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리 뒤로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벌써 이 가파른 달동네의 계단에 오르내린 지 3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의 다리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매일 계단을 오를 때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댄다. 무시하고 계단은 차근차근 올랐다. 나는 나의 몸이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소리를 무시하는 데만 익숙해져 버렸다.
봄의 따스한 햇볕이 달동네의 계단에, 더럽게 얼룩진 담벼락에, 내려앉을 것 같이 위태롭고 먼지로 뒤덮인 낡은 지붕에 부딪쳐 조각조각 나다가 이내 나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벌써, 봄이 왔다. 유난히 손끝이 아려오도록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언제 추웠냐는 듯 나를 위로해 주는 따뜻한 봄이 왔다. 그리고 한 자리 숫자가 작년보다 하나 더 커진 2012년의 본격적인 시작이 비로소 추위가 풀린 이 봄에서야 시작됐다. 희망이라는 작은 씨앗이 나의 마음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쥐도 새도 모르게 심어져 봄의 내음을 맡으며 점점 싹트기 시작했다.
“후…….”
이 제 곧 달동네의 담장에는 아이들의 크레파스 낙서들이 다시금 생겨나 활기가 샘솟을 것이며 계단 사이사이의 검게 찌든 때 사이로 언제나처럼 축축한 이끼들이 새로 자라남으로써 질척하게 그들의 푸르름을 뽐낼 것이다.
또 다시 며칠 전부터 나의 마음속 한 구석을 간질이던 희망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이제 곧 잘, 살 수 있겠지. 아버지가 3개월 전 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것은 나의 희망을 더욱 더 부풀게 만들었으며 사실 나는 그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봄을 잔뜩 만끽할 자격이 되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3개월 전 어느 날 밤에 아버지에게 맞았던 몸의 시푸른 멍은 이제 다 가라앉아서 없어졌다. 아버지가 뱉어내던 탁한 날숨에 엉킨 술과 마약의 역겨운 냄새도 이제 봄의 향긋한 내음에 실려 희석되었다. 이대로 영원히 짐승만도 못 한 아버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엔드로 핀이 저절로 솟아나는 상상에 살며시 웃으며 좁은 계단을 향해 내리꽂아져있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절반정도 올라왔나 싶었는데 여전히 점처럼 보이는 자신의 집이다. 더운 날숨을 훅훅 뱉으며 다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 꼬마야."
단지 나에게 인사를 건넨 것뿐인데도 나의 기분을 단번에 불쾌하게 만들어버리는 목소리가 나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나를 향한 게 분명할 테지만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목소리는, 잠시 나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주위에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머리를 굴려가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애쓰던 중, 희뿌연 기억의 안개 사이로 어느 형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어디서 많이 들어보긴 한 거 같은 목소리다. 서서히 기억의 안개가 걷히고 검은 형상에 불과했던 모습이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취했을 때, 나의 뇌는 그의 존재를 완벽하게 알아채고 온 몸의 신경세포들에게 소름이 돋도록 명령했다.
성격이 개차반으로 유명한 그.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어느 조직의 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신경원. 그가 날 찾아온 거였다. 이 목소리는 신경원이 분명했다. 얼굴 만면에 띤 꺼림칙한 표정을 어렵사리 지우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드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신경원의 시커멓고 역겨운 얼굴이 내 시야로 들어왔다.
드디어 오네, 그의 발음은 담배를 꼬나물고 있어서 그런 가 불분명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술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린 담배의 하얀 몸뚱이가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춤을 춰서 나는 그 쪽으로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나의 시선을 느낀 건지 그가 씩 ― 웃는 이상한 표정을 지은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살벌하게 빛내고 있는 아주 모순된 가면. 순간 역한 구역질이 목구멍을 치밀고 올라와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끝이 하얗게 질린 손을 저지시키며 토사물 대신 깊은 한숨을 뱉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신경원이라는 저 사람, 딱 한 번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버지가 가져간 빚을 내놓으라며 집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갔었다. 조폭들이 돈을 내놓으라며 집안의 물건들을 박살 낸 적은 많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것 선심 것 부시고 던지고 갔지 이 사람처럼 당장 돈을 내놓지 않으면 이판사판이라는 듯 난리를 치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돈을 내놓지 않는 나를 복날의 개잡듯 때리고 간 사람이었다. 그 날, 그에게 맞았었던 광대뼈가 욱씬 아파오는 거 같다. 그렇게, 독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또 다시 나의 집에 찾아왔다……. 어휴, 갑자기 골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리듯 아파와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별일은 아니고.”
내 집에서 나오면 바로 밟게 되는 좁은 계단에서 몇 칸 내려온 곳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던 신경원이 다리를 쭉 피며 몸을 일으킨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은 쉬이 쳐다볼 수도 없게 당당하며 거만하기 짝이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주 재밌는 장난감을 소유한 주인처럼 호기심과 재미, 기대로 일렁이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라고 의아함을 느낀 나는 얼른 신경원을 피해 세 계단 내려갔다. 평소와 아주 많이 다른 눈빛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경계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또라이로 소문난 놈인데 저런 위험한 눈빛을 하고 있다니. 그 것도 나를 향해. 아주 겁이나 죽겠다. 신경원이 자신을 피해 뒤로 물러나는 나를 보고 낄낄 웃는다. 존나 눈치 빠른 새끼네, 라고 중얼거리는 게 내 귓가에 까지 다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묻고 싶었는데 나는 차마 묻지 못하였다. 사람의 입이 참 이상한 게, 입을 열어야 될 상황에서는 이상하게도 추를 매단 듯 무거워져서 열기가 힘들어 진다는 거다. 꿀꺽, 마른 침 넘어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 나는 내가 몹시 긴장했음을 알고 또 다시 긴장했다. 많이 무섭기도 하다, 지금.
끼익 ― 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내 집 쪽에서 들리더니 녹이 쓴 대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신경원의 부하로 보이는 조폭무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하나, 둘, 셋……신경원이라는 사람만 제외해도 6명이다. 여태까지 왔던 조폭들 중 가장 수가 많아서 나는 신경원이 오늘 정말 날 잡고 왔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기지? 나는 신경원의 눈빛을 애써 피하며 아버지가 빼앗아갈까 봐 몰래 싱크대 밑 서랍에 숨겨놓았던 통장의 잔액을 생각해 내려 노력했다. 신경원과 그의 부하들이 못 찾아낼 게 분명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빌려간 돈을 갚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고, 왜 땅 꺼지게 한숨을 쉬고 그래. 앞날이 창창한 네가."
이 딴 쓸데없는 말을 하며 신경원이 나를 향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나도 그가 내려온 만큼 그를 피해 내려가고 싶지만 꾹 참고 가까워져가는 그의 눈을 당당하게 마주했다. 사실 겁에 질린 다리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미묘하게 긴장되는 상황에서 손에 땀이 나 바지에다가 쓱쓱 닦으니 그 걸 본 경원이 피식 웃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하든 나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가 드디어 나와 그 사이에 한 계단을 남겨두고 내려오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곤 또 살짝 웃는다. 나는 제발 좀 이 남자가 그만 웃었으면 좋겠다. 왠지 그가 웃으면 내가 울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그게 싫었다.
한 동안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처음에는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해하다가 이내 긴장하기도 지쳤을 때,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경호를 하고 있던 딱갈이한테 무엇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령을 받은 딱갈이가 품에서 새하얀 종이 하나를 꺼내 신경원에게 정중하게 건넸다. 종이를 건네받은 신경원은 종이를 건성으로 한 번 쓱 훑더니 피식 웃고, 나에게 그 종이를 내밀었다. 어? 그가 종이를 나에게 내밀 줄을 미처 예상치도 못해서 나는 멍청하게 그의 얼굴에다 되물었다가 그가 귀찮듯이 어서 가져가라고 턱짓을 해서, 얼떨결에 그가 나에게 건네고 있는 종이를 받아드렸다. 뭐지? 일단 찬찬히 종이를 살펴봤는데 무슨 어려운 말만 잔뜩 써 놓은 서류 같았다.
"너의 아비라는 작자가 쓰고 갔어."
"이게……뭐데요?"
"네 아비가 돈 빌린 증거로 남긴 서류."
"아…….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데요?"
"밑에 봐 봐."
경원의 말에 바로 밑으로 시선을 내리니 종이 오른쪽 끄트머리에 아버지의 이름이 급하게 쓴 듯, 곧 날아갈 것 같은 필체로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 보증인이라고 검은색 바탕체로 써진 단어 옆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나의 이름이 보였다. 장동우. 서류에 써진 내 이름은 처음 보는 아버지의 필체로 적혀져서 그런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나의 이름이 진짜 장동우였나, 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근데, 대체 왜 내가 여기에 적힌 거지? 그 것도 보증인으로?
"네 아비, 죽었다."
“…….”
“뭐냐, 죽은 거 알고 있었냐?”
“지금…….”
“어.”
“내 아버지가……죽, 죽었다고 말했, 어요?”
“응.”
서류에 적힌 내 기묘한 이름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경원이 새 담배를 꺼내 물며 심심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니. 어릴 적, 제발 죽여 달라고 하느님께 밤낮으로 빌었어도 질기게 살며 저를 두고두고 괴롭혔던 아버지가, 50대 중반이여도 나를 뒤로 날아가게 할 정도의 뺨따귀를 후려치던, 그 정도로 쌩쌩하던 아버지가 죽어버렸다고? 죽는 다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되었단 말이야, 아버지가? 신경원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 죽었다고. 단 한 순간에. 너무나도 짧은 문장으로 말이다. 믿을 수 없어. 진짜로, 믿을 수 없어. 아니 이 건 믿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야. 그 건……전혀 말도 안 돼는…….
자신의 말에 엄청나게 놀라 서류를 떨어트려버리고 잘게 떨고 있는 동우를 보며 경원은 또 다시 입 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어, 마약 과다복용으로 내장 다 썩어서 죽었던데? 저기 옆 동네 저수지에 불어터진 채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시체가 있다 해서 가 봤더니 너의 아버지더군.”
"……말도 안 돼……."
"그나저나, 이제부턴 네가 네 아버지가 진 빚을 갚아야 한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 받아드리기도 전에 경원은 또 다시 나에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준다. 내가? 아버지의 빚을? 그 게 도대체 얼만데. 물론 아버지가 직접 말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아버지의 평소 행실을 보면 상상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떠올려졌다. 도박에 술값에……마약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총 얼마냐면 ― .”
“잠깐만요! 제가 그 걸 왜 갚아요? 제가 쓴 것도 아닌데?”
당연스럽게 빚을 불려주려는 경원의 행동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대로 휘말릴 뻔 했지만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그의 말을 저지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죽었고 자신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으면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을 안 갚아도 될 터였다. 드디어 해방되는 건가?! 나는 얼른 경원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제가 아버지와 인연을 끊으면 저는 아버지의 빚을 안 갚아도 되는 거 아닌가요?”
“아, 그건 안 될 말씀이고.”
“왜, 왜요?! 합법적으로도 가능 한 거잖아요!!”
“나 참, 너의 아버지가 합법적으로 돈을 빌렸을 때만 그건 가능한 소리지.”
“무슨…….”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사채업자한테 돈을 빌렸고……사채업자, 그 것도 신경원은 절대로 그냥 그 많은 돈 들을 무산되게 하지 않을 것 같다.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꽤나 배웠긴 배웠나 보네. 그 것도 알고. 그래도, 꼬마야.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그게 사람의 도리 아니니?”
"알아요, 당연히 갚아야죠! 근데 왜 제가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되요? 제가 쓴 것도 아닌데?!"
"그래, 나도 알아. 돈은 네 아버지가 썼지. 하지만 네 아비라는 놈의 새끼는 1억 가까이 되는 돈을 빌려가 가지고, 지금 이자까지 합하면 돈이 장난 아니거든?"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위에 계시는 형님들께서는 지금 어떤 기분일 거 같아?"
"……."
"당장 너의 내장을 다 중국으로 넘겨버리자고 난리쳤지만 내가 말렸지."
"……왜요."
"너는 그 쪽보다는 다른 쪽이 어울릴 것 같아서."
"……."
경원이 그와 나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던 계단 위로 두 발을 내려놓았다. 이제 그와 나는 거의 서로의 옷들끼리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경원은 허리를 굽히며 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숨소리가 귀 가까이에서 들리자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아서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온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한 역겨움이 온 몸 위로 끼쳐왔다.
"……창녀촌, 가봤어?"
그 말에 핀트가 나가버려 몸부림을 치며 도망치려던 나를 여섯 명이나 되는 조폭들이 붙잡았다. 놔, 이거 놓으라고!! 잡힌 팔과 다리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치는 나의 머리채를 누가 뒤에서 아주 강하게 잡아당겼다. 헉! 하고 급격하게 꺽여진 목에 놀란 나는 이내 머리채가 뽑힐 것 같은 아픔에 살짝 눈을 붉혔다. 신경원이 킬킬 웃는다. 참 즐거운 웃음소리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그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얼굴에다 대고 독한 담배연기를 뿜는다. 눈과 코가 매워져 기침이 나오는데 쉽게 기침할 수 없는 자세라 죽을 맛이다. 신경원이 더 크게 웃는다. 이내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우는 거 봐. 진짜 따먹고 싶네."
"하, 하지 마!!"
"내가 뭘 한다고, 겁먹지 마. 장난이었어."
"흐…흐으……."
"진짜 묘하게 색기가 흐른단 말이지? 잘만 관리하고 장사하면 이익 좀 보겠는 데?"
신경원이 손가락으로 도드라진 나의 턱 뼈를 따라 그린다.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나는 원치 않게도 경직되고 말았다. 경원이 귀엽다며 웃는다. 그리곤 나의 목 아래에서부터 목젖을 지나 턱 아래까지 그의 더러운 혀로 진득하니 한 번 길을 내듯 핥는다. 미칠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떴다 감으며 수치감에 몸을 떨었다. 도대체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나름 착하게 살아왔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살려고 노력했는데……왜 나에게……내가 무슨 죄라고. 그냥 지금은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죽고만 싶어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버지한테 폭력을 당할 때도 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아버지가 죽기를 원했으면 모를까. 하지만 지금은 내가 죽고 싶다. 힘없이 같은 남자 앞에서 희롱이나 당하는 자기 자신을 차마 볼 자신이 없다. ……아니면 누가 자신을 살려줬으면 줬겠다. 누가 나 좀 제발…….
부르르 떠는 나를 보며 경원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이제 상품이 될 몸이니 차마 자국을 남길 순 없고……당장이라도 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경원은 애써 볼 안쪽의 부드러운 피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제가 돈만 좀 더 많으면 이 녀석을 사는 건데, 쩝.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경원은 동우의 팔을 잡고 있는 녀석에게 명령을 내렸다.
"데리고 가."
"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연하게 하늘을 쳐다봤다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냄새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희망으로 가득 찼던 봄볕이 어디론가 사라져 깨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에 시작되어버린 혹독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