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두 한 번 신어 볼랍니까?
w. 랑데부
24.
"팀장님 이번 달 슬링백 라인은 비비ㄷ, ..팀장님?"
팀장님 왜 저러는 거야? 몰라 이번 주 내내 저 모양이야. 무슨 일 있나보지. 강팀장이 무슨 일 같은 거 티내는 사람이냐, 아픈가? 영현은 휴대폰을 뒤집었다 다시 돌려내기만 반복했다. 제가 소집한 회의가 맞긴 하는가. 영 집중을 하지 못하던 영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그럼 ㅇㅇ씨 촬영 계속 진행할까요? 영 여론이 도와주질 않는데, D.A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요"
ㅇㅇㅇ. ㅇㅇㅇ, 그 여자.
ㅇㅇ의 이름이 들리자 영현은 15분 전부터 열심히 떠들던 대리에게 날선 시선을 치켜 들었다. 항상 비슷한 표정이었으나 갑작스레 영현과 마주한 정대리는 준비한 자료를 이어 읽었다.
"스폰 관련 이야기에 대해 회수하려는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여러 상황을 고려 해봤을 때 D.A에겐 새로운 모델을 적용시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윤은채씨로 교체 하는 게 맞다고 생각,"
"가정 사실화 됐다 해도, 업계에서 '여론'이라는 이유로 발 뺐다간 누가 이 회사의 얼굴을 맡겠다고 할까요. 하나를 위해 진행 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고 누누히 말씀 드렸는데"
영현은 까칠한 어투로 조목조목 말을 끝마쳤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영현은 손짓으로 프롬프터의 종료를 지시하고 수트 자켓을 든 채 일어났다.
"얼르은"
"강영현씨 너도 가라구"
왜 그 순간은
"멀리 멀리"
보이지 않는 상처에 닳아버린 사람같았을까.
영현은 도저히 디자인의 진전이 없자 펜을 내려 놓았다. 배우로써, 공인으로써 사랑만 받을 순 없다. 비난은 인기에 비례하기도 아니 그보다 더하기도 하니까. 근데 왜 그 순간만큼은 ㅇㅇ가 배우로, 공인으로써가 아닌 그저 버려진 한 사람으로 보였나.
이쯤 한 번은 와야 할 메시지는 조용했다. 먼저 문자를 보내볼까 휴대폰을 들었으나 영현의 움직임은 빠르게 멎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우린.
"팀장님 손님,"
"왔습니다"
ㅇㅇ였다. 정대리의 말을 이어 붙인 뒤 고맙다며 구십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 해맑게 영현에게로 돌아섰다. 참,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작고 하얀 손에 익숙한 파일 하나를 들고 소파에 앉은 ㅇㅇ는 해사했다.
"계약서에요"
"선물"
"안 받아갈 거에요?"
아니 이렇게 직접 싸인하고 가져오는 케이슨 드물다니까? 파일을 쥐고 흔들어 보이는 ㅇㅇ의 표정이 천진난만했다. 헤실헤실 웃으며 발장난을 치는 ㅇㅇ의 앞에 앉은 영현은 셔츠 윗 단추를 두 어개 풀러냈다.
"거기에 받아 적어요"
"을이 너무 우울하고 외로우면 같이 영화 보러 가주기 세번"
"ㅇㅇ씨"
"같이 밥 먹기 두 번"
어째 명령한다는 ㅇㅇ의 손은 간절히 모아져 있었다. 이건 명령도, 애원도 아닌 그 어디쯤이겠지. 영현의 입에서 어쩔 수 없는 미소가 입꼬리를 건드렸다. ㅇㅇ의 이야기를 추가적으로 적은 뒤 영현은 파일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거 전해주려 온 거에요"
"웬일로 조용하게 가네요"
"그럴수도 있지!"
뭐가 많이 찔렸다. ㅇㅇ는 영현의 나긋한 목소리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데리러 갈게요. 보내줘 장소"
문을 열던 손을 감싸고 다시 닫아버렸다. ㅇㅇ가 가까워진 기척에 올려다 보았을 땐 영현이 가까히 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잘가요"
마음대로 들여보내고 마음대로 내보내네?
영현에게 무슨 답도 하지 못한 채 내보내진 ㅇㅇ는 불투명한 유리 위로 빼꼼 안을 살폈다. 아 깜짝이야. 안에서 저를 고스란히 내려다 보던 영현과 눈이 마주친 ㅇㅇ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래.
*
"계약서 잘 전달했어요?"
"응"
도운은 차키를 찾으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밝은 표정이 퍽 텐션을 올렸다. 도운의 곁에 딱 붙어 CF 촬영 콘티를 살피던 ㅇㅇ는 외압에 의해 뒤로 휘청였다.
"조심 좀 하지, 꺾일 뻔 했잖아"
은채였다. 더 중심을 잃은 것은 ㅇㅇ였으나 가로채 먼저 말을 꺼낸 은채는 ㅇㅇ를 위아래로 훑었다.
"실장님이 혼낼만했네. 관리 포기했니?"
"이봐요"
"영 쉽지 않지. 근데 주사는 안 맞아, 그 자국은 좀 흉하잖아"
"뭐? 야"
도운은 ㅇㅇ의 손목을 붙잡아 뒤쪽으로 끌었다. 물론 ㅇㅇ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 ㅇㅇ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도운은 은채의 곁 우물쭈물대는 매니저를 또렷히 바라보았다.
"누나 늦었어요. 안녕히 가세요"
"야, 잠깐만. 야!"
"너 영화 주인공 교체하는 거 알고 있지?"
ㅇㅇ의 걸음이 멎었다. 누굴 교체해? ㅇㅇ가 빠른 속도로 은채를 향해 돌아섰다.
"다 낡아 떨어져서 갖잖은 소문들만 달고 다니는 배우를 쓰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이거지"
"다시 말해봐"
"이미 이야기 싹 돌았어. 지금 한실장이랑 다시 계약하러 가는 길이고"
ㅇㅇ가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은채가 한 이야기가 전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그것보다 이미 은채에게 넘어갈 배역을 가져올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은채의 예상과는 달리 ㅇㅇ는 주차장으로 향해 걸었다. ㅇㅇ를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ㅇㅇ는 아무렇지 않게 도운을 기다렸다.
배우에게 들어갔다는 건 비공식이지만 거의 확정이었다. 어느 부분에서 교체가 되었는지 ㅇㅇ는 뻔했다. ㅇㅇ가 먼저 호텔로 올라와 버린 날. 그 모두가 원하는 작품에 안달이 나고 혈안이 된 그 날이었겠지.
*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별 일 없어.., 응?"
영현의 두꺼운 손이 ㅇㅇ의 머리를 쓸어 내렸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ㅇㅇ의 머리를 쓸어내리던 영현은 되려 '왜'라는 물음을 지어 보였다.
"뭐해"
"강영현씨가 하길래"
아니 나도 해야하는 건 줄 알았지. 똑같이 영현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ㅇㅇ의 행동에 영현은 소리 죽여 웃었다.
"강영현씨"
"네"
"영현씨"
"네"
"영현아"
"영현아"
영현의 손이 우뚝 멎었다. 장난이었는데, 기분 나빴나. 영현의 깊은 눈이 조용히 감겼다 뜨이며 ㅇㅇ에게로 향해 내려다 보았다. '왜'. 입모양으로 묻는 영현의 표정은 꼭 굳어지지만은 않았다.
"응?"
"아니, 그냥"
"네"
그냥 영현씨 이름이 편해요.
뭐가 편한데요?
"안 갈 거 같아"
"어딜"
ㅇㅇ는 차분하게 묻는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어디든 그쪽은 떠나지 않을 것 같아. ㅇㅇ는 대신 해맑은 미소로 답하고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현은 묻지 않았다.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덴 이유가 있겠지.
네가 오지 않았던 것처럼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왜 ㅇㅇㅇ와 네가 자꾸 겹치는 걸까. 영현은 자연스레 표정이 굳었다. ㅇㅇ는 ㅇㅇ고, 너는. 그냥 넌데. 영현은 조이는 넥타이를 약간 풀고 잠시 일어났다.
"금방 올게요"
애꿎은 필터만 씹어대며 불을 부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계절 속에 살며 가끔 추웠다. 정말로 보고 싶어서, 혹은 아직 너무도 사랑해서. 아니면,
"...하"
영현은 손으로 감싸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비벼 끈 뒤 담배갑을 구겼다.
아니면 너만큼 사랑할 사람이 생길 것 같다던가.
25.
- 자요? 11:08
- 네 11: 10
자면서 답장을 하냐고 이 남자야. 대체 어떤 말을 보내야 저 "네" 혹은 "자고 있어요" 따위의 답장을 피할 수 있을까.
물론 뚝뚝 끊기는 답장들이었지만 애써 대화를 끊으려는 반응은 아니었다. 한참 이야기를 풀어내고 답을 받다 시간을 확인하면 새벽녘을 훌쩍 지나있을 때도 있었다. 영현과의 연락 도중 갑자기 뜬 전화는 발신자 표시 제한이었다. ㅇㅇ는 화면을 밀어 전화를 지웠다. 누군지 너무 잘 알겠으니까.
-못 찾을 것 같아? 12:05
-이제 그 집에서 나올 때도 됐잖아 12:05
영현에게 답장을 보내던 손가락이 멎었다. 한참 오지 않은 연락이 날아올땐 그만한 타격이 함께 올 것을 모른 것은 아니다. 근데 이건, 정말 아니다. 예상 시나리오에 한 번도 넣지 않았던 상황이다. ㅇㅇ는 일층에서 나는 기척에 이불을 쥐었다. 도운의 집이었다. 내 신상, 내 거처도 아니고. 내 소중한 사람의 집. ㅇㅇ는 패딩을 챙겨 입고 급하게 모자를 썼다.
"고타, 쉿. 쉿 고타야"
"어디가요?"
"아 깜짝이야!"
"..누나 제가 더 놀랐어요"
도둑인줄 알았잖아요. 눈을 비비며 부스스하게 일어난 도운에 ㅇㅇ는 휴대폰을 뒤로 숨겼다. 공원 조금 돌려고, 아까 먹은 게 소화가 안돼. 같이 갈까요? 도운은 ㅇㅇ의 모자를 바로 씌워주고 머리칼을 뒤로 정리해주며 물었다.
"한 삼십분만 돌고 올게"
"마스크하고"
"그래 마스크하고"
금방 올게.
ㅇㅇ는 도운을 등지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다시 한 번 한실장에게 경찰은 어떻게 됐는 지 날이 밝자마자 확인할 것이었다. 우선, 다른 곳에 있어야 했다. 대충 둘러대고 주소 찍어 보내면 되니까. 영현을 부르기도 미안했다. 지난번 괜히 영현을 놀래켜 제대로 민폐를 끼쳤으니. ㅇㅇ는 골목에서 조금 내려와 으슥한 모텔 한 구석으로 들어갔다.
- 자요? 12:55
- 이제 자려구요 01:32
ㅇㅇ는 들어오자마자 쳐둔 커튼을 다시 확인하고 소파 위에 누웠다. ㅇㅇ가 머무는 그 어디든, ㅇㅇ는 절대 퀸사이즈 침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곳만큼 내가 혼자라는 걸 아주 선명하게 증명하는 곳은 없었으니까. ㅇㅇ는 도운에게 대충 문자를 찍어 보낸 뒤 눈을 감았다. 아, 이어폰 두고 왔네. 찬바람을 쐬며 내려와서인지 금방 속눈썹이 길게 올라간 두 눈은 꾸벅꾸벅 감기기 시작했다.
- 잘자요 01:48
*
"이봐요"
"윤은채랑 같이 찍는다는 말 없었잖아요"
"사전 변경을 당일까지 못 받았다고요. 계약 위반인 거 아시죠?"
"그러니까 저도 잘..,"
"담당자 연결해요. 당장"
어차피 같은 소속사인데 왜 저래? 몰라. 진짜 깐깐하게 구네.
ㅇㅇ는 눈 위를 쓸고 지나가는 브러쉬의 느낌만을 생각했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대응하면 일만 커졌다. ㅇㅇ는 뺨에 닿는 블러셔의 향을 집중했다. 주연만 고집하면서 원탑 해먹던 년 습관 어디 가겠어? 지 옆에 누구 세우는 꼴 못 본다 이거지.
"어떡해? 밀려서"
"그러게, 밀려서 어떡하냐"
"이제 내려올 때도 됐잖아. 좋게 생각해"
먼저 메이크업이 끝난 은채는 대기실을 빠져 나갔다. 영현이 떠올랐다. 영현이 보고 싶었다. 그냥 내 옆에 있어줄 것 같아서.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니에요 됐어요. 안 뜨거운데? 괜찮아요, 정말"
어깨를 짓누르고 떨어진 고데기에 겁을 먹은 스타일리스트를 진정시켰다. 별 일두 아니고, 실수 할 수 있죠. 이만큼 예쁘게 해줬는데 에이 괜찮아요. ㅇㅇ는 해맑은 미소로스타일리스트의 손을 쥐었다.
"손 데인 것 같은데 가서 물로 꼭 씻어요. 알겠죠?"
대기실을 나오자 익숙한 이가 보였다. 아니 보고 싶은 사람이 서 있었다. 오늘도 역시 항상 같은 차림새로 수트를 입고 구두를 하나씩 확인하는 영현이 보였다. 인사를 건네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가자 영현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ㅇㅇ가 아닌 그의 앞에 서 있는 은채에게. 편안한 표정으로 은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영현에게 더 다가갈 수 없었다.
"아"
"어? 이거 므아?"
(이거 뭐야?)
"고타 간식"
이 시키가 또, 또 장난.
입 안에 확 퍼지는 달콤함을 두고 고타 간식이라니. 그걸 또 믿냐며 웃음이 터진 도운의 어깨를 툭 치고 ㅇㅇ는 초콜릿을 삼켰다.
"어깨 왜 그래요?"
"아, 내 실수. 움직이다가 데였어. 티 많이 나?"
"안 아파요?"
"티 많이 안 나?"
"많이 데인 거 같은데, 진짜 괜찮아요?"
"괜찮다니까"
너 이제 내 말은 전혀 안 듣기로 작정했구나. 그래 누나가 이제 아주 만만해 죽겠지 어?
"누나 고개 들어봐요"
"응?"
도운은 ㅇㅇ에게 가까히 다가섰다. 이거 뭐 묻은 거지, 눈 밑에 떨어진 글리터를 화장이 밀리지 않게 손가락으로 살살 떼어낸 도운은 흘러내린 ㅇㅇ의 드레스 끈을 올려준 뒤 떨어졌다.
"들어가요 이제"
"..어? 어어"
"집중 집중. 누나 내 딱 보고"
가까히 다가선 어색한 공기에 우왕좌왕하는 ㅇㅇ의 앞에 딱, 손을 튕긴 도운은 컴퓨터 뒤쪽에 서 휴대폰을 꺼냈다. 언제 그랬냐는듯 싹 달라진 분위기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ㅇㅇ를 주시하던 도운은 옆에 붙은 은채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담당자는 ㅇㅇ의 이미지를 거론했고, 이미 다 체결된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은채가 ㅇㅇ에게 어떤 사람인지 영현이 알리가 없었다. 그랬으니 붙였겠지. 도운은 몇 걸음 옆에서 사진을 확인하는 영현을 잠시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은채씨 표정 좀 더 다양하게. 동선도 더 이동해도 돼요"
은채가 보폭을 늘리고 영현을 바라보자 영현은 괜찮다는 싸인을 보내주었다. 그 모습마저 도운에게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도운은 영현의 피드백을 주고 받는 사이 혼자가 된 ㅇㅇ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잘 나오는데 누나 왼쪽으로 조금만 틀어요. 머리가 자꾸 그쪽으로 날리네. 어, 예쁘다"
"객관적이야?"
"언제나 제 눈은 객관적이죠"
"도운아 시력 검사 다시 하자. 이거 몇 개야 어?"
도운의 눈 앞에서 ㅇㅇ는 손가락을 번갈아가며 흔들었다.고마워, 좀만 고생해. 응? 다시 촬영이 재개 되고 ㅇㅇ는 최대한 은채와의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자꾸 신경을 써야 했다. 부딪히지 않으려,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필름 바꾸고 의상 갈아입을게요"
여러가지를 신경쓰면서도 카메라에서 모든 것을 감춰야 했다. 어느새 등 뒤가 땀으로 젖은 ㅇㅇ는 손부채질을 하며 구두를 벗었다.
"팀장님 제가 슈즈 화보는 처음이라, 많이 서툴죠"
"그정도면 가능성이 높죠. 잘하고 있어요"
"다음 촬영은 더 잘할게요. 근데 이번 컬렉션 너무 예뻐요, 걷는 것도 조심스러워지고"
"구두에 신경이 쏠리면 다칠 수 있으니까 편하게 해요. 자연스럽게, 잘 나올 거에요"
나한텐 그런 말 해준 적 없으면서. 영현의 너그러운 대화가 ㅇㅇ를 스쳐 지나갔다. ㅇㅇ는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먼저 대기실로 들어가 앉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도운의 문자를 확인한 ㅇㅇ는 도운이 두고 간 이어폰을 꽂았다. 익숙한 고요가 귀를 덮었다. 내 욕도, 내 모든 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
"ㅇㅇㅇ"
"ㅇㅇㅇ"
"ㅇㅇ씨"
"..어, 네? 네"
의상, 먼저. 이어폰 안으로 영현의 짧은 목소리가 웅웅댔다. 아무 생각 없이 감고 있었던터라 화들짝 놀란 ㅇㅇ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피곤해요?"
"저요? ..아니요. 괜찮아요 진짜. 멀쩡해요 저"
"팀장님 이것 좀 도와주세요"
"피곤하면 오늘 회식 오지마요, 들어가 쉬어요. 연락할게요"
ㅇㅇ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현은 전혀 의도를 담지 않고 이야기했겠지만 ㅇㅇ는 웬지 아렸다. 영현이 쥐었던 어깨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이게 아픈 거였나.
*
ㅇㅇ는 회식에서 줄곧 혼자였다. 어차피 다이어트 중이니 음식은 당연히 입에 댈 수 없었고, 술도 마실 수 없으니 물만 호록호록 마시며 간간히 인사나 리액션을 취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앉은 영현은 사진 작가와 은채, 여럿 사이에서 꾸준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받았다. 그냥 보고 싶은 사람 얼굴 보고 있으니까 좋네. ㅇㅇ는 고개를 돌려 술을 들이키는 영현을 적당한 시선에서 담았다.
"누나 이거"
"어?"
"발라야 할 것 같아서"
도운이 조심스레 다가와 화상 연고를 짜 ㅇㅇ의 어깨 위로 살살 발라주었다. 매니저들은 따로 앉아 식사를 하니 다가온 줄도 몰랐다. 도운은 아까보다 약간 깊어진 흉터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정도면 아팠을텐데.
"도운아 2차 가야해?"
"..힘들어요?"
"아니, 그냥. 우리 이따 집에 가다 맥주 한 캔만 사가지구 가자"
"알았어요. 조금만 앉아 있다 나와요, 차 안에 있을게"
슬슬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에 도운이 먼저 빠져 나갔다. ㅇㅇ도 가방을 챙겨 인파에 잇따랐다. 아 2차 노잼인데. 웬일로 영현이 없었다. 시야에 항상 있었는데, ㅇㅇ는 빼꼼 고개를 내빼 둘러보았다.
"..저기 혹시 영현, 아니 강팀장님 가셨어요?"
"네? 아아 저기요. 은채씨 많이 취해서"
꽤 많이 마신 모양인지 몸을 앞뒤로 풀럭이며 흔들리는 은채를 받치고 있는 영현이 보였다.
"매니저 불러야 할 거 같은데, ㅇㅇ씨 은채씨 매니저분 번호 알아요?"
"네? 아, 도운이한테 전화 해 볼게요"
ㅇㅇ는 금방 나간 도운에게 상황을 전했다. 피곤하게 해서 미안해. 함께 들어온 도운에게 미안한 기색을 보이는 ㅇㅇ였다. 은채를 업은 매니저가 자리를 뜨자 썰렁하게 빈 식당에는 세 사람만이 애매하게 서 있었다.
"누나 이거"
"어? 어 고마워"
도운은 코트를 벗어 ㅇㅇ에게 덮어주려 건네자 영현은 도운의 손을 막아섰다.
"뭐하시는 겁니까"
"다쳤어요?"
"네? ..아, 별 거 아니에요. 아까 그냥 좀"
"언제?"
도운은 막아선 영현의 손을 떼어내고 ㅇㅇ의 어깨에 코트를 덮었다. 여전히 영현의 시선은 코트가 덮힌 어깨 위에 머물러 있었다. 예민하게 내쳐진 손 또한 신경을 자극했지만 영현은 ㅇㅇ의 손목을 쥐고 다시 물었다.
"언제"
"아까 메이크업 받다가, 괜찮다니까요?"
"왜 말 안 했어요?"
"늦었어요. 가죠 누나"
"윤도운씨"
뭐야 둘이.
싸늘하게 식은 도운의 시선이 차갑게 얼은 영현의 시선과 맞물렸다.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여기서 내가 자연스럽게 빠지면 되는 거겠지. 누나 그냥 버스 타고 갈게, 도운아. 도운은 ㅇㅇ의 손목을 쥔 영현을 내쳤다.
"의사 없이 잡으면 불쾌하죠"
"윤도운씨가 뭔데 자꾸,"
"매니저죠"
"누나가 아픈지, 지금 당장 왜 힘든지. 곁에 남고 믿는게 내 일이에요"
"영현씨, 아니 윤도운. 너 뭐해"
"팀장님은 뭐죠?"
야 너 무슨 말을, 윤도운. 도운은 영현의 답을 받을 작정을 한 것만 같았다. 당장 어떤 이유로 얽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ㅇㅇ는 섣부르게 낄 수가 없었다. 단호하게 영현을 바라보는 도운은 어쩌면 초면이었다. 저렇게 굳어졌던 적이 있었을까. ㅇㅇ가 사고를 거하게 치고 돌아왔을때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ㅇㅇ는 두 사람을 올려보다 찬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2차전은 나 보내주고 하면 안 돼나. 얼어 죽겠는데.
26.
"누나"
"누나"
옥상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묻은 ㅇㅇ는 거칠게 저를 때려대는 바람에 도운의 목소리를 함께 흘려 보냈다. ㅇㅇ의 뺨을 쓸어 날리는 바람은 ㅇㅇ의 눈물을 함께 가져갔다.
"정말 미안해요.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 요즘 은채씨가 이미지도 좋고 많이 떠오르니까.., 주연만큼 정말 중요한게 조연인 거 ㅇㅇ씨가 더 잘 알잖아. 응? 다음에 꼭 다음 작품에 주연으로 하자. ㅇㅇ씨 빠지면 이거 못 나가, 제발 ㅇㅇ씨 내가 부탁할게"
액션스쿨에서 연습하다 틀어진 어깨에 붙여둔 파스가 얼얼했다. 이제 자신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본집 위 윤은채라는 이름에 두 줄이 그어지고 그 위 ㅇㅇ의 이름 세 글자가 휘갈겨져 있었다. 비중을 따지는 게 아니었다. 끝내 이 스토리의 주인공을 너무 사랑해 놓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자. 도운아 출연한다고 얘기 넣어주고 다음 리딩 잡히면 알려줘"
"알았어요"
벌떡 일어나 활기찬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ㅇㅇ의 앞에 허리를 숙여 ㅇㅇ의 롱패딩을 올려 주었다. 아직 날 많이 추워요.
*
"강영현씨"
"이봐요"
"워!"
영현의 어깨를 조그만 손으로 붙잡자 영현은 화들짝 놀라 이어폰을 빼고 돌아 보았다. 언제 왔어요? 적어도 십분은 됐죠.
"갈까요?"
"음 오늘은 영화 아니에요. 영화 말고"
"그럼?"
"별 보러 갈래요"
"별?"
"응!"
가는 내내 ㅇㅇ는 꽤 신이 난 모양이었다. 묻지도 않은 오늘 하루를 풀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ㅇㅇ는 저 자신이 되기도, 면박을 준 감독이 되기도, 엉뚱한 FD가 되기도 했다. 영현은 조그만 손을 위 아래로 움직이며 말하는 ㅇㅇ를 흘려 보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단 둘이 있을 땐, ㅇㅇ는 마치 어린 아이.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행복을 맛보는 아이 같았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강영현씨는요"
오후 내내 힐을 구겨 신고 서 있었더니 발이 다 긁혀 있었다. 영현은 망설임 없이 제 구두를 벗어 ㅇㅇ의 앞에 내려 놓았다. 크니까 조심히 올라가요. ㅇㅇ는 종이배처럼 큰 영현의 구두를 신고 질질 계단을 올랐다.
"강영현씨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네. 없어요"
ㅇㅇ는 팔을 축 내리고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와 진짜 매정해.
"장난이에요"
영현은 ㅇㅇ의 표정을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 뽀얀 뺨이 부풀어 오른 게 마치 오븐에 들어간 반죽 같았다. 영현은 자켓을 벗어 ㅇㅇ의 어깨에 둘러 주곤 물었다.
"언제부터 연기했어요?"
"어.. 다섯, 아니다. 정식은 여섯살? 내 기억으론 그래요"
"그때부터 좋았어요?"
좋았냐고? 글쎄. 좋았나.
ㅇㅇ는 잠시 답을 보류했다. 좋아서 했었나. 물론 지금은 좋다. 나로 사는 것보다, 가상의 인물로 살아가는게 덜 외로웠다. 고난을 겪어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흔들었고, 항상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 그냥 그 사람들로 살면, 침대에 있을 때보다 좋으니까.
"너무 어렸어서 글쎄요. 뭐, 지금은 좋아요. 연기할 때가, 내가 내가 아닐 누군가일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해"
"근데, 왜 맨날 미안하다고 해요?"
"응?"
왜 맨날 악몽에서 깨어나질 못해요?
ㅇㅇ는 가만히 영현의 질문을 파악했다. 아, 잠들었을 때?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내려다 보는 영현에게 웃어보였다. 다 직업병이죠, 뭐. 영현씨는 꿈에서 디자인 안 해요? 그런거야. 다 영현은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더 파고들어 ㅇㅇ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어느새 정상까지 도착해 달려가는 ㅇㅇ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서울에 이런데가 있어, 와. 강영현씨 빨리 와봐요 저거 북두칠성 아니에요?"
"아니에요"
"맞는데!"
"아닌데"
ㅇㅇ의 눈은 희미하게 빛나는 별보다 더 밝았다. 열심히 손가락으로 별을 이으며 돌아다니는 ㅇㅇ는 마침내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맞는 거 같은데? 맞죠. 지인짜 맞는 거 같아"
누가 봐도 억지로 이은 별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스에서 봤던 ㅇㅇ가, 호텔에서 나를 밀어낸 ㅇㅇ가 겹쳐 보였다. 웬지 달랐다. 더맑았고, 거침없는 목소리. 그리고,
"눈 감아봐요"
구두를 질질 끌고 달려와 까치발로 서 영현의 눈을 대뜸 가리는 이 모든 행동이.
"누군지 맞혀봐요"
저 먼 곳으로 달려가 장난기를 잔뜩 품은 채 넥타이를 메고, 구두를 집어 올리는 행동들이.
"누구게"
새삼 추위가 느껴졌다. 또렷하게 바람이 불었다. 이 계절에서 끄집어 내려 나를 흔드는 누군가 때문에.
영현은 그 기점으로 다른 소리가 잘 들리우지 않았다. 그냥 추위가 심하게 느껴졌다. 아 이 남자 또 이러네, ㅇㅇ는 계단을 내려가다 영현에게 다가가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먼저 내려가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앱니까?"
"편견이에요. 빨리, 가위 바위 보!"
어이없는 미소가 튀어 나왔다. 이 여자 정신연령 몇 살일까. 나름 맟추어 낸다는게 이렇게까지 벌어질 줄 몰랐다. 어떻게 하는 족족 이기는 거지. 영현은 자신도 기가 찼다. 와 한 번을 안 져주네. ㅇㅇ는 회심의 일격일랑 보자기를 냈지만 영현은 이미 계단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짜증나 강영현.
"..짜증나요"
"그런 것 같네요"
"못 하는 거 없어요? 어떻게 한 번을 안 져"
"ㅇㅇ씨가 못한다는 생각으론 안 가죠?"
말하는 거 봐. 와, 세상 억울해서 자빠져야겠네.
ㅇㅇ의 볼은 다시 오븐에 들어간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 강영현 치사해, 와 미워. 짜증나. 영현은 다시끔 ㅇㅇ에게로 올라와 키를 맞추었다. 세 계단정도 밑에 선 영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ㅇㅇ를 올려다 보았다.
"쳐다보면 뭐 어쩔껀데.., 요"
"소원이 뭡니까"
"말 안 할 거에요"
"그럼 말고"
"아니, 아아니! 아 강영현씨!"
"왜요"
정말 억울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ㅇㅇ는 주먹을 쥐고 동동대며 어물댔다. 아 그러니까, 내 소원은.
"단속 잘 할게요"
"예?"
ㅇㅇ는 계단을 내려와 영현의 앞에 마주섰다. 아니 영현을 끌어 안았다.
"그러니까 나랑 약속 하나만 해요"
그 이상 무엇도 바라지 않을게요. 부담스럽게 굴지 않을거니까 강영현씨
"내 옆에 있어줘요"
ㅇㅇ는 영현의 품에 파고 들어 웅얼댔다.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돼요. 싫어해도 돼.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던 다 괜찮아요. 나를 이용해도 괜찮아요. 다.
"그냥 떠나지만 말고 있어줘요"
영현은 ㅇㅇ를 바스러질듯 끌어 안았다. 오늘만 안아볼 것처럼. 오늘이, 아주 마지막인 것처럼.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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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두 달만에 올라온 글치곤 저퀄이네요. 하지만 다시 천천히 굴러가 보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 연재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죄송하고 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랑데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