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낙엽을 사뿐히 지르밟으니 경쾌하면서도 쓸쓸한 소리가 난다. 너도 언젠가 이곳의 낙엽을 밟았겠지. 가을을 닮은 너였는데. 가을이 주는 시원함과 포근함을 모두 가지고 있던 너였는데.
모래시계
해가 지기 전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긴 채 언니와 잠깐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나는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골목을 둘러보았다. 아기자기한 카페,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수가게, 고소한 냄새로 가득한 작은 빵집까지, 참 다양한 상점들이 일렬로 서서 나를 반기는 듯했다. 하나하나 들어가 보지는 못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게 바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
그중에서도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 건 빈티지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골동품 가게였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노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고. 네가 즐겨듣던 노래가 이어폰을 타고 내 귀로 흘러들어오자 머릿속이 순식간에 네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사실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노래가 아니었더라도 너를 생각하게 될 이유는 차고 넘쳤으니까.
[Welcome : My universe]
‘나의 우주’라는, 너를 떠올릴 만한 소지가 다분한 골동품 가게 이름도 그중 하나였고.
대충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문을 힘껏 미니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한국에서는 이런 가게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확률이 더 높을 테지만. 기분 좋은 나무 냄새를 맡으며 가게 구석구석을 둘러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작은 모래시계 하나를 집어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네가 떠나기 전 마지막 선물이라며 나에게 건넨 그 모래시계와 똑같이 생겼으니까. 내가 이 모래시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이유를 다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네가 머무르고 있을 이곳 캐나다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네가 준 것과 똑같은 모래시계를 손에 들고 멍하니 서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너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알아? 무슨 할 말이길래 그래.
― 우리 아버지 캐나다에 계신 거 알지?
― 당연히 알지. 그래서 네가 엄청 가고 싶어 하잖아, 캐나다.
― 이번에 가게 됐어. 아버지께서 오라고 하셔서.
― 그래? 완전 잘 됐다! 언제 가는데?
― 석 달쯤 뒤에.
― 엄청 잘 됐네. 좋은 소식인데 왜 이렇게 울상이야. 나랑 떨어져 있는 게 그렇게 슬퍼?
― …….
― 얼마나 오래 있길래 그래. 길어봤자 몇 달 아니야?
― …….
― 왜 그래 진짜. 얼마 동안 가 있는 건데.
―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좀… 오래 있을 것 같아.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늘 기회만 주어진다면 아버지가 계신 캐나다에 다녀오고 싶어하던 너를 가장 잘 알던 나였기에 떠난다는 너의 말에 마냥 슬퍼할 수도, 그렇다고 기뻐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만큼 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의 우리를 계속해서 곱씹어보고 있는 걸 보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 …어?
― 가서 아버지를 뵙고 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일을 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길면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 아….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표정 풀어. 내가 기다리면 되지. 시간 금방 가.
― 여주야.
― 응?
― 그냥 나 기다리지 마.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네가 나 기다리느라 발 묶여서 이런저런 기회들 놓치는 거 싫어.
― 그게 무슨 말이야.
― 우리가 진짜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다시 만날 테니까, 그때까지 네 할 일 하면서 살아.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면서 무책임하게 기다려달라는 말 하고 싶지 않아.
― 성우야….
― 아직 석 달 정도 남았으니까, 그동안은 서로한테 최선을 다하자. 그 이후에는, 그냥 내 생각하지 마. 아마 연락도 잘 안 될 거야. 괜히 기다리지 말고, 네 인생 잘 살아. 네가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갑자기 불러내서 한다는 이야기가 고작 이런 거라 미안해.
― 기다리지 말라는 말, 진심이야?
― …응.
그렇게 석 달을 눈물로 보내고 난 뒤 네가 비행기에 오르던 날, 너는 나에게 마지막 선물이라며 모래시계 하나를 선물했었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모래시계를 본 기억조차 희미했었는데, 선물로 웬 모래시계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 마지막 선물치고는 너무 뜬금없어 보이기도 했고.
― 이게 뭐야?
― 얼른 열어봐.
― 모래시계네? 엄청 오랜만에 본다, 이거.
― 우리 아버지가 나 어렸을 때 선물해주신 거야. 캐나다 골동품 가게에서 직접 사신 거래. 아버지 보고 싶을 때마다 뒤집어 보라고 하시면서.
― 뒤집어 보라고?
― 응. 모래가 다 떨어져서 시계가 멈춘 것처럼 보여도 다시 뒤집으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되는 거잖아. 끝이 곧 시작인 거지.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 …….
― 여주야,
― 정말 다시 올 거지?
― 당연하지. 금방 오겠다고는 말 못 하지만 꼭 다시 올게. 그건 약속해.
― 알았어. 알았으니까, 너도 가서는 네 일에만 집중해. 괜히 마음 흔들리지 말고.
― 그래야지. 너도 너무 오래 아파하지 마. 금방 잊고, 잘 지내.
― 금방 잊으라는 말은 하지 말자. 그냥 적당히 아파하다가, 언젠가 다시 만나는 거야. 그때까지 건강히 잘 있어.
― 너도. 덥다고 옷 얇게 입었다가 괜히 감기 걸리지 말고. 갈게, 안녕.
작별인사가 될지도 모르는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던 네 뒷모습은 여태 내가 본 모든 뒷모습 중 가장 쓸쓸했다. 그렇게 네가 떠나고 난 이후 몇 날 며칠을 네가 준 모래시계만 바라보며 보냈던 것 같다. 너의 부재에 내가 눈물을 흘려버리면 모래시계 속 모래알들이 굳어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 너무 오래는 울지 말라던 너의 울음 섞인 농담을 떠올리며 매 순간 차오르는 눈물을 삼켜냈었지. 비록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너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았으니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던 아픈 기억도 이제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추억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내가 무언가에 홀린 듯 이 가게에 들어와 네가 나에게 준 것과 같은 모래시계를 발견하고서는 웃으며 너를 떠올릴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겠지. 너에 대한 짧은 회상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누군가는 태엽을 돌리면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오르골을 만지작대고 있었고, 누군가는 가게 한쪽에 놓여있는 낡은 흔들의자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에게 이 모래시계가 마지막 남은 너의 흔적인 것처럼, 저들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오르골과 흔들의자도 저들이 그리워하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추억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을까.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모래시계는 네가 나에게 준 것과 똑같은 것인 만큼 굳이 돈을 내고 다시 살 이유가 없었음에도 나는 어느 순간 계단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수백 번도 넘게 뒤집히느라 많이 힘들었을 내 모래시계에게 친구 하나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핑계를 대며. 네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깟 모래시계 하나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걸 보면, 네가 남기고 간 말대로 너와 함께하는 동안 쌓여간 추억들은 여전히 내 마음 한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양이다.
공항에서 열심히 환전해 온 지폐를 점원에게 건넨 채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추억에 이끌려 들어왔는지 가게 입구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Hey, Long time no see!”
손님에게 이렇게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가게 주인이라니. 아무리 외국이라지만 이곳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역시 사람 간 정은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웃음이 나왔다. 옷가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식점은 더더욱 아닌 이 골동품 가게에도 자주 오는 단골손님이 있다는 사실이 괜히 신기하기도 했고. 각자의 추억을 사기 위해 들르는 골동품 가게에 주인과 친분을 쌓을 정도로 자주 오는 손님은 대체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까.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How have you been?’하고 대답하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낮고 따뜻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 외에는 그 상황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낯익은 눈매, 낯익은 콧대, 그리고 낯익은 입꼬리. 잠깐의 정적 끝에 마침내 겹쳐진 시선.
네가 올 때마다 눈독 들이던 그 모래시계 오늘 드디어 팔렸어- 하고 이야기하는 점원에게 영어로 대답하는 대신 나와 눈을 맞추며 반가운 한국어로 뱉어낸 너의 한마디.
“엉뚱한 사람한테 팔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제 주인 찾아가서 다행이다.”
“…….”
“많이 보고 싶었어. 내가 너무 늦었지.”
나는 그날 밤, 그토록 바라왔던 너를 두 눈 가득 담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내 눈 속에 담긴 네가 조금씩 흘러넘칠까 봐 걱정이 돼 함부로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종착역과 출발역은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던 너의 말처럼, 나는 너와 나 사이를 갈라놓은 이곳 캐나다에서 너를 다시 만났다. 끝일 줄만 알았던 인연이 다시 시작된 순간이었다. 너는 내가 이곳에 여행 온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고 했다. 언니가 미리 귀띔해 줬다나 뭐라나. 조금 괘씸하긴 하지만 이렇게 찾아와 줬으니 한 번 봐주겠다는 나의 말에 너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그 미소에 너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나의 두 볼을 감싸고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은 덤.
캐나다에 머물기로 한 기간을 고작 이 주로 잡아놓은 탓에 우리는 다시 헤어져야 했지만 우리의 두 번째 이별은 처음만큼 아프지 않았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으니까. 기약 없는 이별을 맞이했던 그때와는 달리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 있기로 다짐했으니까. 서로를 위한 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맞잡은 두 손을 놓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 골동품 가게에서 산 모래시계는 내일 너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이별을 앞둔 슬픔 대신 다시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을 가득 담아. 모래가 다 떨어진다 해도 다시 뒤집기만 하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되는 모래시계처럼, 우리의 사랑도 끝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잠시뿐인 이별은 있어도 영원한 이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를 통해 배웠으니까.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너라는 사람을 만나 진실한 사랑의 가치를 알아 버렸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쌓여가는 모래들은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많은 날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든 간에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일 것을 믿어요.
오늘도, 내일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
++ 자주 오겠다고 말씀드려놓고 연중 공지 이후 너무 길게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사담으로 찾아뵙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올린 신알이 제대로 된 글이 아닌 시덥잖은 사담글이면 독자님들께서도 적잖이 실망하실 것 같아 시간이 조금 더 걸렸네요. 정말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날씨도 많이 추워졌는데 다들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요. 제목에도 나와있듯 6월에 모래시계라는 노래를 들으며 '가을이 오면 올려야지' 하고 썼던 글인데 이 글을 올릴 계절이 다가왔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다음 글이 올라오기 전까지 또 시간이 걸리겠지만 틈틈이 사담으로라도 여러분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진짜로요! 여전히 저와 제 글을 잊지 않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