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密會
04
「흐아아-.」
깍지를 낀 두 손을 쭈욱 하늘을 향해 뻗은 호석이 기분 좋은 탄성을 내뱉었다. 햇빛은 너무도 좋았으며 바람은 살랑거렸고 무엇보다도 태형은 다정했다.
벌써 연회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호석은 그 때의 생각만 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결국 연회 도중에 너무도 떠는 자신을 들쳐업듯 하여 집으로 돌아온 태형은 불안해하는 호석의 곁을 지켰다. 악몽을 꾸는 제 곁에서 제가 잠들 때까지 있어주었으며 손을 잡아주었고 식은땀을 달래주었다. 아이를 대하듯 어르고 달래어 주는 태형의 보살핌 덕에 지금은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하루하루 행복함의 연속이었다. 정말로 제게 다가온 이 모든 것들이 신께서 내리신 선물인 것만 같았다. 늦봄 기운이 나른하게 온 몸을 간질였고 태형은 딱히 저에게 고된 일들을 시키지 않았으며 자신이 수업이나 훈련 등으로 바쁘지 않은 날에는 호석을 데리고 저자거리에 나가 맛있는 것을 먹여주었다.
「……후.」
하지만 호석은 자꾸만, 몸이 편안해지면 편안해질수록 마음 한 켠이 복잡하게 뭉그러지는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남준 때문이었다. 남준과 떨어진 지도 스무 날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분명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남준을 찾아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남준을 알기에 더욱, 호석은 남준이 보고 싶었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데다 남준은 호석이 태형을 만나기 전까지 유일하게 온전히 자신을 내비추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저와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음에도 남준은 항상 널따란 어깨에 저를 안아주었다. 그런 남준을 뒤로 하고 자기만 안락한 곳에서 웃고 있기가 호석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말이라도 해 봐야 하나….」
예전 같았으면 몰래 빠져나와 남준을 찾아갔을 텐데, 왠지 태형의 집에서 그런 일을 했다가는 태형을 속이는 것이 될 것 같았다. 태형은 남준을 보러 다녀오는 것을 굳이 막지도 않을 것 같았고, 태형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때 어떻게든 빠져나와야겠다고 호석은 생각했다.
*
「저기, 도련님?」
「-아, 어쩐 일이냐.」
호석이 조심스레 태형의 방 문을 열었다. 드르륵, 부드러운 마찰음을 내며 열린 문 새로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아 조금 더 붉은 주홍색으로 빛나고 있는 머리칼이 호석의 눈에 들어왔다. 가득 담기는 따듯한 뒷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은 호석이 음음,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태형을 불렀다. 책에 파묻혀 호석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인지 조금 놀란 듯 뒤를 돌아본 태형이 호석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역시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총총, 방 안으로 들어와 태형의 곁에 선 호석이 어, 저…. 우물쭈물 발음을 뭉개는 호석이 귀여웠던지 작게 웃은 태형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망설이느냐, 라며 호석의 모은 손을 잡았다. 느껴지는 온기에 조금은 안심이 된 호석이,
「저,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밖에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밖? 밖은 왜, 이곳이 답답한 것이냐?」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만나야 할 사람?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는지 태형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제 죽마고우입니다. 뒷골목에서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아이인데, 제가 김 대감 댁 몸종으로 있던 시절 저를 가장 많이 도와주었던 아이입니다. 늘 도움만 받았는데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라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아이가 있었더냐. 고마운 아이로구나.」
호석이 남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진지하게 그것을 듣던 태형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방해하면 아니 되지, 벗과의 참된 우정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더냐. 게다가 너를 많이 도와주었던 아이라 하니 내게도 고마운 아이가 되겠구나. 그 아이를 만나게 되면 내게로 데려오지 않겠느냐. 천천히 호석을 향해 태형이 말하자, 이번에는 호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곳에요?」
「그래, 싫으냐?」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아무리 네가 나를 잘 따른다 하지만 네게도 편안한 벗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들어보니 사정도 딱한데다 너와 날 적부터 친하였다 하니, 그 아이를 우리 집에 거두어 너와 함께 있게 하고 싶다만.」
「예? 정말이십니까?」
그럼 거짓이겠느냐, 태형이 웃었다. 얼굴 만면에 화색을 그득 띠고는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을 반복하는 호석의 어깨를 태형이 가볍게 두드렸다. 어서 가보거라. 날듯 뛰어 제 방을 빠져나가는 호석의 기뻐하는 뒷모습에 태형은 괜시리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준이 주로 돌아다니는 곳들을 모두 찾았음에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남준의 기척에 호석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울상이 된 얼굴을 한 호석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슬쩍 들었을 때,
「으아악!」
남준이 담장 위에 쪼그리고 앉아 호석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늦었네, 오늘은.」
호석에게 오른손을 쭈욱 내밀어 흔들어 보인 남준이 담장에서 가볍게 호석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편안하게 지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볼을 커다란 양 손으로 마구 부비적거린 남준이 폭, 호석을 제 품에 안았다.
「남준아…….」
「요즘은 좀 어떠냐? 살맛 좀 나?」
다 들었어, 그때 그 영의정 댁 둘째아들이 너 데려갔다고. 이 쪽 동네 소문은 내가 다 꿰고 있잖냐. 장난스레 호석의 머리를 잔뜩 헝클인 남준이 호석과 눈을 맞추었다. 새카만 눈동자, 문득 황제의 눈동자가 생각난 호석이 슬쩍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남준의 어둠에는 따듯함이 있었다. 그 따듯함은 언제나 저를 편안하게 했고, 휴식하게 했다. 호석이 웃으며 남준처럼 남준의 볼에 제 손을 얹었다.
「응, 살맛난다 그래.」
「…잘해주시냐?」
「진짜 잘해주셔. 옷도, 신발도 전부 도련님이 해 주신 거고,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도 사 주시고…」
남준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걸쳐졌다. 정말로, 사랑받는구나. 태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온전히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또한 차오르는 씁쓸한 기분을 어찌할 수 없어 남준은 그저 웃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뛰어난 용모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부귀, 명예를 모두 가진 사람이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고 남준은 눈치가 빨랐다.
나를 사랑해달라, 겨우 며칠 만난 그 사람이냐 아니면 쭉 네 곁을 지켜온 나냐. 붙잡고 보채고 싶었지만 남준은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호석을 사랑했으며 너무나도 배려심이 깊었다. 그저 호석이 행복하면 자기도 행복한 것이라 남준은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아, 그래서 말인데 남준아.」
「응.」
「도련님 뵈러 가지 않을래?」
…뭐라고? 남준이 되물었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말이었기에 남준은 뎅, 하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웬.
「내가 도련님께 너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너를 기꺼이 거두어 주시겠대.」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응? 이렇게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것보다야 이편이 낫지 않을까?」
음, 남준이 고민하는 듯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김태형이라는 작자는 내 얼굴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왜 갑자기 나를 거두어 가려 하는 걸까. 남준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자, 당연히 흔쾌히 수락할 줄 알았던 남준이 고민이 빠진 모습을 보자 호석이 남준의 옷소매를 툭툭 집어당겼다. 남준이 생각에서 벗어나 호석을 쳐다보았다.
「가자, 남준아. 응?」
「…그래, 그러자.」
그리고 남준은, 자기가 호석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천한 몸을 이리 거두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너로구나.」
고개를 태형의 쪽으로 깊이 숙인 남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태형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준과 호석의 사이의 관계에 미묘한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둘 사이에 흐르는 그 이질적인 감정 또한 굉장히 미미했으므로 태형을 고개를 휘저어 그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굳게 다문 입술과 곧게 뻗은 눈매에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도 확고히 느껴져 태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어쩌자고 그리 약속을 쉬이 했을까. 왠지 남준을 제 집에 들이기가 꺼리어졌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는 호석의 반짝이는 커단 눈망울을, 태형은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태형의 신조 역시 말한 것은 지킨다는 것이었으니, 태형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나. 태형은 생각했다.
「기본적인 집안의 예절이나 규율은 밖에 서 있는 아이가 가르쳐 줄 것이다.」
「예.」
「너는 주로 힘을 쓰는 일을 하게 될 듯 싶은데, 괜찮겠느냐.」
「물론입니다. 거두어 주신 은혜, 기꺼이 갚겠습니다.」
「…그래, 이만 나가 보도록.」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인 남준이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나오면서 남준은 깊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태형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마냥 선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용모는 굉장히 수려하였고 기품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태형에게서는 어딘가 날카롭고 서늘한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망울에 맺힌 적의를 남준은 올곧이 받아들였다. 아마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호석에 대한 저의 감정을. 하지만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남준은 중얼거렸다. 정호석이 이곳에 있으라 내게 말했고, 나는 그렇게 하면 그만이다.
*
「제기랄….」
정국이 나즈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고운 입에서 무턱대고 튀어나오는 상스러운 언어에 윤기가 부채를 살랑거렸다.
「폐하, 제발 언동을 조심하십시오. 아무리 저밖에 없다지만-」
「그년이 생각나서 미치겠어.」
「그년이라니요. 계집에게는 통 관심이 없으시더니.」
계집이 아니니 그것이 우스운 것 아니냐. 정국이 읊조렸다. 연회 도중 정신을 잃은 그년을 김태형이 들쳐업고 궐을 빠져나가는 것을 내 보았는데, 어찌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그 동그랗고 커단 눈망울에 맺힌 막연한 두려움이 흥미로웠고. 가까이 다가섰을 때 보이는 유려한 윤곽선과 달달 떨리는 도톰한 아랫입술이 귀엽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년이, 아니. 그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정국의 얼굴 가득 웃음이 서렸다.
「계집이 아니면 사내란 말입니까?」
「그런 것 같구나.」
「아아… 그 때, 그.」
「윤기야.」
「예, 폐하.」
침대에 누워 왼손으로 얼굴을 뒤덮듯 가리고 있던 정국이 천천히 손을 얼굴에서 내렸다. 둥글지만 매섭고 곧게 뻗은 눈초리에, 흥미가 번들거렸다.
「알아보거라.」
「그년을?」
「그년을.」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안녕 안녕! 내 님들.
반가워요, 아아 보고 싶었어 진짜.
이번 주는 진짜로 너무너무 바빴네, 열두 시 전에 잔 날이 없어요ㅠㅠ
수행평가랑 이것저것 대회가 폭탄이다 보니.. 컴퓨터도 잘 못해서 사담톡에 댓글도 못 달아줬는데 이해해줘요ㅠㅠ 미안해ㅠㅠ
그래도 글까지 미룰 순 없어서 열심히 썼어요, 칭찬해줄래요..? ㅠ^ㅠ
어쨌든, 아 보고 싶었어요. 쪽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