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탄 꿈을 사서 왕비가 된 여인 - 문명왕후
2탄 버들잎 곁에 두고 언제나 나를 생각해주오 -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
3탄 잠수이별은 조선시대여도 다 뒈져버려야 해 - 전등사 나부상
드라마 '이산'으로
우리에게 조금 인지도가 있는 의빈 성씨
하지만 드라마에 나온 의빈 성씨에 관한 내용은
허구가 많음
극 중 한지민이 도화서의 화원이라던지 이건 다 상상;
이름도 송연이라고 나오던데 기록에는 이름 안 나옴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음
실제로 의빈 성씨에 대한 내용은
실록에 정식으로는 두 줄 정도 나옴
오히려 기록이 없었기에 드라마 제작이 쉬웠다고 한다
어느 기록에서도 그녀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에
몰락한 양반 가문의 여식 or 천민 출신의 궁녀
둘 중 하나라는데 후자가 거의 맞다는 전문가들의 의견
화빈 윤씨의 궁녀로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으나 기록엔 없음
의빈 성씨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첫아들 문효세자를 낳았을 때임.
왕자가 탄생하셨다. 주상께서 승지와 신하들을 불러 하교하시길
"궁인 성씨가 태중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과인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 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 기대가 커지는 바,
'궁인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가 이미 있었으니
궁인 성씨를 소용(정3품 후궁)으로 삼는다." 하시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아뢰었다.
주상께서 이르시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정조는 즉위한지 6년만에 얻은 첫 아들을
아주 애지중지했음
물고 빨고 핥고 어화둥둥 금이야 옥이야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는 심성은 몹시 고왔으나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함..또르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첫아들까지 낳아줬는데 얼마나 이뻤겠음?
그래서 소용으로 봉한지 불과 두 달 뒤
소용 성씨를 의빈에 봉함
⊙_⊙
정3품에서 정1품으로 초고속 승진!!!!!!!!!!!!!!
궁녀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뙇!!!!!!!!!!!!
(빈 위에는 중전 뿐)
여기서 '의(宜)' 자는 '화목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정조가 의빈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는 소망을 보여줌..
그렇게 둘은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라고 끝났으면...참 좋았을 것을....
의빈으로 봉해진 후 1년 후인 정조 8년, 의빈은 딸을 낳았으나
돌도 되기 전에 죽음...
크나큰 비극이었으나
의빈에 대한 정조의 사랑은 더 깊어져갔음.
2년 뒤에 셋째를 임신함
그러나
그해 5월,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문효세자가
불과 5살의 나이로 죽음
사인은 홍역이었음...
연달아 두 아이를 잃은 의빈은
실성한 채 시름시름 앓았고
결국 같은 해 11월 사망함..
임신 7개월 째였음
아들과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정조는
죽음 같은 슬픔에 빠짐
실록에도 잘 나와있는데
의빈 성씨가 사망하였다.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의빈의 장례는 영빈 이씨 장례의 예에 따라 1등 후궁의 예로 거행하라."
라고 하셨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산실청을 세우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까지 기다리라고 명하셨는데,
이 때 병에 걸려 사망한 것이다.
주상께서 출산을 매우 기대하고 계시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셨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의빈의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부터 내 자신을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구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 말에 정조의 찢어지는 심정이 느껴지는 듯함...
왕은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면 안되는 자리였음.
신하에게 저 정도까지 말한 것을 보면
정조가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했는지,
의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음...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을 효창원(지금의 효창공원)에 합장해주고,
넋을 위로하는 신도비를 세워 줌.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이장되어
현재 의빈과 문효세자는 후궁들의 묘역인 서삼릉에 있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에 위치한 문효세자와 의빈의 묘>
정조의 후궁 중 가장 사랑받았으나
가장 불행했던 의빈 성씨.
저승에서는 둘이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솔직헌 후손의 심정...
그 다음에 정조는 어떻게 지냈느냐?
정조는 왕이었고,
후사를 이어야했기 때문에
6개월 뒤에 후궁을 맞아들임.
그리고 그 후궁이 낳은 아들이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던
순조임 ㅎㅎ...
순조와 그의 어머니 수빈 박씨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