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06. 치킨게임
치킨게임 :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 어느 한쪽도 핸들을 꺾지 않으면 게임에서는 둘 다 승자가 되지만, 결국 충돌함으로써 양쪽 모두 자멸한다. 이 경우 핸들을 꺾은 사람은 치킨(chicken)이 된다. 즉, 치킨은 겁쟁이(coward)를 의미하는 것이다.
“연주씨 오늘도 황 작가 만나?”
“네? 아... 잘 모르겠어요. 오늘은 연락을 안 해봐서.”
참 웃긴 일이었다. 황 작가가 나에게 커피를 주고 간 다음 날, 우리 부서에는 나와 황 작가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뭐, 실상을 알 리 없는 부원들이 우리를 충분히 이상한 사이로 여기기 다분한 상황이긴 했다. 그 이후로도 황 작가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사무실 앞을 서성이다 나를 불러내곤 했다. 그와의 거짓 약속을 핑계로 잠깐의 휴식을 얻었던 날 이후 이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때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짜 약속보다 진짜 약속이 늘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약속들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와의 약속이 생기기를 기다리게 되었는지도.
“아쉽네. 오늘 만난다고 하면 뭐 좀 부탁하려고 했는데.”
“부탁하시려던 게 뭔데요?”
“아, 우리 딸이 황 작가를 너무 좋아해서 책에 싸인 좀 받아달라고 하려 했지. 너무 그런가?”
“다음에 만날 일 있으면 물어볼게요. 오늘은 안 만날 것 같... 선배 잠시만요.”
[오늘 몇 시 퇴근이에요? 나 저녁 같이 먹을 사람 필요한데.]
“누구야? 표정 보니까 작가님인가 본데? 황 작가가 뭐래? 오늘 만나재?”
“아... 네. 오늘 가서 싸인 받아다 드릴게요.”
“내가 볼 땐 둘이 뭐 있어. 황 작가가 연주씨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잘해봐. 황 작가 같은 남자가 어디 흔한가.”
또. 또 그놈의 간섭 시작이다. 관심이 있든 말든 제가 알아서 합니다. 선배님. 아, 그렇다고 관심이 있다는 건 절대 아니고.
***
“연주씨, 여기요.”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으면 작가님은 밥을 못 먹어요? 나 생각보다 되게 바쁜 사람인데.”
“그렇게 바쁜 사람이 나와줬네요, 내 밥 친구 하러. 이거 기뻐해도 되는 거 맞죠.”
“...오늘은 일이 많이 없어서 그랬어요. 아 맞다. 부탁할 거 있어요.”
딸을 위한 싸인을 받아 달라는 선배의 귀찮은 심부름이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저 숨 막히는 분위기를 무마할 방법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부탁이 뭔데요?”
“책에 싸인 한 번만 해주세요. 제 부탁은 아니고, 선배 피디님 부탁. 따님이 작가님 팬이래요. 이렇게 책까지 받아왔는데 안 해준다고 하면 나 쪽팔려서 내일 출근 못 해요.”
가방에서 주섬주섬 책과 펜을 꺼내자, 작가님이 이리 내라는 듯 긴 팔을 뻗어 한 손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놀랍게도 부탁을 거절당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은 먼저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첫째로 든 생각은, 작가님 참 다정한 사람이라는 거.
“연주씨 부탁인데 당연히 해 드려야죠. 싸인 백 번도 해 드릴 수 있어요,”
“제 부탁 아니고 선배 부탁이라니까.”
“어쨌든 지금 여기 있는 게 연주씨니까 나한테는 연주씨 부탁이에요. 따님 성함 아세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분홍빛 파도에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머리로는 그만을 외치면서도 내심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흔들리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뒤 속으로 되뇌었다. 세상에 사랑은 없어. 그런 게 존재할 리 없잖아, 하고. 가만 앉아 종이에 이름을 써 내려가는 작가님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분히 내려앉은 얇고 긴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 기대 누군가를 관찰하고 있는 내 모습이 웃겨서, 피식하는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싸인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든 작가님이 두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내 싸인 많이 웃겨요?”
“하나도 안 웃겨요. 그냥, 남의 싸인 구경하고 있는 저 자신이 웃겨서요.”
“아, 다 했다. 어때요?”
책 속지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는 작가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건 예의일 뿐이다. 나의 부탁을 호의로 받아 준 사람에 대한 예의.
“작가님.”
“네? 왜요?”
“근데 이 구시대적인 멘트는 뭐예요? 행복하세요? 요즘 누가 싸인에다가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써요.”
“왜 그래요. 받는 분이 정말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건데. 원래 기본이 제일 좋은 거예요.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듯이.”
“싸인 멘트 하나에 고전까지 나오네. 알겠어요.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
“지금 부러워서 그러는 거죠. 연주씨도 언제 책 한 번 들고 와요. 싸인해 줄 테니까. 연주씨한테는 행복하세요 말고 특별히 다른 말 써 드릴게요.”
“됐네요. 하나도 안 부럽거든요.”
“싫으면 말고. 어? 밥 나왔다. 얼른 먹어요. 식기 전에.”
생긴 건 스테이크나 썰게 생겨서 실제로 먹는 건 죄다 토종이다. 물론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다. 내 식성이 원체 스테이크보다는 토종에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아, 맞다.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연주씨 나한테 관심 없는 척하면서 궁금한 건 은근 많아요, 그죠?”
“대답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요.”
“대답하기 당연히 좋죠. 궁금한 게 뭔데요?”
“아까 싸인하신 책이요, 그거 신간 맞죠. 제일 최근에 나온.”
“그렇죠?”
“사실 오는 길에 한 번 훑어봤거든요. 대충 무슨 내용인가, 하고요. 요즘 너무 바빠서 맨날 읽어야지 해놓고 못 읽었거든요.”
“어때요? 이번에도 뻔하죠. 마지막에 또 주인공끼리 사랑에 빠지게 설정해뒀는데.”
“뭐,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웬일로 교통사고 장면이 없나 해서요. 제가 못 찾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목차에 사고 암시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데. 사건 해결 과정에서 매번 다른 교통사고가 나는 게 작가님 글의 특징인데 없으니까 이상하잖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고.”
작가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 듯했다. 하긴, 내가 나의 인생을 평가받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작가님도 누군가 자신의 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겠지. 조금 궁금할지라도 참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원치 않는 오지랖이 얼마나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아, 제가 또 괜한 질문을 했죠.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대답하기 싫으시면 그냥 건너뛰세요. 그냥 단순히 궁금했던 거니까.”
“아니요. 좋은 질문이라서요. 저도 쓰면서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라.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이번에 교통사고 장면이 빠졌다는 걸 알아봐 준 것도 고맙고.”
언제 보면 속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꾸 궁금해진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황민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의문을 지워낼 자신이 없다.
Corinne Bailey Rae - Trouble Sleeping
“이제 그 장면을 굳이 집어넣을 이유가 사라진 것 같아서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달라고 하면 실례일까요?”
― 연애경험은 있죠. 그래 봤자 한 번이지만. 연애를 했다고 해서 사랑을 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제가 했던 그 연애에는 사랑이 없었거든요.”
―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실례가 된다면 대답 안 해주셔ㄷ...”
나의 질문을 마주한 작가님의 기분도 그때의 나와 같을까. 그렇다면 퍽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작가님의 조심스러운 추가 질문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을 더 했다. 나의 질문이 그에게 그때와 같은 불쾌함을 안겨주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실례 아니에요. 연주씨가 그렇게 묻지 않았어도 마침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다행이네요.”
나의 질문이 폐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리고 뒤에 이어질 뻔한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저는 교통사고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좋아하진 않죠. 누가 교통사고를 좋아하겠어요. 사고는 뭐가 됐든 간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니까.”
“그렇죠.”
“그때는 혐오 수준이었어요. 한동안 자동차를 보기만 해도 온몸이 떨렸을 만큼.”
불현듯 떠오르는 그날의 대화.
― 그냥 사고였다고요. 흔하디흔한 교통사고처럼, 피디님께 들이닥친 사고였다고.
― 왜, 운전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 꼭 한 명씩 있잖아요. 괜히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아니면 졸음운전을 하다 앞차를 들입다 박아버리는 사람.
― 그냥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해서요. 피디님께서는 멀쩡히 운전을 하고 있던 건데, 이상한 운전자가 피디님을 들이받은 거예요.
그가 교통사고를 혐오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었던 날 그가 나에게 건넸던 말들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교통사고에 대한 엄청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신가 봐요. 누군가가 작가님의 차를 들이받았다거나...”
“어떤 사고였는지 궁금하다는 거죠?”
“...네. 굳이 따지자면.”
“알려주면 연주씨 나한테 되게 미안해야 할걸요. 진짜 엄청 미안해질 텐데.”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정확한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날 말실수를 했던가.
“어차피 한참 된 이야기니까. 사랑하던 사람을,”
설마.
“교통사고로 잃었어요.”
...설마.
― 교통사고가 한 번 나고, 또 나고, 그 사고로 인해 누군가 죽기까지 하면요,
― 다시는 운전 같은 거 하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 운전대를 잡는 게 겁이 나서, 또 누군가 나를 들이받을 것이 무서워서, 어쩌면 도로로 걸어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질지 모른다고요.
아니길 바랐다. 설마. 그에게 이렇게 아픈 과거가 있을 줄 몰랐는데.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의 상처를 이해할 수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랑을 잃어본 적 있는 그는 누구보다 사랑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나보다도 더 사랑 앞에 나약한 사람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랑지상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사랑지상주의자... 그 말은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을 그 무엇보다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랑을 사고로 잃었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그는 사랑만 돌아온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보니까 미안해하고 있네. 맞죠.”
“...네.”
“모르고 그런 건데, 너무 미안해할 건 없어요.”
그 순간에 작가님이 느꼈을 쓰라린 옛 기억에 대한 고통을 감히 헤아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실패작이었던 내 연애를 교통사고로 생각하면 어떻겠냐는 작가님의 말에 반박하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작가님의 마음을 멋대로 할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그가 정말 운전을 그만뒀을지 모를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내가 한 말 그대로 도로로 걸어 나오는 일조차 두려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완전 울상이네. 왜, 미안해 죽겠어요?”
“...네.”
“재밌네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 모르고 그랬으니 다행이죠. 연주씨 잘못 아니잖아요. 나도 연주씨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깊이를 모르고 함부로 떠들어댄 거니까.”
“그래도 제가 더...”
“다 지난 일이니까요. 이제는 운전도 잘 하고, 도로로 걸어 나오는 게 무섭지도 않고. 내 소설에 억지로 교통사고 장면을 넣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무뎌졌어요.”
세상에. 이건 내가 구상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는 정말로 사고 이후 운전도, 도로를 보는 것도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감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던 내가 사랑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 순간이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더럽고도 치사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다만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을 바에는, 그냥 없는 취급 하자는 게 나의 못된 생각이었을 뿐.
“소설에 자꾸만 교통사고 장면을 끼워 넣었던 건, 익숙해지기 위해서였어요. 내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그리고 나에게 불쑥 들이닥친 교통사고라는 불행이 결코 우리에게만 저주처럼 내려진 특수한 불행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사고’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요.”
“그럼 지금은 다 극복하신 거고요?”
“네. 보시다시피. 제가 워낙 다양한 교통사고 장면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제 트레이드마크가 된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신작에도 하나 넣어야 하나 하다가, 이제는 정말 교통사고의 악몽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빼기로 했어요. 굳이 그 장면이 들어가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더라고요. 이거 하나 이겨내는 데 8년씩이나 걸린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이겨낸 게 어디에요. 작가님 이야기 들어보니 제가 겪은 일은 나쁜 기억의 축에도 못 낄 것 같네요. 심지어 나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고.”
“그럼 연주씨도 사랑을 믿어보려고 해 봐요. 노력을 해야 바뀌지.”
애석하게도 나에게 있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부 핑계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이미 나는 사랑의 존재를 부정한 지 오래였고, 그것의 가치도, 소중함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노력을 해서 바뀔 문제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과제를 주고, 그 과제만 해결하면 나도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아니었다. 그렇다면, 비관과 절망으로 가득 차버린 내 심장에는 영원히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생기지 못하는 걸까.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요?“
”......“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는 게 없는 상황이라면 이제 뭘 어떡해야 하는데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내가 화를 낼 상황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답답한 마음에 성급하게 튀어 나와버린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미안해요. 내 문제인 거 아는데...”
“그럼 이제 내가 노력할게요.”
...왜지. 왜 작가님이 노력한다고 하시지. 이건 온전히 나의 문제인데....
“연주씨가 사랑을 믿을 수 있게, 내가 한 번 노력해 보겠다고.”
“......”
“전에 보고 느낀 게 아니면 안 믿는다고 했죠.”
“...네.”
“그럼 보고 느끼면 되겠네. 내가 도와줄게요. 사랑을 볼 수 있게, 느낄 수 있게 해 줄게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면 되겠네. 간단하다, 그죠.”
“작가님 나 좋아해요?”
“네. 많이 좋아해요.”
그 순간 겁이 났다. 그깟 사랑 따위가 감히 나를 흔들어놓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십 년 넘게 지켜온 믿음이 고작 사람 하나 때문에 무너져버릴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동시에 괜한 오기도 생겨난 것 같다. 나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저 사람의 노력이 과연 나를 바꿔놓을 수 있을까 하는 오기가. 나는 ‘없다’에, 작가님은 ‘있다’에 건 모양이었다. 과연 누가 이길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작가님이 사랑지상주의자라는 건 이제 이해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 세상에 사랑은 없다. 적어도 나의 세상에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침대에 엎어졌다. 나는 왜 자꾸만 그의 음성을 곱씹고 있는 걸까. 그냥 정신 나간 작가의 헛소리쯤으로 생각하고 넘겨도 될 만한 일이었다. 가벼운 코웃음 한 번이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고백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작가님의 말을 잊어버리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이, 그 네 글자의 말이 내 온몸을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왜일까. 작가님의 고백은 절대로 진심이었을 리가 없는데. 설사 진심이었다고 해도 나는 결코 작가님을 좋아하지 않는데.
지이잉-
p.m. 8 : 41
[집에는 잘 들어갔어요?]
쓸데없는 친절 또 시작이지, 또.
p.m. 9 : 03
[네.]
딱 보기에도 기분 나쁠 만한 성의 없는 답장을 보내놓은 채 한참 동안 환하게 빛나는 배경화면을 바라보았다. 금방 올 줄 알았던 작가님의 답장은 예상과는 다르게 금방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뭘 기대한 건가 싶어 황급히 핸드폰에서 시선을 옮겼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핸드폰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면을 꺼 버리려는 찰나,
p.m. 9 : 08
[잘 들어가셨다니 다행이네. 내일 방송 준비 잘 하고, 방송국에서 봐요. 잘 자요.]
아 맞다. 내일 녹화 날이었지. 잘 도망 다니면 금방 흐지부지 끝날 일이라 생각했는데, 내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황민현이라는 사람을 피하기에 나는 너무나도 겁 많은 도망자였다.
치킨 게임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상대방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차량이 돌진할 때 나는 절대로 핸들을 꺾지 않겠다는 신호를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 연주야 내가 봤을 때 너 약간 치킨이야(속닥
급전개인 거 아는데, 다들 고구마 싫어하시잖아요. 맞죠?
++ 민현이를 가리키는 연주의 호칭이
'황 작가'에서 '작가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알고 계셨던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