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나오는 여주는 유리구두썰의 여주가 아닌 영현의 과거 연인임을 밝힙니다
유리구두 한 번 신어볼랍니까?
w. 랑데부
너는 나를 어떻게 만났었는지 기억이 날까.
1.
"아, 죄송... 어어 그거 잡아주세요. 안돼 안돼"
"네? 아 네네"
매우 더운 여름 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한 자취방이 냉난방에 하나도 정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봄이 되서야 알아 찜통 같은 더위 속 반반한 빌라로 이사를 했던 그 날이었다.
영현은 계단에서부터 데굴데굴 굴러 내려온 펜들을 허리 숙여 주웠다. 어, 아니. 그게 아니고.
"..ㅇ,이 변태"
"뭐 변태?"
"그래 변태!"
환장하겠네. 이삿짐을 옮기다 떨어진 펜들을 줍다 새하얀 치마와 눈이 마주친 것에 변태로 오해 받은 영현의 팔뚝에 ㅇㅇ가 냅다 던진 슬리퍼가 둔탁하게 맞고 떨어졌다. 내가 펜 주워 달랬지 내 다리 보라고 했어요? 안 봤다니까? 아 이 여자 진짜. 봤잖아, 봤잖아. 내 눈으로 봤어 당신. 펜을 건네 받으면서도 영현을 미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터에 영현은 어이가 없었다.
"고오맙습니다"
"안 봤다고 난 말했어요"
"아닌뒈요, 뚱인뒈요?"
와 이 여자 뭐야.
끝까지 혀를 삐죽 내밀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근데, 앞집? 영현은 계단으로 달려가 창 밖을 내려다 살폈다. 이삿짐 차는 제 차를 제외하고 한 대가 더 서 있었다. 도와줬다 변태 취급한 여잔 영현의 이웃이 될,
"..진짜 안 봤어요?"
"안 봤다고"
"그럼,"
"또 뭐요"
"짜장면이나 같이 먹어요"
ㅇㅇ였다.
2.
나는 처음부터 네가 좋았다.
"어, 어. 난 다 했지. 교수님한테 제출했어"
그나마 지하철은 시원한 편이었다. 막차를 간신히 잡아탄 영현은 흐르는 땀을 손목으로 대강 훔친 뒤 빈자리를 찾아 어슬렁 걸었다. 남방을 벗어 손에 쥐고 끝자리에 털썩 앉은 영현은 꼬인 이어폰을 풀어 귀에 꽂았다. 술을 먹자는 톡으로 도배된 메시지창을 스킵하고 패션 잡지를 한 장씩 밀어 보던 영현은 갑자기 어깨가 푹 꺼지는 느낌에 빠르게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안녀엉"
"아, 어"
"뭐 듣냐아"
"어? ㄴ,"
잔뜩 혀가 꼬부라진 ㅇㅇ였다. 질문을 하고 답은 듣지 않았다. 대신 영현의 귀에서 이어폰 하나를 쏙 빼가 제 귀에 꽂고 베시시 웃는 거였다. 그 미소에 영현의 얼굴색이 붉게 오른 것을 ㅇㅇ는 만취 상태로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좋아하는 노래라며 영현의 손등을 붙들고 하트만 200여번 그려댈 뿐이었다. 불쑥 찾아와 불쑥 곁으로 다가와 웃는 ㅇㅇ를 감당해내기까지, 그 감당이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란 사실을 영현은 처음으로 알았다.
"..야"
"내려야 돼, ㅇㅇ야"
"...뚱인,"
"안되겠다. 업혀"
이젠 잠까지 솔솔 오는 모양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어기적대며 영현의 등짝에 올라탄 ㅇㅇ는 영현의 볼을 밀가루마냥 조물락대기 시작했다. 야야, 하지마라. 몇번이고 고개를 털었지만 ㅇㅇ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ㅇㅇㅇ 진짜.
"나 뭐"
"..뭐"
"너한테 좋은 냄새 나"
야, 야 ㅇㅇㅇ. 영현의 목을 끌어 안은 ㅇㅇ는 이번엔 영현의 목주변을 조물락대다 울대에 손가락을 비비기 시작했다. 귀에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한참 술에 취했으면서도 영현을 찾는 ㅇㅇ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면 ㅇㅇ도 알까. 위태로운 가로등이 꿈뻑대는 골목을 지나 언덕을 오르며까지 영현에게 갖은 TMI를 말하는 ㅇㅇ가 사랑스러웠다면 ㅇㅇ는 알까.
*
우선 걔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거,
"ㅇㅇㅇ"
"어웅, 모까아-? 이거 누구야-?"
영현은 머리만 쓸었다, 누가 또 ㅇㅇㅇ를 이지경까지 손수 만들어 고히 보내셨을까. 이미 초점이 무엇인지도 다 저 잔에 말아먹고 앞으로 뒤로 풀썩거리는 애를 흔들어 보았자였다. 야, 야 ㅇㅇㅇ. ㅇㅇ는 단추구멍만한 눈을 가늘게 실로 만들더니 영현을 이리저리 뜯어 보았다. 진지하고 쓸데없는 주정이었다, ㅇㅇㅇ는 천천히 끔뻑거리더니 금방새 히죽거렸다.
어, 아는 사람이네에- 당연하지 앞집 사는데. 너 되게 여우 닮았다아- 그 사막에서 모래먹고 사는 걔, 북극여우!
사막에서 모래먹고 사는 여우는 북극여우였다. 영현은 더이상의 주정 대신 ㅇㅇ를 꼭 업었다. 무거웠다면 진작 길가에 버리고 걸었을거다, 너무 가벼운 턱에 영현은 꿋꿋히 ㅇㅇ를 업은 채 가게를 나서 약국 앞에 ㅇㅇ를 앉혀두었다.
"너 여기 가만히 있어"
주는 알콜을 전부 모든 통증으로 내뱉는 ㅇㅇ에게 해장보다는 숙취해소제 두 병정도가 더 나았다. 그러나 종강파티가 겹치면 꼭 이런 곤란한 상황을 만들곤 했다, 매번 숙취해소제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모양이었기 때문에 영현은 계산을 치루면서도 대여섯번 고개를 돌려 고개 박고 웅얼거리는 ㅇㅇ를 확인했다.
"ㅇㅇㅇ, ㅇㅇ야 고개 좀 들어봐"
"이 시간에 누구... ㅇㅇ야"
"니가 몬데 내 이름을 막 부르고 이써, 이 북극에서온 사막여우야"
ㅇㅇ는 당당히 영현의 팔뚝을 쥐고 펄럭거렸다. 아아, 솜주먹도 꼬집히면 아프다. 영현은 ㅇㅇ에 팡팡거리는 주먹을 한 손으로 꽁꽁 묶고 ㅇㅇ를 붙잡았다. 길거리에 앉아 난동이라면 난동을 피우는 ㅇㅇ를 붙잡고 겨우 빨대를 입에 꽂았다. 으웩, ㅇㅇ도 도가 텄다. 쪽쪽 빨아 딱 영현의 운동화 옆에 주르륵 뱉는다. 좀, 영현은 결국 약국으로 다시 향했다. 가끔 약국에 비치된 그거, 요구르트 두어개를 들고 다시 한쪽 무릎을 시멘트로 울룩불룩한 곳에 꿇고 ㅇㅇ의 턱을 쥐었다.
"한번에 먹어 한번에"
해소제를 먹이자마자 요구르트를 먹였다. 해소제를 먹이는 건지 강영현을 맥이는 건지, ㅇㅇ의 주정은 항상 고달픈 히말라야였다. 두 병을 먹이는데 이십분이 걸렸다, 지난번엔 사십분 걸렸는데. 이마에 땀방울이 살짝 흘러 낙하한다. 영현은 축축한 목 뒤를 남방을 끌어 닦고 다시 ㅇㅇ를 업었다.
제발 조용히 가자, ㅇㅇ야. 영현은 ㅇㅇ를 고쳐 업었다. 자취방 근처 골목은 대충 그저 그런 비스무리한 상황이 여러곳에서 연출됐다. 그리고 편의점을 지날때쯤 잠잠했던 ㅇㅇ를 몸부림을 쳤다. 아 제발 좀. 누군가 매번 이 시기에 같은 테잎을 저 입에 쥐어 넣고 틀은 것마냥 ㅇㅇ는 비슷한 시점에 주정을 부렸다, 또.
"아이스크림"
방금까진 말인지 주정인지 두 개 적절히 섞어서 오물거리더니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 또. 아아이스크림, 이번엔 내려달라고 지랄이다. 지갑도 없는 애가, 아이스으크림으! 때릴 곳이 없어 못 때리는 거다.
"하얀 통?"
"아아니"
"그럼 뭐"
"핑크으?"
영현은 ㅇㅇ를 다시 내려 앉히곤 금방내 딸기맛 아이스크림통을 사왔다. 이거? 아니. 그럼, 그거 하얀통. 영현은 다시 몸을 일으켜 바닐라통을 사 스푼을 쥐어주었다. 이거? 아니. ㅇㅇㅇ, 아아 그거 맞아.
업힌 ㅇㅇ는 영현의 남방에 뚝뚝 아이스크림을 흘려가며 잘도 먹었다. 토악질을 하는 대신 이게 나았다, 다리 달랑거리며 폭폭 퍼먹다 금방 반쯤 남은 통을 영현에게 넘겼다. 춥다고. 열대야가 이 깊은 밤을 짙게 덮어버린 이 시간에 춥댄다, 다들 고성방가에도 불구하고 찜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창을 여는 이 깊은 시간에 추워 죽어버리겠댄다.
대체 왜 너여야했을까
3.
"잘 하고 있냐"
"뭐야, 왜 왔어?"
"편의점에 왜 오긴, 너랑 마실 맥주 사러 누나가 먼 길 걸어 와 봤지"
누가 누나야. 내가, 내가 누나다 왜. 불만 있냐?
영현에게 못내 웃음이 흘렀다. 오전부터 풀강의를 듣고 뻗을 타이밍에 야간 알바라니. 나라도 응원하러 와 줘야지 응? ㅇㅇ는 영현의 머리를 마구 흩뜨리고 맥주를 가지러걸어갔다. 걷는 것도 귀여워가지고. 영현은 여직 지우지 못한 웃음을 품은 채 계산대에 엎어져 잠시 멈춰두었던 게임을 다시 플레이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기. 저기 재고 비였잖아. 다시 채워 놔"
"아 네"
"학생! 학생 잠깐 이리 와봐"
영현은 돌아서 다시 점장의 앞에 섰다. 지금 이만원 비잖아, 어? 뭐야 학생이 가져갔어? 아니요. 그게 아니고 계산을 잘못, 아니 심지어 저거 개인 금고인데.
영현의 앞에 돈다발을 흔드며 면박을 주는 점장이었으나 영현은 을이었다. 그것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을. 제대로 이야기도 듣지 않고 몰아붙이는 점장에 잔뜩 표정이 굳어진 영현은 오해를 풀기 위해 한 마디라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저기 잠시만요"
"그쪽은 누구야? 어?"
"너 정황있어? 제가 아까부터 봤는데요 이 친구 거긴 손도 안 댔어요. 저기 CCTV 확인해보시면 되잖아요"
"아니 CCTV고 뭐고, 그런 게 아니고 지금 돈이 비니까.."
"하 진짜"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ㅇㅇ는 거친 손길로 영현을 쥔 채 편의점을 박차고 나왔다.
"개인금고를 누가 알바한테 관리하라고 했어? 지가 관리 못해놓고 계산대 돈이 빈 것도 아닌데. 그럼 지가 관리하든가! 하 진짜 열이 받아가지구"
"그런 사람들한테는 어? 주먹을 이렇게 빵! 날려야 했다고. 아 나 짜증나 진짜로-!"
놀이터 그네에 앉아 ㅇㅇ는 온갖 성을 다해 열을 냈다.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며 영현의 부당대우에 대해 완전히 열이 받아 말을 쏟아내는 ㅇㅇ를 영현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단순히 이야기만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ㅇㅇ에 대한 확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내 말이 맞아 안 맞아, 어?"
"..어어 맞아"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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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더라고요 명장면을 한 번쯤 옮겨 보고 싶어 조심스레 글로 적어 보았습니다.
영현이의 과거의 여주는 유리구두의 여주와 다른 인물입니다. 모두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시는 매일이 되시길 바라며, 빠르게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추가 (현재씬) |
"사람, 안 믿지?" "야" "사랑도, 안 믿지?" "이제 나도 가만 안 있어. 다시 이런 일 만들지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