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장 민윤기랑 연애하기 14 (부제 : 민윤기의 일기)
w. 달비
14-1
했다, 고백. 그래, 내 평생 양심이 어디 있었다고 쟤한테까지 양심을 내세우나 싶어서 해버렸다. 김태형 이 새끼는 나보고 그까짓 게 뭐 대수냐며 남자답게 그냥 야! 만나자! 하라고 했지만 말이 쉽지. 심장이 조각나버린 줄 알았다. 산.산.조.각. 좋아해, 그 말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말을 빙빙 돌려가며 매일 걷던 길을 그렇게 느리게도 걸었을까. 사실 오늘도 그냥 보내려고 했는데 애가 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건 내 예상범위를 벗어난 그런……. 아무튼 처음엔 당황했는데 우는 모습 보니 이건 아닌 것 같다 싶어 질러버렸다. 저 조그만 멍청이는 알지 모르겠네. 내가 그 말 하기까지 얼마나 많고 많은 시간들을 제 생각하며 보내왔을지.
와중에 '저는 오빠가 저 좋아하는 줄 알고 좋았는데.'는 솔직히 너무 귀여웠다. 방금 김태형한테 전화해서 야 귀엽지 않냐? 하고 물어보니 연애 시작한 거 축하히니 제발 작작하고 그만 자란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12시네. ……. 무튼, 연애를 해보지는 않았어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처음은 아닐 것 같은데 그게 다 티가 나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눈에 모두 담겨 있어서 내 마음 눌러담기가 어찌나 힘들었는지. 오래 참았다, 민윤기. 고생했어. 근데 사실 아까 왜 뚱한지 대충 알고 있었는데 귀여워서 장난친다는 게 그만 울렸다. 고생은 개뿔. 나는 나쁜놈이다. 양심 오래 전에 팔아먹었으면 애 울리지라도 말아야지. 아니 그래도 너무 귀엽잖아. 귀여워.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덜 마음고생 시킬 걸 그랬나보다. 내 마음 편하자고……. 뭐, 딱히 그런다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아직 스무 살인 아이에게 폭 넓게 주어진 기회를 뺏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에선 성인과 성인의 만남이니 여섯 살 차이는 대수가 아니라고들 말했지만 첫 연애부터 나와 만나며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그랬는데 우는 애 앞에 두고 보니 그 생각이 틀렸던 거지. 완벽하진 못해도 내가 해 주면 되지. 안 그러냐, 태형아? 하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다. 아까 끊었네, 새끼. 학교 가서 보자.
오늘, 아니 12시가 지났으니 어제구나. 어젯밤의 그 길을 계속 기억하고 싶다.
아 근데 정말 너무 좋아서 어떡하지. 내일 또 같이 가자고 해야지.
14-2
나는 솔직히 연기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면 혼났다. 연기 더럽게 못한다고. 아니, 여주가 '더럽게'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표정이 말했다. 내가 다 봤어. 김태형한테 물어보니 맞단다. 안 걸리는 게 신기하다고. 아닌데, 완전 포커페이스였는데……. 아니 근데 귀여운데 어떡해. 귀여운 걸 귀엽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 이거 김태형한테 말했다가 살벌하게 쳐다보길래 그냥 무시하고 다음 수업 갔었다. 뭐. 어쩌라고.
아, 맞다. 둘만 있을 때는 반말 쓰다가 학교에선 꼬박꼬박 존댓말 쓰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눈동자 또르륵 굴려가며 오빠 뭐 했어요, 그랬어요, 저랬어요. 하는 게 너무 귀엽다. 안 그래도 애들이 생각했던 거랑은 다르게 의외로 귀여운 것들 좋아한다고 뭐라고 하던데 사람까지 귀여운 사람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근데 얘는 맨날 나만 혼내는데 사실 자기도 티 엄청 난다. 모르는 게 바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 티가 나는데 어쩜 다들 그렇게 모르는지. 연기는 내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아님 말고.
그리고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맨날 술 약속 있는 거,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 나랑은 잘 안 마시려고 하면서 꼭 자기 동기들이랑은 그렇게 술 약속을 잡는다. 생각해보니 너무 서운하네. 나랑도 술 마시자고, 약속 잡자고 하면 학교 근처에선 절대 안 된다고 들킬 일 있냐고 또 따박따박 대꾸를 하는데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조금만 마시라는 말뿐이다. 물론 조그만 멍청이가 그 말을 듣진 않고.
얼마 전에도 술 조금만 마시랬더니 진탕 마시고 볼은 벌게져 있길래 화를 낼까 하다가 또 그 모습이 귀여워서 화낸 척만 했더니 금세 풀이 죽어 바닥에 신발 앞코만 콩콩 내리찍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여주를 먼저 택시에 태우고 내가 올라타니 토끼눈을 뜨고 왜 오빠가 타냐길래 그냥 아직도 화난 척,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또 풀이 죽어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그게 또 귀여워서 안 보이게 웃고 고개를 끌어당겨 어깨에 기대게 했더니 눈 굴리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귀여워.
조금만 더 이렇게 오래 있고 싶었지만 금방 도착한 여주네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태워 보내기 전에 딱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만 보고 가야지, 했던 게 날 올려다 보는 눈이 너무 예뻐서 그대로 안아버렸다. 안은 건 나면서 어째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도 나 같았는지. 들키기 전에 말했다. 심장 떨려 죽겠다고. 오늘 이 밤도 기억해야지.
다음 날 가서 여주를 몰래 불렀더니 애가 눈도 못 마주치고 아무 말도 못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어제 안은 것 때문에 그렇단다. 나는 혹시 필름이 끊겨 자기가 실수라도 했을까 봐 그런 줄 알았더니만. 진짜 이 정도 귀여움이면 나라에서 상을 줘도 무방하다고 본다. 왜, 뭐. 귀엽다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니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또 귀엽고. 이렇게 귀여운 애가 내 여자친구라는 사실에 감사하다. 종교는 없지만 신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14-3
김태형이 내 인생에 도움 되는 날이 몇이나 있을까. 술 그렇게 마시고 실실 웃을 때부터 집에 보냈어야 했는데. 결국 들켰다. 망할 김태형 때문에.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지만 아직 신입생인 여주 때문에 지금껏 비밀연애를 해왔던 건데, 저 새끼는 무릎 꿇고 빌어도 용서 안 해 준다. 김태형은 붉어진 얼굴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몇 달 되지도 않았지만 안 걸린 게 신기할 정도라고. 어차피 곧 걸렸을 거라고 입을 나불대는데 그 입을 찢어버릴 뻔했다. 말을 말자.
예상대로 술자리에 갈 때마다 형 여자친구가 신입생이라면서요, 어떻게 스무 살을 만났어요, 하며 묻는데 넌더리가 나서 그 이후로 술 약속은 최대한 안 잡았다. 여주가 불편하게 선배들 사이에 끼어있으면 몇 번 데리고 나오기도 했고. 아니 근데 그럼에도 김여주는 제 동기들하고 술 약속 자주 잡던데. 이제 나랑도 잡자고 해 봐야겠다. 들킬 걱정도 없는데 나랑도 마셔달라고. 얘랑 연애하니 나도 덩달아 어려지는 것 같다. 여자 애들이랑 마시는 거 뻔히 알면서 그게 또 그렇게 질투가 난다. 그 시간에 나 좀 더 봐 주지. 김태형한테 이대로 말했다가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소름돋았다. 이게, 선배한테.
매일 같이 걷던 길도 공개연애를 하게 됨으로써 다른 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 눈치 보며 손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걷던 길이었으니. 지금은 서로의 손을 잡고 마음껏 걸을 수 있음에 행복하다. 적당히 무드있는 가로등과 그 아래에서 울리는 둘의 발자국 소리. 기억하고 싶은 게 참 많고, 더 많아지고 있다. 사실 연애를 처음 해본 것도 아니지만 뭔가 첫 연애를 하는 기분이다. 진짜 첫 연애를 하고 있는 내 여자친구는 어떤 심정일지 궁금한데, 그건 뭐 얘 표정을 보면 답이 나오니까. 매일 같이 손을 잡고 걸어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내 발걸음, 자기 발걸음 번갈아 보며 걷는 걸 보면. 귀엽다, 진짜로.
좋아해, 라고 말했다. 분위기에 취했던가. 가로등이 너무 예뻐서, 고백하던 그날 같아서. 그리고 그 가로등 아래에 여주가 너무 예뻐서. 그래서 말했다. 좋아한다고. 그리고 입을 맞췄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이 날 무슨 자기가 드라마 주인공 같았다고 하던데 표현도 그렇게 귀엽게 하냐. 모르겠다 정말. 여태껏 여주와 나 사이에 '술'이 빠지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사귀고 난 후엔 나만큼은 술을 빌미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그날'이 오늘이 되었고, 내가 기억해야 할 날에 하루가 더 늘었다.
14-4
이제 제법 날이 많이 추워졌다. 우리의 연애는 아무 문제 없었고, 문제가 있었으면 그건 김태형뿐이었지. 내가 그렇게 일절만 하라고 당부를 했는데도 저 새끼는 일절이란 뜻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말을 말자. 무튼, 우리는 늘 한결 같았고 여주가 귀여운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 춥다고 롱패딩을 입고 다니는데 쪼끄만 게 그런 걸 입고 다니니 그게 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발목만 겨우 보여서는 잘도 돌아다니는데 아……, 귀여워. 방금 상상했는데 귀엽다. 가끔 베레모인지 뭔지 빵 모자를 쓰고 오는데 그것도 귀엽고. 여름보단 겨울이 좋은 것 같다. 추운 건 딱 질색인데 애가 더 귀여워지니…….
근데 겨울이 다가왔다는 건 내가 곧 졸업이라는 말과 같다. 졸업하고 나서 취업을 하게 되면 만날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게 되는데 이게 싫어서 취업을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래. 말도 안 되는 거지. 애 먹여 살리려면 일해야지. 조금 더 캠퍼스를 같이 걷고 싶은데 모두 내 욕심일 테고, 그냥……. 내가 왜 4학년인 걸까. 왜 스물여섯 살인 걸까. 조금만 늦게 태어났으면 좀 좋아. 여주한테 이렇게 말했더니 철 좀 들라고 혼났다. 그냥 빨리 확 데리고 살고 싶은데 그건 정말 너무 양심 없는 짓이라 데이트 횟수나 늘리고 있다. 그마저도 이제 기말고사 기간이라 잘 만나지는 못하지만.
점점 추워지는 날씨를 따라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연애에는 아무 문제가 없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졸업 이야기를 꺼낼 때면 시무룩해지는 표정이 귀엽지만 그만큼 나도 속상하다는 걸 알고는 있을런지. 내년부터는 학교에 내가 없을 건데 벌써부터 잘 지낼까 걱정이다. 아, 더 잘 지내려나. 약속도 맨날 잡고, 막. 생각만 했는데 좀 서럽네. 이것도 중증이지, 중증이야.
아무튼, 늦은 봄부터 이른 겨울까지 늦고 빠르더라도 함께 했던 네 개의 계절 속에 너와 내가 있음에 감사한 오늘이다.
이 오늘도 내 기억이 되어 오래 남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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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녜... 안녕하세요... 5개월 만에 찾아온... 네... 그렇습니다...(도망) 2학기 개강 전에 끝내겠다고 했지만 2학기 종강 후에 찾아온 쓰레기를 매우 치세요! 아니 쓰레기야 미안해! 사실 몇 번이고 다시 쓰려고 했지만 오래 놓으니 손에 잡히지가 않더라구요. 그리고 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이건 학회장 윤기 마지막편에서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데헷.클릭해서 읽어 주세요 8ㅅ8...(광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