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55.
김여주 님! 화채 드실 시간입니다! 승관의 우렁찬 목소리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는다. 초인종을 장식쯤으로 생각하는 녀석은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현관을 부쉈다.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한 가을 날씨에 걸맞은 화채가 오전 중으로 배달될 예정이니 꼭 환영의 박수로 맞이해 달라던 녀석은 도통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 홀로 씨름 중이었다.
설마 도어락 비번 바꿨냐? 나도 바꿔 줘? 어? 진짜 바꿔? 서운함이 분노로 변해 입으로 눈물을 쏟아낸다. 곧 층간 소음으로 민원이 들어올 게 뻔했다. 선잠으로 눅눅한 몸을 일으켜 인터폰을 켜자 볼록 솟아난 볼때기가 퍼런 화면을 메운다.
- “보험 안 사요.”
- “화채 보험 아직도 안 드셨어요?”
- “꺼져.”
- “아줌마, 지금 욕했죠?”
분노가 복도를 장악하기 전에 녀석을 집안으로 감춰야 했다. 화채 보험삽니다. 들어오세요. 서둘러 문을 열어 방긋 웃는 볼때기를 지나 뒷덜미를 잡는다. 잠에 취해 눈도 못 뜨는 몰골을 보며 녀석은 끌끌 혀를 찼다.
- “과외 한다고 본가 간다더니 늦잠이나 자고 말이야.”
- “그럼 넌 화채 만들려고 학교에서 여기까지 왔어?”
- “당연하지, 가을의 별미는 화채니까.”
승관의 걸음마다 과일 향이 난다. 자연스레 TV를 켜고 주방으로 들어가 숟가락을 입에 문 녀석이 주방 식탁에 널브러진 문제집과 방전된 노트북을 향해 큰 눈을 굴렸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고 그러더니 밤이라도 샜냐. 녀석은 문제집을 들어 영어 문장을 줄줄 읽어 내리다, 눈에 익숙한 그것이 곧 작년 수능 지문이었음을 깨닫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어쩐다 치를 떨었다. 하얀 종이 위, 떨어진 화채 국물을 몰래 닦는 녀석을 모른 척 넘긴다. 번진 듯한 붉은 수채화 자국이었다.
- “서쿠가 그러던데 너희 저번에 호텔 모의 면접 봤다며?”
- “떨어서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
- “그 면접에서 교수 맘에 들면 호텔 꽂아준다는 소문이 아주 바글바글 하더만요.”
- “다 루머야.”
- “알게 모르게 편법은 어디에나 있어요.”
설 녹은 설탕이 그릇 밑바닥을 헤엄친다. 숟가락으로 휘휘 젓기만 할 뿐, 반절도 비우지 못한 채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더 먹지 않겠냐는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나와 상관없는 것들, 그러나 최선에 길들여진 난 그 경계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끝까지 잡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은 한 끗 차이의 경계에서.
늦은 아침의 태양, 커튼을 비집고 내려앉은 빛, 채널 돌아가는 소리……. 눈을 짓누르는 팔을 거둬 옆으로 돌아눕는다. 넌 하고 싶은 거 있어? 내 질문에 승관의 툭 튀어나온 날개뼈가 돌연 움직임을 멈춘다. 화채를 움푹 뜬 숟가락마저 허공을 떠다녔다.
……그냥 닥치는 거 아무거나. 마지막 한입을 겨우 넘긴 녀석은 테이블을 밀어 그 자리에 엎드렸다. 뚫어져라 TV를 쳐다보는 것이다. 라디오 방송국의 72시간 다큐 영상을.
- “어렸을 땐 네 이름 걸고 라디오 하는 게 꿈이었잖아.”
-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어.”
- “지금은?”
- “지금은 뭐…….”
늦은 아침의 태양, 커튼을 비집고 내려앉은 빛, 영상 돌아가는 소리……. 승관은 자리에 앉아 붕 뜬 뒷머리를 매만질 뿐이다. 어색한 공기에 서로가 입을 다물고 TV에 의지해 정적을 털어낸다. 자신의 포부를 자랑하기 좋아하던 녀석은 언젠가부터 말을 아꼈다.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도 있었고 꿈이 현실에 닿기엔 다소 무모한 것임을 스스로 깨우친 것이라.
- “지금도 하고 싶어?”
- “별로.”
- “왜?”
- “돈 못 벌잖냐.”
난 졸부 돼서 건물주 하고 싶은데 언제 돈 벌어서 언제 건물 사. 프로그램이 끝나자 승관은 주방으로 들어가 그릇을 닦았다. 꺼지지 않는 물소리, 커튼을 비집고 들어찬 빛이 사라지고 다음 방송이 중반을 달릴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고작 그릇 두 개에 흠뻑 젖은 손으로 돌아온 녀석은 마르지 않은 제 손바닥을 보였다.
- “내 꺼 완전 크지 않냐.”
- “…….”
- “대기업에선 손바닥 큰 걸로 어떻게 좀 어필 안 되나?”
아마 피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화제를 돌려 숨기는 버릇은 여전했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 녀석의 손바닥에 그저 내 것을 맞댄다. 한 뼘이나 더 커져 버렸음에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온기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하고 싶은 건 꼭 이뤄야 하는 줏대 있는 녀석도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괴로워하고 있었으니까.
- “꿈이 뭐 별거냐.”
- “…….”
- “원래 이루어질 수 없는 거야. 첫사랑처럼.”
날 따라 배시시 입꼬리를 올리던 녀석이 금세 표정을 지운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초인종 소리에 달려가 집주인 행세를 했다. 울 찬이는 인터폰 화면이 영 안 받네. 수업을 위해 다소 일찍 찾아온 소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 “누나 집에 형이 왜 있어요?”
- “죽부인 사이는 왕래가 잦은 법이지.”
- “죽마고우겠죠. 진짜 A대 맞아요?”
- “너 최소 이지훈 동생?”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낯선 이가 불편한 소년은 거실로 피신했다. 따라오지 좀 마요. 그림자도 아니고. 그러나 도망칠수록 달라붙는 것이 습성인 승관은 소년에게 치대며 묵혀 온 고백을 한다.
- “차니차니 찬찬, 형은 널 좋아해.”
- “몇 번 봤다고 사심이에요.”
- “횟수가 사랑에 비례하진 않지.”
- “반비례 완전 싫어하거든요.”
쌀쌀맞은 소년은 녀석의 마음을 내치면서도 가방 앞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저번에 귤 맛있었어요. 이게 매점에서 제일 비싼 거예요. 승관은 귤이 아닌 엄연한 한라봉이었다 말하면서도 못 이긴 척 그것을 받아 든다. 프로포즈를 친구 앞에서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승관이 두 손으로 부러 얼굴을 가리자 소년은 눈을 흘기며 두 귀를 막는다. 조만간 짝사랑이 시작될 조짐이었다.
- “수업 지금 시작할까?”
- “학교도 쉬는 시간을 십 분이나 주는데 누나는 왜 그래요?”
- “사교육이 원래 빡세.”
못마땅한 소년을 앉히고 문제를 되짚는다. 수학의 정석처럼 앞장만 까맣게 될 줄 알았던 문제집도 마침내 끝을 향해갔다. 거실 바닥에 누워 초콜릿을 오물거리던 승관은 어느새 소년 옆에 앉아 수업을 경청했다.
이건 무조건 1번이지. 차니차니 찬찬은 형만 믿어. 단번에 정답까지 유추해 소년의 기회를 뺏는 이기적인 입을 막는다. 간신히 코로 숨 쉴 권리를 얻은 녀석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당당히 손가락을 접었다. 1번에 남은 목숨을 거는 중이었다.
- “우리가 두 달 동안 한 건 여기까지. 더 궁금한 거 있어?”
- “수능 날 긴장 푸는 법?”
- “그건 초콜릿이 대신해 주지.”
- “박스째 먹어도 돼요?”
- “감독관이랑 화장실에서 문제 풀고 싶으면.”
소년이 픽 웃는다. 그만 갈게요. 안 나와도 돼요. 조금은 이른 듯한 작별에 승관이 소년을 끌어안는다. 삼시 세끼 한라봉 먹고 싶으면 삐삐쳐. 처음과 달리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거친 스킨십에도 소년은 미소를 띄웠다. 차분한 고동색 머리가 미래의 잔상에 남는 가을이었다.
- “다른 건 몰라도 영어는 기가 막히게 잘 볼게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문자 해도 되죠?”
- “당장 다음 달부터 오디션 많다면서. 공부할 시간은 있어?”
- “시간은 만들면 돼요. 누나가 나한테 할애한 시간 아깝지 않게.”
영어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드리죠. 반듯한 어깨에 자신감을 실은 소년이 내 앞에 선다. 운동화 뒤꿈치를 꺾어 신는 버릇은 오늘만큼은 제외다. 아쉬운 승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손을 흔들던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며 눈을 맞춘다.
- “이제 대답해 주면 안 돼요?”
……
- “누나는, 괜찮아요?”
지난 여름처럼 같은 자리에서 되묻는 소년에게, 나는 망설이는 입술을 몇 번이고 들썩이다 다문다. 좋아하는 일 하나쯤 있을 거라 소년을 다독이던 내가, 기죽지 말고 힘내라는 말을 달고 살던 내가, 실은 그런 말 할 자격조차 없는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길을 잃어버린 내가 괴로워, 아무것도 아닌 내가 서러워, 소년에게 감히 괜찮지 않다 말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핑계에 숨어 침묵을 지킨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소년은 재촉 대신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나와 반대로 소중한 꿈을 품은 소년은 더 이상 또 다른 내가 아니다. 열아홉의 나보다 큰 아이였으며 별처럼 빛났다.
- “다른 사람한테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묻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에요. 그 사람을 걱정하고 있거나, 아니면 본인이 불안해서 묻는다거나. 자주 잠을 못 자는 누나는 아마 후자에 더 가깝겠죠.”
……
-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는 건 모험 같은 거예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나도 찾기 전까지 모르죠. 설사 찾는다 해도 그 길이 아닐 수도 있고요.”
……
- “남들처럼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누나가 못난 것도 아니고, 누나가 선택한 길이 결국 아니었다고 해도 그건 절대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자책하지 마요. 각자 시간이 다르듯이 아직 타이밍이 오지 않은 것뿐이니까.”
……
- “언젠가 찾게 되면 꼭 말해줘요. 선생님이랑 또 만나고 싶다는 말이에요.”
잘 지내요. 고마웠어요. 소년은 처음 만난 그날처럼 케케묵은 교실 냄새를 남겼다. 이유 모를 공허함에 가슴을 쥔다. 자잘한 후회였다. 소년에게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한 뼘만 더 가까웠더라면, 아니 어른인 척 괜찮다 거짓말이라도 했다면 남겨진 아쉬움에 이토록 가슴이 아팠을까.
- ‘언젠가 찾게 되면 꼭 말해줘요.’
……
- ‘선생님이랑 또 만나고 싶다는 말이에요.’
- “선생님이란 말, 처음 들었어.”
……
- “이름도 제대로 못 불러줬는데…….”
소년은 이듬해 오디션에 합격했다.
무대에서 날고 싶었던 아이의 첫발인 셈이었다.
- ‘이제 대답해 주면 안 돼요?’
……
- ‘누나는, 괜찮아요?’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26. 〈변화>
#56.
코앞으로 다가온 중간고사에 카페에 앉아 노트를 펼친다.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구난방 필기에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결국 인스타로 무료한 시간을 죽였다. 지금은 ‘#승관’, 또는 ‘#우리_천사_승관’을 남발한 석민의 피드에 하트를 누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아옹다옹하던 그들은 이젠 뗄 수 없는 친구가 됐다. 현재 1층 카운터에서 사이좋게 계산을 미루는 것만 봐도.
- “자격증 이제 겨우 하나 땄는데 벌써 2학기인 거 말 안 됨.”
- “난 방학 동안 호텔에서 서빙 했는데 통장에 천 원 있어.”
- “석민, 오백 원만.”
- “너도 돈 없어?”
- “주머니에 있는 오백 원, 네 오백 원 합쳐서 죠스바 사 먹게.”
- “친구 등골은 빼먹지 말어.”
먼저 2층으로 올라와 자리를 탐하던 승관은 구석에 박힌 날 용케 찾아내 기어코 엉덩이를 붙였다. 물아일체세요? 하마터면 책상인 줄 알고 엎어질 뻔. 좋아하는 녹차 맛 음료를 빨아대며 놀리기 바쁜 녀석은 계단 앞에서 신발 끈을 묶는 석민을 부른다. 엉성한 리본 매듭을 자랑하며 달려온 석민이 허연 이를 보였다.
- “여주, 설마 공부해? 같이 재수강하기로 했잖어.”
- “얘 지금 책상에 볼 비비고 있는데 뭔 공부를 해.”
- “펜 잡고 있잖어.”
- “원래 이러고 자.”
그래서 필기가 이 모양 이 꼴이잖냐. 승관이 졸림 체로 휘갈긴 노트를 턱으로 가리킨다. 석민은 이해했다는 듯 작게 주억거렸다. 아직 대항조차 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기가 빨린다. 부석 브라더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얼굴을 돌리자 눈치 빠른 승관의 손가락이 먼저 누군가를 향한다.
저거 이지훈 아니냐. 지금 올블랙으로 들어오는 사람. 승관의 추리에 석민은 엉덩이까지 들어 1층을 확인한다. 맞네! 얼굴 저렇게 작은 사람은 지훈이밖에 없잖어! 석민은 운동화에 묶인 리본을 달랑거리며 지훈을 마중 나갔다. 바로 2층 계단 앞에서 해바라기와 맞닥뜨린 지훈이 어색하게 웃는다. 곧 내 앞에 있는 승관을 보며 인상을 구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연락이란 연락은 다 씹어 대는 이지훈 님께서 김여주 만나러 여기까지 친히 행차를 하시다니요. 부러 큰 목소리로 약을 올리던 승관은 그의 입 모양을 알아차리고는 금세 배를 잡고 끅끅댔다. 대강 죽인다는 뜻이었다.
- “불필요한 관심 감사합니다.”
- “이젠 둘이 공강까지 맞춰 다니고요.”
- “안 바쁘냐.”
지훈에게 눈을 흘기던 승관은 다음 주 술자리는 무조건 나와야 한다 엄포를 박는다. 안 나오면 김여주 새벽까지 잡고 있어야지. 아이스 커피 리필을 외치는 석민을 옆구리에 끼고 멀어지는 녀석에게 그의 삐딱한 시선이 닿는다.
- “쟤 전화와도 받지 마.”
- “같이 술 좀 마셔 줘.”
- “저번에 경찰서에서 같이 해장국 먹었어.”
- “절대 안 받을게.”
새끼를 걸고 다짐하는 내게 어여쁜 반달 눈이 닿는다. 곧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는 그 모습을 참지 못해 입을 맞춘다. 무방비로 당한 그는 되려 멀어지는 나를 잡고 짧게 입을 맞춘다. 푸스스 웃으며 얼굴을 숙이는 버릇이 날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 “정한 형 연락받았어?”
- “응, 월급 들어와서 기분 좋으니까 우리 밥 사주겠다고 소리 지르셨어.”
- “저축 좀 하라니까 조만간 또 거덜 나겠네.”
- “수업 끝나고 같이 갈 거지?”
- “과제 끝나는 거 봐서.”
- “천천히 와, 기다릴게.”
아아, 오후 수업 가기 싫다. 제발 날 잡아 줘. 팔이 긴 니트 소매를 내밀고 어리광을 부리자, 그는 그것을 당기는 척 나를 안았다. 나도 수업 가기 싫어. 잡아줘. 다각으로 주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뻔뻔히 완벽한 사각지대라 정의하며 끌어안는 그가 좋아 지그시 눈을 감는다. 흠뻑 베이는 비누 향에 묻혀 죽고 싶은 나였다.
#57.
창가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손을 흔든다. 동그란 안경이 어울리는 남자는 ‘윤정한’ 이름이 적힌 가운 대신 사복 차림으로 나를 반겼다. 자신 있게 카드를 흔들며 메뉴판을 훑던 그가 지훈의 부재에 팔자 눈썹으로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지훈이 스테이크에 환장하는데 우리만 먹고 떠 버리자. 감히 사촌다운 발상이었다.
- “학교 대빵 나무는 아직도 잘 있나?”
- “본관 앞에 있는 나무요?”
- “그거 소원 이루어 주는 나무잖아.”
A대 의과 졸업생인 그는 캠퍼스 중앙을 지키는 아름드리를 소원 나무라 불렀다. 새벽에 소원을 빌고 나무를 만지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전설을 믿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의과대 마지막 시험 전날 교수의 설사를 빌며 나무를 만진 그는 시험 당일 엉덩이를 잡고 급히 시험장을 빠져나가는 교수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너스레를 떨었다.
- “의사 쌤은 소원을 무슨 그런 데다 빌어요.”
- “교수가 나만 보면 얼굴로 진찰할 거냐고 별 트집을 다 잡았다니까.”
- “복수 제대로 하셨네요.”
- “얼굴값은 그럴 때 하는 거거든.”
그가 와인 향을 맡는다. 붉은 잔에 비친 한강이 일정한 속도로 흘렀다. 곧 겨울이 되면 종적을 감출 물줄기의 생을 애도하며 추위에 몸을 움츠렸다. 이번 겨울은 빨리 오려나 봐요. 오랜 시간 창밖으로 던진 시선을 마침내 거둔 까닭은 부러 자리를 마련한 상대방의 조심스러운 목소리 때문이었다.
- “그때 이모가 무례하게 굴었던 거 대신 사과하고 싶어. 본인 아들 끔찍이 아끼는 양반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네가 무모한 기준으로 판단된 것 같아서 내내 신경 쓰였거든.”
……
- “이제 와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이기적인 거 알아. 대신 곱씹지 않았으면 해. 그런 말로 지훈이랑 멀어지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그건 지훈이도 마찬가지일 거야.”
여태껏 버리지 못한 망가진 구두가 스친다. 좋아하지 않는 와인을 억지로 삼키며 잊으려 하나, 그럴수록 목구멍을 휘감는 이물감에 입술을 막았다. 손등에 남은 붉은 립스틱, 붉은 자국, 그리고 붉은 장미. 생각의 회로는 꽤나 얄팍한 것이라 순간마다 굴절이 심했고 그것은 약한 주체를 지배하기에 가장 쉬웠다.
- “다 사실이었잖아요. 전 남들 다 가는 교환 학생이나 유학 같은 거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졸업 계획도 없어요. 당장 내일 목표도 없이 사는걸요. 굳이 말하면 제 의지와 상관없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억지로 정해진 목표 같아요.”
……
- “오래전에 제 친구가 그랬어요. 살아있어도 죽어 있는 것 같다고. 그땐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매일 빈 마음으로 살아있는 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고 채우고 싶어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라는 걸요.”
……
-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외면한 걸 수도 있어요. 이런 제가 지훈이 옆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모든 걸 이겨낼 수 없다는 거.”
……결국 이렇게 불행해질 걸 알면서도 지훈이를 욕심낸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58.
불행의 시작은 한쪽 부모를 잃고 나서부터였다. 엄마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고 그녀 대신 집에서 일하는 아빠와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특히 그의 목마를 타고 언덕에 솟은 나무에 손을 대보는 일을 가장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곳에 손을 대고 눈을 감으면 세상이 꼭 내 것만 같아 형용할 수 없는 벅참에 가슴이 뛰었기 때문이라.
- ‘우리 집에는 행복 나무가 있어요.’
……
- ‘……저는 행복해요.’
가정에 소홀한 그녀와 갈등을 이기지 못한 그는 집을 나갔다. 해가 질 때쯤 홀로 언덕에 올라 그를 기다렸지만 짙은 어둠만이 그림자를 쫓았다. 이사 가는 날 힘없이 베어지는 나무를 보며 울음을 참았다. 정말 울게 되면 꿈에서조차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아서.
- “내 옆에 있어 주겠다 약속했던 은수마저 죽어 버렸을 때 알게 됐어요. 난 행복하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행복하면 벌을 받는구나. 평생 행복을 모르는 인생이 어쩌면 나을 수도 있겠다.”
……
- “행복해지지 말자. 더 이상 불행해지지 말자. 지훈이를 만나서도 계속 그랬던 것 같아요. 이제 놓아줘야 하는데, 이러다 정말 벌 받을 텐데, 언젠가 지훈이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제 욕심에 지금까지 놔주질 못했어요.”
……
- “트라우마 같은 거예요. 죽을 때까지 깰 수 없는.”
종국에는 끊었던 약을 먹고 잠에 들다 벌건 눈물을 흘린 것도 허다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지훈이와 나란히 걷는 발자국을 지워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빌어먹을 생각이 뇌를 먹는다. 우주에 버려진 잔해처럼 목적 없이 떠다니는 존재가 거울 속 표정 없는 육신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새벽달은 퍼런 눈물을 훔쳤다.
아빠와 은수로는 부족했었니.
지훈이를 운명에 가둔 건 너야
욕심내지 않았다면 스쳐 지나갈 사람을 네가 억지로 잡아버린 거잖아
걘 떠날 거고 너는 또 울게 되겠지
철저히 외면했던 비겁함과 나사 빠진 마음과 되어 먹지도 못한 운명에 스스로 목을 죄인다. 끝내 새벽을 지새운 과거의 눈물이 모여 뺨을 적신다.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고 묵묵히 울음을 듣던 그가 손수건을 꺼낸다. 귀퉁이에 수 놓인 무지개가 젖는 건 한순간이었다.
- “떠날 거니?”
- “……남겨질 거예요. 제가.”
남겨진다는 것. 마음에 고열이 시달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걸 잘 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흉터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고 그곳에 대기만 해도 아픈 것과 같다. 분명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또한 내 몫이라는 것도. 또다시 버려질까 비겁한 내가 먼저 손을 놓는다.
- “이번엔 먼저 안녕이라 말할 수 있잖아요.”
- “…….”
- “그 정도면 충분해요.”
은수의 머리맡에 국화를 두고 온 그날, 언젠가 그를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망설임 없이 그러겠노라 약속했던 스스로를 떠올린다. 훗날 나와 함께 어둠에 잠기지 않고 빛을 따라갔으면 했고 나와는 반대로 걷길 소원했다. 참아지지 않는 울음을 지켜보던 그가 마침내 입술을 뗀다. 강물의 흐름처럼 고요했고 또한 깊었다.
- “예전에 지훈이가 응급실로 누군갈 업고 달려왔을 때 느낀 건 딱 하나야. 아마 저 애가 지훈이를 살리겠구나. 꽃이 다 지기 전에 죽고 싶어 하는 내 동생을 지켜주겠구나.”
……
- “겉으로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넌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훈이를 지켰어. 네 옆에 있고 싶어 하고, 얘기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살고 싶어 했으니까. 네 마음이 확고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분명한 건 무작정 보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야.”
……
- “세상엔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어. 트라우마에 먹히는 사람도 있고, 그걸 이기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 난 여주가 후자였으면 좋겠어. 너를 위해서, 지훈이를 위해서라도.”
그때처럼 이번에도 네 선택이네. 스텝으로부터 안내를 받으며 다가오는 지훈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젖은 눈가를 닦아내고 환히 웃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찰나의 감정을 숨기는 건 몸에 베인 습관처럼 지독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 막혀버린 생각은 떨쳐낼 수 없다.
- “벌써 끝났어?”
-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다시 돌아오거나.’
- “왜 문자 답장 안 해.”
- ‘트라우마에 먹히거나, 그걸 이기고 돌아오거나.’
- “나 보고 싶었지.”
- ‘이번에도 네 선택이네.’
#59.
캠퍼스 벤치에 앉아 맥주 캔을 부딪친다. 새벽달,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 입가에 부러 거품을 묻히고 입술을 내민다. 이윽고 입을 맞추며 눈꼬리를 살랑거리는 그가 달빛이 된다. 자신의 입가에도 나와 같은 거품을 뭍이고 장난스레 눈을 감는다.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지금이고 싶었다.
- “그래서 언제 결혼하신 건데?”
- “한 달 전쯤.”
- “……언니는?”
- “해외로 발령 나서 저번 주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십 년을 만났는데 타이밍 한번 죽이지. 그의 짙은 한숨이 흩어진다. 건축 집안에서 돌연변이로 낙인찍힌 ‘윤정한’이란 사람은 가족에게 눈엣가시인 존재였다. 맘대로 진로 결정을 한 것도 모자라 고작 방송국 기자 만나려 예과에 본과에 그 고생을 했더냐는 물음들은 늘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결국 그녀를 떠나게 만든 이유였다.
처음부터 다른 지위와 출발선은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차갑게 돌아선 그녀를 생각하며 지훈은 작게 실소했다. 마지막까지 윤정한을 위해 떠난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고.
- “사람은 한 번 잃으면 다신 안 온다더니.”
- “…….”
- “왜 그랬을까.”
혀끝에 씁쓸함이 맴돈다. 내가 그녀가 되고 지훈이 그가 될 수 있는 어느 가까운 미래, 그때의 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숨을 뱉는다. 그를 보내는 것이 정녕 맞는 걸까 곱절을 생각해도 정답은 오직 하나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는 건 아버지와 은수면 충분하다. 우리 사이에 이별이 와야 한다면 그건 내가 먼저 끊는 게 맞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더는 버틸 자신이 없어 먼저 보내는 것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라고.
- “윤 쌤이 그러는데 저 나무 소원 들어주는 나무래.”
- “완전 뻥 같은데.”
- “아무도 없으니까 가서 소원 빌어 보자.”
탐탁지 않은 눈으로 끌려오던 그가 나중에는 앞장서 내 손을 그러쥔다. 거북이가 친구 하자고 오겠다. 실은 느릿한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는 내가 마땅치 않았던 거다. 나무 울타리 밖에 앉아 남은 맥주를 들이켠 그가 살며시 눈짓한다. 소원의 타이밍은 지금이라고.
- “제 소원은요.”
- “소원을 말로 하면 안 되지.”
- “마음으로 하면 네가 들을 수 없잖아.”
- “내가 들어도 돼?”
그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합장한다. 내가 먼저 빌게. 이윽고 조용히 눈을 감고 나지막이 소원을 말한다. 오늘부터 여주는 잘 자고 잘 먹고 잘 웃게 해주세요. 진지한 얼굴로 어린아이처럼 소원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터지고 만다. 소원 빌 땐 집중 해야지. 뻥 같다던 소원 나무에 집중하라는 귀여운 얼굴에도.
- “제 소원은…….”
- ‘트라우마에 먹히는 사람도 있고, 그걸 이기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
……
- ‘난 여주가 후자였으면 좋겠어. 너를 위해서, 지훈이를 위해서라도.’
- “……다시 돌아오게 해주세요.”
다시 지훈이를 만나게 해주세요.
Epilogue.
대문 앞 아카시아가 몸을 떠는 밤, 지훈은 식사 자리에서 도망치듯 가버린 여주의 그림자를 좇는다. 정한은 옆에서 지훈의 안색을 살폈다. 당장 뒤엎지 않으면 안 될 표정에 정한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유는 겉보기가 충실한 지훈의 ‘모(母)’였다.
도통 연락을 받지 않는 여주에 지훈이 미간을 구긴다. 결국 꿈속을 헤매던 승관이 그의 부탁에 다급히 외투를 챙겼다. 김여주 뭔 일 있으면 죽는다. 승관의 협박에도 지훈은 입을 다문다. 가죽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를 발견했음이라. 마침내 책갈피를 꽂은 그녀가 찻잔에 입술을 댄다. 지훈과 마주한 지 30분이 지난 후였다.
- ‘정확한 목표도 없어, 그렇다고 열심히 사는 애도 아니고, 집안도 그리 좋지는 않지. 이혼 가정에서 자라면서 뭘 배웠겠니. 그런 애는 이쯤 정리하는 게 맞다. 넌 다른 사람이잖니.’
- ‘적어도 대화를 하셨어야죠. 일방적인 질문만 하셨잖아요. 정확한 목표가, 열심히 사는 기준이 대체 뭔데요? 집안이 어떻고 이혼이 뭐 어때서요?’
- ‘네가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집에는 적어도 비슷한 수준을 데려와야 대화를 하지 않겠니? 그동안 쌓아왔던 건 아깝지 않아? 정한이 보고도 그래?’
- ‘어려서 잘 몰라도 어려서 솔직할 순 있죠. 죽어야만 끝나는 고통인지 괴로워할 때 아무도 제 옆에 없었어요. 다른 애들이 너무 힘들다고 부모한테 털어놓을 때, 저는 제 정신이 약해 빠진 거라고 비난하는 부모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구요.’
공허한 기억, 지훈의 목소리가 떨린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 이제 그만 놓아도 되는 건지, 숨을 멈춰도 되는건지……. 불 꺼진 방안에서 지훈은 늘 괴물들과 싸웠다. 한계에 다다르면 숨죽여 울었고 새벽이 되면 핏줄 터진 눈으로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목을 그었다.
- ‘죽고 싶어 했던 거 이미 아셨잖아요. 저 몰래 정한 형이 불쌍한 지훈이 좀 지켜 달라고 울면서 말했잖아요. 그래서 대학도 전공도 내버려 두신 거 아니에요? 억지로 시켰다가 자살할까 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안에 오점 남기는 게 두려워서.’
- ‘너 지금 부모 앞에서 할 소리니?’
- ‘부모 앞이니까 말하는 거예요. 예전에 죽었어야 하는 제가 여주 때문에 산 거예요. 걔 없었으면 저 여기 없어요. 벌써 죽고 없다구요. 그동안 쌓아왔던 거요? 지금이라도 없애 드려요?’
- ‘이지훈!’
- ‘정한이 형 결혼식 보셨잖아요!’
그녀가 질끈 눈을 감는다. 지훈은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나를 이해해 주세요.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줄곧 방안에서만 맴돌던 목소리가 마침내 그녀에게 향한다. 문밖 정한의 그림자가 서서히 멀어진다.
- ‘형은 아직도 누나 좋아해요.’
……
- ‘제발 저한텐 억지로 그러지 마세요.’
……
- ‘……제발.’
*
10월의 겨울이었다. 정장 차림의 지훈이 빌딩 테라스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어깨를 잡는다. 말끔히 넘긴 머리와 반듯한 턱시도가 매력적인 남자가 지훈에게 담배를 건넨다. 돛대 끌리지. 지훈이 담담히 고개를 젓자, 남자는 입술에 담배를 물고 그의 허리를 당긴다. 어딘가 있을 법한 라이터를 찾는 것이다.
- ‘윤정한 죽는다.’
- ‘부끄러워하기는’
- ‘놓으라고.’
- ‘없어? 진짜?’
- ‘안 펴.’
- ‘끊었어?’
- ‘원래 안 핀다고.’
정한의 입술 끝에 걸린 담배가 바람에 흔들린다.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정한이 지나가는 남자에게 불을 빌리며 호탕하게 웃는다. 현실과 상반되는 얼굴이었다. 가을인데 날씨는 겨울 같다. 담배를 빨아들이는 정한이 자욱한 연기를 뿜는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지훈의 얼굴이 사납다.
- ‘결혼하기 딱 좋은 날씨.’
- ‘진짜 할 거야?’
- ‘왜? 나랑 손잡고 도망이라도 갈래?’
- ‘내가 누나냐.’
- ‘없잖아, 이제.’
깊은숨을 빨아들인다. 짙은 안개가 정한의 주변을 서성였다. 차가운 테라스 벽에 등을 기댄 지훈의 시선이 정한의 옆모습을 훑는다. 빈 껍데기 같다. 지훈은 이렇게 생각했다. 희미한 연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는 정한은 텅 빈 껍데기였다.
- ‘버틸 자신 없다고 우는데 거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해. 사랑해서 보내줬다는 뭣 같은 삼류 소설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
- ‘십 년 동안 날 버티게 해준 사람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데 참 밉더라. 정리하는 게 그렇게도 쉬웠을까.’
타다 만 담뱃재가 흩어진다. 지훈은 메마른 얼굴을 쓸어내릴 뿐 아무 말이 없다. 정한이 억지로 등에 떠밀려 여기까지 온 건 지훈의 모(母) 역할도 컸다. 집안에서 그녀의 입김은 무시할 수 없어 정한의 부모도 겉보기에 특출난 그녀와 손을 잡은 거라. 헤어진 지 두 달 만에 초고속 강제 결혼, 정한은 자신의 처지를 저 한 문장으로 압축하곤 했다.
- ‘너는 잘 만나고 있어?’
- ‘누구.’
- ‘형의 마이다스 같은 손으로 기적을 일으킨 네 친구.’
지훈이 여주를 업고 병원에 달려온 날을 기억하는 정한이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여주를 바로 옆에서 걱정하던, 지금보다 조금은 앳된 지훈의 얼굴이 정한이 뿜어낸 담배 연기에 잠시 머문다.
- ‘가벼운 몸살감기였다면서 기적이라니.’
- ‘모든 병의 회복은 다 기적이지.’
- ‘그래.’
- ‘은혜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전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지훈씨.’
지훈은 억울해 보이는 정한을 달래며 뒤늦은 고마움을 표한다. 그때 형이 웃으면서 여주한테 주삿바늘 넣을 때 이지훈이 너무 무서웠다고 전해 달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나한테 해. 지훈의 장난 어린 말투에 정한이 픽 웃으며 담배를 꺼트린다. 그리고 삐뚤어진 지훈의 넥타이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다. 얼마 남지 않은 진짜 정한의 모습이었다.
- ‘잘 지켜.’
- ‘…….’
- ‘지키지 못하면 이 자리 다음 순서는 너야.’
빌딩 전체에 식이 곧 시작한다는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지훈이 정한의 매무새를 정리한다. 윤정한, 긴장하지 마. 하기 싫으면 소리 질러. 덩달아 긴장한 지훈의 목소리에 정한은 그저 미소 짓는다. 단지 제2의 자신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
- ‘오늘 내 뒷모습 예술이니까 빼먹지 말고 사진 좀 찍어. 나중에 프린트해서 환자분들 병실에 붙여 놓게.’
- ‘그 사람들도 눈이 있을 텐데.’
- ‘멋짐을 왜곡하는 건 굉장한 실례란다.’
정한이 점점 멀어진다. 지훈은 식이 시작한 뒤로도 정한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한참을 머물렀다. 정한이 태운 담뱃재가 한강을 향했다. 흩어지는 조각은 각자 어디서 잠이 들까. 텅 빈 테라스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는다.
- ‘잘 지켜.’
……
- ‘네가 지키지 못하면 이 자리 다음 순서는 너야.’
정한이 담배를 다시 태우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이었다. 병원 옥상에서 홀로 불을 붙이던 정한은 무엇을 태우려 했을까.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한 입술이었는지,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었는지, 혹여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멍청한 기대심이었는지.
- ‘지훈아,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
- ‘대신 지키려 약속은 할 수 있지.’
……
- ‘난 그걸 못 했을 뿐이야.’
식장에서 바라본 정한의 뒷모습은 그의 말처럼 예술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과 허망이 서린 어느 남자의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