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
소스라친 눈동자를 자각한다. 비가 내리는 새벽이었다. 침대 밑에 웅크린 젖은 몸은 진정제를 삼키다 왈칵 눈물을 쏟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숨 쉬는 것이 괴로운 좀먹은 정신은 매사 후회를 안고 발버둥 쳤고, 종국에는 약을 먹어야만 잠이 들었다. 거세지는 비가 창을 뚫고 목까지 밀려 들어올 것 같은 환상은 지훈을 버린 그날부터 시작됐다.
- ‘……거짓말.’
앙상한 가지만이 남는 계절에도 떨쳐낼 수 없는 목소리가 뺨을 적신다. 어스름한 새벽달도 과거의 퍼런 눈물을 흘리며 발광했다. 거울 속 비어버린 육신은 더는 슬퍼할 이유도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여태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마음과 질척한 후회 때문이었다.
- ‘지훈이를 버렸어요. 떠나보낸 게 아니라 제가 버린 거였어요.’
……
- ‘꿈속에서 지훈이가 매일 울어요.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정신과 상담을 재개한 건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이번 만큼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제 발로 찾아온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 의사는 태연히 안부를 물었다. 본래 괜찮음의 여부로 오로지 두 개의 선택지만 가지고 있던 나는 아름드리 앞에서 빌었던 소원을 이루고 싶다는 대답으로 과거를 지웠다. 으레 바닥에만 고정된 시선이 진료 기록을 더듬는 의사를 향한다. 나를 고쳐주세요. 이 한마디를 위해서.
처음부터 되감아야 하는 거북하고 불편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지금까지 놓지 못했던 건, 아빠와 은수에 대한 미련과 애증과 두려움이 엉킨 질긴 감정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었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살아있는 내가 죽은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그 먼 길을 돌고 돌아 지훈을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는 허무함에 글썽인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 흘러가는 시간이 전부였다.
- ‘언제 떠나신다고 하셨죠?’
……
- ‘약은 장기로 처방해 드릴게요.’
다음 달부터 해외 출장이 잡힌 엄마는 휴학 소식에 말도 없이 두 장의 티켓을 끊었다. 평소 가벼운 설득으로 의견을 압살하길 좋아했던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만큼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담담함을 핑계로 용서를 구했다. 어디 저수지에 빠져 죽어버릴 줄 알았나 보다. 그간 아빠의 일도 그녀의 무관심도 참아내던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펑펑 울었으니 말이다.
오래된 장소를 떠난다는 건 버거운 일이었으나 정리할 곳이 간절했던 나는 최소한 김여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내 약점을 알고 눈물을 알고 나약함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이를테면 지훈과 승관이 존재하지 않는 머나먼 지상으로.
색이 없는 캠퍼스는 괴괴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눈 내리는 창밖을 주시한다. 똑같은 사람과 장면이 반복되는 것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으니 짐짓 바깥으로 눈을 돌려 결정체의 의미 없는 크기를 쟀다. 작은 것과 작은 것. 더 작은 것과 덜 작은 것. 시야로 판별할 수 없는 것들에 기준을 내리며 진득하게 따라붙은 상대방의 시선을 피한다.
올가을부터 시작한 면담이었으니 이번만 해도 족히 대여섯 번은 되었다. 호텔 건물 모양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아 휴학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써볼까 하다, 신청서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접수할 수 없다는 조교의 단호함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진로 변경’을 택했고, 그 잘못된 선택에 현재까지 없는 시간을 낭비하며 시달리고 있었다. 어떤 이유를 선택하든지 낭비될 시간이었으나 진로 변경은 구질구질의 밑바닥이었다.
휴학 신청서를 받아 든 교수의 일방적인 회유가 타박이 되고 그 타박이 공격이 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나의 일관된 태도였다. 선택한 전공을 진실로 하고 싶어 온 사람들이 몇 명이 되겠냐는 질문 따위는 오래전에 버렸으니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창밖으로 거세지는 눈발이 두려워 더 깊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오후로 넘어가는 열두 시를 기점으로 교수의 폭언이 체념으로 돌아섰다. 문밖을 나설 때까지 결정에 대해 얄팍한 후회 따위 일절 하지 말라는 교수의 목소리가 발목을 감는다. 식사 약속이 급한 상대를 위해 복잡한 인사말 대신 가벼운 묵례로 긴 이별을 건넨다. 교수는 뚱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종강을 앞둔 학교는 소강상태였다. 교수실 앞에서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승관이 금세 다가와 콧잔등을 비빈다. 얼어 뒤지는 줄 알았네. 펭귄만 있으면 최소 남극이다. 양팔을 다리에 붙이고 뒤뚱거리는 녀석이 호탕하게 웃는다. 겨울에는 필히 검은색 머리로 학우들에게 어필하고 싶다던 녀석은 되려 명도를 높였다. 매일 덜떨어진 누구를 걱정하느라 흰머리가 생겨 평생 어두운색은 포기해야 한다는 건 보나 마나 날 두고서 하는 말이었다.
- “넌 진짜 멍청해.”
- “알아.”
-“그래도 다시 와라.”
- “너 올쁠 맞으면.”
- “안 온다는 말을 꼭 돌려서 해야겠냐.”
나란히 본관 계단에 앉아 침묵을 지킨다. 농담이 적어도 서너개 쯤 오갔어야 할 시간은 아무 말이 없다. 서로의 시선도 각자였다. 직접 묻진 않았지만 승관은 지훈과 헤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차하면 빈 강의실에 혼자 엎드려 울거나 오가지 않는 비상구 계단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창밖을 보는 날이 많아졌으니 눈치가 젬병이 아니고서야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승관은 이후로 지훈이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하는 적도 있었으나 거의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았다.
오래된 관계의 독은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거였다. 녀석은 헤어진 이유를 묻기보다 지금처럼 내 옆에 앉아 위로했다. 그래서 울지 못했고 더더욱 감출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너 없으면 무슨 낙으로 학교 오냐.”
- “학교를 낙으로 다니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걸.”
- “불가사리 들어가서 김여주 후크송이나 만들려고 했는데 주인공 없으면 그게 무슨 재미냐.”
계선배의 질긴 노력 끝에 극적 타결을 맺은 승관은 지난달부터 석민과 함께 보컬 자리를 쥐었다. 대학 가요제는 부석이 따놓은 당상이다 칭찬하는 선배보다 김여주 욕 한방이 실력 향상의 지름길이라는 농담을 던지던 승관은 누그러진 분위기에 차츰 입술을 들썩였다. 쉽게 잊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 “정말 안 물어봐?”
- “…….”
- “이지훈.”
그의 소식을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들리는 건 많았다. 강의실과 작업실에 박혀 단절된 사람처럼 살다, 이젠 먹지도 못하는 술에 잔뜩 꼴아 계선배와 민규의 부축을 받아야 하고, 자취방 문 앞에 주저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듯 밤을 새며 떠나지 못하는 것까지도.
한번은 윤 쌤이 안부를 핑계로 학교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본가에 억지로 데려오면 며칠 동안 죽은 듯이 잠을 자거나 새벽에 테라스로 나가 몸을 웅크리고 눈물에 젖는 일이 허다하다는 그를 제발 살려 달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이별을 고하던 나를 죽이고 싶다가, 부재중으로 남겨진 이름이 미치도록 사무치다가, 그를 버려야만 했던 이유를 떠올리다가, 나를 바라보는 선명한 눈빛을 상기하다가……. 이토록 처절하게 흔들리던 내가 승관의 물음을 애써 외면한다.
겨울의 초입새, 지훈의 소식이 끊겼다.
그는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OH MY RAINBOW
Chapter 27. 〈어떤 미래>
; 당신이 내게 남긴 것들
#64.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본관 옥상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새벽엔 아름드리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보는 뒷모습을 기억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 같이 괴담이 되어 거짓의 살을 입혔다. 날짜가 변할수록 찾는 그림자만 늘어날 뿐, 정작 찾고 싶은 그림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더불어 행방을 모르는 것보다 더욱 비참했던 건, 기억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번호를 누르지 못하는 남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무력함은 이른 아침 캠퍼스에 앉아 기숙사 짐을 싣는 바퀴 따위를 관찰한다. 시간을 죽이고 의미를 죽이는 것들을 골라 자신을 죽인다. 명백한 살인죄였다.
- “김여주.”
……
- “……야.”
승관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각한 휑한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다. 종강의 기쁨도 잠시, 자질구레한 짐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석민은 마지막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손을 털었다. 승관의 외투까지 뒷좌석에 밀어 넣고 기지개를 켜더니 시동 걸린 자동차의 매캐한 연기를 그대로 먹고 목을 부여 잡았다.
여주, 잘 지낼 거지? 까끌거리는 목으로 더한 걱정을 쏟는다. 곧 눈물 많은 아이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흐느끼며 승관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헤어짐에 나약한 인간은 약육강식 사회에서 잡아 먹히기 십상이라는 독한 말을 뱉는다. 울음을 부추기는 꼴이 된 승관은 서러움을 뿜는 석민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 “같이 타고 가지 그러냐. 짐은 어제 다 부쳤다면서.”
- “오후에 학과실 한 번 더 들려야 돼. 휴학 때문에.”
- “끝나면 집으로 가는 거지?”
- “……응.”
겹겹이 쌓인 거짓은 순간마다 부피를 달리했다. 끝내 친구에게도 떠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재차 확인하는 승관의 얼굴을 부러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 된 확신에 넘어간 녀석은 조수석 창문을 내려 팔 위에 턱을 얹는다. 연락해. 먼저 갈게. 장난기 많은 얼굴. 내 친구. 손을 흔드는 지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멀어지는 그들이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다, 녀석이 남긴 발자국과 반대 방향으로 길을 올랐다. 보이지 않는 지훈의 숨을 따라가지 못한 무력한 나는 이윽고 열매를 털어낸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몇몇 이들이 봤다던 그가 정말 이곳에 있었다면, 하늘이 욕심 많은 날 괘씸히 여겨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를 볼 수 있게 해준다면.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에 매달고 거세지는 눈발을 맞는다.
- [범주 형 이지훈 잡았대 둘이 지금 같이 있어]
……
- [너한테 얘기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보낸다]
승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선배의 이름이 휴대폰을 울린다. 이기적인 욕심을 매달던 나는 사라지고 그저 망설이는 겁쟁이만 남는다. 차가운 계절 속에 벌게진 손끝은 부재 하는 번호를 방관했다. 그리고 마침내 갈등의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죽음을 뒤로하고 그를 향해 뛰어가던 그 눈밭을 다시 달렸다.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 욕심부렸던 날 위한 하늘의 마지막 배려였다.
#65.
쾌쾌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어지러운 벽에 기대 담배를 빨아들이던 선배는 앞에 선 그림자를 응시하다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지훈 개새끼야 일어나. 네가 보고 싶어 뒤지겠다는 사람 왔는데 잠이나 쳐 자고. 실핏줄이 터진 눈을 벅벅대며 테이블에 엎어져 간신히 숨을 뱉는 그를 깨운다. 선배는 거칠게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는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테이블에 벌인 술병과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면 얼마나 마셨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선배는 피곤한 듯 꽤나 긴 하품을 했다.
- “지훈아.”
- “…….”
- “너 인마 지금 일어나야 돼.”
연락을 끊어버린 그가 걱정된 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종강 전날 외상값을 치르러 들린 가게에서 혼자 잔뜩 꼴아 술을 기울인 그를 발견한 선배는 손을 뿌리치며 가게를 나서려던 그를 잡아 지금까지 가둬 둔 상태였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으면 업어서라도 집까지 데려다줄 목적으로 그를 지키던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 “민규 아직 학교에 있으니까 끝나면 불러서 얘 좀 눕혀라.”
- “…….”
- “너도 잠은 좀 자고 다니고.”
밖으로 사라지는 선배의 등 뒤로 자욱한 안개가 찼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나뒹구는 술병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참담했다. 눈언저리에 얼룩진 눈물과 마른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도 나와 같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참히도 서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젖어 들고 이내 희미한 물체를 쫓는 눈동자가 울먹이는 날 향할 때, 천천히 테이블에 엎드려 그를 마주한다. 꿈과 현실, 그 경계 어디쯤 서 있는 채로.
- “……안녕.”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꿈을 헤맨다. 나처럼 아득한 그곳을 방황했다. 뒤틀어진 시간을 잡지 못하는 그도 역시 시한부였다. 하늘이 준 마지막 배려의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곧 떠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은 살며시 그의 뺨을 감싸 남은 온기를 나눈다.
- “거짓말인 거 알면서 왜 보냈어?”
- “네가 슬퍼하니까.”
- “……”
-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울잖아.”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떠나보낸 것이 아닌, 그가 나를 떠나보내며 생각했을 곱절의 시간까지. 서로 상처를 주는 것에 서툴던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는,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기 직전에 서 있는 우리는…….
- “마지막 소원, 들어 줄게.”
- “…….”
- “말해봐.”
점차 느려지는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손을 뻗는다. 그 순간이, 그 순간의 우리가, 그 순간 틈 사이 비추던 처참한 빛이 서로를 향한 화살이 되어 심장부에 박힌다. 어떤 미래도 약속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를 위한 마침표를 찍는다.
- “날 기다리지 않는 거.”
……
- “그래야 우리가 살아.”
그가 반지를 빼내는 손을 거칠게 움켜쥐고 애처롭게 운다.
술기운에 속절없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잡으며 틔워낸 목소리는 그 후로도 매일 밤 젖은 꿈을 따라다니며 날 울게 했다.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달음박질로 가게에 도착한 민규가 지훈을 부축한다.
이윽고 문밖을 나서는 발자국이 멀어진다.
그 발자국을 따라 조용히 걷던 나는
더는 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등을 돌렸다.
지독한 겨울이었다.
지훈아
사계절이 예쁘다는 걸 너를 보면서 알았어
비만 잔뜩 오는 내 세상에 어느 날 벚꽃이 내렸고 파도가 일렁였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고 따뜻한 눈이 내렸어
우산이 되어줘서 고마워
햇살이 되어줘서 고마워
……날 좋아해 줘서 고마워
두려운 것이 많았고 왜곡됐고 그래서 온전히 네 마음을 받을 수 없던 내가
만약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때도 널 만나고 싶어
다시 후회하고 절망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널 좋아하고 싶어
네 목소리에 꿈에서 깨면 버리지 못한 그날이 찾아와
너의 눈, 너의 온도, 불었던 바람, 그 바람에 실려 온 너의 눈물까지도
나약했고 비겁했고 쉽게 흔들렸던 내가 괜히 널 보냈을까
겹겹이 쌓인 이불 속에서 젖어가는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까지 후회하고 또 후회할 나는……
……너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네가 없는 난 가끔 죽은 별이 떠 있는 검은 바다를 삼켜
나는 투명한 시체가 되고 검게 물들어가
그럼에도 살고 싶은 나는
오늘도 네 꿈을 꿔
사랑한다는 네 목소리가 영원히 반복되는
내 세계에서
우리가 또 다른 우리가 되어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땐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널 사랑할게
그때가 되면 너도 날……
운명처럼 사랑해줘
Epilogue.
학생! 아유, 또 학생이여? 경비원의 목소리가 아파트 단지를 울린다. 차디찬 현관 앞에 주저앉은 지훈은 금세 고꾸라지며 술에 취해 뜻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연신 기침을 해댔다. 경비원은 그를 부축하며 어딘가 익숙한 전화를 걸었고 저 멀리 한파와 맞지 않는 슬리퍼와 함께 달려오는 승관이 부리나케 고개를 숙였다.
- “아니, 이 학생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가?”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 “노런 풀 때기를 왜 자꾸 가져오는 거여?”
상대의 호통에 승관의 키는 작아져 간다. 해가 짧아진 어느 저녁이었다. 벌써 두 달째 접어든 지훈의 고질적인 습관에 승관은 퍽 열이 받았다. 받지 않는 술을 한꺼번에 마시고 몸이 기억하는 대로 여주의 집 앞까지 와서 목적을 달성한 사람처럼 쓰러지는 것이다.
두달 전 지훈을 처음 본 경비원은 더 이상 그녀가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살살 타일렀지만, 그는 다음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계단에 웅크려 살을 태우는 추위를 견뎠다. 그때마다 승관은 머리를 조아렸다. 절대 미친놈은 아니니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 달라는 자존심 꺾이는 부탁까지 하면서. 주민 신고가 두려운 경비원은 승관의 손을 잡는다. 승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작작 하라고 새끼야.”
승관의 욕사발에 지훈은 실소를 터트렸다. 승관은 벌겋게 얼은 자신의 발가락을 감싸 쥐고 한파에 동사를 갈망하는 지훈을 안타까이 바라봤다. 얼어버린 손에 굳어가는 프리지아를 품에 안은 지훈은 다 꺼져가는 체온마저 나누는 중이었다. 여름에는 구하기가 어렵다던 것을 이젠 발에 채이듯 볼 수 있으니 그에겐 꿈 같은 일이었다. 그것을 좋아하던 그녀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으니 말이다.
- “그때 잡지 그랬냐.”
- “……보내 준 거야.”
- “병신아, 네 꼴을 보라고.”
- “다시 오라고…… 보내 준 거라고…….”
그해 지훈은 심한 감기를 앓았다. 갈라지는 목으로 피를 토해내듯 아파했다. 덩달아 먹지도 못하는 술을 몇 날이고 들이부었으니 그 속도 알만했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그를 부축한 승관이 차가운 벽을 짚는다. 정한에게 끌려가 병실에 갇혀 있고 싶냐는 협박에도 지훈은 묵묵부답이다. 대신 꿈을 헤매는 목소리가 그녀를 그렸다.
- “보고 싶어.”
- “지랄하지 마.”
- “……보고 싶다.”
가볍게 지훈을 들쳐 업은 승관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다. 미친 새끼, 수면 양말이나 왕창 뜯어내야지. 승관의 말마따나 미친놈을 매달고 미끄러운 빙판길을 걷는 건 올겨울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눈 내리는 세상이 죽도록 싫은 승관은 골로 가기 직전인 엄지발가락에 기도하며 아파트 단지 공원을 가로질렀다. 어느새 지훈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스친다.
- “김여주 오기만 해라.”
……
- “진짜 가만 안 둬.”
승관은 애써 감정을 환기한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 건 승관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이 꺼져 있는 것도 잠시, 존재하지 않는 번호에 넋이 나간 승관은 곧바로 그녀의 집에 뛰어가 문을 두드렸으나 텅 빈 그곳엔 애석한 흐느낌만 남을 뿐이었다. 제 부모에게 물어봐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였다. 승관으로부터 그녀의 부재를 받은 지훈은 그때부터 반쯤 정신을 놓아버렸다. 냉정했고 이성에 능숙했던 지훈은 그렇게 무너졌다. 우는 얼굴이 익숙할 정도로.
- “야, 지훈아. 나 어제 라디오 디제이 이력서 내고 왔다.”
……
- “저번에 안 쓰는 메일 확인하다가 파일 하나 왔길래 봤더니 학생 꿈나무 디제이 그런 거 뽑는다는 공고문이었거든.”
……
- “발신자도 없이 그것만 딸랑 보냈더라. 그 메일 주소 걔밖에 모르는데. 꼴에 지 친구 걱정된다고 인터넷 뒤져서 보낸 걸 지원을 또 안 할 수 없잖아.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합격해야지.”
승관은 제 침대에 지훈을 눕히고 곧바로 열을 쟀다. 병원에서 목숨을 건 대탈출을 여러 차례 시도한 손등은 수두룩한 링거 자국을 매단 채 지훈을 끈덕지게 괴롭혔다. 지금쯤 도주한 지훈을 오매불망 기다릴 정한에게 연락을 취한 승관이 침대 맡에 앉아 얼어버린 발가락을 감싼다.
병실에 자물쇠 한 백 개 달면 안 돼요? 아파트 앞에서 죽치는 건 제가 데려올 수 있는데, 이러다가 이 새끼 진짜 죽어요. 승관의 말에 이번엔 되려 정한의 키가 작아진다. 콜택시를 기다리며 도통 내려가지 않는 지훈의 열을 걱정하던 승관의 눈이 흐려진다. 친구를 닮아가는 아이였다.
- “김여주 너한테 돌아오려고 간 거야.”
……
- “느려서 그렇지, 약속은 꼭 지키잖냐.”
승관은 그녀가 잠적하기 전 자신에게 했던 문자를 상기했다. 지훈은 봄과 여름 사이에 목 감기에 쉽게 시달리니 생강차와 유자차는 오며 가며 챙겨야 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울 수 있으니 미리 복용하는 약이 다 떨어졌는지 물어봐야 하고, 겨울에는 귀찮다는 이유로 슬리퍼를 끌거나 목도리마저 하고 다니지 않으니 어디 가게라도 가서 하나 주웠다 핑계라도 대야 한다는, 친구로서 하기엔 다소 연애적인 부탁이었다.
끝으로 자신이 돌아오면 그땐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승관은 애써 그것을 지우며 책상에 놓인 액자를 손으로 닦아내며 먼지를 감췄다. 하나의 프레임이었다면 행복했을 두 개의 액자를 맞댄다. 차례대로 은수, 승관, 지훈, 그리고 그녀가 나란히 서 있다.
- “……예쁘네.”
승관의 친구들이 다 모였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말이다.
2017년 2월.
비닐백에 용케 밀가루를 담아 온 승관은 지훈과 그녀의 등을 향해 뿌리기 시작했다. 절대 하지 말라는 건 곧 죽어도 하는 성격인 걸 아는 여주는 지훈의 손을 잡고 달렸다. 무조건 말리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백발백중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승관에게 열이 받은 지훈은 기회를 틈타 비닐을 낚아챘다.
넌 뒤졌어. 지훈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관을 몰아붙였다. 얼굴이며 교복이며 밀가루를 범벅한 승관은 공격성 제로에 가까운, 그저 날뛰고 싶은 한 마리였다. 허연 몰골이 지훈을 향해 달려간다. 여주는 교복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며 운동장을 마당처럼 뛰어다니는 그들을 향해 손짓한다. 곧 승관과 지훈, 그리고 그녀가 카메라 앞에 선다. 너나 할 것 없이 밀가루에 범벅된 서로를 보며 웃는다.
- ‘미친, 드디어 인생 실전이다.’
- ‘그래도 또 학교야. 이번엔 4년.’
- ‘너희들이랑 4년 동안 또 망할 수 있어서 존나 좋아.’
- ‘망한다는 말 취소해. 그리고 나 아직 대학 안 붙었거든?’
- ‘김여주 넌 제발 A대 좀 붙어라. 나 같은 새끼도 붙었는데!’
- ‘수시 꺼져.’
- ‘같은 캠퍼스에서 널 보면 내가 얼마나 떨릴지 생각해 봤냐?’
- ‘술 먹을 생각에.’
- ‘그건 네 애인이 맨날 하는 짓이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분노하던 승관이 어느새 큰 브이를 그린다. 지훈은 작게 웃으며 승관을 따라 같은 포즈를 취한다. 그녀는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맞잡은 그를 멍하니 쳐다본다. 다정한 시선으로 여주를 바라보는 지훈은,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그녀를 결국 웃게 했다. 하얀 리시안셔스를 안아 든 그녀도 카메라를 향해 지훈을 닮은 반달 눈을 짓는다. 네 명이 함께 한 졸업이었다.
- ‘찍는다!’
- ‘나만 잘 나오게, 알죠?’
- ‘얘만 흑백 처리해주세요.’
장난기 많은 승관이 지훈과 여주 앞을 막는다. 그대로 플래시가 터지고 프레임은 엉망이 되었다. 두 팔을 뻗은 채 만세 독립을 염원하는 열아홉의 승관에게서 멀어진 지훈은 역시나 정상적인 졸업은 글러 먹었다 고개를 젓는다. 어수선한 틈에도 지훈의 손을 놓지 않던 그녀가 지훈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애정에 서툴던 지훈은 그녀의 고백에 마침내 미소 짓는다.
- ‘……진짜 행복해.’
다시 찍는다!
빨리 모여봐
하나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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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서
옆에 있는 네가 내 곁을 떠날까 무서워서
또다시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해도
예전처럼 은수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야
어떤 미래에 잠시 우리가 어긋나더라도
다시 네 곁으로 돌아오고 싶어
돌아오는 길 끝에서 널 만나는 순간이 온다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 많이 해 줄게
네가 없는 하루는 어땠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널 그리워 했는지
그땐 날 안아줘
그럼 우린 영원히 해피엔딩이니까
사랑해 지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