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고 있어? 꿈 이루고 열심히 사는 모습 보기 좋더라. 가수가 꿈이었잖아. 예전부터 춤도 잘 췄었고. 연락은…… 연락은 왜 안 했어? 내내 기다렸는데.
첫사랑 일지
bgm : 달빛바다 - 겨울빛 외로움
또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13년이었고 이제 2019년이 막 시작되고 있으니, 지긋지긋한 이 인연도 벌써 6년째에 접어들고 있나 보네. 열다섯의 여름이었다. 이제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마음 한 편이 시큰해지는 박우진을 만난 건. 유난히도 덥고 습했던 그해 여름, 나는 박우진과 짝이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본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과묵했던 그와의 서먹함을 견딜 방법이 없어 애를 먹었던 것 같다.
“필기, 거기 말고 여기 학습지에.”
국어 시간이었나. 미리 받은 학습지에 적혀 있는 판서 내용을 교과서에 빼곡하게 필기하는 그에게 내가 건넸던 말. 아마 우리의 첫 대화였을 거다. 비록 그의 대답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어…….” 뿐이었지만. 그날 이후 나는 박우진과 정말 느리게,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소소한 인사를 주고받고, 뭐, 솔직히 말하자면 주기만 하고 받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의 준비물을 챙겨주고, 별 시답지 않은 장난을 치는 사이 하나의 계절이 지나갔다.
그해 10월에는 학생들을 잔뜩 들뜨게 만드는 축제가 예정되어있었다.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하루를 나름 가까이서 지켜보는 짝으로서 물었었다. 이번 축제에서 가장 기대되는 무대가 무엇이냐고. 그땐 단순히 밴드부의 공연이나 방송부의 영상제 정도의 뻔한 대답을 예상했던 것 같다. 다들 그렇게 대답하곤 하니까.
“제일 기대되는 무대? 당연히 내 거지.”
그리고 나의 예상을 깬 그의 대답. 처음에는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그의 장난 섞인 대답이 뜻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박우진은 춤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나름 춤을 잘 추는 댄스부 학생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로부터 그의 무대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엔 잠시 생각 회로가 멈춘 듯했다. 박우진이 춤을 춘다고? 내가 아는 조용하고 숫기 없는 그 박우진이?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기 힘들 것 같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이 그의 무대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해질 때쯤, 그도 나에게 비슷한 질문 하나를 던져왔다.
“김여주 너, 노래 잘 불러?”
나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한때 가수를 꿈꾸기도 했었지만, 그건 현실의 벽에 부딪혀 포기한 지 오래였고. 그럼에도 나는 꾸준히 음악을 가까이하려 노력했고, 축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한 것도 그 노력의 일부라면 일부였다. 축제를 위한 오디션의 치열한 경쟁률 때문에 행여 무대에 서지 못하면 어쩌지 하며 마음을 졸였지만 감사하게도 내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내가 이번 축제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박우진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네가 춤추는 만큼은 할걸?”
“너 내가 춤추는 거 한 번도 못 봤잖아.”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대충 비슷하지 않으려나?”
“그럼 너 되게 잘 불러야 할 텐데.”
“오, 너 이런 모습 좀 새롭다?”
평소에는 질문을 해도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을 가리던 박우진은 춤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양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 점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축제 당일에도 그의 무대를 조금 더 유심히 지켜보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박우진의 무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두 개의 마음이 각각 생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도대체 춤을 얼마나 잘 추길래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야, 싶은 얄미움과 그동안 나에게 보인 의기양양함이 충분히 근거 있었음을 보여주길 바라는 기대감, 이 두 가지의 마음이. 그렇게 화려한 조명이 무대를 가득 채움과 동시에, 기다렸던 그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김여주, 너 저기 센터 누군지 알아?”
“어? 어…… 알아. 박우진이잖아.”
“뭐야. 근데 왜 안 놀라.”
“장기자랑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놀랄 게 뭐가 있냐.”
놀라지 않았다는 나의 대답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무대 위에 오른 다섯 명의 학생 중 단연 돋보이는 건 박우진이었다. 무대가 이어지던 십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그대로 그에게 빠져들었다. 빠져들었다기보단 홀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빨리 가서 준비해.”
“아 맞다.”
조용하고 재미없는 짝에 불과하던 박우진의 새로운 모습에 정신이 팔려 학생들로 가득한 체육관 한가운데서 무대를 지켜보던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축제를 총괄하던 학생회 친구였다. 박우진에게 무대를 잘 보았다는 말을 건넬 여유도 없이, 나는 곧 시작될 나의 무대를 준비하러 대기실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한창 열기가 더해진 체육관 벽면을 통해 무대 뒤편으로 향하던 나는, 학생회의 손짓에 따라 땀을 닦으며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박우진을 마주했다.
“박우진!”
반가운 마음에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온 건 별안간의 일이었다. 인파에 밀려 휩쓸리듯 무대 아래로 내려온 박우진은 나에게 어떠한 대답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인 특유의 미소만을 지으며 두 눈으로 나를 좇았을 뿐. 무대에 오를 시간이 가까워져도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설프고 서툰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가수를 꿈꿨지만, 그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현실을 맞닥뜨린 뒤 처음으로 서게 된 무대였다. 무대 위의 나를 비추는 핀 조명을 제외하곤 모든 불빛이 꺼진 상태라 객석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시선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긴장했던 것도 잠시, 막상 노래가 시작되니 거짓말처럼 떨렸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누누이 들어온 것처럼 나는 무대 체질이었다. 무엇보다 나 또한 그 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무대를 즐기는 사이 1절이 끝났고, 흘러나오는 간주에 손가락을 까딱이던 나는 체육관 뒤편에 서서 무대를 지켜보던 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르게 뛰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쿵쾅거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무대 양 끝의 스피커로부터 들려오는 반주에 까딱이던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고, 나는 그 상태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렇게 2절이 시작되었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떨림에 나는 박자를 놓치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너 긴장 많이 했지.”
“막 엄청 많이 하진 않았는데…….”
“아니긴. 안 하던 실수까지 하더만.”
“아…….”
“괜찮아. 반응 엄청 좋았어. 그거 조금 틀린 건 신경도 안 쓰이더라.”
친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 내가 긴장한 게 다 보였겠구나. 그럼 박우진도 알아챘을까. 내가 박자를 놓친 게 그와의 눈맞춤 때문이었다는 걸.
“김여주!”
“어, 어……. 무대 잘 봤어. 너 춤 잘 추더라.”
“그랬냐. 근데 너 어디 보고 말해? 나 여깄는데.”
부끄러웠다. 그땐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지만, 그를 볼 때마다 이유 없이 빨라지는 심장 박동이 낯설어 무의식적으로 그를 피했달까.
“어? 그냥, 쪽팔려서.”
“노래 잘만 불러놓고 뭐가 쪽팔려.”
“실수했잖아. 중간에 박자도 놓치고.”
“그랬어? 나도 네가 말 안 했으면 모를 뻔했다.”
“거짓말.”
“진짠데.”
“…….”
“내가 춤추는 것보다 더 잘 하던데. 내 실력이 부끄러워질 만큼.”
“…….”
“오늘 멋있었어. 진짜로.”
그 말을 들은 직후 얼굴 가득 화악 번지던 열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실수를 했다는 사실보다 박우진에게 설레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욱 부끄러웠고, 실력을 인정받은 것보다 그에게 위로받은 것이 더욱 기분 좋았다. 열다섯의 사랑은 그러했다. 눈부시게 순수했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그날 이후 박우진과 음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생겨 연락할 일이 잦아졌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그도 축제 이후 나에게 관심이 조금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 게, 자리가 바뀌어 더 이상 짝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도 박우진은 나에게 꾸준히 말을 걸어왔다. 가는 길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하굣길을 함께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집에 도착한 이후로도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곤 했었으니까. 나중에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당시 박우진의 집은 우리 집과 반대 방향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그에게 왜 그렇게까지 나와 함께 하려 했는지를 물어보고 싶었으나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지금은 함부로 연락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를 처음 만났던 건 2013년 여름,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같은 해 가을, 그리고 일방적인 줄로만 알았던 내 짝사랑이 이루어진 건 그해 겨울이었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박우진
너 오늘 학원 가는 날 맞지? 오후 5:38
오후 5:45 응. 영어학원.
박우진
몇 시에 끝나? 오후 5:46
오후 5:46 8시 반쯤? 그건 갑자기 왜?
박우진
그냥. 잘 다녀오라고. 오후 5:47
전부터 내가 학원 갈 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놀다가도 바래다주겠다며 심심찮게 나에게로 왔던 박우진이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묘했다. 그가 나에게 학원이 끝나는 시간을 묻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그 시간에 맞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날 학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신경은 온통 박우진에게 쏠려있었기 때문에.
“야, 김여주.”
“뭐야? 네가 왜 여깄어?”
“기다렸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추운데 뭐하러. 전화나 문자도 있는데.”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다음의 말들은 나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워낙 정신이 없었고, 너무나도 떨렸고, 현실이라고는 믿기 힘든 꿈만 같은 순간이었으니까. 차가운 바람 때문이라고 해도 심하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집에 도착한 나의 손에 쥐어져 있던 건 밀린 문자들로 가득한 핸드폰과 누구에게 받았는지 모를 핫팩뿐이었다. 따끈하게 데워진 그 핫팩도 아마 핸드폰 속 문자들의 주인이 준 것이었겠지만.
박우진이 유난히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나도 학교에서 소란을 피우고 다니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학교에서의 우리는 거의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던 것 같다. 오히려 사귀기 전보다도 더 서먹한 사이로 보이게끔. 우리가 꽤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종종 싸우기라도 했냐며 서로 아는 체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지만, 이내 그들도 알게 되었다. 교문만 통과하면 서로에게 누구보다도 편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는 어리고 풋풋한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곧이어 겨울방학이 되었지만, 결코 서로에게 소원해졌다거나 사이가 멀어졌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끔은 밖에서 만나 소박한 데이트를 이어가던 사이 해가 바뀌었고, 우리는 열여섯이 되었다.
가끔 둘의 생각이 달라 다투는 일들도 있었지만,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우리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별 탈 없는 한 해를 보냈던 것 같다. 그때쯤 박우진이 진로를 춤으로 정한 탓에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등의 로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에게로 와주는 든든한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나름 행복한 생활을 이어왔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신 없을 일이었다. 언젠가 다른 누구를 만나게 된다고 해도 그때와 같은 순수한 연애를 꿈꾸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졸업을 앞둔 순간에는 참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던 것 같다. 열다섯에서 열여섯이 되어도 우리의 관계가 변함없었던 것처럼 열여섯에서 열일곱으로 넘어가는 그 시간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 굳게 믿었지만, 학교가 달라지고, 진로가 뚜렷해지면 우리가 자연스레 멀어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박우진은 그럴 일 따위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나를 다독이곤 했다. 이미 먼 미래를 내다보고 온 사람처럼, 겁 많은 내 곁에 영원토록 머물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그래도 네 꿈이 그쪽이면, 학교도 예고로 가는 게 맞지 않아?”
“내가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어?”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너도 내가 가까이 있는 게 좋잖아.”
“……응.”
“나 예고 안 가. 일반고 다니면서도 충분히 잘 준비할 수 있어. 오디션도 꾸준히 보러 다닐 거고.”
“…….”
“네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딜 가.”
“…….”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말해줄게. 연락도 꼬박꼬박 하고.”
“진짜지.”
“응.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너 몰래 어디 안 가.”
바보같이 그 말을 믿었었다. 나 몰래 어딜 안 가긴, 뭘 안 가. 연락 한 통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서.
그의 말대로 박우진은 이듬해 동네에 있는 일반고에 입학했다. 내가 다니게 된 여고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남고였다. 그가 예고에 원서조차 넣지 않은 이유에 나도 포함되어있는 것 같아서, 내가 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실력은 물론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 또한 넘치는 아이였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디서든 잘 해낼 사람이었으니까. 박우진과 대조적으로, 나는 가수의 꿈을 접은 뒤로는 어떠한 꿈도, 열정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는 있었지만, 그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더 좋아졌던 것 같다. 누구보다 선명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박우진이.
박우진은 열일곱,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을 축제 준비로 바쁘게 보냈다. 고등학생이 되니 자신의 학교 말고도 다른 학교에 찬조 공연을 다니곤 했거든. 어떻게든 그의 공연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철저한 감시 아래 있었던 나는 결국 야자를 빼지 못했고, 그의 학교는 물론, 주변 학교들의 축제를 모조리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박우진이 속해있는 댄스팀이 우리 학교 축제 무대에도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알았다. 박우진의 인기가 생각보다 대단했다는 것을. 여학생들이 열광하는 그가 사실은 나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겠지. 먼 미래의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 그가 정말로 자신의 꿈을 이뤄 연예인이 된다면, 내가 그의 인기를, 유명세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그 문제는 단순히 우리 둘이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곤 했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정말로 박우진이 데뷔를 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하고. 그리고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 그 걱정들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가 되어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부모님 몰래 야자를 빼고는 기어코 박우진의 학교 축제에 놀러 갔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드디어 그의 학교에 가보게 되었다는 설렘과 오랜만에 그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벅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물론 박우진에게도 비밀로 한 채 계획했던 일이었다. 이번에도 못 갈 것 같다고 미리 말해둔 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의 앞에 나타나면 깜짝 놀랄 그의 모습이 그려져서, 버스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내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 같다.
“박우진!”
“여주야! 너 못 온다고 했었잖아. 어떻게 왔어? 야자는? 빠져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그런데 네가 너무 보고 싶은 걸 어떡해.”
“너 진짜…….”
“응?”
특유의 웃음과 함께 말을 마친 그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선 나를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체육관 밖으로 황급히 데리고 나왔다. 가을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일찍부터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 학생들이 공연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아무도 없는 학교 뒤편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첫 입맞춤. 다른 표현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가볍고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 두 볼에 닿은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따스해서, 그에게 처음 마음을 빼앗겼던 그때로 돌아간 듯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던 것 같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우리에게도, 서로의 눈만 바라보아도 가슴 설렜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박우진을 마지막으로 본 건 우리가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던 그 날 이후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둔 겨울방학에,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맛있는 것도 먹고, 서로의 일상에 대한 수다도 떨며 마지막 남은 자유를 누리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이상한 점이라곤 단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는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따뜻했고 편안했으며, 부러울 것 없이 다정했던 그런 날이었다. 그 이후로 박우진을 만날 수 없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그와의 연락이 끊긴 이후,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던 친구들은 나를 위로한답시고 그를 욕하기 바빴다. 아무리 제 꿈이 간절하다고 해도, 4년 가까이 만난 여자친구를 배신하진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 아무리 일반인과의 연애가 좋지 못한 과거로 남을 수 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잠수 이별을 하는 건 아니지 않냐 등의 말을 늘어놓으면서. 그들은 내가 그의 발목을 잡을 것 같으니 그때부터 박우진이 나에게 선을 그으려 나의 연락을 피한 것이라고 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으려 노력했다. 나는 끝까지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가 분명 그랬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말해주겠노라, 나 몰래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겠노라 약속했으니까.
“어……?”
“…….”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연락이 끊긴 지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힘없이 거리를 걷던 내 옆으로 그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박우진이었다. 옆에 아버지뻘의 남자가 함께한 채. 그의 가족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사람이 그의 아버지인지, 삼촌인지, 그냥 아는 지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이 박우진이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는 아는 체를 하려던 나를 외면한 채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간 것도 물론 그였다. 그 뒤로 친구들의 말이 전부 맞았고 나의 믿음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쁜 놈. 내가 학창시절 내내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한 사람이 고작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질 만큼 나쁘고 치사한 놈이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지금까지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죽고 싶게 쪽팔릴 만큼.
그날 이후로 SNS는 물론, 그 누구의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은 채 며칠을 펑펑 울기만 했던 것 같다. 그와의 연락을 이어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확인하던 메신저 앱마저 뒷전으로 미뤄둔 나는 갤러리에 저장된 그의 사진을 모조리 지워냈다. 4년 동안이나 모은 그의 사진은 또 왜 이리 많은지, 지우는 데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짜증이 났다. 사실 오래 걸려서라기보다는, 사진을 볼 때마다 피어오르는 그와의 추억들이 자꾸만 마음을 괴롭혀서 또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뒤, 가까스로 마음을 정리한 뒤 밀려있던 문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메신저 앱을 열었을 땐, 여러 명에게서 온 수백 통의 메시지에 숨이 턱 막혔었지. 나는 그 메시지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대신, 이제 공부에 전념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핑계를 대며 핸드폰을 초등학생도 안 쓴다는 폴더폰으로 바꿔버렸다. 혹시 모른다. 그 수백 통의 메시지 중 박우진의 것이 섞여 있었을지도.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길에서 그를 마주친 이후 나에 대한 그의 싸늘한 마음을 알아버린 기분이 들어서, 나로부터 도망친 그가 내게 문자를 보냈는지 보내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일조차 너무 구차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미 불쌍할 대로 불쌍해진 마당에, 스스로의 밑바닥을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리고는 수능을 치른 뒤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렸다. 혹시라도 마주할 변명 섞인 그의 연락에 더 이상은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박우진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었고, 그의 열정과 노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함께 기뻐해 줄 일이었다. 그러나 화면에 비친 그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 한 편이 아려와서, 그의 무대를 끝까지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름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실력 덕에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으니, 박우진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모습을 비추게 되겠지. 이로써 나는 스물에서 시작된 그의 빛나는 인생을 지켜보게 되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평생을. 내가 정말 궁금해했던 건 그의 열아홉이었는데. 수십 년에 걸쳐 보여질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가 나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 찰나의 속마음뿐이었는데.
이젠 너무 멀어져 버려 다시 만날 날이 오긴 할지조차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그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한 번쯤 묻고 싶다. 열아홉의 너는 왜 나를 그렇게 모질게 떠나야만 했냐고. 열아홉의 너는 나 없이도 잘 지냈느냐고. 열아홉의 나는, 그렇지 못했노라고.
<Epilogue>
2017년 1월 3일 화요일
여주❤
오늘은 뭐해? 연습 가나? 오전 11:28
여주❤
많이 바빠? 하루 종일 연락이 없네……. 오후 8:10
2017년 1월 4일 수요일
여주❤
오늘은 뭐해?? 오전 9:02
여주❤
보고 싶어. 오후 11:47
2017년 1월 5일 목요일
여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릴게. 오후 9:01
여주❤
잘 자. 오전 12:32
2017년 1월 7일 토요일
여주❤
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걱정돼 죽겠어. 전화 좀 받아 제발……. 오전 8:54
2017년 1월 19일 목요일
여주❤
뭐라도 좋으니까 말 좀 해주라. 왜 연락 안 받는 건데. 오후 10:08
2017년 2월 5일 일요일
여주❤
너무 보고 싶어. 진짜 너무 많이. 오후 11:52
2017년 3월 17일 금요일
여주❤
네가 일부러 나 피한 건 줄도 모르고 여태 기다린 내가 바보지.
연락 씹느라 고생 많았다. 잘 살아. 오후 5:44
여주❤
안녕. 오후 5:45
2017년 4월 29일 토요일
여주야 한 번만
1 오후 1:37 한 번만 읽어줘 제발.
너무 늦었다는 거 알아. 이제야 연락해서 미안해. 진짜 너무 미안해. 작년 말에 오디션 봤던 회사에서 연락이 왔었어. 방학에 너 만났을 땐 확실하게 정해진 게 없는 상태라 말을 못 했어. 괜히 설레발 치다가 안 되면 실망만 더 커질까 봐. 그러다 너 만나고 며칠 뒤에 그 회사랑 계약이 맺어져서 바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 그 사이에 너한테 미리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이게 진짜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겠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핸드폰을 잃어버렸었어. 연습생 생활 시작하면 핸드폰을 못 쓰게 된다길래 그 전에 어떻게든 너한테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그랬어. 회사에서 제대로 준비해서 데뷔하고 싶으면 예고로 전학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급하게 전학도 가게 됐어. 절대로 너 피한 거 아니고 일부러 떠난 거 아니야. 정말이야. 그리고 전에 길에서 만났을 때, 옆에 소속사 대표님이셨어. 전학 절차 때문에 도움 주러 잠깐 동네에 오셨었는데, 타이밍도 진짜……. 대표님 앞에서 차마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못 꺼내겠더라. 내가 진짜 나빴다는 거 아는데, 그때도 너 일부러 모른 척 한 거 아니야. 그렇게 지나치고 나서 후회 많이 했어. 그냥 대표님한테 다 말씀드리고 너한테 인사라도 해볼걸, 어차피 나는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날만큼이라도 용기를 내서 너한테 갈걸, 하고. 대표님께서 오늘 하루는 자유롭게 보내도 좋다고 핸드폰을 돌려주셔서 이제야 문자 남겨. 미안해. 진짜 미안해.
1 오후 1:43 나 아직 너 많이 좋아해.
1 오후 10:24 정말 많이 보고 싶다.
2018년 8월 7일 금요일
나 드디어 데뷔했어.
1 오후 11:59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2019년 1월 1일 화요일
1 오전 2:37 보고 싶다 여주야.
+ 우진이의 근황이 궁금해서 끄적여봤습니다:)
잘 지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