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달달 무슨달 (달샘)
12화
: 초여름의 열기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는 아침, 개운하게 목욕하고 나왔던 아까의 부지런함을 후회하며 금방 찝찝해진 몸을 힘들게 옮기고 있다. 다리는 이제 꽤 나아져 조금 천천히만 걷는다면 무리가 오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다친 부위를 이끈다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하필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오늘은 몰래 타고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남아있는 건 멀쩡한 왼쪽 다리였기에 어느새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계단을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금세 축축해질 것만 같은 팔 아래 은밀한 부위가 꽤나 찝찝하게 신경쓰이기 시작하며 복도에 도달하고 속도를 늦추니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는데. 아직 2분 정도 남은 시각과 앞에 보이는 2반 표지판에 한숨을 돌렸을까, 마침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가로지르는 통통거리는 뒤통수의 소유자가 눈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호석,이라고 입을 떼려 할 때 별안간 쏜살같은 바람이 내 옆을 지나친다.
"..으아잇."
갑작스런 바람에 어리둥절해져 입이 굳었는데, 으아잇이라는 다소 앙증맞은 소리와 함께 내 옆을 스쳐지나간 향기가 낯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번뜩이게 되고 어느새 저 앞으로 멀어져있는 정국이를 눈에 담았다. 그 좋은 냄새와 귀여운 말소리의 주인공은 너였다.
"야아~ 너 운 좋게 딱 왔다?"
"하.. 지짜 죽을 것 같아.."
"그냥 걸어오지. 어차피 봐주시잖아."
"안돼. 저번 주에 많이 늦은 거 한 번 봐주셨어."
"근데 어쩌냐. 오늘은 쌤 회의 있는데. 헤헤."
앞만 보고 재빠르게 뛰어간 정국이는 급하게 4반 신발장에서 제 실내화를 꺼내 주저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손에 들고 온 운동화를 우당탕 집어넣었다. 그러다 옆에서 출석부를 들고 여유롭게 웃고 있는 앵무새와 짧은 대화를 나누다, 쌤이 회의가 있어 오늘 조례는 없다는 소식을 접하고 별안간 허탈한 기색으로 뒷문에 기댄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 하고서 깊은 한숨을 쉬고 송골송골 땀이 맺힌 제 이마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는데, 이게 또 화보가 따로 없는 광경인 거다. 오늘도 정국이가 서있는 모든 배경은 여전히 촬영 장소가 되고 있었고, 나도 그 배경의 한 부분이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근데 턱은 왜 그래? 다침?"
"아.. 면도하다가."
"푸핫. 면도하다가??"
다급하게 넣은 탓에 신발장 칸 안에서 뒤집어진 제 운동화가 신경쓰였는지 다시 돌아가 바로 세우고 나서, 네가 지친 기색으로 느릿느릿 열려있는 뒷문으로 향한다. 호석이가 그 뒤를 따르다 잠깐 얼굴을 보고 무언가 물으니 민망한 듯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정국인데, 작게 말한 게 무색할 정도로 기다렸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비웃는 사람은 반장이라는 인간이다. 뒷문 안으로 사라지면서도 푸학학!!거리는 웃음 소리가 옆옆반인 내 귀에도 꽂힐 정도다. 얼마 안 가 갑자기 호석이 소리가 끊기는 걸 보면 아마 정국이가 입을 막은 것 같지만, 앞으로 호석이 입에서 저 화제가 얼마나 닳도록 나올지는 눈에 훤했다.
둘이 그렇게 사라지자마자 조례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그제야 나도 모르게 복도 사물함 뒤로 어색하게 숨어있던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훔쳐들은 건가, 방금. 스스로도 소름이 끼쳐 회의감이 들려고 하는데 자꾸 귀에 맴도는 으아잇 때문에 미치겠다. 아니.. 으아잇이래. 으아잇이 뭐야.. 너무 귀여워.. 뛰어가면서 혹시 늦을까 자기도 모르게 나온 찰나의 소리였겠지만, 난 그 소리에 풍덩 빠져 한참을 앓고 있었다. 다신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귀여운 소리도, 많이 급했는지 조금 열려있던 가방 지퍼도, 내 맘에 온통 진한 분홍색 꽃가루를 흩날리게 한다. 맨발로 올라온 탓에 금방 회색으로 변해 꼼지락대던 흰 양말까지도 말이다.
"뭐라고 쓴 거야, 이게?"
"맞혀봐."
"..으아잇? 으아잇이 뭔데."
"..크큭."
경제 시간 내내 선생님 몰래 노트에 다채롭게 낙서한 으아잇. 두껍게도 써보고 얇게 공들여 써보기도 하고 휘갈겨 써서 노트 두 페이지를 빼곡히 채웠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어 내게 물어보다가도 또 시원찮은 내 반응에 이젠 대화하기를 포기하는 나영이다. 또 왜 저러는 거야 대체..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눈빛으로 한 번 쳐다봐주고 감흥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빗자루를 든다.
"야. 나 동아리 갔다 온다!"
"이따 봐. 가서 걔 있으면 알려주고."
"응~."
아까 토론 동아리 회장이라는 애가 찾아와 나 보고 이따 시청각실로 모이라고 했다.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터지는 내적 기쁨에 나영이를 부둥켜안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었다. 설레는 마음에 오늘 내 청소 구역인 창틀도 이미 점심시간에 다 해놓고, 담임 쌤에게 허락을 맡아 석식 전 자습 시간도 빼놓은 상태였다. 가방을 챙겨 두근대는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며 4반을 한 번 흘깃 둘러봤다. 이때쯤이면 정국이도 가방을 챙겨야 할 텐데.. 잠깐 보니 다들 분주하게 놀며 청소를 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정국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금방 오겠지 생각하며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시청각실로 걸음을 뗐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기대를 하고 있는 이유는, 정국이가 토론 동아리를 안 나갔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갔으면 진작에 소문이 났을 일이기 때문이었다. 신청하고서 며칠동안은 호석이한테라도 물어볼까 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 옆에서 나를 둔탱이 취급하듯 바라보며 걔가 거기를 나갔든 안 나갔든 소문이 났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는 나영이가 있었다. 그래. 가만히 안 나갔으니까 소문이 안 난 걸 거야. 난 그 말에 이상하게 맘이 놓였고 그게 내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이유였다.
"..여기겠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도착한 4층 시청각실 앞. 낯선 상황을 맞닥뜨리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겸 조금 열려있는 문 틈 사이로 귀를 갖다 댔다. 정국이 와있으려나.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괜히 긴장되는 마음으로 무거운 시청각실 문을 잡아당겼을까 작게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잔잔하게 들리던 말소리들이 일제히 멈춘다. 계단을 몇 칸 더 올라가 고요한 공기 속에서 객석 사이 공간으로 내 모습을 드러내니, 그제야 맨 앞자리에 쭉 앉아있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의 표정이 풀리고 내게 인사를 건넨다. 미치도록 어색하지만 애써 편한 척 인사를 나누니 내가 앉을 자리를 알려준다. 신입은 두 번째 줄에 앉으라고 했다. 그에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조용히 두 번째 줄 앉을 자리를 찾는 척 잠깐 모두를 훑어보는데 이상한 건, 정국이가 왜 없을까.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일까 싶을 때 동아리 회장이 일어나 상황을 정리하고 말문을 여는 듯 했다.
"다 온 것 같네요. 그럼 시작할까요?"
다 왔다니. 다 왔다니요..! 우리 정국이 안 왔잖아요..!
"먼저 우리 토론 동아리가 7기를 맞았어요. 럭키 세븐이네요. 하핫."
정국이 안 왔다고요..!
"그럼 일단 새로 들어오신 분들 소개하도록 할게요. 이번엔 이상하게 지원자가 거의 다 여학생이었어요. 왜인진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호탕하게 웃는 동아리 회장의 낯이 수상하다. 아무래도 당신만 모르는 것 같다.
"그 경쟁률을 뚫고 들어오신 2학년 여학우 분. 일어나주세요~. 다들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짝짝짝!"
진짜 정국이가 없는 건가 싶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만 깜빡이고 있었을까, 별안간 제 소개를 하라는 말에 정신머리를 그 자리에 두고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2학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국이가 없다. 눈을 아무리 감았다 떠봐도 현실이었다. 정국이가 없는 토론 동아리는 앙꼬 없는 찐빵. 얼음 없는 빙수. 치즈 없는 피자였다.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감당 못하는 일을 무작정 벌려놓은 건가 싶은 허망함에 자리에 앉자마자 속에서 눈물이 흘렀다. 첫날부터 나간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번 학기는 망했다 싶었다. 이런 내 맘을 알 리 없는 동아리 회장은 내 말이 끝나자 신난 기색으로 다음 소개자를 얘기했고 순서는 물 흐르듯이 넘어갔다. 그에 내 옆에 앉아있던 키 큰 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접이식 책상을 넣는 것을 깜빡했는지 그대로 무릎을 빡 부딪히고 만다. 크게 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이 애 무릎에 꽂히지만 몇 번 문지르고는 쿨하게 몸을 일으켜 자기소개를 한다. 이제 보니까 너 그 정국이네 반 키 큰 애였구나.
"안녕하세요. 2학년 문과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토론을 좋아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로 자기소개를 마치고 뿌듯하게 자리에 앉는 김남준이라는 애는 앉자마자 쓰읍..하며 제 무릎을 문지른다. 그러게 안 괜찮으면서 왜 괜찮은 척했어.. 소리만 들어도 엄청 아프겠던데. 나도 모르게 걱정되는 맘에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 애 무릎을 보다가 그만 서먹하게 눈이 마주쳐버리고 만다.
"..괜찮아."
그러자 어색하게 잠깐 마주친 눈에서 내 맘을 읽었는지 빙긋 웃어보이며 괜찮다고 작게 말한다. 그래.. 다행이다. 김남준의 말에 옅게 고개를 끄덕이니 앞에서 다시 동아리 회장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다시 그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 했다. 근데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 회장의 입에서는 동아리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주려는 듯 글자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고, 끝없이 늘어지는 시간에 금방 지루해질 참이었다. 이걸 다 어떻게 기억하지 싶다가도 밀려오는 졸음을 감당하기 힘들어 도리질을 하는데, 불현듯 옆으로 보이는 김남준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몰래 실눈을 뜨고 보니 세상에. 회장의 모든 말을 다 받아 적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말 다 적어서 국이라도 끓여먹으려는 건지. 그냥 원래 저런 스타일의 아이인가 싶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는 대로 다 적어놓고 그 다음에는 알아서 필요한 부분만 숙지해올 것 같은. 분명히 공부도 잘할 것 같단 생각이 들고, 너무도 당연하게 아무것도 안 들고 온 내가 한심해지려 한다. 요즘 들어서 공부 잘하는 애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정상 같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빈도가 늘어가는 것 같아 조금 슬프다. 맘속으로 그렇게 주먹을 물고 있는데 안 멈출 것만 같던 필기하는 샤프가 별안간 멈춘다. 그리고서 필통 안을 꽤 한참동안 뒤지다 결국엔 한숨을 쉬며 별 수 없다는 듯 옆에 있는 제 가방을 끌어오는 김남준이다. 그러고는 곧 가방을 잠깐 뒤적거리더니 네모 모양의 새 지우개를 꺼내 포장지를 벗긴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다는 말이.
"아.. 이제 몇 개 안 남았다."
뭐지.. 얘는.
학원차를 타러 나가는 길. 기분이 많이 안 좋은 상태다. 안 그래도 아까 동아리에 정국이가 없어 기분이 마이너스였는데, 급기야 며칠 전부터 떠돌던 수학여행이 취소된다던 뜬소문까지 오늘 결국 현실이 되어 기분이 바닥을 깊이 파고들어갔다. 리조트 내부 사정으로 예약을 취소 당해 숙소를 다시 찾기 힘들다는데.. 대체 이 시기에 제주도에서 몇 백 명 숙소를 어떻게 찾냐구.. 안타까움 가득한 마음에 멀쩡한 다리로 운동장 흙바닥을 괜히 한 번 발구르기 했다. 예쁜 제주도에서 정국이와의 혹시 모를 인생컷을 기대해보았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내 아쉬움 섞인 한숨은 발치에 내려앉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사실 지금 제주도보다 급한 건 따로 있었잖아. 진짜 동아리에 정국이가 없을 줄은 상상을 못 했다. 정국이가 동아리를 나온 게 왜 소문이 돌지 않은 걸까.. 난 동아리를 안 나와서 안 돈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설마 설마 하던 게 현실로 닥치니 당해낼 길이 없어 당황스럽고 속상한 맘이었다. 그래.. 아니지.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정국이 힘들지 않게 소문은 이대로 쭉 안 났으면 좋겠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직까진 딱히 나쁜 얘기가 없어서 그렇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다가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게 되면 더 부풀려질 수도 있는 거고, 더군다나 하지 않은 일까지 했다며 나쁜 사람 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그럼 아무리 남들 얘기에 신경 안 쓰는 사람이라도 억울하단 생각이 잠자리 들기 전에 계속 떠오를 테고 정국이는 매일 밤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해야 되니 어떤 풍문이든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내 편한 밤 한 조각을 떼어서라도 정국이의 밤은 하루하루가 상냥하고 아주 친절한 밤이 되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의 전부였으니까.
"짜증나.."
하지만 아무리 멀리 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상황을 그르친 데는 모두 내 탓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실을 체감할수록 기분이 맥을 못 추고 떨어져갔다. 나는 왜 정국이에게 물어보거나 더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고 안일하게 있었나 싶은 생각에, 스스로에게 울화가 치밀어 교문 앞 작은 짱돌을 사람 없는 곳으로 멀리 뻥 차버렸다. 진짜.. 내가 이 동아리를 학업이랑 같이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고개를 숙여 코를 건드리는데 똘똘똘 굴러가던 돌이 어딘가에 막히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설마 누가 맞은 건가 싶은 생각에 코를 만지다 말고 흠칫 돌아보니,
"..."
한 손에 단어장을 쥐고 있는 정국이가 평소와 다름없는 기색으로, 차가 안 다니는 한 구석으로 내 짱돌을 발로 옮기고 있다. 아침에도 잠깐 봤지만 오늘은 왜 이리도 반가운지. 나도 모르게 주저없이 너에게 다가갔다.
"안녕. 정국아."
"응. 안녕."
반가워서 거의 울 뻔한 맘을 감추고 다가가니 네가 내 눈을 보고 인사를 받아준다. 이젠 그렇게 어색하지 않게 내 인사를 잘 받아주는 모양새가 왠지 고맙게 느껴져, 고맙다고 할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여기서 고맙다고 했으면 엄청 어리둥절해했겠지.. 분위기 싸해졌을 거야. 진심을 모두 전하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느끼며 정국이와 나란히 교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 말이 오가지 않아 긴장되는 마음에, 석식으로 나와 아직 손에 쥐고 있던 짜요짜요를 만지작거렸다.
"턱은 다친 거야?"
"아.. 어. 어디에 박았어."
"아프겠다. 상처 깊어보이는데. 흉지는 거 아니야?"
그래도 넌 완벽하겠지만 말이야. 애써 뒷말을 삼키며 인상을 쓴 채 투명한 밴드 안으로 보이는 빨간 자국을 살폈다. 보기보다 깊은 듯한 상처에 나도 모르게 요리조리 둘러보니 민망한 듯 네가 의식적으로 헛기침을 큼큼, 한다. 나도 그제야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지금 정국이 입술 근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시선을 내렸다. 상처가 걱정돼서 그런다는 게.. 너를 부담스럽게 한 것 같았다. 속으로 내 머리에 딱밤을 놓으며 자책하다 보니, 어느새 학원 차가 보이고 저 멀리 요단강도 보였다. 설렘에 정신이 아득해진다는 게 이런 걸까. 점점 어지러워지는 듯한 머리에 눈을 부릅떠봐도 소용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네 귀도 내 공부용 귀마개로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못하면 너에게까지 마구 쿵쿵대는 내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뒤늦게 열이 올라오는 얼굴은 금세 터지기 직전이었고,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심장은 쿵쾅거리며 내 목구멍을 노크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내 몸의 어느 구멍을 통해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학원 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만큼은 첫날처럼 네가 저 뒷자석에 앉길 바랐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넌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보고 있는 너와 내 무릎이 과속 방지 턱을 넘을 때마다 한 쪽이 맞닿고, 난 그게 너무 당황스러워 창밖만 바라봤다. 아무리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앞머리를 만져도 발그레한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영어 강의실을 열자 보이는 여자 둘과 남자 하나. 늘 그렇듯 나를 건너뛰고 그 여자 둘이 보는 건 내 뒤의 정국이다. 나도 좀 봐주면 어디 덧나나. 야속한 맘에 괜히 짧게 한 번 흘겨봐주고 내 자리에 가 앉으니 정국이도 가방을 열어 수업 준비를 한다. 떨리는 가슴을 뒤로하고 지금이라도 물어봐야 했다.
"저기, 정국아."
"응?"
"창의 활동 어디 들었어, 너는?"
"나 영화감상."
"아.. 그래?"
난 이제 궁금한 건 그냥 다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면 친해지는 건 그르게 되겠지만, 멀리서라도 지켜보면 되는 것 아닌가. 관계를 망쳐 대화를 못 하게 된다고 해도 난 널 보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지금 더 친해지고 싶어하는 건 단지 욕심 때문이지,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라고 하면 버릴 수 있다. 결심을 굳힌 내 말을 듣고 뒤돈 정국이가 눈썹을 들어 응? 하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 뻔했다. 소장해야 하는 순간임을 직감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이어서 들리는 영화감상이라는 네 글자에 내 속엔 비수가 파고든다. 두 글자만.. 두 글자만 더 같았어도.
"너는?"
"나? 난 영화.. 토론."
"아아. 거기 법정 쌤 아니야? 고민하다가 감상 했는데. 토론도 재밌겠다."
무슨 소리야. 토론이 재밌겠다니. 그렇게 재밌으면 동아리도 계속 하지 그랬어. 아직 토론 동아리라는 미련이 내 마음 한 구석을 끈질기게 차지하고 있었고, 네 입에서 토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가슴 한 쪽에서 눈물이 왈칵 넘칠 뻔했다. 내가 또 내 부주의로 금요일 7교시마다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버렸구나. 나영이 꼬드김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혹시 모르니까 물어보기라도 할 걸. 밀려오는 후회와 아쉬움에, 뭍으로 막 건져올린 매생이처럼 책상에 힘없이 엎드렸다.
"토론.. 그치.. 토론 꿀잼이지.. 재밌지.. 토론.."
"..."
오늘따라 내 앞에 정국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능력이 떨어졌고, 추하게 네 앞에서 정수리를 보이며 축 늘어지니 안 봐도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이 상상된다. 꿀잼이지.. 토론. 재밌으면 토론 동아리 진짜 더 하지 그랬어..
"정국아. 나 토론 동아.."
"역시 한 줄은 먹어야 먹은 것 같아. 안 그냐."
"아유. 시끄러. 말이 안 끊겨, 니는."
"..또 지랄이야."
내가 오늘 무슨 일을 저지르고 왔는지 얘기하면, 혹시 네가 본인도 작년에 했었다고 그러면서 공감대도 형성되고 조언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용기내서 동아리라는 화두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강의실을 문을 활짝 열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는 호석이와 태형이에 말문이 막혔다. 요구르트 5개가 들어있는 한 줄을 각각 빨대를 꽂아 마시며, 변함없이 오늘도 싸우면서 들어온 그들이었다.
"쌤 이거 안 치우셨나. 무슨 대걸레가 책상에 있어."
"주글래.."
"찰팡 오늘 왜 저램."
찰빵도 아니고 찰팡은 또 뭐야..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와중에 시시때때로 변하는 태형이의 호칭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저번 주에 급식실에서 마주쳤을 때는 깨찰!이라며 반가워하고, 교무실 앞에서는 찰찰이~하더니. 아무래도 원형은 찰깨빵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까지 변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다 내 별명으로 잘 알아듣고 돌아보는 나도 웃기지만 말이다.
"깨빵 갑자기 웃어. 이상해.. 어디 아파?"
맥없이 책상과 혼연일체 되어 퍼져있다가 픽픽 웃음을 흘리니 앞에 앉은 호석이가 당연한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이게 정상으로 생각되면 그게 비정상이겠지 싶어서 입을 떼려는데 아직 내 쪽을 보고 있던 것 같은 정국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짜?"
어디 아프냐는 호석이 말에 되물으며 다소 조심스런 목소리가 나를 향하는데 순간 너한테 심장을 얻어맞고 말았다. 설마.. 내 걱정..
"..아냐. 나 멀쩡해."
진짜라는 두 글자에 거짓말처럼 상체를 들어 머리를 빗었다. 불끈 힘이 솟아나 다시 한 번 강직한 장군 같은 기색으로 괜찮다고 하니 나를 보던 셋의 얼굴이 이상해진다. 물론 나쁜 쪽으로 말이다. 그러다 태형이가 나를 보며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찰팡. 오늘 좀 이상한 거 맞는 것 같은데."
"그니까."
아직 뒤돌아있는 정국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쉽게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심장 때문에 위험해 애써 교재에만 시선을 두고 수업할 페이지를 찾는 척했다. 그러자 내 이야깃거리가 끝나니 금방 또 화제를 돌려 다른 수다를 떠는 호석이다. 이쯤이면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오는 호석이 오디오가 빠진다면 아쉬울 정도다.
"야. 근데 너는 진짜 어이가 없어. 중학교 때부터 깎지 않았냐?"
"..조용히 해. 좀."
잠시 정국이를 보던 호석이가 별안간 작은 코웃음을 치며 온갖 어이없는 티를 다 내기 시작한다. 호석이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입을 막는 정국이의 낌새가 다급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상처랑 면도 얘기 같이 나왔던 것 같은데. 아까 교문에선 솔직히 정국이 가방 끈이라도 붙잡고 왜 동아리 안 들었냐고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 컸어서, 미처 생각을 못했나 보다. 눈치를 보아하니 딱 봐도 저 상처 면도하면서 생긴 것 같은데 왜 나한텐 어디 박았다고 한 건지. 수염 깎다가 베였다고 했어도 그대로 멋있는 건 변함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네 상처는 마음 아프지만, 어디에 박았든 면도기에 베었든 넌 다 멋있어 정국아. 네가 내 맘을 언젠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알았으니까 그만 얘기해. 다 듣잖아."
"다 들으면 뭐가 어때서. 정말.. 같은 남자로서 수치다, 정국아."
"넌 그냥 내 수치야. 조용히 좀 하라니까? 아.. 너한테 얘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정국이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귀까지 빨개져서 이젠 호석이 입이 아니라 얼굴을 틀어막느라 아옹다옹하는데, 그 모습이 거의 레슬링 선수들 같았다. 앉아서 하는 레슬링 보는 기분이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것만 같은 호석이의 참을 수 없는 얼굴과 그를 막는 정국이의 모습이, 데굴데굴 구르는 다람쥐들을 연상케 해 꽤 귀여워보이기도 했다. 안간힘을 쓰며 서로를 막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자니 그 옆에서 미소만 지은 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태형이 모습이 사뭇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나랑도 내가 번호가 있는 줄 착각까지 할 정도로, 급속도로 친해진 태형인데 어떤 이유로 정국이랑은 아직도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인지. 이 정도로 안 친한 거 보면 혹시 전에 싸우기라도 한 건가 싶기도 하다. 그게 내가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뭐? 정국이 면도하다가 다쳤다고?"
그때 영어 쌤이 흥미로운 말풍선과 함께 문을 열고 등장하고, 그와 동시에 정국이의 뒤통수는 차게 식어간다. 왜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 걸까. 귀엽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