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49.
- “누나.”
- “…….”
- “누나!”
소년의 커다란 손바닥이 흔들린다. 때아닌 소나기에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두르고 책상에 턱을 괸 소년은, 문제집에 떨어진 물기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그 위에 형편없는 낙서를 했다. 분신을 그리듯 모가 많은 다각형이었다.
- “컨디션 별로면 진도는 다음에 나가요.”
- “미안, 어제 잠을 못 잤어.”
- “잠만 못 잔 얼굴이 아닌데요? 딱 봐도 무진장 사연 많은 주인공이에요.”
- “이제 20번 볼 차례지?”
- “그건 벌써 지났거든요.”
마지막 문제 세 번째 줄이요. 답답한 듯 교복 타이를 풀어 소파에 던진다. 지루함이 길어질수록 자세가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결국 소파에 드러누워 하품을 해댔다. 남들보다 하루가 길다는 소년은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 사이에 쿠션을 넣고 수면 자세를 취했다.
- “누나네 학교 많이 힘들어요?”
- “…….”
- “방학 때는 완전 의지 대마왕처럼 가르치더니, 요즘은 어디 깨진 사람처럼 다니니까 하는 말이에요.”
- “…….”
-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요.”
기대 없는 답을 기다리던 소년이 눈을 감는다. 시곗바늘만 고요히 움직이는 어느 날이었다. 돈을 받았으면 제값을 해야 한다는 엄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밖 빗소리만 귀를 괴롭힐 뿐이었다. 투명한 유리에 달라붙는 빗줄기에 집중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 최소한의 집중이 필요했다.
- “넌 하고 싶은 거 없어?”
- “자는데 깨우지 마요.”
- “졸업하면 뭐할 거야?”
- “진로 상담 왔어요?”
-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소년이 게슴츠레한 눈을 굴린다. 곧 하얀 양말이 바닥에 내려앉고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입을 뗀다. 하고 싶은 거야 많죠. 프로 게이머라든지, 군인이라든지 세상에 간지 나는 거 많잖아요. 소년은 어설픈 경례 자세를 하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침체된 분위기에 괜히 날씨 탓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소년의 말마따나 지겨운 하얀 바탕에 지렁이 문장을 가리키며 본분을 잊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 “여긴 해석이 까다로울 수 있어. 먼저 앞 문장을 살펴보면…….”
- “부인과 억압이 일어나는 곳은 개인의 분노가 일어날 위험이 있습니다.”
- “……어떻게 알았어?”
- “텔레파시.”
겜방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요. 빈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구겨 신는 소년의 팔을 잡는다. 만약 몰래 답지를 봤다 핑계라도 댄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풀어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핑계도,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 대신 뒤늦은 진실만이 빗소리와 섞여 차분히 내렸다.
-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면요.”
- “…….”
-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요.”
- “…….”
- “하기 싫은데 억지로 붙잡는 거, 나한테는 시간 낭비거든요.”
소년은 자신의 팔을 움켜쥔 내 손을 거두고 현관을 나섰다. 냉랭한 뒷모습에 짧은 헛바람이 샜다. 등을 보인 소년이 고개를 돌려 복잡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마 마음을 들여다보는 아이였으려나.
- “누나는…….”
……
- “괜찮아요?”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25. <방황>
#50.
1박 2일의 짧은 휴가 후 개강 전날까지 방에 박혀 잠을 잤다. 딱히 시간을 정해 둔 건 아니었다. 잠이 쏟아지면 눈을 감았고, 문득 정신이 들면 생각을 되짚다 다시 어둠을 청했다. 생각은 거창한 미래나 계획 따위가 아니었다. 현재 가고 있는 길의 의심과 불확신, 그리고 자신의 질책이었다. 대학과 학과에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난 애초부터 이곳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 “S호텔에 지원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됩니까.”
- “여행을 좋아해 숙소를 검색하는 도중 우연히 S호텔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즈니스 객실 중에서도 Complementary가 제공되는…….”
원서 접수를 하던 날도 그랬다. 네 성적에 중 상위 대학이라도 가면 다행이라던 담임은, 성적표를 나무 막대기로 가리키며 그 자리에서 학과 몇 개를 던졌다. 그중 시선을 끈 건 마지막 리스트에 있던 A대였다. 작년 커트라인에 간신히 걸리는 수능 등급에, 담임은 헛된 기대는 접어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차선 따위는 없었다.
- ‘가고 싶어요.’
……
- ‘……가야 해요, 저.’
남들이 꿈을 찾고 그것을 향해 달리던 시간을 난 죽기만 바라는 데에 썼으니 내게 남은 건 오직 지훈과 승관이었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그땐 꿈이 없어 좌절하는 것보다 그들이 옆에 없어 죽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여겼으니.
- “S호텔이 5년 이상 연속 국내 1위를 지킨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 “2012년부터 실행한 ‘Eco-friendly promotion’이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사업을 함에 있어 환경을 생각하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본 기억이 없다. 찾아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매일 닥치는 하루에 최선을 다해 살았다. 수업도 빠지지 않았고 내준 숙제도 성실히 임했다. 다만 학기 초에 작성하는 장래 희망란은 빼곡한 답안지와 달리 철저한 공백이었다.
볼펜 똥만 무지하게 박힌 빈칸에 담임은 따로 나를 불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당시에도 국내 장래 희망 1순위였던 ‘공무원’이 내 진로가 되었다. 그렇게 되어버렸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 “……아니요. 없습니다.”
모의 면접실을 빠져나간다. 마지막 차례는 늘 빈 복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적막을 깨는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주말을 앞둔 느지막한 오후는 개강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밀어냈다. 어느덧 학교에서 맞는 세 번째 계절이었다.
- “면접 잘 봤어?”
- “왔어?”
사과관 건물 앞, 그가 내 어깨에 턱을 괴고 피곤한 듯 숨을 쉰다. 입고 있던 밤색 가디건으로 그를 감싼다. 향수를 바꿨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냄새 같지. 좋네. 잠 못 잤구나. 새벽에 잠깐 깼어. 잠긴 목소리로 작게 웃던 그가 휴대폰 진동에 가방을 뒤적였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계절에 차가운 그의 손을 잡고 침묵을 지켰다.
간단한 통화 끝에 남은 건 그의 미묘한 표정이었다. 발신자는 엄마, 얼굴 본 지도 오래 됐으니 저녁에 와줬으면 한다는 연락이었다. 만약 여주도 옆에 있다면 같이 와도 괜찮다는 허락 같은 말과 함께.
- “안 그래도 그때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지 뭐.”
- “불편하면 안 가도 돼.”
- “어머니는 꽃 좋아하셔?”
- “윤정한이 더 좋아하지. 오늘 가면 볼 수 있긴 하겠다.”
다정히 손을 맞잡은 그림자가 학교를 빠져나간다. 오늘 수업은 어땠는지, 밥은 맛있게 먹었는지, 모의 면접은 어땠는지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다. 대수롭지 않은 대화도 특별해질 수 있다고 느끼면서.
#51.
명치가 턱 막혀왔다. 미리 먹은 소화제도 불발이다. 오랜만에 본 윤 쌤도 함께고 지훈도 내 옆에 있다. 그러나 유쾌하지 않은 자리였다. 식기를 들고 물을 마시고 다시 그것을 내려놓는 모습을 좇는 맞은편 그녀 때문이었다. 윤 쌤은 눈치껏 지나간 명절을 들먹이며 그녀의 시선을 돌렸다.
이모네는 어떻게 된 게 명절 때도 기름 냄새가 안 나. 전도 못 얻어먹고 병원에서 라면 먹었잖아요. 윤 쌤의 농담에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한다. 이제 그만 본가에 내려갈 때도 되지 않았니. 부모 말 듣는 게 뭐가 어렵니. 설득하는 그녀의 말에 윤 쌤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아꼈다.
- “여주는 입에 잘 맞니?”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훈이랑 가까운 친군데 이제야 대접하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고상하게 웃는 그녀다. 식탁 가운데 꽂힌 붉은 장미와 어울리는 미소였다. 현관 앞에서 꽃다발을 안은 그녀가 직접 가지를 정리해 식탁에 장식한 것이다. 투명한 물방울을 머금은 장미는 세 사람을 닮아 있다. 나를 제외한 그들을.
- “과가 어디라고 했지?”
- “호텔 경영이요.”
- “졸업하면 그쪽으로 갈 거니?”
- “아직 모르겠어요.”
- “유학 생각은?”
- “글쎄요, 그런 건 잘…….”
- “부모님은 뭐하시니?”
- “어머니는 영화사에서 일하세요.”
- “아버지는?”
- “…….”
- “이혼 가정이니?”
입안이 까끌거렸다. 쇠를 삼키는 것 같았다. 실망이 역력한 그녀가 불편했다. 지훈의 삐딱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고 정한은 눈짓으로 지훈을 타일렀다. 부러 숨기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꺼낼 필요도 없던 것들이었다. 강제로 벗겨져 가시에 긁히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랬다.
- “아버지는 사업…….”
- “형, 전화 안 받아?”
그가 자연스레 그녀를 차단한다. 정한은 고민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대화 몇 마디에 서늘해진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집으로 가 침대 안으로 웅크리고 싶었다. 피할 곳이 없어 사방으로 화살을 맞는 내가 안쓰럽다. 늘 작아지는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 “그런 질문은 나중에 하세요.”
- “아무리 그래도 한쪽 부모 없이 자랐으면…….”
- “엄마!”
- “아버지 다음 주에 입국하시니까 공항 마중 준비해.”
뜯어보니 반쪽 짜리 부모에 별 것 없는 아이라는 뜻이었다. 가진 것 없는 빈 수레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꽃병을 건넨다. 선물은 고맙지만 장미 알레르기가 있어서. 안쪽 거실로 홀연히 사라진 그녀는 문을 나설 때까지 볼 수 없었다.
- “구두 신었더니 뒤꿈치 또 까졌어. 되게 오래 신었는데.”
- “…….”
- “나한테는 안 맞나 봐.”
벽을 지탱한 채 발목을 살폈다. 붉게 스친 자국에 아파할 겨를도 없이 실없이 웃는다. 본래 괜찮은 척은 약은 새끼들만 하는 것이라 말하던 승관은 이런 날 본다면 놀릴 게 뻔했다. 김여주 너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구나 하면서.
- “아까 엄마가 한 말 마음에 담지 마.”
- “궁금하시면 그럴 수도 있지.”
- “여주야.”
- “괜찮아.”
저 앞에서 버스 타면 되니까 빨리 들어가. 문자 할게. 대문 앞 앙상한 아카시아 나뭇가지가 몸을 떤다. 차마 여름에 남기지 못한 짙은 향이 뒤를 따랐다. 문밖으로 나온 윤 쌤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자 지훈이 그것을 막는다. 무언 갈 억누르는 목구멍이 아프다. 살을 파고든 손톱이 희생의 초승달을 찍는다.
- “김여주, 괜찮아.”
……
- “괜찮아. 울지 마.”
……
- “제발.”
#52.
버스는 어둠을 달렸다. 덜덜거리는 엔진이 토해낸 하나의 잔여물처럼 밖으로 내던져진 육신은 깜깜한 밤 인적 없는 정류장에 앉아 헐거운 구두를 벗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쪽 굽이 망가져 뒤뚱거리는 꼴이 사람들 눈에 얼마나 우스웠을까 생각했고, 망가진 굽처럼 뒤뚱대는 날 보며 그녀는 얼마나 우스웠을까 생각했다. 난 장미 사이에 억지로 피어난 풀꽃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잘 알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파트 화단을 따라 맨발로 길을 걷는다. 바닥에 처박힌 시선은 손에 들린 구두를 보며 숨이 붙어 있는지 가끔 생사를 확인했다. 가장 높은 아파트 단지 앞에 서서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깜깜한 창문을 올려다본다.
들어가기 싫다. 아무도 없는데. 공동 현관 앞에서 억지로 키를 찾는다. 손을 비껴간 그것이 바닥에 떨어져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보다 먼저 키를 집어 든 그림자에 얼굴을 든다. 늘어난 반바지와 헐거운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난 옆 동네 귀염둥이, 부승관이다.
- “네가 여기 왜 있어?”
- “주말에 놀아줄 애가 너 밖에 없잖냐.”
- “바보냐. 석민이 있잖아.”
- “걔 요즘 뜨개질해야 한다고 시간 없대.”
가을밤에도 본새 유지가 필수인 승관은 어깨에 걸어 둔 나이키 져지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삐딱한 자세로 훑어보는 모양새가 퍽 맘에 들지 않는다. 녀석이 크게 한숨을 쉬며 ‘지훈이 그 새끼’를 입에 담는다. 내 휴대폰이 꺼져 있어 지훈이 걱정했다는 얘기였다.
- “갑자기 전화해서 나보고 너희 집 좀 가보라고 부탁하던데? 없으면 빨리 연락하라고.”
- “…….”
- “혹시 둘이 싸웠냐?”
현관 앞 자동 센서 등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했다. 흔한 인사도 없이 문을 여는 날 따라 승관이 들어온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를 짚는다. 너도 빨리 집에 가. 등을 밀어 밖으로 쫓아내려 하자, 녀석은 그럴수록 벽에 붙어 안간힘을 썼다. 결국 힘에 부쳐 계단에 주저앉는다. 승관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고요한 복도에서 서로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 금세 수면욕이 끓어오르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았다.
- “야.”
- “……왜.”
- “괜찮냐.”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 바닥만 내려다보던 녀석이 이번엔 작은 한숨을 쉰다. 인기척에 켜진 불빛에 온전히 녀석의 눈을 보고는 진지함이 어색해 짧게 웃는다. 괜찮냐는 말에 눈가가 시큰거리는 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참을 만했다. 결국 약은 새끼가 되어버린 나는 고개만 주억거린다.
- “둘이 뭔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주변 때문에 멀어지지만 마라.”
- “…….”
- “그건 서로한테 고통이야.”
승관은 가끔 이상했다. 어디서 예지몽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말을 던지곤 했으니까. 예전엔 텔레파시에 능통한 능력자일까 혼자 고민하던 시절도 있었다.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면 용케 알아채 화해를 주선해주거나, 자신에게 서운한 일이 있으면 자연스레 꺼내게끔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 모든 건 내게 관심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랬다.
- “힘들면 말해. 들어 줄게.”
- “…….”
- “이지훈한테 말 못 하는 거 내가 다 들어준다고.”
그거 어렸을 때부터 내 담당이잖아. 평생 직업, 알지? 개구지게 웃는 승관이 자극제가 되어 끝내 참았던 울음을 쏟아낸다. 남들처럼 꿈이 없어서, 아니 애초부터 좋아하는 일이 없어서, 아직까지 찾을 수가 없어서, 뛰어나질 못해서, 비교돼서, 그래서 한마디도 못 해서, 쪽팔려서, 지훈이를 보는 게 창피해서, 그래서.
- “누가 자꾸 울리냐. 이지훈 그 새끼면 친구고 뭐고 없어.”
……
- “이런 말 하면 또 아니라고 혼자 신파극 찍을 우리 돼지. 출연료라도 줘야 할 판인데.”
자신의 품으로 와락 껴안고 혼잣말을 시작한다. 얼마 만에 안아보는 김여주냐. 초딩 때 공포 영화 보다가 서로 안고 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컸어. 기껏 대학 보내놨더니 울고 앉아 있네. 오빠가 마음이 아파요. 괜찮은 척하는 약은 새끼는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 “괜찮아.”
- “…….”
- “다 괜찮아.”
승관의 어깨가 흠뻑 젖는다. 흐느끼는 목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내 등을 쓸어 내렸다. 방황 속에 만난 내 전부 중 하나인 녀석에게 끝내 털어내지 못한 채,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53.
수험생의 행방을 찾고자 학교를 찾았다. 중간고사를 핑계로 연락이 두절된 지도 어언 일주일에 가까웠다. 학교 정문에 쪼그려 앉아 수업이 파하기만을 기다린다. 코를 찌르는 풀냄새가 익숙해질 무렵, 해방을 맞은 아이들이 정문으로 돌진했다. 후문은 공사 때문에 막혔으니 소년의 통행로도 오직 정문이다. 하지만 진즉 학교를 떴는지 붉은 머리칼 하나 보이지 않는다. 교복 떼가 한차례 지나간 길에 터진 은행 잔재가 역한 냄새를 풍겼다. 학교 담 주변을 빙 돌아 미련을 갖는다. 공사 중인 후문 옆 문방구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소년을 발견한 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 “잠만보 개새끼.”
- “난 피카츄가 좋은데.”
- “야, 지폐 더 줘봐.”
- “지폐로 돼? 카드 줄까? 일시불 콜?”
- “꺼져, 입만 살아서 존나 털리고 싶…….”
- “은 건 너겠지.”
조이스틱을 거칠게 다루던 손가락이 멈췄다. 시간 초과에 자동으로 내려온 갈고리는 잠만보의 둥근 귀를 물어 출구 직전에 낙하했다. 소년이 동그란 눈을 끔뻑거린다.
- “네 친구는 내가 금방 보냈거든? 아쉬우면 다시 불러줘?”
-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귀신이야?”
- “지금 학주가 너 빤히 보고 있어.”
- “학주가 아니라 교장쌤.”
- “미쳤구나.”
- “아직은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두르고 입안에 막대 사탕을 찔러 넣는다. 뒷걸음질로 도주를 시도하던 소년은 안타깝게 가방 고리를 잡혀 몸부림을 쳤다. 끌려가지 않으려 목에 힘을 주다, 심각한 담이 왔다는 핑계로 보도블록에 앉아 시간을 끌었다.
- “스쿨존에서 이래도 돼요?”
- “밥은?”
- “호텔 라운지 아니면 안 먹어요.”
- “설빙 콜?”
- “촌스럽게 무슨 빙수야.”
간만에 보는 툴툴거림이 반가웠다. 직직-, 아스팔트 바닥을 끄는 슬리퍼가 속도를 늦춘다.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음을 맞추는 것이다. 이러다 갑자기 도망가도 자연스러운 캐릭터라 교복 셔츠 끄트머리를 잡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예상과 달리 소년은 피하지 않았다.
*
추워 죽겠는데 빙수를 왜 먹어요. 난 치즈로 할게요. 냅킨을 뽑아 어설픈 장미와 비행기를 접던 소년은 아직 깨지 못한 휴대폰 게임에 집중했다. 아이템에 간간히 욕을 뱉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실은 나도 소년도 그날에 대해 일절 말을 꺼내지 않는 중이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소년은 깨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지만, 최소한 나는 묻고 싶었다. 넌 어떤 아이인지.
- “누나.”
- “응.”
- “영어 안 말아먹었으니까 그렇게 보지 좀 마요.”
진동벨에 자리를 뜬 소년은, 이후 스푼으로 말없이 얼음을 푹푹 찔러 댔다. 영어 못한다고 일부러 속인 건 아니에요. 어렵게 말문을 연 소년은 다 먹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 “엄마 때문이에요.”
- “…….”
- “날 미워하는 엄마요.”
#54.
누나, 난 춤이 좋아요. 무대에서 조명받을 때 가슴이 막 미친 듯이 벅차다고요. 오디션 광탈한 날은 욕 좀 나오는데요, 그래도 행복해요.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어쩔 땐 죽음만큼 포기하고 싶은데, 또 그것 때문에 일어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엄마는 전혀 이해를 못 해요. 아니,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누나도 가족한테 비난받아 본 적 있어요?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요. 집안 세울 장남 새끼가 펜을 들어도 모자랄 판에 딴따라 짓 하러 밖으로 나돌아다녀서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어떻게 하면 저런 잡종이 나올 수 있겠냐고, 차라리 낳질 말았어야 했다고……. 이런 말을 매일같이 들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저 사람이 원하는 것과 더 멀어져야겠다, 절대 돌아가지 말아야겠다, 차라리 영원히 병신 소리 듣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겠다, 그냥 꼴통 소리 들으면서 욕이나 먹어야겠다.
가끔 내 선택에 후회는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내 길이 아닌데 억지로 가는 건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나답게 살고 싶어요. 이런 인생이 그렇게도 어려워요? 엄마도 그렇고 사람들이 자꾸 옆집 철수처럼 살래요. 나는 철수가 누군지도 모르거든요. 걔는 공부를 잘한대요. A대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대기업 취직해서 억대 연봉 받으면서 살 거래요.
하지만 저는 공부 관심 없어요. A대는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자신 있거든요. 억대 연봉 받으면서 살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 거예요. 맞지 않는 옷 입고 매일 혼자 우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공부도 하나의 영역 아닌가요? 누군가 요리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고 암기를 잘하는 것처럼, 공부도 그런 것들 중 하나잖아요. 각자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른데 왜 모두가 한 곳에서 만나야 해요? 누나,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부모가 바라는 인생 대신 살아주려고, 대리 만족감 주려고 태어난 거 아니잖아요. 만약 내가 그 이유로 태어난 거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숨만 달려있을 뿐이지,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이랑 다를 게 뭐에요. 내 인생,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라면, 후회해도 정말 원하는 거 하면서 살고 싶어요.
허투루 말하는 건 아니었다. 대화 중간마다 불쑥 끓어오르는 화를 삭히려는 듯 아구를 꾹 물었으니 말이다. 소년은 현재 부모의 기대를 죽이는 중이었다. 그것을 위해 여태 모진 취급을 받으면서 속으로 화를 삭힌 아이였다. 목소리에 잔뜩 곯은 진물이 터져 나온다.
이번에도 똑같이 시험 망치려고 했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마음이 변했어요. 누나가 그랬죠, 공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패배한 사람처럼 굴지 말라고. 지금은 피할 수도 없는 꼬리표로 따라다니겠지만, 그걸 잘라내는 일도 결국 내 몫이라고요. 잘라낼 그 순간까지 기죽지 말고 꿋꿋이 살아가는 게 맞다고 그랬잖아요. 분명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나도 곧 찾게 될 거라면서 믿어줬잖아요.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엄마한테는 평생 꼴통 소리 들어도, 누나한테 한 번은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모든 걸 철수들보다 잘하진 못해도 영어는 철수들만큼 한다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중의 하나 애들 후려치는 꼰대들이거든요? 나이 상관없이 세상 모든 경험은 다 해본 척, 특히 나 같은 애들 깔보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있잖아요. 공부 못 하고 좋은 대학 못 나오면 미래도 인성도 다 글러 먹었다는 같잖은 생각 하는 부류들이요.
누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날 나처럼 봐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사실 제발 날 봐주길 바랐거든요. 내가 이렇게 힘들고 아프니까 제발 위로해달라고.
매번 과외 하러 올 때마다 교복 셔츠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명찰을 마침내 제자리에 꽂으며 이름을 가리킨다. 내가 본 샛노란 색과 가장 어울리는 명사였다.
- “이 찬.”
- “…….”
- “정 없게 수험생이라 부르지 말고 다음번엔 이름 불러 주면 안 돼요?”
- “…….”
- “엄마한텐 다음 주가 마지막 수업이라고 말했어요. 억지로 떼써서 받아낸 거니까 고맙다는 말은 사양이고요.”
소년은 백 팩에서 꺼낸 뭉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게를 나섰다. 그것은 구겨진 시험지였다. 과외 이후 처음 보는 숫자에 잠시 멍한 시간을 보냈다. 시험지 앞장에 빼뚤빼뚤 쓴 글씨는 시간 조절을 해본 적이 없어 3점짜리 문제를 아깝게 놓치고 말았다는 메모였다.
- ‘너랑 되게 닮지 않았냐?’
- ‘누구?’
- ‘아까 그 고딩. 왜, 반항하는 게 꼭 네 학생 때 같구만.’
- ‘퍽이나 그러겠다. 내가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지 네가 더 잘 알 텐데?’
- ‘내 말은, 고슴도치 마냥 가시 세우고 씩씩거리는 게 닮았다고. 이해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큰소리 뻥뻥 쳤으면서 사실은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랐잖아.’
- ‘누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날 나대로 봐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사실 제발 날 봐주길 바랐거든요. 내가 이렇게 힘들고 아프니까 제발 위로해달라고.’
열아홉의 소년은 정말 또 다른 나였을까. 매일 새벽 어떤 마음으로 가방을 메고 하루를 살아가는지 부러 붇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게 가시를 세우고 반항하던 소년은 사실은 제 가시에 아파하던 고작 열아홉이었다.
그날 밤, 소년의 집 앞에 찾아간 스무 살의 내가 한 일은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소년이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호탕하게 웃는다.
짐을 짊어지기엔 아직 어린아이였다.
Epilogue.
- ‘괜찮아. 인간은 최소한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하나씩은 다 있다고 그랬어.’
- ‘그런 걸 누가 정의했대요? 진짜 어이없네.’
- ‘너도 있어. 아직 찾지 못해서 그렇지.’
- ‘그걸 어떻게 알아요? 딱 봐도 내 인생 사이즈 나오잖아요. 너무 긍정적인 것도 안 좋아요.’
- ‘공부 때문에 패배한 사람처럼 굴고 있는 건 괜찮고?’
- ‘……내가 언제 그랬어요.’
- ‘뭐가 됐든, 공부로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 ‘학업이 전부인 학생한테 학업으로 기죽지 말라는 건 모순이죠.’
- ‘영원히 학생 신분으로 살 거 아니잖아. 언젠간 네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열심히 달릴 텐데, 전력 질주하기도 전에 힘 빠지면 속도가 나겠어?’
- ‘너무 선생님인 척하는 거 아니에요?’
- ‘수능 끝나고 전화해.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멋지게 안아주마.’
- ‘별 걸 다 신경 쓰네.”
-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제자야, 수업 일찍 끝난 기념으로 칼국수 어때?’
- ‘이러려고 과외 시작한 거죠?’
- ‘이젠 하나를 알면 열을 알아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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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항상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