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密會
05
「윤기입니다, 폐하.」
「들라.」
짙은 금빛의 목재가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열렸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궁으로 돌아온 윤기가 침대 위에 말없이 누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정국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리에 앉으라 정국이 손짓하자, 윤기가 정국의 침대 옆 의자에 허리를 세워 앉았다.
「알아보았느냐.」
「예.」
「어떻더냐. 뭐 특별한 것이라도 있더냐?」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아니라면 아니겠지요.」
감고 있던 눈을 떠 잔잔한 미소를 띈 윤기의 하얀 얼굴을 슬쩍 쳐다본 정국이 숨을 내뱉으며 작게 웃었다. 오직 윤기이기에 할 수 있는 황제를 향한 농이었고, 황제는 그것을 좋아했다.
「짐을 놀리려 드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폐하.」
능청스럽게도 공손한 말투가 우스워 정국이 또 한 번 푸스스 웃었다.
「올해 스물하나, 어미가 노비인 탓에 그 업을 물려받아 동부승지 김균식의 몸종으로 지내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미는 그 아이가 아주 어릴 때 죽었다 합니다. 그리고 김균식이 종종,」
「종종?」
「그 아이의 몸을 취했었던 모양입니다.」
정국이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 속곳만 걸치고 있었으나 얼굴에 서린 서늘한 냉기와 앳된 이목구비가 묘하게 어울려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그뿐,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국을 잠깐 확인한 윤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찌되었건, 그냥 그저 그렇게 평범한 노비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저자거리에서 태형 도련님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련님이 그 이후 김균식에게 그 아이를 달라 청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도련님과 그 아이가 만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용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던 윤기와 황제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맑고 커다란, 새카만 눈동자에 명백한 호기심이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것을 빤하니 쳐다보던 윤기가 슬핏 미소지었다. 그리고 황제의 얼굴에, 또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도련님은 그 아이를 무척이나 아끼시는 듯 보이더군요.」
「…….」
윤기가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정국을 향해 말했다. 황제의 얼굴에 태양마냥 훤하니 걸린 미소가 커졌다.
「도련님이 그 아이를 몹시 사랑하는 듯 합니다.」
「…….」
「그리고 그 아이 또한, 도련님을 몹시 따릅니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기 역시 접고 있던 부채를 펼치고는 얼굴 앞에 부채를 가져다 대었다. 더 이상 고할 것이 없다는 일종의 표시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황제가 난데없이 툭, 윤기를 향해 뱉었다.
「그년의 어미에 대해서는 더 없느냐?」
윤기가 부채를 살랑거렸다.
「예. 너무 일찍 죽은데다 그저 그런, 평범한 계집종이었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없었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정국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비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모르는데다 어미마저 별다를 것이 없단 말이지. 분명히, 그다지 생경한 얼굴이 아니었다. 어딘가 낯이 익었으나 너무나도 희미한 그 낯익음에, 정국은 그 생각을 지웠다. 누구의 핏줄인지 내가 알 게 무어냐. 지금 정국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김태형이 그년을 그렇게도 아낀단 말이지.」
찌푸렸던 미간이 다시 펴졌다. 고운 이목구비가 선명히 빛을 발했다.
태형은 아주 어릴 적부터 황제의 유일한 친구였으며 동료였다. 정국이 황제이기 이전, 정국의 아버지가 황제였을 때 정국의 아버지와 그 때도 영의정 직책을 맡고 있었던 태형의 아버지 역시 군신관계를 넘어선 벗의 관계였으니 자연스레 나이 또래가 비슷한 서로의 자식들 역시 어울리는 것이 당연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태형과 정국은 늘 함께였다. 나이는 태형이 정국보다 두 살이 더 많았으나, 태형은 언제나 정국에게 경어를 썼고 정국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철저하게 아랫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군신의 관계에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고 실제로 당연한 행위였으나 어렸던 정국은 그것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자신이 항상 태형보다 위였고, 항상 태형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정국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국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태형에 대한 자그만 열등감은 없어지지 못했다. 항상 김태형은 저에게 깍듯이 대하면서도 제가 나이가 많다는 것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정국이 화초를 마구 잡아뜯으면,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황태자 저하. 아니 됩니다, 아니 됩니다. 그놈의 빌어 쳐먹을 아니 됩니다. 듣기 싫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태형이 하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을 정국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항상 옳은 말만 하고, 학문을 사랑하며, 배려심이 깊고 올곧은 김태형이 너무나도 싫었다.
아바마마께서는 항상 나와 김태형을 비교하셨다. 너는 황태자인데도 학문이 태형이에게 뒤처지면 어이하느냐. 더욱 학문을 갈고닦도록 해라. 너는 어이하여 황태자라는 녀석이 태형이보다도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느냐. 너는 어이하여 태형이보다…
「김태형이 그년을.」
김태형이 가진 모든 것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했다.
「김태형이….」
김태형은 절대로, 나보다 나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나는 황제이고, 김태형은 나의 신하이니.
「지민아.」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조용한 읊조림에 또다시 방의 문이 열렸고, 무장을 한 채로 허리춤에 기다란 칼을 찬 지민이 윤기의 옆에 섰다. 깊이 허리를 한 번 숙이고는 황제의 명을 기다리는 지민을 정국이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충직한 사냥개였다.
「짐이 내일 온종일 궐에 없을 듯 싶다.」
「어디를 가시려…」
황제가 그 질문에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민은 항상 물었다. 어디를 가시려 그러십니까.
「윤기와 함께 갈 곳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아무에게도 들키면 아니 될 것 같구나.」
「예, 폐하.」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그래, 그만 나가보도록 해라.」
지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탁, 하고 닫기는 문소리를 확인하고는 정국이 윤기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부채 너머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는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내일 조회에만 참석하고 궐을 비워야겠다.」
「채비를 해 놓겠습니다.」
*
「덥구나.」
내리쬐는 햇살을 손으로 막은 정국이 제 옆에 서 있는 윤기를 향해 짜증 섞인 투정을 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늘상 혹시라도 용안이 그을릴까 옥체가 상할까 제 뒤를 쫓아다니는 수많은 신하들과 궁녀들의 보좌를 받으며 빛 가리개를 머리 위에 늘 씌워 주던 어린 궁녀를 대동하고 다니던 정국이었기에, 손바닥 하나로 뜨거운 열기를 막는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여름이 완연합니다.」
「영의정네에 가면 물부터 동내야겠다.」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듣습니다.」
「들으라 해라.」
윤기가 쿡쿡 웃었다. 눈에 띌까 부채는 소매 속에 집어넣었지만 눈 밑까지 천으로 얼굴을 대신 가려 놓은 윤기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 왔습니다, …폐하.」
문은 부주의하게도 열려 있었다. 슬쩍 손으로 문을 밀어 연 윤기가 정국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문을 걸어 잠구었다. 들어오자마자 답답했던 듯 얼굴을 가리려 덮어쓴 겉옷을 벗어던진 정국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태형과 호석을 찾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엌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빗자루를 쥐어쥔 기다란 남자의 인영이었다.
「…? 누구십…」
「태형이를 만나러 왔다만.」
「황제 폐하?!」
「목소리를 낮추거라. 어느 안전이라고 소리를 높이느냐.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윤기가 한마디 하자, 남준이 입을 다물었다. 조개처럼 닫혀진 입술에 정국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남준의 둥그래진 눈은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황제였다, 자신의 눈 앞에 지금 서 있는 이 소년은 황제가 분명했다.
「태형이를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어디 있느냐?」
「아, 그것이…」
「태형이는 잠깐 외출한다 하였습니다.」
남준의 말을 끊고 그 앞을 가로막아 선 것은 석진이었다. 그 어깨를 감싼 얇은 주홍색 비단이 살랑거렸다. 석진이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얼마 안 있어 돌아온다 하였는데,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누추하지만 이곳에서 기다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님들 안녕 안녕ㅠㅠㅠㅠ
오늘 너무 늦었죠, 오늘 너무 바빴어ㅠㅠ
아침부터 병원 두 개 갔다가 학원갔다 과외갔다 약속있어서 또ㅠㅠ
그래도 글은 올려야할 것 같아서 부랴부랴 안 자고 글을 썼는데 이 시간에 내 님들 깨있으려나 모르겠네.
아참, 그리고 26일날 내 생일이었는데ㅠㅠ
사담톡에 말을 했더니 많은 독자분들이 너무 격하게 축하해줘서 나 정말로 감동이었어.
이쁜이들이 준 생일선물 |
암호닉 '액희' 님 선물 암호닉 '운동' 님 선물 암호닉 '총총' 님 선물 암호닉 '태태매거진' 님 선물 다들 너무 고마워요, 너무 예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