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하교하는 둘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계속 유지해가며 나아가던 종인이 어디선가 느껴본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던 것 같은데... 슬쩍슬쩍 세훈을 훔쳐보며 곰곰이 생각한 종인이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간 기억에 세훈을 올려다봤다.
"우리 저번에도 이런 적 있었어."
종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세훈이 시답잖은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도 같이 하교했었잖아, 기억 안 나? 너희 집 간 날."
...아, 그랬었지. 얼빠진 소리와 함께 유유히 걷던 종인을 보고 웃은 세훈이 종인의 손 끝을 살며시 잡아 깍지 끼었다. 종인이 갑작스런 세훈의 행동에 두 눈 가득 의문을 담아 크게 뜬 채 세훈을 올려다봤다. 종인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 것 같았지만 아무렴 이제 상관없었다. 우리가 어떤 사인데, 키스까지 한 사이지! 혼자 속으로 자문자답을 한 세훈이 뿌듯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종인을 돌아봤다.
"이번엔 손잡고 가자."
서로 깍지 낀 두 손가락 사이로 힘이 들어갔다. 세훈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세훈은 언젠가부터 종인을 '우리'라는 범주에 넣고 있었다. 종인과 세훈 중 그 변화를 감지해낸 이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가? 너희 집. 우리 집은 왜가! 종인이 찡찡댔어도 한 번 정한 먹잇감은 물지 않는 늑대처럼 세훈의 다짐은 완고했다.
한편 경수는 백현과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조용히 차가운 스무디만 쪽쪽 빨고 있는 경수와는 다르게 뭘 그렇게 볼거리가 많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백현은 참으로 산만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처음부터 따져보면 애초에 놀자는 제안은 찬열이 제일 먼저 꺼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약속장소에 모인 건 경수와 백현 둘 뿐이었다. 찬열의 집에 전화도 해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럼 그렇지, 경수는 질린 표정을 지었고, 백현은 미련한 곰 주제에 또 잠이나 처자겠지, 라며 찬열을 깔봤다. 딱히 놀 생각도 없었던 경수가 다시 집에 들어가려고 하자 경수를 붙잡고 징징댄 백현 때문에 지금 경수는 근처 카페에서 스무디를 하나 사 빨고 있다는 말이었다.
도대체가 백현의 체력은 지치지도 않았다. 겉이 휘황찬란한 옷가게에 시선이 꽂힌 백현이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포기 상태로 어쩔 수 없이 백현의 뒤를 따라 옷가게에 들어선 경수가 매장을 한 번 훑고 백현을 한 번 보더니 실소를 내뱉었다.
"가뜩이나 옷도 많으면서, 또 사게?"
"내 옷 사는 거 아니야."
돈이 남아돌지, 응? 비꼬듯 말하는 경수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백현이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됐고, 우리 종인이는 무슨 옷이 잘 어울릴까?"
콧노래까지 부르며 이것저것 옷을 뒤적이는 백현을 보고 입을 벌린 경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우리 종인이라니, 변백현이? 경수가 제 귀를 의심하며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종인이라면 얼마 전에 갑자기 나타나 선조 귀환이라던 까만 남자애가 분명했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정을 안 주는 백현이 종인을 몇 번이나 봤다고 저렇게 예뻐하는지, 저번에도 그랬다. 종인을 처음 보고 난 뒤 뭐가 그리 맘에 든다고 종일 내내 종인이라는 이름만 달고 다녔었다.
신나게 콧노래 부르는 백현을 쳐다보고 다시 한 번 종인의 얼굴을 떠올린 경수가 안쓰러운 표정을 내보였다. 사실 경수의 머릿속에 남은 종인의 인상은 짙은 쌍꺼풀이 새겨진 두 눈과 까만 피부, 그리고 유독 커 보이는 키뿐이었다. 더듬더듬 기억나는 종인의 얼굴이었지만 백현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종인이 불쌍하기만 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미친놈 변백현에게 재수 없게도 당첨된 종인에게 경수가 심심한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물론 종인은 듣지 못했겠지만, 나중에 있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제 죄책감을 내려놓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움직이지도 않고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종업원의 눈길을 따라가니 변백현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종업원의 붉어진 얼굴을 쳐다본 경수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뭐, 백현이 인기가 많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백현에게 다가간 경수가 다 먹은 스무디 통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옷 구경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기다려."
"밥 먼저..."
"우리 종인이는 뭘 입어도 섹시할 거야."
저번에 보니까 선이 잘 빠졌던데? 음흉하게 킬킬대는 백현을 미친놈 보듯 하던 경수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백현의 뒤통수를 퍽퍽 쳐 내리눌렀다. 경수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종업원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자 다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넌 진짜 미친놈이야, 얼른 혼현 안 집어넣어? 경수의 말에 흥분해 튀어나온 제 귀와 꼬리를 만진 백현이 그새 또 다른 길로 새벼렸다. 우리 종인이도 귀와 꼬리가 나오면 얼마나 섹시할까, 이를 보이며 실실 웃는 백현의 뒤통수를 아까보다 세게 내리치려던 경수가 손을 멈췄다.
"미친놈..."
종인의 생각을 하면 할수록 흥분되는 제 몸을, 백현은 혼현 제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황금색의 털도 삐죽삐죽 튀어나와 어느 정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고, 백현의 마주친 이사이로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낮게 울리며 새어나왔다. 이 미친, 고작 종인이 혼현을 내보인 상황을 상상한 걸로 잔뜩 흥분한 백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급하게 백현을 질질 끌다시피 해 가게에서 빠져나온 경수의 눈이 번쩍이는 크고 동그란 호박색의 눈과 마주쳤다. 씨발, 얘 호랑이였지. 결국 나 몰라라 백현을 내팽개두고 경수는 저 멀리 떠났다.
사람이 없었기에 다행이지, 만약 사람들이 많았다면 도로변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는 몸집 큰 황금빛의 호랑이를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마 이쯤 되면 스스로 상황파악을 하고 있을 테니 곧 괜찮아지겠지, 뭐.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경수가 백현에 대한 걱정을 지웠다. 유독 흥분할 일이 많았던 백현에게 혼현 제어가 불가능했던 적은 많았다. 그때마다 아침 뉴스엔 황금빛의 호랑이가 있었다고 보도됐지만, 이미 그땐 백현이 정신을 차린 뒤였고 증거자료로 사용된 사진이나 영상들도 모두 흐릿해 사람들도 가벼운 농담이나 미신 정도로 받아들였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었다. 잽싸게 백현에게서 멀어진 경수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몇 배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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