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 가을
너는 나의 사랑이었고, 나의 친구였고, 때로는 나의 가족이었고, 나의 20대였으며, 나의 전부이기도 했고, 내 세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태양이었다.
이제 나의 세상에는 밤이 찾아오려나 보다.
윤형이와 나는 오래된 커플이었다. 다들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을텐데, 아니, 나조차 그렇게 믿었었는데.
오늘 우리는 7년간 함께 한 시간에 마침표를 찍었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말없이 식어가는 커피잔만 바라보는 서로의 모습이 이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놀랍지도, 아프지도 않은 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 헤어지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너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후회하기를, 내가 너를 사랑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지만 권태는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었나 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아무 연락도, 소식도 없는 걸 보면 너도 같은 심정인걸까. 씁쓸하다. 7년의 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멀어지는 것이.
너무 담담해서 슬픈 지경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오래된 기억들을 펼쳐본다. 세세히, 하나씩.
# 2013. 겨울
결혼하고도 매일 와이프가 더 예뻐보인다는 유부남 연예인의 인터뷰나, 노부부의 절절한 사랑을 담은 다큐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흔하지 않은 존재기 때문이다.
1주일만에 윤형이를 만났다. 오랜만에 밖이 아닌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해드렸으면 좋겠냐고 물었지. 이렇게 해가면 저렇게 해야된다, 그래서 저렇게 해가면 이게 자기가 한거지 내가 한거냐고 사사건건. 골치야 진짜. ”
“ 힘들었겠네. 상사 비위 맞춰주긴 힘들지. 그래서 난 창업한게 다행이야.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일하는 거, 은근 적성에 맞는거 같아. ”
“ 그러게. 넌 일은 좀 어때? 직원들은 괜찮고? ”
“ 뭐, 다들 젊고 어리고. 그래서 열심히들 하지. ”
“ 뭐래, 너도 충분히 젊거든. 이쁜 여직원은 없어? ”
의미없이 한 말이다.
내 질문에 윤형이가 웃는다. 그리고 입을 맞춰온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그냥...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있구나, 거기에.
입을 맞춰오는 윤형이가 낯설게 느껴진다. 넌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어쩌면 너는 시간에 대한 의리로 나를 만나고 있는걸까. 너를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윤형이가 바람을 피지는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너는 다른 사람이 좋아지더라도 그 마음을 삭힐 거였다.
다른 사람이 좋아지더라도 이상할 것도 없어. 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사랑은 너뿐이라는 당연하고도 익숙한 이 명제를 지울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 2012. 여름
윤형이와 다투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후로, 나는 지쳐가기 시작했다. 싫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냥 얼굴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한 때 너무 사랑했던 사람에게 목청을 높이고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 모습이 비참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너에게 서운했고, 너를 이해하기 싫은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거리에 스쳐가는 남자들 그 누구라도 너보단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보다는 나를 사랑해 줄거야. 너보단 날 더 이해해 줄거야. 못난 생각이 들었다.
쌓여있는 너의 카톡을 확인하기가 두렵다. 며칠을 읽지 않은 채 둔 건지.
‘ 언제부턴가 싸우는 게 일상이 돼버렸네. ’
‘ 어제 일은 내가 미안해. 요즘 왜이렇게 예민한지 모르겠다. ’
‘ 너 웃게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
‘ 미안해. 화풀어. ’
‘ 니가 조금만 더 나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
‘ 아니다. 신경쓰지마. ’
‘ 괜찮아지면 연락해 ’
‘ 문고리에 먹을 거 걸어놓고 간다. ’
‘ 연락 안되는 동안 밥 안챙겨먹을 것 같아서 ’
마지막 두 개는 오늘 아침에 보낸 거네. 문을 열고 보니 커다란 종이가방이 보인다.
식어버린 죽, 내가 좋아하는 당근케이크, 꽃다발, ‘ 미안해. 밥 굶지 마. ’라고 적혀있는 쪽지.
하얀 장미들과 안개꽃. 내가 흰 색을 좋아하는 걸 잘 아는 윤형이는 내가 꽃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느 가게의 케이크를 좋아하는지도.
때로는 우리가 왜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서로 날을 세워 모진 소리들을 해댔다. 그래도 싸운 후에 항상 먼저 사과하는 건 윤형이었다.
조금만 더 사랑해달라는 너의 말이 아파서 눈물이 난다. 내가 한 나쁜 생각, 나쁜 마음들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미안해 윤형아. 미안해.
# 2011. 가을
“ 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
“ 나는... ”
“ 니가 방금 내 인생을 망쳤어. ”
모르겠다. 화내는 윤형이의 모습은 처음이다. 눈에선 자꾸 눈물이 흐른다. 내가 잘못한걸 아는데, 왜 억울하다는 듯 눈물이 나는건지 모르겠다.
윤형이의 USB를 잃어버렸다. 몰래 가져가서 4주년 기념으로 만든 동영상을 넣어 둘 생각이었다. 동영상을 넣고 돌려주려고 했는데, 모르겠다. 그게 어디로 간건지.
그 안에 어떤 자료들이 있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바로 어제 봤는걸.
윤형이는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윤형이가 좋아하는 형들과 꽤 오래 준비해왔다.
준비가 만만치는 않지만 보람도 있고 설레기도 한다며 웃던 윤형이의 얼굴도 또렷히 기억한다.
몇 개월을 쌓아 온 아이디어 노트와 각종 데이터, 모든 것을 담은 USB. 할 말이 없다.
4년을 만나면서 윤형이가 처음으로 나한테 화를 냈지만, 억울할 것도 없었다. 내 잘못인걸.
근데도 계속 눈물이 났다. 놀래켜주려고 한건데,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 그만 울어. ”
“ 윤형아...미안해...내가 미안... ”
“ ...괜찮아. 다시 준비하면 돼. 울지마. 화내서 미안. ”
뚝, 그쳐야지 하며 나를 달래주는 너 때문에 더 눈물이 난다.
나 때문에 함께 준비하던 형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윤형이는 홀로, 다시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 2010. 봄
2년간의 기다림 끝에, 윤형이가 전역을 했다. 스무살에 만난 우리는 벌써 스물 셋이 되어있었다.
긴 시간이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저 이 기다림이 끝나면, 니가 나를 안아줄거란 생각을 하며 참아온 시간이었다.
우리 집과 너의 집을 이어주는 돌담길에서, 너는 나에게 꽃신을 신겨 주었다.
“ 기다려줘서 고마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그리고 더 사랑할게. ”
“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 매일 니 생각만 했어 윤형아. ”
자꾸 눈물이 나와서 보채듯 나 안아줘, 하고 팔을 벌렸다. 윤형이는 나를 안아주는 듯 다가오다 내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내 볼 위로 윤형이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고 있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 2009. 가을
만난지 2년 되던 날, 올해도 함께 보내지 못해 서운해 할 널 위해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나도 서운하지만, 윤형이가 더 서운할테니까.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게 자기 탓도 아닌데.
오히려 내가 미안한 마음뿐인데 군대에 있는게 자기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해하던 윤형이.
집에 앉아 홀로 편지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린다.
택배 시킨 것도 없는데.
“ 누구세요? ”
“ 나야. 문 열어봐봐. ”
문을 열자 군복 차림의 윤형이가 보인다. 상병이 되었다고 꽤 군복이 익숙해진 모습이다. 이런 말 하면 싫어하겠지만. 말도 없이 나온 윤형이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다.
“ 오늘 우리 만난지 2년 되는 날이잖아. 1주년도 못챙겨주고.... 이번엔 겨우 맞춰 나왔어. 너 놀래켜 주려고 말 안했는데, 화난 거 아니지? ”
“ 올 줄 알았으면 예쁘게 하고 있는건데. 2주년에 츄리닝이 뭐야... 오랜만에 보는건데. ”
“ 바보야. 뭘 그런 걸 걱정해. 지금도 예뻐.”
부스스한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윤형이가 말을 잇는다.
“ 매일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마다 니 생각을 해. 내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너를. 앞으로 너도, 해가 떠오를 때 마다 내 생각을 해줬으면 해. ”
그리고는 대뜸 내 손을 잡더니 반지를 끼워주는 너.
갑작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고 반지와 너의 얼굴만 번갈아보며 서 있는 나를 보고 살짝 웃더니,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한참 뜸을 들인다.
“ 나랑 결혼해줘. ”
“ 무슨 소리야... 아니 당연히 너랑 결혼할건데, 지금은... ”
“ 미리 프로포즈 하는거야. 다른 남자한테 한 눈 팔지 말라고. 나중에, 정말 근사한 남자가 돼서 다시 고백할 거야 너한테. 그 전까지는, 이 반지 끼고 있어. ”
“ 이런 반지 없어도 너밖에 없는거 알잖아. ”
“ 이거라도 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정도로 내가 너 사랑하는 것도 알잖아. ”
얇은 금색 반지가 빛났다. 그 날, 난 처음으로 내 태양의 품에 안겼다.
# 2008. 여름
어제 윤형이는 입대를 했다. 21살에 입대,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윤형이가 원망스러운건지. 21살의 예쁜 나이에 고무신이라니 너무하잖아. 미워. 밉다 송윤형.
띵동-
문자다. 반사적으로 윤형이라고 생각하고 핸드폰으로 몸을 날린 내가 원망스러웠다.
‘ 안녕. 나야. 나 보고싶지? ’
윤형이가 맞다. 뭐지?
‘ 응, 보고싶어. ’라고 답장을 하려는데, 문자알림이 연달아 울린다.
‘ 너 외롭지 말라고 예약해 두는건데, 잘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
‘ 나 없다고 딴 놈 쳐다보지마. 오빠가 지켜보고 있다. ’
‘ 오늘도 사랑해. 이쁜아. ’
송윤형. 진짜 어떤 여자가 너를 안사랑하고 배기겠니. 이렇게 예쁜 짓만 하는데.
윤형이의 문자는 한 달 가량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왔다.
윤형이에게 마지막으로 문자가 온 날은 우리가 1년이 되던 날이었다.
‘ 365일, 그대는 나에게 저물지 않는 태양이었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빛나주길. ’
# 2007. 가을
학교에 가기 전, 나는 늘 집 앞의 작은 카페에 들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매일 같은 직원이 내 주문을 받는다.
이목구비가 또렷해서인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은근히 말도 잘 붙이고 웃음도 많다. 인상과 다르게 순한 느낌이랄까.
“ 손님, 오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실거죠? ”
“ 아니요. 오늘은 다른 거 마실래요. 좀 달달한거 먹고싶은데. ”
“ 달달한거 찾으시는거면... 우리 가게에선 제가 제일 달달한 놈인데요. ”
말도 안되는 농담을 던지고 아이처럼 헤헤 웃는다. 참, 성격 한 번 좋다.
오늘은 아이스 모카요, 휘핑도 많이 주세요, 하고 주문을 마치고는 내 지정석인 창가자리에 앉았다. 가을 햇살이 부서지듯 들어오는 이 자리가 좋았다.
“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어요. 맛있게 드시고 컵은 저한테 주시고 가세요! ”
“ 네. 맨날 드리고 가잖아요, 새삼스럽게. ”
직원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이내 다시 커피를 만들러 간다.
늦장을 부리다간 지각을 할 것 같아서 급하게 커피를 마시고 컵을 챙기려는데, 어, 잔 밑에 뭔가 있다.
쪽지?
‘ 매일 손님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찾아와 웃음지으면, 아침이 가치 있게 느껴지거든요. ’
반듯한 글씨로 그렇게 적혀있다.
그쪽을 쳐다보니 자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으면서 ‘컵?’ 하고 말하는 게 장난꾸러기 소년 같다. 컵을 가져다주며 내가 물었다.
“ 저기요. 이 글 어디서 베낀거죠? 나 이거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
“ 봤어요? 에이. 내 글솜씨로는 안될 것 같아서 남의 글 좀 참고했어요. 근데 내용은 진심이에요. 손님. 전 손님이 좋아요. 진짜로요. ”
다음 날부터 나는 저기요, 대신 그를 윤형아, 하고 불렀다.
# 다시 2014. 가을
눈을 뜨자 눈물로 베개가 젖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헤어지고 싶어한건 니가 아냐.
윤형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내가 틀렸다. 그게 아니야. 내가 멋대로 상상했고, 내 맘대로 믿은거야. 내가 헤어지고 싶어서, 내가 떠나오고 싶어서.
너무 바보같이 착해서, 맨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니가 너무 당연해져서.
태양 없이 살 수 있을리가 없잖아.
긴 권태를 사랑이 아니라고 착각했던 내가 한심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 돌담길에 가면, 니가 있을 것 같아.
만나러 갈게, 윤형아. 7년의 시간동안 늘 먼저 손을 내밀어준 너에게.
이번엔 내가 갈게. 긴 시간동안, 늘 기다리게만 해서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뛰어온 곳에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 계절 시리즈가 끝났습니다!
막글인데 뭔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기분이에요ㅠㅠ
내용은 정말..보여드리기 죄송스러울 정도네요
저렇게 오래 연애해본 적이 없어서 사실 저도 잘 모른답니다..(오열)
가장 긴 시간을 들여 썼는데 결과물이..거듭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장편을 써보고 싶기도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장편을 끌고나갈 능력이 되는지
신선하고 재밌을만한 소재가 있는지!
답이 안나오네요ㅠㅠ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셔도 좋아요 감사하게 들을게요:)
그동안 부족한 제 글을 좋아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ㅠㅠ아이시떼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