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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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in.T - 멋지게 인사하는 법 (Feat. 슬기 of Red Velvet)
1. 우리의 시작
김태형과 나는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지난 5년간 우린 그저 필요한 이야기와 조금의 장난, 마주칠 때 마다 간단히 인사만 하는 심심한 사이로 지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공통분모가 적어 그렇게 친하진 않았다. 그렇다보니 별다른 호감도 없었다.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그냥... 그게 다였다.
2. 나의 시작
계속 이런 미적지근한 사이로만 남을 줄 알았는데, 어쩌다보니 내가 너를 좋아해버렸다. 차라리 계속 몰랐으면 좋았을테지만 깨달은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마음은 쉬이 통제되질 않았다. 김태형의 절친이자 나의 오랜 친구인 지민이에게 하소연 겸 연애상담 겸으로 현 상황을 털어놓자, 자신있게 밀어주겠다던 박지민은 주어를 알고 나서는 빠른 사과를 건네며 왜 하필 좋아해도 김태형이냐면서 대신 슬퍼했다.
김태형은, 게다가 열아홉의 김태형은 연애에 관심이 0에 수렴한다며 나무랐지만 난 그런 김태형이라서 좋았다. 딱히 별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사이의 진전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교실 안에서 남은 1년을 그 아이의 열아홉을 지켜보며 함께하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
박지민
야 근데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엉?
박지민
걔가 왜 좋아?
나 진짜 어제 잠 자기 전에 계속 생각해봤는데
진짜 모르겠다
나도 몰라...
나 어쩌다 김태형 좋아했지
박지민
아 다 말해놓고 이러기냐
뭐를 ㅋㅋㅋ
박지민
알았어 너네 반 갈테니까 말해줘라
카톡으로 말하는게 부끄러울 수 있지
그럴 수 이써 그럴수 잇ㅆㅆㅆ숴
1 아니 진짜라니까
1 진짜 나도 모른다고
1 야 박지민
1 저기여?
그새 아래 층에서 뛰어와 내 앞자리에 앉아 ' 왜 김태형을 좋아하냐 '고 말해오는 박지민에게 이번에는 카톡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내 입술은 대답할 생각이 없는듯 했다. 아무 말 없이 골똘히 생각만 하고 있는 내 모습에 박지민은 꽤 답답해하는 모양이었지만, 정말로 나도 모르겠는걸.
딱히 특별한 계기나 이유랄게 있었나?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멍하니 김태형을 보다가 별안간 깨달았다. 나는 쟤를 좋아하는 거구나, 하고. 아무리 진실만을 열심히 대답해줘도 말 돌리지 말라는 성화만이 돌아오기에 그냥 한 대 쳐서 돌려보내는 편이 좋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마침 교실 앞문으로 들어온 김태형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다.
“ 너 무슨 색깔 좋아해? “
“ 나? 나는 검은색. “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김태형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곤 도로 교실 밖으로 퇴장했다.
“ 이젠 아예 날 무시, "
“ 쟤가 검은색 좋아하는 것까지 좋아서. “
나도 대답했다.
“ ... 허. “
“ 됐냐? “
내 대답이 꽤 감동적이었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박지민의 말문이 다시 트임과 동시에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나이스 타이밍.
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열아홉의 순애보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4월 초에 피어난 꽃은 봄이 지났음에도 지지 않고 여름의 무더위를 견디고 가을까지 살아남아 겨울을 대비할 채비를 했다. 확률 없는 짝사랑은 오히려 더 마음편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추위에 강했으니까.
김태형
문학 수특 고전시가 8 필기 좀 보여주라 ㅜㅜ
(사진)
근데 내 거 비싼데
김태형
ㅎㅎ
ㅇㅋㅇㅋ
1 뭐가 오케이여
갑자기 온 선톡에 기분 좋아했던 것도 잠시, 평소 보여지는 모습에 장난기가 많아서 카톡 말투가 살가울 것이라고 지레짐작 했었으나, 상상 속이 아닌 현실의 김태형은 생각보다 무심했다. 그치만 누구에게나 다정해서 간간히 떨어지는 희망에 목 매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 그냥 무심한 김태형 그대로를 좋아하며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 그게 내가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 거기 가운데. 니네 썸 타지 말아라. “
“ 예? “
“ 너네 둘. “
꽃샘추위가 온 적이나 있었냐는듯이 갑작스레 찾아온 여름의 햇살은 추위에만 강한 봄꽃에게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우리는 가끔 교과서를 같이 봤다. 그냥, 누구랄 것 없이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책을 깜빡하는 바람에. 그럴 때마다 없는 사람이 의자를 끌고 가져온 사람의 자리 옆에 가 앉곤 했는데, 앞뒤로 앉아있던 우리가 굳이 서로를 찾아가서 나란히 앉아 한 책을 보는게 좋았다. 너는 책을 봤고, 나는 책을 보는 너를 봤다. 가까이 붙어앉는 바람에 스타킹 위로 살짝씩 스치는 교복 바지가 간지러웠다. 짝꿍을 다 없애고 시험 대형으로 앉으라던 담임에게 처음으로 고마웠다.
음,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가끔보다는 꽤나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책을 놓고왔어도 공부는 하겠다고 뒤에서부터 내 옆까지 끌고 온 의자가 무색하게 수업을 듣다 말고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너도, 내가 놓친 필기를 옆에서 무심히 대신 채워주는 너도, 핑글핑글 펜을 돌리다가 요란스럽게 떨어트려 꾸중을 받는 너도 좋았다.
“ 이거 노래 좋아. “
하지만 제일 좋아했던 건, 이 노래 좀 들어보라며 평소 내가 듣던 음악과는 정반대 스타일의 음악을 추천해주는 너였다. 함께 교과서를 보던 교시가 끝나면 노래를 듣고싶다며 다짜고짜 내 핸드폰을 가져가 나의 재생목록에 흔적을 잔뜩 남기고 간 네 덕에 단조롭던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점점 알록달록해졌다.
/
항상 잔잔하기만 하던 나의 귓 속에 너라는 파도가 쳤다. 익숙치 않은 강렬한 비트가 처음엔 낯설었지만 네가 좋다니까 그냥 무작정 들었다. 마냥 시끄럽게만 느껴지던 노래들조차 네가 생각날 때마다 한 곡씩 듣다보니 시나브로 좋아졌다.
나와 취향이 비슷했던 박지민은, 내가 추천해주는 김태형의 플레이리스트를 듣자마자 이어폰을 빼며 치를 떨었다.
“ 좋긴 한데... 귀가 너무 피곤하다. “
“ 김태형이 이게 제일 좋대. “
“ 맞아. 걘 그런 것만 좋아하더라. 시끄러운 거. “
“ 근데 이제 나도 좋아. “
“ 엥? 너 이런 거 싫어했잖아. “
“ 그냥 듣다보니까 좋아지던데. “
“ 너도 참... “
박지민은 한심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듣는 스펙트럼 넓어지면 좋은 거지 뭐.
/
오른손 >
왼손 >
김태형 >
지문 추가...
내 휴대폰에는 어느새 김태형의 지문이 하나 추가됐다. 이쯤되면 그냥 몰래 넣어둘 법 한데도 김태형은 왠지 모르게 내가 옆에 있을 때만 노래들을 추천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거리가 가까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너에게까지 들릴까 걱정하던 나였지만, 항상 힐끔 쳐다보면 천진한 표정으로 리듬을 타는 모습에 걱정 따윈 다 때려친지도 오래였다.
종이 땡 치고 쉬는시간, 요즘들어 자주 해오던 것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래만 듣고 있어도 한 이어폰을 두 사람이 같이 꽂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괜스레 기분이 몽글몽글해지곤 했다. 이젠 아예 김태형을 위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개중에 잔잔한 노래가 섞여있긴 했지만 리스트 안의 음악들은 대부분 시끄러운 편이었다.
맨 처음 추천해줬던 노래가 고막을 넘어 뇌까지 울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을 때 가차없이 목록에서 삭제해버리던 네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익숙해진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걸어다닐 나일 걸 잘 알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좋아하는 건 나도 모두 좋아하고 싶었으니까. 노래가 진짜 좋은 것 같다면서 눈을 반짝이는 네게 항상 나도 좋다고 답했다. 시끄러운 멜로디가 완벽히 좋진 않았어도 네가 좋은 건 맞았으니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낯설던 노래들은 몇 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꽤 괜찮은 것 같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노래를 들을 때면 주변 소음이 작게 들리거나 안 들렸는데, 그대로 눈을 감으면 30여명이 상주하는 시끄러운 교실 안에서 우리 둘만 남겨진 기분이 들어 좋았다. 노랠 추천해줄 때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네 물음에 비로소 진심으로 끄덕일 수 있을 때 즈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동시에 같은 노래를 듣는 지금의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중간고사를 앞두게 되었다. 김태형은 전부터 내 필기를 좋아했다. 어느날 우연히 내 노트를 보고선 글씨도 예쁘게 잘 쓰고 정리도 잘 해놨다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더니, 그 이후부터 단골 손님이 되었다. 필기 노트를 보여주는 것 조차 별로 달가이 여기지 않던 나였지만 너에게만은 모든 것이 예외였다.
열심히 시험 공부를 하던 어느 금요일, 김태형이 복사를 해도 되겠냐며 내 노트를 아예 빌려갔던 날. 같은 독서실을 다니던 박지민이 나에게 노트를 빌려왔다며 자랑하는 김태형을 보고 깜짝 놀라 아직 답장도 안했던 나에게 바로 연락했을 정도였으니.
박지민
야 너 내일 죽어?
아니면 김태형이 죽는 건가?
뭐라는 거야
설마 태형이 때렸냐 너?
박지민
안 때렸어 ㅡㅡ
아니 니 노트가 왜 여기에 있어
이거 봐
박지민
(사진)
그걸 왜 그쪽이...?
난 분명 태형이 빌려줬는데
박지민
김태형이 방금 필기 대박이라고 자랑함
헐!
대박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뭐래 ㅠㅠㅜㅠ??
박지민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중욯
중요해
머라그랫냐고
박지민
...^^ 그냥 개 쩔지 않냐고 그랬다
ㅠㅠㅠㅠㅠㅠㅠ
박지민
그게 아니라 너 노트 절대 안 빌려주잖아
보여주기도 꺼리는 애가
복사하라고 빌려줬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 수도 있지 임마
박지민
나 순간 그거 보고 애가 니 걸 훔쳐왔나 해서
너도 필요하면 하덩가!
박지민
얼마나 놀랬
전 이과거든요;
와 진짜 사람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도 안바뀌었는데요
김태형 아니면 안 보여주는데요
박지민
어련하시겠어요 ^^...
ㅎㅎㅎ
그래 지미니 열공 ^^!
박지민은 남에게 필기 보여주기를 꺼리던 내가 아예 노트 자체를 빌려준 것에 대해 놀랐고, 나는 김태형이 내 노트를 누군가에게 자랑했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필기 진짜 대박이라고 쌍 따봉을 날리더라. 마침 온 카톡은 그간 수업시간에 졸음을 참으며 손을 놀렸던 나의 수고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캬... 이 맛에 필기하지. 아님
그리고 살짝 꼼수긴 하지만 부러 김태형이 열심히 필기하는 과목 필기를 빌리기도 했다. 나도 열심히 해서 딱히 필요하진 않았지만, 그냥... 연락 한 번 더 하면 좋기도 하고, 내가 혹여나 빠트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태형아
김태형
응?
나 생윤 필기 좀 보여줄 수 있어?
김태형
당연하제
아 나는 또 뭔가 했네
응? 왜? ㅋㅋㅋ
김태형
놀랐잖아 ㅜㅜ
ㅋㅋㅋㅋㅋ 놀랄게 없는데 왜 놀라
김태형
아니 너가 이름만 딱 부르니까
갑자기 내가 뭐 잘못했나
애가 뭔 말을 하려고 이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 나 몰래 뭔 짓 했어? ㅋㅋㅋㅋㅋ
김태형
그건 아닌데...
여튼 앞으론 그렇게 부르지 마 ㅠ
에엥 그럼 뭐라고 불러
김태형
으음...
김태형
태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태태?
ㅋㅋㅋㅋ너무 귀여운 거 아냐?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태형
아 왜 웃어 집에서 나 다 이렇게 불러!!!
그래 태태야 ㅋㅋㅋㅋㅋㅋ
귀여운 거 좋아하면 미리 말하지
ㅋㅋㅋㅋㅋㅋ 아 내가 미처 몰랐네 ㅋㅋㅋ
김태형
ㅡㅡ
웃지 마ㅏ
왜 태태
나 웃는 거 싫어?
김태형
그게 아니라
아아ㅏ각ㄱ
돼써 그냥 부르지 마
ㅇㅋ 잘 자 김태형
김태형
아 진짜
ㅠㅠㅠㅠ 너무해
^^ 태태 굿밤
(이모티콘)
김태형
(이모티콘)
생윤 필기 안 보여줘
어쩔 수 없지 뭐 김남준한테 빌려야지
김태형
맘대루 해라 ㅡㅡ
잘 거야
ㅋㅋㅋㅋ 알았어 잘 자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던져본 씨앗은 의외의 큰 수확을 가져다줬다. 진작에 카톡 한 번 해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예전과 다르게 어느정도 이어지는 대화에, 단단히 삐졌다고 시위하는 와중에 귀여운 토끼 이모티콘, 마지막으로 웬 귀여운 별명까지. 확실히 우리 사이에 진전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거구나.
기대조차 하지 않다가 얻어걸린 큰 선물에 기분 좋게 카톡을 마쳤다. 단단히 삐졌던 김태형은 안 보여주겠다는 마지막 말과 다르게 다음날 복사까지 해서 등교하는 친절을 보였다. 시험기간 내내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들여다봤더니ㅡ사실 내용보다는 김태형의 글씨체나 필기 스타일을 더 열심히 봤지만ㅡ 정말 사랑의 힘이라는게 있긴 한 건지 나는 그 중간고사에서 처음으로 생윤 1등급을 맞았다.
그 다음 시험에도 난 김태형의 필기를 빌리곤 했다. 예전과 달라진 건 중간고사 때에는 졸려도 아득바득 놓치지 않겠다며 손을 놀렸었지만, 이젠 졸리면 그냥 잔다는 점 정도? 단, 김태형이 깨어있다는 전제 하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간은 김태형 필기 베끼면 되니까. 아, 물론 윈윈이다. 나 뿐만 아니라 김태형도 졸리면 뒤에서 내 등을 두어번 치고 웅얼거리며 부탁하곤 했는데,
“ 부타캐... 나 어제 3시에 잠... “
“ 엥, 맨입으로? “
“ 피크닉 사줄게... 쉬는시간에 같이 매점가자. “
진짜로 윈윈 그 자체였다. 개좋아.
/
마냥 짜증나기만 했던 시험기간은 의외로 고3이 되니 더욱 달콤했다. 여담이지만, 3년간 받은 성적 중에 고등학교 3학년 성적이 제일 높았을 정도로. 성적이 좋은 김태형은 시험시간에 더욱 연락 빈도가 높아ㅡ물론 죄다 공부 이야기긴 했다.ㅡ 나도 덩달아 열심히 하게 된 탓이었다.
심지어 시험을 치는 사흘 중 이틀은 전화까지 빼먹지 않았었다.
부재중 전화 (1)
김태형
잠금 화면에 간결히 떠있는 알람 하나가 그땐 왜 그렇게 설레었는지. 이름만 봐도 설레기 시작했던게 아마 이맘때 즈음부터였나.
항상 무음으로 해놓아서 그런가, 요상하게도 항상 나는 김태형의 전화를 제때 받지 못했다. 그래서 부재중 목록에 떠있는 이름 석 자를 확인한 다음에야 내가 다시 걸어야 연결되곤 했었는데, 떨리는 마음을 눌러놓고 애써 태연한 척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로 항상 별 시덥잖았다.
“ 여보세요. “
“ 여보는 좀 빠른데요? “
“ ...끊을까요? “
“ 아냐! 아냐 미안해! “
“ ㅋㅋㅋ 전화 왜 했어? “
“ 나, 나... 그 뭐냐... 한국지리 수업ppt 좀... 보내줘. “
“ 싱겁긴. 그거만 보내주면 돼? “
“ 어...엉. “
“ 알아써, 페메로 메일 주소 보내줘. “
“ 네엥, 내일 봅시당. “
중간에 답지않게 말을 잔뜩 더듬거릴 땐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안절부절 못하고 입술을 만지작거릴 모습이 눈 앞에 홀로그램처럼 아른거렸다. 말을 더듬는 것까지 귀엽게 느껴지면 진짜 답 없는 건데. 우리는 어느새 여보는 너무 빠르지 않냐는 정도의 농담 따먹기가 가능한 사이까지 발전했다. 매일 저녁 카톡으로 소식을 전해들으며 제 일 마냥 신경써주는 박지민이 떠올랐다. 오늘 일 들으면 난리 나겠네.
‘ 굳이 전화 안해도 되는데 왜 전화했어? ‘
좋은만큼 더 헷갈리기 시작하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가끔 시시콜콜한 전화를 할 때마다 이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선을 넘는 건가 싶은 마음에 매번 그만두기 일쑤였다. 처음엔 솔직히 나만 기대했다 실망할까 일부러 먼저 선을 긋곤 했었는데.
그치만 태형아, 이쯤되면 나 기대해도 되는 거겠지.
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 김태형한테는 진짜 민폐지... 태형이 대학 가야하잖아. “
“ ... “
“ 보니까 요즘 김태형 핸드폰 자주 들여다보더라고. 양심도 없나. “
마냥 순탄할 것 같던 나의 짝사랑은 나와 김태형이 썸을 탄다고 소문이 나면서 점점 방해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혼자 좋아하다가 썸 탄다고 소문이 나는 것도 신기해 죽겠는데, 졸지에 공부 잘하는 김태형 발목 잡는 애로 뜬금없이 뒷담을 까일 줄이야. 원래 모두까기 인형으로 정평이 나있는 애였기에 뒷담 까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기분이 상하진 않았지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정말 내가 태형이에게 그저 시간만 뺏는 방해물인걸까 하는 불안감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 왜 늦었니? “
“ 죄송합니다, 종 소리를 못 들어서... “
그 아이가 나가기만을 기다리다 그만 수업시간에도 늦고 말았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 어디 갔다 왔냐는 김태형의 뻐끔거림에도 기분이 좋아지질 않았다. 별 거 아냐. 애써 웃으며 답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나 진짜 너한테 방해만 되는 걸까.
“ 태태, 나 너한테 방해 돼? “
“ 내가? 네가? 방해가 된다고? 왜? “
“ 아니면 말고. “
“ 너가 뭔 방해야, 오히려 도움 받고 있고만. “
“ 그럼 다행이네! 나 간당.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례가 끝나고 교탁 앞에서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김태형에게 대뜸 내가 방해되냐고 물어봤을 때, 정말 황당하단 표정을 지으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다 오히려 필기 잘 보여줘서 고맙다고 웃어보이는 네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그래, 그런 애 말에 휘둘리지 말자.
이제 그런 소리까지 들었으니 행동을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야 상관 없었지만, 김태형에겐 괜히 나와 엮이는 일이 기분 나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은 쉽게 도출할 수 있었다. 어차피 며칠 전에 카톡도 끊겼으니까 굳이 잇지 말고, 학교에서도 좀 떨어져서 지내고,
김태형
어디서 그런 이야기 들었는진 몰라도
나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 ㅜㅜ
엄... 김태형의 선톡은 어쩔 수 없고.
+) AM 12:42
김태형
그래서 누구야
나한테도 요즘에 그런 이야기 들려서 그래
괜찮으니까 그만 주무세여
진짜 별 거 아니야
괜찮아!
김태형
내가 안괜찮아요
카톡으로 말하기 불편해?
아니 그게 아니라
김태형
그럼 전화하등가
? 지금?
김태형
010 - xxxx -xxxx
수락 거절
와,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