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장 민윤기랑 연애하기 01 (부제 : 흑역사 리즈 갱신하기)
w. 달비
01-1
스무 살, 인생의 첫 이십대를 맞이하여 가장 기대했던 것은 대학 생활이다. 중고등학교와는 다르게 웬만하면 아는 사람 없이 첫 학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살더라도 다니는 대학은 천차만별.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사회라고 불리기 때문에 걱정도 많이 했다. 아, 여고 출신인 내가 여대가 아닌 대학을 간다는 게 제일 걱정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내 기대 속 대학의 풋풋한 신입생이 될 예정인 나는 입학 전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듣기 위해 곧 내가 다닐 학교에 왔다. 집 바로 옆 중학교, 여자들만 우글우글한 여고를 졸업하고 처음 본 대학의 캠퍼스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대박...정도? 아니 일단 남자가 있잖아! 워후!
여고에서 여대가 아닌 대학을 간다는 건 로망 또는 환상을 꿈꾸게 했다. 왜 그렇지 않은가, 나는 여고에 다녔기 때문에 그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던 걸 거야, 했던. 사실 그건 이유가 절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부정하며 드라마와 같은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 기대를 잔뜩 떠안고 간 예비 오리엔테이션은 내게 실망만 줬다. 우리 과가 여초 과라는 사실은 배제해둔 채, 그저 여대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기뻐 날뛰었던 날 매우 치고 싶었다. 왜냐면 내가 입학한 과가 국어국문학과였으니까. 정말 사방에 깔린 게 여자였다. 내가 지금 여자와 남자 분반이 된 과를 들어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난히 여자가 많았다. 후에 알게 된 거지만 우리 학번만 유난했던 거라고 들었다. 무튼, 환상을 키우면서도 스스로 깨뜨리며 기대치를 낮추었음에도 이건 아니었다. 내 대학생활...
"안녕하세요. 국어국문학과 학생회장, 09학번 민윤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얗다. 저 오빠를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은 하얗다, 였다. 그 잡티 제거를 했는데 눈이 사라져버렸다는 웃픈 이야기와 비슷하게 저 오빠랑 같이 사진을 찍은 다음에 밝기를 최대한으로 올려버리면 저 오빠 얼굴이 몽땅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아, 머리카락 빼고.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가 하얗다는 걸 극대화 시켜주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든 생각은 귀엽다? 저 오빠의 이름은 미리 알고 있었다. 신입생 단톡에 몰래 잠입했었던 과 선배들이 들통 나고 나서부터는 학과에 이런저런 일들일 많이 이야기해주곤 했다. 우리 과는 선배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도, 민윤기가 약간 좀 까칠하다는 것도 모두 다. 이름만 듣고 생각했던 모습은 저렇게 하얀 얼굴이 아니었는데, 하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뒷자리에 앉은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쳐다봐도 눈이 마주칠 거라 생각을 못했나보다. 멍청이. 다른 임원 소개가 이어질 동안 발끝만 쳐다보던 민윤기가 고개를 든 순간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나름 티 안 나게 서서히 시선을 내리 깔았지만 분명 눈치 챘을 것이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시고, 개강 날 뵙도록 합시다."
"장기자랑 인원만 남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01-2
"아, 안녕하세요."
"안녕~"
엄마. 나 왜 여기 있는 거예요? 하, 예비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며칠 뒤 난 다시 학교로 올 수밖에 없었다. 개강 한 거냐고? 아니. 근데 왜냐고? 춤 연습 하러 간다. 오, 나 방금 무슨 댄스 동아리 부원 같았어, 미친. 내가 댄스? 대애애애애앤스? 사실 입학 후에 가게 될 오리엔테이션에서 내가 장기자랑을 나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장기자랑, 정말 싫었다. 근데 걸렸다. 언니, 오빠들이 한 명씩 골라 홀 앞으로 데리고 나오면 그 걸린 애들이 줄줄이 물귀신 작전으로 한 명씩 지목하는 거였는데, 나도 누가 지목해서 홀 앞으로 나가게 됐고 바로 지금, 빈 강의실에 와있다. 여기 3층인데 뛰어내리면 어떻게 되려나. 하하. 하하하.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도 절대 춤을 추지 않는 앤데 지금 내가 어? 동기들 앞에서, 그리고 언니들, 오빠들 앞에서 춤을 추라니. 그것도 민윤기 앞에서. 세상에. 아직 낯가리는 사람들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는 것도 싫었지만 남자들 앞에서 그러는 건 더더욱 싫었다. 어색했으니까. 내가 뭐 남자들이랑 놀아 봤어야 알지! 남사친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나따위가! 걸그룹 댄스라니! 내가 춤을 추는 것 보다 자퇴하는 게 쉬울 것이다.
약속 되어있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선배들 사이에 끼어서 뻘쭘하게 다른 친구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이 강의실에 신입생은 나랑 친구 딱 둘 뿐이었다. 나보다 먼저 와있던 친구는 내가 오자마자 정말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것 마냥 눈이 동그래져서 내 옆으로 냉큼 걸어오더니 왜 이제 왔냐고, 진짜 죽을 것 같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럼 다음부턴 연락해서 1층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가자고 하니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어, 오빠. 안녕하세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언니가 갑자기 일어나서 강의실 문을 보고 인사했고,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건 민윤기. 오... 저게 바로 흔한_국어국문학과_학회장의_사복_패션.jonmeot? 예비 오리엔테이션 때는 안경 끼고 있었는데 오늘은 안 끼고 왔다. 개인적으로 안경 안 낀 게 나은 것 같다. 우리도 눈치만 보다가 민윤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인사를 건네니 짧게 대답만 하고선 뒤로 밀어 넣은 책상 사이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괜히 신경 쓰이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아니야. 나는 부끄럽지 않다. 나는 당당하다. 세상에서 제일 당당해! 나는 부끄럽지 않지가 않네!!!!!!!!!!!!!!!!!!!!!!!!!!! 세상에 마상에. 이게 대체 뭐하는 거람? 김여주, 이거 뭐하는 거야? 나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워!후! 분명 예비 오리엔테이션에서 장기자랑에 나갈 애들이라고 홀 앞에 나와 있었을 때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그냥 리즈를 갱신해야지 왜 흑역사 리즈 갱신을 하고 있는 건지. 하하. 신난다. 뭐, 그래도 내 인생 최고의 흑역사가 될 날은 본 오리엔테이션 장기자랑 무대겠지만.. 뒤를 슬쩍 돌아 임원 언니, 오빠들 반응을 살펴보니 다들 휴대폰 만지기에 바빴다. 다행이다. 앞으로 그렇게 계속 휴대폰만 바라봐 주세요.
"...아, 안녕하세요."
강의실에서 모이기로 했던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도 하나 둘씩 도착하고,
"이야- 얘네가 장기자랑 하는 애들이에요?"
"응. 근데 넌 왜 왔냐."
"아, 형. 형 보고 싶어서 왔죠."
"닥쳐라."
"와,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요."
그 뒤로 갑자기 강의실 문이 벌컥, 정말 말 그대로 벌컥 열리더니 소란스럽게 ‘이예에-’를 외치며 누가 들어왔다. 얼굴을 보니 며칠 전 예비 오리엔테이션에서 임원 소개할 때 부학생회장이라고 소개했었던 오빠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정... 뭐라고 했는데 기억 안 난다. 아무리 봐도 기억이 안 나는 이름에 옆에 있는 친구 팔을 툭툭 치며 저 사람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자, 넌 그걸 며칠 만에 까먹냐고 타박하며 정호석이라고 알려준다. 아니, 내가 어? 까먹을 수도 있지 말야. 학회장 이름만 기억하면 되는 거 아니냐. 에베베. 아무튼, 정호석은 오자마자 민윤기한테 자꾸만 치대려 했고, 민윤기는 그게 싫은지 연신 ‘닥쳐’, ‘꺼져’만 외쳐대며 귀찮다는 듯, 한 손으로 제지해 정호석은 빈정이 상했는지 형, 진짜 오랜만에 보는데 그러는 거 아니에요. 대박 너무해. 라고 말하며 강의실 구석으로 간다. 며칠 전에 봐놓고선...
"김여주?"
"...에?"
"춤 연습 안 해? 왜 멍 때리고 서있어."
"...으아, 죄송해요!"
내 이름이 불리자마자 여러 개의 눈동자가 다 나를 향했다. 아, 왜 하필 내가 민윤기 눈에 띄어서 이름을 불렸을까.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 얼굴이 빨개지는 터라 지금 내 얼굴은 아마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씨씨크림에 가려서 분홍색 정도? 보지 않아도 안다. 지금 내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까. 후...
춤 출 생각을 하니 쪽팔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설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아는 애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뭐, 물귀신 작전으로 끌어들인 거라 그럴 수밖에 없으려나. 아무튼, 단톡에서 유난히 좀 친했던 친구들 몇 명만 따로 모인 적이 있었는데 지금 걔네들이랑 이러고 있다. 한 명씩 얼굴을 쳐다보니 다 내 표정을 빼다 박아놓은 것 같다. 진짜 이토록 집에 가고 싶었던 적도 없을 것이다. 생전 춤이라고는 춰본 적이 없는 내가 장기자랑에서 춤을 춘다니? 말이 돼? 춤을 ‘안’ 춰본 것도 있지만 난 춤을 ‘못’ 춘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난 몸치거든. 하하! 몸치인 내가 요즘 1위를 달리고 있는 걸그룹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니, 와 춤추는 내 모습을 무대 아래서 볼 생각을 하니까 그 무대를 볼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제가 미리 사과드릴게요.
노래를 틀어주는 사람은 예쁘장하게 생긴 임원 언니였다. 아직 대형을 맞춘 적은 없었기에 우리는 동영상을 보며 대강 따라 하기 시작했고, 나는 춤을 추는 내내 최면을 걸었다. 여긴 아무도 없는 거야. 우리만 있는 거야. 그렇게 그 최면이 먹혀 들어갈 리 없지! 하, 세상에. 솔직히 여자 임원 언니들은 신경 안 쓰였는데 이 강의실에 있는 남자들을 모조리 내쫓고 싶었다. 간절하게. 곁눈질로 보면 우리를 제대로 보고 있는 건 정호석밖에 없음에도 나는 괜히 민윤기의 눈치를 보며 괜히 부끄러운 볼을 식히려 연신 손 부채질을 해댈 뿐이었다.
01-3
"오늘은 이만 하고, 밥 먹으러 가자."
"헐! 형이 쏘는 거예요?"
"넌 좀 조용히 해."
"아 왜 맨날 저한테만 그래요? 형 진짜 그러는 거 아니에요."
"닥치라고 했다."
연습은 8시 정도에 끝났다. 처음엔 정말 쪽팔림 때문에 동작도 날리고 제대로 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을 뿐.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호명이 자주 되고 하다 보니 열심히 하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들어 그 이후부턴 참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춤을 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친구들이랑 있을 때도 춤을 안 추는 내가, 학교 강의실에서, 그것도 남자들 가득한 이 강의실에서 춤을 추고 있다. 음 사실 이걸 춤으로 말해도 될 진 모르겠다만 말이다. 춤추느라 아직은 쌀쌀한 봄임에도 불구하고 겉옷을 벗어 놨던 우리는 나갈 채비를 하며 벗어뒀던 겉옷들을 걸치고, 선배들이 강의실 정리를 마칠 때까지 손가락만 이리저리 만져대며 책상에 엉덩이를 기대 앉아 기다렸다. 얻어먹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듯 정호석은 가자! 하고 외치며 제일 먼저 강의실을 나섰고, 우리도 바로 나섰다.
아 잠깐만, 틴트 놓고 왔다. 주머니가 무거워 춤출 때 잠깐 빼뒀었는데 그걸 강의실 구석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냅두고 왔다. 애들한테는 너희끼리 먼저 가있으라 말해둔 뒤 강의실로 들어가서 허겁지겁 틴트를 주머니에 우겨넣고 고개를 드는데 보이는 건 불 끄는 스위치 옆에 기대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윤기였다.
"안 나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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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구상은 저번 달 말에 했는데 이제야 글을 올리네요!
브금..은 도저히 어울리는 게 뭔지 몰라서 그냥 이 글 쓰면서 듣고 있던 노래 첨부합니당 ㅎㅅㅎ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열심히 써보도록 할게요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