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Cards :: 행운의 기사
27. 촉박
“진짜 이 짓을 하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네.”
실소를 머금은 진영이 쓰게 속삭였다.
“그러게.”
우진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며칠 째, 다시 없을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 우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거의 흑색에 가까워진 낯빛에 피곤이 드리운 지 오래였다. 악몽은 늘 암흑이었고, 그는 늘 공허에서 떠돌았고, 어김없이 목소리들이 그를 괴롭혔다. 그래, 적어도 그것까지는, 지난 10년 동안 그가 늘 그랬듯이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날 포기한 것처럼 말하지 마요……’
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우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그 마지막 목소리만큼은. 우진의 피해자들 사이 새롭게 추가된 또렷한 원망. 우진은 잠에 드는 게 무서웠다, 늘 그랬듯이. 참다못해 밀려오는 피곤에 저도 모르게 깜박 잠에 들면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들은 그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아득하게 먼 곳에서, 누군가 그를 아련히 불렀다. 우진 씨, 날 포기하지 말아요. 미안해. 당신을 포기하는 게 당신을 지키는 일이었음을.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깨면, 몇 시간은 지나있을 거라 예상한 바와 달리 기껏해야 몇 십분 남짓 지난 시계바늘을 보며 우진은 점점 더 망가져갔다. 제가 내뱉은 거짓말을 되새김질하며 그는 한 번 더 스스로의 심장을 씹었다. 누구에게도 죄가 없었다면 우진은 누굴 탓하면 좋을까? 운명의 장난? 그 상투적이고 무책임한 개념이 정말 모든 원인이었다고.
하지만 우진은 단 한 번도 운명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스스로를 원망했다. 어째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를 의심한 적은 있었으나, 그에겐 허상을 원망할 만큼의 유예도 없었다. 7살, 그가 처음 사람을 죽인 그 날도.
폭도와 기사의 연합. 어느 누구도 그 진위를 믿지 않았으나 따지고 드는 자도 없었다. 몇 십 년을 이렇다 할 접점 없이 삐걱대며 평행선을 그리던 두 수트가 연합을 한다는 건 어지간히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총칼로 무장한 카드가 빼곡히 주위를 감시하는 불안정한 약혼.
“얼마나 더 남았어?”
슬슬 아린 다리를 어색하게 꾸물대며 이름이 다니엘의 소매를 조금 더 꽉 잡았다.
“아직 반도 안 왔어.”
억지로 미소를 짓느라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양 뺨을 애써 유지하며 이름이는 숨을 들이마셨다.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것 같아.”
“좋아, 그럼 난 호랑이 시켜줘.”
제발. 하지만 다니엘은 뭉글뭉글 웃을 뿐이었다. 난 이게 우리 약혼식인 줄 알았는데. 이름이는 쓰게 웃었다. 서로 각 잡히게 팔짱을 끼고 내리 붙어있기를 몇 시간 째였는지.
시작 이래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이름이는 인형처럼 웃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을 반가운 척 맞으며, 옆에서 다니엘이 뭐라 지껄이면 그에 동조하고, 얼굴 근육이 저리도록 웃어주고, 서로 다정한 척 연기를 하고.
사실 대부분의 힘든 일은 이름이의 몫이 아니었으나, 스스로 속이 뒤틀림을 느꼈다. 구태여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하는 자는 드물었으니 이름이는 말을 해야 할 일도 많지 않았다. 그저 가끔, 다니엘이 제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두를 때, 자연스럽게 그에 호응해주는 것뿐. 그것마저도 이름이는 쓴 물을 삼켜가며 참아내야 했다.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눈 앞에 사람들에게도, 옆에 그녀의 약혼자에게도. 눈꼬리에 자꾸만 밟히는 등 뒤의 실루엣이 있었다.
우진은 클럽의 에이스였다. 그건 오늘 밤,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상사인 다니엘과 그의 약혼자의 안전을 지켜야 함을 의미했다. 즉 그건 그가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모든 걸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쳤어?”
“……조금.”
“쉬든가.”
“……”
“감기 때문이라고 해줄게.”
“아니, 괜찮아.”
인형 취급은 진짜 지겨워. 다니엘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인형 같은 걸, 좋은 뜻으로. 제발, 그딴 말은 사람들 앞에서만 해줄래? 속이 뒤집어질 거 같아. 다니엘이 이름이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우진은 똑똑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끓어 넘치는 화나 질투 따위는 나지도 않았다. 이게 거짓말,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라는 건 우진은 잘 알고 있었다. 눈 앞에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다고.
단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건조한 무기력감이 우진을 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감정의 매듭이 우진의 호흡을 막았다. 죄책감, 두려움, 원망, 억울함, 출처를 알 수 없는 욕망들과 아득하게 밀려오는 미련 같은 것들이. 시선을 옮길 수가 없었다. 가장 끔찍한 풍경 속 가장 그리운 것이 있었다.
우습게도 이 화려한 역겨움 속 가장 역겨운 건 나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파.”
“먹지 말라고는 안 했는데.”
“먹으면 토할 것 같아.”
“그럼 먹지 말아야지.”
슬프게도 그녀는 태생이 그곳인 것처럼 완벽하게 들어맞았지만. 마치 우진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점 같아 보였지만.
“한 잔 할래?”
다니엘이 샴페인 잔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술 마셔도 돼? 취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잠시 고민하다 이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게 최소한의 할 일이라도 줄 테니. 다니엘이 건네준 술잔을 곧장 입술에 가져갔다. 계속 나누던 대화와 터트리는 웃음에 갈증이 나기도 하였거니와, 계속 부딪히는 망할 시선 때문에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두 번은 못하겠어.”
“뭐를. 약혼을?”
“당연하지.”
“즐겨. 언제 또 이런 짓을 해보겠어?”
“언제가 됐든 하고 싶지 않아……”
최소한의 탄산을 머금은 황금색 샴페인이 약간 따가웠던 목을 촉촉하게 적셨다. 찰나의 쉼표에서 조용히 홀짝이던 이름이의 귓가에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좋아?”
“방금 두 번은 못하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저런, 그래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다니엘의 입술이 거의 귓바퀴에 닿을 듯 가까워지자, 저절로 이름이의 살짝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 사람들 좀 봐.”
“……”
“내일 누가 죽을 거 같아?”
뭐? 생각해 봐. 내일은 전쟁이라고. 첫 하루 동안, 누가 누굴 죽일 거 같아? 봐봐, 여기 사람들 머릿속엔 딱 두 가지 생각 밖에 없어. 첫째, 누가 죽어야 할까? 둘째, 그가 죽으면 나한테 떨어지는 건 뭘까?
“골라봐. 누굴 죽이고 싶어?”
“지금만큼은 당신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
“저런. 틀렸어. 날 죽여도 당신에게 돌아오는 득이 없잖아.”
“……재미있는 얘기 해주는 줄 알았는데.”
“재미없었어?”
히죽대는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재미는 없었을지 몰라도, 농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정말이야. 누굴 먼저 죽일 거야?”
“……”
“당신 발 밑에 있는 도시를 봐. 당신 말 한 마디에 웃다 울다, 흥망성쇠가 다 당신 손에 달려있는데.”
“내가 진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안 그랬다면 당신이랑 결혼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이라고, 얼마나 더 말해야 돼, 나?”
“설마 나랑 약혼만 하고 결혼은 안 할 생각이었어?”
“……말이 안 통한다.”
하하, 다니엘이 웃는다. 하지만 흘려 듣지마. 잭은 당신 머리에 왕관을 씌워줬고, 에이스는 당신 손에 총구를 쥐어줬지. 누굴 겨눌 거야?
“……날 이 자리에다 앉힌 놈부터.”
“벌써 두 번째 오답이야. 그것도 당신에겐 이득이 아니니까.”
“내가 무슨 얘기를 하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생각을 하길 바라는 거야.”
“……”
“옆을 보지 말고 앞을 보란 뜻이야.”
진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당연하지. 일부로 못 알아듣게 얘기했으니까. 그의 손이 귓가를 쓸어 내린다. 눈에 띄게 경직된 이름이의 손이 유리잔을 꼭 붙든다. 긴장하지 마, 사방이 눈이야.
“둘러봐. 모두의 주위가 여기 몰려있는 걸.”
사실이었다.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시선을 이름이는 현저히 느낄 수 있었다. 뒷걸음질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나와 당신이라고.”
“……”
“이건 연극이니까. 관객은 전개를 원해. 자극적인 걸 바라지.”
“……”
“어떻게 하고 싶어? 당신은 주인공이고, 나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 텐데.”
그의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남자가 생각하는 것의 발치까지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의 밝은 미소가 입에서 내뱉는 말과 괴리감이 너무 커서. 소름 끼쳐. 이름이는 살짝 고개를 떨궜다.
“당신 진짜 징그러워.”
“그렇겠지. 당신은 인형처럼 사랑스럽고.”
그리고 눈 앞에 다가오는 다니엘의 가슴팍에 이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뒷목을 부드럽게 감싼 손아귀가, 이윽고 이마에 닿는 입술이, 둘에게만 들릴 듯한 소리를 내고 금세 떨어진다. 숨을 내쉼과 동시에 감았던 눈을 슬쩍 뜨자, 허리 숙인 그가 귓가에 속삭인다.
“좀 쉬어.”
그리고 슬쩍 잔을 든 이름이의 손가락을 잡는다. 그녀의 손에서 잔을 뺏은 다니엘이 굽혔던 상체를 일으키고 멀어진다. 그제서야 빈 공기가 이름이의 뒤통수를 거세게 스치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뒤돌아가는 이름을 다니엘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뭐해?”
그건 명백히 우진을 향한 부름이었다. 녹아 내리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다니엘이 우진을 돌아보았다.
침착한 척 했다. 위험해. 우진은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서로 문대며 꾹 참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붙잡고, 우진이 목례를 했다.
“쫓아가 봐.”
이름 마시던 잔에 입을 대고, 남아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킨 다니엘이 고갯짓으로 우진을 보냈다. 다시 목례를 건네고 우진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빠르게 사라진다. 머리카락을 허옇게 비추는 금빛 조명 아래, 다니엘은 제 손목시계를 보았다. 10시 15분. 자정, 전쟁까지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우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만큼이나 그녀도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장 뒤쪽으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밤공기기가 뺨을 때렸다. 우진은 그녀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문을 잡아주었다. 고개 숙인 어깨가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인적 드문 골목길, 우진은 그녀가 그보다 열 걸음 남짓 앞서 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우뚝, 그녀가 멈춰 선다.
“들어가요.”
“……”
“혼자 있고 싶으니까.”
긴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소용돌이 친다. 이름이는 바람 속에서 제게 묻어있는 다니엘의 체취를 역력히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징그러운 남자였다. 적어도 나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정확히 집어낼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체 내게 뭘 원하는지? 이름이는 그에게서 다음을 찾아낼 수 없었다.
“조용히 있겠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닌데.”
“멀리 있겠습니다.”
천천히, 이름이 돌아선다. 정갈한 눈빛이 우진은 극히 낯설었다. 화가 난 것도 아니지만 슬프지도 않은 눈빛으로, 한 번도 맞닥트린 눈빛으로 그녀가 그를 꿰뚫어본다. 그건 체념인 걸까?
“당신 존재감이 날 불편하게 하는 걸.”
우진에게 그런 어투를 한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도려낸다. 새카만 밤하늘 아래, 창문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피부가 희게 빛난다.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왜 숙인 뒷목이 서늘하게 당겼을까.
“다 제자리로 돌아간 기분이야.”
덕분에 우진은 입을 여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마음은 불편해도 몸은 편하다는 걸.”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야. 서로를 만나기 전부터. 우린 훨씬 이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어야 했어. 과정이 어찌되었든. 이건 내 이름이었고, 거긴 당신의 자리였어.
강다니엘. 당신 형이라며? 그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동시에 모든 걸 다 끼워 맞췄어. 당신이 왜 날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날 원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 나는 당신을 배신한 거야.
“미안해.”
“……”
“난 몰랐어.”
내가 당신을 버리고 당신 형을 선택했다는 것. 내가 약혼을 한 것도, 아니, 내 오빠를 대신한 것도, 애초에 당신을 만나기로 한 것도. 인정할게. 당신이 옳았어. 난 어느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게 없어. 당신은 날 원망할 이유가 있어.
“당신 형은 똑똑해.”
“……”
“난 안전할 거야.”
강다니엘의 등 뒤에 쪼그리고 앉아서, 인형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으면 안전하겠지. 근데 난 그럴 이유가 없어. 난 지킬 게 없어.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알아? 난 지켜낼 게 없고, 죽일 것만 잔뜩 남았어.
“다행이야. 여태까지 모든 게 최악이었는데, 늘 마지막 ‘그나마’가 남아있어서.”
다들 날 죽이고 싶은 건지, 살리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당신이 그랬지, 형을 너무 사랑했다고. 그래. 나도 그러기로 했어. 난 강다니엘을 사랑하고 싶어. 아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나랑 수지가 맞아. 그는 날 막지 않을 거야. 내가 뭘 하든. 내가 미쳐버리든 지금 당장 내 머리에 총을 쏘든. 그게 맘에 들어.
“우진 씨, 나는……”
“……”
“나는 목표가 생겼어요.”
난 그만하고 싶어.
“다 죽여버릴 거야.”
미친 소리였지만.
“그래야 내가 죽어.”
어떤 선택이 행복을 줄 수 있었을까? 우진은 회의적이었다. 강다니엘은, 그가 아는 바로는, 그의 약혼녀와 잘 굴러가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의문이 들지, 난 그녀의 일주일 치의 면밖에 모르는 걸.
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우진은 가만히, 그녀가 자결하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진이 그녀를 버려두고 도망쳐온 자리에서, 보란 듯이 제 관자놀이에 총을 겨눌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 앞에서 흩날려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린 서로의 방관자가 될 거야.”
서로의 무덤이 되고 싶어.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해야 했는지 당신은 평생 모를 거야. 당신은 당신 형을, 나를 지키려고 하겠지만. 나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사실 지금 당장 누가 뒤에서 날 찔러도 상관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또 살고 싶기도 해. 아직 하고 시은 게 많아서.
“난 전쟁에서 이길 거야.”
그게 내 계획이야. 옆에서 모두들 내 귀에 하도 때려 박아서 나도 세뇌 당한 걸까? 그래도 모두가 내가 그리하길 원해. 나조차도. 있지, 나는……
“나는 당신을 포기하고 싶어.”
미안해. 못 알아듣는 말만 자꾸 해서.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다시 못할 거 같아. 나는 이제 포기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애쓰지도 않을 거야. 말했다시피 여긴 내 자리고, 거긴 당신의 자리잖아. 어울려. 당신이 날 포기했으니, 나도 포기할 거야. 복수하는 건 아니야. 그냥, 당신이 떠났는데 내가 돌려내라고 나리를 쳐서 뭐해.
“이게 다야.”
“……”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
그냥……내 결론은 그래. 난 당신을 포기할 거고, 대신 해야 할 일을 할 거야. 그건 당신 형을 사랑하는, 사랑하는 척하는 거고, 이 전쟁에서 이기는 거지.
그래도 이름이는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미안해. 단전 깊은 곳에서 울부짖었다. 거짓말이야. 나는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어. 내 인생은 이미 망가졌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괜찮아. 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은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미안해. 그래도 나중에 언젠가 알아주길 바라.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기 위해 이 자리를 택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궁금해도 죽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밖에 너무 오래 있었어. 들어갈래.”
그리고 그녀는 똑바로 그에게 다가오다 슬쩍 옆으로 스쳐 지나간다. 바람은 건조하고, 감정은 눅진했다. 우진은 다시 그녀가 몇 걸음 앞서 걷기를 기다리다, 이내 함께 돌아서서 뒤를 따랐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데 드러나는 건 없었음을.
“오래 쉬었네.”
“그리웠어?”
“당연하지. 심심했거든.”
적당히 농담하는 이름이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슬쩍 웃은 다니엘이 다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래서, 얘기는 잘 했어?”
“뭐?”
순식간에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이름이에게 다니엘은 아무 답도 주지 않았다. 눈썹을 으쓱대던 다니엘의 입술이 귓가 가까이에 속삭인다.
“백날 천날이고 모른 척 해줄 수는 없지.”
“너……”
“걱정 마, 약점 잡는 거 아니니까.”
솔직히 신경도 안 써. 그가 어깨를 으쓱댔다.
“그래도 너무 긴장하고 있으면 티 나잖아?”
눈썹을 잔뜩 찌푸린 이름과 상관없이 다니엘은 웃는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우진이는 거짓말을 못해. 쳐다보는데 뒤통수가 타버릴 것 같더라고. 봐, 지금도. 이름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등 뒤 불과 열 발자국 남짓 떨어진 곳에 우진이 있었다.
그래서, 둘이 진짜 무슨 사이야? 다니엘이 눈치는 빨랐으나 다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별 거 아니야.”
“그래?”
“딱 일주일 만났어.”
“만났다는 게 어떻게 만났다는 거야?”
그만해. 진짜 역겨워. 이름이의 회색 낯빛을 살피던 다니엘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난 상관 없어. 나한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그래도 티 나지 않게 굴려고 노력해봐. 자꾸 그렇게 굴면,
“내 눈에 거슬리잖아.”
이름이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우진과 자신은 서로를 숨기기에 필사적이었고, 다니엘은 그걸 알았다. 결국 중간에 놓인 건 자신이었다. 난 내 할 일을 알아. 적어도 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고분고분해지는 게 내 몫이야.
“……걱정 마.”
“그렇다면 다행이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니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잠시 어깨에 두르고 있던 손을 떼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그가 전화를 받았다. 왜? 여보세요, 같은 말로 받지 않는 점이 퍽 어울린다고 생각되었다.
“뭐? ……알았어, 끊어.”
기껏해야 5초 남짓한 통화를 마치고 그가 곧바로 핸드폰을 다시 뒷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삽시간에 구겨진 그의 인상에서 좋지 않은 내용이라는 게 역력했다. 무슨 전화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가 먼저 선수를 친다.
“11시가 다 됐는데, 긴장 안 돼?”
“내가 왜?”
“왜냐니, 한 시간이면 전쟁이야.”
그래도 긴장 안 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이름을 내려다보며 다니엘이 웃는다. 하지만 지금은 해두는 게 좋을 걸.
“마침 또 축하손님께서 오셨다고 하니.”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도 반기지 않는 사람이 왔다는 거지. 재킷 칼라를 매만지며 그가 코웃음을 쳤다.
“옹성우가 왔어.”
*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험을 드디어 다 끝내고ㅠㅠ너무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시험기간이 너무 길었어서,,,이제 밤 그만 세고싶어요 흑흑
사실 지금 너무 힘들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잔뜩 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ㅅ;
아무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화는 진짜 빨리^^! 돌아올게요
완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힘내서 가봅시다
미세먼지 심한데 늘 건강 챙기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