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05. 모순 : 창과 방패
출근이라는 건 어째 맨날 해도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시간에 쫓겨가며 샤워를 마친 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싸매고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도 다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시리얼로 대충 때우는 아침밥은 언제나 서럽다. 오늘은 또 뭘 입을까 하고 연 옷장은 또 왜 이리 초라한 건지. 거의 매일 걸치고 나가는 카키색 야상을 집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다시 옷장을 훑어보고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집어 들었다. 딱히 잘 보일 상대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이겨 먹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뿐.
“어! 연주 피디 이리로 와.”
“피디님 오랜만이네요.”
황민현 저 사람은 대체 녹화장에 얼마나 빨리 오는 건지, 오늘은 심지어 스태프인 나보다도 더 빨리 도착한 모양이다. 그래 봐야 나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출연자보다 늦게 온 셈이 되었으니, 선배 피디님들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너는 어쩜 작가님보다도 늦게 오냐. 딱 보니까 옷 고르다 늦었구만.”
“아닌데... 그래도 지각은 아니잖-”
“야 막내.”
“...죄송합니다.”
내가 28년간 살면서 깨달은 불변의 진리 중 하나. 슬픈 예감은 절대로 틀리는 법이 없다. 선배들에게 혼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자존심에 작은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내가 선배에게 핀잔을 듣는 이유가 저 작가 때문이라니. 그건 내 자존심을 조금 건드리는 일임이 틀림없었다.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던 선배가 떠난 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황 작가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살짝 올라간 듯한 그의 눈꼬리는 왠지 모르게 나를 비웃고 있는 듯했다. 그가 나를 비웃으려는 의도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섰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이상하게도 황 작가에게만은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늘 녹화 집중해서 봐요.”
“녹화는 항상 집중해서 보는데요.”
“아는데, 오늘 내가 하는 말은 특히나 더요.”
무슨 소리야. 아무리 우리 프로그램에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패널이라지만 본인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건 조금 재수 없지 않나. 본인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아니면 이 프로그램을 살릴 사람이 없다는 걸. 그래서 더 재수가 없었다.
“뭐, 알겠습니다.”
“녹화 시작할게요~ 스탠바이 해주세요.”
오늘도 별 볼 일 없는 녹화가 시작되었다. 대학생들의 고민은 고민대로 뻔했고, 저들의 조언도 저번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볼품없었다. 내가 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어른들께 도움을 요청하겠다 싶을 정도로. 솔직히 직업이라 이걸 지켜보고 있는 거지 시청자였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아직 첫 녹화분이 방송되기 전이라 정확한 반응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오늘도 취업 이야기, 인간관계에 이야기, 사회생활 이야기와 같은 뻔한 주제들이 오갔다. 마지막 질문으로 사랑에 대한 대학생의 고민이 나오자 밀려오는 결국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시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가려는 찰나,
“어? 연주 피디 어디 가.”
“저 잠깐 밖에 좀 나갔다가...”
“어딜 가. 지금 중요한 부분이야. 자기 꼭 있으랬어.”
“네...? 누가...”
“황 작가가 직접. 미리 대본 읽어 보더니 이번 질문에 대해서 할 말 많다면서 자기 분량 편집할 사람 연주 피디 아니냐고 심부름도 시키지 말고 꼭 자리에 붙어있게 하라고 하더라.”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 아까도 자기 얘기 집중해서 들으라고 하더니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아니면 보기와는 다르게 왕자병 같은 게 있는 건지. 우선 앉아서 들어나 보기로 했다. 황 작가가 하려는 말이 궁금해서는 절대 아니고, 또 선배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죠. 짝사랑은 누구나 힘드니까. 우리 동혁 학생의 고민에 대해서 황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짝사랑은 물론 힘든 일이죠. 그래도 제가 감히 말씀을 드려보자면,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타고난 행복인 것 같아요. 같은 맥락에서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랑에 대한 황 작가의 한결같은 입장에 감탄하며 최선을 다해 그를 노려보고 있는데, 별안간 그와 시선이 부딪힘을 느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종종 계시거든요.”
나를 향한 말이 분명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뭐, 동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사랑을 믿든 말든, 자기가 나서서 자꾸만 간섭할 이유가 대체 뭔데.
“작가님도 혹시 좋아하는 분 계세요? 고민 해결사로 나오신 거니까, 작가님의 경험담을 들려주시는 게 가장 와닿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 저요?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제가 그분을 아직 너무 몰라서... 관심이 가는 분은 있어요.”
“와, 정말요? 이렇게 완벽한 작가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분은 어떤 분일지 궁금해지는데요?”
“저는 그동안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게 사랑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니더라고요. 저랑 정말 다른 사람이에요.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나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다들 궁금하시죠?”
“네!”
여기 궁금하지 않은 사람 하나요. 내가 어쩌다 저 작가라는 사람을 이렇게나 아니꼽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가 나의 가치관에 끼어든 이후로 나는 황 작가의 모든 말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데 자꾸만 태클을 거는 것도 거슬리는데 내가 저 사람의 사랑 이야기까지 들어야 한다니.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녹화장에서 나가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의 눈으로 나를 지켜보는 선배 피디님 때문에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처음에는 신기했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신기하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궁금하다. 어떤 일을 겪었길래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닌데.”
“흥미진진한데요, 이거?”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분의 생각이 틀렸고 내가 맞다고. 그쪽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고.”
“그래서요, 그분의 생각을 돌려놓는 데 성공하셨나요?”
“아니요. 보기 좋게 실패했죠. 그래서 이제는 제가 그분을 이해해 보려고요.”
“아까는 분명 좋아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야기하시는 거 들어보니까 완전 푹 빠지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게.”
“아 그런가요? 원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이긴 하죠. 스스로가 알아채기도 전에 그 사람에게 스며드는 법이니까요.”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드리고 다음 고민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좋아한다는 감정을 작가님 나름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정의 내려질 수 있을까요?”
“어렵네요. '좋아한다'는 감정은 여러가지 방면이나 각도, 형태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음식이 좋다든지 어떤 것이 ‘좋다’든가 누군가가 ‘좋다’든가. 그런 '좋아해'라는 감정이 제가 가진 감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의 말씀이 고민을 신청해 준 동혁 학생에게 좋은 위로가 되었을 것 같아요. 그럼 다음 고민으로 넘어가 볼까요?”
어째 오늘따라 황 작가의 장난이 좀 심하지 싶다. 물론 그 상대가 나라고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닌데, 방송에서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그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게 나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는 절대 아니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 저 긴말을 쏟아내는 내내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어. 그나저나 방송이 처음인 티를 너무 내는 것 같은데,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말을 할 때 패널들을 골고루 쳐다보지 않고 저렇게 한 곳만 쳐다보면서 말하면 어떡하자는 건지. 아까부터 대체 어디를 그렇게 뚫어지듯 쳐다보며 말하는 거야. 아무튼, 황 작가가 우리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된 것이 프로그램 측에서는 좋은 일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음이 틀림없었다. 오늘이 두 번째 녹화인데, 벌써부터 저 작가 하나 때문에 내 기분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걸 보면, 앞으로 얼마나 끔찍한 날들이 이어질지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
이 직종에 종사한 지도 벌써 몇 년째지만, 고작 한 시간의 방송 분량을 위해 최소 다섯 시간 이상 녹화를 한다는 건 참 비효율적인 일인 것 같다. 이 다섯 시간짜리 녹화분을 한 시간으로 편집해야 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수고하셨습니다. 아, 연주 피디, 이번 주 첫 방송 있는 거 알지.”
“알죠. 저 완전 기대하고 있어요, 지금. 반응이 어떨지.”
“기대만 할 게 아니고, 오늘 녹화분도 얼른 가서 편집하라고. 이제 본격적으로 방송 나갈 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한 번 밀려버리면 답 없는 거 연주씨도 잘 알 거라 믿어.”
“그럼요, 당연하죠. 안 그래도 지금 바로 편집실 가서 작업 시작하려던 참이었어요.”
“다행이네. 그럼 수고해.”
마침 일을 하려고 했는데 누가 먼저 나서서 일 안 하냐고 하면 괜히 하기 싫어지는 그런 경험 한 번씩 느껴봤을 거다. 지금 내가 딱 그 상태였다. 안 그래도 편의점에서 컵라면 넉넉하게 사서 편집실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왜 또 잔소리래. 없던 반항심도 생기게.
“막내 피디님.”
“아, 깜짝이야.”
황 작가였다. 이 사람은 취미가 사람 놀라게 하는 건가? 자꾸 어디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건지 모르겠는데, 친하지도 않으면서 자꾸 이런 장난 치면 곤란하다고. 딱히 유쾌하지도 않고.
Various Artists - Let The Wind Blow
“오늘 녹화 잘 보셨어요?”
“네. 잘 봤고, 지금 편집하러 가야 하니까 길 좀 비켜주실래요?”
“저 말 잘하죠.”
“무슨 말이요.”
“녹화 잘 보셨다면서, 무슨 말인지 아실 텐데.”
“모르겠는데요.”
“되게 중요한 말이었는데 모르신다고 하시네. 그럼 여기서 다시 말씀드릴까요?”
굳이 황 작가가 아니어도 막내라서 이리저리 치이기 바빠 죽겠는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만한 건 항상 나지, 아주. 내가 동네북이지, 동네북이야.
“아뇨. 다 들었으니까 저는 이만 편집하러-”
“잘 들으셨으면 한번 생각 잘 해보세요. 피디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았으니까, 길 좀 비키시라고요. 작가님 키 크신 건 알겠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남용하지는 마시죠.”
“아, 죄송해요. 그럼 이따 편집실에서 봬요.”
“편집실은 또 왜요. 거기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인 거 모르시나?”
“저도 좋은 곳들 놔두고 굳이 거기서 피디님을 뵙고 싶지는 않은데, 편집하셔야 한다면서요. 어쩔 수 없이 저 계속 보셔야 할 것 같아서.”
“아...”
어쩜 농담까지 저렇게 싱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은 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말을 끝내고 돌아서려던 황 작가의 시선이 별안간 내가 들고 있던 컵라면에서 멈춘 듯했다. 기싸움으로는 지고 싶지 않아 안 입던 코트까지 꺼내입고 왔는데, 고작 이딴 라면 하나에 초라해지고 싶지 않아 컵라면을 황급히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밥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저 불러요. 같이 먹어드릴 테니까.”
“됐거든요. 제가 왜요.”
“제 영상 편집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하시는 거면, 제가 너무 죄송하니까.”
“제 일인데 작가님이 왜 죄송해하세요.”
“저한테 피디님은 사적인 사람이라서요.”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좀 나오세요, 이제.”
“이상한 소리 아닌데. 아무튼, 일 열심히 하시고 다음 녹화 때 봬요.”
“네에.”
“그 전에 볼 수 있으면 더 좋구요.”
“다음 주에 봬요.”
“꼭 그러길 바랄게요.”
나는 딱히 귀를 기울여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을 흘린 채 반대쪽 복도로 걸어가는 황 작가의 발소리가 사라진 다음에야 무거워진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오늘 재수 참 없네, 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불쌍하다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더니 그새 내가 궁금해지기라도 한 건가? 생각을 곱씹을수록 그자의 계획에 놀아나는 기분이 들어 생각 자체를 포기하기로 했다. 알 게 뭐야. 내가 저 작가를 신경 써서 좋을 게 뭔데.
그렇게 긴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 도착한 편집실은 컴컴하고 적막했다. 탁, 하고 스위치를 켜니 어제 급하게 나가느라 미처 치우지 못한 컵라면 용기가 책상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왼손에 의해 들어 올려진 빈 용기의 자리가 새 컵라면으로 금세 메워지는 것을 보며 눈 깜짝할 새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는 꼴이 꼭 나의 미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이 편집실에만 들어오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좁고 답답한 곳에 홀로 남겨진다는 건 언제나 서글픈 일이다. 그나저나 그놈의 황 작가 좀 그만 보고 싶은데, 먹고 살려면 열심히 편집해야지 뭐. 오늘은 또 몇 시간이나 걸리려나.
“처음에는 신기했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신기하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궁금하다. 어떤 일을 겪었길래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닌데.”
“흥미진진한데요, 이거?”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분의 생각이 틀렸고 내가 맞다고. 그쪽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고.”
인정하기 정말 싫지만, 우리 프로그램의 패널 중 멀쩡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황 작가 한 명뿐이기에, 내가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아 했던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방송을 타게 될 예정이었다. 다른 몇 명의 패널들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방송을 못 하는 겁니까. 당신들 때문에 흥미도 없는 황 작가의 사랑 이야기를 꼼짝없이 내보내야 하게 생겼잖아요, 하고. 그나저나 황민현 이 사람은 카메라 감독한테 원수진 것도 아니면서 정면만 왜 이렇게 오래 쳐다보면서 멘트를 뱉은 건지 원. 꼭 나한테 하는 말 같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원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이긴 하죠. 스스로가 알아채기도 전에 그 사람에게 스며드는 법이니까요.”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드리고 다음 고민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좋아한다는 감정을 작가님 나름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정의 내려질 수 있을까요?”
“어렵네요. '좋아한다'는 감정은 여러가지 방면이나 각도, 형태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음식이 좋다든지 어떤 것이 ‘좋다’든가 누군가가 ‘좋다’든가. 그런 '좋아해'라는 감정이 제가 가진 감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황 작가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내내 단 한 순간도 정면 카메라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황 작가 촬영분을 편집하는 내내 그 잘난 얼굴을 원 없이 볼 수 있었고. 그것이 그의 의도였는지, 무의식이 불러온 우연이었는지를 알 길은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편집실에 틀어박혀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고, 또 보는 동안 내가 느낀 단 한 가지 감정은, 황 작가가 줄곧 언급하고 있는 그 사람이 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져온 어이없음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그의 이야기 속 상대방이 나일 리도 없고, 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영상을 보면 볼수록 밀려드는 확신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날카롭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그의 눈빛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 지금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잘 들으라고. 혹시라도 당신을 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의 이야기가 맞으니 쓸데없는 의심 따위 하지 말라고. 좁고 답답한 편집실에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황 작가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모니터를 꺼 버리고 말았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나를 좋아할 리가 없는데. 나는 그를 얼마나 잘 알고 있지? 내가 그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나? 그것 또한 아닌데. 그렇다면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건 전혀 아니지만, 정황상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괴롭히는 사이, 어느덧 작업을 시작한 지도 벌써 세 시간 가까이 되고 있었다. 조금 출출해진 것 같아 아까 사 온 컵라면의 포장을 뜯으며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를 찾아 나서려는데,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선배가 급하게 편집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자기, 약속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지.”
“네? 저 오늘 약속 없는데...”
“약속이 없긴 뭐가 없어. 사무실 앞에서 작가님 기다리고 계시던데.”
“작가님이라뇨. 황 작가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요?”
“왜긴 왜야. 둘이 약속 잡았다던데?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만 오늘은 내가 참을 테니까, 얼른 나가봐. 작가님 오래 기다리신 것 같더라. 화장실 가려고 나가다가 깜짝 놀랐네.”
“사무실 앞에서 계속 기다렸대요?”
“얼른 나가보라니까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가서 직접 물어봐. 약속은 자기가 잡아놓고 왜 꼭 처음 듣는 사람마냥 이래. 아무튼,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우리 막내~”
뭐야, 황 작가가 나를 왜 기다리는데.
“어? 나왔네요, 진짜.”
“뭔데요 또. 오늘 편집 끝내야 해서 지금 되게 바쁜데.”
“되게 바쁠 것 같긴 했는데, 너무 오래 일만 하면 힘드니까, 나와서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고 하라고요. 자요. 다른 피디님께 여쭤보니까 막내 피디님 카페라테 좋아한다길래.”
― '좋아한다'는 감정은 여러가지 방면이나 각도, 형태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음식이 좋다든지 어떤 것이 ‘좋다’든가 누군가가 ‘좋다’든가. 그런 ‘좋아해’라는 감정이 제가 가진 감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 커피나 얼른 받아요. 팔 아프니까.”
“아... 네. 잘 마실게요.”
“바쁘다면서요. 얼른 들어가서 하던 일 마저 하세요.”
“뭐 저한테 볼 일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었어요? 선배가 작가님이 저랑 약속 있다고 하셨다던데. 더 하실 말씀이라도...”
“아뇨. 볼일 끝났는데.”
“네?”
“줬잖아요, 커피.”
“이거 주려고 부른 거예요?”
“네. 들어보니까 편집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다길래,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좀 쉬셨으면 해서요. 막내라 특히 더 힘드실 것 같아서.”
“......”
“그럼 전 갑니다. 이제 정말 다음 주에 봬요.”
“...커피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별말씀을요.”
두 손 가득 쥔 커피잔의 온기가 손바닥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메워갔다. 나름 잘 잠가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작게 열린 마음의 틈 사이로 영리한 도둑 하나가 든 모양이다.
그저 오기만 하면 된다.
곧은 방향으로,
사랑하기 좋은 계절과 함께.
- 느린, 기다림
+ 사닮너는 저의 사심 충전 글임에 틀림없어요ㅎㅎ
그리고 오늘 민현이의 대사 중에 실제로 민현이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들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어느 대사인지 맞추시는 분께는 소정의 뽀뽀를...💋
++ 오늘 구독료 없는 날이라고 하길래 잠시나마 50포인트를 걸어볼까 하고 고민한 나쁜 작가 즈믄을 매우 치세요jn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