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차 대전이 종료되었는데도 전쟁이 끝난것을 몰랐던 일본군 소위 한명때문인데요.
무려 30년간 정글에 숨어지낸 일본 패잔병의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오노다 소위는 필리핀 루방 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제국군 부대의 정보장교였습니다.
그는 2차 대전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끝끝내 30년 가까이 투항을 거부하며 정글에서 홀로 지냅니다. 2차 대전중 연합군이 살포한 선전물은 물론 2차대전이 끝나고 필리핀 정부군이 뿌린 '전쟁은 끝났으니 항복하라'는 내용의 선전물까지 자신들을 기만하는 계략이라고 굳게 믿었죠. 일본 정부와 오노다의 가족들도 필리핀에 와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것도 연합군의 계략이라고 생각하여 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60년 일본 정부는 오노다가 사망한 것으로 공식 판정했는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 1974년 2월 20일, 패전 후 30년 만에 투항한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
“명령이 없으면 산에서 내려갈 수 없다.” 29년 4개월을 산속에서 보낸 사람의 첫 마디였습니다.
1974년 2월 20일 저녁, 필리핀 루방섬에서 그를 찾아나선 한 일본인 청년과 조우했을 때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전 일본 소위의 반응입니다.
오노다가 조국을 떠나 멀리 루방섬에 배치된 것은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던 1944년 9월이었습니다.
일본군 퇴역 소위 오노다 히로오는 일본의 패전이후 1974년까지 무려 29년 4개월동안 필리핀 마닐라 근처 작은 섬 루뱅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습니다. 그는 1944년 12월 자신의 말대로 이미 패색이 짙은 전쟁에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라며 필리핀 마닐라 근처의 작은 섬 루뱅에 파견됩니다. 그는 250명의 훈련되지 않은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이었는데요. 그들은 미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비행장 활주로를 파괴한 후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는 떠나는 오노다 일행에게 말합니다.
“항복은 물론 옥쇄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버텨야 한다. 병사가 한 명이 남더라도 야자수 열매라도 먹으며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항복은 물론 옥쇄도 허락하지 않는다.”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투항하지 말라는 상관의 명령을 아로새기며 루뱅섬에 상륙(1945년 3월)한 미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이듬해 봄 미군이 루손 섬에 상륙하면서 화력에서 밀린 일본 주력군은 그들을 남기고 패퇴합니다.
250여명의 오합지졸에 불과한 풋내기 부대였던 오노다의 부대는 첫 전투에서 207명이 전사했고 43명이 남았습니다. 이때부터 전쟁이라기보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생쥐처럼 숨어 지내기 시작한 것이죠. 결국 살아남은 43명은 산속으로 흩어집니다.
생존자 43명중에 40명은 미군이 살포한 삐라 전단을 읽고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한 사실을 알게 된 후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오노다는 미군의 전단을 믿지 않았죠.
오노다 소위는 처음에 세명의 동료와 함께 산에서 살았습니다. 그 중에 한명은 필리핀 정부군에 항복했고, 오노다 소위는 시마다 오장, 고즈카 일병과 함께 주저없이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개시합니다.
종전 다음해인 1946년 봄, 오노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 투항했던 옛 부하들이 필리핀으로 가서 섬 전체를 돌아다녔습니다.
"오노다, 어디있나? 나와라. 전쟁이 끝났다. 어서 나와라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자"
오노다는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여러 번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두 부하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죠.
"역시 간사한 미국 놈들이다. 우리를 잡으려고 내 부하들까지 동원하다니..."
오노다는 이것도 간사한 미국군이 자신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계략이라고 여겼습니다.
얼마 후 오노다 일행은 원주민 부락을 습격하여 불태웁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유격전을 전개 한 것이었지만, 실상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한 공격이었겠죠.
처음 미군 철수 전에는 미군레이다 기지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미군이 철수 했으니 뭘해야 할까요?
그냥 적국으로 필리핀인을 지정한 것입니다.
무료한 정글에서 계속 작은 신문조각을 서로 돌려 반복해 읽으면서 문화생활도 즐겼다 하죠.
또 내부적으로 삐라등을 통해 한국전쟁 소식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만주의 관동군이 미군을 반격한거라고 결론 내렸다고 합니다.
필리핀 정부의 다급한 연락을 받은 일본 정부는 오노다의 형제를 루뱅 섬으로 급파하여 오노다와 일행을 설득하게됩니다.
오노다의 가족사진과 가족들이 보낸 편지 전단을 뿌리면서 돌아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노다는 이마저도 미국이 이번에는 자신의 가지 동원하여 자신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후 오노다와 2명의 부하는 산에서 내려와 섬의 원주민들을 공격하였고, 때문에 필리핀 정부는 토벌대를 섬으로 보내게 되죠. 종전 9년차인 1954년에 시마다 오장이 토벌대에게 사살됩니다. 종전 20년인 1965년에는 고즈카 일병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개의치 않고 단신 유격전을 수행합니다.
그는 야자수 열매를 따던 원주민 소년을 토막 내 살해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거기 있었던 것이 불운있었소."
나중에 오노다가 한 말입니다.
일본 시민단체에서는 해마다 루뱅 섬으로 사람을 보내 오노다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죠. 일본인들은 필리핀 주재 일본 대사관 이름으로 우편함을 설치합니다.
- 여기 고국에서 온 편지와 신문들을 놓고 갑니다. -
하지만 함정으로 알고 접근마저 거부했습니다.
1965년에는 마을 원주민으로부터 라디오를 약탈하여 직접 패전을 비롯한 모든 뉴스를 들었음에도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여론의 관심이 높아져 오노다 구출본부까지 결성이 됩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오노다의 고등학교 동창생들까지 데려가 추억의 교가를 부르게 합니다. 그들 중에는 교가를 부르며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죠.
종전 30년째인 1974년 겨울, 마침내 오노다는 스즈키 노리오라는 일본인 탐험가에게 발견됩니다. 스즈키는 오노다의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느껴 그를 직접 만나 설득을 하고자 하여 루방 섬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스즈끼는 침착한 태도와 말투로 오노다를 안심시킨 후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노다는 그때서야 비로소 일본의 항복 사실을 받아들였죠. 그러나 그는 스즈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합니다.
“나, 오노다 소위의 직속상관이 와서 항복 명령을 내리기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소.”
일본에 돌아온 스즈키 노리오는 일본 언론에 오노다 소위의 아지트를 공개했고 일본 열도는 흥분에 휩싸입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오노다 소위의 귀환을 위한 작전이 펼쳐졌으며 제대후 도서 판매상이 된 다니구치 요시미가 수소문됩니다.
다니구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옛 부하를 살리는 일을 거절할 수 없었죠. 그는 골프백을 휴대하고 필리핀으로 갑니다. 그는 잠깐 오노다를 만난 후, 골프나 즐길 요량으로 필리핀에 간 것이었습니다.
오노다는 옛 직속상관에게 투항명령서를 정식으로 수령합니다. 그 날 밤 다니구치는 졸음을 참아가면서 30년에 걸친 루뱅 섬 정찰 및 전투 결과를 오노다에게 보고 받아야 했습니다.
다음 날 오노다는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투항의식을 치른 뒤 일본으로 귀환합니다.
▼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일본도를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내어 주며 정식으로 항복 의식을 취하는 오나다 히로(1974년 3월11일)
오노다가 29년 4개월동안 정글에 숨어서 지역 순찰대와 게릴라전을 벌이느라 30명의 필리핀 사람을 죽이고 10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오노다의 범죄를 사면해줬습니다.
당시 필리핀이 일본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빌렸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투항 당시 오노다는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99식 소총을 정비해 놓고 500여발의 탄환과 대여섯개의 수류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칼은 여전히 날이 시퍼렇게 서있는 등 장비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2세가 되어서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습니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들은 오노다에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고 열광했고 극우파들은 오노다야말로 옛 일본의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 비행기편으로 일본 본토에 귀국한 직후의 오노다 히로
투항명령서 정식 전달식,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항복 세리머니,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노병의 거수경례, 조금도 녹슬지 않은 제국군인의 총검, 깡마른 신체에 광채가 살아 있는 장교의 눈동자 등에서 일본인들은 감동을 받은 것이었죠.
▼ 낡아서 고쳐입은 남루한 군복을 입고 일본식 경례를 붙이는 오노다 히로
1973년 필리핀 루뱅섬에 갇혀있다가 일본으로 귀국후 오노다 히로는 일본이 발전을 하면서 옛날의 좋은 전통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눈에 비친 일본은 나약한 미국의 식민지였던 것입니다.
과거의 그들이 지녔던 미덕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자기 절제등이 온데 간데 없었다고 개탄하죠.
“전후 일본은 과거의 소중한 가치들을 상실했다. 그래서인지 나를 팬더곰처럼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지긋지긋했다.”
결국 그는 1974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브라질로 결혼한 아내 마치에(町枝)와 함께 이민을 갑니다.
그 곳에서 그는 목장을 운영 하였는데 섬에서 숨어살았던 경험 덕분에 목장 운영을 잘했습니다.
그는 규모가 큰 목장 운영으로 돈도 많이 벌어 성공한 이민 일본인이 되었고,
1984년 일본으로 돌아와 오노다 자연학교(小野田自然塾)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자연속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루방 섬을 다시 찾아가 현지 학교에 1만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 74세때 필리핀 루방섬을 다시 찾은 오노다 히로오와 그에게 피해를 입었던 필리핀 농부 칸디도 트리아(Candido Tria)씨(81세)의 만남 (1996년 5월 20일)
아내와 함께 우익활동가로 활동하여, 일본의 일본군 위안부의 책임을 부인하고, 일본군에 의한 남경 대학살을 중국측에 의한 조작이라고 외치며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4년 1월 16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의 일기로 사망합니다.
전쟁이 끝난줄 모르고 29년 4개월동안 필리핀의 정글속에서 숨어지내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일본의 마지막 낙오병이었던 오노다 히로.
일본국민들에게는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여준 영웅이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오래 살았던 전범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