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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제곱 , 02 

 

 

 

짜증이 났다. 변백현은 그 날 이후로 거의 도피하다시피 내 얼굴을 마주보지 않았다. 우린 딱히 마주칠 일이 없는 사이였다. 원래 친한 것도 아니었으며, 같은 반도, 같은 무리도 아니었다. 그걸 잘 아는 경수기에 괜시리 잘 정돈된 머리를 헝크려도 보고, 길가의 돌을 발로 찼다가 다리를 맞고는 한다. 

 

" 뭐하냐, 도경수. " 

 

변백현이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 왜 갑자기 친한 척해? ` 라고 묻고 싶었지만 변백현과 무슨 사이도 아닌지라 머쓱하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백현을 보니 여러 생각들이 겹쳐 혼란스러워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말 없이 백현에게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 어디가. " 

 

대답없는 경수의 등에 다시 한번 ` 야! ` 라고 소리치는 메아리가 반사되어 나간다. 경수의 등은 정말이지 강철등이었다. 반사가 잘 됐다. 

 

 

 

 

집에 돌아와보니 내심 후회가 되었다. 아니, 모르는 척 했을때는 언제고 찾아오니 제 발로 까고 있다. 황당한 마음에 ` 도경수 똥멍청이, 핵멍청이! ` 라는 말을 반복하며 괜시리 머리를 때려본다. 열심히 일하고 있던 경수의 뇌세포는 폭격을 맞았다. 교복을 벗지도, 씻지도 않은 채로 침대에 누운 경수는 마치 1년 야근 한 사람같은 피곤한 얼굴로 바로 잠에 들었다. 

 

 

" 도경수. " 

" 내 이름 부르지마. " 

" 부르지마? " 

" 어. 부르지마. ” 

” 부르, 부르주아 ” 

" 그게 무슨 개소리야? " 

" 부르주아, 부르주아! ” 

 

하아, 꿈에서 깨어났다. 백현이 뜬금없이 부르주아를 연신 찾으며 울부짖는 정말이지 개같은 꿈이었다. 꿈 속의 백현은 인중을 한 대 때리고 싶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선, 시계를 확인했더니 아직 2시밖에 되지 않아 교복 넥타이를 풀기 시작한다. 

 

잠옷, 잠옷이 어디갔지. 옷장 두번째에 항상 걸려있던 파란색 줄무늬 잠옷이 없었다. 세탁했나보네. 대충 아무거나 잡아입어야 겠다. 했는데 잡히는 것들은 엄마가 ` 나는 딸을 낳았으면 했어! ` 라고 소리치며 강요하던 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잠옷과, 리본이 달린 멜빵뿐이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 뿐이었다. 

 

씨발, 이게 뭐야. 

 

경수는 풀리지 않는 교복 단추를 신경질적으로 풀며 의자에 던지듯이 걸쳐놓았다. 분홍색 레이스가 정말 거슬렸지만 뭐 어떤가, 아무도 보지 않고 있을텐데. 잠결에 휴대폰을 던졌던 것 같은데. 아닌가? 꿈에서 백현이가 ` 부르주아, 부르주아! ` 하며 다가오던 때에 나도 모르게 옆에 있던 무언가를 던져버린 것 같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튼 내일은 학교를 가야했고, 학교의 노예인 학생 신분이었던 도경수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꽃고 선, 발 닦고 잤다. 

 

 

 

 

” 미친 -, 도경수 왜 카톡 씹어? " 

" 아. " 

 

카톡이 왔긴했나. 어제 자고 일어난 이후로 전혀 한번도 만져보지 않은 휴대폰을 떠올렸다. 19 요금제다. 300메가도 안된다고. 데이터를 절약하는 경수에게 예고없이 카톡을 보내대는 백현은 참 곤란한 아이였다. 

 

" 내일 놀래? " 

" 아니. ” 

" 모레는? " 

” 아니. ” 

" 내일모레글피는? ” 

" 왜. “ 

" 시간 나는구나. " 

 

대답이 달라진 경수를 보던 백현이 방긋 눈을 접어 웃는다. 책을 정리하던 경수는 움직임을 멈추고 백현을 바라보았다. 누구네 아들인지, 잘생겼다. 변 가네 아들이겠죠? 아들 하나는 정말 기막히게 낳으셨습니다. 아닌가, 변백현이 세포분열을 잘 한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멍하니 서있던 경수는 곧 시야에 백현의 손이 몇번 움직이자 초점을 맞췄다. 

 

" 듣고 있어? " 

" 어어. " 

" 피씨방 갈래? ” 

” 담배냄새 때문에 싫어. " 

 

백현은 엄청난 고뇌와 갈등을 겪고 있는 듯 했다. 선택장애 변백현에게 이런 막중한 미션을 떠맡긴게 내 잘못이다. 경수는 지나가는 말로 ` 요즘 피곤해서, 집 말곤 영 가고 싶은 곳이 없네. ` 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 말에 백현의 눈이 반짝였던 건 아마 착각이겠지? 백현은 웃으며 ` 그럼 너희 집 가자! ` 라고 했다. 눈이 석영처럼 빛나서 뜰 수가 없었다. 내 눈은 이미 손상됐다.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니 ` 와아아악 신난다 ` 라며 괴상한 추임새를 넣고 반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우리집은 변백현 네 처럼 미모와 아름다움을 중시한 집이 아니었다. 

 

 

 

 

놀 친구가 없는가? 아니다. 그런데 왜 요즘 변백현에게 끌려다니는 걸까? 경수는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치명적인 언어장애가 있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눈이 저절로 감긴다던가 이런 류도 아니었다. 다만 귀찮음을 많게, 자주 느낄 뿐이었지. 인간 도경수는 나름 A 상태의 인간이었다. 스스로를 점수 매기고 나니 기분이 뿌듯해져 괜시리 사물함을 깨끗히 정리했다. 사실은 항상 깨끗해서 정리할 게 없었다. 

 

" 나, 또 왔어. " 

" 그러네. " 

 

자리로 쓰러지듯 착석하는 경수의 모습에 백현은 ` 그러네가 뭐야, 그러네가. 백현님이 특별히 이 곳까지 행차하셨구만. ` 이라며 투덜댄다. 나는 오라고 한 기억이 없는걸로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삐질테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내했다. 

 

" 경수야. " 

" 왜? " 

" 넌 꿈이 뭐야. ” 

 

생각해보니, 내 진로를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는 건 어이없는 일이었다. 대강 생각해놓은 것은 있어도 확실하게 ` 이게 내 길이다. ` 하는 쪽의 분야나 직업은 없었다. 백현의 말에 문득 내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건가? 하는 회의감이 느껴져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 너 또 쓸데없는 생각하지. " 

" 어, 들켰네. " 

" 난 안 물어봐? " 

" 백현아, 너는 꿈이 뭐니? " 

 

정말 국어책도 이런식으로는 안 읽겠다. 욕먹을 법한 연기톤에도 백현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 난,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사람하나 죽이는건 예사인 사람이 될거야. " 

” 뭐? ” 

 

백현아, 네 꿈이 킬러인지는 차마 몰랐다만은, 앞으로 거리를 둬야 할 듯 싶다. 친구라고 살해 당하지 않을 일이 있을까. 내심 확률을 계산해본 경수였다. 

 

" 뭘 생각하는거야. 작가가 되고 싶다고, 작가가. " 

” 아, 작가. " 

 

맞아. 그랬구나. 작가는 글 한번 쓱 쓰면 누구던지 죽이고 살리고 만나게 하고, 떨어지게 하고. 전지전능하구나. 

 

" 소설의 매력에 반했어. 정확하게 말하면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거야. ” 

 

유명한 소설의 일부분을 읊는 백현의 모습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비웃었다. 미안, 진짜 웃겨서. 

 

" 듣고 있는거지? 근데, 나중에 글을 쓰게 되면 꼭 주인공 이름을 도경수라고 할 거다. " 

" 왜? “ 

” 이름이 마음에 들어. " 

 

태어나서 내 이름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 이름으로 삼을 것이라는 사람은 처음보았다. 내심 기분이 좋아 작명가분께 목례를 했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 계신가요. 모르겠으니 사방으로 절하겠습니다. 

 

" 세상에 멋지고 예쁜 이름 널렸어. " 

" 아냐, 도경수 이름. 되게 예사롭지 않아. " 

" 어떤데? ” 

" 왠지 모르게, 내천이 흐르고 커다란 산이 뒤에 자리잡고 있을 법한 이름이야. " 

 

` 멍청아, 그게 뭐야. ` 라고 윽박지으려던 찰나에 종이 쳤다. 

 

" 다음 시간에 또 올게. ” 

 

해맑게 손을 흔드는 백현에게 차마 멍청이라고 할 수가 없어 제 입을 가리는 경수였다. 아, 짜증나. 갑작스럽게 짜증이 몰려와 교과서에 낙서를 해보았다. 

 

` 변백현 똥 멍청이 `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동태 눈깔로 연맹하던 아이들이 점심시간종이 치자마자 인류를 구원한 마지막의 약이라도 찾은 듯 뛰어나갔다. 이러다가 십분 정도 있으면 잠잠해지겠지. 하며 평안히 자리에 앉아 여유 있는 척 허세를 부리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변백현에 의해 무산되었다. 

 

" 야, 뭐야. " 

" 늦으면 고기 적게 준단 말이야! " 

 

뭐야, 그럴거면 급식 당번을 하란 말이야! 라고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끌려갔다. 급식 당번은 반찬이 두배였다. 다만 안 좋은건 토마토도 두배였다. 난 토마토가 싫었다. 

 

" 토마토 싫다. " 

" 토마토 싫어해? " 

 

냉큼 집어 먹는 백현이 이상하게 멋졌다. 쓸데없는 곳에서 멋진 백현이었다. 평상시엔 별로 멋지지 않았다. 변백현이 급식으로 나온 500개의 토마토를 다 먹어준다면 나는 아마 변백현에게 프로포즈를 할 지도. 

 

" 맛있는데. " 

" 너 고기 다 먹어. "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을까. 물론 경수도 그 `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 ` 중에 하나였다. 경수는 백현이 자신보다 고기를 좋아할테니 더 많이 먹으라며 하나남은 고기까지 퍼 주었다. 백현은 눈물을 흘릴 것 같이 감격해서는 고맙다고 소리 질렀다. 

 

" 시끄러워. " 

 

 

 

 

 

고기도 없고, 토마토 샐러드도 변백현이 다 먹었다. 맨밥을 맛있게 먹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거의 먹지 않고 다 버려버린 경수였다.  

 

” 경수야. ” 

” 왜. " 

” 너 배에서 꼬르륵거려. " 

 

천진난만한 얼굴로 경수의 배를 가리키는 백현이었다. 경수는 팔이라도 뜯어먹어야 하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갑자기 백현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 짠. ” 

 

백현이 손에 들고 온 건 딸기 우유와 토마토가 잔뜩 들어가 맛있다는 명품 샌드위치였다. 

 

역시 변백현은 똥 멍청이였다. 

 

” 야, 이 바보야. 토마토 싫어한다고 했잖아. " 

“ 헉, 미안. 까먹고 제일 비싼걸로 사왔네. “ 

 

머쓱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심 미안해져서 경수는 ` 아냐, 괜찮아. ` 라며 억지로 봉지를 뜯어 먹히지도 않는 토마토가 쓸데없이 분사한 듯 많이 들어간 빵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적군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는 심정으로. 개가 개껌뜯듯이. 원래 보통 이런 빵엔 토마토 포함확률이 10프로 정도잖아. 근데 이 빵은 80프로가 토마토인 것 같아. 

 

경수는 본인이 손을 씹고 있는지 토마토를 씹고 있는지 빵을 씹고 있는지 백현의 말을 씹고 있는지 몰랐다. 

 

" 야, 그걸 왜 먹어! 너 토마토 싫어한다며. “ 

 

백현이 황급히 경수의 손에서 빵을 빙자한 토마토를 빼앗아갔다. 

 

“ 그래도. 네가 돈 주고 사온건데 아까워서라도 먹는다. 이리 줘. “ 

“ 됐어. 안 먹어줘도 돼. 새 빵으로 사올게. 무슨 맛 좋아해? “ 

“ 슈크림. “ 

“ 엉, 조금만 기다려. “ 

 

미안하다고 할 땐 언제고, 묻자마자 바로 대답하는 경수였다. 경수는 슈크림빵이 참 좋았다. 생크림은 안된다. 슈크림이어야만 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백현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 뭣하러 뛰어왔어. “ 

“ 점심, 헥. 시간. “ 

 

백현은 숨을 고르며 시계를 가리켰다. 5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럴거면 차라리 천천히 매점에 같이 가 사온 다음에 5교시 끝나고 먹겠다. 

 

“ 여튼, 고마워. “ 

 

웃음이 나서 웃었다. 백현이도 웃었다. 너도 웃음이 나니?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신명나게 까던 변백현이었는데, 갑자기 쉴드 쳐주고 싶다. 너를 위해 인간 쉴드가 되어줄게. 백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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