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닉 = 내 여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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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밤하늘은 한국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냥,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하늘은 멀다는 것. 9월의 오후는 아직 덥지만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는 것. 사람마다 전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종인에겐 그랬다. 다만 한국과 이곳에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지금 도경수는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 종인은 펜실베니아주에 도착하자마자 동쪽으로 향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의 건물들이 압도적으로 다가왔으나, 이곳 필라델피아에 도경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종인을 충분히 들뜨게 만들다. 그저 내겐 그 모든 것이 낯선데, 너는 괜찮을까. 기차에서 내린 종인은 고요한 도시의 풍경들을 눈으로 훑었다. 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도시들 틈으로 어딘가에 있을 도경수를 찾으며.
경수야, 안겨 외전(外傳: 너의 의미)
W.B 보송
“Umm, Just keep going.”
“Go straight forward, right?”
“Yes. So, good luck!”
“Okay, Thank you. Wish you good luck, me too.”
계속 앞으로 가면 된다는 남자의 말에 종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인사를 건넸다. 행운을 빌어준다라. 내 얼굴에 그렇게 티가 났나. 종인은 피식 웃으며 제 입가를 매만졌다. 이미 새벽이 되어버린 필라델피아의 하늘은 고요했고 아름다웠다. 종인은 그 어둠 아래를 걸으며 제가 예약해뒀던 호텔로 향했다. 운이 좋게도 전망이 좋은 룸이었다. 다 씻고 난 뒤 종인은 가운을 입은 채 젖은 머리를 털었다. 높은 층에서 내려다보는 미국 도시의 풍경은 훨씬 아름다웠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곳. 그런 곳에 지금 도경수가 살고 숨 쉬고 있다. 3년이 훌쩍 지난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종인이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곧 전화를 걸었다. 하루라도 빨리 도경수를 만나고 싶었다.
“어디야?”
─사무실. 내일 미팅이 꽤나 중요해서. 아, 그래서 말인데 나 당분간은 집에 못 들어가. 내일 아침 비행기로 호주에 가야하거든. 대신 내일 경수 집에 있으니까 가보고. 어차피 목적도 그거잖아, 넌. 그나저나 한국엔 언제 돌아갈 예정이야?
“이제 막 온 사람한테 묻기에는 빠른 질문인 것 같은데. 여하튼 당분간은 여기 머무를 생각이야.”
─그래. 무사히 도착했으니까 됐네. 경수 좀 잘 보살펴줘. 내가 없으면 밥을 꼭 거르는 애야. 자기도 먹어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거든. 옆에서 신경 좀 써주고 또…….
“…….”
─경수, 안 그래도 보여도 많이 외로운 애야. 네가 표현은 거칠어도 꽤나 섬세하잖아. 그래서 너라면 뭐,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챙겨줘.
“…그래. 일마저 하고, 이만 끊을게. 응. 나중에 전화 해.”
전화를 끊은 종인이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 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외로운 아이라. 그래, 도경수는 늘 외로워했다. 입을 맞출 때도, 관계를 맺을 때도, 심지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도경수의 눈빛은 늘 쓸쓸해 보였으니까. 마치 다른 곳을 보는 것처럼. 도경수의 시선이 향하던 곳은 다름 아닌 외로움이었다. 그저 자신이 도경수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도경수는 자신이 도경수라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 것이다. 3년간 한국에서 지내면서 종인은 경수에 대해 많은 생각에 잠겼고, 많은 결론을 내렸다. 종인은 그저 경수의 곁을 채워주고 싶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종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종인은 불을 끄고 침대 헤드에 기대 스탠드를 켰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인 서류에로 손을 뻗어 그것을 펼쳤다. 팔락이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종이들은 종인이 회사에서 검토 중인 프로젝트 서류였다. 게으름뱅이 팀장이라도 욕을 먹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제가 이사 자리에 오르다니. 순간 제 어깨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종인이 기지개를 폈다. 주말을 끼고 연차를 연달아 쓰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에 머물 수도 없다는 게 좀 슬펐다. 그래도 나도 나만의 사회가 있는 거니까. 도경수도 도경수만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종인은 창가 쪽을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 더 줄어든 도시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종인이 스탠드를 껐다. 모두가 잠이 드는 새벽이었다.
* * *
“그러니까, 어, 음…오, 랜만이다?”
“…….”
“그, 저기…들, 어 가도 되지?”
“…들어오세요.”
문 앞에 섰을 때부터 슬슬 긴장이 되더니, 문이 열리고 도경수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종인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리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기만을 삼십초. 종인이 굳은 입술을 억지로 열고 목소리를 꺼냈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순간 종인은 제가 말더듬이라도 되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담담하게 들어오라며 길을 비켜주는 경수 때문에 종인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무뚝뚝한 건 그대로네. 종인은 속으로 생각하며 경수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담한 이층 주택의 풍경은 아름다웠고, 정원에는 제법 시원해진 바람이 불었다. 곧 종인이 들어선 경수의 집 현관문이 닫혔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앉아요. 차 가져올 테니까.”
“어, 어……. 그래.”
거실 소파에 앉은 종인은 곳곳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풍경화가 꽤 많네. 직접 그린건가? 종인은 풍경화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곧 차를 내오는 경수의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고 차를 따르는 경수의 손에 희미한 물감 자국이 보였다.
“미술, 하고 있는 거야?”
“네, 뭐……. 학교도 이 근처예요.”
“회화? 순수 미술 하는 거지?”
“일단은요.”
의외였다. 경수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경수가 제 말이 순순히 대답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종인에겐 낯설면서도 즐거운 감각이었다. 도경수가 타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도경수가 그린 그림을 보고, 제 옆에 앉은 도경수를 바라본다는 것. 종인은 제 눈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맞춰오는 경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곧 찻잔을 테이블 위로 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상체를 경수의 가까이로 해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했다. 경수는 그런 종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곧 천천히 눈을 감았고, 종인은 그런 경수를 바라보다 곧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맞추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이 따뜻한 감각을 이제야 맛본다. 종인은 한동안 입술만 맞댄 채로 있다가, 곧 달큰한 숨을 경수의 입술 위로 내뱉었다. 종인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자 경수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고, 종인은 그런 경수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짓고서 말했다.
“키스하고 싶어서 혼났네.”
“…….”
“있잖아, 궁금한 게 있는데.”
어느덧 경수의 손을 잡고 물감이 묻은 부분을 조몰락거리는 종인이었다. 경수는 그런 종인이 귀찮은 건지 좋은 건지 모를 표정으로 종인에게 잡힌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경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종인을 바라보고선 대답했다.
“네.”
‘뭔데요’도 아닌 ‘네’라니.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구나. 종인은 경수의 대답에 씨익 웃으면서도 여전히 경수의 손을 바라보았다. 제법 선이 굵은데도 가느다란 손가락이 마냥 예뻤다. 종인은 제 손 안에 쏘옥 들어오는 경수의 손을 한참이나 매만지다가 잠시 다물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아직도 나를 좋아해?”
“…….”
“난 말이야. 솔직히 아직까지도 너에 대한 확신이 안 서. 분명 네가 떠나기 전에 날 좋아한다고 말했는데도 난…네가 이렇게 미국에 온 후로부터 그냥 초조하기만 했어.”
“…….”
“그러니까 내 말은.”
“…….”
“나 아직도 좋아 하냐고.”
여전히 도경수의 눈빛은 어딘가 멍해보였다. 하지만 분명 그 시선 안에는 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종인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경수의 시선에 초조함을 느꼈다. 그래서 경수의 손을 잡고 있는 제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저 눈만 깜빡이는 경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경수는 늘 그렇듯 잠시 굼뜨다가 곧 제 입술을 달싹였다. 입술을 달싹이는 저 버릇은 경수가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란 걸 어느 정도 눈치 챈 종인이었으나, 한편으론 경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종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다 곧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경수의 목소리에, 종인이 비로소 안심한다.
“네.”
“…….”
“저는 아직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서툰 방식만큼 도경수는 솔직하다. 그것에 경수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종인의 손이 그제야 나른하게 풀린다. 종인은 경수의 손을 잡은 채 엄지손가락으로 경수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 따스한 느낌에 경수가 짧게나마 피식 웃었고, 그걸 또 귀신같이 본 종인이 금세 히죽거리며 제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고서 말했다.
“그럼 그 증거로 여기, 내 입술에다가 먼저 키스해봐.”
“…….”
“빨리. 그래야 내가 믿지.”
“믿지 마세요, 그럼.”
“어, 야, 잠깐, 도경수!”
경수가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보다 더 빨리 소파에서 일어난 종인이 다급하게 경수의 팔을 붙잡았다. 허나 그 순간 종인의 쪽으로 몸을 돌린 경수가 종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곧 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종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됐죠?”
“어, 어? 어…….”
종인은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대답을 흘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기습을 당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거기다 제 대답에 안도한 듯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는 도경수라니. 종인은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것에 경수가 살짝 인상을 쓰며 왜 그러냐는 듯이 바라보자, 종인은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말했다.
“그냥, 좋아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
“너랑 나, 둘 다 3년 동안 많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저 널 인형 취급하겠다고 말했던 바보 같은 나와, 그런 나에게 휘둘리는 척 했던 도경수. 또 그런 도경수를 사랑해 버린 나와,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도경수. 우리는 서로 외로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긴긴 시간을 거쳐 드디어 맞물린 두 입술은 오랜 기간 동안 외로웠던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종인은 경수의 뺨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곧 제 입술을 경수의 입술 위로 포갰다. 창문 틈을 비집고 발끝에 닿는 노을빛이 맞물린 입술처럼 따스했다. 종인은 붉은 빛에 반짝이는 테라스의 창가를 등지고 앉아 경수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조심스레 경수의 등을 매만지다 곧 깃이 단정하게 다려진 푸른 셔츠의 단추를 종인이 하나씩 풀어갔다. 경수는 종인의 손끝에서 풀어지는 제 옷의 단추를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종인의 숨결이 제 목덜미에 닿고, 종인의 투박한 손이 제 살결에 닿을 때, 그제야 경수는 제 몸을 감싸는 붉은 빛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제 몸에 스미는 이 따스한 빛처럼, 종인이 제 몸에 녹아든다. 경수는 종인의 목덜미에 제 손을 두르고서 붉어진 숨을 내뱉었다. 발갛게 익어가는 9월의 가을이었다.
* * *
“지금 무슨 생각 해?”
“…바닥에서 두 번 다신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경수의 몸 위로 얇은 이불을 덮어준 종인이 다시금 경수의 옆에 누웠다. 열어 놓은 테라스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위로는 달빛이 일렁였다. 종인은 경수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그 여린 몸을 끌어안자, 경수가 곧 종인의 쪽으로 몸을 돌려 눈을 맞췄다. 종인은 그런 경수의 눈꺼풀 위로 조심스레 입을 맞추더니 내뱉는 숨만큼이나 나른한 목소리로 경수에게 물었다.
“돌아 올 거야?”
“…어디로요?”
“어디긴. 당연히 내 옆으로지.”
“…지금은 당신 옆에 있잖아요.”
경수의 말에 종인은 느리게 눈을 감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믿어. 언젠가 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거란 걸. 종인의 말을 얌전히 듣던 경수가 곧 천천히 눈을 감으며 종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종인은 그런 경수의 등을 토닥여주며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
“도경수.”
“…….”
“잘 자.”
이 순간, 나는 너의 의미를 깨닫는다. 도경수, 너는 나의 빛. 동시에 내가 품어야 할 어둠을 가지고 있는, 도경수, 나의 빛.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내 발등에 너란 빛이 닿는다. 도경수가 따뜻했다.
* * *
“누나는 못 보고 가네요.”
“뭐,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다음, 또 언제?”
“음, 네가 보고 싶다고 말 하면 언제든지.”
도경수가 여기서 잘 적응하는 모습도 봤고, 밀린 업무도 슬슬 할 겸, 종인은 다음 날 바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언제 또 올 거냐고 묻는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종인은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경수는 그것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종인과 짧게 작별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은 알고 있었다. 우리의 작별은 곧 다시 만날 인연을 뜻한다는 것을. 경수가 끝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을 때, 종인은 그런 경수를 쫓아 이곳 미국까지 왔다. 그러니 우리의 작별은 언제든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인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경수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말에 경수는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종인이 경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서 뒤를 돌았다. 점점 멀어지는 종인을 바라보며 경수는 제 입술을 달싹이다, 곧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든지 한국으로 와. 이번엔 내가 널 기다리고 있을게.
종인은 미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자리에서 저를 기다리겠다고 말한 종인의 마음은 여전히 경수의 옆에 놓여있었다. 경수는 곧 종인이 타고 있는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공항을 나섰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근하게 감싸주던 종인의 그 마음을 제 가슴속에 간직한 채.
+)불마크...를 붙일 수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생략했는데..안 붙여도 되겠죠...?
(아니 근데 세상에나!!...이글 제가 쓴 글중에 최초로 불마크를 뗀 글이예요ㅋㅋ!! 는 잡소리!!)
다음 글은 텍파 공지와 함께 달달한 카디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