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가득 쏟아지는 글자들 사이로 또 너의 모습이 보여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춘다. 내 책 속의 주인공만큼은 너와 정반대로 그리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소설이다. 완벽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너와 닮아있는 주인공이 야속하기만 하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바라보니 밖은 벚꽃이 만개해 있다. 우수수 눈처럼 쏟아지는 벚꽃을 멍하니 바라보다 기지개를 쭉 폈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한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글만 써내려갔다. 머리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머리를 감고 깨끗이 샤워도 하고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부엌을 뒤져보았지만 비상용으로 사놨던 라면마저 다 떨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며 커피를 타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아른거리는 벚꽃들을 애써 무시하며 글을 써보려 했지만 이미 머릿속엔 그날에 너로 가득 차있었다.
도시락을 싸서 피크닉을 나온 가족들, 옹기종기 붙어서 사진을 찍는 여고생들, 손을 잡고 걷는 수많은 커플들사이에 너와 나도 손을 꼭 마주 잡고 걷고 있다. 한껏 들뜬 맘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기분 좋은 웃음을 만든다. 원래 무뚝뚝한 너지만 오늘따라 더 말이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너와 함께 이 길을 걷는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경수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한없이 낮다. 흐드러진 벚꽃만치 어둡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가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그날에 난 온통 분홍빛 이였던 4월의 여의도에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벌써 3년 전 일이었다. 3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이별을 고하던 너의 모습이 생생한데 생각만으로도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 민망하고 저주스러워 소매 끝으로 우악스럽게 눈 끝이 붉어질 때까지 눈물을 닦아냈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울고 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오늘은 글을 쓸 날이 아닌가 보다.
애써 너의 뒷모습을 접어내고 황급히 막바지에 다다른 소설의 결말을 짜내어 보았다. 이제껏 써온 책의 결말은 항상 세드앤딩이였다. 내가 해왔던 연애가 모두 그랬으니까. 독자들은 지루하고 뻔한 해피앤딩이아닌 비극적이고 아린 세드앤딩을 더 선호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의 소설은 언제부터인가 아팠고 쓰렸다. 아린 연애가 쓰린 연애가 그리고 실패한 연애가 지금의 날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차기작의 결말을 결국 붉어진 눈으로 개워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숨이 막히게 우하하고 커다란 벚꽃나무 아래 벚꽃처럼 수줍고 예쁜 니가 서있다. 너를 지우려고 쓰기 시작한,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 내 끝에는 결국 또 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재가 끝나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나는 쉴틈없이 사인회와 강연 스케줄에 끌려 다녔다. 잡지 인터뷰도 여러 개 했다. 많은 기자들이 결말에 대해 물었지만 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도경수 작가의 숨겨진 애인은 탑스타 A양? 이라는 기사가 떴을 때 나는 혹시 니가 기사를 봤을까 노심초사하며 밤을 새기도 했다. 그래서 결말은 너를 위해 그린 것이라고 이 책은 단한사람만을 위해 쓴 것이라고 밝힐까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Y대학에서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이번 책으로 인해 잡힌 스케줄을 모두 마쳤다. 소설의 마지막 줄에서 나를 기다리던 너는 나의 ‘그대’, 나의 김종인이 아닌 독자들마다의 ‘상혁’으로 남았다. 솔직하고 싶었다. 솔직하게 너를 사랑했노라고 해가 바뀌고 또 꽃이 폈지만 아직 잊지 못했노라고 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가두고 싶었다. 너의 존재를 너와 나의 끝나버린 관계를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었다. 글을 쓸 때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었는데 막상 쉬는 날이 코앞에 닥치니 만사가 귀찮았다.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갈까 친구를 만나 새벽까지 술을 마셔볼까 했지만 이상하게도 침대위에서 한발작도 움직이기 싫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으니 처참한 방 꼴이 눈에 들어왔다. 노트북 주변은 담배꽁초와 과자부스러기가 난무했고 바닥에는 찢긴 종이와 지우개 가루가 수북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켜 세워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름 깨끗하다고 생각 했었는데 쓰레기봉투 하나가 가득 찼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패딩을 목 끝까지 올린다음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생각 보다 차가운 날씨에 잔뜩 움츠려 얼른 분리수거를 했다. 올라가서 오랜만에 따뜻한 밥을 지어 된장찌개를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쿵- 어디서 많이 맡은 향수 향이라고 생각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 꿈처럼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바로 너였다.
“죄송합...”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첫 만남처럼 재회도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처산남과 지금의 다른 점이라면 진짜 좆같이 마주쳤다는 것이다. 하필. 오늘. 눈을 마주하면 모두 들킬 것 같았다. 이제껏 써온 모든 것이, 책안에 담긴 모든 모습이 너라는 것까지. 그래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너와 다시 마주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수없이 상상하고 연습해보았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게 좋을까? 너무 들떠 보이면 어쩌지. 역시 활짝 웃기에는 무리가 있나 머릿속으로 수천 개의 조각들을 그려보았다. 조각들 속에 나는 각각 다른 말투 다른 표정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 울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겠다고 당황하지도 않고 얼굴도 안 빨개지고 입술도 물어뜯지 않자고 약속했다. 너로 인해 아직까지 무너져 있는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수백 번 수천 번 나와 약속했다. 그런데 이미 숙여진 고개가 꽉 깨문 입술이 가빠지는 호흡이 하루도 빠짐없이 너를 그리워했다고 보고 싶어 했다고 너로 인해 내 모든 것이 망가졌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널 놓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