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시간동안
下 77시간.
“…호원씨.”
그러나 나는 붙잡혔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떠나려던 순간 나를 찾아왔고, 나를 붙잡았다. 그를 위해서라면 나는 매정히 그에게서 돌아서야 했지만 나는 그의 눈물을 짓밟을 수 없었다. 그의 눈물에 내 가슴은 미어져갔다. 내가 뭐라고 그는 눈물을 흘리는 건지. 조금의 시간이 지나 사라져버릴 내가 뭐라고. 77시간이라는 시간에 갇혀버린 나를. 나는 그에게 붙잡혔다. 모든 것을 껴안고 떠나려고 했던 내 발은 그 자리에 멈췄고 나는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를 떠나지 못했고 모든 것을 껴안지 못했다. 영영 - 그러지 못할 것이라. 그리고 앞으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 것이다. 그를 떠났어야 했다고. 모든 것을 껴안아야 했다고. 77시간, 내 남은 시간 동안 눈물짓는 그를 보며, 아마 나는.
“…성, ……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눈물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는다. 나도 그의 웃음에 화답하여 작은 미소를 지었다.
“성, …규.”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그를 불렀다. 그 또한 같은 웃음, 같은 목소리로 내 부름에 대답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76시간. 내가 그를 부를 수 있는 시간, 그가 나를 볼 수 있는 시간. 그가 내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킨다. 나는 그의 손길에 의해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바닥에 흩어진 내 물건들을 그는 차분한 손놀림으로 제자리에 두었다. 나조차 기억하지 못한 물건들의 자리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신기하게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나를 바라보았다.
“호원씨가 쓰는 물건이라서….”
나는 그를 향해 또다시 웃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건들이었던지라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리를 끝낸 그는 내 옆에 앉았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있었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옆에서 느껴지는 상대방의 존재감을 느낄 뿐이었다. 이제 나와 그 사이에 남은 시간은 75시간. 삼일하고 세 시간 더. 이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는….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움찔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손은 서늘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줘 놔줄 생각이 없음을 전했다. 그가 손에 긴장을 풀며 내 손을 마주 잡아왔다. 내 손에서 전해진 온기에 그의 손이 조금씩 따뜻해져갔다.
“호원씨, 나…휴가 냈어요.”
그가 잘하지 않았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남은 시간 전부를 함께 보낼 수 있다고, 보내겠다고. 그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예쁘다. 나는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으러 손을 뻗었으나 나는 그의 손을 피했다. 돌연 나는 두려워졌다. 감히 내가 이처럼 예쁜 그를 탐내도 되는 것일까. 75, 아니 74시간.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그리고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감히 그를 탐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탐내기에는 너무나 어여쁜 그를.
“놓지 마, 호원씨. 응? 끝까지 내 손 잡아줘.”
그가 다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가만히 그가 잡은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놓아주려 했으나 그는 나를 붙잡았다. 감히 탐해서는 안 될 그가 나를 붙잡았다. 욕심을 내도되는 것일까. 그를 내가 원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로 인해 내 남은 시간이 끝나고 그가 받을 상처가 나는 두렵다.
“호원씨, 응?”
내가 가만히 있자 그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구나. 이미 내 남은 시간 전부는 그에게 속해 있구나. 내 영영(永永)은 그를 위한 것이구나. 손에 힘을 줘 다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내 스스로 그를 붙잡는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 그 마음으로. 그제야 그가 불안한 미소를 거두고 환한 웃음을 내게 보여준다. 영영 내가 바라고, 그리워 할 웃음을.
“안 피곤해요?”
그래서 간호사에게 아침에 여기 오지 말라고 그랬지요, 라며 그가 내 옆으로 파고든다. 병원 침대는 1인용이라 두 명의 남성이 눕기에는 비좁았다. 그가 나를 꼭 껴안는다.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한 행동일 테지만 그의 행동에 남은 내 시간이 거세게 요동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눕던 그도 눕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보조 침대를 꺼냈다. 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잡았다.
“호원씨, 내가 거기서 잘게. 호원씨는 여기서-,”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쫑알거리는 그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추고 반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자리에 누웠다. 나를 위한 듯 그는 내 품에 가득 안겨왔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랐는지 긴장되어있던 그의 몸이 긴장이 풀리며 그가 천천히 내게 기대왔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내 몸은 점차 나른해져갔다. 이는 그도 마찬가지인 듯 조금은 늘어지는 목소리로 내게 잘 자라고 인사한다. 나는 말없이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춤으로써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잘 잤어요? 좋은 꿈꾸고?”
나는 그의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잘 잤고 꿈속에서 당신을 만났다고. 그도 내 대답을 눈치 챈 건지 나와 같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배고프겠다. 밥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내가 먹을 죽, 그리고 그가 먹을 밥. 그와 마주앉아 수저를 들었다. 평소였다면 안 먹겠다고 버티고 버티다 마지못해 들었을 수저였고 몇 번 삼키다 끝내 뱉어낼 죽이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이보다 더 한 맛의 죽은 없다는 듯 나는 그릇을 비웠다. 깨끗하게 비워진 내 그릇을 보더니 그가 방긋 웃는다. 그리고 자기도 다 먹었다는 듯 비워진 제 밥그릇을 내게 보여준다. 밥그릇 곳곳에 붙어있는 밥풀 몇 개를 가리키니 그가 입을 삐죽 내밀며 입으로 가져간다. 귀엽다, 참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기를 정리하고 있던 그가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68시간을 병원에서 보낼 수 없음.>
그는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66시간, 이라는 글자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옷차림, 그리고 쪽지에서 내가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그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얀색의 뭉게구름이 느리게 하늘 위를 떠내려간다. 저 구름이 하늘 저편에 도달할 때쯤이면 68시간이 모두 지나 있으려나. 그때까지 내가 이곳에서 저 구름을 보고 있을 수 있을까.
“호원씨!”
잔잔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문이 벌컥 열리고 사복 차림의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매번 흰 가운을 입은 그만 보았던지라 사복 차림의 그는 어딘가 낯설었다. 아마 이건 사복을 입은 나를 보는 그도 이렇게 느낄 것이라. 나는 빙긋 웃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그가 의도한 것인지. 그와 내가 입은 티셔츠의 색이 비슷했다. 나는 짙은 빨강, 그는 옅은 빨강. 그가 미소 지으며 내 팔을 붙들었다.
무작정 나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가고자 하는 곳은 없었다. 나는 그저 걸었다. 그도 별다른 말없이 내 옆에서 걸었다.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나란히 걷고 있는 나와 그의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람들, 어머 저기 저.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기에 나 또한 그들의 말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그들의 말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조금 떨어져 걸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이런 내 생각을 알기라도 한 듯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 남은 시간만 생각해요. 잔 떨림과 함께 그는 내게 말했다. 이제 그와 내게 남은 시간은 66시간. 그에게만 온전히 집중하기도 부족한 시간. 나는 주변을 향한 귀를 닫았고, 눈을 감았다. 이제 내 귀는 온전히 그의 목소리만을 쫓았고 내 귀는 온전히 그의 모습만을 담는다. 그가 나를 잡아끈다. CINEMA, 영화관이었다. 영화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틈에서 어떻게 빈 의자를 찾은 건지 그가 나를 빈 의자에 앉히고 매표소로 달려갔다. 그를 눈에 담기도 부족한 시간,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그를 나는 끝까지 눈에 담았다. 매표소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내게로 돌아왔다. 그가 표를 들고 내게 오자마자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상영관 쪽으로 달려간다. 영화관 직원에게 표를 내밀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자 영화는 이제 막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와 그는 좌석 제일 끝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스크린에 집중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를 질투가 났다.
“좀 이른 것 같지만 점심 먹어야죠, 우리!”
우연의 일치인지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그와 나는 죽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그 가게를 향해 이끌었다. 그는 밥을 먹어도 상관없는데, 죽도 간신히 삼키고 있는 나를 위한 그의 배려일 것이라.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죽집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나를 반긴다. 그가 나를 죽집 한 가운데에 있는 빈자리에 앉히고 메뉴판을 펼쳤다. 이건 맛있고, 저건 맛없고. 그가 메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열심히 음식 평을 내게 해준다.
“나보다 호원씨가 죽 많이 먹어봤을 텐데. 호원씨가 내게 해줘야 하는 거 아녀요?”
그러다 그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다. 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죽 하나를 가리켰다. 그가 내가 가리킨 죽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었다. 아주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셨고 그는 내가 가리켰던 죽을 가리키며 두 개를 주문했다. 점심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다음이라 그런지, 죽집이라서 그런 건지. 가게 안에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렇기에 주문한 죽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밋밋한 병원 죽보다 맛있었으나 여전히 나는 죽을 삼키기 어려웠다. 넘어가지 않는 죽을 억지로 삼켰다. 그가 내 앞에 없었더라면 수저를 내려놓았을 테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 앞에서 나는 차마 수저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마 그랬더라면 그는 당장에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돌아갈 테니. 지금 이 순간을 깨어버릴 수 없었다. 억지로 수저를 들었고, 억지로 목 뒤로 넘겼다. 그에 그릇이 빈 그릇으로 변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작은 미소와 함께 내가 그릇을 비우기를 기다려주었다. 느리게, 천천히 죽을 먹었지만 억지로 먹은 탓인지 내 속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잘못 하면 금방이라도 게워낼 듯 한 느낌이었다. 나는 간신히 속을 다스렸다. 그가 이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는데 이미 눈치 챘는지 그가 내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울 것 같은, 미안함으로 가득 찬 그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미소 지으며 그를 내 옆에 앉혔다. 시원한 바람이 그와 나 사이를 지나갔다.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살짝 이지만 몸을 내게 기대왔다. 여전히 나와 그를 향한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와 나, 어느 누구도 그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느낄 뿐이었다.
“우리 이러고 있다 병원으로 돌아가요.”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겁결에 그 또한 나를 따라 일어났다. 그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그가 병원에 가야 한다니까요, 라고 말했으나 나는 무시해버렸다. 조금이라도 병원 밖에서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남은 시간을 병원에서 그와 보낼 수 없었다. 무작정 걷다 보니 익숙한 길이 나오고 내 발은 집 앞에서 멈춰 섰다.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에 그가 여기는 어디냐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보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홀린 듯 천천히 어머니를 향해 걸어간다. 그제야 그도 이곳이 내 집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가만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어머니가 달려와 나를 껴안으신다. 따듯, 하다. 나는 작은 미소와 함께 어머니를 껴안았다. 그간 나 때문에 많은 걱정을 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왜소해지셨다. 눈물이 난다. 밖으로 잠시 나간다던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를 찾으러 인지 동생이 나왔다. 엄, 하고 어머니를 부르려던 동생이 나를 발견하고 멍 - 하니 현관에서 멈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동생이 크게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아버지를 부른다. 우당탕탕 - 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가족들의 눈물 어린 환대를 받으며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족들도 그대로였고, 놓여있는 모든 것도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다만 이곳에는 내가 없을 뿐이었고, 내 물건이 드문드문 사라져있을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놓여있는 물건 하나하나에 내 손끝이 스치며 나는 작은 추억에 휩싸였다. 내 뒤를 그가 뒤따랐다. 내가 보고 있는 것,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을 그도 보고, 만지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내 추억을 되찾음과 동시에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자라난 시간을. 내가 살아간 시간을. 그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시간을. 다시는 오지 못할 곳. 이제 내 기억 속에만 잠들어 있을 이곳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병원은…어찌 하구….”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거실로 돌아오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이 집에 있다는 것에 기쁜 듯 하셨으나 내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에 불안한 미소를 띠셨다. 나는 불안한 어머니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내 미소에 어머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호원씨에게 휴가 줬어요.”
그가 혹여 내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를 나대신 다독거려주었다. 그래도 쉽사리 진정되지 못하시던 어머니가 문득 시계를 보시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시장하실 텐데.”
재빠르게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달그락 소리가 곧이어 들리기 시작했다. 분주히 어머니가 부엌에서 움직이시는 동안 나는 그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내 방을 휘 둘러보더니 책장으로 향한다. 내 눈치를 보며 책 하나를 빼어들더니 내게 등을 돌리고 그 책을 펼쳤다.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 마다 그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의 바로 뒤, 고개만 숙이면 그가 보고 있는 책을 볼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을 때 그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고 그에 내 얼굴은 그의 얼굴 바로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가 히익, 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벽이 멀지 않았던 탓에 그의 머리는 벽에 부딪혔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문지르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손에서 그가 보고 있던 책을 빼들었다.
“아우, 호원씨. 이때가 몇 살 때에요? 회전목마 타는 거 봐봐. 되게 귀여워.”
그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내 앨범이었고 그중에서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놀이공원으로 소풍 갔었을 때 찍었던 사진이었다. 노란색의 유치원복을 입고 회전목마에 앉아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던 어린 나. 그 때에 나는 결코 오늘의 나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그를 생각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나를. 그의 웃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오빠, 저녁!”
그 순간 밖에서 저녁을 먹으라고 나를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잠시 현기증이 났는지 그가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나는 재빠르게 그를 붙잡았다. 그가 큭큭, 웃으며 내 손에서 빠져나왔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갈 때 까지 그의 잔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빈 의자를 빼 앉으며 살짝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애써 내게서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나는 집요히 그를 쫓았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가족 모두가 식탁에서 마주 앉은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성규, 그.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천천히 이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이 순간. 나는 애달파지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수저를 들었다. 투정 한번 없이 죽을 먹어가는 나를 보며 어머니께서 또다시 눈물을 글썽거리신다. 왠지 죄송스러워졌다. 내가 도착할 종점은 변함이 없다며 나를 위한 어머니의 정성을, 마음을 모두 거부한 것이 차마 못할 짓 이었다고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나는 그러하리라.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죽을 떠먹었다.
“……미안해요.”
나는 말없이 세면대에서 입을 헹궈내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힘없이 내 손길에 의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데리고 내 방, 내 침대 위에 누웠다. 이제 남은 시간은 54시간. 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 의사인데도…아무것도,……정말 아무것도 호원씨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나는 가만히 그를 품에 안았고 그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앞섶이 축축해지는걸 보아 그는 울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품에서 울고 있는데 나는 이것 외에 어떠한 위로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죽지 않는다, 살 것이다. 나는 차마 이 말을 그에게 해줄 수 없었다. 그가 운다. 아파하는 나를 보며 자기를 자책하고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다. 후회한다. 내 한정된 시간에 그를 새김으로써 그가 - 운다. 나는 후회한다. 그날 그를 떠나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 그가 울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옆에 남겠다 결정한 나를 원망한다. 그러나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때와 같은 결정을 내리리. 내가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내 시간은 그에게 속해 버렸으니. 다시 돌아간다 해도 지금과 다르지 않으리. 울던 그는 잠이 들었는지 잘게 떨리던 어깨가 잠잠해지며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나는 잠든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곱다. 어여쁘다. 그리고 그렇게 나도 그를 품에 안고 잠에 들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나와 그는 집을 나섰다. 다행인지 점심은 그리 내 속이 거부하지 않았다. 집을 나오기는 나왔으나 막상 갈 곳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어디를 갈까, 머뭇거리던 나를 붙잡고 그가 택시를 불렀다. 놀이동산으로 가주세요, 라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선지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흥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께서 그의 손에 도시락 통을 들려주시더라. 어쩌면 이 행선지는 갑작스럽게 정해진 게 아닐지 몰랐다. 어제, 그가 내 앨범을 볼 때부터 생각해두었던 행선지가 아니었을까. 삼십분쯤 달려 택시는 놀이공원 앞에서 멈춰 섰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놀이공원 앞에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잠시만 기다리라며 매표소로 달려갔고 얼마 되지 않아 두 장의 표를 들고 이리 오라, 내개 손짓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고 그가 내민 표로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타야겠다는 뚜렷한 생각 없이 그와 나는 정처 없이 놀이공원을 걸어 다녔다. 걷다 힘들면 앉아서 쉬고. 목이 마르면 음료를 사고. 쉬었다 싶으면 다시 일어나 걷고. 그렇게 우리는 놀이공원 속 수 많은 연인들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서로가 소중해 미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을. 그저 이 순간이 즐거워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그들을. 짙은 행복을, 짙은 생기를.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들이나 나나. 똑같이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 순간 살아있음인데. 어찌하여 내게는 영원이 허락되지 않은 것인지. 한정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인지. 그가 내 손을 잡아온다. 나는 그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줘 그의 손을 맞잡았다. 서늘한 그의 손에 나는 애달피 미소 짓는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말없이 나는 그를 느꼈고 그는 나를 느꼈다. 어느 연인들보다 더욱 다정히. 더욱 애달프게. 그렇게 우리는 걸었다.
“호원씨, 회전목마다!”
그가 멀리 보이는 회전목마를 보더니 나를 끌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회전목마를 타겠다고 줄서있는 유치원 꼬마아이들 뒤에 줄을 선다. 다 큰 남자 둘이 회전목마를 타겠다고 줄 서 있는 게 흔한 모습은 아닌 듯 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이 한 번씩 우리를 향했다. 이는 앞에 서있는 꼬마아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천진한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저씨, 아저씨도 이거 타요?”
그가 말하다 말고 웃음을 터뜨린다. 꼬마아이들이 어서 말하라며 그의 다리를 조막만한 손으로 두드린다.
“어제 이 아저씨가 유치원 때 회전목마 타는 사진을, …푸, …사진을 봤거든.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지. 지금 이 아저씨가 회전목마를 타면 무슨 모습일까, 라는.”
그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이 찬찬히 나를 살펴본다. 나를 관찰하는 듯 한 시선이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회전목마를 타는 내 모습을 상상해냈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삐졌냐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나와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직원에게 표를 내밀자 이상한 눈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최대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 더 안쪽, 조금 더 안 보이는 곳으로. 그러나 내가 그 자리를 찾는 것 보다 그의 행동이 빨랐다. 그는 잽싸게 내 팔을 잡아 제일 바깥쪽에 있는 말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 내 바로 안쪽에 그가 앉았다. 나는 말에서 내려 그의 안쪽에 있는 말로 옮기려 하였으나 직원이 다가와 곧 움직이니 가만히 있어달라고 한다. 결국 나는 하릴없이 그 자리에 앉아 회전목마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천천히, 느리게 말은 움직였다. 한바퀴, 두 바퀴. 나는 가만히 말의 움직임에 몸을 실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말의 움직임이 묘하게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같은 길만 도는 이 말이, 나락을 향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길을 걷고 있는 나와 닮았다고.
“……성,…규.”
한참의 부드러운 침묵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입을 열어 말을 잘 하지 않는 나였기에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작고 흐릿했지만 분명 내 목소리였고 나는 그를 불렀다. 그의 눈에 작은 눈물이 고였다.
“…성,…규.”
나는 조금 더 또렷하게 그를 불렀다. 그리고 짙은 미소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눈에 고인 작은 눈물은 주르륵,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에 흐른 눈물자국을 닦아주었다.
“……미안,…,”
울게 만들어서 미안. 한정된 시간에 새겨서 미안. 나락을 피할 수 없어서 미안. 끝을 바꿀 수 없어서 미안. 이렇게 만나서 미안. 조금 더 일찍 만나지 못해서 미안. 더 이상 너와 함께 할 수 없어서 미안. 내가 아파서 미안. 자신을 자책하게 만들어서 미안. 죽을 때 까지 함께 하겠다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 영원을 기약할 수 없어서 미안. 떠나지 못해서 미안. ……전부 다, …미안.
“…그래도,”
고맙습니다. 기꺼이 내 시간에 새겨줘서 고맙습니다. 나를 붙잡아줘서 고맙습니다. 울기 보다는 웃어줘서 고맙습니다. 날 위해 울어줘서 고맙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있겠다고 해줘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을 알고도 용기 내줘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내 앞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날 보며 웃어줘서 고맙습니다. 내 앞에 나타나줘서 고맙습니다. 그 무엇보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그래서 무척이나.
“좋아해.”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고 내 입은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 내려앉았다. 그가 눈을 감았다. 첫 키스. 나의, 그리고 그와 나의. 얽힌 혀와 혀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았다. 그 어느 때 보다 짙은 감정의 전이에 그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 눈에도 작은 눈물이 고인다. 이렇게나 나는 그를 원하고, 그도 나를 원하는데. 어찌하여 그와 내게 주어진 결말은 단 하나 인걸까. 애달픈 그 결말을 알면서도 나는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일까. 그도, 나도 서로의 옆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어찌하여, 정말.
“호, …호원씨?”
나는 믿을 수 없다는 그의 표정에 삐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가 불편한 내 기색을 느꼈는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놀라서….”
나는 그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고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다 먹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음>이라고 써둔 종이를 내밀었다. 그가 행복하다는 웃음과 함께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 나오자마자 우리를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친구들이 분통터진다는 얼굴로 씩씩대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친구들 뒤에 서있던 그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냐. 웬 사람들이냐. 나는 옅은 웃음이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음으로써 잊고 있던 그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친구들이 당황하며 그에게 인사한다.
“아, 저흰 저 새끼 친군데 …아, 의사쌤?”
그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내 옆으로 끌어당겼다. 친구들은 혼자 신나하며 그들끼리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들이 내 앞에서 뭐라 떠들던 일체의 신경도 주지 않은 채 내 옆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취를 들이마실 뿐이었다.
“야, 너, …설마…!”
그러다 문득 한 친구가 나와 그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인상을 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의 외침에 다른 친구들도 나와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이 점점 커졌고 나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버버, 거렸다.
“너설마의사쌤이랑그렇고그런사이인거냐?”
나는 심드렁한 눈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나와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 혼자였다면 그들이 뭐라 말하던 흘려버렸을 텐데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보니 차마 그러지 못하고 발로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다, 가 치사한 새끼야. 친구들이 휙, 하며 집을 나갔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치사해서 원! 문이 닫혔으나 그들이 밖에서 얼마나 큰 소리로 외친 건지 집 안까지 그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잠시만 있겠다던 그들은 들어온 지 네 시간 만에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 나는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천천히 다독였다. 좋은 녀석들이라고. 나 없을 때 힘들면 그들에게 기대라고. 그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줄 거라고. 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녀석들이니 충분히 잘 대해줄 거라고. 나는 그의 손바닥을 펴 그 위에 글씨를 썼다. <10>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으나 그는 빠르게 지워냈다. 그리고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똑같은 미소로 그의 미소에 화답했다. 나는 그의 입에 작은 입맞춤을 남기고 그를 품에 더욱 끌어안았다. 그도 내 허리에 팔을 둘러 나를 끌어안았다. 나와 그는 서로의 온기를 느꼈고 서로의 체취를 담았다. 더 이상 내가 그에게 할 말도, 그가 내게 할 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것 대신 주고받는 온기로 끝없이 대화했다. 잊지 않겠다고. 내 영원을 주고 간다고. 영혼 그 바닥까지 그로 채워 넣는다고.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7시, 8시, 9시.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6시간, 5시간, 4시간.
“성규.”
또렷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가 내 품안에 안겨온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간다. 이렇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그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 내가 마지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나락을 눈앞에 둔 자의 마지막 발악이리라. 나는 그를 곽 껴안았다. 내 모든 것. 나의 전부.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를.
“좋아…해요.”
그가 내 품에서 나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멍 - 하니 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내 영영, 내 전부를 걸게 한 그 미소를.
“좋아…합니다.”
낮게 속삭인 내 고백에 그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이내 고운 반달을 그린다. 그의 눈꼬리에 어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점차 눈앞이 흐려져 간다. 내 몸은 조금씩 나락에 빠져간다. 내 마지막.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떴고 그에게 초점을 맞춘다. 조금이라도 더 그를 눈에 담고자. 더 깊이 그를 내 영혼에 새기고자 나는 노력한다. 그가 내 손을 붙잡는다. 그가, 운다. 손 위에 차가운 그의 눈물이 느껴진다. 아아, 아직 나락에 빠지지 않은 내 일부가 애달피 비명을 토해낸다. 그의 눈물에 나는 온 힘을 쥐어짜 그의 눈물을 닦았다.
“……미소.”
이내 내 손은 힘없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힘을 또다시 억지로 쥐어짜 그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그가 내 말에 힘겹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나도 그의 미소와 같은 미소를 짓는다. 그가 애타게 나를 부른다. 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귓가에 맴돌고 그가 흐릿해져간다.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나도 뭐라 대답해주고 싶으나 내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흐릿하다. 보이지 않는다. 진정으로 내 마지막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조금이라도 그를 더 봐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눈을 떴고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나락에서 버틸 수 있을 힘을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나는 끌어올렸다. 이 순간이 지나면 아마 나는 나락 속에 온전히 몸을 담글 것이었다. 조금 더 이르게, 조금 더 빠르게. 더 이상 나라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의 손을 잡아 그가 지금 아파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후회한다. 내 영영에 그가 새겨진 것이 아팠으나 그와 동시에 달큰했다. 모순된 감정 속에서 나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 영원을 향해. 내 전부를 향해. 나는 영원히-,
“내, ……영영을,”
그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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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케 77시간은 끝이 났습니다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