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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전정국] 그대야 안녕 3화 | 인스티즈 

 


 

 

 

 

 

 

BGM - 구름여행 (소린)

 


 


 


 


 


 


 


 


 


 


 

3화 

: 행운 


 

 


 


 


 


 


 


 


 


 

 쏜살같이 석식을 먹고서, 외롭다며 가지 말라는 나영이를 뒤로 하고 1층 현관으로 내려왔다. 운동화를 신으려는데 엉켜있는 끈이 신경쓰여 ​현관 턱에 걸터앉았다. 뒤죽박죽 꼬인 끈을 하나씩 잡아 빼고 열심히 다시 묶는데 이미 더럽혀진 끈 끝 쪽이 신경 쓰인다. 아침에 나올 땐 하얘보였던 게 아무래도 마음이 속인 착시였는지 보기에 별로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좀 신경쓰였을 법도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에 잘 좀 신고 다닐 걸, 하는 생각을 끝으로 금방 떨쳐버리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실 너무 떨렸다. 나 이제 학원 가면 정국이 볼 수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가슴은 진작 설레발치고 있었고 긴장돼서 호흡도 가빠지는 것 같았다. 아, 근데 혹시 아까 물 맞았다고 피곤하다고 오늘 학원 안 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진짜 안 되는데. 잘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 늘어가고 있다. 


 


 

 "후.." 


 

 

 노력해보지만 좀처럼 잘 가라앉지 않는 마음에 심호흡을 하고 발을 딛었을까, 걸으며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6시 25분이었다. 학원차 오려면 15분이나 남았는데 정국이를 보려면 15분밖에 안 남은 시각이었다. 정국이 있을 때 눈에 띄는 짓을 하면 바보 같이 보일 것 같아서 얼른 이 맘을 추슬러야 하는데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 난 그냥 학원에 가는 첫날이고 학원차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스스로 그냥 평범한 일이라며 주문을 걸어보지만 알아듣는 뇌는 아무리 말해도 ‘정국이를 보러 가는 첫날이고 난 정국이를 보러 가는 것뿐이야.’라고 알아듣고 있었다. 주문도 안 통하니 다소 답답해져 그냥 마음을 놓고 비우기로 노력해본다. 차라리 아무 생각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던져두는데 문득 드는 생각. 원래 이 시간이면 어둠이 하늘을 절반은 덮었을 때였는데 아직 꽤 밝은 걸 보니 해가 좀 길어지긴 했나 보다. 새삼 이제 여름이 오는구나 싶었을 때,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 


 


 

 ‘나 학원쌤이야. 정문 6시 40분이 맞아. 하얀 승합차에 학원 이름 써있으니까 잘 타고 와​​.’ 


 

  

 오.. 지금 학원차 오기 10분 전인데. 아무 문자가 없으셔서 어제 말해주신 시간이라 생각하고 나온 게 다행이었다. 어제 보니 많이 바쁘시던데 아마 문자해주는 걸 깜빡하셨던 듯싶다. 어차피 난 안전한 시간에 나와 학원차를 잘 기다리고 있으니 딱히 선생님이 미워지거나 문제될 건 없었다. 근데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지. 이 학원차를 정국이가 타느냐 마느냐. 


 

 

 “...” 


 

  

 그때 내 걱정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사람의 등장. 오, 지져스. 선생님. 지금 나오고 있는 사람이 전씨 성에 이름은 정국을 쓰는 사람이 맞나요? 단어장에 코를 박고서 정문에 다와가는 정국이를 힐끔 보고는 못 본 척 뒤를 도니, 내가 이룩한 현실에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석식을 먹고 매번 어디를 가는 줄은 알았지만 학교 앞에서 학원차를 타는 줄은 전혀 몰랐기에 더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좋아서 눈물이 난 적은 실제로 없지만 그 만감이 교차하는 벅찬 감정이 뭔지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혼자 흠뻑 감격해있는 사이 뒤에서 들리는 운동화 소리는 가까워졌고 이내 근처에서 멈추는 듯했다. 둘만 있는 정문 앞. 난 애써 모르는 척 핸드폰만 뒤적이고 있었고 정국이는 날 진짜 몰랐다. 슬프지만 현실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누가 보면 싸우기라도 한 듯 큰 교문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갈라서 있지만 정국이와 나는 같은 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무려 같은 차를! ​​속으로 방방 뛰며 온신경은 건너편에 서있는 정국이를 향해있었지만 난 여전히 핸드폰에 집중하는 척 하며 나만의 외사시 기술로 몰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쉽게도 단어장을 더 들여다보는 정국이에 어쩔 수 없이 쉬는 시간을 가지고 시간을 보니 38분. 정국이와 함께한 몇 분이 눈 깜빡할 새 몇 초만에 사라진 것 같다. 너.. 시간을 뺏어가는 능력도 있었어? 


 


 

 “...” 


 

 

 근데 진짜 넌 단어만 외우는구나. 짝다리를 짚고 서서 고개를 숙이고 아까부터 단어장에만 몰두하고 있는 정국이. 내가 서있는 걸 알긴 알 텐데 처음부터 눈길은커녕 신경도 안 쓰고 있다. 그래, 그런 철벽 좋다. 내심 앞으로도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주기를 소망하며 하릴없이 바닥에 있는 돌을 발로 건드리는데 교문 앞으로 들어온 흰색 승합차 한 대. 정국이가 그 차를 보고 단어장을 덮는 걸 보니 저 차가 맞는 것 같다. 이제 보니 문에 적당한 크기로 학원 이름이 써져있었다. 학원차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걷는 정국이 쪽으로 쭈뼛쭈뼛 다가가니 낯선 눈으로 나를 아주 잠깐, 진짜 잠깐 힐끗 보고는 학원차 문을 연다. 먼저 탄 정국이 뒤로 기분 좋게 남아있는 섬유유연제 냄새에 이어서 타려던 발이 멈춰졌다. 별로 가까이 있던 적이 없어서 그런지 처음 맡아보는 향기다. 너란 남자는 어떻게 향기도 완벽하냐.. 질린다, 진짜. 멋있음에 정신이 나갈 뻔한 걸 어렵사리 다시 붙들고서 나도 몸을 싣고 문을 닫을까 말까 흠칫 고민하는데, 


 


 

 “학생이 새로 왔다는 학생이여?” 


 

 

 사람 좋은 얼굴과 구수한 말투로 날 맞아주는 학원차 기사님. 어색한 분위기 속 반갑게 말 걸어주는 기사님에 나도 달가워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혹시 다른 사람들은 더 안 타나요?” 

 “응. 문 닫아도 돼야.” 

 “넹.” 


 

 

 우리 학교에서 타는 사람이 당연히 더 있을 거라 생각하고 좀 늦는구나 했는데 이게 끝이라니. 정국이와 단 둘이 차를 탄다니. 현실 입틀막이다, 물론 속으로. 연달아 터지는 축제 같은 일들에 눈과 턱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엄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태어나게 해주시고 이 학교에 다니게 해주시고 학원을 보내주셔서. 


 


 

 “...” 


 

 

 감격에 겨운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다가 혹시 들킬세라 재빠르게 정국이를 봤는데 역시나 또 별 생각도 관심도 없는 듯 조용했다. 문 바로 앞에 앉은 나와 달리 중간 칸에 앉아있는 정국이도 턱을 괴고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근데 어쩜 그런 일상적인 모습마저도 얼마나 화보 같던지. 마음 속으로 사진을 찍으며 오래오래 기억해야지 생각하고 아쉬운 맘으로 몰래 보는 걸 그만뒀다. 그러고는 언제 봤냐는 듯 다시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들었다. 


 

 

 ‘학원 갔어? 만났어?’ 


 


 

 음성 지원되는 나영이의 문자에 소리 없는 팬미팅 중이라며 지금 상황을 짧게 설명해주고 난 후, 차를 5분쯤 탔을까. 학원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학원차. 어제 테스트 보러 걸어올 땐 꽤 먼 것 같았는데 차 타니까 정말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조금 더 타도 좋은데 싶은 생각에 잠깐 아쉬운 맘이 들었을 때 앞에서 들리는 기사님의 목소리. 


 


 

 “자리가 없네. 난 더 돌아볼 테니까 먼저 내려서 올라가요.” 

 “..네, 네.” 


 

  

 빽빽한 주차장에 혀를 내두르던 기사님의 말에 자동적으로 대답을 한 후 누가 뒤에서 미는 듯이 학원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일단 정국이보다 일찍 내리긴 내렸는데 도통 어느 쪽으로 가야 있는 건지 모르겠는 입구에 두 발이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곧이어 뒤에서 감사합니다, 하고 내린 정국이를 떨리지만 소심하게 슬쩍 보는데 날 본 건지 못 본 건지 무심하게 어느 쪽으로 걸어간다. 정국이가 앞에 있고 내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게 걷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엘리베이터. 아, 이쪽으로 와야 되는구나.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정국이가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 후 둘 다 그 앞에 섰다. 


 


 

 “...” 

 “...” 


 


 

 근데.. 아까 정문에서 멀리 서있을 땐 몰랐는데. 


 


 

 “...” 

 “...” 

 


 

 멀뚱멀뚱 단둘이 가까이 같은 곳을 보고 있으니 이만큼 어색한 게 없었다. 난 네 얼굴을 익숙히 여러 번 봐왔지만 넌 오늘까지 내 얼굴을 본 게 몇 번 안 될 거다. 며칠 전 급식실에서 정호석과 인사하던 게 나였는지 기억을 못할 수도 있고. 갑자기 말도 없이 처음 보는 애가 학원차를 타고 학원에 같이 가고 있으니 조금은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말 한 번 안 섞어본 사이에 내 소개를 먼저 할 만큼 난 간이 크지 않았으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하, 1층입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어색함 속에서 날 구원해주려는 반갑지 않은 여자 목소리. 그리고 또 같이 몸을 싣는데 어김없이 예상되는 미치도록 서먹한 분위기에 신속하게 핸드폰을 꺼내드니 때마침 문자가 와있었다. 


 


 

 ‘팬미팅?ㅋㅋㅋㅋㅋㅋ 그래서 행복해?’ 

 ‘몰라. 일단은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아.’ 


 

 

 지금 내 기분을 딱 표현할 수 있는 말. 숨 막혀서 죽을 것 같다는 말. 물론 좋은 것도 있지만 답답할 정도로 어색해서 얼른 빠져나가고 싶어졌다. 난 가까이서 보게 되면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너무 어색하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진짜 현실적인 거리감이 느껴진달까. 그래도 지금 좀 다행인 건 이 시간에 학원에 같이 올라가는 거 보면 일단 영어 수업은 듣는 것 같았다. 수학은 자신이 없는 편이라 만약 수학만 같은 수업을 듣게 되면 공부 못하는 애로 낙인찍힐 것 같아 사실 좀 걱정이었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엉망인 점수는 아니지만 정국이에 비하면.. 한 구간을 통으로 밀려 썼나 싶은 점수일 테니까. 그래서 정국이가 한 과목만 듣는다면 수학이 아니라 영어였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다행히도 들어맞는 것 같다. 영어만 듣고 다른 공부하러 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잠깐 혼자 속으로 안도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다 온 3층. 정국이가 내리고 그 뒤를 따라 내리니 어제 왔던 학원이 보인다. 네가 열고 들어간 유리문을 잡고 같이 들어가는데 생각해보니 선생님한테 전해듣지 못한 게 학원차 시간 뿐만이 아니었다. 난 내 강의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또 쭈뼛대며 길을 잃을 뻔했지만 마이웨이로 강의실 복도로 향하는 정국이를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따라갔다. 막상 따라가고 보니 문 옆에 붙어있는 ‘English Classroom 3’. 오. 생각보다 잘 헤쳐나가고 있는데. 무작정 정국이를 따라가기로 한 방금 전 내 자신의 결정을 기특해하며 긴장되는 마음으로 뒤따라 들어가는데, 


 


 

 “...” 

 “...” 

 “...” 

 “...” 

 “어.. 어깨빵?”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정국이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강의실 안에는 친숙하게 날 어깨빵이라고 부르며 눈이 커지는 정호석이라는 애와 그 주위로 날 아주 낯선 눈으로 보는 남자 둘과 여자 둘이 있었다. 정국이의 등이 눈앞에서 거둬지고 슬쩍 앉을 자리를 살피는데 한 분단에 앞뒤로 앉아있는 남자 둘과 여자 둘의 시선이 따갑다. 아니, 나도 너희를 거의 처음 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학교인데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지 않니. 


 

 

 “헐. 오늘부터 여기 새로 다니는 거야?” 

 “아, 응.” 

 

 

 이 상황에 생각보다 날 반가워하며 말을 걸어주는 정호석. 고마움에 쏟아질 뻔한 눈물을 참고 다시 자리를 탐색해보는데 두 명 씩, 2행 2열​. ‘=’ 이렇게 생긴 흔히 이꼴이라고 하는 부호가 양쪽 벽에 붙어있는 모양의 8명 자리가 있었다. 정국이는 진작 앞줄인 정호석 옆자리에 앉았고 비어있는 곳은 운 좋게도 그런 정호석 바로 뒤 두 자리였다. 쭈뼛대는 것도 잠시, 자리를 찾아가 정국이 뒤에 앉으려다 심장이 허락을 안 해주는 바람에 결국 정호석 뒷자리에 앉았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떨려서 맘을 가다듬느라 애쓰고 있는데 옆 분단 앞자리에서 날 돌아보는 어떤 남자애. 조심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아. 시선이 집중되는 거에 당황해서 이제 알았는데 어제 눈싸움 했던 그 갈색 머리 남자애다. 

 


 

 “오늘부터 여기 다니는 거야?” 

 “어? 아.. 응.” 

 “그럼 어젠 테스트 보러 온 거였구나.” 


 

 

 어제부터 든 생각이지만 참 생긴 거랑 말하는 게 매치가 안 된다. 큰 눈이 살짝 냉정하게 생겨서 껌 씹고 째려보면 지체없이 지리겠는데 말투는 착했다. 그 남자애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다시 뒤도는데 그때 앞줄 네 명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뒤통수가 다 똑같이 생겼다. 놀랄 만큼 동그랗다. 그 모습들이 뒤에서 보기에 뭔가 귀여워서 혼자 속으로 웃어보는데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 


 


 

 “...” 

 “...” 

 


 

 거의 본 적 없는 여자애 두 명이 생소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음.. 뭔가 촉이 온다. 내 생각에 갈색 머리 남자애 뒤의 여자애와, 잠시 들린 말투가 시니컬했던 하얀 남자애 뒤에 있는 여자애는 분명 각각 사랑의 짝대기였다. 그러니 방금 나한테 말 걸었던 남자애 뒤에 있는 여자애가 날 다소 매서운 눈으로 본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그 짝대기에 동참할 수밖에. 


 

​ 

 "..." 


 

​ 

 내가 정호석 뒤에 앉았기에 옆모습으로 보이는 정국이었다. 아마 문제집을 펴서 오늘 수업할 데를 찾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 정국이 뒤로 조용히 자리를 옆으로 옮기려 시도해보려다가 얼굴이 아예 안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얼른 관뒀다. 짝대기는 안 좋은 거였어. 얼굴이 안 보이잖아. 동참하지 않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하다 문득 누가 더 올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빈 의자에 뒀던 책가방을 들어 내 의자 뒤로 걸었다. 설마 외롭게 문과 여자가 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했다. 58분을 가리키는 분침에 살짝 불안해져오긴 하는데 그래도 설마. 옆에 여자애들과는 친해지기 글러먹은 것 같으니 다른 친한 친구라도 사귀어야 할 텐데. 


 


 

 "자. 저녁들은 다 먹고 왔어?" 


 

​ 

 그때 학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익은 선생님. 들어오며 우리들 허기 안부를 묻는다. 전 두둑이 먹고 왔습니다만 진짜 수강생이 여기서 끝인가요? 혹시나 누가 늦게라도 우다다 뛰어오는 건 아닐까 싶어 문 밖을 주시했는데, 전혀. 복도는 평화로웠다. 


 


 

 "네. 쌤은 뭐 드셨어요?" 

 "육개장. 호석이는?" 

 "김태형이랑 김밥이요." 


 

​ 

 가벼운 인사로 건넨 말에 살갑게 받아치는 정호석이 김태형이라는 애랑 같이 먹었다며 웃는데 어딘가 사악한 얼굴이다. 그러자 그 갈색 머리 남자애가 기다렸다는 듯 억울한 신경질을 낸다. 


 

​ 

 "야씨, 너는 라볶이 시켰잖아. 그래놓고선 내 김밥 뺏어먹은 거면서 지 라볶이는 쏙 빼고 말하네. 쟤 아까 라볶이랑 김밥 2인분 넘게 다 먹었어요. 돼지예요, 돼지. 양 부족하다면서 나 라볶이는 쥐꼬리만큼 주고." 

 "표정이 재밌잖아. 그래서 그냥 다 뺏어먹었어요." 


 


 

 울분 섞인 말을 다다다 뱉지만 어딘가 느린 말투여서 듣는 귀에 말이 차근차근 박히는, 갈색 머리 남자애 이름은 김태형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어제 얼핏 들었던 이름 같기도 하고. 근데 하여튼, 라볶이 안 줬으면 김밥도 안 주거나 김밥을 뺏겼으면 기를 쓰고 라볶이를 강탈하면 될 일이지. 마음이 약한 건가. 놀리기 좋고 순진한 애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영이가 그랬으면 봐주는 거 없이 바로 넥슬라이스였을 텐데. 근데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다 보니 좀 웃긴 게, 둘이서 이렇게 정신없이 티격태격하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선생님 표정은 사진 찍는 사람처럼 온화했고 그 뿐만 아니라 정국이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책만 살피고 있었다. 아. 저 마이웨이도 왜 이렇게 멋있어 보이지. 또한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계속 정호석과 말싸움하는 김태형 옆으로 보이는 민.. 뭐야. 책 아랫면에 네임펜으로 대충 적혀있는 이름이 잘 안 보인다. 민윤? 민윤이라는 애는 감흥 없이 샤프에 샤프심을 넣는 중이었고 내 옆에 여자애들은 소소하게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지금 보니 둘 빼고 다 싸움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고, 정신없어. 그만 싸우고, 들. 오늘 새 친구 온 거 봤지?" 


 

​ 

 그때 싸움을 끊고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내 이야기를 꺼내는 선생님. 아 부담스럽다. 그냥 넘어가주시지. 이어지는 쌤의 오늘 새 친구 온 거 봤냐는 말. 그리고 물흐르듯 흐르는 정적. 그래, 이 정적은 교문 앞부터 익숙했으니 상처 따위 받지 않는다. 


 

​ 

 "네. 제가 아는 친구예요." 

 "그래? 그럼 학원에 모르는 거 있으면 네가 알려주면 되겠다." 

 "그럼요." 


 

​ 

 너는 진짜 내가 나중에 콘푸라이트 사줄게, 호석아. 학원에 빈 자리가 생긴 걸 알게 해주고 처음으로 학원에서 말 걸어준 은인인 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알려주겠다며 빙긋 웃어주니 진심으로 고마웠다. 호의를 퍼주는 정호석에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서야 이제 나에 대한 별다른 코멘트 없이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 


 


 


 


 


 


 


 


 

 ​정국이에 대한 별다른 소득 없이 끝마친 영어 수업. 딱히 기억에 남는 수업 내용은 없었지만 정국이 귀 생김새만큼은 머리에 각인되었다. 멍 때리다 우연히 시선이 정국이 귀에 꽂혔었는데 딱 칠판이 있는 방향이라 마음 편하게 주구장창 귀만 본 탓이었다. 피부색이 밝으니 당연히 귀도 밝았고 심지어 귀도 잘생긴 귀였다. 내가 변태는 아닌데, 그냥 귀도 멋있었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하여튼 첫 영어 수업을 마치고서 가방에 필통과 책을 넣으려는데 문득 드는 생각. 선생님이 나가기 전에 빨리 붙잡아야 했다. 


 


 

 "선생님, 저 수학은 어디서 해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얘기 안 해줬구나. 3번으로 가면 돼." 

 "네." 

 "그럼 내일 보자." 

​ 


 

 내가 안 물어봤으면 난 또다시 미아가 될 뻔했다. 오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네. 한결 마음이 놓여 다시 마저 가방을 싸는데 앞에서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는 정호석. 


 


 

 "안녕. 잘가, 친구." 

 "응. 안녕." 


 


 

 그리고 김태형. 


 


 

 "잘가." 

 "으, 응." 


 


 

 아무래도 정국이한테는 무리고 해서, 그래도 내가 먼저 말을 한 번 걸어보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먼저 인사해준 정호석. 여자애들과 민윤이라는 애는 벌써 나가고 그 뒤를 따라 막 나가려고 하던 김태형도 나를 보고 가볍게 인사해준다. 후자는 예상하지 못한 터라 나도 모르게 당황을 했다. 찰나의 순간 기세를 몰아 자연스럽게 정국이한테도 인사를 시도해볼까도 했지만, 


 


 

 "..." 


 

​ 

 음. 역시 빨라. 벌써 저만치 멀어져 문을 열고 나가고 있는 정국이었다. 그래. 정국이는 바쁘지. 공부해야 하니까. 근데 정국이도 수학 수업을 듣나 모르겠네. 미련없이 나가는 걸 보니 안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속으로 조금은 다행이다 싶은 생각을 하며 제일 마지막으로 짐을 싸고 나와 'Math Classroom 3'으로 적힌 곳을 찾아왔다. 아직 들어가기 전인데 저멀리 오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많이 시끄럽다. 여고라고 했지. 그러면 자기들끼리 엄청 친할 텐데 나만 동떨어지려나. 뭐 그래도 한 시간 반밖에 안 되니까 외롭단 생각 안 들게 열심히 공부에만 집중하고 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음가짐을 가볍게 하고 문을 열었는데, 


 

​ 

 "..." 

 "..." 

 "..." 

 "..." 


 

​ 

 아, 또 지겨운 저런 눈빛과 함께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그들은 자신들의 리그에 발을 들인 사람을 보고 일단 거리를 둔다.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라고 외치고 싶은 맘이지만 그러면 더 답없이 멀어질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한다. 내게 꽂히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자리를 찾는데 이번엔 책상이 6개 뿐이다. 벽과 떨어져 드문드문 간격이 있는 책상은 한 열에 3개씩, 총 두 열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두 명씩 앉는 자리가 아니고 한 명씩 앉는 자리라서 그나마 친구 없는 티가 덜 날 것 같았다. 학원에 와서 정국이를 보고, 정호석, 김태형과 말을 튼 거 다음으로 좋은 일이었다. 


 


 

 "..." 


 

​ 

 덩그러니 비어있는 앞 두 자리 중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았는데 눈에 띄는 책상 서랍의 공부용 스톱워치. 누가 놓고 갔나. 아슬아슬 떨어질 것 같이 걸쳐있던 걸 안전하게 깊이 밀어넣고 가방을 풀었다. 시계를 보니 수업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오랜만에 교재를 먼저 좀 봐볼까 하는 우등생적인 생각에 스스로를 칭찬하며 책을 폈다. 근데 그때 열리는 문. 


 

​ 

 "..." 


 


 

 ..세상에, 정국이? 문이 열리고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와 함께 등장한 건 다름 아닌 정국이었다. 놀라서 커진 눈을 포함한 몸은 그대로 굳었다. 대박. 정국이도 수학 듣는구나. 방금 정호석이랑 같이 나갔었던 게 단지 잠깐 어디 갔다온 거였나 보다.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이 마주친 나를 보고 덩달아 흠칫 놀란 것 같은 정국이가 덤덤하게 조금 떨어진 내 옆 책상에 앉는다. 간격이 좀 있어도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 않은 책상에 자꾸 바로 옆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설렘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심장 제발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는데. 금세 얼굴이 좀 더워지는 것 같아서 빨개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혹시 귀가 벌써 빨개졌을까 문득 놀라 얼른 귀 뒤로 넘어가있던 짧은 머리를 당겨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서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책 보는 척 곁눈질로 지켜봤는데 가방 속에서 교재와 필통을 꺼내놓고는 뭘 더 찾는 듯하다. 얼마 안 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작은 탄식을 내뱉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또 안 봐도 멋있어서 속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너는 맨날 그렇게 영화를 찍는구나. 내 눈이 카메라 렌즈가 되어주고 싶어. 네 꿈을 마음껏 펼쳐보겠니. 


 


 

 "..." 


 

​ 

 혼자 헛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가 이내 정국이가 곧 두리번거리더니 뭔가 이쪽을 보는 것 같았다. 내 느낌이 착각인지  아닌지 고개를 돌려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얼른 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빨개진 걸 들키는 거보다야 그냥 일상이 자신감 없는 애로 비춰지는 게 나았으니까. 아니 근데 날 왜 보는 거지? 근데 점점 이상한 게.. 응? 티 안나게 슬쩍씩 내 배 쪽을 보는 것 같았다. ..응? ..내 배? 


 


 

 "..." 


 


 

 다시 완벽한 곁눈질로 정국이 고개 방향을 확인하는데.. 내 배쪽 맞는 것 같은데? ..나, 나 오늘 셔츠 깨끗해! 물 안 흘렸어! 왜 보는 거야, 대체! 뱃살이 볼록 튀어나온 게 혹시 보일까 싶어 순간 손으로 가려볼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러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시선을 괜히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말았다. 


 

​ 

 "거기 원래 자리 주인 있는데." 


 

​ 

 내 뱃살을 보는 건지, 아님 그냥 다른 쪽을 보고 있는데 그 근처에 우연히 내 뱃살이 있는 건지 헷갈려 미치겠을 때 뒤에서 들리는, 분명히 누구 들으라는 듯한 크기의 목소리. 탐탁치 않아 하는 앙칼진 목소리가 재수없어서 순간 돌아볼 뻔했다. 책상에 자기 물건으로 자리 맡아놓은 것도 아니고 네 자리 내 자리가 어딨니, 이 기지배야. 쓸데없이 크고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기분이 나빠져서 혼자 뚱해있는데 잠깐이나마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밀어넣은 공부용 스톱워치가 뇌리를 스친다. 손으로 뒤적거려 생각없이 꺼내 책상에 올려놓으니, 


 

​ 

 "..그것 좀." 


 

​ 

 응.. 물건으로 맡아놨었구나.. 준비성 완벽해. 역시 정국이. 꺼내놓자마자 옆에서 들리는 조심스러운 정국이 목소리에, 어진 임금에게 특산물을 상납하는 백성처럼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을 다했다. 손이라도 안 떨렸으니 다행이다. 


 


 

 "..응, 응." 


 


 

책상으로 고이 모셔다드리고 난 책에 고개를 박았다. 첫 대화라는 기회를 허무하게 날렸다. 힝.. 누가 다시 하게 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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