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찻잔과 도넛이 춤추는 가게 (세레노)
1화
: 만인의 짝사랑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바뀌려는 4월에 걸친 날. 일찍 찾아온 더위 탓에 벚꽃 잎은 이미 거리의 바닥을 덧칠했고 우리는 생각보다 이르게 여름을 준비해야 했다. 그 탓에 환복 혼용 기간이 예년보다 몇 주 정도 앞당겨져 오랜만에 잘 다려입은 하복 셔츠인데. 방금 물을 흘려 기분이 안 좋아졌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텀블러에서 이상한 땀냄새 같은 게 코를 찔러서 따뜻한 물로 소독 겸 넣고 흔든다는 게, 힘 조절을 못해 그만 새버렸다. 기분 나쁘게 배를 적신 물을 얼른 탁탁 털어내고 뜨뜻한 느낌이 싫어 찬물로 손을 씻었다. 교무실 갈 참이었는데 창피하게 됐다. 왜 하필 신발장 닦아야 되는데 손걸레는 행방이 묘연한 것이며 이를 물어보려 교무실에 가야 하는 나는 왜 방금 물로 배를 씻었는가. 반 애들도 청소 안 하고 뛰어다니는 탓에 종례를 일찍 하기엔 글렀다 싶어 속으로 성질을 부리며 교무실로 향하는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던 사람에게 순간 어깨빵을 당해 콘크리트 대 인간으로 몸통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오, 슛. 누가 이렇게 칼 같은 어깨를 가진 거야.
”헉! 괜찮아? 어떡해.”
“아.. 괜찮아.”
벽에 한 번 부딪히고서야 제자리에 선 날 보고 놀라서 묻는 남자애 목소리가 생소하지 않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 낯익은 애가 앞에 서있다. 내색하지 않고 애써 괜찮다 말하는데 한껏 인상을 쓰고 조심스럽게 날 살피는 애 얼굴이 미안해서 곧 울 듯 싶다.
“어우, 미안해. 진짜 괜찮아?”
“응응.”
“어유.. 진짜 미안해. 혹시 나중에라도 아프면 4반으로 와. 나 4반이야."
”응.”
”미안해~.”
그러고는 급한 일이 있는지 연신 미안해하며 남자애는 바람처럼 멀어진다. 동그란 뒷통수 머리카락이 통통 튀어대며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애가 있던 자리를 보고 잠시 생각한다. 같은 일본어 수업을 듣는 정호석이 맞다. 근데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건지. 피어오르는 궁금증에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별안간 제대로 찾아오는 어깨의 고통에 저절로 인상이 썩어들어간다. 광범위한 멍이 들 것 같은 느낌에 얼얼한 팔뚝을 손으로 감쌌다. 당분간 오른쪽 어깨는 사려야겠다.
다른 애는 몰라도 저 애는 기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 2 외국어 분반 수업 때문에 4반으로 갈 때마다 일본어 선생님의 뭔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있는 눈을 자주 보곤 했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본분은 수업 준비성와 이해도 높은 전달력에 있지만 또 무시할 수 없는 게 학생들의 집중력을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누구 한 명이 엎드려 자기 시작하면 주위 애들도 하나 둘 눈치 보며 엎어지는 탓에 관심을 유도하는 게 생각보다 중요했다. 그 이유로 여러 게임이나 간식을 가져오는 쌤들도 많았지만 일본어 선생님만은 예외였다. 일단 첫 번째 이유를 들자면, 4반은 일본어 선생님이 담임인 반이어서 남자애들 호응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뭐만 하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교실을 압도하기에 덩달아 우리 반 애들도 분위기에 맞춘 반응을 보이게 되어 다소 어색한 공기가 풀리기도 했다. 그 우레 같은 호응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 남자애가 있었고, 그 아이가 두 번째 이유이다. 일본어 수업을 듣는 애들이라면 걔를 모른다는 게 오히려 의아할 정도로 활달한 친구였다. 그 아이의 예능감을 굳게 믿는 일본어 쌤은 수업마다 대화 예문의 상대로 불러내 상황극을 하셨고, 노련한 애는 맛깔나게 받아쳐 수업 분위기는 날로 좋아지기도 했다. 오죽하면, 아직 수업을 채 5번도 안 한 것 같지만 그날 수업의 분위기는 그 남자애 컨디션에 달려있는 느낌이 역력할까. 특유의 밝은 분위기로 50분 수업을 재밌게 만드는 인싸 중심의 이름은 정호석인데 바보 같이 이제야 생각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얘는 정국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복도 사물함 위에 올려둔 학교 홍보 책자는 도대체 왜 자꾸 사라지는 거냐며 2학년 부장쌤이 매일 아침마다 새 책자를 다시 꺼내게 하는 장본인. 화장실에서 홀로 외로운 전쟁을 치르다 보면 온갖 감탄사와 함께 들리는 이름. 정말 가까이 있지만 끝없이 먼 그 아이.
내가 정국이를 처음으로 제대로 알았던 건 불과 한 달 전이다. 3월 초, 현재 기수 토론 동아리의 마지막 교내 토론 대회가 열렸었다. 3학년을 제외한 1학년과 우리 학년은 삼삼오오 시청각실에 모여 토론대회에 참관해야만 했고, 매번 귀찮은 교내 행사에 강제로 참여해야 하는 무거운 몸뚱아리를 이끌고 푹신한 의자에 읏챠,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별 감흥 없이 앉아 심드렁하게 토론을 기다리는데 웅성웅성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 전정국 나온다는데 대박이다, 공부도 잘하는데 토론도 잘하면 사기캐 아니냐 등등. 여럿 입에서 나오는 문장의 주체는 익숙하게도 그 애였고 난 속으로 걔가 그렇게 대단한가 싶었다. 네 이름은 아마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난 1년 내내 거의 본 적도 없는 내 귀에 딱지가 앉다시피 전교에 알려져왔다. 아기 같이 생겼는데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의 1학년이 있다더라, 생각보다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잘한다더라. 거기에 착하다는 소문까지 더해져 그동안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하루에 한 번씩 네 이야기가 나오는 건 예삿일이었다. 소문의 중심에는 항상 같은 아이가 있었지만 정작 그 아이는 어떤 튀는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 가십거리를 던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난 널 잘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했을 수도 있다. 근데 아니나 다를까. 이제 보니 얘는 실로 대단한 애가 아니던가. 얼굴에서 빛이 나는 애가 등장하더니 낙태 찬반 토론 준비에 앞서 의자 대신 내 마음에 앉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 맘에 폴짝 앉아 찬성 푯말을 앞에 두고는, 여러 이유로 태아에게는 생명권을 부여할 수 없고 이 때문에 산모가 태아에게 자신의 인생을 반드시 걸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데, 순간 쟤한테 내 인생을 걸 뻔한 게 표정에서 보였는지 나영이가 내 어깨를 때렸었지. 익히 들어 얼굴은 정말 얼핏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깊은 충격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다. 우리 학교에 저런 인재가 있었구나. 아.. 이 느낌이 진정한 인생 베팅인가,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큰 깨달음을 받아들인 뒤로 내 학교생활은 180도 달라졌더랬다.
정국이를 제대로 처음 본 후, 얼마 안 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럿 찾아왔었다. 사실 작년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교실이든, 이용하는 급식실이든 층이 아예 달랐기에 얼굴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매점은 매일 출석 도장을 찍을 지경인 나였지만 놀랍게도 정국이를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어 네 얼굴도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다. 작년에 그래서 한 번은 무슨 일이 있었냐면, 후광의 존재를 믿게 됐을 때가 있었는데 명찰 색은 같지만 이름을 못 봐 그 아이가 정국인지 아닌지 몰랐던 적이 있었다. 정국이의 생김새를 알고 있는 나영이도 곁에 없어서 혼자 엄청 궁금해하다가 결국 기억이 흐려져버리고 말았고. 뭐.. 걔네 반 창문에 딱 붙어서 나영이가 쟤가 걔라고 알려주기도 민망한 노릇이니 그냥 그렇게 지나갈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 그러던 중 2학년이 되고 홍보 책자에 나온 정국이를 보고 1차 충격, 토론 대회에서 정말 제대로 보고 2차 충격을 받은 거였다. 그리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떠오르는 운 좋은 일들이 난 지금 감격에 겨운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거고. 수준별 영어 수업 반이 겹쳤기에 50분동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당연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가야금 수업 전 반이 4반이어서 음악실에서 그 날 정국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마냥 귀찮기만 했던 분반 이동이, 가야금은 무겁고 또 줄은 잘 안 뜯겨 손에 생기는 물집 때문에 싫었던 음악실에 가는 게 신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접점이 조금 생겼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널 한 번 보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 개의 장벽이 존재했으니까. 쉬는 시간에도 망부석처럼 앉아 책에만 몰두하고, 황금 같은 점심시간엔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돌아와 교실로 들어가버리는 공부벌레를 볼 기회가 사실상 많지 않았다. 특히나 이 근처에서 급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우리 학교 밥을 먹으면서도 '맛있는 밥을 먹는다'가 아니라 그저 '끼니를 해결한다' 정도로 신속하게 처리하는 느낌을 받게 하는 건.. 우리 학교 유일무이한 인물일 것이 분명하다. 이러니 내가 영어와 음악 수업을 목 빼고 기다리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1년 동안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널 본 기억이 없었던 걸 생각하면 아주 단번에 이해되는 생활 패턴이긴 했다. 내겐 가혹하지만 하루를 자투리 없이 활용하는 공부 습관은 존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를 누구보다 빽빽하게 보내니 전해듣는 정국이 성적에도 빈틈이 없는 건 당연했고, 내신 성적이든 모의고사 성적이든 단연 문과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공부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는 것쯤은 파다한 소문을 통해 익히 들어왔지만, 그런 정국이와 내가 영어 수준별 같은 반이라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이건 진짜 다시 생각해도 일생일대 사건이다. 물론 내가 공부를 못 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이 상황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년에 엄마 친구 아들과 경쟁이 붙어서 자존심에 상처가 난 적이 있었는데, 이때가 딱 얄미운 친구가 날 슬슬 건드릴 때였다 이 말이다. 기저에 무시가 깔려있는 말투로 날 대하는 그 친구와 엄마의 무의식 속에서 자꾸 비교 당하는 내가 싫어 몇 달 동안 이 악물고 공부만 하니, 기말고사 때 다신 받을 수 없는 숫자들이 떴었다는 전설이다. 내 악바리로 친구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엄마에게 성적표를 딱 보여주자 그제야 은근히 경쟁을 붙이던 엄마 친구분은 사그라들었고 다시 평화로운 생활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랬던 시기와 맞물렸기에 영어 시험을 잘 봤고 그래서 같은 반에 있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나 정국이 보라고 짜맞춰진 건가 싶기도 하다.
음, 그렇다고 정국이와 어떻게든 친해져서 사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목적을 두고 좋아하는 게 아니었을 뿐더러 일단 외적으로 너는 나보다 훨씬 우월했다. 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난 평범했고 칠판 글씨 때문에 잠깐이라도 안경을 쓸 때면 눈은 더 작아져 내 얼굴은 더욱 답을 잃어갔으니까. 그리고 뭐 굳이 다른 부분도 대보자면 성격? 그마저도 난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겪은 건 없으니 더는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혹시 내가 객관적으로 예뻤더라면, 이라는 가정도 가볍게 해보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리 분별을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짝사랑에 눈이 멀었더라도, 애초에 불가능한 건 눈독 들이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고로 난 지금 상황에도 만족했다.
처음에는 오직 외모에 반해 이러는 내가 한심하다가도, 외모가 아니면 뭣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고 내가 거기에서 또 어떻게 활력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다. 따지고 보자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외모지상주의를 합리화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래도 사람이란 게 하는 짓이 미우면 모든 게 미워보이는 법인데 정국이 너란 남자란.. 정말 헤어나올 수 없는 미담 공장장이었다. 들은 건 작년에 많이 들었는데 관심 없을 때라 슬프게도 다 까먹어버렸지만, 내가 본 건 기적적으로 몇 개가 떠오른다. 저저번주에 학교 정문 현관 앞을 지나갈 때였나. 저 앞에 가던 어떤 키 크고 늘씬한 남학생이 잘생긴 뒷모습을 자랑하며 걸어가다 그냥 길에 보이는 캔 하나를 주워가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네 뒷모습을 몇 번 못 봤을 때라 누구인지 모르고 누가 저런 멋있는 뒷모습을 가졌나, 궁금해지려는 참에 들어가는 옆모습을 보고 주먹을 물었었다. 늦게나마 알고서야 그 자리에서 입을 틀어막고 혼자 방방 뛰며 흥분했었지. 그래서 그날은 잠들 때까지 카톡을 붙잡고 나영이에게 멋있다고, 어쩜 그럴 수 있냐며 같은 말만 반복했던 것 같다. 완벽한 도덕성.. 전정국. 아,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담이라기엔 애매하지만 일본어의 아들 정호석과 정국이가 눈 오는 날 운동장에서 장난치는 걸 창문에서 관람했던 때가 있었다. 정국이 지금 공부 안 하고 노는 거냐고, 계 탔다며 창문에 달라붙어있던 여러 명 중의 한 명이었던 나는 그날도 눈에서 닿지 않을 하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날은 유독 진눈깨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는데, 전날에 왔던 눈으로 앉아서 눈사람을 만드는 정호석 위로 우산을 씌워주고 있던 정국이의 젖은 어깨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뭐가 그리 웃겼는지 얼굴에 웃음 가득했던 정국이는 우산을 친구 쪽으로 기울여주며 제 어깨는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종이 치자 발을 털고 유유히 체육관 안으로 사라졌었다. 내색도 안 하고 챙겨주는 그 모습이 소녀의 맘을 어찌나 된통 흔들어놓던지. 그때 네 모습을 그려보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하다. 완벽한 사회성.. 전정국.
그러나 그런 정국이한테도 단점이 딱 하나 존재했다. 날 갖지 못한 것? 음, 아니. 인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앞서 창문에 달라붙는 애들 중 하나였던 나도 그렇고, 영어 수준별 수업도 가까운 자리 앉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달 동안 지켜본 결과 정국이는 창가 쪽 두세 번째 정도, 적당히 앞자리를 선호하는 것 같았는데 불행하게도 그 주위로는 이미 모조리 자리가 차있었기 때문이다. 종 치면 공평하게 땡 치고 시작해야지, 전 시간에 미리 그 책상 주인한테 영어책 맡겨놓을 건 뭐람. 그 덕에 난 주구장창 정국이 뒷모습이나 애매한 옆모습만 봐오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같은 수준별 수업을 듣는 나도 정국이를 토론대회에서 제대로 봤을까. 수업 들으면서 티 안 나게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정국이가 잘 안 보이는 날엔 좀 많이 우울하기도 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학기 초에 간식 주신대서 영어쌤 노트북 도우미를 자처한 탓에 정국이와 가까이 앉는 게 더 힘들어진 것도 있다. 그래도 끝까지 노력해보려고 수업이 끝나면 재빠르고 자연스럽게 노트북 들어드리러 앞으로 나가보지만 넌 그때마다 마침 교실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별짓을 다 해도 책상 주인과의 지연을 못 이기는 건 사실이니..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참, 그러면 다른 여자애들은 진작부터 자리 경쟁하고 있었다는 건데 대체 언제부터 정국이를 알아본 건지. 인재 발굴 능력이 거의 세종대왕 수준인 것에 놀라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 다음으로 생각했던 건 음악실. 이것도 하필이면 음악 시간 전이 체육 시간이고 음악쌤이 학생부쌤이라 지금껏 한 달 동안 음악실 나오는 정국이를 본 건 딱 한 번이었다. 그래도 차차 옷 갈아입는 시간을 줄여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모두를 제치고 정국이를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정글 같은 경쟁 속에서 바쁘게 짝사랑 하고 있는데 문득 그 치열함 속에 몸을 부대끼며 껴있는 날 생각하다보면 가끔 현타가 온다. 정국이를 앓고 있는 사람이 적게 잡아도 전교에 50명은 가뿐히 넘길 텐데 참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이 들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아.. 훨씬 많으려나. 갑자기 슬프네. 물론 예쁜 여자친구가 생긴다면야 그땐 당연히 뭘 어쩔 수도 없고 이런 작은 팬심 같은 마음도 미안해지겠지만 그래도 아직 없는 건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뭐, 연예인 사생범들처럼 스토킹하듯 선을 넘어서 깊게 알고 싶은 건 절대 아니고, 학교 다니면서 힘을 얻는 활력소 정도니 아무도 나에게 음흉하니, 변태니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맘이다. 인간 비타민, 인간 박카스, 인간 비타오백. 어떤 말로도 피곤을 날아가버리게 해주는 너를 담을 말이 없었고 그 정도로 너는 내게 컸으니까.
그래서 난 너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루에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평소의 일주일만큼의 행복이 전부 채워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날이 행복의 농도는 견줄 데 없이 진해졌고 진득한 아침잠을 떼어내야 할 때도 평소보다 산뜻하게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따금씩은 이렇게도 고마운 죄 없는 정국이가 불현듯 미워질 때가 생긴다. 팍팍한 학교 생활 속 내게 유일한 호흡기 역할인 너는 정작 문제집 앞에서만 숨을 쉬고 있으니까. 지겹게 말했지만 지겹게 슬픈 사실이다. 꼭 친해지고 싶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자주 봤으면 좋겠는 모순적인 맘이랄까. 그렇다고 내가 정국이에게 무엇을 바라고 좋아하는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니었지만 그래도 딱 하나. 너에게 갖는 바람이 아닌 그냥 나만의 작은 소원을 말해보라면, 그건 졸업식 때 받을 앨범에 꼭 네가 있었으면 하는 것. 그거면 고등학교 3년 생활은 한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꽃잎으로 가득해서 행복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망했다. 냄새 안 나게 텀블러도 깨끗이 씻고 간만에 여유로운 아침을 맞아 학교에 왔는데,
"뭐지. 그 모르는 표정은?"
사회와 문학, 무려 두 과목의 수행평가를 완벽히 잊고 있었다. 어제 청소 시간에 물로 배를 씻고나서 덩달아 뇌도 깔끔하게 씻겼는지 순백의 상태였다. 내 표정을 보고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붕어냐? 하고 옆 자리에 앉는 나영이. 그리고는 뒤늦게 머리를 관통해오는 제출 날짜. 그렇다. 오늘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웹툰을 보고 두 장 분량의 소감문을 쓰는 것과 주제 상관 없이 작시하는 것. 작시야 10분컷으로 아무거나 휘갈기면 일단 6교시에 제출은 할 수 있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지만 문제는 웹툰. 유명하지만 전혀 본 적도 없는 웹툰이라 걱정되기 시작했다. 4교시에 있는 사회 수업 끝나면 쌤이 내라고 할 텐데 그 분량을 언제 다 쓰냐..
"아..."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뱉고 얼른 핸드폰을 들어 웹툰을 검색했다.
소감문을 폭풍처럼 몰아서 끝내버리고 탈진한 심신에 터덜터덜 급식실에 들어왔는데, 세상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등어 카레 튀김이 등장했다. 급식실 들어올 때부터 공간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튀김 냄새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대박이다. 신나서 퐁퐁 설레는 걸음으로 창가 자리에 위치한 구석자리에 앉았다. 바빠서 오늘 메뉴를 못 봤는데 열심히 머리 쓴 거 상이라도 주듯 내게 고등어를 내려주심에 다시 한 번 감복했다. 오늘도 영양사 쌤께 마음으로 감사를 전하며 젓가락을 들었는데 앞에서 들려오는 다소 불만 있는 목소리.
"튀길 거면 고등어만 튀기지.. 너 먹어."
"진짜? 아싸. 고마워."
살포시 내 고등어 위로 더해지는 부드러운 다른 고등어. 웬 떡이냐 하고 열심히 발라서 밥과 함께 입에 넣자 속을 가득 채우는 기쁨에 최선을 다해 먹고 있었다. 근데 내 씹는 소리와 상반되게 어디선가 들리는 허전한 사운드. 문득 식판에서 눈길을 떼고 나영이를 보자 역시 허전한 저 입놀림. 주반찬을 나를 줬으니 오늘 나영이의 기쁨은 비었겠구나 싶다.
"정 그러면 카레만 발라서 줄까?"
"됐어. 뭘 그렇게까지 해. 카레향이 싫은 거야."
"그럼 이거, 내 거 어묵 다 먹어도 돼."
아무리 안 먹는 거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중요한 반찬을 다 주었으니 나도 최대한 줄 수 있는 걸 건넸다. 젓가락으로 어묵볶음을 한방에 다 집어서 나영이 급식판으로 완벽하게 옮기는 데 성공했다. 아쉽긴 한데 난 더 큰 걸 받았으니까 내가 더 고마웠다. 그러자 갑자기 미간을 잡고서 인상을 쓰는 나영이. 늘 그렇듯 오버액션이었다.
"크으으. 이런 게 우정인가."
"그냥 밥 먹어."
거기에 대충 무미건조하게 리액션을 거부하고서 밥, 고등어, 김치. 이 루트를 무한반복하며 열심히 씹고 있는데 옆에서 들리는 높은 톤의 남자 목소리.
"어? 안녕?"
방금 누가 안녕 소리를 내었는가.
"..어, 안녕."
내 식사를 방해한 건 다름 아닌 일본어의 아들 정호석이었는데 그 맞은편에 있는 정국이 때문에 더 놀랐다. 둘은 언제 왔는지 사이에 한 자리를 띄우고서 우리 옆 식탁에 앉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호석은 앉기 전에 나인 걸 알고 인사를 건넨 듯 싶은데 왜 이 타이밍에 정국이랑 같이 있는 거야..? 분명 입가에 기름 다 묻었을 텐데. 그렇다고 급하게 닦기도 뭐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하니 정호석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려진다.
"몸은 괜찮아?"
"아, 응응. 진짜 괜찮아. 그만 미안해해도 돼."
제법 반가워하던 낯은 금세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어, 저번처럼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려 하길래 그만하라고 했다. 걱정할 정도로 아프진 않아, 라고 할 순 없으니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자 금방 표정이 풀려 안도하는 게 눈에 보이고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넌 감정을 전혀 못 숨기는 편인가 보다.
"괜찮다니까 다행이다. 그럼 맛있게 먹어."
"응. 너도."
가볍게 미소짓던 정호석이 이제야 수저를 든다. 나도 다시 식사에 집중하려는데 도통 할 수가 있어야지. 정국이는 이미 앉았을 때부터 이쪽을 힐끗 한 번 보고는 진작에 밥 먹고 있었고, 난 그걸 가까이서 보자니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랑 밥 먹는 것도 아닌데 하여튼 주책은.
"..."
그래. 너도 주책이구나. 나영이 표정을 통역하자면 내 마음이었다. 아니, 그나저나 정호석은 계속 모르네. 일본어랑 영어, 무려 두 과목이나 같이 듣는데도 조금도 못 알아보는 것 보니 내가 어지간히도 임팩트가 없었구나 싶다. 와. 전혀 안 친한데 서운해. 이게 서운하다고 해도 될는지 잘 모르겠는데 대충 그런 비슷한 감정이 든다. 뭔가 억울하고 슬프고? 그래도 관계가 인사하기도 애매한 관계라 모르는 척 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 말투나 표정도 그렇고 굉장히 살가운 친구구나 싶다. 솔직히 만약에 내가 먼저 봤으면 아마 그냥 지나갔을 거다. 친구야 미안한데 나 아직도 팔이 빠질 것 같아. 아프면 오래서 왔어, 라고 내 진심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저렇게나 충분히 미안해하는데 더 미안해하게 만드는 건 못된 사람 같아서, 어색한 사이인데도 군더더기 없이 끝난 대화에 만족했다.
근데 그때부터 신기한 현상이 발생했다. 나와 나영이. 정호석과 정국이. 한 칸 띄고 앉은 상태고 급식실 자체가 워낙 시끌벅적한 탓에 대화 소리가 잘 안 들릴 수 있지만,
"어제 진짜 급했을 때 있잖아. 그때 부딪혔었거든."
"아~ 바지에 큰일 할 뻔했을.."
"야씨. 조용히 해."
"그래서 왜 속이 안 좋았던 거래?"
"모르겠어. 아, 근데 걸리는 게 우유 먹고 자가지고."
정말 다 들렸다. 그래서 알게 된 어제 그 상황의 진짜 내막. 그러니까.. 마려운 강아지 같이 울 거 같은 표정이 진짜 진심에서.. 우러나온 거였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미안해서 그러는 줄 알고 괜히 마음 쓰고 있었네. 어제를 회상하며 간단하게 얘기해주던 정호석에게 정국이가 놀리며 웃는 말투로 말하니 살짝 호들갑을 떨며 쉿,하라고 제스처를 취한다. 자기 딴에는 소곤소곤 말하는 줄 알았겠지만 진작에 다 들린 말들에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또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화.
"야. 근데 너 그거 학원쌤한테 들었냐?"
"뭐를."
"역시 정보통이 느려터져요. 우리 학원 문과 한 명 늘린다고 저번에 말 나왔었잖아."
"응."
"그거 진짜 한다고 하던데. 왤까?"
"원장님이 힘든가 보지. 몇 명 없어서."
"그래도 우리 학원 싼 편은 아니잖아. 소수로 고효율 내는 거 아닌가."
"모르지."
아 참, 잊고 있던 게 하나 있었는데 정국이 때문에 치열한 건 학교 자리 경쟁 뿐만이 아니었다. 정국이는 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인강을 듣는지, 과외를 받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확실하게 아는 건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 하나. 듣기로는 단과 학원이라 수학과 영어만 가르친다고 했나. 근데 그 학원이 인기가 좋아서 들어가기가 어렵다고도 들었다. 다름 아닌 정국이가 다니는 곳인 데다 거기에 선생님들이 능력이 좋기도 했고 설상가상 수강생 정원도 극히 적었으니까. 그래서 항상 등록 대기 신청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막상 진짜 등록되는 사람은 없는 그런? 처음엔 아니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려는 거지 했는데. 그래.. 정국이 있으면 그래도 된다고 수긍했었지. 게다가 들어가기 어려운 데는 성적 기준도 한 몫했다. 중위권 성적을 올려준다기보다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주는 느낌이라고, 다른 반 친구가 그 학원 상담 다녀오고나서 말해줬었다. 그 애는 낙담하며 결국 들어가지 못했지만 아직도 나처럼 멀리서 앓는 중일 거다. 근데 이런 너네 학원에 자리가 났다는 얘기지? 숟가락으로 밥을 푸며 눈을 반짝였다.
"..야. 옆에."
"어?"
그때 밥 먹다 말고 눈치를 보며 날 부르는 나영이. 내 옆으로 고갯짓하길래 무의식적으로 돌아본 곳엔 내가 생각에 빠져서 못 봤는지, 계속 저기.. 저기.. 해오던 것 같은 모양새로 내게 다시 한 번 말을 거는 정호석이 있었다.
"저기, 혹시 근데 우리 일본어 같은 반 아니야?"
"어. 맞아, 맞아."
"와, 그랬구나. 왜 몰랐지. 어디서 봤다 했는데."
"아아. 나도."
"헤헤. 반가워."
"반가워."
아까 급식실에서 나한테 처음 인사할 때보다 더 반갑게 날 알아본 티를 내며 웃는 정호석. 밥 먹던 정국이도 살짝 이쪽을 보는 것 같다. 급기야 반갑다며 악수를 건네는데 정말 보기와 같게 밝은 애인 것 같아 나도 웃으며 받았다.
"히. 그럼 밥 맛있게 먹어."
"응. 너도 맛있게 먹어."
빈 의자 위로 가볍게 악수를 하고서 다시 대화는 끊겼다. 그러고 무의식적으로 나영이를 보는데 표정이 (0.0)처럼 눈이 확장되어 네가.. 남자랑 손을 잡았어..? 웃으면서? 라고 말하고 있는 얼굴이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
학교가 끝나고 핸드폰을 받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잡아야 했다.
"여보세요? 엄마!"
'응. 왜.'
"엄마, 나 학원 다녀도 돼?"
'학원? 저번엔 싫다더니?'
"친구가 수학이랑 영어 단과로 하는 학원 다니는데 거기 자리가 났대. 원래 자리 잘 안 나는 데거든."
'그래서 보내달라고?'
"응응. 수학이랑 영어 둘 다!"
'근데 영어도? 영어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아니야. 영어도! 수학이랑 영어 둘 다!"
'알겠어. 그럼 일단 그 학원 번호 보내봐, 전화해볼게. 넌 자습실 들어가고.'
"응응. 전화해보고 바로 카톡해줘!"
'알았어. 애가 왜 이렇게 흥분했데. 공부나 해.'
"응!"
허겁지겁 엄마와의 통화를 끝내고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챙겼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엄마가 먼저 과외 얘기 했었는데 진짜 잘됐다. 자습실 들어가려면 10분 남았으니까 그 전에 엄마한테 좋은 소식의 카톡이 왔으면 좋겠다.
"야. 언제 나와?"
"지금, 지금."
일찍이 가방을 다 정리하고 복도에 나가 날 기다리고 있던 나영이가 답답한 얼굴로 날 부른다. 뭐 하느라 이제 나오냐며 타박하는데도 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왜 그래. 오랜만에 남자랑 대화해서 신나? 아, 아까 걘 어떻게 아는 거냐니까? 일본어 때문에?"
"응. 니혼."
"그럼 왜 괜찮냐고 물어본 거야?"
"히히. 어제 부딪혔었어, 걔랑."
"아. 걔랑 부딪혔으면 아팠겠다. 살도 없어보이던데."
"아프긴 했는데 안 아팠어."
"뭐래.."
연신 입이 귀에 걸려 시원찮은 대답만 하는 날 보며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제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돌린다.
"근데 너 아까 옆에서 걔가 하는 얘기 들었어?"
"뭘?"
"걔네 학원 자리 생긴 얘기. 못 들었어?"
"진짜? 대박. 나도 다니고 싶다. 어제 인강 프리패스 끊었는데.. 아쉽."
"나 그래서 방금 엄마한테 전화로 그 얘기 했어. 학원 다니고 싶다고."
"역시..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더니. 멋있다."
"난 짝사랑이잖아. 걘 나 알지도 못해."
"야, 그래도 일단 같은 학원이면은 자주 보는 거잖아. 말도 할 수 있겠네."
"아니야.. 그냥 난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근데 거기 학원 잘 가르친다고 하지 않았어? 잘하면 성적도 오르겠는데?"
신나서 나영이와 수다 떨며 걷다 보니 어느새 다다른 여학생 자습실. 종 치기 전이어서 많이 시끄러운 내부를 뚫고 들어가 반과 번호 순서대로 매겨진 숫자가 붙어있는 지정석에 가방을 놨다. 좋은 예감이 들어 여유롭게 교재를 꺼내고 보니 어제 책상에 붙이고 간 공부 명언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온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라는 말. 내가 뭘 준비했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느낌에 어김없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때 마침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 엄마에게서 온 문자다.
'다니는 학교랑 모의고사 성적 말하니까 될 것 같이 얘기하던데. 언제 테스트 보러 오라더라.'
기회를 진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