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굵게 표시된 숫자가 있는 부분은 과거입니다.
유리구두 한 번 신어볼랍니까?
w. 랑데부
8.
"헤어지자"
너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만 하고 싶어"
"ㅇㅇ야"
너와 보낸 모든 계절을 정리하기까지, 그 시간까지 내가 가지 못할 걸 알았다.
영현은 ㅇㅇ의 손을 붙잡았다. 시간, 시간을 좀 줘. 멍하니 아무것도 담지 않았던 ㅇㅇ는 잠시의 정적을 갖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간을 좀 갖자.
9.
"왜 여기까지 왔어. 집에 있으라니까"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ㅇㅇ는 타박과 다르게 영현의 코트 안으로 쏙 들어가 얼굴을 부볐다. 아 강영현 냄새. 코트 안에 꽁꽁 숨어버린 ㅇㅇ는 한동안, 잠이 깰 때까지 기차역에서 영현을 끌어 안았다. 기차에서 오는 내내 잠들었던 건 잠이 아니었다.
"..안아줘"
"그래"
영현에게 안겨 잠드는 게 비로소 안정적인 잠이었다. 영현은 ㅇㅇ를 번쩍 안았다. 습관 같은 일이었다. 길을 걷다, 그 어디서든 갑자기 영현의 앞을 가로 막고 서 영현에게 안겼다. 그럼 한 번씩 번쩍 안아 올려주었던 영현이었다.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어. 그랬어? 나와 있어줘서 고마워.
"집 가다가 삼겹살 먹을까?"
"소주도?"
"또 아이스크림 먹으려고, 안돼. 추워"
"아 조금만 마실게. 조금만"
알았어. 물론 믿지 않았다. 진탕 마시고 업혀 들어갈 것이었지만 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어때, 넌데.
그냥, 넌데.
*
패션워크 스탭으로 일을 하는 것은 영현에게 천국 같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고된 하루가 되곤 했다. 열심히 발에 땀이 나게 뛰어가며 여러 일을 떠안아 들면서도 영현은 지나는 쇼 하나를 그냥 넘기지 않고 영현이 가진 낡은 수첩에 모두 카피 스케치를 해두었다. 어 저거, 그리고 영현의 눈에 퍽 들어온 구두가 있었다.
"..저거다"
영현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간단한 스케치가 아닌 꽤 처음부터 완성도 있는 실루엣을 잡고 영현은 구석에 서 한참 상세한 정보들을 적어 나갔다. 영현씨! 그러나 금방 영현을 부르는 목소리에 급하게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영현은 다시 스테이지 뒤로 달려갔다.
"어 전화,"
일이 끝나고 확인한 휴대폰엔 생각보다 많은 부재중이 찍혀 있었다. ㅇㅇ의 이름이 적힌 부재중에 영현은 두어번 전화를 걸었지만 반대로 받지 않아 짧은 메시지만 남기고지하철역으로 걸어 내려갔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어? ..아"
아침부터 바빠 미처 채우지 못한 교통카드에 영현은 난색을 표하며 지갑을 열었다. 한참 퇴근 시간이라 사람이 밀려 텅 빈 지갑을 들고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여기"
"어?"
뭐해 빨리 나와. ㅇㅇ였다. 카드를 찍은 ㅇㅇ는 영현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사람들 기다리잖아. 엉겹결에 지나온 영현은 이곳까지 마중을 온 ㅇㅇ의 빨갛게 언 귀가 먼저 들어왔다. 뭐해? 영현은 큰 손으로 ㅇㅇ의 작은 귀를 꼭 감쌌다. 집에서부터 오기까지 꽤 먼 거리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현을 바라보던 ㅇㅇ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뒤 조심히 ㅇㅇ를 안은 영현은 그제야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지하철 타고 왔지"
"전화 안 돼서 그러고 달려 나왔지?"
"아니야아"
아닌게 아니었다. 쉬는 시간 잠시라도 확인을 할 껄. 언제나 꼬박꼬박 먼저 연락을 하던 영현이었으니 충분히 놀랄 만도 했다. ..안 놀랬어. ㅇㅇ는 발꿈치를 들어 영현의 목을 껴안으며 나름의 안심을 시켰다. 안 놀랬어 진짜 나. 알았어. 영현은 패딩을 벗어 ㅇㅇ에게 입혀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너는"
"안,"
"안 추운 게 어디있어"
패딩을 벗어 주려 하자 영현은 ㅇㅇ를 꽉 끌어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야 빨리 입으라니까? 안 춥다니까? 네가 슈퍼맨이야 아이언맨이야 뭐야. 그 사람들도 다 추워해. 빨리 입으라고. 끝끝내 말을 듣지 않는 영현을 이기지 못한 ㅇㅇ는 집에 가는 길 내내 영현을 수시로 올려다 보았다.
"이리 와봐"
"응?"
아저씨 이거 얼마에요? 만원, 학생이지? 팔천원만 줘.
네가 나에게 둘러줬던 것처럼, ㅇㅇ는 하얀 목도리를 자리서 구매해 영현에게 둘러 주었다. 이제야 볼만 하네.
"고마워"
"아니 내가"
내가 더 고마워. 뭐가? 아니 그냥 다 고마워. 원래 그냥 다 고마운 거야. ㅇㅇ는 영현의 손을 깍지 껴 쥐며 해맑게 웃었다.
"들어가"
"네가 먼저 들어가"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날 새겠다 빨리 들어가. 집 앞이어도 보고 싶은 건 같다. 문만 열어도 볼 수 있는 거리여도 언제나 같은 마음이었다. 문을 차마 닫지 못하는 ㅇㅇ에 영현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ㅇㅇ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왜, 뭐.
"누나"
"자고 가라"
10.
*
솔직히 말해서 너는 우리가 영원할 거라 생각했어? 난 아니야. 그리고 여기에 그만 발 묶이고 싶어, 그만 하자 우리.
너 때문에 친구 하나 없는 거 알아? 나는 그게 아무렇지 않았거든 그게 아니더라. 너만 본 내가 후회스러워.
너한테 더이상 설레지가 않아. 좋지도 않아. 질질 끌기 싫어.
*
"글쎄? 한 두달 전인가, 나간다고 미리 말 했지"
ㅇㅇ가 사라졌다. 아니 떠났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영현이 없는 새 짐을 전부 빼 떠났다. 그리고 영현이 가졌던 그 수첩까지 가지고. 허탈감만 남아 버렸다. 영현의 전부를 아무렇지 않게 가져 떠난 ㅇㅇ가 미운 동시에 미워지지가 않았다. 죽어라 미워해도 모자란 마당에 밉지가 않았다.
"등신, 진짜 하나도 없어?"
"ㅇㅇ한테 연락 온 건, 없어?"
"지금 나한테 그거 물을 처지야? 미친놈아"
브라이언 이 미친 놈. 영현이 그동안 디자인했던 모든 작품들을 갖고 떠났는데 그것보다 ㅇㅇㅇ가 우선인 것이 제형을 기가 차게 만들었다. 저에게도 한 마디 없이 떠난 못난 친구였지만 걱정은 됐다. 그래도 ㅇㅇㅇ. 이건 아니지. 적어도 강영현한테는 솔직했어야지.
"그만, 그만 마셔"
"..아 한 잔만"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두 병 되는 걸 내가 이제 모를 줄 아냐. 제형은 강하게 거부했지만 영현은 더 강하게 거부하고 잔을 채웠다. 대체 어느 깊이까지 차있었던 걸까. 대체 얼마나 깊은 곳에 자리했기에 영현이 이렇게 된 걸까. 영하 7도에 육박하는 추위에 패딩 하나 없이 나와 찬바람 쌩쌩 부는 창가에서 벌써 몇 병째야. holy shit.
"연락 오면 바로 전화 줄게. 집 좀 들어가, 강영현"
"따악 얼굴 한 번만 보면"
"어 알았으니까 들어가라고"
..그러면 될 것 같은데.
제형은 빌라 앞에 영현을 던져 두고 숨을 몰아 쉬었다. 드럽게 무거워 아오. 야 ㅇㅇㅇ, 너는 삼년이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냐. 그럼 쟤는 대체 왜 저렇게까지 아파하는 거냐. 네가 진짜 뭐였길래.
"..."
제형이 돌아가고 영현은 잔뜩 휘청대며 집 앞에 서 열쇠를 찾다 문득 돌아섰다.
"영현아아"
"강영혀언님-"
"이번엔 또 뭘까, ㅇㅇ야"
"노트북이 안 먹어!"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그렇게 귀엽게 하면 어떡해.
"뽀뽀 다섯번?"
"가자. 당장 고쳐줄게"
영현이 문 앞에 기대 주저 앉았다. 당장 네가 문을 열고 나와 나를 부를 것 같아서.
"강영현 너 진짜 죽는다, 이거 안 열어?"
"안 열어. 화 풀릴 때까지 가만히 좀 있.. 야!"
그러게 누가 비밀번호를 내 생일로 해놓으래. ㅇㅇ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 영현아 미안해. 깜지 써왔으니까 봐줘
동글동글한 글씨로 영현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섯번과 그리고 사랑해라는 말을 열번이나 적은 깜지를 내밀고 품에 포르르 달려와 안긴 ㅇㅇ에게 영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내가 더 미안해"
조심스레 턱을 쥐고 한 부드러운 키스였다. 사실 너 많이 보고 싶었어. 종이를 떨어 뜨리고 영현의 허리를 감은 ㅇㅇ가 발을 헛디뎌 가슴팍에 얼굴을 꿍 부딪힌 ㅇㅇ에 금방 고개를 젖히고 한참 웃었지만 말이다.
11.
"너 아직도 ㅇㅇㅇ 찾지?"
"다 알어"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영현은 제형을 흘겨 보고 웃었다. 웃었어? 미친 거 아냐.
"찾았어"
"뭐?"
찾았다고. ㅇㅇㅇ.
제형은 소매로 안경을 닦아내다 불현듯 고개를 확 돌렸다. 찾았다고? 만났어? 아니 만난 건 아니고. 공항에서부터 웬지 쎄하게 뒤바뀐 영현의 분위기는 ㅇㅇㅇ의 영향이었던 걸까. 제형은 영현이 말을 꺼내기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잘 지내더라"
"내가 디자인 했던 그거 다"
걔가 만들어 썼어. 남자친구도 있었고.
"내가 ㅇㅇㅇ를 왜 못 놨는지 아냐"
"네가 말 안 했잖아"
그렇지 내가 말 한 적이 없네.
"영현아"
"걔가 나한테 줬던 건 전부 진심이었거든"
"사랑해"
"걔가 나한테 줬던 모든 시간이 그 계절의 찰나가 전부 다"
"진심이었다는 걸 알아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쉽게 누군가를 믿기는 어렵겠지. 근데 박제형 그것보다,
"나는 진짜 아무도 사랑하지 못 할 거 같아"
"강영혀언"
"나는 ㅇㅇㅇ 원망 안 해"
쉽게 누군가를 못 믿고, 쉽게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었어도. 절대 원망 안 할 거야.
"나는 아직도 걔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ㅇㅇㅇ를 만났던 그 겨울에 살고 있어. 다 끝난 거 알아, 그래도 여기 있을 거야.
가장 행복했던 시간 속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 p.1 |
"ㅇㅇ야"
"..응?"
왜 앞에서 잠들어 있어. 늦게 온다고 먼저 집에 들어가 있으라니까.
"..들어가 있었는데에"
"그랬는데?"
네가 없으니까 잠이 안와. ㅇㅇ는 한참 울상이 되어 아무렇게나 영현에게 안겼다. 네가 있어야지 잠도 오고, 잠도 오고 어 잠도 오는데..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라"
ㅇㅇ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리본을 꺼내 제 머리에 묶었다.
"생일 축하해"
내가 선물이야. 감사하게 받아 이 말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 와 생일을 제대로 한 번도 챙긴 적이 없다는 말을 기억했던 ㅇㅇ는 그렇게 집 앞에서 하염없이 영현을 기다렸던 거였다. 내가 미역국도 끓였어. 너 먹어본 적 없지.
"우선 약부터 바르자"
"어?"
먼저 잡아 이끈 건 부엌이 아닌 서랍 앞이었고 구급상자를 꺼내 ㅇㅇ의 손을 쥐고 데인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영현이었다. 그 무엇보다 ㅇㅇ의 상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그저 자취러, 배달 음식이 일순위였던 ㅇㅇ가 할 줄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며 끓였을 미역국에 고마우며 동시에 미안했다. 이럴 줄 알았음 좀 더 일찍 돌아와 같이 할 껄.
"그 말 하면서 은근히 캐나다 가고 싶어 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아,"
ㅇㅇ가 불을 켜자 보인 건 영현의 베이스였다. 또한 영현의 어릴 적 사진, 그리고 영현이 처음으로 디자인했던 구두까지. 모두 캐나다에서 받은 거였다. 영현 몰래 영현의 친구와 메일로 주고 받으며 영현이 캐나다에서 가장 많이 보고 만졌던 물건들. 그리고 편지.
"나한테 말 좀 해. 그래야 내가 알아"
네가 보고 싶어 했던 모든 걸 다 가져오고 싶었는데 그건 안돼더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 모든 걸 스스로 혼자 몰래 준비해 온 ㅇㅇ를 먼저 안아 올렸다.
"..무슨 말 해야 돼"
"지금 생각 나는 말"
"사랑해"
"나도"
"사랑해. 강영현"
나는 ㅇㅇㅇ를 만났던 그 겨울에 살고 있어. 다 끝난 거 알아, 겨울도 갔지. 그래도 여기 있을 거야.
가장 행복했던 시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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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현이의 과거가 끝이 났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사는 영현이기에 지금의 영현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단 2명만 봐주셔도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 열심히 지루하지 않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정말 매번 감사드립니다.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