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사장님
01
부제 : 싸가지가 바가지
"주문, 안받습니까?"
"아, 아!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이 버려달라고 주고간 회사 팜플렛을 여기저기 훑어보다, 누군가 카운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타닥,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주문 안받습니까? 하는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팜플렛을 후딱 던져버리고 벌떡 일어나니, 그가 이제와서 메뉴판을 주욱- 훑었다.
뭐야, 금방이라도 주문 할 것 처럼 말하더니, 시간이 제법 흘러도 말 한마디 없이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메뉴를 읽고있다.
아무리 다음 손님이 없다지만, 한국어가 서투른 외국인이 한글을 보듯이 보는게 영 답답해 죽겠다. 먹고 싶은게 없으면 돈이나 아껴라, 응?
"추천 안해줍니까?"
"네?"
"보통 손님이 이렇게 뜸 들이면 빨리 주문하고 꺼지라는 듯이 아무거나 추천해주던데."
한동안 쳐들고있던 고개를 급작스럽게 내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한 남자는 이제와서 보니 꽤 잘생긴 것 같았다. 훈남상?
메뉴를 보던 것과 같은 눈빛으로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말고 추천 안해줍니까?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깔렸다.
내가 추천해주기까지 기다린건가. 근데 뭘 추천해주지. 나도 아직 다 마스터 못한 메뉴를 얼른 훑어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피식-. 하는 웃음소리에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가니, 그가 나를 보며 예쁘게 웃고있다. 참 말이지, 정말 잘생겼다. 한번 더 웃으면 사랑에 빠지겠어.
"이걸로 두잔 주세요."
내가 보고있던 메뉴판에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올리더니 두 잔을 달라며 지갑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본인 수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그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본 그의 주머니는 정말 은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앞주머니, 뒷주머니. 이곳저곳에서 남자가 만원짜리를 찾으려고 뒤적거리는 동안
내가 본 10만원짜리, 100만원짜리 지폐들만 해도 몇개인지 셀 수가 없었다. 저렇게 많은 돈들이 수중에 있다면 하루하루가 어떤 기분일까.
"돈 받기 싫습니까?" 또 날카롭게 날아온 남자의 말에 정신차리고 공손히 돈을 받아들었다. 2만원, 저 남자한테는 별 가치도 없는 정도려나.
도경수 사장님
들었다 놨다, 어제 그 남자가 잠깐 내려놓았다가 깜빡하고 그냥 놓고가버린 그의 지갑을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도있는데, 빨리 찾아가지.
여태 열어보지도 못하고 겉모습만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눈에 안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렸다. 보통 사람도 아닌 것 같은 데 괜히 건드렸다가 데일라.
어제 하루 내내 기다렸지만 결국 지갑을 찾으러 오지 않았던 그 남자를 어제 그 시각, 아침부터 기다리고있다. 둔한건지 버린건지.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데도 찾으러 오질 않지? 다른 것도 아니고 지갑이잖아, 지갑. 분명 거액이 들어있을게 뻔한 지갑!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바 언니랑 주문한 점심 식사가 도착하고, 그 식사까지 다 해치웠을 때도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내 사정을 들은 언니가 "그런건 당장 열어보는거야, 지갑 어딨어? 누구껀데?" 하는 것도 단호하게 뿌리쳤는데, 기다리다 목 빠지겠다.
딸랑-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어 그이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일도 지쳐 그냥 주문이나 받으려 일어났다.
아쉬운 쪽은 남자니까 알아서 찾으러 오겠거니라는 명답을 찾아내고 고개를 들려는데 대뜸 손님이 뭔갈 달라는 듯이 손을 내미는 바람에 좀 늦었다.
"제 지갑 여기있죠."
대뜸 짜증부터 내는 어제 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네,네. 하며 어물쩡 어물쩡, 카운터 서랍에 대충 넣어둔 지갑을 꺼내서 보여주자마자 쌩하니
지갑을 채가는 남자의 표정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썩창이었다. 손님에 대한 예의로써 나름 공손히 준건데, 기분 나쁘다는 듯이 채가는게 순간 열이 올랐다.
본인이 놓고간거 좋게 보관해줬더니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손 안댔어요."
"압니다, 손을 안댔으니 지금까지 내가 찾게 만들었겠죠."
"....."
"기본적으로 남의 물건을 습득했으면 누구 것인지, 찾게해줄 만한 연락처는 없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 정상 아닙니까?"
"아니 전..."
"애초에 주인 찾아줄 마음도 없었겠죠."
"....허."
"시급쟁이가 돈이 얼마나 급했는지는 잘 알겠으나, 앞으로 기본 정도는 익혀두는걸로 합시다."
"저기요."
난 정말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한거지? 주인 잃은 지갑을 보관해준거? 그 지갑을 주인에게 공손히 돌려준거?
내가 부담을 잔뜩 안으면서까지 보관해줬더니 그 마음을 매도하며 완전한 내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남자에게 점점 화가 치밀었다.
시급쟁이가 돈이 얼마나 급했는지는 잘 알겠으나, 시급쟁이가, 시급쟁이가, 시급쟁이, 시급쟁이. 남들은 은혜에 고마워서 보상금도 주는 판에, 뭐? 시급쟁이?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돌아가려던 남자에게 저기요 하며 남자의 팔뚝을 거세게 붙잡았다.
"뭡니까."
"난 정말 지갑에 손 댈 생각 없었고, 오늘도 안오시면 찾아드리려고 했어요."
"그래서요."
"......"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알 길이 있어야 말이죠."
"......"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며 무슨 말이든 해보았지만 결국 병신같게도 화는 나오지못했다. 왠지모를 위압감이랄까.
그래서요, 차갑게 돌아오는 남자의 대답에 마땅히 할 말 없다. 알 길이 있어야 말이죠, 라는 말에는 더욱이 그랬다.
왜인지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헛웃음을 한번 치더니 그만 뒤돌아 회사 로비로 나가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뒤쫓아 나갔다.
분해서 이건 도저히 못참아. 쿵쿵거리며 남자의 바로 뒤까지 쫒아,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금 얼굴을 마주하게 했다. 뭘 잘했다고 표정이 넌 썩창이야.
"야."
"....."
"넌 뭘 그렇게 잘났는데? 시급쟁이? 내 시급 니가 주니? 왜, 여기있는 사람들보고 봉급쟁이라고 해보지, 왜."
"뭐하는 겁니까. 조용히 못해요?"
"못해. 그깟 지갑 한번 발견하고 보관해준게 잘못이야? 거기 얼마나 들었는데? 어?"
"ΟΟΟ씨."
"넌 아주잘나서 니 빼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시급쟁이, 봉급쟁이에 불과하지?"
"그만하라고 말했습니다."
"난쟁이 새끼"
"......"
"니가 무슨 일을 하면서 얼마를 버는지는 몰라도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도경수 사장님
"......"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니가 나온지 얼마 안됐다고 해도 이건...."
"언니 나 어떡해...."
"점장님도 이건 어떻게 못해, 무조건 사장님 결정에 따라야지. 사장님한테 돈 받는 입장인건 점장님도 마찬가지인데."
그 남자와....아니아니, 도경수와 한바탕을 한게 고작 이틀 전이고 그 남자가 이 회사 사장이라는 걸 들은게 바로 어제였다.
주머니에 수표가 열댓장씩 들어있고 말투도 딱딱하며, 사람 주눅들게 하는 뭔가의 포스가 느껴질 때 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완전 새됐어.
'내 시급 니가 주니?'
'난쟁이 새끼'
생각할 수록 답은 하나다, 나 곧 잘리겠지. 우리 카페가 이 회사 부속 카페라 점장님도 이건 어쩔 수 없을거다. 이건 해고가 답이다.
안그래도 요즘 병원비가 꾸준히 밀려서 알바 하나 더 구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잘리게 생겼네. 진짜 어쩌지.
카운터에 앉아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가서 사정이라도 빌어볼까? 하면 난쟁이라는 내 발언이 걸리고, 미치겠다.
남의 사정을 봐줄만큼 착한 사람 같지도 않아보이고, 그저 참지 못했던 내가 너무도 밉고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어차피 잘릴 일, 뭐든 할 의욕이 생길리 없고, 손님이 오든 말든 가만히 앉아서 주문을 하기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주문, 안받습니까?"
"받아요, 주문하시겠....."
딸랑 소리에도 거들떠 보지않고 여전히 구인구직 신문에만 정신이 팔려있다가 주문 안받냐는 손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째 익숙한 대사와 익숙한 목소리같다 싶었더니, 고개를 들었을 땐 역시 도경수,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상대를 어떻게 해줘야 하지.
"라떼 한 잔 줘요."
"네."
"근데 표정이,"
"....?"
"원래 손님을 그런 표정으로 받습니까?"
언제 언성을 높이며 싸웠냐는 듯이 라떼 한잔을 태연하게 주문하는 도경수의 모습에 나도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마주하기 불편해서 살짝 찡그린 내 표정을 본건지, 원래 손님을 그런 표정으로 받냐는 도경수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왜그래요, 표정이. 라며 얼굴을 주욱 빼는 도경수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못했다. 그냥 아는 척 하지 맙시다, 악연인데.
"주문하신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이거,"
"....?"
"이거 한번 누를 때 마다 헤드라이트 켜집니다."
"네?"
"눌러봐요,"
"......으아."
"그렇게 누르면 헤드라이트가 한번 반짝 한다고요."
도경수가 라떼를 기다리는 동안 혼자 신문이나 보면서 단 한마디의 대화도 없었다.
라떼를 도경수한테 전해줄 때는 갑자기 라떼를 받아들어 다시 카운터에 내려놓더니 웬 차키를 꺼내들어 버튼 하나를 가리킨다.
네? 하는 내 멍청한 표정에 도경수는 처음 본 날 웃어줬던 것처럼 살풋 웃더니 눌러보라며 내 손가락을 가져다가 버튼을 꾸욱- 누르게 했다.
헤드라이트가 반짝 한다는데, 그게 반짝이든 말든. 어쩌자는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경수를 멍하니 쳐다봤다. 어쩌라고요. 혹시 외제차 자랑?
"나 이거 놓고갑니다."
"......?"
"주인 잃은거에요, 이거."
도경수 사장님
뭐지. 일단 도경수가 그렇게 뛰쳐나가자마자 차키를 들고 따라 뛰쳐나왔다가 주차장까지 오기는 했는데 여전히 상황 파악이 난 아직 안됐다.
대충 차 키로 헤드라이트를 비춰가면서 차를 찾으라는 소리 같은데, 내가 이걸 왜 해야하냐고, 일하다 말고.
나랑 사장 눈치보느라 정신없던 언니가 "어어, 어여 갔다와. 내가 할게. 얼른 따라가." 라며 보내주긴 했는데, 이거 되게 쓸데없는 일 같단 말이지.
"...후...."
꾸욱- 도경수가 알려준 버튼을 일단 누르면서 빛을 내는 자동차를 찾아다녔다. 이리저리 한참을 돌다가 코너 쪽에서 빛이 보였다.
괜히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그쪽으로 달려가 문제의 차 쪽으로 다가갔다. 이걸 누르면 문이 열린다고 했나? 열어도 되는거겠지?
썬팅을 잔뜩 해놔서 차의 내부는 전혀 안보이고, 그저 도경수가 시킨대로 또 문이 열리는 버튼을 꾸욱- 눌렀다.
달칵 하는 차 열리는 익숙한 소리가 들리고, 혹시 무슨 심부름이겠거니 차 문을 조심히 열었다. 도경수 차인가, 벌써 도경수 향수 냄새가....
"잘 찾아왔네요."
"......"
난다했더니 차 안에 도경수가 운전석에 능숙한 자세로 앉아 인사를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