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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noir)


20대의 끝자락, 우리가 돌아본 시간은 모두 추억의 한 장면일 뿐이다.
우리가 기대한 청춘은 어둠이 아닌 빛이기를 바랐다.
찬란한 무대 위, 그리고 그 무대를 빛내기 위해 우리가 할애한 무대 아래 어둠 속에서의 시간들.


우리들의 성장 누아르.




02 #




선배, 동기, 후배.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취한 채 비트거리며 저마다 인사를 한다.


12월 31일,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시작된 회식은 빨리 취해버린 단원들 덕에 올해가 가기 전에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선배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서야 허리를 폈다.



"다들 너무 신났나 봐요. 벌써 이렇게……."


"그래도 제 발로 잘 갔으니까 다행이지. 탄소 너는 어쩌려고?"


"카페 한번 확인하고 집에 가야죠. 단장님은 바로 댁으로 가시죠?"


"그렇지. 아이고, 또 이렇게 한해가 다 갔네. 우리 부단장 수고했어?"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존재만으로 많은 귀감이 되었지. 우리 극단을 위해서 카페 수입도 척척 내놓고, 떠난 녀석들 챙기는 것도 너, 잘된 녀석들 후원 받아오는 것도 너, 후배들 데려오는 것도 너."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다들 제 꿈속에 계셨던 분들이고 또 이끌어갈 미래니까."


"올 한해 가장 수고 했고, 내년에는 대박나자."



극단의 단장으로 있는 선배와의 마지막 인사로 12월 31일을 1시간 남기고 카페로 왔다.


내일이면 새해다, 아니 한 시간 후면 나는 진짜 20대의 끝자락이다.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카페로 왔다.


이상하게도 이런 날이면 왜 석진이는 연락도 없이 카페 앞에 있는 걸까.



"왔어? 여기로 올 것 같아서 기다렸어."


"추운데 연락하지."


"서프라이즈."


"예상 못한 선물이라 기쁘긴 하다."


"마지막이라 서운 할 까봐. 내 얼굴이라도 보라고, 술 한 잔 하면서."



그가 내 앞에 와인 한 병을 흔들어 보인다.


그의 모습에 웃으며 카페 문을 열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내 마음을 그가 잘 아는 것 같다.


술이 한잔, 두잔 밤이 깊을수록 술잔도 깊어진다.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너도 곧 스물다섯이네.”


“왜 아쉬워?”


“내가 왜?”


“말이라도 그렇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


“아, 내가 스물아홉이 되는 건 좀 속상하다.”


“그래도 내 눈에는 아직 스무 살의 김탄소 그대로야,”



그의 말에 웃음이 난다.


나 역시도 열여섯의 그가 선명하다.


내 앞에 앉아 와인 잔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 위로 교복을 입고 천진하게 웃어보이던, 내게 선생님이라 부르던 중3 김석진도 여전하다.


와인 잔과 교복이 참, 언밸런스하다.



“귀엽다.”



혼잣말로 내 뱉은 말에 석진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뭔 생각을 하냐고 물어온다.


옛날 얘기를 하면 그때 기억은 잊으라며 언성이 높아질 그를 생각하니 자꾸 웃음만 난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또 그런 말이 나와?”


“교복 입은 김석진.”


“나 군대도 다녀왔는데.”


“넌 여전히 내 눈에 애야.”


“아, 올해도 고백하기 글렀다.”



그의 말에 입 밖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올해라고 해 봤자 이제 30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누나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여전히 좋아해.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좀 서운하겠지만 항상 옆에 남아 있을 건 나니까. 그걸로 만족해.”


“주변에 예쁘고 근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한 곳에 너무 오래 메여있지 말고 도망이라도 가.”


“싫은데~? 누나가 아무리 그런 말해도 나 진짜 어디 안가. 벌써 8년이나 됐잖아.”


“김석진 고집 누가 말려.”


“말리지마. 그냥 받아들여.”



그가 자신이 든 와인 잔을 내 잔에 가져다 대며 짠- 하고 선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다.


빈 와인 병을 보며 아쉬운지 시계를 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곧 12시로 넘어가려는 시계가 야속하다.


멍하니 시계를 보던 그가 나를 본다.



“새해 인사만 하고 다녀올게.”


“어딜?”


“편의점. 한 병으로는 아쉬울 것 같아서,”


“그래, 그럼.”


“아, 보신각 종소리 들어야지.”



그가 코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는 영상을 틀어보인다.


카메라 중계에 잡힌 사람들은 저마다 설레는 표정을 하고서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곧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점점 새해가 다가옴을 느꼈다.



“5, 4, 3, 2, 1, 땡! 누나 해피 뉴 이어! 나 다녀올게!”



내가 그에게 새해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가 내 볼에 입을 맞추곤 도망치듯 카페를 뛰쳐나갔다.


텅 빈, 쓸쓸해 보이는 카페와 달리 내 뺨에는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있다.


아직 앤 줄 알았더니, 제 딴에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나보다.


창 밖에는 또 다시 눈이 내린다.


눈이 오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다.


잊을 새라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글을 써본다.


그 것도 모자라 사무실에 가 컴퓨터를 켜 워딩을 시작한다.



"누나?“



그가 다녀 온 건지 나를 찾아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술기운에 써 내리는 글이지만 왠지 예감이 좋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 글을 다 써야만 할 것 같다.




*




지난 12월의 어느 마지막 밤, 석진이와 술을 마시다 홀린 듯 써 내려간 극본은 술이 깬 후에 봐도 꽤나 쓸 만한 내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몇 날 며칠을 고치고 또 고쳐 단장님과 선배 앞에 내 보였다.


처음으로 내 보인 극본은 단번에 통과되었다.



"네가 쓴 글이니까 주연부터 연출까지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단장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사무실을 나왔다.


내가 만든 극본으로 연극을 꾸미는 게 꿈이었는데 그날 밤, 술기운에 꿈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언가에 홀린 게 분명하다.


스물아홉, 새해의 기쁨을 이 작은 종이 가득 쓰인 글들과 맞바꿨다.



"사장님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응? 기분 좋지~ 좋은 일 있지~"


"요 며칠 우울해 하셔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그랬나?"



알바 생은 오랜만에 웃어 보이는 내가 신기한지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온다.


알바 생에게 주문을 맡기곤 주방으로 들어가 쿠키와 조각케이크를 챙겼다.



"얘기 잘 됐나봐?"


"아, 왔어? 앉아있지 왜 들어와."


"그거 줘. 쇼케이스 넣어둘게.“



쟁반을 뺏어든 그가 자연스레 쇼케이스로 걸어가 하나씩 빈자리를 채운다.


내 연락도 극본에 대한 소식도 기다렸을 석진이가 조심스레 극본에 대한 얘기를 물어온다.



“단장님 뵙고 왔어?”


"나 하고 싶은 대로 해보래."


"다행이네. 그래서 기분이 좋구나?"


"사장님, 연극 연출 맡으셨어요?"



석진이의 옆에서 듣고 있던 알바생도 신이 나서 묻는다.


이 카페의 존재 이유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알바이기에 내 얘기를 누구보다 기뻐해 준다.



"나중에 놀러와. 특별석으로 줄게."


"에이~ 사장님 공연인데 제 돈 주고 가야죠."


"무슨, 우리 우수 직원은 특별히 사장님이 쏜다."


"감사합니다."


"누나 나는?"


"넌 출연해야지."



내 말에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나를 본다.


그는 아직 모른다. 나의 큰 그림을.




*




후배들을 도와주고자 단장님과 선배, 그리고 내가, 학창시절 온 열정을 다해 이끌었던 연극 동아리 '빅히트'를 무대에 세우기로 했다.


동아리 회장인 석진이를 통해 그 소식을 전했다.


모두 감사하다며 기뻐했고 간단한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정하고 연출도 나름의 기준을 정해 뽑았다.


첫 대본 리딩이 끝난 후, 석진이와 몇 명의 애들이 가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난 그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첫 대본 리딩이었는데 어땠어?"


"뭐 다들 좋았어. 아직은 아마추어라서 잘 못해도 가르치는 만큼 잘 따라 올 것 같아."


"아, 저기 있는 애들, 내가 아끼는 후배들이야."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라며 자랑하던 윤기를 제외하면 다들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그동안 학교 얘기는 수 없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의 지인을 만난 적은 없는 듯하다.


석진이는 웃으며 나를 그들이 있는 관객석으로 이끌었다.



"여긴 내가 말했던 탄소누나. 여기 극단 부단장이자 이번 연극 감독님."


"반가워요. 석진이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처음 보네요. 다들 오디션을 봐주고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들 일어나 자기소개를 한다.


석진이는 올해 들어온 신입생 막내라며 토끼 같은 얼굴을 하고서 나를 보는 전정국이라는 애를 소개한다.



"여긴, 제일 특별한 인연. 어쩌면 내 라이벌 일지도 모르겠다."


"라이벌?"


"누나 팬. 학생 때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누나보고 우리 과 지원했데. 동아리도 마찬가지고."


"정말요? 귀한 팬이네. 고마워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진짜 제 우상이세요.”


“또 이렇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인 걸 느끼게 해주네... 정말 고마워요."



내 말에 정국이라는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작게 팬이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곤 석진이에게 이런 설레는 기분은 오랜만이라 말하자 입을 비죽거린다.



"지난 9년 동안 내가 한 말은 뭐지."


"뭘 또 질투를 하고 그러냐."


“서운해서 하는 말이지.”



각자 자취든 집이든 떠나려는 아이들을 잡았다.


그런 날 석진이가 가장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다들 저녁 먹을래요? 내가 살게요. 석진이가 아끼는 후배들이라니까 나한테도 특별한 사람들이거든요."



처음 만난 그들과 대학로에 있는 고기 집으로 왔다.


오랜 대본 리딩으로 배고팠을 그들을 위해 메뉴판을 보며 이것저것 시켜본다.



“지민이는 연출 전공인데 연기도 잘한다며? 교수님이랑 가끔 통화하는데 뮤지컬 시키고 싶어 하시던데.”


“안 그래도 권유하시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서 연출 공부 계속하고 있어요.”


“차차 하고 싶은 게 생길거야. 아직 안 늦었어.”



저마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아, 물론 윤기와 석진이는 예외다.


석진이는 이미 아역으로 데뷔한 경험도 있고 요즘도 틈만 나면 단역으로도 연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고,


윤기는 연출 전공을 하며 뮤지컬 음악에 관심이 많아 선배들을 통해 음악공연 티켓이 생기면 챙겨주곤 했으니 말이다.


석진이가 아낀다는 나머지 저 다섯 아이들의 꿈이 뭔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연영과에 왔다고 해서 연기만, 연출만 바라보고 살기에 분야들이 너무 세분화된 세상이다.


지금은 연기를 한다고 가난 해야만 하는 그런 현실이 아니다.


이들도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를 찾아 배부른 예술을 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다행히 일찍 움직인 덕에 저녁에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러 왔고 2편을 무사히 내 놓습니다!

내일도 올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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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님 어서오세요^^ 오늘도 몽글몽글한 글 그대로 돌아오셨군요~아까 신알신 울리자마자 보러 왔다가 약속 생겨서 나가는 바람에 이제야 다시 정독하고 댓글 남기네요 이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군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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