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마친 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지금까지 혼자 이야기를 해준 것에 입 언저리가 아려오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저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자신의 손을 마주잡아 온 그녀의 온기는 따뜻했고, 그게 그에겐 커다란 힘이 되주었기에 힘든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기분 좋게 웃어보인 그는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힘주어 잡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게 고마웠는지 그녀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입가에 살짝 걸린 그 미소가 마냥 좋은지 그는 입 언저리가 아려오던 것은 금방 잊어버리고 그녀에게 다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 그건 기억나? 우리 첫 데이트 한 날 ”
두번째 이야기
★
처음 만났을 때 정신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너한테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고 있었고,
쑥스러워 하면서도 너는 내가 집요하게 물어봤었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 나한테 보여줬었어.
근데 그거 기억나?
핸드폰 번호 입력되어 있는 액정을 내 눈 앞에 한 번 들이밀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리고는 이제 됐죠? 라고 새침하게 말했던거.
아마 갑작스러웠을테니 기억 못 할거라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겠지만 그 때 분명히 보고 기억해뒀었어.
그걸 기억 못 해두면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무작정 숫자만 나열해서 기억해뒀지.
눈으로는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쫓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핸드폰 번호만 되뇌이면서.
뒤늦게서야 주머니 속에서 계속해서 만져졌던게 핸드폰이고 나도 핸드폰이란 걸 가지고 있었구나 싶었어, 그 땐 너한테 집중하느라 다른 걸 다 잊어버렷었나봐.
핸드폰 주소록에 네 번호를 저장해두고 혹시나 싶어서 제대로 저장되어 있나 여러 번 살펴보기도 했고.
근데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네가 냉큼 그 버스에 올라타버리는거야.
나는 너만 보느라 버스가 온 지도 몰랐는데….
응, 그래서 다음날에 바로 너한테 연락했어.
만나자고, 만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무작정 전화를 끊어버렸었는데 너한테 다시 전화가 온 거야.
약속 취소하려고 전화한건가 싶어서 받지 말아버릴까도 생각했는데 금새 또 방금 전에 들었던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냥 받아버렸었어.
핸드폰 너머로 너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서 아, 역시나 싶었지. 근데 말야.
“ 약속 장소랑 시간을 말씀해주셔야 만나던가 말던가 하죠. ”
내 귀가 잘못된건가, 그래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들은 게 맞았어.
혹시나 네 마음이 변할까봐 냉큼 약속장소랑 시간을 말했고 넌 알았다는 대답도 없이 그냥 전화를 끊었지만, 그래도 좋았어.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거잖아.
전화 끊기자마자 침대 위에서 방방 뛰기도 하고 좌우로 구르기도 하면서 난리를 쳤어.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그리고 약속한 그 날이 왔어.
최대한 멋있게 보인답시고 준비하고 누나들한테 틈만 나면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햇었어.
결국엔 누나들이 먼저 외출을 해버리더라.
아무리 귀찮아도 동생이 설레여하면서 데이트 나갈 준비를 하는건데 그걸 도와주질 못할 망정 귀찮아하다니.
우리 누나들 참 밉지 않아?
난 지금도 밉지만 말야.
이것저것 신경 쓰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촉박해진 듯해 결국 택시를 잡아 타고 약속 장소 근처 지하철역으로 갔었어.
도착하자마자 뭘 준비했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약속 장소로 말했었던 카페로 뛰다시피 해서 갔는데 네가 카페 앞에 서 있는거야.
카페 안에 들어가 있어도 괜찮았을텐데, 가방이 보물이라도 되는듯이 양 팔로 끌어안은 채로.
내가 너무 늦은건가 싶어서 핸드폰을 꺼내서 보니 오히려 약속 시간이 되려면 아직 10분 정도 더 남아 있는 상태였고.
근데 그게 또 너무 좋더라.
전화는 그렇게 끊었어도 결국엔 약속 장소에 일찍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단게.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카페 앞에 서 있는 너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참았어.
추운 날씨에 카페 앞에 계속 둘 수도 없고 한 시라도 빨리 따뜻한 장소로 데리고 들어가서 몸을 녹이게 해주고 싶었었거든.
그래서 잡생각들은 다 떨쳐버리고 카페로 천천히 걸어갔는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주위를 살펴보던 네가 나를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리는거야.
왜 나를 보자마자 저런 표정을 지을까 싶기도 해서 빠른 걸음으로 네가 서 있는 곳으로 갔더니
네가 대뜸 그 조그만 키로 날 올려다보면서 한 눈에 봐도 나 화났어요 라는 표시를 팍팍 내는거야.
“ 왜 이렇게 늦어요? ”
방금 전에 확인해서 약속 시간이 되기에는 아직 몇분 가량 더 남았다는 걸 아니까 나는 고개를 그냥 좌우로 저으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너한테 보여줬어.
그니깐 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가방을 뒤지다시피 해서 굳이 자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손가락으로 뭔가를 세기 시작하는거야.
그러더니 하는 말이.
“ 헐, 한 시간이나 일찍 와서 기다렸나봐…. ”
잠깐 뭔 소린지 이해를 못한 내가 멀뚱하니 너를 내려다보기만 하니까 네가 또 저번에 만낫을 때처럼 자기가 말한 내용에 놀랐는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려버리더라고.
그제서야 뭔 소린지 이해가 된 나는 대놓고 웃으면 네가 금방이라도 약속을 취소하고 어디로든 가버릴 것 같아서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어.
근데 그게 참는답시고 참은건데 내 얼굴엔 웃고 있다는게 확연히 드러났는지 네가 성난 사자같은 표정을 짓더니 막 째려보는거야.
“ 전혀 아니에요, 이 근처에 볼 일 있어서 살펴볼 겸 일찍 와본거예요! ”
“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
내가 생각해도 능글능글하니 놀려대듯 말했던 것 같아.
그니까 너는 그게 또 화가 났는지 귓볼이 빨개져서는 금방이라도 뭐라고 내뱉을 듯한 표정이 됐지.
더 놀리면 오늘 약속은 정말 여기서 끝날 것 같다 싶어서 무작정 한 손으로 네 손을 잡았어.
네가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카페 안으로 걸음을 옮겼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자그마한 네 손이 내 손 안에 다 들어오니까 그게 또 말로 표현 못 할듯한 그런 감정이 생겨나는듯하더라.
무슨 여자가 장갑 하나 안 끼고 다녀서 손을 차갑게 하고 다니나 싶기도 했고, 이따 가는 길에 장갑 하나 사서 가방에 몰래 넣어둬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카페 안에 들어와 따뜻해보이는 안 쪽에 너를 앉히고, 나는 그 반대편 의자에 앉자마자 목에 감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너한테 건냈어.
“ 이건 왜요? ”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이끄는대로 카페 안으로 따라들어와서 조용히 앉는 걸 보니 예쁘기도 하고.
“ 하고 있어요. ”
목도리를 하고 있으란 말에 잠깐 거절하려는 듯하는 낌새를 보여서 고개를 저어보였더니 마지못해 목에 목도리를 칭칭 감는 것도 예쁘고.
그냥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스러워 보였어.
조금 있다가 가서 주문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동안 제일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어.
“ 이름이 뭐예요? ”
목도리를 끝까지 마저 감다가 답답했는지 목도리를 이리저리 풀면서 네가 한심하단 표정을 했어.
내가 보기엔 목도리 하나 못 감고 있는 네가 더 한심해 보이고 있는데 말야.
“ 그것도 몰라요? ”
“ 알 리가 없죠 ”
그래, 알 리가 없었지.
그제서야 또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는지 네가 헛숨을 들이켰어.
애가 좀 모자란가 싶더라, 그 땐.
그래도 네 이름을 알아내려면 다시금 입을 열게 해야겠다 싶어서 내 이름을 먼저 말하고 물어보기로 했어.
“ 내 이름은 차 학연인데, 그쪽 이름은 뭐예요? ”
“ 별빛이요, 이 별빛 ”
별빛, 이 별빛.
한동안 계속 그 이름만이 머릿속을 맴돌았어.
결국 보다 못해 내가 대신 네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면서도 계속.
다른 사람이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 이름 하나도 특별해보이기 시작했던걸로 봐선, 아마 그 때부터였을꺼야.
너를 평생 내 옆에 두고싶다고 생각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