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헌터(City 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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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나 본 듯한 커다란 2층 집으로 힘없이 터덜터덜 들어선 한 남성은 언제나 그랬듯 익숙하게 번호 키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신발을 벗고 뜨뜻미지근한 바닥에 한 발짝 내딛자마자 귀를 찌르고 들어오는 왁자지껄한 음성에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앞을 바라보니, 중년의 여성 세 명이서 도도하게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그 중 이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지금 막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섰다.
“ 아들, 왔어? ”
“ 어머- 창선이 오랜만이네? ”
“ 안녕하셨어요? ”
그렇다. 힘없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집으로 들어선 건 창선이었고, 이 집의 주인인 여자는 창선의 어머니 손정희 여사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봐 반갑다는 듯 꺄르르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음성의 여자들은 정희의 친구들이었다.
“ 아들,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무슨 일 있었어? ”
“ 아니요.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저 올라가서 쉴게요. 말씀 나누시다 가세요. ”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제 엄마의 음성에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 창선은 꼭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른 발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갑작스런 제 아들의 행동에 정희는 걱정이 되어 한참이나 2층을 바라보고 섰고, 그에 저들은 그만 가볼 테니 얼른 올라가보라는 듯 재촉하는 친구들이었다.
“ 창선이가 저런 애가 아닌데, 미안해. 조심해서들 가요. ”
그 말 한 마디를 내뱉은 채 2층으로 올라간 정희는 닫힌 제 아들의 방문을 바라보고 서있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선다. 지금 막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있는 창선의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 서야 제 엄마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챈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 엄마. 제가 아주 예전에 드렸던 질문 기억하세요? ”
“ 응? ”
괜찮냐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치고 나온 창선의 음성에, 정희는 창선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고 앉아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정희였지만, 창선은 기대도 안했다는 듯 다시 한 번 힘겹게 입을 열었다.
“ 행복하시냐고 물었던 거요. 엄만 행복하시냐고, 지금 생활에 만족하시냐고. ”
“ 아…. 기억나.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
“ 엄만 그렇게 대답하셨어요. 행복하다고. 그런데 엄마, 그럼 그때 그 감정. 아직도 그대로에요? ”
“ 응? ”
“ 지금도, 행복하시냐고요. ”
“ 행복하지. 그것도 아주 많이. ”
그래요. 그렇구나…. 하릴없이 같은 말만 되뇌고 있는 창선의 손을 꼬옥 붙잡은 정희가 그의 얼굴을 다정스레 만져주며 미소 지으며 묻는다. 아들. 그럼 아들은? 우리 창선이는 행복하니? 입가에 걸린 환한 미소를 빤히 바라보던 창선은 제 얼굴을 만지던 정희의 손을 잡아 조심스레 밑으로 내리고는 이윽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아뇨, 엄마.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나는 불행해요. 죽을 것 같아요. ”
“ 창선아…? ”
“ 그땐 엄마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젠 안 되겠어요. 엄마,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요. 너무 불행해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요. ”
“ 이창선! ”
창선에게 꼭 잡혀있던 손을 거칠게 빼낸 정희가 악에 바친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에 창선은 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정신 차려, 이창선. 그럼 너 예전의 그 시궁창 같은 생활로 돌아가고 싶니? 엄마는 매일 상처투성이 몸으로 울고! 너는 그런 엄마를 지키려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나가 놀지도 못하고! 너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런 거야? ”
“ 차라리 그러고 싶어요. ”
“ 뭐…? ”
“ 차라리 그 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너무도 거지같아서, 내가 처한 상황이 지랄 같아서! 내가 기필코 성공할 거다, 이 생활에서 벗어날 거다 다짐하면서 버텼는데…! 지금은, 지금은 아니에요. 버틸 수가 없어요. 숨이 막혀. 그 땐 꼭 살아남아보겠다고 발버둥이라도 쳤는데, 지금은, 지금은 죽고만 싶어요. 지금의 나는 사는 게 더한 지옥이에요, 엄마. ”
“ 너 어떻게 엄마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 됐다. 약한 소리 그만하고 내려와서 밥 먹을 준비 해. 아버지 오실 시간 다 됐으니까. ”
“ 엄마…! ”
팔까지 쭉 뻗어가며 애타게 불러보지만 정희는 냉정한 얼굴을 한 채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때문에 허공에 붕 떠있던 손이 털썩,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눈에서도 투명한 액체들이 방울방울 맺혀 투둑, 소리와 함께 침대 시트를 적셔갔다.
“ 나는… 행복하지가 않다고요, 엄마…. ”
너무, 아프다고요…. 아파 죽겠단 말이에요…. 이미 나가버린 정희에겐 들리지도 않을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던 창선이 어느새 제 얼굴을 흠뻑 적셔버린 눈물을 옷소매로 벅벅 문질러 가며 훔쳐내곤 이를 악물고,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세게 쥐어본다.
“ 나 좀, 살려주라. ”
다시 한 번 맺힌 눈물이 흘러 한 방울 툭.
“ 숨 좀 쉬게 해줘. ”
내 눈에서 흘러내린 이 눈물이, 네가 되어 내 심장을 적신다. 그것도 흠뻑.
“ 이호원. 제발…. ”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 * *
평화롭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 그것이 여행을 다녀온 여덟 명의 분위기였다. 아무 일도 없이 잘 웃고 떠들지만 평소와는 너무도 다르게 행동하는 호원 한 사람 때문에 나머지 인원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늘 겉으로 틱틱대며 초등학생 남자아이처럼 행동하던 호원이 요 근래 들어서는 꼭 큰일을 앞두기라도 한 사람처럼 무슨 말을 해도 웃어준다거나 작은 거 하나도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해준 다던가, 평소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친절을 베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익숙지 않은 친절을 받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일주일째에 접어들면서 이젠 그 의구심마저 서서히 사라지려던 참에 호원은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모든 이들을 거실로 불러 모았다. 그의 부름을 받고 거실 소파에 모두가 모여 앉았지만 호원은 한참 동안이나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않고 그저 꼼지락 꼼지락 손장난만 쳐대었다.
“ 아, 불렀으면 말을 해. 무슨 일인데? ”
참지 못한 아란이 한 마디 쏘아붙이자 화들짝 놀라 흠칫 몸을 떤 호원이 고개를 들어 올렸고, 이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제게 쏠린 것을 알고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제 말을 들어줄까, 하는 마음에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말문을 여는 호원이다.
“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 할 때잖아.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만은 없고, 하루 빨리 끝냈으면 좋겠어. 그래서 말인데, ”
“ 왜? 무슨 좋은 의견이라도 있는 거야? ”
“ 나한텐 좋은 의견인데, 분명 제일 크게 반대할 사람은 너 같아서, 남우현. ”
“ 나? ”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아한 듯 물어오는 우현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인 호원은 다시 한 번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에 다들 지금 이 상황이 그다지 장난스러운 상황은 아니라고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아까와는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 그 놈들 알아낼 거야. ”
“ 뭐? ”
“ 남우현 너희 가족. 그리고 우리에게도 가족이 되어주셨던 그 고마운 분들 돌아가시게 한 새끼들 내가 알아낼 거라고. ”
“ 방법이 있어? 성열이랑 성종이 둘이 힘을 합쳐도 국정원 보안실 컴퓨터만 수 백 대야. 우리 힘으론 절대 못 뚫… ”
“ 내가 직접 가. ”
“ 야. 이호원. ”
“ 형!! ”
직접 간다는 그 말에 무섭게 표정을 굳힌 채 목소리를 낮게 내리 깐 우현과, 다급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 된다고 소리치는 성종. 그리고 무척이나 놀란 듯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제 옆에 앉은 호원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동우까지. 모두가 그의 폭탄발언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호원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처음과 변함없는 표정으로 호소하듯 말을 시작했다.
“ 그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국정원 보안 컴퓨터 뚫을 수 있어? 아님, 나 좀 잡아주세요 하고 단체로 쳐들어가기라도 할래? 그냥 나 하나만 들어가서 빼오면 모든 게 끝나. 지금 현재 국정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사람 나 하나뿐이라고. ”
“ 그러다 잡히기라도 하면? ”
“ 잡히더라도 그 전에 정보는 내가 여기 컴퓨터로… ”
“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돌았어? ”
결국엔 참지 못하고 화가 터져버린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원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지금까지 우현과 꽤나 많은 시간을 보내왔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다들 처음 보는 것이어서,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국정원이 어떤 덴지 몰라? 그냥 겉만 번지르르한 정의로운 곳이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너도 함께 겪어놓고 지금 네 발로 거길 기어들어가겠다고? ”
“ 그럼 어쩌자고. 이대로 가만히 있자고? 남우현 넌 너 그렇게 만든 새끼들 빨리 찾고 싶지 않아? 얼른 찾아서 죽여야 김성규 복수고 뭐고 다른 것도 할 거 아냐! ”
“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억울해도! …소중한 사람을 두 번 잃고 싶지는 않다고! ”
‘ 소중한 사람 두 번 잃고 싶지는 않다. ’
그 한 마디에 싸늘한 정적이 집 안을 가득 에워쌌다. 하지만 호원은 정말 단단히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저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축 쳐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머지 제 팀원들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 너희들이 반대해도 난 갈 거야. 말없이 가려고도 해봤어. 근데, 나중에 내가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럼 남은 네들 볼 면목이 없으니까, 그래서 말이라도 하고 가는 거야. ”
“ 왜 형인데. 왜 형이! ”
“ 나야만해.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어. 날 설득하는 것보단 그냥 날 죽이는 게 빠를 거야. ”
눈에 한 가득 고인 눈물 탓에 뿌옇게 시야가 흐려져 옷소매로 문질러 닦아보지만 닦는 만큼 눈물은 차고 또 흘러서, 결국엔 고개를 떨구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성종이었다. 아란과 성규 또한 답답한 이 상황에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고, 절대로 안 된다는 듯이 간절하게 호원을 올려다보고 있는 성열과, 초조한지 그런 성열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주며 제 무릎을 꾹 쥐었다 놨다 어찌할 바를 몰라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명수까지. 그리고 동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않고 앉아있었다.
“ 보여? 다 너 때문에, 네 말 하나 때문에 이렇게들 당황스러워 하고 있어. 그러니까 접어. 넌 죽어도 날 설득하지 못할 거야, 이호원, ”
“ 말했지. 모두가 반대해도, 난 가. ”
“ 이호원!! ”
“ 냉정하게 생각해, 남우현! 너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지금 재미 삼아서 간다고 한 거 같아? 그냥 홧김에 내가 가겠다고, 좀 멋져 보이겠다고 그러는 거 같냐고! 나도 수없이 고민해왔어. 어떤 게 우리에게 최선일까, 나에게는 또 어떤 게 최선일까! 그렇지만 답은 늘 하나였어. 내가 가는 거 그거 하나였다고! 확률은 반반이야. 성공한다면 좋은 거고, 실패한다면… ”
“ 하지 마. 말,하지 마…. 제발, 이호원…. ”
“ 네들이 구해줘. 그럼 되는 거잖아…. ”
부르르 떨리는 입 꼬리를 최대한 끌어 올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짓는 호원의 노력에, 결국 우현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피가 베여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아보려 해도, 한 번 터진 눈물은 막을 길이 없다.
사실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이 방법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러라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답답하기 그지없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우현은 그대로 호원에게서 홱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문을 쾅 닫고 들어갔고, 곧 이어 조용한 집안에선 제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고 슬프게 울어재끼는 우현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에 깊은 한숨을 내쉰 호원이 툭,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김성규. 들어가서 남우현 좀 잘 달래줘. 내가 들어가면 분명 우리 둘 다 피 터지게 싸울 거야. ”
호원의 말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는 우현의 방으로 가지도, 다시 앉지도 않고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서 호원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늘 그래왔듯 무표정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 저러다가 우현이 다칠까봐 들어가긴 하는데, 다시 한 번만 생각해줬음 좋겠다. ”
들려오는 대답 같은 건 없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성규는 방향을 틀어 우현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정말 처참함 그 자체였다. 제 화를 못 이겨 방 안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던지고 때려 부순 탓에 바닥은 조금이라도 잘못 디디면 상처를 입을 수 있을 만한 유리조각들이 잔뜩 깔려있었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기에 망정이지, 맨발이었다면 우현도 자신도, 똑같이 발에 상처를 입었겠지.
슬리퍼를 직직 끌며 다가서자,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바르르 떨어가며 서럽게 울고 있는 우현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에 성규는 아무런 말없이 침대에 앉아있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하얀 손을 제 두 손으로 아프지 않게 만져주었다.
“ 더 울어도 돼, 우현아. ”
“ 성규야…. 나, 정말 안 돼. 나 저 자식 절대 못 보내. 안 돼, 성규야…. ”
“ 알아. 네 마음 다 알아. ”
“ 무서워. 무서워 죽겠어. 이호원도 잘못되면 어떡해? 나 때문에 이호원도 죽으면, 그럼 난 진짜 앞으로 어떻게 살아…! ”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버린 우현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제 품으로 끌어안은 성규는 이내 자신 또한 아픈 표정이 되어, 너무도 말라 앙상해져버린 우현의 등을 아이 다루듯 슥슥 쓸어내렸다. 그러자 거짓말 같게도 우현은 그 안에서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려버렸고, 성규 또한 아픈 눈물을 흘리며 어금니를 꽈악 물었다 놓고 아픈 숨을 몰아쉬었다.
“ 나도 이호원이 가는 거 찬성하는 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하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우현아, 너무 그렇게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라고 봐. 이호원 우리 중에 가장 잘 싸우고 순간판단력도 가장 좋은 애야. 쉽사리 당할 녀석 아니잖아. 무조건 아니라고 반대하는 것보단… 믿어주는 게 어떨까? 이호원이 아까 그랬잖아. 우리가 반대해도 반드시 갈 거라고. 그렇다면 끝까지 반대하다가 좋지 않은 감정으로 보내는 것 보단 믿어주고, 잘 갔다 오라고 격려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
“ 그러다 잘못되면? 정말 잡혀버리기라도 하면? ”
“ 구해야지. ”
“ ………. ”
“ 우리 모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구해야지. 반드시. 우리는 이미… ”
…가족이잖아.
가족. 그 한 마디에 차갑게 식었던 심장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성규의 품안에서 나온 우현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채였지만 아까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흠뻑 젖은 제 얼굴에 남아있는 물기를 손으로 닦아내며 무언가 다짐어린 눈을 해보였다. 그에 성규는 다시 한 번 쐐기를 박 듯 입술을 떼었다.
“ 우현아, 넌 우리의 리더야. 리더가 흔들리면 모두가 무너져. 이호원도 저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거고, 많이 아팠을 거야. 그랬기에 지금 네가 이렇게 화를 내며 괴로워하는데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제 감정을 숨길 수 있는 거고. 분명 많이 괴로울 거야. 너희 둘은 그냥 보통 친구사이가 아니잖아.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었고, 잠시 방황할 때 잡아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잖아. 너와 나처럼. ”
“ ………. ”
“ 잠시 돌아가면 어때? 조금 틀린 방향으로 가는 게 뭐 어때. 길을 돌아가서 너무 멀다 싶으면 잠시 쉬었다 가면 되는 거고, 틀린 방향으로 가서 크게 데인다면 그걸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번복하는 법도 없을 거야. 언제나 옳을 수만은 없어. 가끔은 일탈도 해보고, 모험도 해보고. 우리가 언제부터 정해진 대로, 올바른 길로만 갔어? 늘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그게 우리가 늘 추구하던 방식 아니야? ”
“ 성규야. ”
“ 이호원을 막을 수 없다면, 믿어주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바로 그거야. 우리 가족. 우리 팀. 이호원 그 자체를 믿어주는 것. ”
성규의 말에 비로소 안 좋았던 우현의 표정이 서서히 풀려갔다. 이내 입술을 꾹 깨무는 우현에게 대고 픽, 웃어버린 성규가 손을 들어 올려 핏기가 싹 가셔 메마른 우현의 입술을 다정스레 만져주었다. 그가 늘 제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 뭐야, 남우현. 너 나보곤 입술 깨물지 말래놓고 내 습관 네가 가져가버린 거야? ”
분위기를 풀려고 애써 장난스럽게 건네는 성규의 농담에 결국 우현의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를 따라 성규도 함께 웃었고,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올라가있는 성규의 입술에 제 입술을 쪽, 맞춘 우현은 당황한 성규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말랑말랑한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싱긋 웃어보였다.
“ 앞으론 입술 깨물 때마다 이렇게 뽀뽀 한 번씩. ”
“ 하, 뭐? ”
“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진하게…! ”
“ 진하게? ”
“ 진하게 뽀뽀. 김성규 너 뭘 상상한 거야 지금? 혹시 키스해주길 바란 건 아니겠지? ”
“ 무, 무슨! 내가 뭘 바랐다고! ”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성규가 평소엔 보이지 않았던 말 더듬기 스킬을 선보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에 우현은 재미있다는 듯 침대를 데굴데굴 굴러가며 크게 웃어재꼈다. 그 행동 때문에 더 민망해져 아까보다 얼굴을 더 붉힌 성규가 우현을 홱 노려보다 이내 방을 빠져나갔고, 그 뒤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던 우현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뒤늦게 성규를 따라가려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 조금 돌아가면 뭐 어떻고 틀린 길로 가면 뭐 어때. 네 말대로 너무 멀다 싶으면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틀린 곳으로 가서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아픈 기억을 떠올려 두 번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그렇게 되새김질 하며 성장해나가면 되는 거야.
지금 너와 내가, 그런 큰 상처를 입고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해나가면 돼.
우리는 이미…
가족이니까.
- 37 -
집 안은 정적 그 자체였다. 화난 우현이 방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성규가 방으로 들어간 뒤, 안에서 들려오던 물건 부서지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명수와 성열, 아란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하지만 아까부터 내리 울기만 하던 성종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문을 쾅 닫고 들어갔고, 뒤를 이어 동우도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더 공기가 무거워진 집 안에서 꼭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된 성열의 손을 꼬옥 붙잡아준 명수는 괜찮다는 듯 입 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어 주었다.
“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지. ”
무거운 정적을 가르고 그보다 더 무거운 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 네 잘못은 아닌데, 조금 많이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네. ”
한참이 지나고서야 아란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었다.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간 우현도, 그의 뒤를 뒤 따라간 성규도, 각자 우울한 마음을 안고 제 방으로 모습을 감춰버린 성종과 동우도, 모두가 호원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더 슬프고 마음이 아팠던 거다.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늘 그 미래를 상상해왔긴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빨리 다가올 줄도, 그리고 목숨을 걸고 가야만 하는 그 사람이 호원이 될 줄도 몰랐다. 호원의 말대로 국정원을 단체로 치러 간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그건 다 같이 죽자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야만 하는 사람이 호원이라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었던 거다. 인정은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또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어렵고도 어려운 일.
“ 들어가서 동우 오빠나 좀 달래주는 게 어때? 성종이는 내가 달래줄게. ”
“ 들어간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간신히 눈물 참고 있는 동우 형 울리기밖에 더하겠냐. ”
“ 그래도 제대로 네 마음을 밝혀야지. 그럼 이대로 성종이랑 동우 형 울려놓고 갈래? 그러다가 너 잘못되기라도 하면…! ”
“ ………. ”
“ …우린, 어떡해? 갈 때 가더라도! 남아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이라도 좀… 편하게 해주고 가라고, 이 나쁜 새끼야. ”
“ …어울리지 않게 눈물은. ”
팀에 합류해 지금까지 눈물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아란이,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말을 하다 이내 눈물 고인 눈을 해보이며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음 말을 이었다. 그에 성열도 결국엔 눈물을 터뜨려버렸고, 명수 또한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리는 아란을 바라보던 호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래. 원하던 대로 할 테니까 다들 그렇게 울지 마라. 야, 내가 뭐 죽기라도 했냐? 왜 이렇게 벌써부터 눈물바람이야? ”
애써 장난스럽게 던진 그 한 마디에도 아란과 성열의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입술을 꾹 깨물며 동우의 방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 약간의 미소를 띤 채 우현의 방에서 나오는 성규를 보며 ‘우현인 좀 어때?’라고 던진 소리 없는 질문에, ‘우현인 괜찮아.’라는 고개짓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성규였다. 그 대답에 조금은 안심된 듯 작게 숨을 내뱉으며 동우의 방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로 잠시 망설이던 호원은 이내 굳은 다짐이 어린 얼굴을 한 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제게서 등을 보인 채 추욱 늘어진 어깨를 하고 있는 동우의 모습이었고, 그 모습에서 슬픔이 한 가득 묻어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 형. 나 좀 봐줘요. 우리 형 얼굴 좀 보자. ”
그런 제 말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동우의 모습에 결국엔 호원이 아프지 않게 그의 어깨를 잡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호원의 시야에 들어온 동우의 얼굴은,
“ 왜 그런 얼굴이에요. 이호원 벌써 죽었나? ”
예상 외로 우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도 더 슬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에 호원은 제 입술을 짓씹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참으려 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 절로 신음소리가 튀어나와버리고 말았다. 결국엔 하려던 말도 하지 못하고 푸욱 고개를 떨군 호원이 눈물을 참으려 애써 눈에 힘을 주며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덕분에 이빨에 잔뜩 짓이겨진 호원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자,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그 피를 닦아낸 동우가 힘겹게 눈 꼬리를 접으며 웃음을 띠었다.
“ …호원아. ”
“ …네, 형. ”
“ 우리 밖에 나갈까? ”
데이트,할까? 우리? 말하기조차 벅찬지 띄엄띄엄 숨을 고르며 말을 잇는 동우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미소조차 호원에겐 아프기만 했다. 여리디 여린 그의 마음이 얼마나 처절하게 울고 있을지 아주 잘 알아서. 엉엉 울며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내고 있을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 생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 …그래요. 데이트,해요. 그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못해봤으니까…, 우리 나가서 재미있게 놀고 와요. 하지만, 오늘은 안돼요. 오늘 말고 내일. 내일 데이트해요, 우리. ”
“ ………. ”
“ 이대로 나가면 형 쓰러질 거 같으니까 오늘은 쉬고, 내일. 내일 가요. ”
제 말 뜻, 알겠죠? 라고 덧붙이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호원의 모습은 평소와 같이 장난스러웠지만 동우는 웃지 않았다. 그저 알았다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치곤 조용히 호원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 같이 있어줘. ”
“ ………. ”
“ 울고 싶지 않아. 그런데 혼자 있으면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울 거 같아. 그러니까, 오늘 밤은 나랑 있어줘. 내가 잠들어도, 절대로 곁에서 떠나지 마. 응? ”
작디 작은 손으로 아프도록 제 등을 꼬옥 끌어안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호원은 아무런 말없이 그저 제 연인의 마른 등을 아이 달래듯 다정하게 쓸어내려주었다. 그 다정스런 손길에서 긍정의 대답이 들려오는 것도 같아 동우는 아무런 말이 없는 호원을 탓하지도 않고 그의 품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오늘은 너무… 지친다. ”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힘든 날이네, 오늘은. 그런데 앞으로는 더 많이 아프고 지칠 것 같아서 무섭다, 호원아. 네가 곁에 있는데도 두렵고 무서워. 지금 현재, 눈물을 참고 있는 내가 정말 신기할 정도로.
* * *
사람이 없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싸늘하고 정적뿐인 성종의 방안으로 들어선 아란은 내리 책상 앞에 엎드려 울고 있는 성종의 곁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었다. 막상 그의 곁으로 다가가긴 했지만 섣불리 위로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어서 답답함에 입술만 꽉 무는 아란이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자신의 눈물을 훔치며 성종의 어린 등을 살살 달래주었다.
“ 괜찮을…거야. ”
“ 으흑…. ”
“ 이호원. 강하잖아. ”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그 한 마디 뿐이었다. 그렇게 성종도 울고 자신도 울기를 한참, 조금은 진정된 듯 보인 성종이 드디어 엎드렸던 자세를 바로하며 아란에게로 몸을 돌려 앉았다. 아란 또한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바로 옆 침대에 조용히 앉아 성종의 머리칼을 슥슥 만져주었다. 그 손길에 왠지 모르게 돌아가신 우현의 어머니의 손길과 비슷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큰 눈망울 사이로 투명한 액체를 한 가득 담는 성종이다.
“ …우리 형은, 호원이 형은, 어찌 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
“ ………. ”
조심스레 제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성종에게 아란은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기로 한다.
“ 우리 부모님은 제대로 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늘 술에 빠져 살고 그저 우리만 보면 때리기 바빴죠. 아버지의 그 무자비한 폭력을 막아준 건 형이었어요. 우리 형. ”
“ ………. ”
“ 자기도 어린데, 저를 보호하겠답시고 그 작은 몸뚱아리로 아버지의 발길을 견뎌내 가며 늘 저를 보호했어요. 제가 마구 울면서 비키라고, 좀 나오라고 해도 형은 절 안은 팔을 절대로 풀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독한 놈이라는 욕을 내뱉으며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
“ …성종아. ”
“ 아버지에게 맞아 온 몸에 멍이 들고 이마며 입술이며 찢어져 피가 나는데도 형은 늘 다치지 않은 저를 보며 다행이라고 웃었어요. 바보 같은 게, 그게 뭐가 다행이라고, 맞아놓고도 웃었던 건지…. 형은 언제나 제게 최면을 걸듯 말했어요. 우린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자. 저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 이렇게 된 거라는 비겁한 핑계를 대며 못나게 살지는 말자. 꼭, 성공하자, 라고요. ”
“ ………. ”
“ 형은 언제나 제가 우선이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받은 돈으로 사오는 맛있는 음식은 모두 제게 줬죠. 이거 배터지게 먹고, 공부 열심히 해. 성적표 검사할 거야, 라는 어른행세까지 해가며. ”
“ ………. ”
“ 형은 어렸을 적부터 참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힘도 힘이지만, 참 정신적으로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런데, 제가 보는 우리 형은 늘 약했어요. 겉으론 웃는데, 그 마음이 늘 힘들다고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우는 게 제겐 다 보였어요. 우리 형은, 강할 수가 없어요. 지금은 그래 보여도 언젠간 그게 한 번에 터져버릴 수밖에 없어요. 약할 수밖에 없다고요. 그게… 왜인지 알아요, 누나는? ”
“ ………. ”
알 것도 같았다. 성종이 하는 말을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만 있던 자신은 성종이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 이야기의 핵심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온 얼굴을 제 눈물로 흠뻑 적셔가며 우는 성종은 한참이나 말을 않고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다음 말을 이었다.
“ 당연…하잖아. 형 곁에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는…걸요. ”
“ ………. ”
“ 내겐 형이 있었지만, 형 곁에는 그 아무도, 없었잖아요. 의지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단 한 명도. 이건 안 돼. 나쁜 거야. 이게 올바른 길이야, 호원아. 라고 해주는 사람 따위… 없었다구요, 형은. ”
“ ………. ”
“ 그래서일 거예요. 그 분들은, 우현이 형과 그 가족들은, 형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첫 번째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형이 저렇게 무작정 자기 목숨을 던질 수 있는 건지도 몰라요. 단지 가족이라는 그 단어를 떠나서, 제게 그 무언가를 가르쳐준 사람. 처음으로…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자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봇물 터지듯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호원이 울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려졌다. 까만 어둠 아래서 홀로 눈물을 삼키며 강해져야 한다, 나는 강해져야만 한다, 수도 없이 되뇌고 되뇌었을 그 어린 녀석의 모습이 그려져서,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 형의 그런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나인데,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이해해줘야 하는 사람도 나인데, 내가 형을 보낼 수 없는 이유는…. 그, 이유는…. ”
“ 성,종아…. ”
안절부절, 불안에 떠는 성종의 손을 최대한 꽈악 잡아주며 함께 울었다. 혹여라도 제 형을 잃을까 두려움에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우는 성종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 으…. 나한텐 형이, 첫 번째잖아. 형이 내 부모님이였다구요. 호원이 형은 제게 엄마고, 아빠고, 형이에요. 우현이 형의 가족들도 제겐 정말로 감사하고 소중한 가족이지만, 첫 번째 가족은 우리 형. 이호원…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제가 어떻게 보내요? 내가 어떻게…! "
…그 무서운 데로 형을 혼자 보내요…. 결국엔 제 품에서 다시 한 번 울음보를 터뜨리는 성종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똑같이 터뜨렸다.
참 아프다. 너도, 이호원도, 남우현도, 김성규도 모두가 너무 아프다. 이렇게나 아픈데 너희들의 상처를 치료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 그게 제일 아파. 아픈 너희들끼리 사랑을 해도, 증오하는 그들에게 복수를 성공해도, 너희 가슴에 남아있는 그 끔찍한 상처들은 사라지지 않을 걸 아니까, 언젠가 그 흉터처럼 새겨진 상처를 보며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내가 그래서 이렇게 아픈 거지, 하며 다시 그 상처의 기억 속에서 허우적댈 너희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
정말 진심으로 너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답이란 걸 주지 않는 이 세상이 원망스러워. 이렇게 아플 수밖에 없는 너희가 꼭 영원히 풀리는 않는 문제마냥 어렵고 힘들어서, 그래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야 말아.
지금 흘려 내보내는 이 눈물이 잠시나마 너희의 상처를 지워줬으면 좋겠어서. 눈물이 다 마르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상처라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이 눈물에 잠겨 상처가 흐릿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울어.
이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랑하는 너희를 위해.
- 38 -
“ 진짜 좋다. 너랑 이렇게 손 잡고 다니는 거. ”
집에서 큰 파장이 있은 후, 잠시 바람이라도 쐴 겸 짚 앞을 산책하는 명수와 성열의 표정은 밝다기 보단 무언가 아주 큰 고민이 있는 심란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호원의 일 때문이겠지. 호원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가겠다고 하는데, 말릴 방도가 없고 말리는 데에 성공을 한다고 달리 하루 빨리 복수를 할 좋은 방도가 떠오르진 않을 테니까. 이렇게 해도 문제고 저렇게 해도 문제니 기분이 좋을 레야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 잠깐 여기 앉아서 얘기 좀 할까? ”
잠시 앉자는 명수의 말에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성열이 먼저 벤치에 앉았고, 뒤이어 명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늦은 새벽시간인지라 공원엔 그 어떤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둘만, 성열과 명수 둘만 그 공간에 앉아 있었다.
“ 명수야. ”
“ 응? ”
“ 호원이 형 말이야…. 정말, 괜찮을까? ”
“ ………. ”
“ 명수야, 나는 말이야. 이상하게 전부터, 호원이 형만 보면 그냥 진짜 우리 형 같고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에 많이 의지하고 기대고 있었던 것 같아. ”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 명수 넌 모를 거야. 네가 납치돼서 아주 많이 다쳤던 그 날, 호원이 형이 울었어. 널 살리겠다고, 자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다쳤다고 죄책감에 울면서 동우 형에게 매달렸어. 자기 몸도 성치 않은데, 피를 많이 흘려서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널 살리겠다고 고집을 피웠었어. ”
“ ………. ”
“ 그래서 그럴까. 평소에 너무 믿음직한 형이어서 늘 강할 거라고만 생각했었어. 그런데… 왜 자기가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호원이 형이 처음으로 약해보였던 건지 모르겠어. ”
이야기를 하는 내내 성열은 명수의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런 성열의 손을 더 꽈악 잡아준 명수가 조용히 눈을 감은 명수는 한참의 정적 끝에 듣기 좋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 이쁜아. ”
“ 응? ”
“ 나, 사실 후회하고 있어. 많이. ”
“ 뭘? ”
“ 글쎄. 뭐일 것 같아? ”
후회. 그 한 마디에 성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결국 명수를 그 후회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은 게 자신이었으니까. 명수를 불안에 떨게 만든 게 자신이었으니까.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못하고 급격하게 말 수가 줄어든 성열을 알아챈 명수가 푸스스 웃으며 하얗고 얇은 성열의 손을 두 손으로 꽈악 감쌌다.
“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후회는 아니니까. ”
“ …명수야. ”
“ 당신들 때문에 평범한 내가 이렇게 됐습니다. 이제, 당당하게 변호사질도 못하게 되었어요. 라는 후회가 아니야, 이 바보야. ”
“ 그럼? 네가 하는 후회라는 게 뭐야? ”
“ ………. ”
성열의 물음에도 명수는 감은 눈을 뜨지 않고 한참이나 말을 아꼈다. 그런 명수를 보채지 않고 성열도 시원한 밤바람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아보았다. 눈을 뜨면 네가 보여 명수야. 그리고 눈을 감으면…. 네가 느껴져. 날 너무도 사랑해주는 네가.
“ 내가 하는 후회는…. ”
“ ………. ”
“ 왜 진작 너를, 우리를, 말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 ”
“ ………. ”
“ 너무 후회가 돼. 우리는 왜 이렇게 어리석었던 걸까. 그 복수가 뭐 길래. ”
열이 넌 복수를 하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성규 형과 우현이 형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글쎄. 복수를 성공하면 오히려 더 불행할 것 같아. 성규 형은 죽을 만큼 미워했던 아버지지만 그래도 아버지이기에, 하나뿐인 혈육을 제 손으로 죽였다는 자책감에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 것 같고, 우현이 형은… 그렇게 성규 형이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또 자신을 원망하겠지. 복수에 성공했지만 이미 떠나간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라곤… 고통스러워하는 성규 형의 모습일 테니까.
한참동안이나 젖은 목소리로 말을 해오는 명수의 말을 잠자코 듣던 성열이 조심스레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한참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어서, 눈앞에 비친 주황빛의 가로등 불빛이 너무도 눈이 부셨다.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눈이 너무 부셔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꼭, 미래의 우리 모습처럼.
“ 사실 나도…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오곤 했어. 하지만 명수야, 넌 그것도 알아? ”
“ ……… ”
“ 후회를 해도… 우린 이미 늦었어. 명수 너는 이미 얼굴이 노출되었고, 호원이 형도 국정원에서 위태로운 상태고, 우현이 형의 존재 또한 서서히 사람들이 눈치 채고 있어. 여기서 멈추기엔, 우린 이미 너무 늦었어. ”
“ ………. ”
“ 사실 난 처음부터 예상했는지도 몰라. 이 복수에 성공해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어째서 말리지 않았는 줄 알아? ”
“ …글쎄. 모르겠어. ”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으며 대답하는 하는 명수를 바라보며 성열이 또 한 번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잃어 너무도 아파하는 성규 형의 모습을… 수도 없이 봤으니까. 잠을 자다가도 수십 번을 깨. 늘 같은 꿈을 꾼댔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어머니가 제 앞에서 목숨을 끊었던 그 날이 수도 없이 반복이 된댔어.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도 자지 못했어. 우현이 형만큼, 성규 형도 많이 아팠어. 내색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르는 줄 알고 그랬을 거야, 그 바보 같은 형은. 하지만 우린 알고도 모른 척 한 거야. 우리가 아는 체 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게 성규 형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그런데 있잖아, 동우 형과 나는 그날들을 후회해. 왜 진작 알아주지 않았을까. 왜 진작… 성규 형을 보듬어주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
결국, 우리가 이렇게 만든 건지도 몰라. 성규형의 지금의 모습을. 그리고, 미래를.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가 형들을 잡아주면 되잖아. 지금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여기서 멈춘다면, 우리 여덟 명이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고. ”
“ 아니. 그렇지 않아, 명수야. ”
“ 성열아, 제발…! ”
성열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외쳐보지만, 성열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럴수록 명수의 표정은 더 슬프게 일그러져 가기만 한다.
납득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왜 멈추기 않겠다는 건데? 복수를 꿈꾸지 않는 우리 여덟 명은 단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웃고, 울며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
“ 명수 넌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어? ”
“ ………. ”
“ 형들이 겪었을 아픔.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지옥과 같은 악몽을. ”
“ ………. ”
“ 아니, 없을 걸? 우리들 중 그 아무도 형들의 아픔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어. 그게 왜인 줄 알아? ”
지금 제 앞에서 울지도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 성열은 지금까지 정말 제가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지금만큼은 딱 어른 이성열의 모습 같달까. 그 모습에 명수가 조용히 제 입술을 짓씹었다.
“ 직접 겪어보지 않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크기의 아픔이니까. ”
“ ………. ”
“ 나도 여러 번 말려보고 싶었어. 그리고 늘 성규 형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려고도 해봤어. 하지만 되지 않았어. 그 아픔을 직접 겪지 않은 내가 상상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으니까. ”
“ …그만하자. ”
이대로 계속 얘기를 이어가도 끝이 나지를 않을 것 같았다. 성열은 성열 나름대로 자신을 설득하려 하지만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으니까. 이렇게 괜히 얘기 해봤자 언성만 높아지고 싸움만 커질 것 같았다.
“ 명수야. 네가 이해를 좀 해주면 안 될까?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먼저 집으로 들어가려는 명수의 팔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성열이 외쳤다. 이해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우리 모두 이호원이라는 사람을 그곳에 보내고 싶지는 않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 말에 한참동안이나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있던 명수가 긴 한숨을 내뱉으며 드디어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 …미안해, 열아. 하지만 난,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왔던 김명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이런 이기적인 나라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
그 말을 끝으로 성열의 손을 뿌리친 명수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 …명,수야. ”
마음이 아팠다. 가슴이 문드러지는 아픔이 일었다. 명수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명수가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오지 못했던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명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명수야…. ”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픈 이유는, 평범한 명수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을 강요하고 있는 자신의 못난 이기심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생활을 해본 적 없던 명수에게 하루아침에 우리를 이해해달라고 하는 제 못난 마음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다.
툭, 투욱-.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찝찝한 습기가 온 몸을 휘감는 그 순간부터 아, 비가 내리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많이 내릴 줄은 몰랐다. 곧 장대비가 쏟아지며 입고 있는 옷을 모두 적셨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벤치에 털쩍 앉은 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성열의 고개가 들린 건 그때였다.
“ 하아, 하아-. 멍청해. 이성열 넌 진짜, 사람을 가만히 놔두질, 못하는구나. ”
뛰어온 듯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우산을 들고 달려온 명수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고 갈 땐 언제고, 쫄딱 비를 맞고 있을 자신을 걱정해 또 금방 우산을 손에 들고 온 김명수 때문에. 자신을 씌워줄 우산을 손에 들고 올 생각만 했지, 정작 저가 비를 맞을 건 생각하지 않고 달려와 똑같이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제 남자 때문에, 참고 있던 눈물이 드디어 터져버렸다.
“ …가자. 감기 걸리겠다. ”
아직도 자신에 대한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 팔을 잡아 일으키는 그 손길만은 눈물이 나도록 다정해서 쉴 새 없이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옷소매로 닦고 또 닦아보아도 눈물은 멈추질 않았고, 또 이미 젖어버린 소매인지라 닦아봤자 오히려 더 얼굴만 적실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많이 지친 듯한 명수의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 많이 생각해볼 생각이야. ”
“ ………. ”
“ 최대한 이해도 해보려고 할 거야. ”
“ ………. ”
“ 잘 될지는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을 해도 네가 원하는 그 답이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나 꽤나 고집스러운 놈인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래도 해볼게. 최대한 너를, 그리고 형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 고집을 죽여 볼 생각이야. ”
“ 명…수, 흐윽…. ”
결국엔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성열의 어깨를 더 꽈악 감싸 안은 채, 명수 또한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그러니까, 울지 마, 열아. 아무리 고집스러운 김명수라도 이성열 우는 모습에는 어쩔 수 없이 약해지기 마련이니까. 지금만큼은 내게도 생각할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어. ”
“ …응. 응, 명수야. ”
명수의 부탁대로 성열은 제 눈물을 손으로 급하게 닦고 최대한으로 감정을 추스렸다. 그와 동시에 명수는 성열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여주었고, 성열은 명수의 어깨에 제 고개를 댄 체 차박차박 물소리를 내며 길을 걸었다. 늦은 새벽시간인지라 길가를 밝게 비추고 있던 가로등이 모두 꺼져 칠흙 같은 어둠이 깔렸지만 그렇게 무섭다고 느끼진 않았다. 성열은 명수에게, 명수는 성열에게 의지를 한 채였으니까. 하나는 약할지라도 둘이라면 강했다. 처음엔 약했지만 점점 성장해나가는 성열과, 그런 성열을 무조건적으로 위하는 명수. 두 사람의 미래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더라도 밝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티헌터.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만큼은 누구보다도 평범한 인간들이니까.
* * *
“ 자, 아- 해봐. ”
“ 형, 저도 손 있는데…. ”
“ 어허. 우리 처음 하는 데이튼데 그러기야? ”
처음 하는 데이트. 그리고 그 뒤에 일부러 붙이지 않은 소리 없는 단어,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데이트. 하지만 두 사람은 정말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으며 행복하게 데이트를 했다. 평범하지 못한 사람들인지라 지금까지 즐길 수 없던 여느 연인들과 같은 평범한 데이트. 영화도 보고 맛있는 밥도 먹고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차도 마시며 농담을 건네고, 그 농담에 행복한 웃음 가득 머금고.
호원은 사실 이 데이트가 굉장히 우울하고 눈물이 가득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동우는 그 일에 관해 언급은커녕 아예 없었던 일처럼 평소와 같이 눈을 예쁘게 접으며 즐거워했다. 처음엔 심란한 마음으로 나온 호원도 그런 동우의 미소에 그 일 따윈 잊고 그와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호원은 동우에게 참 고마웠다. 아무리 가기로 했다고 마음 먹었다한들 동우가 울었다면 마음이 많이 약해지고 잘 할 수 있을까란 불안감도 컸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웃어주고 즐거워해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웃고 떠들 수만은 없었다. 동우도 호원도, 진지하게 나눠야할 이야기들이 존재하긴 했으니까. 아직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한 겨울이어서 녹지 않은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걷는 두 사람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한 가득이다. 사람이 드문 거리여서 마주 잡은 두 손을 더욱 꼬옥 감싸 쥐고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동우가 먼저 그 일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 호원아. 난 사실 아직도 많이 불안해. 당장이라도 네 품에 안겨 울 수 있을 만큼, 너무 무섭고 그래. ”
“ ………. ”
“ 근데도 이렇게 오늘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서워하는 그 마음보다, 너를 믿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야. 이호원은 무사히 잘 돌아올 거야. 아예 다치지 않은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나를 두고 허망하게 갈 사람은 아니야, 라는 그 강직한 믿음. ”
“ …형. ”
그 일을 생각했을 때 마냥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가지고 있었는데, 동우의 말 한마디로 인해 지금은 마음이 슬프지도 않고, 그냥 가슴이 막 벅차올랐다.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신 하늘의 신께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믿어주며 자신이 가는 길이 늘 옳다고 해주는 사람. 어쩌면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사람.
“ 딱 하나만 물어볼게. 국정원은…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거야? 저번 그 호텔 붕괴사건 때 CCTV가 창선씨한테 넘어갔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국정원을 어떻게 들어가? ”
“ 저도 이제 국정원에서는 끝일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왜 요새 출근 안하냐고. 팀장님 화가 많이 났다고. ”
“ …뭐? 그게 대체 무슨. ”
“ 제가 사람 하나 꿰뚫어보는 거 참 잘해요. 그런데 그 후배, 절대로 거짓말 하는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더라고요. 아마도 창선이가 제게 시간을 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아직 그 CCTV는 위에 보고를 안 한 거겠죠. ”
“ 하지만 만약 그게, 모두 함정이라면? 그렇다면…! ”
“ 그게 함정이어도 전 갈 거예요, 형. 처음부터 국정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라면 포기하겠지만, 들어오라고 거기서 다리를 놓아주는 걸 어떻게 포기해요. 우리를 그렇게 만든 놈들의 정체가 그 안에 있는데. 거기가 아니면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포기해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
호원이 눈빛에 서려있는 단호함에 동우는 그만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웃으며 보내주겠다고, 호원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겠다고 스스로 되뇌고 또 되뇌었는데 저도 모르게 또 호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정말로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었는데, 막상 보내려고 하니 그렇게 쉽지가 않다.
“ 약속할게요. 형 말대로 나, 다치지 않겠다고는 약속 못해요. 그렇지만 꼭 살아 돌아올게요. 너무 많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끝까지 의식 놓지 않을게요. 그거 하나는 제가 약속할게요, 형. ”
“ 호원아…. ”
“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행동파 4명이 있는데 뭘 걱정해요. 안 그래요? ”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이는 이호원은 참으로 강했다. 그래서 불안하던 마음이 싹 가셨다. 그라면 정말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정말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를 따라 웃을 수 있었다.
“ …잘,다녀와, 호원아. ”
말없이
두 번, 고개를 끄덕인다.
“ 다쳐서 오면 내가 치료해줄게. 장동우 손맛은 아프지 않다고 했으니까, 네 상처는 전부 내가 치료해줄게. 그러니까, 우리 꼭… 다시 보자. 알았지? ”
말없이 마주잡은 손을 더욱 힘주어 잡는다.
이것이 호원과 동우의 작별인사였다. 어쩌면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는 기간불명의 작별인사. 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눈물을 참는 것이 아니다. 웃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믿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이다.
두근두근, 마주잡은 두 손을 타고 심장고동이 쿵쿵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복한 미소를 한 가득 머금었다.
* * *
3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밝고 쾌활했던 집안의 분위기는 정말 말 그대로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 마냥 차갑고 우울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성규와 우현이 오랜 상의 끝에 모두를 불러 모았다. 여덟 명 중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소파에 앉은 것을 확인한 우현이 성규를 바라보았다. 정말 3주라는 시간동안 밤을 새가며 고민하고 또 고민해왔고, 그 결과 어떻게 할 지 답이 나왔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때문에 몰려오는 불안감에 성규를 한 번 바라보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였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고개짓 한 번에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서 호원을 한 번 바라보자 그가 씁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미안해서 그럴 것이다. 또 한 번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그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미안함.
“ 정말 많이 고민했어. 굳이 너를 보내야만 하는 걸까. 그 외엔 정말 방법이 없을까. 심지어 복수를 포기하는 것까지 생각했었어. ”
조심스레 말문을 연 우현의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그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동료들은 우현의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모른 척 눈감아주었다.
“ 하지만 3주 내내 고민한 끝에 나온 결론은, 너를 한 번 믿고 보내주기로 하자, 였어. ”
“ 절대 안돼요! ”
“ 우현이 형…! ”
우현의 말에 반박을 하고 나선 사람은 명수와 성종이었다. 그들 또한 여러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지만 나온 답은 ‘보낼 수 없다’ 였다. 성종은 그렇다 쳐도 명수까지 반대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호원이 놀란 표정으로 명수를 바라보자, 명수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보낼 수 없다고. 아마도 명수는 호원을 친형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듯싶었다. 그간 호원에게 많이 기대왔던 것이 사실이고, 저도 모르게 그의 넘치는 자신감과 전투능력을 늘 동경하곤 했다. 때문에 이 위험한 일에 친형 같은 호원을 보내기가 힘든 것이겠지. 호원 또한 명수를 친동생인 성종만큼 아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꽤나 당황하고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다. 두 사람의 굳은 표정이 쉬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가지 마요. 가지 마요, 호원이 형. ”
“…김명수. ”
“ …가지 말라고!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엄청난 인원을 상대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두가 함정이라고요. 당신을 이용해 우릴 붙잡고, 전부 죽이려는 함정! ”
“ 함정이여도, 그 안에서 건질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야. 그간 숱한 임무들을 해왔어. 정말 어렵고 함정이 가득한 임무에서도 늘 그만큼의 보상은 따라왔어. 위험을 감수하고 하는 만큼, 그 함정은 내게 그만큼의 보상을 해줄 거야, 명수야. ”
“ 형…. 제발요…! ”
끝까지 호원을 말리려는 명수를 제지한 건 다름 아닌 성열이었다. 제 두 손으로 명수의 손을 붙잡아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만. 너의 고집은 여기까지만 하자, 명수야. 굳이 입을 벌려 소리를 내지 않아도 성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이호원을 그 위험한 곳으로 떠미는 김성규와 남우현도, 그에 아무런 반대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성열과 아란도.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그곳을 가겠다는 이호원, 그를 가장 이해할 수 없다. 결국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쾅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 명수였다.
“ 명수는 제가 설득할게요. 모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
그 말을 끝으로 성열이 명수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고, 안 그래도 적막했던 거실의 분위기는 더더욱 가라앉고 말았다. 이것부터가 벌써 결과가 보이지 않는 긴 싸움 같았다. 이 사람을 설득하면 저 사람이 안 된다고 하고, 또 저 사람을 설득하면 다른 사람이 안 된다고 반대를 한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고 갔어야 하나, 라는 자책감에 빠진 호원의 어깨로 동우가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호원아. ”
그리고 이어서 성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맙다.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봐줘서. 만약 네가 말하지 않고 갔다면 우린 지금보다 더 많이 힘들었을 거야. 더 많이 아프고, 울었겠지. 네가 말이라도 해줘서, 마음을 많이 추스릴 수 있었어. 네가 잡혔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계획도 세워두었어. 이 모든 건 네가 우리에게 네 의견을 말해준 덕분이야. 고맙다, 이호원. ”
동우와 성규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뜨거운 눈물이 툭, 투욱-.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데일만큼의 아픈 뜨거움이 아니라, 모든 아픔이 사르르 녹아 내려가는 기분 좋은 뜨거움이었다. 두 눈을 꼭 감은 호원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게서 가족을 앗아갔지만, 그만큼 더 따뜻하고 소중한 가족을 만나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혹여 자신이 그곳에서 안 좋은 일을 당할지라도, 자신들의 목숨보다 저를 먼저 생각해 달려와 줄 그들이 있기에, 든든한 마음을 안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큰일을 앞두고 있지만, 현재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그렇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는 것이라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대고 속삭였다.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들을 얻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 39 -
호원을 보내는 건 절대로 안 된다고 소리친 명수를 따라 들어오긴 했지만, 너무도 화가 나 방 안의 물건을 냅다 던져버리는 명수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성열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기만 했다. 명수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것들보다도 저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그가 화를 내는 대상이 우리 중 그 누구도 아닌, 김명수 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 성열이 너도 내가 밉지. 한심하지. ”
“ …명수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
“ 한심해. 정말이지 나도 이런 내가 한심해서 미칠 것만 같아. 열아, 나도… 머리는 호원이 형을 보내는 것이 맞는 거라고, 옳은 일이라고 하는데, 자꾸만 안 된대. 마음이… 안 된다고 자꾸만 비뚤어진 말만을 내뱉게 만들어버려. 이런 내가 너무, 싫어…. 나 어떡하지? ”
혼란스러운 듯 두 동공이 흔들리는 명수가 너무도 안쓰러워 그대로 그를 있는 힘껏 따뜻하게 안아주는 성열이다. 오늘따라 그가 너무도 작고 약해보였다. 지금까지 제가 알던 김명수는 늘 저보다 어른스럽고 현명한 판단만을 내렸던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 오늘 명수 네 행동? 그게 왜 한심한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호원이 형한테 가지 말라고 한 거? 우리보고 너무하다고 윽박지른 거? 그게 왜. 그게 왜 한심하고 어린 행동이야? 그건 잘못된 거 아니야, 명수야. ”
“ ………. ”
“ 그건 잘못된 게 아니라, 솔직한 거야. 네가 그만큼 호원이 형을 많이 아끼고 있다는 증거야, 그거 절대로 나쁜 거 아니니까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마…. ”
“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
“ 괜찮아. 다, 괜찮아. ”
긴 말 없이 명수를 다독이는 성열의 모습은 정말로 예전과는 많이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예전의 성열이었다면 힘들어하는 명수를 옆에 두고 같이 울어주고 아파했을 텐데, 지금의 성열은 아파하는 명수를 안고 다독일 줄도 아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성규도, 성열도, 그리고 동우도. 모든 이들이 한 계단 한 계단 밟아가며 성장하고 있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건,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아파할 만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서로를 감싸 안고, 어른이 되어가는 단계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니까.
“ 명수야, 네가 그 어떤 결정도 내리기가 힘들다면… 그냥 모두 놓는 건 어때? 가지 말라고 붙잡지도 말고, 가라고 허락하지도 마. 그냥 흘러 가는대로…. 호원이 형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게 해주면 되는 거 아닐까? ”
“ ………. ”
“ 우리도 그래, 명수야. 우리 중 그 누가 호원이 형보고 거기 가라고 했어? 우리는 굳이 가지 말라고 하지 않은 것뿐이지, 가라고 등 떠밀지 않았어. 우린 그저 형의 의견을 존중했을 뿐이야. 모두가 너와 같은 마음이야. 당연히 가지 않았으면 좋겠지. 가면 다칠 게 뻔하니까. 안 좋은 일을 당할 게 눈에 훤하니까. 하지만 굳이 말리지 않는 건, 말려도 형은 그곳을 갈 거고, 그럴 바엔 형의 마음을 더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 게 모두의 마음이야. 명수 너도, 우리와 다르지 않잖아. 안 그래? ”
“ ………. ”
“ 넌 한심하고 어린 게 아니라, 용감했던 거야. 너의 그 걱정 어린 말 한 마디에 호원이 형은 많은 힘을 얻었을 거야.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전보다 훨씬 더 든든한 마음을 얻게 되었을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
성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제 마음으로 들어와 따스하게 번져 나갔다. 정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원이 잘못될까봐 초조하고 불안하고, 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가 한심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했다.
“ 좋네. 가끔씩은 이러는 것도. ”
“ 응? 뭐가? ”
“ 성열이 네 품이… 이렇게 따뜻한 줄은 몰랐네. 항상 널 내 품에 안기만 했지, 이렇게 너에게 안겨 위로받는 건 또 처음인 것 같아서. ”
“ …정말, 그러네. ”
“ 우리 이쁜이, 많이 컸다? ”
“ 하, 뭐라고? ”
언제 우울했냐는 듯, 평소와 같이 짓궂은 장난을 쳐오는 명수에게 휘말린 성열은 또 한 번 그에게 발끈하고 만다. 하지만 곧 한쪽 입 꼬리를 올린 성열이 배시시 웃으며 도도하게 팔짱을 낀 채 명수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 그으래? 정신 연령은 네가 나보다 높을지 몰라도, 키는 내가 너보다 더 크다? 나보다 작은 게 어디서 나한테 컸네 마네야! 까불고 있네, 우리 김변? 우쭈쭈- ”
“ 허, 이성열 너…. ”
“ 뭐! 내가 뭐! ”
“ 남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고 말았어…. ”
“ 풉-. 뭐어? ”
행복한 듯 크게 웃는 성열을 제 품에 꼬옥 가둬버린 명수가 저도 따라 웃었다. 키는 성열보다 작은지 몰라도, 품은 제가 더 크다. 키만 컸지, 깡마른 성열은 언제나 제 한품에 쏙 들어오곤 하니까. 라는 유치한 근거를 대며 애써 제 성장판을 위로하는 명수의 얼굴 위로 예쁜 보조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괜찮을 거야. 그렇지, 이쁜아?
응. 괜찮아. 다 괜찮아, 명수야.
그래.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명수의 품에 갇혀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아도, 숨소리 하나,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안 성열은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명수의 허리를 꽈악 감싸 안았다.
네 말이면 다 괜찮아. 열이 네가 내 세상이니까,
나는 정말로 다 괜찮아.
* * *
화를 참지 못한 명수가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 뒤를 성열이 따라 들어간 후, 명수와 똑같이 반대를 하던 성종은 가만히 앉아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이내 현관으로 가 신발을 구겨 신고 뛰쳐나가버린다.
“ 성종아! ”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따라 나가려는 동우를 앉힌 호원이, 이것은 제가 할 일이라며 그를 눌러 앉히고는 겉옷도 챙기지 않고 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우현이 조용히 일어나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입술을 조물거리며 말했다.
“ 저 바보 같은 것들이, 지금 밖에 비도 오는데 생각도 없이. ”
걱정스러웠다. 아직은 많이 차가운, 겨울과 봄 사이의 날씨에 내리는 비였다. 그리고 이어서 우현이 우산을 2개 챙겨 급하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따라 일어나려는 동우를 막아선 것은 성규였다. 안절부절 꼭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어버린 동우를 바라보는 성규의 마음 또한 좋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 성규야, 비켜줘. ”
“ 형. 그냥 가만히 있어. ”
" 아플 거야. 성종이랑 호원이… 많이 아플 거라고! "
다시 한 번 성규를 뿌리치고 나가려는 동우의 팔을 강하게 붙잡고 성규가 미간을 찌푸렸다. 큰 눈망울에 아픈 눈물을 한가득 담고 있는 동우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아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를 더 힘주어 붙잡으며 조용하게 입을 떼는 성규였다.
“ 형이 가면, 뭘 해줄 수 있는데? ”
“ …뭐? ”
“ 저들이 지난 우리의 세월을 전부 다 알지 못하듯, 우리도 저 셋의 세월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어. 누구보다 형이 잘 알면서 그래? ”
성규는 제 한마디에 동우의 몸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에 성규도 함께 팔에서 힘을 빼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또한 따라 나가고 싶었다. 따라 나가서 지금 가장 많이 아플 호원과 성종을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저들이 살아온 시간과,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이도 다르고 아픈 것이었으니까. 저들이 굳이 우리의 세월에 참견하려 하지 않듯, 우리도 그들 사이의 시간을 존중하고 아껴줘야만 한다. 저와 우현이 사랑하고, 호원과 동우가 사랑한다 한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모든 걸 이해하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다른 것이었으니까.
“ 호원이가 언제 형하고 성열이의 과거에 대해서 물어본 적 있어? 우리 셋이 어떻게 만났는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 건지 물어본 적 있었어? 호원인 어땠는지 모르지만, 우현인 없었어. 내 아픈 시간들도 내가 먼저 말했던 거고, 그에게 구해달라고 먼저 손을 뻗은 것도 나였어. 호원인 어떤데? 이호원이 언제 형의 과거를 물었던 적이 있어? 어째서 고아원에서 자라야만 했는지, 그곳에서 어떻게 하다가 나와 손을 잡게 된 것인지 물어본 적 있었어? ”
“…없,었어. “
“ 우리도 모르는 새에, 저 아이들은 우리를 배려하고 있었어. 우리가 어려워할 걸 아니까, 궁금해도 참고 기다려준 거라고. 우리도 참 많이 아팠지만, 저 아이들은 같은 때에 같은 아픔을 함께 공유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애들이야. 저 아이들 사이에 우리가 껴서 뭘 어떡할 건데? ”
“ ………. ”
“ 형이 지금 가서 뭐라고 위로해줄 수 있어? 하나 뿐인 제 형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간다는데, 그런 피 마르는 심정의 성종일 위로할 수 있어? 제 하나뿐인 동생이 울면서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데, 거길 꼭 가야만 하는 호원이의 문드러지는 마음을 모두 헤아려줄 수 있어?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던 아이들을, 자신이 이 지옥 같은 데로 내몰았다고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온 우현일 알아줄 수 있어? 아니, 우리 중 그 누구도 저 세 사람을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
성규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동우가 그대로 소파로 털썩 주저앉는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이 맞고,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틀린 게 맞는데, 그걸 잘 아는데도, 저 깜깜한 어둠속에서 세차게 내리는 차디찬 비를 맞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시려 죽을 것만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대신 맞아주고 대신 아파해줄 텐데. 정말로, 할 수만 있다면.
“ 동우 형, 우리 기다려주자. ”
“ ………. ”
“ 우리보다 더 강한 사람들이야. 분명, 웃으면서 들어올 거야. ”
아까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다정한 목소리에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점차 진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프지만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는 성규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가슴 저 깊은 곳 어디서부턴가 뜨겁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 ………. ”
그래. 이제는 그 짐을 버려도 될 것 같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너무도 아프고 어린 성규를 이제는, 정말로 이제는 그만 내려놓아도 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제가 없어도, 성열이 없어도, 혼자 일어설 수 있는 그를, 이제는 정말 놔줄 때가 온 것 같다.
“ 비가 참… 많이 온다. ”
다가오고 있었다. 이 길고도 아픈 이야기의 끝 지점이.
* * *
“ 하아…, 이성종!! ”
하얗고 마른 팔목이 한손에 잡혀왔다. 빼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수년 간 단련해온 제 형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엔 포기해버린 성종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꾹 문다. 고개를 숙인 성종도, 그런 성종의 팔목만 잡고 하염없이 서있는 호원도, 아무 말이 없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을까, 먼저 입을 뗀 사람은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성종이었다.
“ 형. ”
“ 그래. 말해. ”
“ …형한테 나는, 뭐야? ”
“ 뭐…? “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한참을 벙져있던 호원에게 드디어 성종이 얼굴을 보였다. 홀로 이 빗속을 뛰며 얼마나 운 것인지 그 큰 눈이 하염없이 벌게져 있었고 입술은 이미 파랗게 질려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호원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제 형의 모습이 성종에게는 보일 리가 없다.
“ 나, 지금까지 형 말이라면 뭐든 다 따랐어. 틱틱대면서 불평불만 늘어놓아도, 결국 난 형의 뒤에서 묵묵히 형을 따라왔던 사람이야. 그게, 왜였다고 생각해? ”
“ ………. ”
“ 무조건 형이 옳아서? 형이 무서워서? ”
“ 성종아. ”
“ 아니? 형도 잘 알잖아. 내가 왜, 형 말이라면 뭐든 따랐던 건지…! 그게 왜인지 누구보다 형이 잘 알잖아! ”
악에 바친 고함을 지르는 성종의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물며 푹- 고개를 숙이고 마는 호원이다. 그리고는 성종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이듯 한 마디를 내뱉어본다.
…미안,하다.
“ 알잖아…. 나한테는 형 하나뿐인 거. 태어났을 때부터, 나한테는 형 하나였어. 엄마도 아빠도 없었고, 그냥 형 하나였다고! 형이 내 엄마였고, 아빠였어. 그래서 따랐던 거야. 내 하나뿐인 혈육이 그러자고 하니까. 이게 맞다고 하니까 따랐던 거야. 근데 이게 뭐야? 그간 내가 형을 믿고 따라왔던 결과가 이거야? 내가 형 말이라면 다 따라가 주니까 이번 일도 그렇게 혼자 맘대로 정해버린 거야? 그런 거야, 이호원!? ”
“ 그런 거 아냐. ”
“ 형이 정말로 날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럴 순 없어. 내 하나뿐인 가족을 잃을 수도 있는 그 곳에, 내가 형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형은!? ”
탁-타악-. 물에 젖어 무거운 신발소리를 애써 죽이고 벽 너머로 몸을 숨긴 채 쥐고 있는 우산만 괜스레 부서져라 잡았다. 숨소리조차 들리게 않게, 제 존재를 철저히 어둠속으로 숨겼다. 지금은 자신이 끼어들 타이밍이 아니었다. 호원과 성종,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게 해줘야 했다. 축축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뜨거운 숨을 내뱉어보았다. 차가운 비를 하도 오래 맞아서인지 제 숨마저 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 식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모든 게.
“ 성종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남우현을 위해 헌신하는 줄 너도 잘 알잖아. ”
“ ………. ”
“ 그 분들은… 우리는 자식처럼 생각한 게 아니야. 정말로… 우리를 자식으로, 제 아들로 생각하셨어. 그래서 나는, 그 분들을 죽어서도 잊지 못해. 그래. 너한테 지금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하게 들릴지 알아. 그래서 미안해. 너한테는 형이, 전부 다 미안해. 이 말밖에는 할 수 없는 못난 놈이라서, 그래서 더 미안해. ”
“ …제발. 제발, 이호원…. ”
모두가 운다. 호원도 울고, 성종도 울고, 바로 옆 벽 너머에 몸을 숨긴 채, 숨까지 죽인 우현까지. 모두가 그렇게 울고 있다.
“ 사실 말이다. 이건 우현이도, 그리고 너도 모르는 이야긴데 말이야. 예-전에 내게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 ”
“ ………. ”
“ 호원이 네가 우현이를, 그리고 성종이를 지켜다오. 네가 두 아이들을 지키렴. 그리고 호원이 너는… ”
“ 아흑…. ”
“ 내가, 평생, 지켜주마. 내 아들, 엄마가 평생 지켜,줄게… ”
호원의 그 마지막 한 마디에 결국 성종이 주저앉고야 말았다. 지금 자신 앞에서 울고 있는 호원을 그곳으로 보내기는 싫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들을 보살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이렇게 해도 잘못된 선택 같고, 저렇게 해도 잘못된 선택 같은데 도대체 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라고 이런 잔인한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일까. 그냥 끊임없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꼭 바늘처럼 제 전신을 휘감아 푹푹 쑤셔댄다. 고개를 들고 호원을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이대로 제가 졌다는 걸 인정해버리는 걸까봐. 고개를 들어 제 형을 마주본다면,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설득 당해 버릴까봐, 그저 땅에 고개를 쳐박고 하염없이 우는 일밖에는 할 수가 없다.
“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주라. 언제나처럼, 가진 거 하나 없어도 당당한 네 형으로 갔다 올게. 비록 돌아온 내 모습이 처음처럼 멀쩡하다고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네 곁에서 절대로 떠나지는 않을 거야.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주면 안되겠어? 나를 믿어달라는 게 아냐. 저 먼 곳에서 날 지켜주실 거야. 반드시 그럴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너도, 엄마를 믿어주면 안되겠어? ”
성종이. 우리 예쁜 막내.
엄마가 우리 막내아들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 엄…마. 엄마. 엄마…! 으흑.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형….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
아이처럼 엉엉 울며 절규하는 성종을 앞에 두고, 고개를 떨군 호원은 말없이 울기만 했다. 보고 싶고, 그립고, 만지고 싶고, 안기고 싶다. 그 따뜻한 품을 다시 한 번 느끼고,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서, 그 사실이 뼈저리게 와 닿아서, 마음이 더 시린 것 같다. 다시는, 정말로 다시는 그 분을 못 본다는 것이 느껴져서 그저 피가 나도록 입술만 악 물고 가까스로 울음소리를 참아보는 호원이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울기를 몇 분, 차가운 바닥에 앉아만 있던 성종이 천천히 일어나 제 형을 아무런 말없이 감싸 안았다.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직은 너무 어리기만 한 철없는 동생과, 아픔에 허덕여 정신도 못 차리는 제 친구를 지키려고 얼마나 많이 이 입술을 상하게 하고 혼자 감내해왔을까. 강하게 보여도 언제나 늘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는데. 나는 또 다시 그런 당신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썼다. 그러지 않으려고, 어른인 척 해보려 해봐도, 나는 언제나 당신보다 어리기만 하다. 그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직은 어리기만 한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당신의 선택이 맞을 것이라고. 그렇게 다시 한 번 더 내 하나뿐인 혈육을 믿어보려 한다.
“ 건강하게, 씩씩하게…. 잘 다녀와. 믿고 기다릴 거야. 형을, 그리고… 늘 우릴 지켜주신다는, 엄마를. ”
“ 그래. 고맙다…. ”
제 형의 믿음직스런 대답을 들은 성종은 더 이상 우는 얼굴이 아닌 웃음을 띤 얼굴을 하고, 그에게서 등을 보인 채 집으로 향했다. 호원이 먼저 가라고 눈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성종은 아무런 대꾸 없이 발걸음을 돌렸고, 성종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던 호원은 그제 서야 고개를 들고 저 벽 너머를 바라보며 한마디 뱉었다.
“ 언제까지, 그렇게 혼자 울고 있을 건데, 남우현. 청승맞게 그러지 말고 좀 나오시지? ”
호원의 장난어린 목소리에도 우현은 바깥으로 나오질 않았다. 결국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제가 먼저 우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호원이었다. 그리고 호원은, 제 눈앞에 비친 우현의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 하, 병신 같은…새끼. ”
주저앉아 있는 우현은 가까스로 벽에 몸을 기댄 채 이를 악 물고 소리를 참아가며 울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우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부들부들 떨려오는 어깨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많이. 아주 많이, 아프다고.
그 모습에 호원 또한 성종의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깨물고 있던 입술을 드디어 놓고, 천천히,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그리고는 그의 옆으로 떨어져있는 우산 하나를 주워들어 펴고는 우현의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 울어. 그간 참아왔던 거, 그리고 앞으로 쏟아낼 것들까지 모두… 울어. 그리고 그 다음엔…. ”
“ 으흑…. ”
웃자. 함께. 평…생.
누가 들어도 흐느끼는 목소리인데 애써 그것을 꾹 눌러가며 제 의사를 전달하려는 호원의 의지에, 우현이 천천히 일어나 제 옆으로 떨어져 있던 나머지 우산 하나를 더 들어 편 채 호원의 위로, 씌워주었다.
“ …너나 좀 울어. 강한 척 해도, 많이 무섭잖아, 너. ”
그 말에 호원이 웃음을 터뜨린다. 눈은 우는데, 입은 웃는 그런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게 웃는 얼굴인지 우는 얼굴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 하, 역시. 같이 살아온 세월은… 못 속인다니까. 귀신 같은 남우현. ”
“ …긴 말 하지 않을 거야. 잘 다녀와라, 이호원. ”
“ 그래. ”
“ 걱정 따위 하지 마. 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너 구하러 우리가 바로 갈 거야. 절대로 너 혼자 두지 않아. ”
“ …알아. ”
“ 당연히 그럴 거라는 거 알지만, 우리 꼭…. 웃는 얼굴로 다시 보자. ”
“ …응. 그러자. ”
그리고 두 사람은 언제 울었냐는 듯, 이미 홀딱 젖은 서로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던 것인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비는 멈출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의 몸뚱아리를 하염없이 적셔갔다. 이 비가 언제 그칠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비는 그치지 않아도 우산을 쓰고 있어 더 이상 몸이 젖지 않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의 마음에 내리던 비도 서서히 그쳐가고 있는 것 같다고. 더불어, 잔뜩 껴있던 먹구름 또한 머지않아 모두 갤 것이라고.
반드시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고.
* * *
“ 하, 선배! 왜 이러세요. 정신 좀 차리시죠? ”
“ 지훈아아- 네가 보기에도, 내가 나쁜 놈이냐? ”
“ 아, 이 선배가 지금 뭐래. ”
“ 네가 봐도…! 나만 나빠? 내가 제-일루 못 됐어어? ”
“ 선배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리시고! 저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여기 가만히 계세요. 알겠습니까? ”
술에 잔뜩 취해 정신도 못 차리는 창선과, 그런 창선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국정원 동료. 후배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창선은 남은 소주를 병나발로 모두 쏟아 붓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취해 비틀거리는 것이 위태로웠지만 그 누구도 창선을 도와줄 이는 없어보였다. 후배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제 맘대로 밖으로 나온 창선은, 비가 잔뜩 쏟아지는데도 그 비를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도 모자라 대자로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 비가… 온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강하게 때려 눈이 아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선은 눈을 부릅뜬 채 까맣기만 한 하늘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에도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 호원아. 이호워언…. ”
아파보였다. 그의 모습은, 정말로 금방 죽어버릴 이 처럼 매우 아파보였다.
“ 이 비가… 계속 내려서, 정말로 끝도 없이 내려서… 내가 잠겨버렸음 좋겠다. ”
내 존재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도록. 그렇게 내리고, 또 내렸음 좋겠다.
“ 죽고…싶어. ”
서서히, 눈을 내리감는다. 앙 다문 입술 끝이 부르르 떨려온다.
“ 죽이고 싶어. 미치도록. ”
너를 사랑하는, 이 빌어먹을 이창선이란 놈을.
- 40 -
불을 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도 차가운 새벽. 불안감과 기대감이 한 데 섞여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호원은, 결국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는 동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손을 들어 조심스레, 아주 사랑스럽다는 냥 동우의 밝디 밝은 노란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참동안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로, 가야만 한다.
그 누구에게도 언제 떠날 것이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날을 정해놓고 간다면 모두가 그 시간에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제 걱정을 할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모두가 잠든 시각, 그냥 제 마음의 준비가 모두 됐을 때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게 바로 오늘, 지금 이 시각이었다. 그 전쟁터로 간다고 선포한 후로 단 한 번도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동우가 참 사랑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앞선 감정은 미안함. 그리고….
그를,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항상 우현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겁만 주었지, 막상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잘 알 것이다. 지금 내가,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라는 것을. 잠들어있는 그의 이마에 한 번, 코끝에 한 번, 입술에 길게 한 번 입을 맞춰본다. 마지막 종착지에 입술을 댔을 때, 정말이지 눈물이 나도록 따뜻해서, 계속 그러고만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다가는 동우가 깰 수도 있어서, 정말이지 그에게 떠나는 모습만은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이불 속에서 나와 나갈 채비를 했다.
자켓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조용히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동우와 처음으로 진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했던 날 찍었던 사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고는 이내 그것도 핸드폰 위로 올려놓았다.
“ 저건 정말… 가지고 가고 싶은데. ”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국정원에 잡히게 된다면 모든 소지품을 빼앗기게 될 텐데, 저 사진이 있다면 동우의 신변 또한 무사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잡혀도 저 하나만 잡혀야지, 이 사람들까지는 절대로 다치게 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그럴 각오로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니까.
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을 빼놨으면서도 막상 한 가지, 챙기는 것이 있었다.
“ 나도 참…. 별 수 없나봐. ”
어두운 방안에서도 빛이 나는,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무서운 물건. 성규가 자신을 위해 개조해준 총이었다. 무기 브로커는 그냥 무기 밀매만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김성규는 참으로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원하는 대로 총을 개조할 줄 아는.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호원의 손에 딱 맞는, 검은빛의 총을 개조해 품에 넣어줬다. 총에 들어갈 수 있는 탄환은 총 열 개.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이 열 개지, 사실은 세발의 탄환이 더 장착될 수 있는 총이다. 만약 적진의 누군가가 호원의 총을 빼앗아 탄환창을 본다면 그의 눈에는 딱 열 개의 탄환창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탄환창을 정확히 두 바퀴 반을 빙그르 돌리면 숨겨진 탄환 세 발이 나온다. 위급한 상황을 대비한 비상 탄환이나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누군가를 쏘기 위한 탄환이 아닌, 호원 자신을 위해 쓰라는 성규의 마음이 담긴 특별한 총이랄까.
잠시 사색에 잠겨있었더니 어느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린 호원은 다시 한 번 더 동우의 머리칼에 입술을 맞추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 금방… 끝내고 올게요. 울지 말고, 씩씩하게. ”
…나, 기다려주세요.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리고, 호원이 없어 쓸쓸한 공기가 감도는 방 안.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동우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실은 호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호원 그보다 더 불안했을 마음인데 어떻게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있을까. 그가 오늘 떠날 것이라는 것은 그냥 직감으로 알아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가 충분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연기를 했다. 곤히 잠든 연기를. 그렇지만 자는 척 하는 내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꾹꾹 참아내기를 반복했다. 특히나 호원이 제게 입을 맞출 땐, 그의 사랑이 뼈저리게 와 닿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한 것도 꾹 참아내었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그때는 정말 호원의 손을 붙들고 제발 가지 말라고,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으니 나만 보고, 나를 위해서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냐고 엉엉 울며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너무도 사랑하는 동생 우현과 성규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리고 호원이 이를 갈며 살아왔을 그 시간조차 자신이 붙잡는다고 치유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것 또한 꾹 참아내었다.
그렇게 호원을 보내고 나니 정말 마음이 너무 허해서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호원만 떠나면, 그가 이 방안에서 나가면 바로 눈물을 쏟아내겠다고, 눈물이라도 흘려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아서 그러려고 했는데 그럴 수조차 없어졌다.
마지막 호원의 말이 제 가슴에 너무도 깊숙이 박혀 들어서.
울지 말고,
씩씩하게.
나…
기다려주세요.
손이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세게 쥐고 눈물을 참았다. 이 눈물은… 호원이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흘려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호원이 돌아오면, 그가 저를 품에 안아주는 그때. 그때 흘릴 눈물이니까. 참고, 참고, 또 참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 강한 너를 닮아… 나도 강해질 거야. 꼭, 그럴 거야 호원아. ”
울지 않고 씩씩하게, 너만 기다릴게.
그러니까 너도, 울지 말고 씩씩하게.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알았지?
* * *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누워있던 우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옆에 누워있던 성규 또한 일어나 말없이 이불만 꾹 쥐고 있는 우현의 손을 잡아주었다.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동우뿐만이 아니다. 호원이 전쟁터로 가겠다고 선포한 이후 그 누구도 제대로 잠을 이룬 사람이 없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버릴 거라고 예상을 했으니까.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곤히 잠든 연기를 한 것이다. 아마 저와 성규뿐만 아니라 성종과 아란, 성열과 명수 모두 지금쯤 불안한 한숨만 내쉬고 있을 것이다.
“ 걱정돼? ”
고요한 새벽녘에 울리는 성규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조금은 진정되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두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어 본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까 싶어서.
말없이 그냥 성규를 제 품에 한가득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 위에 제 턱을 받치고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제 마음이 어떤지 알아챘는지 성규는 아무런 대꾸 없이 등을 어루만져주기만 했다. 마치, 네 탓이 아니야. 더 이상 모든 것을 네 탓으로 생각하지 마, 우현아….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 …성규야. ”
“ 응, 우현아. ”
“ …괜찮겠지? 아무 일, 없겠지? ”
만약 호원이 잘못 된다면 시티헌터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잃는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특히나 자신은… 성종과 동우에게 죄스러워 고개조차 들지 못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속에 무언가 와서 얹힌 듯 숨조차 쉴 수가 없어졌다.
“ 우현아, 솔직히 나는 모르겠어. 내가 신이 아닌 이상 호원이가 멀쩡하게 돌아올 거라고는 장담 못해. 하지만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게. ”
“ ………. ”
“ 호원이, 안 죽어. ”
확실하다며 말을 해오는 성규의 손조차 불안하게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불안해하는 저를 위해 필사적으로 제 자신의 불안함까지 숨기며 다독이려는 성규의 노력이었다. 그 노력에 우현은 그제 서야 불안함 따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의 침착하던 모습과는 달리 덜덜 떠는 성규의 손을 힘 있게 꽈악 잡아준 우현이 입 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었다.
“ 응. 이호원 안 죽어. ”
“ ………. ”
“ 그러니까 너도 무서워하지 마. 알았지? ”
그 말과 함께 성규를 있는 힘껏 제 품속으로 더 끌어안는 우현이었다.
우리 이호원에게 약속했잖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달려가겠다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잡히더라도, 절대로 혼자 죽게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어쩌면 이게 우리의 종착역일지도 몰라. 근데 참 이상하지? 복수조차 하지 못하고 끝날 종착역일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마음이 편한 건지 모르겠어. 오히려 복수에 성공했다고 상상했을 때보다 마음이 더 편하고 좋아.
나는 그냥 이대로… 모든 게 끝나버려도 좋을 것 같아.
성규 너와 이렇게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도 있고, 곁에는 든든한 우리 가족들이 있잖아. 동우형, 호원이, 성열이, 명수, 성종이, 아란이. 모두와 함께라면 나는 정말 이대로 모든 게 끝나버린다고 해도, 아무 것도 완성된 게 없다고 해도, 행복하게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너희를 만난 그 순간부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라. 평생을 죽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야하고, 시간이 지나도 내 곁에는 같은 아픔을 공유한 호원이와 성종이밖에 없을 것 같았어. 복수라는 것은 시도 조차 해보지 못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너희를 만나서 더 이상 숨어 지낼 필요도 없어졌고 예전의 내 모습을 찾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던 소속감. 따뜻한 가족의 정. 이제는 느낄 수 있어.
성규야, 어쩌면 나는 복수를 꿈꿔왔기 보다는… 이런 가족을 그리워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어느 순간 내 마음에 차있던 감정은 복수심이 아니라, 지독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싶어.
“ 성규야. ”
“ ………. ”
“ …사랑해. ”
처음 내뱉어본 진심이었다. 그 진심어린 한 마디로 인해, 두 눈 가득 눈물을 담는 너의 모습에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잊혀져갔다. 우리 많이 아프기도 아팠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 그러니까 이제는…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
“ …나도. ”
“ ………. ”
“ 나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우현아. ”
그래. 이거면 된 거다. 너와 내가 사랑을 하고, 너와 나의 곁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의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는 것. 그거면 정말 될 것 같았다.
눈물을 흘려 촉촉해진 너의 두 눈가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그렇게 한참동안을 너와 눈을 맞추다, 이내 너의 입술에 격정적으로 파고들었다. 사랑스러운 너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감쳐물기도 하고, 분위기에 취해 너의 입술이 열린 틈을 비집고 들어가 치열을 뜨겁게 쓸어내리기도 하며, 정신없이 타액을 섞고 서로를 느꼈다.
호흡이 부족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네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그런 너에게 다시 한 번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수줍어하지 않고 너 또한 적극적으로 내 목을 끌어안고 몸을 더 밀착시켰다. 서로가 서로에게 목말라하며 또 한 번의 입맞춤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네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와 같은 이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그것만큼 벅 차는 일이 또 있을까. 마지막으로, 너의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가져대는 그 순간, 눈물길을 타고 물줄기가 흘려 내렸다.
“ 사랑해. ”
성규 네가, 바로 내 마지막 종착지야.
* * *
국정원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호원이 들른 곳. 웬 납골당의 2개의 사진 앞에 선 호원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리고 꽉 문 입술은 터져 피가 흘렀다. 장례식이 끝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곳인데. 자신이 그 전쟁터로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이곳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원은 한참동안이나 입만 벙끗거릴 뿐, 도저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결심을 한 것인지 깊은 숨을 한 번 내뱉고는 마침내 잠긴 목소리를 내보는 호원이었다.
“ 왜… 나타났어요. 어째서, 내 꿈에 나타났어…? ”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저들을 등지고 떠나버린 친부모님들. 그들을 그리워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우현의 부모님이 그리워 몇 번 강가를 찾아간 적은 있어도 끝까지 제 부모가 있는 납골당에는 찾아온 적이 없었다. 생각나지도 않았고, 생각이 난다 하여도 죽어도 이곳에는 발걸음을 하기 싫었다.
괜찮을 줄 알았다. 정말로, 모든 것을 잊은 줄 알았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그런 말, 믿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믿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발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제 발이 저절로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 그것은, 지난 밤 아주 가볍게 잠들었던 자신의 꿈에 나타난 부모님의 모습 때문이었다. 나타나더라도 우현의 부모님이 올 줄 알았다. 절대로 제 부모님이 올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았다.
“ 왜 나타났어요. 갑자기 왜 나타나서…! 사람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어요. 왜…! ”
울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부모님의 눈물. 그것이 제 꿈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제 막 2살이 된 호원의 작은 손을 잡고, 갓 태어난 성종이를 끌어안고 행복하게 엉엉 우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으앙- 하고 울어대는 성종의 모습을 바라보며 너무 기쁘고 신비롭다는 듯이 울고 있는 제 어미와 아비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제 손보다 더 작은 아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해맑게 웃고 있는 제 모습까지.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제가 기억하는 부모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을 짐짝 취급하며 그냥 나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막말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 살아생전 나와 성종이… 단 한 번도 감싸준 적 없잖아요. 내가 기억하는 것에는, 그런 다정한 눈빛 같은 거 없었다고…! 그런데 왜 그래요. 왜 사실도 아닌 거짓을 내게 보여줬어요? 왜 이 중요한 날…! 나를, 흔들어요…. 왜…. ”
호원이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은 결국엔 제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호원은 여전히 원망스러운 얼굴로 제 부모님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다는 적개심이 많이 죽은 눈빛이었다.
“ 많이… 아팠어요. 당신의 그 주먹과 발길질.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것이었어요. 그리고, 많이… 부러웠어요. 학교 운동회 때 부모님이 도시락 싸서 응원 오는 친구들이. 언제든 달려가서 울 수 있는 엄마의 품이 있는 그 아이들이, 많이 부러웠어요. ”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제 부모의 사진을 쓸어본다. 엄지손가락으로 바득바득 문지르니, 새까만 먼지가 한 웅큼 묻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호원의 울음이 다시 한 번 터지고야 말았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한 데 뒤섞여 제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도대체 지금 저를 흔드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아빠와 엄마의 사진을 손으로 닦아 깨끗하게 만든 호원이, 그제 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을 넣어놓고 유리문을 다시 닫았다.
“ 우리한테 그렇게 몹쓸 짓을 하면서도, 조금은… 그래도 아주 조금은 당신들도 아팠을 거라 믿고 싶어요. ”
비록 우릴 두고 떠나간 당신들은 대답이 없지만, 오늘만큼은 믿고 싶었다. 당신들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커다란 짐으로 등에 지고, 그보다 더 큰 짐으로 느껴졌을 우리를 때리고 무관심 속에 방치하면서도, 조금의 눈물이라도 흘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살아서는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그곳에서나마 지켜주고 싶어서 내 꿈에 나온 거라고… 그렇게 믿어도,돼요? ”
참아보려 해도 한 번 터진 눈물은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 이미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호원은 결국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 우리 큰 아들…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다녀오라고… 기도해줄 거라고 생각,할게요…. ”
그리고는 한참동안이나 망설이다가 꺼낸 그 단어에, 거짓말처럼 가슴이 미친 듯 아려왔다.
나도 조금은…
보고 싶어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 * *
납골당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지만 아직은 여전히 모두가 잠든 새벽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린 호원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킬 것이다. 반드시 지키고야 말 것이다.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제 손으로 지켜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나갈 것이다.
“ 반드시, 우리 다시 보자. ”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옅은 미소를 띤 호원이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불안한 기운이 호원을 덮치듯 삼켰지만 이미 굳은 결심을 한 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서히 전쟁터로 가까워지는 호원의 등 뒤로,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듯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41 -
국정원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밤새 작업한 서류뭉치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여자 동료들도, 지금 막 임무가 주어졌는지 다급하게 총기를 점검하며 대충 눈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남자 동료들도. 모두가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단 한 명, 이호원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수년간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을 배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었나 보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조차 쉬기 힘든 것을 보면 말이다.
“ 안녕하세요, 선배님! ”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후배들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온다. 그에 씁쓸하게 웃으며 그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니 또 좋다고 해맑게 웃으며, 기나긴 복도를 저만치 뛰어간다. 점점 멀어지는 후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쥐고 입술을 꾹 물었다.
남우현도, 그리고 이호원도. 저런 새내기 시절이 있었는데.
잠깐 동안 회상에 잠기려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애써 생각을 떨쳐내는 호원의 어깨 위로 턱하니 손이 올려졌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자신과 꽤나 가깝게 지냈던 후배 지훈이 반갑다는 얼굴을 한 채 웃고 있었다.
“ 어? 선배! 이게 얼마만이에요? ”
“ 어, 어. 지훈아, 오랜만이네. ”
“ 선배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휴가는 잘 보내고 오셨어요? ”
지훈은 언제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저를 잘 따르는 예쁜 후배였다. 지훈을 보고 있으면 그 언젠가, 맑게 웃으며 호원 선배가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들던 병헌이 생각나 더 잘 챙겨주게 되었는데, 그것이 씨가 되어 지훈과는 벌써 이만큼이나 가까워진 사이가 되어버렸다. 잠시 동안 저의 목적을 잊은 채 반가운 마음을 가득 안고 지훈의 어깨를 툭툭 쳐주니 지훈이 곧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을 잔뜩 치다가, 이내 토끼같이 눈을 번뜩이며 호원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 아, 맞다! 선배 혹시 창선 선배랑 연락되세요? ”
“ …창선이? ”
“ 네. 아씨, 요 근래 들어 선배가 무슨 일이 있는지 너무 힘들어 하시 길래 얘기나 들어줄 겸 같이 술 한 잔 했거든요. 그런데 진짜 그 선배가 소주병을 거의 들이붓다 시피 마셔서 완전 간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서, 집까지 데려다드리려고 잠깐만 앉아있으라 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글쎄, ”
“ ………. ”
“ 사라진 거 있죠. ”
“ 그게 무슨 소리야? 사라지다니? ”
지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호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라지다니?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 그 다음날 중요한 간부회의가 있었는데 창선 선배가 안 나왔더라고요. 그 회의에 선배가 빠지면 안돼서… 전화도 해보고 집에도 찾아가 보고 별 짓을 다해봤는데, 글쎄 집에도 안 들어왔다는 거예요. 어머니도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던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
“………. ”
“ 그래서 전 당연히 호원 선배는 알고 있을 줄 알았죠. 선배님들은 특히나 더 각별했으니까요. 그래서 선배한테 전화도 했었는데, 없는 번호라고 하던데요? 번호 바꾸셨어요? ”
“ 어? …어. 얼마 전에 일이 있어서 번호를 바꾸긴 했지…. ”
아무래도 전에 쓰던 번호는 국정원 동료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노출이 많이 되어있어 훗날 위험해질 것을 감안해 얼마 전 다른 번호로 바꿨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 날 이후로 창선이 사라졌다면… 그는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 얼마나 됐어? 창선이가 사라진지. ”
“ 얼마나 됐더라? 한… 일주일 됐나? 아씨, 술 마시면서 술김에 H호텔 CCTV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사라져서 다 물거품 됐다니까요? ”
“ H호텔…. ”
“ 선배도 알죠? 그 엄청난 붕괴와 화재사고에도 불구하고 CCTV가 딱 하나 살아남은 거. 그걸 창선 선배만 봤다는데, 다 자기가 알아서 조사하고 상부에 보고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CCTV를 발견했다는 소리조차도 하지 말라고 하도 신신당부를 해서 일단 우리끼리는 쉬쉬하고 있는데, 가져간 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저희도 슬슬 불안해지는 거죠. 이 선배가 정말 무슨 짓을 하려고 CCTV같은 중요한 증거물을 보고하지 않는 것인지. ”
제 예감이 들어맞았다. 역시나 창선은 아직 CCTV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가 어째서인지는 호원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지만 일단은 창선에게 고마워해야하는 게 맞는 것일 거다. 만약 창선이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면 자신은 국정원에 출입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째서 창선은 그 중요한 것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을까.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것은 아니다. 창선은 이미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었다. 알아서 자백하라고, 남우현의 생존 사실을 국가에게 보고하라고. 하지만 그 기회를 버린 것은 자신이었고, 창선은 두 번 다시 저를 위한 아량을 베풀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어째서 아직도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일까.
“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선배는 오늘 회의 참석 안하시는 거죠? ”
“ 어, 맞아. 나는 잠깐 물건 좀 찾으러 왔어. ”
“ 물건이요? 어떤 거요? ”
지훈의 물음에, 호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얼른 가보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에 입술을 비죽 내민 지훈이 곧 다시 맑게 웃어 보이며, 다음에 또 봬요 선배! 하고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가 떠나고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답답한 숨만 몰아쉬고 있을 때, 그의 정신을 단번에 깨워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삐익-.
저에게만 들릴 정도의 굉장히 작은 기계음이었다. 지금 현재 자신이 서있는 이 복도는 개미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을 정도의 적막한 공간이여서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만한 아주 작은 소리였다. 왠지 그 소리가 자신의 자켓 안쪽에서 나는 것만 같아, 옷 구석구석을 뒤적이던 호원의 손이 멈춘 것은, 성규가 개조해준 총이 들어있는 가장 안쪽의 주머니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가 없는지 확실히 확인하고 총을 꺼내자, 총체의 가장 밑쪽에 살구색의 익숙한 것이 붙어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이것은 저번 H호텔 사건 때 성열과 성종이 직접 개발했던 그 최첨단 인이어였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호원이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칸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화장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스티커를 떼어 귀 밑에 붙이자마자 다급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호원이 형! 제 말 들려요?
“ 성열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
- 하, 다행이다. 버리지 않고 받아줘서. 형이 그거 발견하자마자 버릴까봐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알아요?
“ 이성열. 이거 뭐냐고 물었어. ”
- 다 설명할 테니까 그렇게 목소리 깔고 말하지 마요…. 무섭잖아요.
“ …알았으니까, 설명해봐. 어떻게 된 일인지. ”
호원은 너무 당황스러운 이 상황에,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심호흡을 했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고, 문 또한 걸어 잠궜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쿵쿵 뛰며 제 속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 아무래도 형 혼자서 하기엔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제 마음대로 형의 계획에 뛰어들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제가 형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그래도 나름 실력 있다고 자부하는 해컨대…. 그냥 형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 …성열아. ”
- 알아요. 이런 일에는 평소 형의 패턴에 빠삭한 성종이가 더 제격일 거라는 거. 그런데 성종이는 안 되는 거, 형이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그리고 혹시나 절 걱정하는 거라면 그건 괜찮아요. 지금 형이 붙이고 있는 그 인이어는 저번 H호텔 때 사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제가 새로 개발한 거거든요.
“ 뭐…? 개발? ”
- 네. 그 인이어는 말 그대로 1회용이에요. 제 쪽에서 먼저 교신을 끊거나 형이 그 인이어를 귀에서 떼어버리는 순간 체온 감지를 통해서 그대로 회로가 자폭해요. 절대로 역추적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놨어요. 그러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말아요, 형.
성열의 말에, 그나마 조금 안심되는 듯 차마 내뱉지 못했던 숨을 그제 서야 시원하게 뱉어보는 호원이다. 성열이 도와준다면야 자신이 혼자 처리하는 것보다 시간도 대폭 벌 수 있을뿐더러 성공확률 또한 올라간다. 그렇지만 자신의 복수를 위해 성열을 이용하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불편하다.
- 형.
" ………. "
- 부탁이에요. 형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 성열아, 이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야. 너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 아주 작은 꼬리라도 잡히면 나 하나로 죽는 거? 그걸로 끝날 것 같아? 네가 아직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모를 수도 있어. 그런데 죽음이라는 거, 그건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 ”
- 단 한 번도 쉽게 생각한 적 없어요!
“ ………. ”
- 물론, 나 단 한 번도 현장에서 뛰어본 적 없고, 그럴 강심장 가지고 있는 얘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로 남의 뒤나 캘 줄 알았지, 누군가의 앞에 대놓고 나서서 따질 줄 아는 그런 애 아니었어요. 그런데요 형, 죽음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쉽게 생각한 적 없어요. 나, 얼마 전까지만 명수를 통해서 그 공포감을 절실히 느꼈던 애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집에서 기다려야만 했던 내 고통… 그걸 형이 알아요? 그것도 나 때문에 납치되었는데, 정작 명수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요! 그런 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내 자신, 더 이상은 겪고 싶지 않아요. 형, 잘못돼도 좋아요. 형 때문에 어떻게 돼도 나는 절대로 형 원망하지 않아요. 형이 그랬잖아요. 우리 가족이라고. 가족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 쓰고 발버둥 치는 거. 그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번에는 내가 형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 할 테니까, 형은 제발 형 자신을 좀 생각해요. 언제까지 우현이 형만 보고 살 거예요. 형 자신을 생각해요. 형과 성종이, 그리고… 우리 동우 형도 좀 봐줘요. “
성열의 말에는 간절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다짐. 결의. 그리고…제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희생정신. 진심 어린 말에 호원은 그간 자신이 성열을 너무도 어리게 봐왔다고 생각을 했다.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저 여린 속으로 그간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성열의 마지막 말….
제발 자신을 위해서 살라는 말.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깊숙이 와 박혀버렸다.
- 형. 시간이 없잖아요. 저 도와도 되는 거죠? ”
“ …그래. 고맙다, 이성열. ”
‘고맙다’ 라는 단 세 글자에서 느껴지는 호원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아, 성열은 울컥한 마음을 애써 꾹 누르고 땀이 차오르는 손바닥을 제 바지에 한 번 슥 문질러 닦은 후 목소리를 내었다.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형의 계획을 알아야 도와주죠.
“ 혹시, 지금 국정원 내부 CCTV 보고 있어? ”
- 네. 아까부터 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 그래. 네가 보는 대로 지금 이곳에는 사람들이 매우 적어. 그 이유는, 오늘이 바로 입사 6개월 차부터 각 팀의 팀장들은 물론 최정예 요원들까지 모두 모여 회의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야. 이 회의는 2주에 한 번씩, 그리고 최소 2시간에서 최대 4시간까지도 소요되는 중요한 자리야. 그래서 그나마 보안이 약할 거라고 생각해서 이 날로 결정을 한 거고. ”
2주에 한 번씩 하게 되는 이 회의는, 국정원 내부에서 아주 중요한 날로 정해진지 오래였다. 중요한 임무를 하고 있거나, 혹은 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웬만해서는 임무 도중에도 참석해야만 하는 회의였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안이 허술해진 국정원은 당연히 잠입도 쉬울 것이다. 저음으로 나직하게 말해오는 호원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성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내 의문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 형, 그런데 그 수많은 자료 중에 도대체 우현이 형의 자료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요? 제가 듣기론 기밀자료들은 년도, 사건 이름의 첫 자음, 그리고 기밀등급까지 종합해서 넘버를 매긴다고 들었어요.
“ 그건 걱정하지 마. 1년 전 악몽의 사건파일 넘버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
1년 전의 악몽. 목숨보다 소중했던 친구를 한 명의 사망자로 만든 것도, 모든 일의 뒤처리를 하고 다녔던 게 호원 저 자신이었으니까 모를 리가 없다. 다시 떠오르는 그 고통에 호원이 이를 악 물며 주먹을 곽 쥐었다. 이번엔 반드시, 죽는 한이 있어도 성공해야만 한다. 다시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리고 우현과 저 자신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도록 제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이다.
- 제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죠?
“ 일단 성열이 네가 도와줘야 할 일 중에 가장 기본적인 건 CCTV 조작. 국정원 내부에 CCTV를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는 없어. 보안팀 멤버들은 이곳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기밀자료열람실로 발을 들이는 게 화면에 잡히는 그 순간, 비상경보가 울리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게임은 쉽게 끝난다고 보면 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 만약에 비상경보가 울린다고 쳐도, 회의실 자체가 반대편 건물에 있기 때문에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나 소요돼. 때문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엔 나는 이미 그곳으로 들어간 후겠지. 그곳의 문은 지문인식을 통해 열리게 되어있어. 하지만 모든 사람의 지문이 통과되는 건 아니야. 만약 그곳으로 들어가야 할 일이 있다면 사전에 보안팀 쪽에 보고를 한 뒤에 지문을 입력해달라고 요청 해야만 하지. 그 누구의 검사도 필요 없이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각 팀의 팀장들,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직위의 사람들뿐이지. ”
- 형, 혹시 그럼….
“ 그래 맞아.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우리 팀장의 지문을 미리 체취 해놓은 상태야. 조만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늘 생각했었거든. 난 팀장의 지문을 이용해서 그곳으로 잠입을 할 거고, 들어가자마자 문 안 쪽의 잠금 버튼으로 문을 잠굴 거야. 안에서 문을 잠그게 되면 비상경보가 울리는 건 물론, 바깥쪽에서는 마스터키로 열 수밖에 없는데, 성열이 네가 최종으로 날 도울 수 있는 게 바로 여기야. 비상경보가 울리는 것을 해킹으로는 막을 수가 없을 테니 그들이 경보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달려와 마스터키로 문을 열려고 하면, 네가 지문인식 기기의 코드를 입력해 그 안의 회로장치들을 최대한으로 망가뜨려주면 돼. 성열이 네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국정원 쪽의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들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복구하려고 할 테니 오래 버티지 못 할 수도 있어. 네가 그들과 싸워주는 동안 난 최대한으로 자료를 빼내도록 할 거야. ”
- 잠시만요, 형. 그래요. 내가 최대한으로 버틴다고 쳐요. 하지만 그 후에 탈출은요? 그 뒤에는…!
금세 울먹이는 성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원은 천천히 화장실에서 나와 기밀자료 열람실 쪽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모 아니면 도. 성공 아니면, 죽음. 애초에 죽음 쪽을 더 염두에 두고 온 터라 큰 두려움은 없다. 단지, 갑자기 자신의 계획에 합류하게 된 성열이 혹여나 죄책감이라도 가지게 될까봐 걱정스런 마음이 들 뿐.
“ 성열아. 애초부터 나는…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 따위 해본 적 없어. ”
- 형, 안 돼요. 형이 죽으면 우리는, 우현이 형은요? 동우 형은 어쩌라고요!
“ 그치만, 살기 위해 최대한으로 발버둥 쳐볼 생각이야. 그래, 네가 말하는 우리 가족과 남우현. 그리고… 동우 형을 생각해서. ”
발걸음이 멈추어 섰다. 호원은 제 눈앞에 보이는 웅장한 문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미리 체취해둔 코팅지를 꺼내어 지문인식 기기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쉽게 열려버리는 커다란 문. 이렇게 쉽게 열 수 있는 것을, 그 동안 무엇 때문에 이리도 뜸을 들이며 시간을 지체한 것인지 저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발을 들인 곳. 이제 이곳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저가 이기든, 아니면 모든 것이 묵살된 채 그들이 승리자의 자리에 앉든. 한 치 앞의 결과도 내다볼 수 없었지만 물러날 마음 따위는 없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달아나는 게, 가장 비겁한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울먹이는 소리를 내면서도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성열이 이미 일을 시작한 것 같았다. 호원은 그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인이어 쪽으로 손을 뻗을 채 목소리를 내었다.
“ 성열아. 나 부탁이 있다. ”
- 아니요. 말하지 마요. 그 부탁, 안 들어줄 거니까 말 하지 말라고요!
“ 나 네 말대로… 지난 1년간,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는 놈이야. 오로지 나는, 너무도 위태로운 내 친구 남우현만을 위해서 살았어. 난 그 선택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해본 적 없어. 그런데 말이다…. 이제 그 녀석은 많이 자랐으니까. 그리고 그 옆은 이제 김성규가 지키고 있으니까… ”
- 호원이 형. 안돼요. 제발. 제발 그러지 마요….
“ 이제는 나도… 날 위해서 살아보고 싶어졌어. ”
- 으흑…. 할 수 있어요. 왜 안돼요. 하면 되잖아!
“ 응. 그러려고. 나… 그렇게 살 거야. 그러니까 성열아. ”
울부짖는 성열의 목소리가 꽤나 크다. 시간을 더 끌었다간 다른 아이들이 눈치 채고 성열의 방으로 모일 지도 모른다. 호원은 최대한 빨리 끝내자고 마음을 먹으며 다시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 우리 동우 형…. 그리고 성종이, 부탁…해. ”
- 혀엉…. 제발 그러지 마요. 아아….
“ 나 그 동안 동우 형한테 해준 게 너무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난 형에게 못된 놈일 거야. 성열아, 나는 동우 형이 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내가 만약 많이 다쳐서 돌아가게 된다면…. ”
- 말,하지 마요…. 제발. 안 들을 거니까, 제발, 형…!
………해줘. 알았지? 부탁해, 성열아. 부탁한다. 제발, 제발….
그 말을 끝으로, 호원은 귀에서 인이어를 떼어 그대로 구겨서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로 제 옆에 있는 잠금 스위치를 눌렀다. 성열이 도저히 참지 못한 울음을 터뜨림과 통시에,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렸다.
* * *
문이 닫히고 외부와 차단되자마자 싸늘한 적막만이 제 주위를 휘감았다. 비상 경보음을 듣고 최대한 빨리 달려온다고 쳐도 10분. 그리고 성열이 프로그래머들과 상대할 수 있는 시간은 어림잡아 30분. 혹은 그보다 더 줄어들 수도 있는 터. 최소 30분 이내에는 모든 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만 한다. 모두를 위해서.
“ 사건넘버, TW10259887H…. ”
대형 도서관과는 차원이 다른 정도의 커다한 책장들이 수백 대 놓여 있고, 그 책장에는 보통 CD케이스 만한 크기의 검은색 상자가 수천 개씩 꽂혀있다. 그 케이스들의 밑에는 각 사건의 넘버가 적혀있으며, 겉모습은 일반 플라스틱과 별 차이 없지만,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태우거나 부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케이스를 꺼내면 그 상단에 바로 전자 자판이 나타나는데, 그쪽에 사건넘버를 거꾸로 입력하기만 하면 케이스는 쉽게 열리게 되어있다. 즉, 우현의 사건넘버를 거꾸로 하게 되면, H78895201WT이 되는 것이다. 호원이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스레 자판을 입력했다.
삐익-.
케이스가 열리는 소리가 나고, 안에 들어있는 USB를 꺼내려 손을 뻗는 그 순간, 호원은 제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두 눈을 조심스레 다시 한 번 감았다 떴다.
“ 이게, 뭐야…. ”
케이스 안에는 그토록 찾던 USB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USB가 있던 자리가 움푹하게 패어있기만 하고, 자신이 찾는 그 물건은 어디에도 없었다.
“ 말도 안 돼. ”
국가기밀자료 열람실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은 절대 외부로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되어있다. 꼭 찾아야만 하는 파일이라면 USB만 찾아, 책장 너머에 구비되어 있는 수 십대의 컴퓨터로 즉시 확인 후 빠져나가는 것이 원칙이니까. USB를 들고 출입문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그쪽의 전자회로가 USB의 코드번호를 감지해, 안에서는 문이 절대로 열리지 않아 나가지 못하도록 시스템화 되어있으니까.
호원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USB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곧 죽어도 USB는 외부로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되어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곳에는 물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역시….
“ …하, 역시나. ”
그가 이곳에 있다.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한 그였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그건 바로….
“ ……너구나. ”
나직하게 내뱉은 그 목소리 뒤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이윽고 호원의 앞에 나타난 익숙한 인영.
“ 혹시, 이걸 찾아? ”
제가 그토록이나 찾던 물건을 손에 쥔 채, 아무런 표정도 없는 채로 서있는 사람. 제가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했으며, 가장 미안하게 생각했던, 언제나 저의 파트너로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제 패턴을 빠삭하게 읽고 있는 사람.
“ ……이창선. ”
이창선. 그가 호원의 앞에 서있었다.
아군이 아닌, 적군이 되어.
* * *
“ 이창선. 그거 당장 이리 줘. ”
“ 이호원. 난 분명히 경고했었어. 거기서 멈추라고. 이 사건은, 너희 팀 모두의 종말이 될 거야. ”
“ 이창선!!! ”
“ 이게 갖고 싶어? 이게 그렇게도 소중해서, 네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그래!? 좋아. 이게 너에게 그렇게도 필요하다면, 줄게. 어디 한 번 뺏어 가봐. 날 쓰러뜨려 보라고. ”
손에 쥐고 있는 USB를 제 주머니에 넣고는, 호원이 준비할 새도 없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케이스를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공격을 시작한 창선에게 케이스로 머리를 가격당한 호원이, 쓰러지지 않으려 책장을 잡고 간신히 버텨내었다. 하지만 곧이어 제 복부를 가격해오는 창선 탓에, 잔기침을 하며 결국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창선이 그대로 호원의 위로 올라타 그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 이호원, 너 뭐 하는 거야. 제대로 싸워. 봐주지 말고 덤비라고!! ”
“ 하윽…. U,SB 돌려줘. 창선아, 제,발. ”
“ 갖고 싶어? 갖고 싶으면 날 이기라고 했지. 이곳에서 쓰러지면 넌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국정원에 그대로 잡히고 말 거야. 그리고 넌! 절대로 살아 돌아가지 못하겠지. ”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죽게 된다.
창선의 그 말을 들은 순간, 호원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반드시 살아서 보자는 우현과, 형을 믿고 기다리겠다는 제 동생 성종의 목소리. 그리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끝까지 웃으며 저를 보내주려 했던 애절한 동우의 노력.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성열과도 약속했다. 반드시, 살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라고.
순간, 호원이 놀라운 정도의 힘을 발휘해 제 위에 올라타 주먹질을 하던 창선의 주먹을 그대로 잡아채었다. 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한 창선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호원이 그대로 창선의 복부를 팔꿈치로 가격한 뒤 간신히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 …쿨럭! 하으…. ”
하지만 아까 창선에게 맞은 복부가 잘못 된 것인지 계속해서 피가 섞인 기침이 나왔다. 그의 아래에서 맞은 것도 타격이 꽤나 커서 머리가 어질어질 했지만, 이제부터는 정신력 싸움이었다. 호원은 잠시 동안 책장을 잡고 중심을 잡다가, 이내 비틀거리는 창선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 그의 턱을 가격한 뒤, 그대로 팔꿈치로 다시 한 번 복부를 가격했다. 연이어 복부를 가격당한 창선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이윽고 USB를 뺏기 위해 다시 한 번 달려드는 호원의 모습을 보며 제 바로 옆에 꽂혀있는 케이스를 꺼내어 들어 그대로 몸을 숙이고 들어가, 모서리 쪽으로 호원의 옆구리를 스치듯 베고 지나갔다.
“ 아흑…. ”
뚝, 뚜욱-.
호원의 옆구리를 타고 굵직한 핏방울이 떨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차라리 날카로운 칼에 베이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케이스의 모서리에 베인 것은 살갗이 엉망으로 찢겨져 나가는 고통이여서, 간신히 벽을 잡고 서있는 호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하지만 이 정도에 무너질 것이었다면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터. 잠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USB가 잘 있는지 확인을 하던 창선의 틈새를 노린 호원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을 꺼내어 들어 총체로 그대로 그의 머리를 가격하고, 비틀대는 창선의 어깨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무릎으로 턱을 가격했다. 그리고는 바로 그의 위에 올라타 양 무릎으로 그의 팔을 누르고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봉쇄하였다. 차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창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의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어 USB를 잡는 그 순간,
“ 으윽! ”
전체적으로는 팔을 움직이기 힘들지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손목을 이용한 창선이 제 바지주머니에 있던 단도를 꺼내어 그대로 호원의 허벅지를 찔렀다. 덕분에 그대로 옆으로 넘어지는 호원의 찢어진 옆구리를 발로 한 번 걷어 찬 창선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호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USB를 꺼내어 들었다.
“ 이호원. 내가 왜 이렇게까지 널 막는지, 궁금하지 않아? ”
“ 하아…. 우윽. ”
“ 네가 목숨을 걸고 이 일을 성사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듯이, 나 또한 목숨을 걸고 널 막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
“ …이,창선……. ”
“ 이깟 USB? 이게 그렇게 갖고 싶어? 자, 줄게. 한 번 가져가봐. ”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서서히 감기던 호원의 눈이 커다래진 건 그 순간이었다. 창선이 손에 쥐고 있던 USB를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뜨린 것. 그리고, 호원이 그것을 잡으려 팔을 뻗어 USB를 제 손 안에 가둔 그 순간,
“ 으아아악!!! ”
창선이 호원의 손을 그대로 짓밟아 뭉갰다. 우두둑, 손가락뼈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울렸다. 호원이 피가 나도록 제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들어 올려 창선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제 손을 밟고 있는 창선의 얼굴이, 저의 얼굴보다 아파보이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 이,창선. 너 도대체, 왜…그러는 거야! ”
“ ………. ”
호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창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슬픈 얼굴로, 뼈가 으스러져 힘을 줄 수도 없는 호원의 손 아래로 제 손을 집어넣어 USB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란 호원이 제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제 발로 USB를 밟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 아, 안 돼. 이창선!!!! ”
이미 산산조각 나다못해 가루가 되어버린 USB를 앞에 두고 울부짖는 호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창선이, 이내 제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어 그의 이마에 겨누었다.
“ 호원아. 저 USB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 ”
“ 너, 너. 지금 뭐한 거야. 네가…. 네가 어떻게!! ”
“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내가, 모든 진실을 알려줄게. ”
“ …뭐? 너, 그게 대체 무슨…. ”
창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든 진실을 말해주겠다니. 도대체 창선이 무엇을 어찌 알고 알려주겠다는 말인가…? 호원이 떨리는 동공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채, 저를 겨누고 있는 팔마저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려고 입술을 떼었을 때, 마치 자신의 말부터 들으라는 듯 서둘러 목소리를 내는 창선이었다.
“ …처음엔 동경이었어. 나이는 같은데 뛰어난 두뇌와 정확한 상황 판단력으로 어린 나이에 팀장이란 직위를 단 남우현과, 두뇌보단 몸을 쓰는 육탄전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지만 언제나 그 뒤에는 승률 99프로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지. 승진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그저 남우현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소탈한 인간 이호원을, 나는 동경했어. ”
“ ………. ”
“ 겉으로는 우정이라는 막을 씌워놓고, 속으로는 부러움을 넘어서서 소름끼치는 질투를 하고 있던 거야, 나는. ”
“ …창선아. ”
“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너희들과 같은 자리에 올라서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어. 그런데, 그랬던 감정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랑으로 변해있더라. 내 친구 이호원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호원으로.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응? 창선아, 왜 그래….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낸 호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창선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만 흘렸다. 이내 그에게서 겨누고 있던 총을 천천히 내리고, 탄식이 섞인 헛웃음을 뱉으며 다시 이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 그래서 되게 괴로웠어.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해야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는 그 자체가. 그저 그 임무를 받은 것만으로도 내 자신이 역겹고, 괴물 같고 소름끼쳤어. 근데 있지, 호원아. 어떤 결정을 내리건, 내겐 똑같은 지옥이 펼쳐질 뿐이더라. 그걸 알고 나에게 그런 임무를 준 거야, 국가는. 그래, 네가 저번에 그랬지. 국정원이 겉만 번지르르한 정의로운 곳이 아닌 걸 알지 않느냐고. 그걸 가장 처음으로 느꼈던 게 나였어. 한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은폐하려는 더러운 국가. 그걸 가장 처음으로 알게 된 게 나라고. 알아들어? ”
“ 그만,해…. ”
“ 내겐 선택권조차 없었어. 내가 그 임무를 거절하는 순간, 우리 엄마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거든.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내가, 내가…! ”
“ 그 입 닥쳐, 이창선!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이것도 위에서 시킨 거지? 이렇게 말하면 이호원이 적당히 속아 넘어갈 테니 그렇게 말하라고 지시 받았어? 너 왜 그래. 왜 없는 말을 지어 내고…! ”
“ 차라리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 네 말대로 이 모든 게, 내가 과거에 저질렀던 이 실수들이 모두 꿈이고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곧이어 창선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될 모든 진실이 너무도 두려워서, 들을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릴 텐데. 아니면, 제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면 저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짧은 시간 안에 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답이 나오질 않는다. 도저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누구도 알려주질 않는다. 귀를 막아보아도 들리고, 일부러 제 상처를 꾸욱 짓누르며 출혈을 유도해보아도 이상하게도 정신은 더 맑아질 뿐, 흐릿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 이호원. 너도 알지.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너와 남우현 같은 작전요원이 아니었어. 폭탄 전문 처리반. 그게 바로 내 주요 임무였지. ”
“ 하으윽…. 제발, 창선아. 하지 마.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마…!! ”
“ 1년 전의 그 날, 남우현의 가족과 남우현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잖아. 그건 바로…. ”
“ 제발! 그 입 좀 닥쳐! 아아악!!! ”
……시한폭탄. 차에 폭탄을 설치해 남우현의 가족을 몰살한 것도, 남우현의 차에 폭탄을 설치해 증거도 없이 모두 태워 없애버리려고 한 것도, 모두가…… 내 짓이라고. 내가…! 모두를, 죽였,다고…!!
“ 흐으…. 아아…. 아아아, 거,거짓말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
호원이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안 그래도 깊게 베인 옆구리의 상처가 더 길게 찢어져 많은 양의 피를 분출해내었다. 이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사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호원은 그저 제 귀를 막은 채 울부짖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호원을 바라보며, 창선 또한 그와 앞에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문을 열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국정원 요원들이 드디어 성열의 해킹을 잡아내고 문을 열었는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와 모두 호원에게 총을 겨누었다. 두 사람은 호원의 양 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해 놓고, 다친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냥 그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거칠게 다루는 요원들 때문에 호원은 피가 섞인 기침을 하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붙잡힌 후에야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호원은 마지막으로 정신을 놓기 전,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는 창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집에서 목 빠지게 저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을 우현을 생각했다.
우현아, 어떡하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 건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며 나는 누구를 따라가야 맞는 것인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 너라면 달랐을까. 너라면, 이 상황에서 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나는, 못하겠어.
요원들의 손에 붙잡혀 끌려가던 호원의 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이 끔찍한 지옥에서… 도저히 난 살아나갈 자신이 없,어….
미안하다. 미안해, 남우현….
- 42 - (창선 번외)
창선의 어머니는, 아주 어렸을 적 사고로 부모를 잃은 가엾은 고아였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하지만 은연중에 부모의 사랑을 매우 갈구하고 그리워하는 소녀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제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고아원에서 독립을 하겠다며, 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녀는 제가 아주 잘 살 수 있는 거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 고작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였고, 그 어디도 어린 중학생 아이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는, 몸을 파는 것. 어린 소녀의 철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다 어느덧 저도 모르게 어린 생명을 배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무섭기도 했지만, 저와 이어져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생에 처음으로 가족이 생겼다는 감격스러움과 반드시 이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모성애가 서서히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워낙에 말랐던 그녀라, 초반 몇 달은 복대를 하며 숨길 수 있었지만 같은 여자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챈 창녀촌의 마담은 그녀에게 당장 아이를 지우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울며 매달렸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씨앗이지만 절대로 지울 수 없다고. 처음 생겨난 나의 가족이고, 내 생명인 이 아이를 죽게 할 수 없다고.
그녀의 눈물겨운 부탁에, 마담은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빚까지 갚으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임신한 여자를 이곳에서 데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썩 나가라고 쫓아냈다.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맨 몸으로 쫓겨난 그녀가 찾아갈 수 있는 곳이라곤, 저를 친 딸처럼 보듬어 주었던 고아원뿐이었다. 그 당시 그녀의 나이, 겨우 열일곱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사회로 나갔던 딸 같은 아이가 불러온 배를 안고 초라한 행색으로 찾아오자, 고아원장 부부는 매우 놀랐지만 이내 제발 저와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어린 생명을 거두어달라는 애절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어 고아원 옆의 작은 방을 내주었다. 난방은 무론, 환기조차 되지 않아 거의 창고 같은 방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무거운 몸을 한 채 낮에는 고아원의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에는 제 뱃속의 아이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었다.
꼬박 열 달을 채우고 태어난 아이는 그녀에게 매우 영롱한 보석이었다. 그 어느 누군가가 수백억, 수천억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그녀는 더더욱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리하여 굳이 시키지 않은 일까지 제가 도맡아 해가며 고아원의 아이들을 제 아이와 마찬가지로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알아준 원장의 부부도, 많지는 않지만 적당한 보수를 주며 그녀를 정식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제가 컸을 즈음, 그녀에게는 뜻하지 않은 사랑도 찾아왔다. 박선호라는 남자는 최연소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외모도 수려하고 능력은 말 할 것도 없이 뛰어나며, 인성마저도 우월했다. 보여주기 식으로만 봉사를 하는 다른 정치가들과는 달리 그는 제 스스로 2주에 한 번씩 고아원을 찾아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좋아하는 소탈한 남자였다. 제 뜻이 언론을 통해 가식으로 비쳐지는 것이 싫으니 봉사에 대한 일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떠들지 말라며 입막음을 하던 남자였다. 그는 나의 어머니를 보고 첫눈에 반한 듯 했다. 물론 아이들을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느 덧 그녀를 보기 위해 더 자주 고아원을 찾아오곤 했으니까. 처음엔 저와 맞지 않는 상대라며 피하던 그녀조차도 서서히 그의 진심을 알아주며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소소한 행복이 지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행은 늘 예기치 못한 시점에서 찾아오는 법이었다.
* * *
“ 아, 안 돼요. 이거 놔요! ”
“ 엄마!! ”
“ 창선아! ”
여느 때처럼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먹일 한 달 치 간식을 사러 마트로 간 그녀는 그간 보지도 못했던, 잊고 싶었던 시절의 창녀촌 마담의 눈에 다시 띄게 되었다. 창선이 열다섯의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서른한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나이뿐만 아니라 외모도 여전히 아름답고 충분히 어려 보였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녀의 외모를 보자마자 다시 욕심이 생긴 마담은, 그녀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그리고는 지난 번의 빚을 갚아야하지 않겠냐며 막무가내로 그녀를 창녀촌으로 다시 끌고 들어왔다. 제 엄마를 지키기 위해 함께 그곳으로 따라 들어간 창선은 매일 밤을 울며 저를 끌어안고 미안하다 속삭이는 제 엄마의 품에서 하루하루 다짐했다.
반드시, 성공해서, 이 시궁창을 빠져나가리라.
제 엄마가 울며불며 가기 싫다고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 없었다. 그저 엄마를 끌고 가려는 덩치 큰 아저씨들을 막아서는 것밖엔. 하지만 그것마저도 금방 그들의 힘에 의해 제지되고는 했다. 저를 때리는 그 무지막지한 주먹과 발길질을 모조리 막아주는 것은 결국엔 또 자신의 엄마였다. 고작 열다섯의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엄마를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이 매우 원망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녀를 두고 도망칠 바엔, 함께 죽는 것이 나았다.
‘ 미안해, 창선아…. 엄마가, 엄마가 겨우 이거밖에 안 되는 여자라서, 너 하나 지킬 수도 없는 나약한 엄마라서, 미안해. 미안해 우리 아가…. ’
온 몸에 멍이든 채로 저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던 제 엄마가 한 말이 아직까지도 창선에게는, 잊혀 지지 않는, 끔찍하게도 슬픈 기억 중 하나이다. 그 당시 목소리가 어땠는지, 간신히 내쉬고 있는 그녀의 숨소리가 얼마나 큰 슬픔에 젖어있었는지 조차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아픔은, 말 그대로 암흑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역시 신이라는 것이 존재는 했던 건지, 너무도 힘들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이 찾아와 우리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 이제 모두 다 괜찮아요. 내가 지켜줄게요. 당신과, 당신의 아이를 내가 지켜낼 겁니다. ’
박선호. 그 남자는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던 모자에게 구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갑자기 사라진 저의 여자를 찾기 위해 수소문 끝에 알게 된 모든 진실. 하지만 그녀의 암울한 과거를 모두 다 덮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했기에, 그는 모든 걸 던져 그녀의 빚을 갚고 그녀와 그녀의 아이까지 책임지기로 결심을 했다.
‘ 나 이제 가진 것도 별로 없고, 다시 밑바닥부터 힘들게 시작해야 될지도 몰라요. 당신과 당신 아이까지 책임지기에는 많이 모자란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모진 시련 다 견디고, 당신과, 이제는 내 아이가 될 창선이까지 모두 책임지고 싶어요. 그만큼,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와… 결혼해주지 않을래요? ’
구원. 그래, 말 그대로 구원과도 같은 그의 손을, 그녀가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창선 또한 그라면 제 엄마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와 결혼을 한 뒤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풀렸다. 모든 우려와는 다르게 그는 승승장구하며 저를 서포터해주는 많은 정치가 선배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능력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에 걸 맞는 근사한 아들이 되기 위해 창선 또한 피나는 노력을 했다. 학원이며 과외까지 모두 뒷받침 해주겠다는 선호의 호의도 거절하고 오로지 제 힘만으로 국정원에 입사했다. 물론,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알리면 안 되는 것이 저의 신분이기 때문에, 창선의 가족은 그가 국정원에 입사한 것을 몰랐지만 우리나라에서 난다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하는 창선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서서히 시들어가던 제 어미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이제는 울지 않게 되었다. 창선은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모두 제 것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행복했던 무렵, 그에게는 사랑도 찾아왔다.
“ 여어- 이창선, 오늘도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콜? ”
“ 좋지. 우현이도 가는 거지? ”
“ 글쎄다? 남우현 그 놈은 혼자만 바쁜 척 하고 말이야. 아무리 팀장이여도 그렇지, 이렇게나 좋은 친구를 버려놓고 일에만 빠져있으니, 원. 재미가 없는 놈이야, 그 새끼는. ”
“ 풉. 이호원 지금 너 스스로를 좋은 친구라고 칭한 거냐? ”
“ 아, 왜! 아니야? ”
처음엔 그저 좋은 친구였다. 배울 점이 많은 동료. 그리고, 평생을 의지하며 함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친구. 호원뿐만 아니라 우현도 제게는 참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우정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편이었다. 어떤 일이건 척척 해내는 그가 참으로 부러웠던 적이 많았다.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팀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고, 모든 팀원들의 신뢰도 얻고 있을 만큼 인성 또한 훌륭했다. 제가 보는 남 우현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완벽한 인재였다.
반대로 호원은 우현과 마찬가지로 동경하는 부분도 있었으나, 그것보다는 좋은 친구에 가까웠다. 워낙에 장난스럽기도 하고 센스 있는 탓에,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선배들의 호통에도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밉지 않게 피해가기도 하고,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되도 않는 장난을 치며 사기를 북돋아준다거나, 오늘처럼 술이 당기는 친구에겐, 어떻게 알아채고는 센스 있게 먼저 약속을 잡아준다거나. 남우현이 모든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라면, 이호원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남우현에게 섭섭한 일이 있거나, 깨진 날이라면 동료들은 어김없이 호원을 찾아와 그의 뒷담화를 했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원은 남우현 욕하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하는 소탈한 인간이었으니까.
“ 야, 그나저나 이번 승진 명단에 너도 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
“ 아아, 그거. 난 싫다는데 왜 자꾸 넣는지 모르겠다. 야, 솔직히 말해서 남우현 쟤만 봐도 일에 파묻혀 사는 게 보이잖냐. 난 절대로 저렇게 못 살아.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쟤처럼 재미없게 사냐? ”
“ 이호원. 다 들린다.”
“ 어엇! 하늘같으신 팀장님에게 제가 무슨 소리를! 죄송합니다. 일 보십쇼-. ”
서류를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내뱉은 우현의 한 마디에, 호원이 배꼽인사를 하며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호원의 재치에 모든 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하물며 한참 일에 집중하고 있던 우현마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호원을 밉지 않게 째려보았다. 제가 아는 이호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때론 저 자신을 가볍게 낮추어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
그래서 더욱이 호원에게 빠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친구이기만 하던 그에게 어느 새 사랑이란 감정을 이입하여 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저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감정은 겉잡을 수없이 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백을 해서 그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갖기를 원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혼자 하는 것이어도 충분히 행복한 사랑이었다.
자신에게 남우현과 이호원은 엄연히 다른 존재의 감정이었지만 똑같이 사랑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가끔씩 보면 우현과 호원만의 알 수 없는 끈끈한 우정이 저와 그들 사이의 벽이 되어 나타나곤 했다. 처음엔 그것이 실력 차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따라잡으려 발버둥 쳐보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계속 성장했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은 늘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우정이라는 가면으로 모든 것을 가린 채, 남모르게 그들을 질투하고 있던 것이.
“ 선배, 국장님이 잠시만 뵙자고 하시는데요. ”
“ 국장님? 국장님이 날 왜…? ”
“ 글쎄요, 그건 저도 잘…. ”
얼마 전, 남우현이 임무에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일로 상사에게 한참을 깨진 것인지, 오늘 잔뜩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 출근해서 모든 이들의 근심을 샀었는데. 무슨 일인지 묻고 위로를 하려고 호원을 찾던 중에, 국장님의 호출에 모든 일을 멈추고 국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 이창선입니다. ”
“ 들어오게. ”
국장실에는 난생 처음 불려 가보는 거여서, 설렘 반 두려움 반을 안고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늘 상 인상이 좋다고 좋은 평이 자자한 국장님의 굳은 얼굴이었다. 창선은 일단 그에게 구십 도로 인사를 한 다음, 저를 무슨 일로 찾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에 한참동안이나 말을 아끼던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선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더니, 이내 열지 않을 것만 같던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 자네, 이 국정원에서 제대로 한 번 커 볼 생각 없나?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자네 눈빛에는 야망이 가득한데, 말이야. ”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길게 끌 이야긴 아닌 것 같으니 한 번에 얘기하지. 얼마 전, 남우현 팀장의 1급 기밀임무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임무가 무엇인지는, 나와 그 임무에 참여한 이들만이 알지. 하지만 이 일이 외부로 새어나가게 되면 우리 국정원뿐만 아니라 이 나라 대한민국 자체가 발칵 뒤집힐 거야. 이 일은 절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란 말일세. ”
도대체 국장이 이런 말을 왜 제게 하는 것일까. 저가 남우현의 임무 실패와 무슨 관련이 있기에 저리도 소름끼치는 얼굴을 하고 로봇처럼 말을 하는 것인지, 아무 것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제가 아는 우현은 임무를 함부로 발설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기에, 친구 된 도리로 그를 두둔하기 시작했다.
“ 남우현 팀장은 절대로 입을 함부로 열 사람이 아닙니다. 도대체 그 얘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 창선 군. 나는 말이야…. 무슨 일이던지, 깔끔한 걸 참 좋아해. ”
“ 네…? ”
“ 모든 임무에, 오점이 남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일세.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우현 팀장과 이호원 요원을 많이 아끼는 거야. 그래서 그 중요한 임무도 남우현 팀장을 믿고 맡겼던 것이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 ”
무슨 일인지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았지만, 그 뒤에 나올 말이 너무도 두려웠기 때문에 도저히 입이 열리지를 않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냥 느낌 자체도 매우 좋지 않았다.
“ 그런데 말이야. 남우현 팀장이 내게 아주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거든.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것을 느꼈지. 너무 한 사람만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을. ”
“ ………. ”
“ 그래서 말일세, 창선 군. 나는 자네에게도 기회를 한 번 줄 생각이거든. ”
“ 국장님, 그게 대체 무슨… ”
“ 자네에게, 1급 기밀 임무를 내리겠네. ”
…!!!!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도 잘 나가는 우현이 실패하고, 하물며 호원에게도 한 번도 내려지지 않은 1급 기밀 임무를 제게 주겠다니. 창선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물고 그 다음 이어질 국장의 말을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뒤 이어 나온 그 말에 창선은 심장이 저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남우현과, 1급 기밀임무에 참여했던 다섯 명의 요원 모두를 몰살할 것. 그것이 끝이 아니네. 혹시나 그들의 임무를 알 수도 있는 그의 최측근인 가족들까지 모조리. 사살할 것. "
한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도대체 제가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인지 뇌에서 인식을 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받아들이기 싫어서 애써 밀어내고 있는 건지 그 어떤 것도 파악이 되질 않는다. 차라리 제 귀가 이상해져서 잘못 들은 것이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건 꿈이라고, 모두 제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하지만 사시나무 흔들리 듯 부르르 떨리는 제 몸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가 들은 것은 현실이 맞다. 다만, 인정하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역겨운 현실.
“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그걸 제게 임무라고 내리시는 겁니까? 저는 절대로…! 절대로 그런 짓은! ”
하지만, 창선의 이런 반응까지도 모조리 예상했다는 듯 더욱이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은 국장은, 곧 제 자리로 가서 털썩,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 자네 아버지가 정치인이라고 하지? 그것도 요새 들어 아주 잘 나가는. 잘하면 추후에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들었네. 자네의 아버지 뒷조사를 해보았는데, 참으로도 깨끗하더군. 뒷거래도 없이, 오로지 제 힘만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차기 대통령 후보감. 참 대단하지. ”
“ 그게 대체 무슨…!! ”
“ 하지만, 그런 자네의 아버지에게는 딱 하나 결점이 있지. 바로, 자네의 어머니이지. ”
“ ………. ”
“ 자네도 알 것 아닌가? 국민들은 정치가들의 속사정? 그딴 건 안중에도 없어. 그저 눈에 보이고, 귀로 듣는 것들만 믿지. 이 나라 차기 대통령 후보가 창녀촌에서 굴러먹던 여자와 결혼을 하고, 제 자식도 아닌 아이를 데리고 키운다라…. 어때? 자네의 아버지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정치가들에게 아주 좋은 이슈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없는 소설을 써 내려가기에도 아주 좋은 소재지. 아아, 걱정은 말게나. 물론 이 일은 나밖에 알지 못해. 자네의 아버지가 눈물겹게 그 사실을 숨겨왔으니까. ”
더러웠다.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저 자의 비열한 미소가 더럽고, 추악스럽고, 혐오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제 허리춤에 있는 총이라도 빼들고 마구 난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저 더러운 국장의 손에, 제 소중한 가족이 위태롭게 걸려있었으니까.
“ 물론 창녀촌 여자와 함께 산다고 자네의 아버지가 무너질 거라곤 장담하지 못해. 자네의 아버지는 그간 피나는 노력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쌓아온 대단한 인재니까.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자네의 어머니이지. 국민들은 과연 누구에게로 화살을 돌릴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나? ”
“ 저는, 절대로… 살인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나라를 지키려고 국정원에 입사한 것이지, 같은 동료를 살해하려고 입사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차라리 저를 죽이시란 말입니다!! ”
“ 자네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어. 그 안에 남우현과 그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내 귀에 들려오지 않으면, 나는 자네의 가족사를 언론에 모두 공개할 생각이야. 똑똑한 자네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했을 거라고 믿네. "
“ 국장님!!!!!!! ”
“ 내 장담하지. 자네는 반드시, 내게 좋은 소식을 들려줄 거야. 반드시. 그럼 이만 나가보게. ”
그리고는 제게서 등을 돌려 앉는 그를 바라보며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총을 빼 들고 마구 난사해 그를 죽여 버릴까? 아니면,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제 머리를 쏴 자살을 해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제 가족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그를 죽이고 저도 함께 죽어버릴까? 라는 끔찍한 생각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하지만 나오는 답이라곤 없었다. 이것을 선택해도 지옥이고, 저것을 선택해도 지옥이다. 결국, 국장은 제가 무엇을 택할지 알고 이 일을 던져준 것이란 말이다.
정말로 이제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설마 여기서 더 힘든 일은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고 하였거늘, 어찌 하여 이리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제게 주신 것인지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장의 뜻대로 결국 제 결정은 정해져있었다.
이렇게 해도 죽음. 저렇게 해도 죽음이라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
“ 으아아악!!! ”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끔찍한 절규를 하며 결국 창선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 * *
제 사랑스러운 후배들을 모두 쏴서 죽인 그 날, 악몽을 꾸었다. 최대한 그동안의 감정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을 유인해내 깔끔하게 심장에 총알을 박아 넣어 죽였다. 모두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였지만, 특히나 병헌을 죽일 땐 정말이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는 호원이 특별히도 아끼는 후배였다. 워낙에 싹싹하고 실력도 좋아 모두들 예뻐하는 국정원의 막내였다. 그런 그를, 이제 막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는 어린 새싹을 제가 밟아버렸다. 다시는 소생조차 하지 못하도록.
마지막으로 그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와 제 몸에 튄 피를 미친 듯이 씻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씻고 씻어도 핏자국은 더욱이 선명해지고 피비린내 또한 역하게 올라왔다.
“ 우흑…. 제발, 제발 나를, 용서하지 마…. ”
그대로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염없이 그 말만을 되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악몽을 꾸었다. 다섯 명의 후배들이 모두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로 울고 있었다. 도대체, 저희들이 왜 죽어야 했던 것이냐고. 무엇을 잘못한 거냐고.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만 했다. 사랑하는 선배가 보자기에 나갔을 뿐인데, 결국 그 사랑하는 선배의 총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째서 죽어야만 했는지, 어째서 그것이 창선이여야만 했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
그렇게 악몽을 꾸고 나니 창선은 제 생각을 모두 뒤집어 버렸다. 제 잘못이 아니라고, 저도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저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날 너무 원망하지 말아달라고.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그는.
그래서 우현 가족의 차와 우현의 차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조차 영혼이 없는 인형인 듯 아무런 표정도 없이 척척 해내었다. 그 뒤의 일을 생각할 머리 또한 제게는 없었다. 오로지 창선의 머릿속엔 제 어머니와 아버지의 미소만 있을 뿐, 그 누구의 행복 따위 제 앞길에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마지막 타깃인 우현과, 그의 가족들이 몰살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실성한 듯 웃었다. 눈빛은 이미 빛을 잃어 탁해져있는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입 꼬리는 부르르 떨어가며 미친 듯 웃어 제켰다.
“ 내가 죽으면, 이 죄가 사라질까…? ”
제가 죽는다 한들, 이 손에 피를 묻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선은 더 이상 살아갈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하기 위해, 제 후배들을 쏴 죽인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관자놀이에 대고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 순간, 옆에 떨궈진 휴대폰 액정이 반짝 빛나며 벨소리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또한, 그 벨소리는 그 옛날, 창선을 위해 직접 제 어미가 만든 노래였다.
“ 아흐윽…. 어째서 나는! 죽지도 못하게 하는, 건데? 어째서… 어째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고…!!! ”
아무리 악을 써보아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마도 이 일은 평생 제가 짊어가야 할 무겁고 숨 막히는 짐일 것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고, 함께할 수 없다면 제 스스로가 더 강해지는 수밖엔 없다. 그와 누구보다도 절친했던 이호원을 앞에 두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낯짝 두껍게 웃으며 친구 행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또한, 제 스스로 미쳐야만 했다.
이 또한, 창선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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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다. 어머니, 행복하세요? 라고. 그 물음에 어머니는 나의 두 손을 잡으며 웃으셨다. 어머니는 이미 두 눈으로 내게 말을 하고 계셨다. 응. 너무 행복해, 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웃어보였다. 어머니, 그렇다면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나는 차마 소리 내어 하지 못할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하시는 어머니께 나의 근심까지 얹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아니, 저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나는 차마 다른 사람에게 묻지 못한 그 질문을 언제나 나 스스로에게 던져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에 대한 답을 얻은 적은 없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걸까. 사람들은 어떠한 감정이 들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불행의 기준은 무엇인걸까?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불행하다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내 두 손을 꼭 잡은 채 머리를 쓸어 넘겨주시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과거의 어머니는 이제 없다. 현재 나의 앞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여인만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점점 더 꽃이 피고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
점점 시들어만 가는 것일까.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 순간 울컥, 하고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한 들, 그것은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 바보같이, 정말 바보 같게도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갑작스런 나의 눈물에 당황하신 어머니가 왜 그러니 아가…. 하며 나를 따스히 품어주셨다. 어렸을 적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어머니에게 안겨 이렇게 우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위로를 받고 또 받았지만 나의 가슴에 얹힌 하나의 돌덩어리의 무게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을 더 짓누르고 밟아 뭉갰다. 이것이 그 대가겠지요. 어머니가 행복해지는 대신 내가 받아야만 하는 고통. 그렇다면 제가 다 감수 할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아 있어 주세요. 제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갈게요. 저는 그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저는… 저라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의 죄인입니다.
창선 번외 Fin
- 43 -
“ 형, 안 돼요. 호원이형!!! 아아…! ”
모니터를 붙잡고 소리를 쳐보지만, 교신은 이미 끊겨 제 목소리를 호원에게 전달할 수 없다. 이미 안으로 들어간 호원의 모습은 CCTV로도 확인이 불가능해서 더더욱 답답할 뿐이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 꽉 깨물며 정신을 놓고 있던 성열을 깨운 것은 곧이어 들려오는 비상경보음 소리였다. 소리가 울리자마자 성열은 최대한으로 이성을 찾으려 애를 썼고, 이내 굳어버렸던 손가락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비상경보음을 듣고 호원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요원들의 모습이 화면을 통해 비쳐졌다. 그들이 미리 가져온 마스터키를 통해 문을 열려고 했지만, 오작동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지 않자, 제 옆에 있던 프로그래머 몇몇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프로그래머들이 곧이어 가장 가까운 옆 사무실로 뛰쳐들어가 아무 컴퓨터나 켜서 접속을 시도했다.
역시나 국가 안보팀의 프로그래머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셋씩이나 달라붙어 성열의 작업을 제지하기 시작하니 슬슬 그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보다 더 힘들게 고군분투하고 있을 호원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나 프로그래머 두 명은 자신이 보낸 악성코드를 잡고, 한 명은 제 컴퓨터로 악성코드를 보내기 시작하니 이내 성열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 안 돼…. 제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줘…! ”
하지만 이런 간절한 성열의 바람을 들어줄 수가 없었는지, 이윽고 그가 실행하고 있던 프로그램이 그대로 종료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기밀자료 열람실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요원들이 마스터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화면을 통해 보였다.
“ 아흑…. 안 돼!! 제발, 제발 들어가지 마요…! 제발…. ”
그들에게 전해지지 못할 외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에 있을 호원이 걱정돼 결국엔 소리를 치며 울부짖는 성열이다. 연신 모니터를 잡고 소리를 치자, 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명수가 제일 먼저 뛰어 들어와 아이처럼 서럽게 엉엉 울고 있는 성열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 열아, 왜 그래? 왜 울어. 응? ”
“ 아아…. 명,수야, 나 어떡하지. 호원이 형 어떡하지? 어떡해…! ”
왜 그러냐는 물음에 성열은 아무런 답도 못하고 그저 서럽게 울기만 하며 명수의 옷깃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런 성열을 다정하게 다독이던 명수의 시선이 모니터를 향함과 동시에, 그의 울음소리를 함께 들었던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성열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시선 또한 울고 있는 성열에게 한 번, 그리고 멍하니 넋을 놓아버린 명수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로 향했다.
“ 이게, 뭐야. ”
“ 흐윽…. 성규 형, 호원이 형 어떡하지? 내가, 내가 조금만 더 버텼어야 됐는데, 내가, 내가…! ”
“ 이성열.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이게 뭔데! ”
성규의 큰소리에 놀란 성열이 금방 울음을 그쳤다. 여전히 이 상황이 너무도 무섭고 끔찍했지만, 꼼짝 않고 여전히 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려주는 명수의 존재 덕에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열은 이내 어서 이 사실을 형들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 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하기 시작했다.
“ 내가, 내가… 너무 불안해서 호원이 형을 도우려고 했어. 그런데 형이 저 안에 들어가서 나와의 교신을 끊어버렸어. 저 안에는 CCTV가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해. 하지만 형은… 한참동안이나 나오지 않았고, 방금 전 국정원 요원들이 저곳으로, 들어,갔어. ”
너무도 혼란스러운 상태인 성열이 내뱉는 말은 두서가 없었지만 모두가 핵심적인 내용은 파악한 듯 싶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성종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이내 몰려오는 현기증을 이기지 못한 그가 비틀거리는 것을 동우가 간신히 부축했다. 괜찮냐 물어오는 동우의 물음에도 성종은 아무런 대답 없이 입술을 깨물고 주먹만 꽉 쥐며 제 스스로를 괴롭혔다.
“ 너는 왜 이런 짓을 혼자 해. 이런 건 우리와 상의했어야지! 너는 정말…! ”
“ 나는, 그저… 호원이형을 도와주고 싶었어! 혼자서는 무리일 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
“ 이성열. 그래서 넌 지금 네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성규의 음성에, 잔뜩 겁을 먹은 성열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명수에게 더욱 더 안겨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저의 화만 쏟아 붓는 성규의 음성을 가로막은 건 명수였다. 저를 꽉 붙들고 애처롭게 울기만 하는 제 연인을 잠시 떼어놓고, 그와 성규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완벽히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그리고는,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차가운 얼굴을 한 명수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 형은 뭘 잘했어요. 형은 뭘 했다고 지금 애한테 이렇게 화를 내는데요. "
“ …뭐? ”
“ 성열이가 무슨 잘못이냐고요.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겠어요. 안 그래도 겁이 많은데,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런 거 다 무시하고 호원이형 돕겠다고 잠도 안자고 이렇게 고군분투 했겠냐고요! 성열이도 성열이 나름의 노력을 한 거예요. 왜 그 용기를 이렇게 짓밟고 화를 내는 건지, 저는 이해가 안 돼요. ”
“ 김명수, 너…. ”
“ …잠깐만. ”
명수에게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열던 성규를 제지시킨 것은 우현이었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해오는 우현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로 꽂혔다.
“ 안,돼…. ”
모니터 안에서는, 국정원 요원들에 의해 호원이 추욱 늘어진 채 끌려나오는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성종이 울음을 터뜨렸고, 동우는 이내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안쓰럽게 늘어진 채로 끌려 지나가는 자리마다 얼룩덜룩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우현이 그대로 숨을 멈추고 모니터 속의 호원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여기서 제가 숨을 내쉬어버리면, 꿈이라고 믿고 싶은 이 모든 게 현실일까봐, 그게 두려워 차마 들이마신 숨을 내뱉지 못했다. 그런 우현의 팔을 애처롭게 붙들고, 엉엉 울며 애원하는 성종이 아니었다면, 우현은 저가 그대로 숨을 내뱉지 못하고 기절할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 형. 우리 형 좀… 구해줘요. 아윽…. 형이라면, 가능하잖아요. 네? 우리 형 좀 제발, 제발 얼른요…! 혀엉…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내가 이렇게 빌 테니까, 얼른 우리 형 좀 구해줘요. 난 우리 형 없으면 안 돼요. 흐윽… 제발. 제발요 형…!! ”
연신 제발이라는 말을 수십 번 해가며 무릎까지 꿇고 애걸복걸하는 안쓰러운 성종의 모습에, 우현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 물었다. 우현 또한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건든다면, 그는 이성을 잃고 당장 국정원으로 쳐들어가고 말 것이다.
남우현은, 이 모든 게 저 때문이라고 자책을 하고 있는, 가장 위태로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터지지 않게끔, 성종을 막아선 것은 동우였다. 동우는 호원에게 약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울고 있지 않았다. 평소라면 성종과 함께 울며 아픔을 함께 했을 텐데, 그는 오히려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우현의 바지를 붙들고 있는 성종의 팔을 떼어내고는 다부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성종아, 진정하자. 호원이 괜찮을 거야. 호원이 절대로, 안,죽어. 그러니까 제발… 우현이 숨 좀 쉬게 해주자, 우리. 응? ”
“ 이거 놔요! 형은 걱정도 안 돼요? 형, 우리 형 사랑한다면서요…. 그거 다 거짓말이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요? 형은 어떻게…! ”
“ 이성종!!! 너 당장 그만 못해? 네 눈에는 지금 동우오빠가 멀쩡한 걸로 보이니. 그래? 네 눈에는 그렇게 보여!? ”
이성을 잃고 모든 화살을 동우에게로 돌리는 성종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아란이었다. 그녀 또한 성종과 똑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도 아팠다. 저 화면 안에 있는 이호원의 모습도, 그리고, 제 형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질려 사리분별 하지 못하고 울부짖는 어린 성종의 모습도. 하지만, 아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은….
“ 아파죽겠다잖아…. 너만큼 아파죽겠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이것 좀 봐…. 응? ”
아란이 동우의 팔목을 세게 쥐어 잡고, 성종에게 그의 손을 보여준 건 그 순간이었다. 놀란 동우가 급하게 주먹을 쥐었지만, 성종은 이미 그의 손바닥 상처를 보고 난 뒤였다. 울지 않으려고 악을 쓰고 버틴 흔적이었다. 주먹을 너무 꽉 쥔 탓에 길어진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흐르다 못해 이미 굳어져 손바닥 전체를 물들인 상태였다. 그런 동우의 손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성종이 이내 제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꼬옥 붙잡고는 푸념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 형. 동우 형…. ”
“ ………. ”
“ 우리 형이 혹시, 울지 말라고…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이 악물고 참는 거예요? ”
“ …끄윽…. ”
끝까지 울음을 참으려 애를 쓰는 동우였다. 이미 목 끝까지 차오른 서러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또 한 번 제 손바닥을 괴롭히며 눈물을 참고야 마는 동우의 모습에 모두의 마음이 짓뭉개지듯 아파왔다. 동우의 눈은 울지 않지만, 그의 몸이 서럽도록 울고 있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내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동우가 못 견디게 안쓰러웠던 성종이, 동우를 끌어안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터뜨렸다.
“ 나쁜 새끼…. 천하의 못된 놈. 지가 마음 아프게 해놓고. 흐윽, 갈기갈기 찢어놓고, 울지 말라는 건 뭔데…. 이건 고문이잖아. 형, 이건, 고문이잖아요…. ”
더 이상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이곳에 있게 된다면, 저 또한 울부짖을 것만 같아서, 우현은 이윽고 성열에게 두 사람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명수와 아란, 성규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 …우현아! 괜찮아? ”
“ 아윽…. 아아…. ”
괜찮은 척, 했다. 성종과 동우 두 사람 앞에서, 자신은 우는 것도 허락될 수 없는 죄인이니까. 애써 참고, 참았던 게, 방을 나서자마자 터져버리고 말았다. 벽에 기댄 채 간신히 중심을 붙잡고 있던 우현이,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제 팔로 눈을 가리었다. 하지만 두 눈을 가려봤자 흐르는 눈물까지 가릴 수는 없었기에, 그 아픈 눈물은 고스란히 명수와 아란, 그리고 성규에게까지 전해졌다. 마음껏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에 숨미 막혀왔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는데. 너무 아프다고, 무섭다고,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되는데. 아마도 우현은 방 안의 두 사람을 위해 저 자신의 아픔을 애써 꾹꾹 눌러 참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 …우현아. ”
성규의 음성에도 우현은 답하지 못하고 그저 제 가슴을 쿵, 쿵 때리기만 했다. 피멍이 들 정도로 제 가슴을 세게 때리며 괴롭히는 우현의 팔을 잡아챈 명수가 그만 하라며 슬픈 얼굴을 해보였다. 그의 힘을 이길 기운조차 남지 않은 우현이 그대로 팔을 내리고 서서히 눈을 떴다.
모두가 슬펐다. 저만 힘든 게 아니라, 이런 저를 보고 있는 아란과 명수, 성규 모두가 힘이 든 상태였다. 아란은 이미 저 너머로 얼굴을 돌린 채 소리 죽여 울고 있었고, 명수와 성규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아파 죽겠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하아…. ”
심호흡을 길게 한 번 했다. 아픈 건 사실이고, 심호흡을 한다고 해서 그 아픔이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렇게 아파할 시간조차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아픔이 끝날 수 있도록 호원을 구출해내는 게 먼저였으니까.
애써 괜찮은 척 하는 우현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지만, 지금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인지 알기 때문에, 먼저 소파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은 우현을 따라 모두들 아무 말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 …일단, 미안하게 생각해. 너희들 마음 추스를 시간도 주지 못하고 이렇게 급하게 얘기하게 된 거. 그리고, 약한 모습 보인 거. ”
“ 그런 생각하지 마. 어느 정도 이렇게 될 건 예상했으니까. 그것보다, 얼른 설명해주는 게 낫지 않겠어?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
성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애써 슬픈 표정을 지우고 저를 빤히 응시하는 아란과 명수가 보였다. 그에 우현 또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 듯 싶었지만, 이내 또 한 번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여버리는 모습에 그 누구도 그를 재촉하지 못했다. 물론 한시가 급한 것을 안다. 누구보다도 그것은 우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아파서, 그리고 무서워서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서로 달라붙어버린 듯 떨어지질 않는다. 제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서럽게 떨고 있는 우현의 불안한 모습에, 성규는 안 되겠다는 듯 애처롭게 떨고 있는 우현의 손을 제 손으로 꽉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그를 대신해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 길게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간단하게 이야기 할게. ”
“ 그래. 그 편이 우리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 ”
“ 일단,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쪽에서 이호원을 끌고는 갔지만, 금방 죽일 순 없을 거야. 그들은 반드시, 그를 이용해서 우리와 협상을 시도할 테니까. 혹은, 협상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기 위함일 수도 있고. 우현이에게 들은 지난 1년간의 국정원은 국가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곳이지, 국민 개개인을 생각하는 조직은 아니라는 거야. 그렇기에, 제 조직 안에 있는 요원들을 그리도 쉽게 쉽게, 죽이라고 명령했겠지.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국정원 자체를 치는 게 아니라, 이호원을 구하는 게 목적이라는 거야. ”
“ 형, 그렇다는 말은… ”
“ 그래, 맞아. 그들은 국정원에서는 이호원을 추궁하지 않을 거야. 그들이 멍청하지 않은 이상, 국정원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내부 고발이라도 있을 시엔 모든 국민들의 질타를 받기 딱 좋을 테니까.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소수의 최정예 인원으로만 구축해서 이호원을 심문할 생각일 거야. 그리고 그의 위치는, 성열이가 맡길 거고. 우리는 성열이가 찾아준 위치를 찾아서 그를 구할 건데, 여기서 핵심은 우리 모두가 그곳으로 가는 게 아니야. 물밑작업이 필요하거든. ”
“ 물밑작업…? ”
"응. 물밑작업. 상대는 국정원이야. 우리가 다 함께 그곳으로 쳐들어가면, 이호원과 함께 우리 좀 잡아주세요 하는 꼴이라고. 그러니까 우린 이번에도 두 팀으로 나누어 활동할 거야. 나와 아란이가 한 팀, 명수 너와 우현이가 한 팀. "
이번에는 모두 한 팀으로 뭉쳐서 작전을 짤 줄 알았던 성규가 의외의 대답을 내놓자, 명수와 아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 팀은 호원이 잡혀있는 곳으로 간다 치면, 나머지 한 팀은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것인가? 그런 두 사람의 의문을 알아차렸다는 듯,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우현이 성규를 대신해 답했다.
“ 아까 성규가 말했다시피, 이호원이 있는 곳은 소수의 국정원 최정예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을 거야. 아무리 우리라고 한 들, 그들을 상대로 이호원을 무사히 구출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최정예 요원들을 다른 곳으로 배치되게끔 하는 것. ”
“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건데? ”
“ 일단, 나와 명수는 이호원이 잡혀있는 그곳으로 잠복할 거고, 성규와 아란이는 따로 국정원과 접촉할 거야. ”
“ …뭐? 그게 대체 무슨. ”
“ 며칠 전, 은근슬쩍 흘리듯 들은 말이 있어. 현재 국정원에서 최고의 인원들을 동원해서 체포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는 조직이 있다고. 뉴스에서도 몇 번 본 적 있는 거대한 마피아 조직이야. 우리는, 그 조직원인척 신분위장을 하고 국정원 쪽에 접촉할 거야. 성규는 자신이 그 마피아 조직의 간부급이라고 속여서 국정원과 컨택한 다음, 이 조직에서 나가고 싶은데 도저히 겁이 나서 나가지를 못하겠다. 내가 이 조직의 정보를 흘릴 테니 너희들이 알아서 이 조직을 소탕해줘라. 그리고 나는 자백을 했으니 형량을 깎아주라는 식으로 말이지. ”
“ 굳이… 그렇게까지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는 거야? 잘못되기라도 하면, ”
“ 잘못되지는 않을 걸. 왜냐하면 지금 현재 국정원이 주력하고 있는 쪽은 우리 시티헌터가 아닌, 그 마피아 조직이니까. 순위로 따지자면 우리가 두 번째, 그쪽이 첫 번째라는 말이야. 생각해봐. 우리는 정체조차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영역도, 시기도, 정확하지 않아. 캐내려고 해도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지. 하지만 그 조직은 달라. 워낙 대규모 조직이라서 존재를 숨길 레야 숨길 수가 없지. 다만, 너무 큰 탓에 한 번에 소탕할 증거를 잡는 게 어려워서 타이밍을 재고 있을 뿐. 그런 대형 먹잇감이 직접 나타나서 조직의 약점을 흘리겠다는데, 그들이 과연 최정예 요원들을 이호원 곁에 둘까? 아니, 그들은 분명 소수의 평범한 요원들만 배치시키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최정예 요원들은 모두 마피아 소탕 작전에 투입시킬 거야. ”
“ ………. ”
“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마피아 조직원이라고 국정원에 컨택함과 동시에, 성열이는 그 마피아 조직에, 조직원 중 누군가가 그곳을 나가기 위해 국정원에 기밀사항을 발설하고 있으니 얼른 잡아야하지 않겠냐, 라고 정보를 흘릴 거야. 그렇게 되면, 상황은 물 보듯 뻔하지. ”
“ …국정원과, 거대 마피아 조직의, 싸움…. ”
“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가 노리는 게 그거거든. 우린 그 틈을 이용해 호원이가 있는 곳으로 잠입해 그를 구출해낼 거야. 그때까지 이호원이, 잘 버텨줘야 할 텐데 말이지…. ”
모든 작전설명을 끝마친 우현의 마지막 음성에, 걱정스러움이 한 아름 묻어나왔다. 벌어진 잇새로 아픔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본 게 틀리지 않다면, 호원은 이미 중상을 입었다. 옆구리와 허벅지의 상처. 그리고, 엉망으로 망가져있던 왼손까지. 국정원은 호원을 바로 죽이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도 않을 거다. 분명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를 해둘 테지. 이것이야말로 호원에게 가장 어려울 과제일 것이다. 분명 그들은 죽지 않을 만큼의 온갖 고문을 해가며 호원을 괴롭힐 테고, 그는 상처 입은 몸으로 그것을 모두 견뎌야만 한다. 자신들이 그곳으로 갈 때까지 호원이 버텨내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이다. 모두가, 무너질 것이다.
우현은 방금 전, 모니터를 통해 보았던 처참한 호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성열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 호원은 혼자 들어갔고, 요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리도 처참한 모습을 한 채 끌려나왔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안에서 다른 누군가와 크게 겨뤘다는 것이 되고, 만약…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모든 요원들이 빠져나오고 맨 마지막으로 그곳을 빠져나온 이는 다른 아닌… 제 옛 동료인 창선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또 한 가지의 의문은, 그가 대체 왜…? 라는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사람이었고, 호원과는 끔찍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는데 대체 왜, 어째서 호원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건지 알 수가 없어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그런 그의 어깨 위로, 하얗고 길게 뻗은 고운 손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다 괜찮을 테니 너무 아파하지 말라는 듯, 천천히 어깨를 둥글게 만져주며 눈을 맞춰온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제 불안한 마음들이 서서히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괜찮을까. 이호원, 심한 중상을 입었어…. ”
“ ………. ”
들려오는 대답 따위 없지만, 저에게 맞춰오는 그 눈빛이, 모든 게 괜찮다고 말해오는 것 같아서 우현은 그제 서야 편히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제 어깨 위에 올려 진 손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다시 한 번 들리지 않을 슬프디 슬픈 애원을 해본다.
금방 갈 테니까, 그때까지 절대로 눈 감지 마, 이호원. 이렇게 빌고, 또 애원할게.
제발, …살아만 있어주라.
* * *
“ 새끼야! 대답해. 대답 안 해!? ”
끊임없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함소리와, 또 그와 함께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통어린 신음소리.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 듯, 그의 신음소리는 옆에 있는 사람만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도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쓰러져있는 누군가의 어깨를 아프게 발로 꽈악 짓누르며 얼굴로 침을 퉤, 하고 뱉는 이는 다름 아닌 호원과 매우 친하게 지냈던 국정원의 동료였고, 또한 그에게 짓밟힌 채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는 이는 이호원이였다.
“ 독한 새끼. 어떻게 신음 한 번을 안 내. 개같은 새끼. ”
“ ………. ”
“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처음부터 우릴 속여 왔던 거야!? 왜 그랬어. 어째서 우릴 그 동안 속이고 그런 짓을 했냐고, 이 새끼야!! ”
호원의 동료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차마 이기지 못할 만큼의 배신감 때문에. 국정원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호원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생각해보려고 한 적도 없다. 그만큼 호원은 국정원 내부에서 매우 신뢰가 두터운 요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호원을 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오히려 그를 더 구타하고 괴롭혔다. 그런 제 동료의 빨갛게 충혈 된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이 지금 제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더한 지옥이여서, 호원은 그대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이만 나오지.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
그리고, 감정 컨트롤에 힘들어하는 요원을 밖으로 내보내고는 직접 호원이 있는 곳으로 발을 들이는 국장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치료를 해둔 곳은 다시 한 번 상처가 터져 피가 새어나오고 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열은 잔뜩 올라 시야가 흐릿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를 향해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국장의 모습은 너무도 선명히 보여서, 호원이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 그 눈빛. 여전하군. 그 눈빛 때문에 내가 자네를 참 아꼈는데 말이지. ”
“ …당신도 여전하네. 사람 같지 않은, 그 소름 끼치는 눈빛. ”
“ 그래. 자네처럼 이렇게 열을 내고 달려들어야 재미가 있지. 안 그래? ”
“ 야 이 새끼야!! 네가 그렇고도 한 나라를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국정원의 장이라고 할 수 있어?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
“ 워어. 진정하지 그래. 그러다가 정말로, …죽는 수가 있어. ”
내내 웃으며 말하던 국장의 표정이 차갑게 굳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며 표정을 싹 바꿔버리는 국장의 모습에, 밖의 유리문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창선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국장이 하는 말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에서 호원을 사살한다고 해도 그 누구도 국장을 말릴 수는 없을 터. 그저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아무 말도 않고 있는 호원의 모습이 불안한 듯 입술을 꽉 깨무는 창선이다.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이제 와서 죽는 게 무섭기라도 한가. ”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호원이 얼굴이 들렸다. 그리고 그는 이내, 소름끼치게 비식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분명 안에선 제가 보이지 않을 텐데, 마치 호원은 모든 것이 보인다는 것 마냥, 자신을 정확하게 찾아내고는 눈을 맞춰왔다.
“ …죽는 게 두려웠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어. 난 말이지, 이곳에서 남우현을 그렇게 만든 그 새끼들을 죽이고, 나도 함께 죽을 생각이었거든.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 따위, 애초에 해보지도 않았다고. 알아들어? 이 겁쟁이 새끼야. ”
“ ………. ”
온 몸이 덜덜 떨려왔다. 분명 호원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당사자는 국장인데, 오히려 그 대답은 저를 바라보며 해오는 호원 때문에 창선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굳어졌다. 그의 말이 마치,
나는 너처럼 겁쟁이가 아니야. 너처럼 비겁하게 권력의 뒤에 몸을 숨기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더러운 놈이 아니야, 나는.
이라고 말을 해오는 것 같아서.
“ 겁쟁이들의 최후가 어떤지 내가 알려줄까? ”
“ ………. ”
“ 너는 분명 과거의 잘못을 후회할 거야. 하지만 후회해도 네 곁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지. 결국 너는 너 스스로를 옭아매고 괴롭히기 시작할 거야. 서서히 괴물로 변해가고 말 테지. 그리고 너는, 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될 거야. ”
“ ………. ”
“ 물론 너를 조종한 사람은 따로 있겠지. 너보다 훨씬 먼저 괴물로 변해버린, 쓰레기만도 못한 국장 새끼. ”
창선에게 쏟아 붓듯이 말을 하다, 이내 시선을 국장에게로 돌리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 호원의 모습에 국장이 드디어 표정 없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그는 이내 화를 참지 못한 듯, 그 두툼한 손을 올려 호원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손발이 묶인 것은 둘째 치고 온 몸에 힘이 없어 저항조차 할 수 없던 호원의 몸이 그대로 픽 쓰러져 그의 구타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입술이 터지다 못해 입 안의 살점까지 모두 찢겨나가 피가 섞인 침이 새어나오고,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변하고서야 씩씩거리던 국장이 손을 거뒀다.
“ 시티헌터. 그들이 어디 있는지 말 해. ”
“ 크흑. 푸하핫! 멍청한, 새끼….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내가 말했지. 난 여기 죽을 각오로 왔다고. 너 같은 새끼가 그렇게 협박한다고 해서 내가 불 것 같아? 난, 누구처럼 권력에 휘둘리는 겁쟁이는 아니거든. ”
또 한 번, 호원의 가시 돋친 말에 무너지는 것은 창선이었다. 그는 더 이상 호원의 말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나가야 하는데, 어서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죽어 버릴까봐. 제가 없는 이곳에서, 힘없이 죽어버리고 말까봐.
결국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는 창선의 모습을 동료들이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저들은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호원이 배신자인 건 알겠는데, 어찌하여 국장은 시티헌터를 호원에게 묻는 것이며, 그와 누구보다도 절친했던 창선은 이리도 하얗게 질려 덜덜 떠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 죽이고 싶으면 죽여 봐. 죽일 수 있음 죽이라고. 하나도 겁 안 나. 그러니까 죽여보라고! ”
“ ………. ”
“ 날 죽여도 상관은 없지만, 내가 하나만 더 알려줄까? ”
“ …이,호원…. ”
“ 날 죽여도, 당신은 반드시 죽어. 그리고 날 죽이지 못해도, 당신은 죽을 거야.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한 번 시행해보는 건 어때? 어서 죽여. 죽이라고, 이 새끼야!! ”
발악하는 호원을 앞에 두고, 국장은 다시 한 번 소름끼치는 서늘한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대기하고 있는 요원들을 한 번, 한심하게 나자빠져있는 창선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 준비시킨 거, 투약해. 그리고 불 때까지 계속 고문해. ”
“ 구, 국장님. 정말… 투약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다 정말 죽으면…. ”
“ 이호원 요원이 하는 말 듣지 못했나? 죽을 각오로 왔다고 하잖아.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입을 열어. 그것이 정 불가능하다면, 그가 죽을 때까지 투약하도록. 명령이다. ”
국장의 명령에, 제 입술을 짓씹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랍에서 하나의 약물을 꺼낸 제 동료를 보자마자, 창선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약물을 빼앗으려 들었다. 하지만 곁에 있던 다른 요원들이 그런 창선을 앞을 가로막았다.
“ 국장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저건… 절대로 사람에게는 투약하면 안 되는 바이러스입니다! 저걸 이호원에게 투약하겠다뇨. 정말 그를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입니까!? ”
“ 창선 군. 지금까지 이호원 요원이 하는 말 어디로 들었나? 죽고 싶다고 발악하잖아. 그러니 죽여줘야지. ”
“ …국장님!!!! ”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며 국장에게 달려드는 창선의 팔과 다리를 결박하며 그 자리에서 제압한 것은 다름 아닌 아까 제 앞을 막아섰던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호원과 친분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더더욱 자신의 반항을 두고 볼 리 없었다.
“ 아, 안 돼. 절대로 안 돼! 승원아, 너도 알잖아. 그거 투약하면 죽어. 이호원 죽는다고, 새끼야!! ”
그나마 절친했던 동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외쳐보지만 그도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이미 약을 주사기에 투입하고는 호원이 있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안 돼!!! 이 개새끼들아! 이거 놔! 놓으라고!!!! ”
“ 처리해. ”
거세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며, 우습다는 듯 한 마디를 던진 국장이 그대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국장이 나가자마자 창선을 결박하고 있던 요원들이 그대로 그의 명치를 세게 찔렀고, 창선은 괴로운 듯 거친 숨을 한껏 들이키며 서서히 의식의 끈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의 끈을 모두 놓으려 할 무렵 들려오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가슴을 후벼파듯 상처내고 만다.
“ 으아아악!!!!!! ”
고막을 찢어버릴 듯 울려오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창선 또한 결국은 의식을 놓고야 말았다.
미안해. 미안해, 호원아….
끝까지 겁쟁이일 수밖에 없던 나를,
…용서하지 마. 절대로.
- 44 -
대낮의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길에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꼭 누군가가 미리 손을 써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대던 성규가 조용히 한 사람의 앞에 섰고, 이윽고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보이며 씨익 미소 짓는다.
“ 오늘 비 소식이 있나요? ”
“ 아뇨, 없습니다. ”
성규와 마찬가지로 모자를 쓰고 있던 남자가 그에게 눈을 맞춰오며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성규에게 건네고는 조용히 골목길을 돌아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컵홀더를 벗겨내자 홀더의 안쪽에는 의미심장한 숫자가 적혀있었다.
<1+4-8+14+5+1+14+5+12+3+0-4=1407>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암호를 해독한 성규가 다시 한 번 작게 웃으며 제 차에 올라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아란이 시동을 걸고 장소가 어디냐고 묻자, 성규가 가만히 컵홀더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 경화호텔, 1407호. ”
“ 오케이. 최대한 빨리 달릴 거니까 벨트나 매시죠, 김성규씨. ”
성규가 벨트를 매기 무섭게 아란이 수준급의 운전솜씨를 뽐내며 무서운 속도로 도로를 질주했다. 성규는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컵홀더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첫 번째 미션보다 두 번째 미션이 어려웠고, 두 번째 미션보다 이번 미션이 더 어렵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더 험난한 길이 되겠지. 그것은 아마도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만감이 교차하는지, 살짝 어두운 표정의 성규를 곁눈질로 보던 아란이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며 그에게 묻는다.
“ 그나저나 그 컵홀더에 써있는 이상한 숫자들은 뭐야? 국정원 사람이 암호 해독을 어떤 식으로 하라고 했길래 넌 그걸 경화호텔로 해독한 건데? ”
“ 그다지 어려울 건 없어. ”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1 2 3 4 5 6 7 8 9 0 11 12 13 14
이런 식으로 각 글자마다 숫자를 붙이고,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모음에도 순서에 따라 숫자를 붙이고, 앞에 +를 붙이는 거지. 받침이 되는 자음에도 순서에 따라 숫자를 붙이고, 앞에 -를 붙여. 각 글자 사이의 연결은 +로 하고. 이것들을 모두 해석했을 때, 나오는 글자는 내가 말한 대로,
“ 경화호텔 1407호. 이게 접선장소인 셈이지. ”
“ 김성규 넌 저 복잡한 걸 머리로 다 계산한 거란 말이야? 무서운 자식. ”
“ 네가 멍청한 거야. ”
“ 잘난 척은. ”
아란이 속력을 내서인지 타고 있는 차가 어느새 경화호텔 앞으로 멈춰 섰다. 크게 한 번 숨을 내뱉은 성규가 차 문을 열었고, 아란은 살짝 걱정이 되는 표정으로 잘 하고 오라며 애써 그를 다독였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성규지만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는 건, 아마도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또한,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단 굳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호텔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기다린 그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14층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내내 성규는 쓰고 있는 모자를 만지며 곁눈질로 옆 사람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유독 허리 쪽이 불룩 튀어나온 것을 보니 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일 거고, 저 한 사람이 총을 소지하고 있단 것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혼자이고 무기도 하나다. 사격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지만 무기가 총이고 상대가 여럿임을 감안한다면 작전에 실패했을 때 자신이 이들을 뚫고 나올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
띠링-.
14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먼저 내리라는 듯 꿈쩍도 하지 않는 국정원 요원의 행동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첫 걸음을 내딛었다. 미리 손이라도 써뒀는지 개미 한 마리 없을 것 같은 조용한 복도를 걸어 살짝 열려있는 문을 붙잡고 열어 안으로 들어가자, 꽤나 높아 보이는 직급의 사내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 박성윤씨? ”
“ 네. 제가 박성윤입니다. ”
성열이 조직의 신원 중 하나를 빼 성규에게 건넨 이름은 박성윤. 성규의 나이와 엇비슷한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탐색이라도 하는 듯 한참 동안이나 성규의 눈을 보며 그의 속셈을 간파하려 드는 국정원 사람이지만, 수년간 제 표정을 숨기며 살아온 성규에게 이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계속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탓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중이 잡히질 않는다. 결국엔 포기한 남자가 그제 서야 성규에게 자리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 그 모자 좀 벗어주실 수 없나요? ”
“ 어째서죠? ”
“ 이게 가벼운 만남도 아닌데, 서로 얼굴은 확인하고 가야죠. ”
“ 그쪽 말대로 이게 가벼운 만남이 아니라면 더더욱 제가 얼굴을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이게 지금 그쪽의 승리가 될지, 조직의 승리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중간에 낀 제 입장은 좀 배려를 해주셔야죠. 엄연히 나는 그쪽에게 크나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인데 말이에요. ”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은 채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고 제 할 말은 다 하는 성규를 보며 국정원은 생각했다. 어리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하긴, 저 젊은 나이에 그 큰 마피아 조직의 간부급이 되었다면 이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겠지.
“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
“ 아, 잠시 만요. 전화 좀 받을게요. ”
정자세를 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하려고 하던 남자의 말을 끊은 성규가 벨이 울리자 양해를 구하곤 전화를 받았다. 최대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지만 목소린 들리지 않고, 하는 대답도 수긍하는 식의 단답형이었다. 10초도 채 되지 않아 금방 전화를 내려놓은 성규가, 실례를 했다며 웃어보였다.
“ 시간 끌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가죠. 저에게 궁금하신 게 뭐죠? 제 선에서 답해드릴 수 있는 건 전부 다 알려드리죠. ”
“ 조직에 대해 묻기 전에, 당신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생겼네요. ”
“ ………. ”
“ 박성윤. 당신은 어째서 조직을 배신하고 우리와 손을 잡으려 하는 거죠? ”
남자의 말에 성규는 잠시 동안 말을 않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조금 편한 자세로 다리를 꼰 채 팔짱을 꼈다. 그 건방진 태도에 국정원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냥 성규는 그저 모든 것이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 무섭거든요. 그 조직에서 더 이상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요, 나는. 그래서 이제는 좀 내 맘대로 편하게 살아보려고요.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요? ”
“ ………. ”
하지만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표정은 쉬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직이 무서워 나간다고 말하는 성규의 얼굴에서 두려움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정원이라는 조직 안에서 꽤나 오랜 경력을 쌓아온 자신이지만 도저히 이 젊은 남자의 속을 간파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 아, 그리고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
“ 착각? ”
“ 내가 당신들과 손을 잡고 있단 생각 따위 하지 마세요. 나는 정보를 흘리고 당신들이 조직을 소탕하면 그 대가로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지, 당신들과 한 패가 되겠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말마따나 그 조직과 당신들의 싸움에서 조직이 이길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럼 난 평소대로 그 조직으로 돌아가는 거겠죠. 그러니 난 당신들의 편도, 조직의 편도 아니란 소립니다. ”
졌다. 기 싸움에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는데 겨우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남자에게 이렇게 한 순간에 지다니. 앞으로 이 싸움판은 박성윤 그가 쥐고 흔들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모든 이가 박성윤이라고 알고 있는 젊은 사내는 바로 자신들이 수년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현상수배범, 살인청부업자 김성규라는 사실. 모두가 성규의 연기에 깜빡 속아 이제는 그가 다른 사람일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자,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
이 게임은, 이미 성규의 승리였다.
* * *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란은 단 한순간도 방심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성규의 목소리를 최대한 주의 깊게 들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만약 이 일이 잘못되었을 때 국정원이 먼저 발 뺄 것을 대비하여 성규와 국정원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일부러 녹음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방금 전 자신이 성규에게 전화를 걸었고, 성규는 그것에 적당한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는 척 화면이 보이지 않게 책상 위에 휴대폰을 엎어 놓고 그대로 모든 대화 내용을 들려주고 있는 셈이었다.
제일 먼저 오고 가는 대화의 주제는 역시나 마약과 무기 밀거래 루트. 성규 직업 자체가 무기브로커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꾸며서 말하는 것 정도는 그에게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이쪽의 일을 하게 되면서 마약 또한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여서, 아마도 그들은 능숙한 성규의 연기에 속아 헤어 나오지 못하겠지.
“ 아아-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
아란이 시계를 쳐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성규가 호텔로 들어가자마자, 마피아 조직 쪽으로 지금 조직원 중 한 명이 국정원과 손을 잡고 기밀사항을 유출하고 있다고 정보를 흘렸다. 성규가 안으로 들어간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도착하는 것이 맞는데….
“ …어? ”
사이드미러를 통해 검은색의 차량 여러 대가 호텔 앞으로 줄 지어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아란이 기겁을 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핸드폰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성규야, 김성규!! 하지만 아무리 불러보아도 대답이 들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 김성규 대답 좀 해, 이 자식아! ”
전화를 엎어놓은 채여서 아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상황이 좋지 않은 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리던 성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오로지 정적뿐이다. 마피아 조직원들은 이미 차에서 내려 다들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얼른 빠져나와야 할 성규에게서 답이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지금이라도 호텔로 올라가봐야 하나? 아니면 우현이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불안한 마음에 입술만 잔뜩 씹고 있던 아란에게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 지금 내려가고 있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정아란.
“ 너 뭐야! 왜 이제야 대답을 하는 건데! ”
- 네가 갑자기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일이 좀 틀어졌어. 다행히도 잘 따돌리고 내려가고 있으니까 거기 꼼짝 말고 있어.
“ 그래서 너 지금 어디… 어어? 야! 김성규! ”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성규의 목소리에는 많이 지친 듯한 숨소리가 섞여있었다. 걱정이 되어 물었건만, 제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린 성규 덕에 아란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핸드폰을 차 시트 위로 던졌다. 남우현은 왜 하필 저 똥개랑 같은 팀을 하라고 한 거야!
“ 내가 진짜 김성규 때문에 화딱지 나서 죽겠… ”
“ 지금 그거 나보고 한 소리냐? ”
“ 뭐, 뭐야, 너! 대체 언제…! ”
저 혼자서 열심히 성규를 씹고 있었더니 제 욕을 하는 것은 어떻게 안 건지 때맞춰 성규가 대뜸 차 문을 열고 들어와 제 몸을 싣는다. 그리곤 아란이 정신을 차릴 새도 주지 않고 제 멋대로 차 시동을 걸더니, 이내 어서 출발하라는 듯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 ”
코웃음을 치면서도, 성규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출발하는 아란이었다. 핸들을 톡, 톡 건드리며 옆에 앉아있는 성규를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 다, 잘 되겠지? ”
잠시라도 시간을 주자는 마음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성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자체에서 걱정스러움과 불안함이 한없이 묻어나오는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쓰렸다. 성규의 대답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쥐고 있는 핸들만 꽉 붙잡고 속력을 높였다. 성규 또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이 질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창밖으로 내던진 시선에는 현재 자신들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꼭,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아서 모든 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지려는 것인지 어느새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눈부신 햇살에, 한 손으로 두 눈을 애써 가려보지만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 성규야, 괜찮은 거지? ”
눈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많이 힘들어보였다. 괜찮냐는 물음에도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일 뿐 올리고 있는 손을 내리지도 못하는 모습에 그냥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우현과 명수가 잘 버텨주고 있을지, 혹여나 큰 일이 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그들을 믿었기에, 불안하진 않다. 이 해가 지고, 무사히 호원을 데리고 집에 갈 수 있기를. 호원 또한 저희들을 믿고 버텨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래본다.
* * *
성규가 국정원 사람들과 한참동안이나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우현과 명수 또한 호원이 잡혀있는 곳에 잠입하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외딴 곳에 위치한 작은 건물이었다. 겨우 2층까지밖에 없었고, 사용하지 않는 건물인 건지 외관 또한 아주 낡아보였다.
우현과 명수는 건물 근처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규와 아란 쪽의 일이 잘 해결되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요원들이 그쪽으로 몰려갈 것이다. 그 틈을 타 자신들이 건물을 치고 올라가 호원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성규와 아란이 올 때까지 버텨주는 수밖에.
" 성열아, 아직 멀었어? "
- 잠깐만. 곧… 금방 될 것 같…. 아, 됐다!
“ 됐어? 어때, 상황은? ”
- ……….
“ 열아…? ”
명수가 귀에 붙인 인이어를 붙잡고 성열에게 일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물었다. 혹여나 많이 잔혹할 수도 있는 상황을 대비하여 성종과 동우는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호원이 감금되어있는 건물의 CCTV에 접촉하는 일이었다. 만약 위급한 상황이라면 앞 뒤 상황 재지 않고 뛰쳐나갈 우현이기 때문에 성열과의 무전은 자신만 하기로 협의를 했다. 하지만 접촉에 성공했다는 말만 하고, 그 뒤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성열 때문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현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을 때, 겁에 질린 듯 덜덜 떨리는 성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며, 명수야….
“ 왜 그래, 열아. 떨지 말고 말해봐. 왜 그러는데? ”
- 빨리…. 어서 가야 돼. 호원이형이, 형이… 아아….
결국엔 아침과 마찬가지로 울음을 터뜨려버리는 성열이다. 하지만 그 울음이 아침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너무도 서러운 것이어서, 명수는 무슨 일이냐고 저를 재촉하는 우현에게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 최악의 상황이 아니기를. 워낙 겁이 많은 성열이기에 호원이 다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우는 것이기를 간절하게 바래보지만, 이윽고 제 귀를 통해 들려오는 성열의 목소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충격적이었고, 끔찍했다.
- 형이, 소리를 질러…. 너무, 너무 아파해. 명수야 어떡하지? 나 호원이형이 저렇게 아파하는 거 처음 봐…. 어떡해. 어떡하지 명수야?
“ 성열아, 진정하고. 어떤 상황인지 말해봐. 형을 때리고 있어? 그런 거야? ”
-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이상한, 이상한 주사기를 들고 형에게 자꾸만 무언가를 투약하고 있어…. 저게 뭐지? 저게 대체 뭐야…! 흐으….
성열의 대답에 명수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투약이라니…. 도대체 무슨 약을 투약하고 있다는 말인가.
“ 김명수. 대체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 ”
“ …가야돼요. ”
“ 뭐? ”
“ 가야돼요, 형. 지금 당장. 당장 호원이형한테 가야된다고요! 형이 위험해요. 그들이 이상한 약을 투약하고 있대요. 어떡하죠? 아아, 진짜…! ”
명수의 말에 멍해진 것은 우현도 마찬가지였다. 예상했던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상황 중 이런 건 없었기 때문에 더 충격적이었으며 말은 나오질 않고,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바라보니 성규의 이름이 떠있었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성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쪽의 상황을 얘기할 자신이 없었다. 어떠한 순간에도 냉정하고 침착할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제 오랜 친구이자 가족인 호원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가족이 모두 죽어버렸을 때 유일하게 곁에 있어준 것이 호원과 성종이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없다면 자신은 절대로 버티질 못한다. 설사 성규가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여보세요? 형, 오고 있어요? 무사한 거죠? ”
- 어, 거의 다 왔어. 그런데 왜 우현이 전화를 네가 받아? 무슨 일 있어?
“ 상황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형,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 우리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갈 테니까 최대한 빨리 와주세요. 시간 끌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
아무런 말도 못하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애처롭게 서있는 우현을 바라보며 명수가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많이 심각하다는 걸 인지한 성규도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더 빨리 가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때마침 국정원의 연락을 받은 건지, 건물 안을 철통같이 보안하고 있던 요원 수십 명이 차를 타고 다급하게 빠져나갔다. 우현이 예측한대로 이제 저 건물 안의 인원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인원보다 더 적을 수도.
“ 열아, 건물 안에 남아있는 인원 좀 체크해줄래? 지금 당장 들어갈 거야. ”
- 어, 지금 남아있는 인원이… 그러니까, 총 여섯 명이야.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네. 두 명은 호원이형이 감금되어있는 2층 방의 앞에서, 그리고 나머지 넷은 마찬가지로 2층의 복도를 서성이고 있어. 1층에는 한 명도 없으니까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면 될 것 같아.
“ 그래, 알았어. 반드시 형 구해서 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까 인이어는 이만 버릴게. 나중에 집에서 보자. ”
- 제발… 조심해, 명수야….
성열의 그 말을 끝으로, 귀에서 인이어를 떼어 버린 명수였다. 그리고 옆을 바라보니,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많이 나아진 것인지 우현이 정신을 차리고 총을 장전했다. 마찬가지로 명수도 제 총을 장전해놓고는,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이번 일에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총은 꺼내지 말자는 서로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가자. 성규랑 아란이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 ”
“ 네. 가요. ”
우현이 앞장을 서고, 명수가 그 뒤를 따랐다. 상황을 살피고 말고의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건물의 안으로 곧장 뛰어 들어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충분히 발소리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이쪽의 사람들도 보통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현과 명수의 존재를 눈치 채고 바로 주먹을 뻗어왔다.
“ 명수야, 엄호 좀 부탁한다! ”
“ 걱정 말고 형은 어서 가요! 성규형과 아란누나도 곧 도착할 거니까! ”
두 사람 모두가 한 사람씩을 상대하다 보면 시간이 지체된다. 명수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일단 엄호를 부탁하고 자신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게 꽤나 버거워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 중 한 사람이 우현에게 향하는 걸 쉽사리 허락하지도 않았다.
제게로 뻗어오는 주먹을 잡아 막았지만 체격이 많이 큰지라 힘이 감당이 되질 않았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저를 벽으로 밀치려는 남자의 정강이를 그대로 발로 차버리곤, 그가 주춤한 틈을 타 그대로 맞은편의 커다란 창문 쪽으로 몰아붙였다. 자신이 한 명의 남자를 상대하는 동안 우현에게로 향하려는 나머지 한 명을 놓치지 않은 명수가, 상대하고 있는 남자의 멱살을 그대로 잡고, 몸을 움직여 저를 등지고 앞으로 향하는 남자의 무릎을 발로 힘껏 밀어버렸다. 충격이 꽤나 큰 듯 무릎을 붙잡고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온 힘을 다해 저보다 체격이 큰 남자의 목을 움켜잡고 창문 밖으로 밀었다. 상반신이 거의 밖으로 빠져나간 상태였지만 남자 쪽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발악이라는 생각으로 명수의 손가락을 잡고 뒤로 꺾어버렸다. 손가락이 부러져 엄청난 고통을 동반했지만, 신음을 애써 안으로 삼키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남자를 창밖으로 떨어뜨렸다. 2층이기 때문에 죽진 않을 것이고 팔과 다리 중 하나가 부러지긴 하겠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떨어진 남자를 확인할 새도 없이 곧바로 명수가 쓰러져있는 남자의 무릎을 다시 한 번 짓밟았다. 팔보단 다리를 못 쓰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테니까. 그리고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아파하는 남자의 머리를 움켜잡고 그대로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남자의 이마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국정원에서의 훈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명수의 다리를 잡고 넘어뜨렸다. 남자가 그대로 명수의 위로 올라타려고 했지만, 여기서 지면 호원을 구하는 시간이 더 지체될 것임을 알기에, 몸을 한 바퀴 굴려 간신히 피한 후 그대로 남자의 등 뒤로 덮쳐 올라탔다.
“ 개같은 새끼들! 이호원은 스파이야. 그런 스파이를 데려가면 너희도 무사할 수 없을 텐데!? ”
어마도 이 남자는 저들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것 같다. 호원을 구하러 왔다면 시티헌터인 게 당연한 것을, 그저 스파이를 구하려는 낯선 사람으로 보다니. 명수가 남자의 머리통을 짓밟으며 코웃음 쳤다.
“ 국정원에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새내기 같은데 말이야, 혹시 남우현이라고 들어봤어? ”
“ 남…우현? 1년 전에 죽었다던 그…. ”
“ 그래, 바로 그 사람이 저기 저 앞에서 무섭게 싸우고 있는 남자거든. 그리고 혹시 나는 들어 봤으려나? 김명수라고 말이지. ”
“ ………!! ”
“ 이제야 눈치 챘나보네. 국정원에 입사를 했으면, 시티헌터부터 제대로 공부를 했어야죠, 애송이님? 우리는 스파이를 구하려고 온 그저 그런 범죄자들이 아니거든. ”
“ 아윽!!! ”
“ 내 말 똑똑히 들어. 남우현은 국가에게 배반당한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일 뿐이고, 너희들이 스파이라고 그렇게 죽음까지 몰아간 이호원이란 사람은, 유일하게 국가에게 맞선 정의로운 사람이야. 뭘 좀 제대로 알고 국정원을 신뢰했으면 좋겠네. 국정원은 말이야, 아직 이십대 초반의 어린 네가 생각하는 만큼의 정의로운 곳이 아니거든. 알아들어? ”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남자의 등을 발로 꾸욱 누르며, 그대로 그 위로 올라타 다리를 올려 뒤로 젖혔다. 겁에 질려 일어나려는 남자였지만 명수가 위에 올라타 있으니 그게 될 리가 없었다.
“ 걱정하지 마. 몇 달간 병원 신세만 좀 지면되는 거니까 말이야. ”
그리고는 남자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들어 올린 다리를 뒤로 접어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발로 세게 밟아버린 명수다. 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다리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남자는 정신을 놓아버린 듯 했다. 지친 몸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명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 아으…. ”
부러진 손가락 쪽이 욱신욱신대며 엄청난 고통을 불러왔다. 절로 얼굴이 구겨졌지만 앞을 바라보니 우현 또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상태여서 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한꺼번에 두 명을 상대해버린지라 이미 체력적으로 많이 지쳤고 하필 다친 손가락이 오른쪽이여서 주먹으로 싸우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막막해졌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다른 손가락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딪쳐보는 수밖에. 명수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끝이 된다 하더라고 상관없다. 지금 모두의 마음은 복수에 다가가지 못하더라도 제 가족을 지키는 것. 지금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므로 제 몸 하나 부서진다 해도 상관없다. 호원이 목숨 걸고 저를 구해줬던 것처럼, 저도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해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그 하나의 사명감이 제 의지를 불태웠다.
* * *
우현은 우현 나름대로 진을 빼고 있는 상태였다. 역시나 훈련받은 요원을 상대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총을 빼내어 상대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더욱 커질 것이고 현재 호원을 지키고 서있는 코너 뒤의 두 사람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호원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까지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앞을 떠나지 말라는 상사의 지시가 있었겠지.
명수에게 두 명을 맡기고 온 뒤 저 또한 앞 뒤 상황 재지 않고 저에게 달려드는 한 명을 손쉽게 처리했다. 제가 한 명을 상대할 때 달려들면 상황이 유리해질 텐데, 다른 한 남자는 달려들지를 않고,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를 총체로 내려쳐 기절시키고는, 거친 숨을 내쉬며 제 앞의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 오랜만이네, 남우현. ”
“ 윤승원…. ”
“ 기억해주다니, 이거 영광인데? 네가 살아있을 거라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진짜였다니. 그 동안 잘도 우리를 속였구나. 더러운 자식. ”
윤승원. 창선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호원에게 불법시약을 투약한 국정원의 동료. 우현이 팀장으로 일했을 당시에도 꽤나 친하게 지냈던 동료이자 후배였다. 그런 그와 이렇게 대면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옛날의 일일뿐, 그가 제 옛 동료라고 해서 마음이 약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를 이겨야만 제 가족, 이호원을 구할 수 있으니까.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다. 우현이 주먹을 꽉 쥔 채 달려들려고 할 때, 그를 비웃는 승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가 여기서 우리를 모두 쓰러뜨리고 간다고 한들, 이호원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구한다 하더라도 이호원은 절대 다시 너희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어. ”
“ 대체… 이호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 들리나? 저 비명소리. 잘 들어보라고. 너의 그 복수를 위해, 이호원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건지. ”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거짓말 같은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찌르는 비명, 아니, 그보다 제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괴로움에 찬 비명소리였다.
“ 이호원. 이호원…! ”
“ 약물 DDW-148. 이건 너도 들어봐서 알 텐데? ”
승원의 말을 들은 우현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 DDW-148. 그 약물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국과수 쪽에서 희귀병을 치료하기 위해 실험을 하던 약이었지만 실험 실패로 인해 사람을 치료하는 약이 아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인무기나 마찬가지인 바이러스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국가는 이 사실을 국정원과 국과수 내부에서만 알도록 하였고, 약물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약물을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그때는 왜 그런지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는데, 이게 이런 용도로 사용될 줄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국정원은 훨씬 더 잔혹하고 끔찍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래. 이호원은 며칠 후면 죽어. 약을 얻지 못하는 이상은 죽는다고. 그것도 엄청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말이지. 하지만 그 약은 딱 두 군데에서 보관하고 있지. 한 곳은 예상했듯이 국과수. 그리고 또 하나는, …국정원의 국장실이지. 너희가 그 약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네가 이호원을 구해서 여길 나간다고 한 들, 이호원은 두 번 다시 너희들과 함께할 수 없을 거라고. 알아들어? ”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형…. ”
“ 명수야. ”
“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요!! 그리고 또 이 비명소리는 뭐예요…. 대체 호원이형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네? 형, 제발…! ”
어느새 두 명을 모두 처리하고 온 명수가 모든 대화를 들었는지 울먹이며 우현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어떠한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우현 자신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았으니까. 지금 저 자의 말에 휘둘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아마도 승원은 그냥 여기에 깔려있는 다른 요원들보다도 훨씬 막강한 상대임이 틀림없다. 명수는 이미 2명을 처리하고 온 상태라 체력적으로도 많이 지쳤고, 오른쪽의 두 번째 손가락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니 손으로 싸우기도 힘들 것이다.
“ 명수야, 일단은 이호원 구하는 게 먼저야. 너 먼저 가있을래? 나도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약속해. ”
“ 형! ”
“ 빨리 가! 이호원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은 상대적으로 약할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할게. ”
우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승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달려 코너 뒤로 사라졌고,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꾹 문 채 그 뒤를 쫒으려 등을 보인 승원에게 그대로 달려드는 우현이었다. 승원의 종아리를 그대로 파고들어 넘어뜨리고는 총체를 다시 한 번 꺼내어 빠르게 그의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키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국정원에서의 경력이 많기 때문에 우현에게 쉽게 당하지 않았다. 저를 내리치려는 우현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꺾어 총을 떨어뜨리게 만들고는, 상황을 뒤집어 우현의 위에 올라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여러 번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 정도면 정신을 놓을 법도 한데, 이를 악물고 끝까지 정신을 잡는 우현을 보며 승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우현처럼.
당황한 승원을 눈치 챈 우현이 그 틈을 타 옆으로 손을 뻗어 슬그머니 제 총을 다시 잡아들었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뻗으려는 그의 머리를 그대로 가격했다. 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승원에게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어깨를 양 무릎으로 누른 채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는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승원의 얼굴에 사정없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 배신감? 넌 그깟 배신감 하나를 견디지 못해서 오랜 동료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했어? 이호원이 너희를 배신한 건 맞지만 그 자식은 항상 너희에게 미안해했었어! 나를 도우며 어쩔 수 없이 너희를 배신해야만 했던 자기 자신을 매우 자책하고 괴로워했던 놈이라고! 그런데 넌 그 배신감 하나를 이기지 못해서 이호원을 죽이려고 해? 윤승원 넌 그럴 자격도 없어. 네가 진정으로 이호원을 믿고 의지했다면! 한 번쯤은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호원은 얼마나 괴로울까를 생각해보는 게 맞아. 하지만 넌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잖아! 넌 그저 화가 났던 거야. 동료라고 믿었던 이호원이 순식간에 너와 적이 되어버렸으니까! 함께 임무를 하며 쌓아왔던 우정은 보이지도 않았겠지. 그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어째서 너희를 속이면서까지 국정원에 있어야만 했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았잖아! ”
“ 흐으…. ”
“ 이호원은 끝까지 널 원망하지 않을 거야. 내가 아는 그 자식은 그런 놈이니까! 우린 국장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지 너희에겐 악감정 따위 없다고! 그러니까 제발… 우리를 보내줘. 부탁이다. ”
우현의 주먹질로 인해 승원의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승원의 모습을 보며 우현도 괴로움에 제 입술을 짓씹으며 괴롭혔다. 그리곤 바닥에 떨어져있는 제 총을 집어 들고 명수에게 가려던 그 때,
탕-
“ 하윽…. ”
어깨가 불에 덴 것 마냥 뜨겁고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우현이 어깨를 붙잡으며 뒤를 돌아보자, 승원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총을 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남우현. 하지만 네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 이호원과 나는 적이야. 너 또한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나는 너희를 끝까지 제지하는 게 맞아.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
“ 우윽…. ”
총알이 어깨에 박히진 않았지만 스쳐지나간 총상이 꽤나 깊다. 새빨간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려와 바닥으로 투둑, 떨어져 웅덩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제게 총을 겨누는 승원을 보며 저 또한 왼손으로 총을 겨눴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의 고통이 너무 큰 탓에 왼쪽 팔까지 부들부들 떨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질 않는다. 어서 가야 하는데, 어서 가서 명수를 도와 호원을 구해야 하는데.
“ 잘 가라, 남우현. ”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제 한계라고 생각하고 두 눈을 감은 그 순간, 거짓말 같은 한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승원이 쏜 것이라면 제게 고통이 있어야 하는데, 어떠한 고통도 없자 우현이 두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 우현아!! ”
“ 성…규. ”
그를 보자마자 안도감이 한 가득 차올라 쥐고 있던 총도 떨어뜨리고는 다행이라는 듯이 웃어보였다. 하지만 성규와 아란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버린 셔츠와, 바닥으로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우현의 피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란의 발 빠른 대처 덕에 승원은 총상을 입고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우현을 부축한 것은 성규였다.
“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우현아 괜찮아? 아아, 어떡해…. 빨리 동우 형한테, 형한테 가야 돼…. ”
점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우현의 상태를 보면 어서 집으로 가는 게 맞는데, 저희들의 목적은 아직 달성하지도 못했다. 눈물이 가득 고인 성규의 두 눈을 부드럽게 만져주며, 괜찮다고 웃어주는 우현이다. 피는 멈출 생각도 안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우현은 어서 가자며 성규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 일단 너부터 형한테 가자. 호원이는 내가 빨리 구해서 갈 테니까, 너랑 아란이 먼저…! ”
“ 성규야, 진정해! 나 안 죽어. 지금 나보다 위험한 사람 이호원이야. 우리가 여길 왜 온 건지 잊었어? 이호원 못 구하면 나도 못가. 겨우 이 정도로 나 안 죽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
이성을 잃고 사리분별 하지 못하는 성규를 붙잡고 우현이 다그쳤다. 저 때문에 그런다는 걸 알기에 마음에 안 좋았지만, 저 하나로 일을 그르칠 순 없는 것이니까. 다행히 성규도 우현의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부축도 필요 없다고 우현이 거절한 탓이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했다는 듯, 세 사람은 속력을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 다행히도 명수가 모두 처리한 듯 일반인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널브러져 있고, 복도 맨 끝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간 세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눈 떠요. 눈 뜨라고, 이호원!!! ”
명수가 아이처럼 엉엉 울며, 엉망이 된 몸과 얼굴을 한 채 눈을 감고 있는 호원의 가슴을 압박하며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우현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호원의 비명소리를 들었는데, 대체 어째서…
“ 이게 대체 무슨…. ”
“ 하윽…. 형, 호원이형이 숨을 안 쉬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어떻게 좀 해보라고요! ”
재빨리 호원이 곁으로 다가가 호흡이 있는지 확인을 해보지만, 명수의 말대로 작은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현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물며 명수를 대신해 호원의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힘을 준 탓에 출혈이 더 심해지고 있었지만, 이미 어깨의 통증은 잊은 것인지 우현은 팔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인공호흡도 해보고, 명수와 바꿔가며 심폐소생술을 해보았지만 호원은 미동도 없었다.
“ 안 돼. 눈 떠. 눈 떠, 제발!!! 웃는 얼굴로 다시 보자고, 그렇게 평생 보자고 했잖아. 숨 쉬어. 제발 숨 좀 쉬라고, 이호원!!!”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너와 내가 1년 전의 그 고통을 이기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이호원. 버티겠다고 했잖아. 끝까지, 살기 위해 발악하겠다고 나와 약속했잖아!!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너와 성종이가 없었음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인데, 이 세상에 없을 존재인데 네가 살려냈잖아. 네가 살려내 놓고…! 이렇게 죽어버리면 안되잖아. 제발 일어나. 너 없음 나는 어떡하고, 성종인 어떡해. 그리고 너만 기다리며 숨도 못 쉬고 있는 동우형은, 형은 어떡해…!
“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제발, 제발 죽지 마, 호원아…! ”
네가 없으면, 모두가 무너져. 네가 없음 안 돼. 내가 다 잘못 했어….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줘. 제발. 제발, 호원아….
나 좀 제발….
살려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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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씀드리기로는 45편까지 가지고 온다고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45편은
다로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45편은 주말에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달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