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흔한 클리셰 1
w. 랑데부
1. 박제형
"우리 헤어질까?"
"라떼 마실래?"
"헤어지자"
"I'll order and come"
(주문하고 올게)
비행기표를 바꾸길 잘했다. 제형이 떠난 자리에서 ㅇㅇ는 제형이 두고간 휴대폰을 괜히 들췄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찍은 어색하다 못해 지우고 싶은 그 나이, 열 여섯. 제형의 휴대폰은 십여년간 꽤나 바뀌었으나 배경화면은 항상 똑같았다. ㅇㅇ는 어깨를 움츠렸고 제형은 그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선 어린 두 사람.
"뜨거워"
"제형아"
"조금만"
에스프레소와 라떼를 각 자리에 놓아두고 얼굴을 마주했다. 당장 울 것처럼 네가 그러면 내가 더 어떻게 말해 제형아. 삼개월만에 만나 할 말이 이 말 뿐이었다. 뜸해지다 못해 귀국전 두어번 연락이 전부였다. 그러다 너는 부정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이별을.
2.
"야 너 어떻게 들어왔어, 안 나가?"
"wait wait wait, If I go out now? I'll die. got it?"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나 지금 나가잖아? 나 정말 죽어 알았어?)
"oh got it, you're dead. get out of here now"
(응 알겠어, 알겠으니까 빨리 꺼져)
내가 미쳐 진짜. 여기가 어디라고 막 들어와 안 꺼져 진짜?
ㅇㅇ는 망설임 없이 제형의 등짝을 마구 후려쳤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도망간게 확실하다. 여자 기숙사로, 그것도 문 열고 들어오는 놈은 너 하나 밖에 없을거야. 들키면 박제형은 무슨 나도 벌점 테러각인데, 야 안 나가?
"이거만 풀어줘. 네가 문자 안 봤잖아"
"그와중에 문제집은 챙겨왔고?"
"걸리면 사유는 대야하니까"
걸릴 걸 알고도 와? 이 미친놈아 안 가?
ㅇㅇ는 제형이 내민 문제집을 둘둘 말아 마구 후려쳤다. 마른 몸에 때릴 곳이 어디에 있느냐, 존나 많아서 셀 수가 없다. 제형은 ㅇㅇ의 구타를 이리저리 피하다 ㅇㅇ를 살짝 밀어냈다. 아 쫌, 좀
"..."
"..Are you really, really going to die?"
(..너 진짜, 진짜 내 손에 죽을래?)
"...this mistake, a thi, 아!"
(..이건 실수야, 이거, 아!)
솜주먹도 계속 맞으면 아픈 법이다. 말린다고 말린 제형의 양손이 물컹한 촉감과 함께 너무 적나라하게 잡힌 꼴은 두 사람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으나, 그와중에 ㅇㅇ는 정확하게 제형의 종아리를 깠다. 죽어 이 변태야 죽으라고, 죽어. 미안미아미안 아니 미안하다고, 제형의 발빠른 사과가 이어졌으나 제형은 침대에 걸려 넘어진채 ㅇㅇ는 제형을 후드려팼다.
"창문으로라도 나가, 안 나가?"
"야야 아니, 야 ㅇㅇㅇ. 아니 머리!"
"머리 뭐, 어딜 만져 응?"
머리칼을 한움큼 쥐뜯기고 나서야 분이 풀린 ㅇㅇ는 그제야 제형을 놓아주었다. 보고싶어 왔다가 멍이나 엄청 달고 나가게 생겼으나 다행히 ㅇㅇ는 내쫓지 않았다. 줄 거 있는데. 제형은 후드 주머니를 뒤적여 찢긴 종이와 늘어붙은 사탕과 함께 뒤섞인 약봉지를 꺼내 쑥 내밀었다.
"먹어"
"밖에 나갔다 왔어?"
"아까 농구하고 잠깐 보건실 들려서 가져온거야"
이거 좀 감동해줄게, 박제형 이제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다컸네. ㅇㅇ는 제형의 엉덩이를 습관적으로 툭툭 두드려주고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제형은 약을 넘기고 혀에 남은 쓴맛에 표정을 자동적으로 찡그리는 ㅇㅇ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죽어라 싸우고 또 이럴땐 언제 그랬냐는듯 달콤했다. 그리곤 제형의 품 안으로 푹 고개를 박았다. 못돼먹어도 아플 때 있어주면 좋았다. 제형은 고개를 푹 박고 열기운에 짜증 섞인 투정을 부리는 ㅇㅇ를 안아주었다.
"나 온 거 잘했지"
"nope"
(아니)
"그럼 가?"
아니 그냥 여기 있어. ㅇㅇ는 제형을 꽉 끌어 안았다. 물론 걸리기 전에 나가야했지만 제형은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쓰고 ㅇㅇ의 앞머리를 마구 헤쳐 드러난 이마에 손을 대었다. 참 매너없게 열 잰다 박제형.
"잘거야"
"알아"
"이제 가"
"싫어"
이게 은근히 같이 자려고. ㅇㅇ는 꾸물꾸물 손을 올려 제형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가끔 박제형이 없는 학교 생활을 떠올리곤 했다. 아무렴 거기엔 내가 없겠다,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본 게 박제형이었고 방금 눈 떠 본 것도 박제형인데. 이게 내 남자친구인 것도 조금 의문이네 허 참.
*
"그거 과제야? 같은 조? 무슨 내용이야"
"ㅇㅇㅇ는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또 시비턴다 또. 이게 진짜 저승도 같이 가고 싶나. ㅇㅇ는 대걸레로 제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랑 같은 조 안 해. ㅇㅇ는 제형의 발을 꾹 밟고 교실문을 쾅 닫았다. 아니 잠깐만 근데,
"나 진짜 못생겼어?"
ㅇㅇ는 다시 문을 쾅 열고 나름 꽃받침이라며 양손을 볼에 대고 물었다.
"...um"
에라이 개새끼.
ㅇㅇ는 더 말 않고 교실문을 닫은 채 대걸레를 질질 끌고 복도를 걸어갔다. 그럼 나랑 왜 사귀어, 박제형 개싫어. 나도 멀대 별로거든? ㅇㅇ는 걸레를 퍽퍽 빨아대며 열불을 삭혔다.
"ㅇㅇㅇ"
"가라"
"hey"
(야)
장난이야.
제형이 죽어가는 대걸레를 빼앗아 걸어두고 ㅇㅇ의 목을 끌어 안았다. 안 떨어져 이 거구야? 무거워 아 좀, 더워 덥다고. 버둥거려 제형에게서 빠져 나온 ㅇㅇ는 제형을 밉게 올려다 보았다. 너 싫어, 너랑 안 사귀어.
"난 너 좋아해"
"나 안 예쁘다며"
"안 귀엽다곤 안 했어"
ㅇㅇ는 제형을 향해 베시시 웃어 보였다. 아, 아!
이게 어디서 수작이야. 지랄도 지렁이가 받아먹는 지랄로 해먹네, ㅇㅇ는 제형의 정강이를 까고 홱 돌아서 걸었다. 저 기지배 진짜. 제형은 종아리를 매만지며 고통을 달랬다. 진짜 귀여운데.
3.
"아마 한동안은 안 돌아올거야. 프로젝트가 꽤 길어서"
"그게 아니어도 더 오랫동안 안 돌아올거야 제형아"
우리 이제 그만 끝이라고 인정하자.
정확히 세는 일은 그만두었으니 얼추 십 이년을 함께 했을 거다. 제형이 데려다 준 곳은 둘이 함께 살았던, 여전히 제형은 살고 있는 체코의 빌라였다. 긴 시간을 함께 했다고 권태기를 피해갔다고 모두 행복한 건 아니었고 제형도 분명 알 것이었다.
"키는 너 가져"
어쩌면 ㅇㅇ가 제형을 데려다 준 셈이었다. ㅇㅇ는 가방에서 키를 꺼내 제형에게 내밀었다. 딱딱하고 차갑지도 않은 온도의 대화와 분위기, 그렇다고 무미건조 하지도 않은 사이였다. 오랫동안 생각한만큼 그리 아프지도 않았다. 단지 제형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을 뿐이었다.
"갈게"
"그래"
"안녕"
제형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이별의 시나리오를 짜보았지만 제형은 답이 없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을까, 근데 왜 나는 너에게 대체 무엇이 궁금해 물었을까.
"더 할 말 없어?"
"..love you"
못내 나는 마지막으로 너에게 물었던 순간을 후회했다.
2. 박성진
"먼저 연락할 줄 몰랐다"
"진짜 오랜만이네"
몇 년만이더라, 우리.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림잡아 삼년 조금 더 되었을 시간이었나, ㅇㅇ는 머리를 귀에 스쳐 꽂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한 말이 있었다. 그 말을 하고 영영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야?"
"어? 어, 친구"
과거 주어였던 두 글자를 빼먹고 넘겨 소개한 관계는 '친구'였다. 성진의 입매가 쌉싸름한 맛을 머금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결국 만나긴했네 이래.
2.
"와, 또 갈궜나"
"아니이.."
"그람 또 앞담 깠나"
"것도 아니다아.."
아니 그냥 내는,
아, 댈이유가 없었다. 이번엔 정말로 연락한 이유를 댈 수가 없어 고개만 저어댔다. 고개와 동시에 몸도 돌고 돌아가 의자에서 삐죽 탈출하기 일쑤였고 그런 ㅇㅇ를 성진은 받쳐 안았다.
"이제 고만 무라"
"한 잔만 더 먹꼬오.."
"내 간다"
"알았다 그만 물게 알았다꼬"
한 번 헤어지면 누가 두 번 헤어지지 못한다고 했나. 두 사람은 달랐다 헤어짐은 정확했으나 만남은 불균형했고, 이별이 별 수 없음을 인정해버린지 오래였다. 그녀의 잦은 술주정과 꼭 뒤에 붙여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은 두 사람의 다시 연애의 스타트를 끄적였다. 그리고 성진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단지 고민과 결정 두 가지 뿐이었다.
"집 가자 ㅇㅇ야"
"아 싫타, 내 안 간다"
"내는 갈 낀데"
"그람 따라가지 모"
가시나 어디라고 또 따라오는데. 와 내는 와 못 가는데.
헤어진 연인의 대화가 맞았다, ㅇㅇ는 가끔 인정사정 없이 취하면 이별을 망각해버리는 건지 되려 성진에게 큰소리였다. 내 간다고 갈거라고 니네 집. 사실 집이 어디인지도 몰랐으나 생때도 이런 생때가 없었다. 결국 커지는 언성에 성진은 ㅇㅇ를 들춰 업고 가방을 목에 걸었다.
"아 등 다시다, 빨리 안 가나! 가라 가자"
"입 오므리고 가자. 밥은 안 뭇나, 와 이리 가벼워졌는데"
"시끄럽다. 아 쫌 빨리 가라, 뛰라 뛰어가자 박성지인"
업혀가는 주제에 요구도 많다. 성진의 목을 꽉 끌어안고 귀를 앙 물어버리는 ㅇㅇ에 성진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주정 또 나왔네, 아 아프다 이 가시내야! 니는 술 깨믄 진짜 내한테 죽었다. 또 도망가기만 해봐, 진짜 ㅇㅇㅇ. 성진은 볼을 잡아당기고 귀를 앙 물며 괴롭히고 괴롭히는 ㅇㅇ에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니 딱 서라"
들켰다. 아 자는 줄 알았는데. ㅇㅇ는 가방과 구두를 끌어안고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어젯밤이 필름 하나 끊기지 않고 생각나는 것을 보니 분명 많이 마시진 않은 것 같은데. 왜 이 문을 꼭 잡고 튀어가는게 맞을 거 같다는 생각만 드는 걸까. ㅇㅇ는 단호한 성진의 목소리에 머리를 헝클이며 성진의 앞에 조용히 앉았다.
"...미안타"
"뭐가"
"...."
"뭐가 미안한데"
말 안 해도 알면서 꼭 말해야 하나. ㅇㅇ가 덧붙인 말에 성진은 ㅇㅇ의 이마에 작게 딱밤을 놓았다.
"내 야근하다 얼마나 놀랬는지 아나"
"그라니까 미안하다꼬.."
"습관이가"
"아이다"
당장 죽어도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 네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전 애인한테 술만 먹으면 찌질하게 전화하고 데리러오라고 징징 대는데 습관이면 나가 죽어야지. 그래서 난 나가 죽어야지. 성진은 뒤로 팔을 뻗어 숙취해소제와 사탕 봉지를 꺼내 밀었다.
"이 먹고 가라"
"미안타"
"알면 전화 받던가"
*
"ㅇㅇ야 성진이 먼저 왔다, 참 경우 없는 가시네 닌 언제 내려올래?"
"아 안간다!"
"어머니 저 잠깐만,"
엄마 안돼, 주지마 나 혼난다고 안돼 엄마. ㅇㅇ는 절박하게 부탁했지만 이미 전화는 성진에게 넘어간 후였다. 아 죽었다 진짜.
-"가시내야"
"내 바빠가지고.."
-"잔말 말고 데리러 갈때까지 기다려라"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내려갈.."
-"대뽀 까지말고 집에서 기다려라"
그래 내가 잘못했다. 올라오건 내려오건 집에 딱 붙어 있을게. 성진의 전화를 피하고 피하다 연휴와 맞물려 딱 걸렸다. 분명 막히는 고속도로였을텐데 생각보다 빠르게 성진은 ㅇㅇ의 집 차임벨을 눌렀다.
"왔나"
"어머니가 싸주신거"
"니 가져가라, 내 안 먹는다"
"이거라도 무라. 니 살 쪽 빠진 거 아나"
성진은 ㅇㅇ의 어머니가 바리바리 싸준 반찬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었다. 진짜 밥 안 해먹네 가시나. 텅텅 빈 냉장고를 채운 성진은 탁자 옆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으나 다시 방 안으로 도망가려는 ㅇㅇ의 옷자락을 쥐고 말이다.
"..뭔데"
"내 무슨 말 할 거 같은데"
"모른다"
"무슨 말 할 거 같은데"
우리 청산해야 할 거 있다 아이가
ㅇㅇ는 조용히 성진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래 청산할 거 있지, 근데 그거 지금 해야 하는 거니 정말. ㅇㅇ는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못 잊었다고 인정하는게 뭐 그리 어려운건지,
"내가 말 하까"
"아님 니 입으로 말 할래"
"아, 알았다 알았다 고마 내 니 몬 잊었다! 몬 잊어서 전화 해가꼬 또 진상진상 개진상 피우고 했다 우짤래 응? 뭐!"
하여튼 못돼처먹었어 진짜. 빠르게 토로하는 ㅇㅇ의 진심에 성진은 웃어버렸다. 내 다루는데는 도를 텄지 진짜 저 화상. ㅇㅇ는 성진은 못내 노려보다 몸을 일으켜 컵을 꺼냈다. 너만 보면 진짜 속타오른다 정말로, 박성진 여튼 저거 으유. 냉수를 받아 꼴깍거리는 ㅇㅇ의 머리칼을 흩뜨리며 성진은 ㅇㅇ가 쥔 컵을 빼앗아 물을 마셨다.
"내도"
"내도 니 몬 잊어가 전화 기다렸다고"
2-1
여기 우리 진짜 많이 왔는데, 아마 건물도 두 번 바뀌지 않았나? 여튼 박성진 고르는 취향하고는. ㅇㅇ는 성진과 함께 영화관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았다. 성진은 영 넥타이가 답답한지 약간 잡아당겨 풀고 단추를 하나 끌러내렸다. 사내연애의 장점이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점, 뭐 한 달 전까진 단점이었지만.
"손 도"
"와"
"도"
ㅇㅇ는 뜬금없이 손을 내밀곤 달라는 성진의 이야기에 성진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얘 왜이래 손 뭐.
영 성진의 말에 답이 없는 ㅇㅇ에 성진은 그냥 ㅇㅇ의 손을 잡아 깍지를 껴잡았다. 전과 같았으면 덜덜 떨기라도 했을지언정 성진은 깍지낀 ㅇㅇ의 손을 잡은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문제는 졸렸다. 이틀 동안 잠을 설쳐 따뜻한 히터와 캄캄한 영화관은 이거 그냥 잠들라는 거 아닐까. 얜 졸리지도 않은가 어제도 야근했다면서.
"내 이럴줄 알았다"
"못 잤다고.."
"나가까. 집 가서 편하게 잘래?"
"됐다. 끝나면 깨워라"
한참 영화가 진행 중인 터 성진의 어깨를 파고드는 ㅇㅇ에 성진은 어이없게 웃곤 제 벗어둔 수트를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냥 뜨시가 잠만 자겠네 가시나.
*
"참 잘도 자대. 영화 니가 골랐다, 아나"
"안다"
"아 야!"
왜 뭐 어쩌라고. 등딱지에 이미 업힌 거 뭐 떼어내기라도 할래. 성진의 등에 와다다 달려가 퍽 업히는 ㅇㅇ에 성진은 그런 ㅇㅇ를 떼어내고 돌아섰다.
"와 봐"
"아 업어줘"
"알았다 빨리 와 봐"
성진은 제 수트를 ㅇㅇ의 허리에 꼭 묶어 둘렀다. 가시나 치마 입고 폴짝폴짝, 얼라가. 성진은 다시 ㅇㅇ를 업곤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넓직하고 따뜻한 등에 얼굴을 부비며 ㅇㅇ는 성진의 목을 끌어 안았다. 향수 좋네 아직도 향수 모으나.
"오늘 고맙다. 내 진짜 사표 던질 뻔 했잖아"
"성질 쫌 죽여라 진짜 던질 뻔 해가 나선 거다"
"내 니 없음 우짤뻔했노, 지짜 속상했다 내"
'"안다"
점심도 챙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던 차 ㅇㅇ보다 두 직급이 높은 성진의 도움으로 오늘도 파란만장하다 못해 그지같은 회사 생활을 연명했다. 박성진 이럴 땐 쓸모있다니까. 근데 좀만 빨리 가면 안 돼? 거북이냐. ㅇㅇ는 다리를 달랑거리며 집으로 가는 내내 재잘거렸다. 성진은 그런 ㅇㅇ의 목소리를 귀기울이며 뜨문뜨문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우면 뽀뽀라도 해주던가"
"미칫나"
"남자친구한테 미쳤나가 뭐고"
"돌았나"
"가시내야"
진짜 미치고 돌았나, 무슨 뽀뽀람. 남사스럽게 진짜. ㅇㅇ는 답 대신 똑띠 꿈에서 깨라며 성진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투닥투닥 걷다보니 ㅇㅇ의 집이 보였다, 성진은 그제야 ㅇㅇ를 집 앞에 내려주곤 현관 앞 전등을 휘휘 저어 켰다.
"잘가라"
가서 디비 자지 말고 내한테 전화해라. ㅇㅇ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으나, 이내 다가온 성진에 의해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세워졌다.
"ㅇ,"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 성진은 ㅇㅇ의 뺨을 쥐고 입술을 맞춰왔다. 찬바람에 살짝 튼 입술이 닿고 이내 톡톡 입 안을 살짝 열었다.
"내 진짜 간다, 잘자라"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말을 꺼내려던 차 성진은 웃으며 ㅇㅇ의 머리를 헝클이곤 돌아서 걸었다.
3.
"친구제"
"..."
"그래 우리 친구 맞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ㅇㅇ의 말에 동의했다.
"내 매년 여 있을 기다"
"니 잊어먹을때까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순간 성진이 말했다. 잊지 못하면 돌아오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묻어두고고 지냈다. 옮긴 회사는 괜찮냐, 잘 지냈냐 묻고 싶었으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입술을 물었다. 이러려고 만나자한게 아닌데.
"..저기,"
"내 결혼한다"
"..어?"
"다음 달에"
ㅇㅇ보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성진이었다. 너도 잘 지내고 있었구나, 마음이 놓이면서 뭔가 묵직하게 답답한 게 툭 걸려드는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 성진은 꽤나 안정된 표정이었다.
"그냥, 우리 오래 만났으니까. 니는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어 그래, 축하해. 진짜"
"니한테 축하한다는 말 들을 줄 몰랐는데"
"...이래 됐네"
그냥 너한테 조금 더 빨리, 그냥 아무생각 말고 돌아갈걸. 나, 왜 망설였을까. 성진은 괜시리 앞머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ㅇㅇ야"
"..어, 응?"
"내 간다"
그냥 우리 엇갈릴 인연이었던거다. 니 또 가다 술 묵지 말고 바로 집 가라. 알았나
ㅇㅇ는 성진의 말에 따라 일어나려했으나, 아니 금방 사라진 성진에게 전화를 걸어 붙잡으려 했으나 이내 모든 것을 관두었다. 성진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단지, 성진을 놓기까지 애를 먹는 ㅇㅇ를 위한 성진의 거짓말이었을뿐이었다.
안녕 나의 십대. 안녕 나의 이십대. 안녕 나의 순간
3. 강영현
"오늘은?"
"싫어요"
"와이셔츠나 주세요"
나 진짜 나가야하거든요? 길 자꾸 막지 마요 진짜. ㅇㅇ는 영현이 건넨 와이셔츠를 꿰어 입었다.
"움직이지 좀 말아봐"
"단추 잠그고 있잖아요"
한 마디를 안 지지 너. 영현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ㅇㅇ의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주었다. 실핀으로 헝클여 튀어나온 잔머리까지 실핀으로 잘 고정해준뒤 영현은 돌아서 앤틱한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건넸다. 다정하게 굴지 마요 안 빼준다니까. 누가 뭐래?
"갔다 안 들어올거야"
"찾는데 오분도 안 걸리는 거 알지?"
"근데 600년 동안 못 찾았어요?"
"기다린거지"
"말이나 못하면"
ㅇㅇ는 문을 쾅 닫고 익숙하지 않은 구두의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나갔다. 아주 못됐어, 600년은 더 썩어야돼 진짜.
2.
"아 싫어요..."
"알바 잘라버리기 전에 학교 가 얼른"
"진짜 아프다니까?"
아저씨는 얼마나 아픈지 모르잖아요. 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ㅇㅇ는 이불을 데굴데굴 말아 퍽이나 시위를 했다. 날도 춥고 감기에 들렸고 그 날이다. 아니 그냥 학교에 가기 싫었다. 무시 받는 거 아저씨는 모르잖아요, 그게 얼마나 지독하게 아픈 건지.
"너 점점 어리광 심해져. 알아?"
"어리광 아니에요"
끝내 ㅇㅇ는 영현에게 소리쳤다. 그냥 가버려, 아니 내가 나갈거야. 영현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간 건가, ㅇㅇ는 베개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깜짝이야, 이 도깨비 진짜.
"무슨 일일까"
"알아서 뭐할 건,"
순간이었다. 시야가 어두컴컴하게 가려졌다. 그 무엇의 묘술도 아닌 영현의 품이었다. 왜 갑자기 안아주고 그래요 진짜 서럽게. ㅇㅇ는 영현의 품을 끝내 적시고야 말았다.다 미워, 나갈 거야. 괜시리 영현에게 화풀이를 해댔지만 영현은 그렇게 엉엉 우는 ㅇㅇ를 토닥였다.
"수능 볼 거라고 약속해"
"약속하면 뭐 어떻,"
"옆에서 끼고 가르쳐야지"
"내가"
영현은 ㅇㅇ의 머리칼을 치워 뽀얀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에다 해주면 안돼요? 안돼. 왜요. 잡혀가
"참나"
"아저씨한테 말 좀 할래?"
"뭘요"
"힘든 거"
그래야 내가 널 안아줄거 아니야. 안아줄 수 있을때, 응? 영현은 조막만한 ㅇㅇ를 다시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 작은 아씨 하나 데리고 있는데 속은 엄청 썩여 알고나 있어? 내가 언제 속을 썩여요. 영현은 ㅇㅇ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고 몸을 일으켰다.
2-1.
"아저씨 어때요?"
"뭘?"
바뀌었잖아요. 뭐가. 똑바로 봐봐요 이 사람아. 이 사람아?
ㅇㅇ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눈썰미 하나 징하게 없네, 아니 해가 바뀌면서 노안이라도 온 거야? 서툰 손가락으로 눈두덩이에 색을 입히고 붉어진 입술을 확인했으나 이 늙은 도깨비는 하나도 눈치 채질 못하니 ㅇㅇ는 퍽 서운했다.
*
"어어. 엄마 엄마야!"
"조심, 조심해"
영현은 금방 ㅇㅇ에게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처음이라그래요, 처음이라. 화장도, 스케이트도, 데이트도 처음이라 그렇다고요. 끝까지 예쁘게 꾸민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영현에게 삐쳐 혼자 나아가려 했으나 빙상은 시린 것보다 아주 미끄러웠다. 나 놀리려고 여기로 온 거 분명해. 드럽게 나쁜 도깨비.
"잡아줄게"
뒤에서 천천히 ㅇㅇ를 따르던 영현은 웃으며 ㅇㅇ의 손을 쥐었다. 걸음마 가르쳐달라 한 적 없어요. 걸음마? 영현은 ㅇㅇ의 말에 웃음이 비식 터졌다. 퍽 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보이기야 했으니. 뒤뚱뒤뚱 그러나 차근차근 입술을 모은 채 영현의 손을 쥐고 한발씩 나아가는 ㅇㅇ를 영현은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배고프지, 좀 사올게. 타고 있어"
생각 외로 에너지소비가 빠른만큼 영현은 어느정도 걸음을 떼는 ㅇㅇ를 보고 잠시 스케이트장을 나섰다. 영현의 걸음을 따라가려면 한참 적응해야했지만 ㅇㅇ는 입술을 깨물며 영현의 걸음을 쫓았다.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어어어"
얼마나 기다렸을까, 꽤나 스케이트에 적응한 ㅇㅇ는 멀리서 보이는 영현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순간 앞을 홱 지나치는 타인에 의해 빙긍빙글 중심을 차마 잡지 못하고 휘청이던 ㅇㅇ는 익숙한 품 속으로 푹 들어가 앉았다. 와 넘어지는 줄 알았네. ㅇㅇ가 안도의 숨을 내뱉고 올려다보았을땐 너무도 당연하게 영현이 있었다.
"깜짝 놀래키게 할래 너?"
"내 잘못 아니잖아요"
"코트 때문에 화장 뭉..."
방금 뭐라고 했어요? 딱 걸렸어.
영현은 급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ㅇㅇ의 표정엔 마치 승리를 쟁취한 이의 미소와 비스무리하게 번지고 있었다. 알면서 그냥 꿀떡 넘어가려했다 이거지.
"발 아파요 잠깐 쉴래요"
"..어, 그래"
영현은 ㅇㅇ를 일으켰다. 그리곤 이내 앉아 낑낑거리며 스케이트를 벗기 위해 버둥거리는 ㅇㅇ의 앞에 앉아 신을 잡았다. 스케이트를 대신 벗겨주는 내내 말이 없는 ㅇㅇ의 눈치를 살피며말이다. 이내 신을 모두 벗어 부츠를 앞에 놓아주었을쯤, ㅇㅇ는 입을 열었다.
"그냥 예쁘다고 말해요"
"뭐?"
"빨리"
빨리요, 지금.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니 이 귀여운 요구에 헛웃음을 짓던 영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
"너"
순간 ㅇㅇ의 얼굴에 맑은 꽃 한 송이가 피었다. 들었다, 예. 이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쥐는 영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덜컥 끌어안은채 어깨에 얼굴을 묻는 ㅇㅇ에 영현은 웃음을 다시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말해도 돼요"
수능도 잘 봤고 대학도 붙었고 난 스무살이에요. 이정도면 좀 알아들었음 좋겠어요.
ㅇㅇ는 영현의 귓가에 줄줄이 말을 늘어 놓았다. 신부한테 해주고 싶은 말 있을 거 아니에요, 아무도 안 잡아가니까 이제 좀 말하라고. 그때였다. 덜컥 목을 끌어안은 ㅇㅇ를 안아 올린 영현을 ㅇㅇ를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너라서 다행이야"
"아니 그거 말고,"
"사랑한다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만난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어. 네 집 앞에서 널 데려왔을때부터 쭉, 항상말이야.
3.
"예쁘네"
"..."
알아요 아는데,
ㅇㅇ는 웨딩드레스의 자락을 쥐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는 옷,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일. ㅇㅇ는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내일 하자.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또 내일, 그리고 다시 내일. 머뭇거리는 ㅇㅇ의 뺨을 영현이 살짝 쥐어보였다.
"고마워"
"아무말도 안 할거라고 했잖아요"
"알겠어"
화장 지워지게 울지만 마 응? 영현은 그렁그렁한 ㅇㅇ의 눈에서 눈물이 추락하기 전 투박한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어느 날 피었던 꽃들보다 아름답고 맑았다. 너무 오래 지체해버려 못내 상처를 입히는 것 또한 사라지며 받을 벌이었다. 영현은 ㅇㅇ의 얼굴을 따뜻하게 주시했다.
"갈게"
"아무말도 안 하기로 했잖아"
미안, 미안해. ㅇㅇ는 이내 눈물을 박박 닦아냈다. 쉽사리 진정이 될리가 없었다. 살며 이렇게 사랑하는 남자를 내 손으로, ㅇㅇ는 영현을 충혈된 눈으로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가지마요. 아니 원망이 섞였으나 간절한 시선이 맞았다. 그제서야 영현은 ㅇㅇ의 양손을 쥐었다.
"싫어"
"ㅇㅇ야"
"안 할래요. 안 뽑을래, 하기 싫어요. 아저씨"
결국 터져버렸다. 영현의 손을 뿌리치고 양손을 영현이 잡지 못하게 뒤로 했다. 어떤 모습으로든 옆에만 있어요, 집에서도 나가고 하라는 거 다 할게 아저씨. 응? ㅇㅇ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지만 않았으면.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울음을 퍽 터뜨린 ㅇㅇ의 앞에서 영현은 건넬 수 있는 이야기에 한계가 존재한다느 사실을 알았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사랑한다는 고백도, 소멸에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영현은 ㅇㅇ를 다시끔 안아주었다. 드레스가 부스럭거리며 ㅇㅇ는 영현에게 더 가가가 껴안았다.
"가지마요. 싫다니까 내가"
"손 잡지마요, 잡기만 해봐. 진짜야 진짜에요"
목이 쉬면 내일 학교갈 때 아플텐데. 눈도 부으면 찜질해야 할 텐데.
진이 빠져나가도록 우는 ㅇㅇ의 앞에서 영현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라앉힌뒤 ㅇㅇ의 뒤로 감춘 ㅇㅇ의 양손을 쥐었다. 끝내 싫다 엉엉 울며 저항하였으나 영현이 ㅇㅇ의 손을 쥐고 가슴팍 가까히 올렸을땐 검이 잡혀버렸다.
"하지마, 하지마요. 끅, 하지말라고!"
"오랜 시간 미워만해. 오랜 시간 사랑하지만 마"
"그건 나만 해도 돼"
영현의 힘에 이기지 못한 채 억지로 잡은 검은 순순히 뽑혀 들기 시작했다. 검이 뽑히기 시작하고 ㅇㅇ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아저씨 가면 나는 여기서 혼자 어떻게 있어야하는데요. 그리 오랫동안 기다렸고, 그리 오랜 시간을 끌었으나 검이 뽑히는 것은 순간이었다. 어느새 ㅇㅇ의 손은 털썩 허공을 저으며 떨어졌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숨결이 사라져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사랑해요"
"아저씨"
흩어지는 순간에 영현의 입술이 ㅇㅇ의 입술을 포개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입맞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신부.
4. 김원필
"가기 전에 로또번호 알려주면 안돼?"
"그런 건 모르거든?"
"앞에, 딱 한 자리만"
"모른다니까..., 2"
봐봐 알잖아. ㅇㅇ는 발끝으로 서 원필의 머리칼을 부스스 흩뜨렸다. 이렇게 조금 더 서글프지 않았음 했다. 네가 덜 힘들게 떠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으니까. 원필은 장난끼를 전혀 섞지 않은 채 ㅇㅇ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말 좀 해봐, 어색하게 진짜.
"미래에서 나는 어떻게 돼? 너랑 다시 만나?"
"...응"
뭐야. 잠깐 떨어지는 거잖아. 속상할 뻔했네, 담 생에 또 만나게 해줄 순 있어? 그건 못하거든? 내가 신이냐. 원필 역시 ㅇㅇ의 머리칼을 헤집어 흐뜨렸다. 원필의 눈동자의 담긴 ㅇㅇ의 모습은 그저 해맑았다.
"시간 없다며 빨리 가"
"내가 떠났음 좋겠어?"
"미래에서 만난다며, 야 빨리 가서 살고 있어. 누나가 금방 간다"
"누가 누나야, ...진짜"
그렇다면 그런줄 알어. ㅇㅇ는 원필을 툭 쳤다. 진짜 간다. ㅇㅇ가 고개를 끄덕이며 원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응, 미래에서 봐.
2.
"헛소리 하지마"
뭐 이런 놈이 붙었어? ㅇㅇ는 기가 찬 헛웃음을 내뱉고 유도복을 끌어 올렸다. 미래에서 왔다고? 내가 미래에 네 애인이라고? 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어떻게 경찰대 들어온 거야 저 띨빵이가. ㅇㅇ는 가차없이 원필을 업어 내리쳤다. 냉수 먹고 정신 차려라 진짜.
"진짜라니까? 진짜라고"
"빨리 자세나 다시 잡아"
원필은 유도복을 여미며 자세를 잡았다. 여튼 이때부터였고만, 당찬 게. 한참을 유도복 자락을 쥐었다 떼어내던 차 원필은 ㅇㅇ의 다리를 제대로 걸었다. 아, 아아. 뒤로 확 자빠지던 찰나 원필은 ㅇㅇ의 옷자락을 붙잡아 천천히 매트 위에 내려주었다.
"쫄았어?"
"..이, 야 죽을래?"
"아아니"
아 저거 해맑아서 때릴수도 없고 진짜.
*
이 띨빵이는 삼개월째 헛소리를 했다. 그리곤 매일을 쫓아다니니 나 진짜 자퇴할까.
원필은 매일 ㅇㅇ의 기숙사 호실 앞에 야생화를 꺾어 내려두곤 했다. 대체 저 야생화는 어디있는거야 다 뽑아버릴라.
"크리스마스 나랑 보내니까 좋지 응?"
"닥츠 너 때문에 남자친구도 못 만들고..씨"
크리스마스 외박까지 따라오다니 ㅇㅇ는 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원필을 피해 빠르게 걸었다.
"괜찮아?"
"야 너..,"
"뭐야 다친데 없어?"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 옆으로 쏟아진 오토바이에 ㅇㅇ를 끌어안고 넘어진 원필이 급하게 물었다. 왼손으로 ㅇㅇ의 머리를 받치고 그 위로 넘어져 놀랐기야했지만 다치진 않았다. 그보다 김원필 너.
"미쳤어? 다치면 못 돌아간다며! 아 띨빵아!"
"믿어주는거야?"
"...ㅇ, 아니 그런게 아니고 네가 자꾸 옆에서 헛소리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잖아. ㅇㅇ는 원필의 양볼을 쥐고 휙휙 돌려 상처를 살피며 답했다. 다행히 다친데는 없는 거 같네. 원필을 일으킨 ㅇㅇ는 코트를 털고 떨어진 휴대폰을 주웠다. 뭐야 야 자정 지났잖아, 아. 확인한 시간은 12시 2분을 넘기고 있었다.
"네 헛소리에 말려가지고 내가 진짜"
"너 따라오지마"
이제부터 솔로크리스마스 만끽할테니까.
ㅇㅇ는 원필에게서 홱 돌아 걸어나갔다. 따라오던지 말던지 너 때문에 자정종 울리는 것도 못 들었잖아.
"ㅇㅇ야"
"ㅇㅇㅇ-"
"아 ㅇㅇ야"
"아 왜! 왜 또 뭐!"
이게 뭐야. 꽃.
귀찮음에 몸을 틀었을땐 원필이 꽃다발을 내밀고 서 있었다. 매일 아침에 놓아두던 꽃의 다발이었다. 이거 나 받으라고?
"크리스마스잖아"
"선물이야"
너 이 꽃 좋아했어.
ㅇㅇ는 원필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점점 헛소리가 아닌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ㅇㅇ는 조용히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잠깐만 와봐"
"응?"
그냥 답례야.네가 하도 헛소리하니까 안쓰러워서 답레하는 거야.
물음표를 물고 다가선 원필을 ㅇㅇ는 퍽 껴안았다. 암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말하면 놓을거야. ㅇㅇ의 이야기에 원필의 웃음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왔다. 원필은 ㅇㅇ의 오른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그대로 제 입술을 도장마냥 꼭 찍었다.
"..입에다 하면 맞을까봐"
"손등에 하면 안 맞을 거 같았냐? 너 이리 안와?"
한달음에 저멀리 달려가는 원필을 ㅇㅇ는 빠르게 뒤쫓았다. 너 잡히면 진짜 그대로 죽일거야. 안 와 빨리?
3.
-"가상 현실이 종료되었습니다"
"일어나시죠"
원필은 링크가 열림과 동시에 쏟아지는 빛을 눈으로 가렸다. 매번 하는 건데 왜 또 우십니까.
"매일 그리우니까요"
원필은 버튼을 조작해 칩을 꺼냈다.
사람의 기억을 기반으로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시스템. 원필과 함께 한 지 단 4년만에 죽어간 원필의 전부.
-"자꾸하시면 피실험자 역시 뇌의 손상으로 사망의 확률이 커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살아있는게 뭔데요"
원필은 찬 물에 얼굴을 씻어내리며 딱딱하게 답했다.
"연구실 닫아요"
원필은 링크의 전원을 끄고 ㅇㅇ의 그림이 이곳저곳 걸린 연구실의 불을 전부 소등했다.
이곳이 그가 사는 미래였다.
5. 윤도운
"안 가면 안 돼나"
"응 안돼"
"내가 신랑이라매"
"귀신이랑 살 거야?"
도운은 입을 다물었다. 가시나 하여튼, 절대 안 질라카네.
2.
"서방 서방 서방 야야 윤도운. 윤도운!"
"와와 또 와"
무서운 꿈 꿨어. ㅇㅇ는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는 도운의 품으로 도르드 달려와 퍽 안기곤 벌벌 떨었다. 와 저승사자라도 나왔나, 굴을 파고들어갈 기세의 저음으로 퍽 웃는 도운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귀신이 무서븐 것도 있나"
몸을 일으킨 도운은 어깨를 찰싹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스운지 실실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야야 어디가 윤도운,
"와봐"
몸을 일으킨 도운은 ㅇㅇ를 천천히 안아주었다. 틱틱거려도 ㅇㅇ를 품에 꼭 도운은 벌벌거리는 ㅇㅇ의 등을 쓸어주며 스탠드를 켰다. 무서븐 거 다 도망가뿔게 불 켰으니까 괘안타. 도운의 토닥임 덕에 몸을 벌벌거리던 떨림이 줄어들자 도운은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깔았다.
"거기서 잘 거야?"
"와, 같이 자자꼬?"
당연하지.
"가시나 발랑 까져가지고, 빨리 누워라"
"...무섭다고"
"그래가꼬 내가 니 방 가서 자라 안 카고 내 여 누워 자잖아"
"치"
ㅇㅇ는 도운을 애타게 바라보다 결국 도운의 침대 위에 폭 누워 이불을 덮었다.
"이불 다 끌어올려 자라. 감기 들린다"
"..ㅇㅇㅇ, 야"
이거. 잡아라
도운은 침대 밑으로 떨어진 ㅇㅇ의 손을 톡톡 쳤다. 이 잡고 자라꼬. 쑥쓰러운 모양인지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으나 해맑은 표정으로 다시 도운의 손을 꼭 잡는 ㅇㅇ에 도운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 톡 치면 불 날 거 같애, 네 귀"
"..안다"
"자라 빨리"
도운은 애써 팔로 눈을 덮으며 답했다.
2-1.
"홈런은 언제 터져?"
"내가 아나"
"나 이렇게 시끄러운데 재밌는 곳 처음 와봤다?"
"맞나"
반응 한 번 참, 영 무뚝뚝한 도운은 최선의 대답이었으나 ㅇㅇ는 입술을 삐죽였다. 신랑감 잘못 골랐어,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지. 그러나 ㅇㅇ는 그런 도운을 두고 꽤나 즐거운 분위기를 타며 목이 나가라 두산을 응원했다. 어어어, 호, 홈런
"아, 아 잠시만요"
날아오는 볼을 따라 잡으려는 인파에 밀리다 그들을 투과해버리는 ㅇㅇ를 본 도운은 ㅇㅇ를 꽉 들어안았다.
"참 거칠게도 돌아댕기네, 니 괘안나"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겁을 먹은 ㅇㅇ는 도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도운은 이내 ㅇㅇ의 손을 잡고 야구장을 나갔다. 아를 이래 미니까 겁을 먹지, 아 진짜. 도운은 ㅇㅇ의 손목을 쥔 채 야구장 밖 벤치에 앉히고 나서야 그 역시 화가 누그러졌다.
"치킨 맥일라켔는데 걍 가자 집에"
"왜, 나 더 볼래"
"오면서 티켓 버렸다 가자"
"나 꺼낼 수 있어"
나 더 보고 싶단 말이야, 어? ㅇㅇ는 도운의 유니폼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 가시내 진짜.
"니 아까 겁 이따시 묵고 있던 거 내 못 봤겠나. 가자 치킨 사주께"
약간 언성을 높였던 도운은 머리를 헤집고 ㅇㅇ의 손을 잡았다. 미안타, 가자. 분명 걱정으로 찬 화였다. 너 나 걱정했구나? 그럼 가자, 집. 금새 또 도운에 의해 밝아진 ㅇㅇ는 도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몸을 돌렸다. 가시내 단순하게 진짜.
"야구장에서 못 사줬으니까 여서 사주께 맥주 골라와라"
"응"
야야 한 두개 사오라켔지, 누가 다 먹으라고. 도운의 말에 정말 한아름 맥주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ㅇㅇ에 도운은 급하게 맥주캔들을 받았다. 이 음료수 아니라켔지. 캔에 있잖아. 도운은 얼굴을 쓸어내린 뒤 어이없게 ㅇㅇ를 바라보았다.
"아 하지마!"
"반피가"
캔에 있음 다 음료수냐. 도운은 퍽 귀여운 발언에 웃으며 ㅇㅇ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아 저게 진짜. 신랑이라고 봐줬더니, ㅇㅇ는 도운의 머리칼을 똑같이 헤집으려 콩콩 뛰었으나 그에 반도 미치지 못하고 관둘 수 밖에 없었다. 전에는 엄청 쪼끄만했으면서.
"내가 들게, 가자"
도운은 ㅇㅇ가 고른 맥주가 담긴 봉지를 왼손에 든 채 털레털레 걸어갔다. 같이 가, 신랑.
"근데 와 내가 신랑이고"
"신랑이니까"
"그니까 와"
도운은 문득 ㅇㅇ에게 돌아서 물었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신랑, 서방 거리며 따라다니더니 몇 개월만에 도운의 삶에 눌러앉은 이 처녀귀신에게.
"말하자면 어엄청 길어. 그냥 넌 되게 좋은 집 도련님이었고, 나는 좋은 집 아씨였다나. 근데 혼인을 약속하곤 내가 죽었대"
"어쩌다"
"내가 목을 매달았대"
"..니가?"
"일종의 벌이지. 처녀귀신으로 죽어서 신랑 찾을 때까지 성불 안 시켜준다나 뭐라나 사실 나도 잘 몰라. 내가 왜 죽었는지, 내가 왜 귀신이 됐는지"
ㅇㅇ는 아무렇지 않게 도운에게 이야기를 건넸으나 도운은 묵묵한 침묵만 이을 뿐이었다. 몰라 언제 성불 시켜주는지, 이렇게 또 천년을 사는 건지. 한참을 떠들며 홀로 걷던 ㅇㅇ는 빈자리를 느끼고 뒤를 돌아섰다. 너 왜 거기 서 있어?
"니 이마 함 까봐라"
"왜"
도운에게 총총 돌아간 ㅇㅇ는 의심 하나 없이 이마를 들췄다. 그 하얀 이마에 머뭇거리던 도운은 눈을 질끈 감은채 입술을 갖다 대었다. 말 그대로 입술 박치기였다.
"...뽀뽀도 못해 봤담서"
"너도 못해본 거 같은데?"
"이람 성불시켜주는 거 아이가"
글쎄 나도 잘,
순간이었다. ㅇㅇ의 양볼을 쥐고 입술을 맞춘 도운이 ㅇㅇ의 입술을 물었다. 퍽 모든 게 서툴었다. 키스 같은 건 생전에 처음, 아니 이또한 그저 무언가 홀려 이끌렸으니 서툴기만한 애매모호한 키스였다. 그리고 입술을 뗀 도운은 손등으로 실타래를 쓱 닦아주었다.
"...그러니까,"
"...가자"
3.
도운은 현관에 서 입술을 깨물었다. 예고없이 불쑥 왔다 다시 불쑥 가는 건가. 그렇게 보내기에 도운의 삶에 눌러 앉은, 아니 베어있는 ㅇㅇ를 다시 하나하나 떼어내라니. 도운은 착잡한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따라가도돼나"
"너도 천년 기다릴래? 자기 손으로 명 끊으면 천년이야. 서방"
"니는 와 가는데"
"나도 몰라"
그냥 가야한대. 이제 올라가나보지 뭐.
도운은 목구멍이 답답했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대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어 꾹 삼키려하고 있었다.
"서방"
"와"
"담 생엔,"
"담 생에도, 내 신랑 해주면 안돼?"
이건 부탁. 죽기 전, 아니아니 올라가기 전에 하는 부탁이야. 다음 생엔 오래 살고 귀신으로 안 올게. 그리고 더 예쁘게 태어나서 찾으러 올게, 그러니까
"담 생에도 내 신랑으로 있어줘"
"..알겠지?"
도운은 목구멍을 막는 이야기에 결국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ㅇㅇ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담 생에서 우리 보는 거다 알았지?"
"..알았다고"
"안녕, 신랑"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이내 철컥, 빠르게 문이 닫혔다. 아, 도운은 그제야 다시 문을 열어젖혔다.
"...아, 아"
목구멍이 갑갑했던 말이 있었다. 도운의 머릿속을 누군가 빠르게 스친냥 순간의 과거를 몇장의 파노라마를 보이곤 흩어졌다. 과거도, 지금도 다시 놓친 전하지 못한 진심. 전하지 못한 말은, 사랑한다는 그 짧은 한 마디였다.
-End-
해석 아닌 해석 |
1.박제형 오랜 연인의 이별 (10대 연애) 2.박성진 오랜 연인의 이별(20대 연애) 3.강영현 도깨비 모티브 4.김원필 미래에서 죽은 연인이 그리워 연인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을 조합한 칩으로 가상현실을 만들고 매일 연인을 만나는 남자의 이야기 5.윤도운 여주의 끝은 '성불'이 아닌, '소멸'이었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직접 '사랑'을 전해받지 못해 처녀귀신이 되었고 결국 현재도 똑같은 상황으로 결국 소멸되어버린 결말입니다. |
정말 오랜만입니다.
꾸준히 병원을 다니며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준비중이며 얼굴을 비추기 위해 짧게 가져와 보았습니다. 조각글이라 뚝뚝 끊어지는 글이지만 너그러히 봐주시길 바랍니다:)
천천히 준비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