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쫑긋쫑긋 세우고 다닌 결과 도경수가 다음달 즈음엔 레지던트를 밟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도경수랑 변백현이 입사동기니까, 백현이도 곧 레지던트를 달지 않을까 싶었지만 백현이가 하루하루 초췌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눈치보기에 바빴어. 예전에는 별 생각없이 궁금한거 있으면 바로 물어보곤 했는데, 요즘에는 공부하다가 모르는게 생기면 백현이한테 전화하기가 굉장히 꺼려졌거든. 혹시나 자고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야 체력이 약해서 항상 일이 고되다며 불평했지만 변백현은 고등학교때 신나게 뛰어다닌 보람이 있는지 3교대가 돌아가는 틈에서도 웬만해서는 팔팔했어. 그래서 백현이가 나를 챙기는 게 익숙했는데 요즘에는 백현이도 잘시간 없이 돌아가니까 나랑 연락도 뜸해지고 얼굴도 못보는게 현실이었지. 저번에는 애가 복도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길래 아는 척도 못하고 지나갔어.
오늘도 평소처럼 출근해서 간밤에 체크된 차트를 쭈욱 훑어보는데 담당인턴이 도경수야. 도경수야 워낙 정확한 성격이니까 제대로 했겠지 싶은 마음에 스윽 훑는데 투약 오더랑 환자가 맞바뀐 것 같았어. 도경수 성격에 그럴리가 없는데 싶어서 두번이고 세번이고 봐도 도경수가 이상해. 마침 도경수가 쪽잠을 자고 나왔는지 머리에 까치집 짓곤 가운 끼워입고 나오는거야.
"도쌤, 이거 이상한데..정신 놓고 체크하셨어요?"
"어.."
"넋놓지 말고, 다시 봐."
내 말에 경수가 눈을 비비고 차트를 확인하길래 나도 다른 거 보고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도경수가 아무 말이 없어. 그래서 고개 들고 쳐다봤더니 차트에 고개 박고 졸고 있는거야.
"선생니임?"
"..."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
"경수야, 일 안하냐."
결국 내가 툭툭 쳐서 흔들고 나서야 깜짝 놀라서 눈을 떠. 그 커다란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서 있는데, 도경수 덕후는 마음이 아프지. 경수가 목 몇번 앞뒤로 꺾더니 눈을 꿈뻑꿈뻑 거리면서 정신을 차렸어. 어이구, 우리 경수 잘생긴 얼굴 다 상했네.
"아..죽겠다."
"밤 샜어?"
"거의..한시간 잤나.."
"인턴 막바지가 원래 힘들다면서, 우리 경수 화이팅."
"변백현도 죽으려고 그러던데. 너한테 짜증 안내?"
"피곤하다고 짜증내는 건 내가 하는 짓이지, 걘 안그래."
말이야 쿨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싱숭생숭한게 사실이었어. 요새 통 연락도 안되고 연락이라곤 한번씩 아픈 곳 없냐는 변백현의 일상적인 문자들 밖에 없었어. 그거라도 나는 감사했지만, 그래도 얼른 백현이 바쁜 일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지.
사실 백현이만 바쁘고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나도 소아병동으로 로테이션 되면서 일하느라 바쁘고 퇴근하면 힘든 몸 이끌고 공부하느라 바빴어. 사실상 졸업하고 소아병동은 처음 와보는 거라 대학생때 공부했던 건 가물가물했거든. 나는 3교대 돌리는 것도 벅찬데 신규때처럼 다시 공부하려니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 그래서 그런지 원래 달고 살았던 위염이 나를 심하게 찾아왔지. 고등학교 3학년 때랑, 처음 취직하고 신규때 나를 괴롭혔던 위염이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빵하고 터져버린거야.
이제는 참는 거에 내성이 생긴건지 배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어도 그냥 참으면 좀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하며 참는게 버릇이 되기도 했고. 병동 옮기면서 위아프다고 징징댈 사람도 없어졌고. 그래서 꾸욱 참다가 일 끝나고 공부도 해야되는데 싶어서 외과로 약을 타러 내려갔어.
"약 좀 타주라, 나 속이 너무 아파서."
"나 먹던 약 있는데, 그거 줄까? 너 또 처방기록 변백현이 보면 난리 날텐데."
"그럴래? 병동 옮기고 죽겠다 진짜.."
아직 외과에 남아있는 내 동기한테 한번 징징거려주고 걔가 원래 먹던 약 받아서 식당 정수기 앞에서 약 꿀꺽꿀꺽 삼켰는데, 누가 내 손을 확 잡는거야. 덕분에 손에 남아있던 약 한알이 바닥에 떨어져버렸어.
"왜, 또 어디 안좋은데?"
"어.."
"위염이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백현이 얼굴에 멍하니 고개만 끄덕끄덕거렸어. 백현이가 살이 빠지면 얼굴부터 티나는 타입인데 볼살이 하나도 없고, 피곤한지 눈 주변이 퉁퉁 부어있는거야. 백현이가 피곤하면 눈 주변이 붓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많이자거나 뭘 먹고 자면 눈이 붓는데 피곤하면 눈 주변 전체가 부어버리거든. 내가 손 들어서 백현이 얼굴 만지려고 하니까 손목을 잡아채.
"왜 또 약을 달고 살아, 내성 생기면 계속 먹어야 되는거 알잖아."
"얼굴 부은거봐, 어제 못잤어?"
"끼니 거르지말고 인스턴트 먹지 말고. 그렇게 하라니까."
"..어디서 자꾸 담배냄새가 나지, 누가 병원에서 담배피나."
내가 코 킁킁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봤어. 병원은 정말 한번씩 막 담배피고 들어오신 보호자분들 아니면 담배냄새를 맡을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내가 그 냄새에 되게 예민하거든. 근데 갑자기 백현이가 내 손 잡고 있던 걸 놓더니 순간적으로 자기 옷을 툭툭 터는거야.
"..너, 담배폈어?"
"아니, 아닌데.."
변백현이 당황했는지 눈 데굴데굴 굴리는데, 정말 머리가 멍해졌어. 그러고보니 담배연기 냄새가 아니라 몸에 밴 냄새같기도 하고. 오늘 따라 백현이가 가운을 꼬옥 잠그고 있기도 했어. 가운 안쪽으로 티셔츠에 얼굴대고 숨 들이쉬었더니 변백현 옷에는 벌써 냄새가 배어버린거야.
"..야. 장난하냐."
"..."
"내가 얘기 했지 않아?"
"..."
"담배피는 사람 옆에 둘 생각 없다고, 그러지 않았어?"
백현이가 퉁퉁 부은 얼굴로 다시 내 손 붙잡는데 순간 얘가 너무 미워서 그냥 내쳤어. 백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나서도 주변에서 하도 담배를 많이 피니까 나는 그게 제일 걱정이었단말이야. 그러면서 내가 했던 말이, 김종대나 너나 담배피면 얼굴 안볼거라고 습관처럼 이야기했었는데 기특하게도 그 힘들다는 의대생 시절을 담배한번 입에 대지 않고 버텨냈어.
"아..너한테 이렇게 실망하기도 처음이다."
그렇게 의지가 약한 애라고 생각조차 한 적 없었는데, 뭔가 뒤통수 맞은 느낌도 들고 그 정도로 힘들었을 때 왜 나를 찾지 않았는지도 야속했어.
"지금 그쪽이 나한테 약 내성 생긴다고 걱정할 상황이세요?"
변백현이 제일 싫어하는 잔뜩 비꼬는 말투로 툭 한마디 던지고 그냥 바로 병동으로 올라와버렸어. 또 우연하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경수를 만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거야. 뭔가 변백현은 내가 이건 하지마라, 이건 나쁜거다, 이렇게 이야기 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온 느낌인데 도경수는 그런 거 하나 없이 저 혼자 여기까지 올라온 느낌이었거든. 원체 성격이 그런지라 대학생때 잠깐 사귄 경수 여자친구도 그런 면에서 진저리치며 떠났었어.
"..싸웠어?"
"아..짜증나."
"아까까지만해도 칭찬하고 가더니."
"변백현이 딱 너만큼만 했으면.."
"왜, 또."
"말이 되냐, 경수야..변백현이 담배를 입에 대는 게 정상적인 일이냐고.."
"..."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거진 십년을 이야기 했는데.."
"..이해해야지, 니가."
하여튼 보살 도경수. 뭐든 저리 이해하시고 배려하시는데 이 세상에 도경수 적이 어디있겠어. 마음같아선 도경수가 나랑 신나게 변백현 욕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성격상 그렇게 해주지 않을 걸 아니까 대충 눈물 닦고 먼저 자리를 떴어.
정말 하루종일 머리속에는 변백현 생각만 가득하고 그러면서도 울리는 전화는 모조리 거절해버리고. 나도 내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감정을 어찌 추스를 방법이 없었어. 그렇게 퇴근하고 집으로 가서 쓰러지듯이 잠들었어. 공부고 뭐고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아서 차라리 잠이나 자자 싶었던거지.
다음 날 아침에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아직도 살살 아파오는 윗배를 부여잡고 출근 한다고 병원로비로 들어섰는데 변백현이 로비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어. 쟤가 일하는데 로비에 앉아있을리는 없고 보나마나 내 얼굴 보러 저기에 앉아있구나 싶었어. 모른채하고 지나가려했는데 변백현이 먼저 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와서 내 손에 종이봉투 하나를 쥐어주는거야.
"나 기다릴 시간에 잠이나 더 자라, 제발.."
"아침 안먹었잖아."
"지금 내 아침이 중요하냐구요."
"그럼 뭐가 중요해."
"..."
"죽 먹고, 병에 든 것도 마셔."
내가 벽이랑 얘기하니 지금. 내가 얘한테 신경질적인 이유도 모르고 묵묵히 자기 할 말만 내뱉는데 그것만큼 답답한 것도 없어. 결국 짜증이 머리 끝까지 폭발한 내가 변백현 손에 다시 종이봉투 쥐어주고 빠르게 걸어갔어. 거기서 포기할 변백현이 아니지, 곧바로 성큼성큼 뒤따라 오더니 내 손에 억지로 봉투를 쥐어주는거야.
"짜증 그만내고 가져가."
"너 하나 추스르지도 못하는 게 뭘 나를 챙겨, 어?"
"야."
"사람 속 뒤집어지게 하지말고, 너부터 챙기세요."
"너 나랑 만나고 있는 거 맞아?"
"아, 왜 또."
안그래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있는데 변백현이 거기다가 불씨던지듯 말을 꼬는거야. 신경질적으로 뒤돌아서 변백현 얼굴 쳐다봤더니 변백현도 참았던 화가 폭발했는지 벌게진 눈으로 입을 꾹 다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왜, 내가 주제 넘게 굴었어? 챙겨주면 안되는 위치야, 내가?"
"..."
"쪽잠보다 너 아픈 게 더 중요해서 만들었다, 왜."
"..."
"내 밥보다 네 밥이 더 중요하니까 가져왔겠지."
"..."
"그럼 안돼?"
얼마만에 보는 백현이 화난 얼굴이지. 만감이 교차했어. 나도 힘들고 스트레스 받아서 생각나는대로 짜증을 냈는데, 생각해보니 변백현은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참아왔나 싶기도 하고. 그래, 다르게 생각하면 애가 대학때도 안하던 담배를 입에 댔을 정도면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했을까 싶기도 했어.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또 행동은 삐딱해져서 혼자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와버렸어.
백현이 만나면서 이렇게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적이 있었나, 당직실에 앉아서 백현이가 그렇게 억지로 손에 쥐어준 종이봉투를 열자마자 엉엉 울었지. 내가 죽을 먹을지 밥을 먹을지 고민이 됐었는지 무식하게 죽이랑 밥을 다챙겨왔어. 요즘 세상에 죽집이랑 밥집이 얼마나 많은데, 시간도 없는 애가 그걸 뭐하러 집에서 만들어와. 정작 자기 밥은 귀찮아서 병원에서 떼우고 가는 애가.
눈물 뚝뚝 흘리면서 변백현이 꼭 제 성격같은 큰 병에 담아온 내용물이 뭔가 싶어서 뚜껑을 돌려 열자마자 역한 냄새가 훅 올라왔어. 내가 그렇게 위염을 달고 살 때 변백현이 매일같이 양배추를 갈아서 억지로 먹이곤 했는데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였거든. 확실히 그걸 먹으면 속이 편했는데 양배추 특유의 냄새도 싫고 싫어하는 걸 나 스스로 만들어 먹을 리는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먹어야겠지싶어서 병입구에 살짝 입을 가져다 댔는데 내가 알던 그 맛이랑 다르게 되게 달달한 맛이 나는거야. 아마 변백현이 꿀을 된통 탄 것 같았어. 거기다 종이 가방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사탕 3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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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의사썰이 가장 잘 써져여...^_T.. 항상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당.(꾸뻑!)
그리고 왜 또 싸우냐 물으시면...제 취향이에여ㅇㅅㅇ.변탠가봐영. 싸우는게 제일 좋아..왠지는 저도 몰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