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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전정국] 그대야 안녕 15화 | 인스티즈 

 

 

BGM - 구름여행 (소린)


















15화 
: 설레는 숫자





















 터벅.
 터벅.




 한 칸을 내려가면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해볼까. 두 칸을 내려가면 어느 정도의 내성이 생길 때까지는 거리를 둬볼까. 정국이를 대하는 내 마음에 있어서 내성이 생길 리는 만무했고, 혹시 그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아주 까마득한 미래일 것 같으니 난 당장의 가까워진 너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 옆구리에 끼워놓은 노트를 추스르고 생각에 잠겨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 오전에 내게 뛰어와 간단한 말만 마치고 후다닥 사라졌던 동아리 여자애의 말에 따라 잠시 시청각실에 모였다 돌아가고 있는 내 황금 같은 점심시간. 갑작스런 모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두근대는 맘으로 왔더니 동아리 부장이 하는 말이 글쎄. 주저하며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제가..’라고 말머리를 꺼냄과 동시에 주제를 바꾸자고 하더라. 그러니까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누군가의 성 정체성을 남이 나서서 판가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당신은 모를 거라며 다소 야속한 맘에 속으로 동아리 부장의 말에 일일이 토를 달았던 아까, 별안간 옆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라며 예의를 차리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김남준의 낮은 목소리. 누구처럼 속으로 생각하지 않고 용기 있게 본인의 생각을 밝히는 모습이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조금 멋져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생각을 눈치보지 않고 드러내려는 연습에 있어서 토론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게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던 것 같다. 나영이가 항상 하는 말에 따르면 내가 남과 이야기할 때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고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선배님.”




 나도 모르게 옛날 생각에 잠겨 넋을 놓고서, 교복 팔 부분 밖으로 삐져나와있는 반팔티를 다시 접어 넣으려 꼼지락대던 그때. 크게 트인 계단 창문으로부터 내리쬐는 햇살이 은은히 비추는, 복도 안쪽으로 우연히 돌린 내 시야에 들어온 어떤 여자애 두 명의 뒷모습. 그리고 그 앞에는 어딘가 향하려다 멈춘 두 남자애들이 보이고, 눈살을 찌푸려 집중하니 보기만 해도 떨리는 정국이와 호석이가 우뚝 서있다.




 “...”
 “...”​




 교과서를 든 남준이가 그들 뒤를 유유히 지나가면 이동 수업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는 말이 그제야 떠오르고, 복도 밖에서 보기 드문 정국이의 귀한 앞길을 막는 게 누구인가 싶어 조용히 시선을 돌려보면 정국이 앞에 서있는 여자애가 뒷짐을 진 손을 괜히 꼼지락거린다. 영락없이 무언가 할말이 있어보이는 사람의 뒷모습이었지만 멀리 정면으로 보이는 둘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어리둥절해지며 서로의 눈이 한번 마주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처음 보는 여자아이들이 아닐까 싶은데.. 계단을 내려가던 걸음을 돌려, 후다닥 보이지 않는 각도로 다시 잽싸게 올라가 귀를 기울였다.



 
 “그.. 제가 선배님을 좋아하게 돼서요. 번호 좀 알려주세요.”




 멀리서 어렴풋이 듣고 있는 사람까지 긴장될 정도로 조심스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놀라기도 잠시. 수줍으면서도 당당히 고백해오는 말소리에 순간 내 두 귀를 의심했다. 크지 않은 말소리였지만 또렷이 들린 내용에 나도 모르게 얼굴의 모든 구멍이 커지고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저런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샘솟을 수 있는지.. 여자아이의 용감함이 절로 존경스러워지려 할 때부터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고 입 속의 침이 마른다. 이 순간 정국이의 표정이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 온신경을 정국이에게만 쏟는 것 뿐이었다.




 "..."
 "..."




 잠시 말소리가 끊기기 무섭게 정국이가 답했다.




 "내가 핸드폰을 잘 안 해서."
 "..네?"
 "핸드폰을 잘 안 봐."




 단호하지만 차갑지 않게 거절의 뜻을 밝히고서 미련 없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고 어느새 앉아있던 자리에서 주섬주섬 털고 일어나니, 그대로 가만히 서있던 두 소리가 그제야 어렵게 발을 떼어 돌아간다. 주책없이 기쁨이 차오르는 맘을 숨기기 어려워 얼굴에 옅은 웃음을 달고 계단을 내려가니, 얼핏 빨개진 여자아이의 얼굴이 우연히 스쳐 보이고 난 그걸 보고 조금 놀란다. 정말 예뻤다.
 그 길로 난 패닉 상태에 빠져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교실로 향했다. 남준이처럼 모범생이 되어볼까 하는 마음에 혹시 몰라 가져갔던 노트를 책상에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그 위에 철푸덕 엎드렸다. 온몸이 터질 것 같이 불쾌한 이 감정은 뭐지. 그 여자아이는 왜 그렇게 예뻐서 더 신경쓰이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나와 그 여자아이. 너를 좋아한다는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이렇게나 상반된다는 사실도 지금 이 기분의 원인 중 하나였다. 짜증스러운 감정이 우악스럽게 내 머릿속을 덮쳐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니, 고개와 함께 기분도 처지기 시작한다. 또아리를 튼 두 팔 안으로 얼굴을 더 묻었다. 과연 내가 물어봤어도 핑계를 대며 그자리를 피했을까.. 물론 상상을 안해본 건 아니었다. 거절당해도 무색할 정도의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슬쩍 번호를 물어보는 상상 말이다.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할 법도 했지만 그러지 못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잠을 설치며 예상해본 여러 경우의 수에는 성공도 조금 들어있었지만, 대체로 짐작이 가는 현실의 시나리오는.. 핸드폰의 '핸'자만 꺼내도 핸드폰이 뭐야? 라며 해맑은 거절의 뜻을 내비치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내용이었으니까. 내가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 배경에는 숱한 고민과 걱정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었고, 나는 오늘도 같은 곳에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착잡해졌다. 무거운 기분으로 멍하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보송하고 뜨끈한 바람이 내 온몸에서 살랑이지만, 좀처럼 기분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금세 또 다른 생각이 어지러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여기 안 앉았어. 친구랑 다른 자리 가던데?'




 어제 일본어 수업을 마치고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오자마자 들은 나영이의 뜻밖의 대답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된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은 채 마지못한 발걸음을 뗀 것이 무색하게도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현재 내 짝꿍은 나영이었기에, 네가 말한 대로 내 자리에 앉았다면 중국어 반에서 홀수로 외로이 남아있는 나영이의 짝꿍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는데. 엎친 데 덮쳐 어제는 학원이 끝나고 그런 일까지 있었으니 깊게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뭔가 이상하긴 했다. 혹시 저번 시간에 내 자리 근처에 뭐라도 흘리고 갔나 싶어, 아침에 오자마자 책상 서랍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나오는 건 먼지 뿐이었더랬지. 쉬이 떨어지지 않는 정답에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하며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보면, 별안간 눈꺼풀이 나른하게 무뎌지고 자연스럽게 어젯밤이 상기된다. 짝꿍 사건의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어제 그렇게 핵폭탄 같은 일을 맞아 또 밤잠을 뺏겨버린 탓이었다.




 '띠리리리-'




 잠시나마 눈을 붙일 시간이 있을까 싶을 때 곧바로 없다고 알려주는 잔인한 예비 종. 그제야 교과서를 찾으려 무기력하게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니 꽤 요란스런 소리를 내는 납작한 물체.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철칙 아래 관리하는, 제출하지 않은 핸드폰을 겁도 없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화면을 켜고 홀린 듯이 두드려보면, 정국이의 기본 프로필 사진 밑의 숫자 없이 허전한 공간이 오늘따라 나를 더 괴롭힌다. 하지만 그때 내가 모르던 건 비단 네 번호 뿐만이 아니었으니.




 "어? 이게 뭘까?"




 ..그것은 바로 뒤에서 날 지켜보고 있던 담임쌤의 존재였다.




















 "그래서 온 거야? 우리 반까지?"
 "응.. 가져다줘서 고마워.."




 6교시 쉬는 시간. 우연히 마주쳐 도움을 청했던 태형이에게서 마른 손걸레를 건네 받아, 남자애들이 북적이는 틈을 비집고 바로 앞 세면대로 향했다. 그 안에 걸레를 넣어놓고 물을 틀자 냉기가 느껴지고 걸레는 곧 어두운 색으로 젖어들어간다. 덩달아 그 앞에 있는 내 마음까지도.​




 "그러게 하필 왜 그때 오셔가지구... 운이 나빴구만 그래. 이 친구."




 학급 내에서 제일가는 벌점 선두로 톡톡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정신도 못 차린 상태에서 핸드폰까지 걸려버린 아까 점심시간. 해탈한 채 어쩔 수 없이 교무실을 따라 들어갈 뻔하다가 문제 출제 기간이라 철저히 금지되는 출입 때문에, 일단은 문 앞에 멈춰 서서 선생님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니, 다소 망설이시다 대뜸 내게 제안을 해오셨더랬지. 그것은 바로 아이들에게 비밀로 해줄 테니 벌점을 받지 않는 대신에 조퇴로 인해 비어있는 주번의 역할을 오늘만 대행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그동안 쌓여있는 벌점이 이미 태산이니 그 중 1점 정도를 걸고 거래를 하셨을 수도 있지만, 5점이라는 핸드폰 현행범의 큰 무게를 없애주시려는 자연스러운 배려로 느껴져 그자리에서 당장 하겠다 외쳤다. 그렇게 해서 생긴, 9반에서 손걸레를 빌려와 칠판 밑 받침대를 깨끗하게 만들라는 임무. 우리 반 손걸레에는 희한하게도 모두 발이 달린 지가 오래였기에 9반 담임쌤께는 이미 얘기를 해놨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에, 난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걸어 마지막 반에 다다랐고, 마침 하품을 하며 반에서 나오던 태형이와 마주친 것이었다. 이과라는 건 알았지만 9반이라는 건 몰랐기에 예상치 못한 반가움을 한껏 드러냈더니 환하게 웃어주더라. 그리고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럼 종례 끝나고 내가 너네 반으로 갈게. 그때 돌려줄 수 있지?"




 태형이는 9반의 반장이었다.




 "아니야. 내가 갖다줄 수 있어."
 "우리 반 종례 항상 일찍 끝나서 어차피 또 정호석 찾으려면 그쪽 가야 돼. 내가 갈게."
 "그래? 그럼 난 고맙지. 고마워."




 두 손으로 꾹꾹 걸레를 쥐어가며 물 묻히기에 집중하고 있으니, 꿋꿋이 본인이 이쪽으로 와주겠다 얘기하는 태형이. 절로 고마운 맘이 들어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하면서 물기를 짜낼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도 넌 오늘도 계속 호석이를 찾아다녀야 하는 건가 싶어 속으로 웃음이 터지기 무섭게 내 얼굴은 차게 식기 시작했다. 걸레를 비틀기 무섭게 검회색 물이 보란 듯이 줄줄 흘렀으니.




 "..."
 "..."




 다소 머쓱하고 당혹스러운 둘의 눈이 마주치고 급히 서로의 눈치를 본다.




 "내가 다시 빨아서.."
 "왜 이렇게 더럽지.. 줘봐."




 나도 모르게 당황하기도 잠시. 침착하게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이미 태형이의 손에 쥐어져있는 비누. 뭐라 말해볼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를 옆으로 밀어 촉촉히 젖어있는 걸레를 펼쳐 비누로 문지르기 시작한다. 빌려준 입장에서 더러운 걸레를 준 게 미안했는지 익숙한 솜씨로 신속하게 비누칠을 하는데, 옆에서 보기에 손놀림이 흡사 세탁기였다. 야무지게 비누를 굴린 부분을 꽉 잡아 빠른 속도로 문대는 게 전문적인 포스가 폴폴 풍기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청소로 학교에서 한 가닥 했을 것 같은 느낌에 재미 삼아 농담을 던지려 했을까, 나긋한 목소리가 먼저 귓가에 든다.




 "어깨 축 늘어뜨리고 다니면 허리 굽는대. 몰랐지."




 오늘따라 처진 어깨를 눈치챘는지 아무렇지 않은 모양새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색을 안 한다고 했지만 그게 너에겐 보였구나 싶다. 혹시 내 기분이 너에게 영향을 끼쳤을까 걱정되어 조금 미안해지려 하지만, 미안하단 말보단 네가 보내준 걱정을 덜어주는 답이 좋을 것 같았다.




 "알았어. 펴고 다닐게. 이제."
 "좋다."




 네 걱정을 대하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분주한 손길에 집중하는 와중에도 슬쩍 미소 짓는 옆모습이 보이고 난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다 안도한다. 그러다 문득 조심스럽게 올라와있는 동그란 광대를 보고 결심한다. 너를 믿고 내 고민 해결의 첫 단추를 꿰어봐도 될 것만 같았다.




 "태형아. 내가 못생겼나?"
 "..어?"




 순수한 의도로 물어본 말에 네가 적잖게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큰 눈이 되어 이쪽을 돌아본다. 눈길이 잠시동안 정지된 듯이 내 눈에 머물렀다가 황급히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후, 수도를 잠그고 걸레를 물기를 다 짜낼 때까지 내 눈을 피한 채 아무말이 없다. 아무래도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웃음으로 무마해볼까 생각했던 때.




 "우리 엄마가 그러셨어. 세상에 못난 사람은 있어도 못생긴 사람은 없다고."
 "..."
 "..그리고 너 예뻐."




 마지막 말을 마치자마자 보송해진 걸레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태형이는 후다닥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버렸지만, 못난 사람은 있어도 못생긴 사람은 없다는 말은 그자리에 남아있다. 그 한마디가 가슴 속에 와닿아 태형이가 서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에겐 누군가의 복잡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순하게 정리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텅 비어있는 머리를 붙잡고 누가 흔들기라도 한 듯 멍하니 그자리에 시선을 메어두다, 종이 치는 소리에 발자국마다 근심을 내려놓으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내렸던 비를 다시 예견하듯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먹구름이 무색하게도, 아직 복도를 강렬하게 내리쬐는 후끈한 햇볕이 지금까지 바보 같은 고민을 해왔던 나를 질책하듯 온몸를 뜨겁게 만든다. 그때 그 햇빛이 너무나도 강해서 나로써도 모자라 뛰어들어가는 태형이의 귀까지도 화끈거리게 만들었던 건지.




















 조용한 석식 시간의 도서관에서 나와 교문으로 향했다. 중간고사가 닥치기 전, 제출 기한이 촉박한 독후감 수행평가를 미리 끝내놓기 위해 빌려온 책 한 권을 들고서 신발을 대충 꿰신었다. 밖으로 나오니 나를 맞아주는 어둑어둑한 구름 낀 저녁 하늘과 흙먼지 냄새. 후둑후둑 빗방울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늘은 석식 메뉴가 딱히 끌리지 않아 급식실이 아닌 매점에서 한 끼를 해결한 덕에 도서관까지 들렀음에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고 안도했다. 조금씩 비가 떨어지면 걸음도 느려질 테니. 그래도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주기도 그렇고, 하늘을 보아하니 학원 도착할 때까지는 날씨가 갤 것도 같은데. 구름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민 햇빛이 그림을 그리는 운동장에 발을 내딛었다. 내딛은 발이 닿는 곳엔 이젠 근심이 아닌 결심이 함께였고, 그 종착지엔 저번처럼 이른 시간에 나와있는 내 마음의 주인이 있다. 손에 쥐고 있는 단어장은 평소와 같았지만, 보고 있던 방향과 모습을 나타낸 시간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몸은 내가 나오는 쪽을 보고 눈은 단어장을 보고 있다 별안간 고개를 들어 둘러보는 너의 눈길에 내가 든다. 멀리서 걸어오던 나와 마주치자마자 눈에 띄게 밝아지는 너의 표정과 함께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는 네 눈가. 나도 너를 보고 걱정 없는 미소로 웃으니, 그자리에 서서 여전히 말없이 웃기만 하고 천천히 걸어오는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나 또한 네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
 "..."




 한 번 보니 두 번 보고 싶고, 한 마디를 나누니 두 마디가 나누고 싶어져 비로소 여기까지 오게 된 우리 관계. 새싹이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 이 관계 속엔, 망설임으로 뿌리가 내려져있고 욕심으로 잎이 가득 차있다. 녹음이 우거지는 한 나무에게 물을 주면, 함께 자라나는 뿌리에는 눈길을 두지 않고 하늘을 향해 흔들리는 잎사귀만 눈에 담으려 한다. 온전히 처음으로.​




 "일찍 나와있었네. 정국아."
 "항상 이 시간에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향하던 걸음이 어느덧 멀리서부터 눈을 마주치고 있던 정국이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도착과 동시에 내 예상과 달리 후두두 무섭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우리의 대화를 끊어버리고, 그와 동시에 유의미한 눈맞춤이 오가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둘 다 손에 든 책으로 머리를 가린 채 스탠드로 달려간다.




 "갑자기 많이 오네."
 "그러게. 많이 안 젖었어?"



 꽤나 밝은 하늘 아래 쏴아아 쏟아지기 시작하는 빗줄기로부터 간신히 몸을 피한 너와 내가 숨을 돌리며 정신없이 각자의 책과 제 팔에 묻는 물기를 닦아낸다. 돌계단 하나 위에 내가 있고, 그 하나 밑엔 네가 있다. 어느새 푹 젖어있는 네 팔이 걱정되어 너를 둘러보며 먼저 물어보니, 같은 눈높이가 된 네 눈이 되려 나를 살핀다.




 "금방 마를 거야. 근데 어떡해."
 "..."
 "..너 못 걸어가겠다. 오늘은. 비가 와서."




 무섭게 땅을 내리치는 장대비가 스탠드 지붕 끝자락에서 모여 그 방울이 내 종아리에까지 튀면, 오늘은 이상하게 네 생각까지도 나에게 닿는다. 걱정을 건네고 나를 물끄러미 잠깐 보다 괜히 눈길을 돌려 축축한 팔을 다시 한 번 쓸어내리는 기색이 제법 쑥스러운 듯하다. 학원차가 오기까지 꽤나 남은 시각이었음에도 그전에 비가 그친다는 가설은 네 생각에 없어 보였다.​




 "그러게. 오늘은 차 타야겠다."
 "..."
 "아니. 내일부턴 다시 탈래. 같이 가자."
 "그래."




 내 욕심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지금 내 무기는 오늘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있던 용기였다. 욕심 앞에 용기를 들고 맞서면, 내 말이 반갑다는 듯 눈썹을 한번 들썩이며 대답하는 네가 어느새 욕심 대신 내 앞에 서있다.




 "정국아 근데 있잖아."




 그동안 마음 속으로만 수없이 부르던 네 이름을 하루에 벌써 두 번이나 불렀다. 떨리는 이름 두 글자에 덩달아 내 목소리까지도 떨렸을까 평소 같았으면 걱정했겠지만 이젠 달라져야 했다. 내 부름에 멍하니 비가 무섭게 내리치는 운동장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음? 하고 입을 다문 채 소리를 내 대답한다. 나를 돌아본 얼굴이 나와 높이가 같고 또한 가까우니 마음이 새삼스러워진다.




 "저번에 너한테 물어볼 게 생겨서 보니까 네 번호가 없더라고. 번호 알려주라."




 서툰 내 사랑엔 아직 이유가 따라야 했다. 용기는 가져도 대담한 심장은 가지지 못해 변명 섞인 말을 꺼내니, 그때부터 가슴께가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을 뻔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제법 자연스러운 말투로 말을 마치고, 최대한 별로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네 반응을 기다리니. 나를 돌아봤던 표정에서 그대로 멈췄다가 별안간 개구진 미소로 내게 손을 내민다.




 "그럼."​




 설레는 웃음을 머금은 네가 내게 당연스럽게 손을 내미니, 순간 그대로 손을 맞잡을 뻔한 걸 잘 참아내고 너에게 내 핸드폰을 건넸다. 받아들자마자 곧바로 타닥타닥 바삐 번호를 입력함과 동시에, 저 깊은 구석에서부터 꽃가루가 내 온마음 속을 유랑하며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내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손은 얼떨결에 수학 시간 자리를 뺏긴 내게 손을 뻗던 그 손이 맞다. 내 풀이를 지우고 보드마카를 바꿔 대신 풀어주던 그 손이 맞다. 다부진 생김새지만 말랑한 힘으로 내 손을 움켜쥐던 어제 그 손이 맞다. 정국이 네가 맞다.




 "여기." 




 1초 전 방금 네 손길이 닿았던 핸드폰을 다시 받아드니 기분이 묘해진다. 생생한 온기가 전해져오는 느낌이 손에서부터 시작해 가슴까지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3자리 4자리 4자리. 총 11자리 숫자가 맞는지 안보이게 몰래 눈을 찌푸려가며 정확히 확인했다. 자아가 두 개였다면 다른 하나는 꿈인지 눈을 비비며 재차 볼을 두드려봤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눈가로 손등이 올라갈 뻔했음에 질겁하다가, 허튼 곳이 터치가 안 되도록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저장 버튼을 눌렀다. 어제처럼 직접 손이 맞닿지 않더라도, 이젠 네 손에 내 소식이 닿을 것이다.




 "이 책은 뒤에 줄거리가 없더라."




 느릿느릿 차분하게 저장하며 내적 기쁨을 누리는 내가 핸드폰을 보며 아무말이 없자, 말없이 지켜보는 듯했던 정국이가 제법 그쳐가는 비를 내다보며 다른 화제를 꺼낸다. 너 또한 같은 수행평가를 받았을 테니 내 손에 들린 축축한 책의 제목을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정국이의 말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네 얼굴을 돌아보니 지붕 밖을 내다보며 책 뒷면이 아쉽다는 듯 코를 살짝 찡그리는 게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내 맘은 두근거린다.




 "벌써 찾아봤구나. 혹시 다 썼어? 벌써?"
 "아니~ 다 쓴 건 아니구우."




 내 물음에 네가 사근사근 부정의 뜻을 보이며 말끝을 늘리면, 나의 오늘밤도 같이 늘어나고 그와 동시에 베개가 왜 이렇게 꺼졌냐며 새로 사야겠다던 최근 엄마의 말이 맴돈다. 너와의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베개를 때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던 기억들이 수없이 필름처럼 스쳐가고, 전에 했던 나 자신과의 약속도 그대로 스쳐가도록 둔다. 남들에게 묻혀 네 일상에 조용히 스며들겠다는 내 다짐은 이미 깨져버린 뒤였다.




















 “그정도에서 끝난 게 다행이지. 요즘 분리수거장이 그렇게 더럽다고...”
 “...”
 “야. 뭐하는데 아까부터.”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나한테 관심이 왜 이렇게 많아.”
 “친구끼리 관심 가져주고 그러는 거지. 은근 말 서운하게 한다?”




 늦은 밤의 한 학원가 근처 편의점 앞 테이블. 배고픈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허기를 달래고자 적당히 붐비는 곳에서 두 남학생이 각자 컵라면을 앞에 두고 가벼운 말싸움이 일어난다. 한 학생이 제 손에 들린 무언가를 보느라 정신이 팔리자 그 앞에서 열심히 이야기하던 학생의 낯이 금세 울상이 되어 한껏 속상한 티를 내면, 그제야 핸드폰을 주시하던 눈길을 돌리는 학생도 할 말이 없어보이진 않는다. 




 “서운하기는. 어제 나한텐 말도 없이 집에 가놓고.”
 “어젠 미안 미안. 우리엄마가 너무 무서운 걸 어떡해. 대신 삼김으로 용서 좀 해줘.”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소시지와 섞여 놓여있는 삼각김밥 여러 개 중 한 학생이 맘껏 고르라며 펼쳐놓으면, 벼슬자리에 앉아있는 관리가 마지못해 뇌물을 열어보는 듯한 모양새로 괜한 헛기침을 하더니 세 개를 제 쪽으로 끌어오는 다른 학생. 그 학생이 가져온 것들 중 하나의 포장지를 벗기자 맞은편에 있던 학생도 남은 것 중 아무거나 골라잡고, 두 학생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허기를 채우기 시작한다.




 “아니 진짜 뭔데 그래. 오늘 복도에서 돌려보낸 애가 보면 울겠다 야.”
 “플래너 선착순으로 준대.”
 “아 그래?”    
 “넌 안 필요해?”
 “저번에 처음으로 일년짜리 받았잖아.”
 “아 그랬지 참.”
 “근데 넌 안 쓰다가 갑자기 웬 스터디 플래너야?”




 오물오물 마주보며 삼각김밥을 씹다 한 학생은 아직 테이블에 남아있던 물기가 묻은 소시지를 털고 무언가 생각난다는 듯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 챙기면, 다른 학생은 핸드폰을 보다 기다림에 성공한 듯 옅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그제야 핸드폰을 멀리 두며 대화를 잇는다. 물음으로 끝난 말에 그냥 필요해져서, 라고 대답하며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채 두 학생 동시에 젓가락을 들고 컵라면을 들여다본다. 미처 꺼지지 않은 핸드폰 화면의 문자 알림창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면, 이미 읽은 표시를 드러내는 메시지 하나가 밤하늘에 떠있다.




 ‘안녕 정국아! 나야’























 
독자1
암호닉 신청한 [꾹전]이에여! 저의 학창시절엔 이런 설렘이 없었지만 진짜 작가님 글로 항상 대리만족합니다ㅠㅠ
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네요!! 역시 그 가까워지는 과정에 설렘이 최고예요ㅠㅠ 엉엉ㅠㅠ

5년 전
독자2
안녕하세요 작가님 암호닉[달콤한민슈가]입니다 ㅠㅠ 흐어 드디어 여주와 정국이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네요 세상에 이 둘의 과정을 지켜보는데 왜 이리 제가 다 설레이고 그러는걸까요..아 너무 몽글몽글한 기분..크으..정말 감동입니다 진짜 암호닉 신청한 뒤로 작가님의 작품 정주행중인데 진짜 윗 구독자분 말씀처럼 왜 대리 설레고 난리..ㅠㅠ정말 작가님 짱짱맨뿡뿡..♥글이 너무 따뜻해서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드네요 다시 돌아오신 작가님 앞으로도 무리 하지 마시고 꾸준한 연재 부탁드려요 흐아...언젠간 윤기의 이야기도 보고싶고 막 그래요 정말 예쁜 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진짜 너무 예뻐서 광광웁니다..ㅠㅁㅠ
5년 전
독자3
안녕하세요 암호닉 신청한 [레다]입니다!
여기까지 봤는데 너무 설렜어요ㅠ 태형이가 하는 말도 예쁘고 정국이도 귀엽고ㅜㅜㅜㅜ
글 보는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더라고요! 너무 재밌어요 다음 화도 빨리 보고 싶네요!

4년 전
독자4
안녕하세요 항상 뒤에서 보던 한 독자입니다.
전부터 봐왔는데 한동안 못보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찾아왔습니다. 암호닉은 신청하지 못했지만 옛날부터 수줍게 지켜보던 독자로서 꾸준하게 다음편을 기다리겠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설렘이 차오르고 장면 하나하나가 상상되서 더 좋게 다가오는거 같습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얼른 여주랑 정국이가 이어졌으면 좋겠네요 ㅎuㅎ

4년 전
라잇나잇
암호닉은 언제나 받는 중입니다 신청해주세요!
4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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