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무잡잡한 피부에 쌍커풀진 큰 눈과 어렸을때 부터 또래보다 훨씬 더 큰 키로 인기가 아주 많았었던 김종인이랑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종인이와 같이 놀기도 했고 서로의 집에 찾아가서 아줌마가 해주시는 밥도 먹었었다. 그런 나를 모두 부러워했었고 나는 종인이의 친구라는 것이 뿌듯했다. 중학교를 갈라지면서 자주 못 보게 되니 길에서 마주쳐도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것 보다는 알게모르게 있는 어색함에 내가 먼저 빠른걸음으로 스쳐지나가거나 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리고 핸드폰도 바꾸게 되면서 종인이의 연락처도 사라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종인이를 본건 중학교2학년때 였나...우리동네 엄청 큰 놀이터가 있는데 그곳을 잠깐 지나가다가 그네에서 멍하니 혼자 생각하던 종인이를 본 것이다. 몸에 힘을 다 빼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있었긴 했지만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종인이가 얼마나 남자답게 컸는지 알 수 있었다. 앉아있는 다리는 길었고 축 쳐진 어깨는 넓어보였다. 인사를 하기도 뭐하고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왜 항상 옛날부터 인기많고 잘생기고 집안도 받쳐주는 애들은 항상 유학을 가는지. 종인이가 유학을 갔다는 걸 방금 페이스북을 통해서 알았다. 알 수도 있는 친구 목록에 김종인이 있길래 클릭했더니 거주지가 뉴욕으로 되어있었고 친구들을 보니 외국인이 굉장히 많았다. 내가 여기서 섭섭해하면 좀 이상하지만 왜 나에게 말 한마디 안하고 그냥 떠나버린걸까? 초등학생때 친했었는데.. 너무 추억팔이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엄청친했었는데, 우스겠소리로 6학년때 '멋진사람이 되서 우리 결혼하자.' 이런말도 했었는데.
나는 여중을 가고 종인이는 공학을 다녀서 종인이는 더 인기가 많았을 것이고 초등학생때의 추억쯤은 그냥 까먹었을 수도 있다. 좀 아쉽지만. 아쉬울게 없나? 잘 모르겠다. 종인이가 중2때 유학을 갔으니까.. 벌써 3년째다. 한달에 한두번씩은 가끔 지나가다 마주쳤었는데. 3년이나 보질 못했다. 사진찍는걸 좋아하는 애가 아니라서 페이스북을 아무리 뒤져봐도 사진한장 찾기 어려웠다. 페이스북의 프로필 사진은 항상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원빈의 사진으로 해놔서 도저히 종인이의 얼굴은 찾을 수가 없었다.
친구추가를 할까? 생각했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김종인이 나를 까먹은 것 같아서 하지 못했다. 한숨만 푹푹 내쉬고 내일 학교갈 준비를 했다.
또 지루한 하루의 시작이다. 그래도 학교에 친구들이 있어서 그나마 잘 다닐 수 있는 것 같다. 종인이가 유학갔다는 걸 안 뒤로 항상 종인이가 다닐 미국의 학교생활이 궁금해졌다. 이렇게 오랜시간 앉아있지 않아도 될텐데..하면서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는 생각들만 해댔다. 우리학교는 야자신청을 받아서 하고싶은 몇몇의 아이들만 하는데 그 몇몇에 나도 끼어이다. 집에가면 책한번 펴보지 않게 되어서 신청을 했다. 수리영역을 풀다보니 벌써 9시가 되어서 학교를 빨리 나왔다. 오늘따라 더 배고프고 피곤했다. 야자 후 하굣길은 약간 무섭다. 학교가 산쪽에 있어서 밤되면 가로등이 환한데도 그냥 무서운 느낌이 든다. 게다가 학생들도 많이없어서 좀 스산하다. 오늘따라 더 무서워서 교문을 빨리 뛰어가는데 누군가가 나를 크게 불렀다.
"000!!!"
왠 남학생이 날 불렀다. 뭐지?하고 뒤를 돌았더니 나보다 머리한개는 더 큰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김종인이다 우와. 근데 막상 티낼 수가 없었다. 어색해서...
"어? 김종인..."
"나 안반가워?"
"엄청 반가운데.."
"난 네가 내 손잡고 방방 뛸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무덤덤하게 인사해서 그런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있엇다. 덩치도 큰게 그러고 있으니까 너무너무 귀여웠다. 나도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옜날이랑 똑같네. 웃을 때 이 광대뼈좀 집어넣으라고 했지?"
김종인이 바보같이 웃으면서 내 광대뼈를 꾹 꾹 눌렀다. 초등학생 때 부터 하던 장난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뭔가 기분이 설렜다. 나와 종인은 가로등 빛 밑으로 걸어갔다. 무서웠었는데 다행이었다.
"너 번호 바꼈지?"
"옛날에 바꿨는데"
"근데 왜 연락을 안해줘. 내가 중2때 놀이터에서 만나자고 문자했었잖아. 딴 사람한테 보냈네"
"진짜? 그 때 너 놀이터에서 봤었는데...멍때리는거"
"멍때리는게 아니라 너 기다리는 거였어. 우리 타이밍 진짜 구리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김종인은 멍때리는게 아니라 날 기다리던 김종인이었다. 그걸 3년이나 지난 뒤에 알게됬다. 근데 왜 날 기다렸지? 유학가는거 말해주려고 그랬나보다.
"유학가는거 말해주려고 만나자고 했었어?"
"당연하지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려고 했었는데.."
"진짜? 미안.."
"미안은 무슨, 괜찮아 이제 유학갔다가 완전히 돌아온거야 계속 만날 수 있어"
종인이는 원체 성격이 좋아서 미국에서도 외국인 친구들과 잘 지냈는지 무슨 파티란 파티이야기는 다 해주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졸업후에 처음 만나는 거라 어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만 어색했던 것 같다. 종인이는 항상 만났던 냥 편하게 날 대해주었다. 날 보고 바보같이 웃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런 얼굴과 대비되게 어깨도 넓고 키도 훨씬 큰 종인이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옜날엔 진짜 진짜 까맸었는데 크면서 옜날보다 많이 하얘진것 같기도 했다.
"남자친구는? 생겼어?"
"여중여고면 말 다했지. 너는? 미국가서 이쁜 외국인 여자애들이랑 많이 사귀어봤겠네."
"나 인기 엄청많았었다? 네가 들으면 깜짝놀랄걸?"
"헐.."
"근데 내가 다 안사귀어줬어."
"왜?"
"한국에 여자친구 있다고 했었거든. 그래서 사진도 보여줬어."
김종인 여자친구 있었구나...
중학교때 우리학교에서 이쁜애들이 종인이한테 몇번 고백했었다고 들었었는데.. 나도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시무룩해졌다. 그래. 어디 그 이쁜 김종인 여자친구나 보자.
"이거 봐 진짜 귀엽지?"
김종인 핸드폰 배경화면은 초등학교 졸업식 때 운동장에서 찍었던 우리 둘의 사진이었다. 학교에 엄청 큰 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그 소나무 밑에서 꽃다발을 들고 서로 바라보고 활짝 웃는 모습이 찍힌 사진. 그 옜날 사진을 아직도 들고 있었다.
"이거..."
"엄마한테 내가 너한테 가져다 준다고 했는데 너 가족끼리 여행가고 그래서 까먹고 못줬어. 자 이거"
종인이가 백팩에서 사진을 꺼내서 나에게 주었다. 종인이의 배경화면과 똑같은 그 사진이었다. 맞아. 우리 이렇게 친했었는데.
"이때 나 너 엄~청 좋아했다?"
"나도나도!! 진짜재밌었는데 옜날 생각 난다 그치?"
"지금은?"
"..어?"
"지금은? 아직도 나 좋아?"
"뭐래~"
민망에서 빨리 대충 이 상황을 넘기고 싶었다. 근데 내 옆에서 자꾸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지금은?지금은? 하고 묻는 김종인이 부담스러워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나 진지해. 지금은? 나 싫어?"
"내가 너를 왜 싫어해"
"그럼 됐네."
갑자기 내 오른손에 따뜻한 종인이의 왼쪽 손이 닿았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잡아본 종인이의 손은 내 손을 다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커졌고 더 따뜻해졌다. 손을 잡는 것 만으로도 종인이의 마음이 나에게 전달 되는 것 같았다.
"이제 데이트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