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 짜증난다. 그냥 짜증도 아니고 그냥 아주 개짜증이다. 지금 내 표정을 글로 묘사한다면 아마 똥 씹은 표정이 제일 적절하지 않은가 싶다.
옆에 탑스타를 모셔놓고 왜 그렇게 짜증을 내냐고? 탑스타고 나발이고 지금 내가 짜증이 난 이유가 저 위대하신 탑스타 때문이라고요.
잠깐 오늘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밤 촬영이 늦어져서 나는 아침에야 집에 올 수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바로 씻고 꿀잠에 빠졌고, 나는 웬만해서는 한 번 잠에 들면 잘 깨지 않는 타입이다.
오늘 하루는 스케줄이 없는 날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홍빈 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꿀같은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얼마만의 꿀잠이야...
(사진에 대한 이의 제기는 일절 받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였어 봐, 조금이라도 못생긴 사진 올려주고 싶지 멋있는 사진 올려주고 싶겠어요? 흥.)
그렇게 한참 동안을 꿈 속을 헤매이던 도중에, 내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을 떨며 웅웅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댄 다신 사랑은 하지 말아효~ 넘흐 납흔 사람이니까~ 날 버린 댓가로 햄보카지 마라요~
난 처음으로 내 벨소리로 해둔 곡이 싫어질 뻔 했다. 계속 되는 전화에도 내가 꿋꿋히 받질 않자, 상대방이 전략을 바꾸기라도 한 듯
정말 듣기 싫은 따르릉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 이전에 엄마가 잽싸게 전화를 받았고, 뭐라 뭐라 말하는 듯 싶더니 뚝 끊는다.
아, 이제 편하게 자겠ㄷ
덜컥
"야, 왕빛나!!! 일어나!!!"
ㅋ
"일어나라니까, 이 기지배야!!!"
"아, 왜 엄마... 나 오늘 진짜 간만에 쉬는 날이란 말이야. 나중에 얘기 해. 나 이따 일어나서. 응?"
"쉬는 날은 개뿔. 홍빈 님한테 전화 왔었어. 얼른 준비하고 나가!"
"홍빈 님이 누구길ㄹ"
아. ㅋㅋ. 홍빈. ㅋㅋㅋ. 이홍빈? ㅋㅋㅋㅋ. 엄마는 이홍빈 짱팬이다. 내가 이홍빈 코디를 맡게 된 날 아주머니들을 집으로 모아서
파티를 했을 정도로 팬이다. 그래, 처음에는 나도 손이 덜덜 떨릴 만큼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손으로는 모자르다. 발까지 덜덜 떨릴 정도로 싫다. 정말 싫다!!!
이홍빈 부름에 똥 씹은 표정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내 모습도 싫다. 돈이 뭐라고. 돈이 뭐랄괄아흐앟우릏욿!!!
문자 왔숑, 문자 왔숑♪ 철 지난 문자 알림 소리가 내 고막을 파고든다. 저 알림음 조차도 짜증난다. 이홍빈 때문에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다.
옷 챙겨 올 필요 없다는 이홍빈의 문자이다. 아니 근데 어떤 스타가 코디 핸드폰도 아니고(물론 내가 안 받긴 했지만) 집으로 직접 전화를 해??? 아니 왜??? 왜?!?!!??!!??!?!?
이 땅을 기필코 부수고 말리라는 듯한 감정이라도 실린 건지 내 발걸이 굉장히 무겁다. 쿵쾅쿵쾅 소리가 요란하자 엄마가 또 잔소리를 퍼붓는다.
날 사랑하는 만큼 이홍빈을 좋아하는 엄마도 밉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쉬는 날 일하러 나오라고 전화 한 이홍빈을 나랑 같이 잘근잘근 씹어줘야 되는 거 아니야?
"잘 다녀 오겠습니다!!!!!!!!!!!!!!!!!!!!!!!!!!!!!!!!!!!!!!!!!!!!!!!!!!!!!!!!!"
"잘 다녀 와라, 이 년아!!!!!!!!!!!!!!!!!!!!!!!!!!!!!!!!!!!!!!!!!!!!!!!!!!!!!!!!!!!!!!!!!!!!!!!!!!"
이 놈의 집구석은 아마 앞으로도 조용하긴 힘들 것 같다.
***
"뭐라구요?"
내 이름 왕빛나. 직업은 코디.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배우 이홍빈의 코디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직업을 때려칠까 3초 정도 고민했다.
"나 잘 때까지 거기 좀 있으라고."
뭐 이 새KEY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라기에는 표정에 장난기가 없다.
심지어 나는 지금 이홍빈의 집, 그것도 침실 안이다. 이홍빈은 누워서 이 여름 날 이불까지 덮고 있고, 나는 서있다. 그것도 아주 멍청한 표정으로.
이 꿀같은 휴일 날 나를 부른 이유가 고작 잠이 안 와서란다. 자기는 원래 혼자서 잠이 못 드는 스타일이라면서 잠들 때까지 여기 좀 서있으란다.
아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그럼 지금까지는 밤에 혼자 어떻게 자셨어요? 네? 마음같아서는 이불을 덮고 있는 저 몸뚱아리를
시원하게 발로 뻥뻥 차버리고 싶지만 그건 마음에서 그치고 만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을, 이홍빈은 갑이기 때문에.
그래, 있으라면 있어야지 뭐 어쩌겠어요. 나는 을인데.
넌 참 좋겠다. 돈이 많아서.
***
"그래, 완전 미친 새끼라니까? 나 진짜 답답해 죽겠어. 좀 만나자. 응? 지금 이건 잠으로 해소 될 스트레스가 절대 아니라고."
[으이구.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시내 사거리에 우리 늘 가던 곳에서 만나. 금방 나갈게.]
대충 눈치 보니 자는 것 같길래 등신같이 발꿈치까지 들면서 빠져 나왔다.
만약에 혹시라도 이홍빈 집에 cctv라도 있어서 이홍빈이 나중에 그걸 본다면 난 혀를 콱 깨물고 죽을 지도 모른다.
나오면서 경리 언니한테 연락을 했다. 내가 하소연 할 구석은 역시 언니 뿐이인 것 같아...
***
"이 기지배가 미쳤나 봐."
"흐흐. 언니 와떠?"
경리는 도착하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술도 잘 못하는 애가 혼자서 생맥주를 한 잔, 두 잔, 세 잔... 세상에. 벌써 다섯 잔 째였다.
되도 않는 혀 짧은 애교를 부리며 실실 웃더니 경리가 앉자마자 고개를 푹 테이블에 박아버리는 빛나. 경리는 여기가 룸으로 된 호프집인 게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입으로 웅얼 거리는 소리를 듣자하니 잠깐 잠든 것 같았다. 얘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술을 이 지경으로... 경리는 잠시 마음이 쨘해졌다.
"언니가 만날 일은 없지만 그 사람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아주 어? 패대기를...!"
덜컥
"...!"
"..."
말도 안 되는 뜬금 없는 등장이었다. 마치 홍빈의 눈빛이 패대기 뭐요,라고 묻는 것만 같아서 경리는 마음 속으로 친단 말 취소요...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경리는 이제 막 유명해진 여자 아이돌이었다. 그래서인지 홍빈을, 아니 홍빈이 아니더라도 탑스타를 이렇게 이런 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막상 실제로 마주보니 빛나가 한 말은 전부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저런 반듯한 얼굴로 그런 짓을 일삼을 수가 있어.
"혹시 같이 술 드셨나요?"
"네? 아, 아니요. 여기서 같이 만나기로 한 건 맞는데 제가 몰래 나오느라 좀 늦어서... 방금 도착했어요."
경리답지 않게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이건 위험 신호나 다름 없었다.
말하면서도 본인조차 내가 왜 이렇게 주절 주절 설명하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입과 마음은 따로 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홍빈은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개의치 않아 보였다. 당연한 것이었다. 홍빈의 관심사는 오로지...
"미친 기집애... 여자 혼자서 술이 떡이 되도록 먹고 다니고. 휴일이면 좀 집에서 쉬던가."
자신의 업은 생각하지 않는 뻔뻔한 홍빈.
"겁대가리 없이 그런 술주정이나 부리고."
경리는 지금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빛나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홍빈은 전혀 이럴 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일단 그 이전에 이 자리에 이홍빈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경리는 머릿 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