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인은 힘에 부치는 발걸음을 끌며 몸을 숨길만한 곳으로 이동했다. 경수는 종인의 품에서 빠져나와 종인의 어깨며 팔에 난 상처들을 어루만졌다. 백현은 여전히, 하얀 얼굴에 얼룩덜룩한 핏자국을 묻힌 채로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찬열씨는..."
경수는 뒷말을 아꼈다. 혹시, 백현이 듣고 있을까봐.
"언제부터 찬열씨야."
종인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경수는 쓰게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살아 돌아오겠지."
"....."
"여기 있잖아, 그 새끼 심장."
".....그래."
경수는 조금 더 깨끗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종인은 애꿏이, 아우씨, 오글거려. 진짜..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경수의 눈가에 마침내 잔잔한 곡선이 그려지자, 종인은 그 곡선을 마주하여, 닮은 미소를 마주 띄웠다.
셋은 콘크리트 벽 뒤로 숨어들었다. 종인은 백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자신은 털썩 주저앉았다. 경수는 황급히 발목을 걷어올려 부어오른 정도를 확인했다. 종인의 상처를 보는 눈썰미가 찌푸려졌다. 곧 작은 손을 내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왼쪽은 금이 갔나봐.."
경수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붓기가 잘 안 가라앉네.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아직은."
"뭐가..."
종인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발목 쪽으로 숙였다. 자신의 발목을 감싸쥐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잡아채 끌어당겼다. 경수는 어어, 하며 종인의 곁에 무릎을 대고 앉게 되었다.
종인은 말없이 경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수는, 자신을 바라보는 종인을 바라보았다.
깊은 우주의 한 가운데, 자신이 있었다.
종인의 우주는 빈틈없는 온기로 가득했다.
그 안의 온기의 중심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혹은, 튀는 불꽃처럼 번뜩이는, 시발점을 보았을까. 어느 누가 먼저라고 말하기도 전에, 경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비틀었다.
종인은 자신의 우주가 잠식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가만히 입을 벌려오는 꽃잎을 머금었다. 단번에 물기를 머금은 입술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종인의 혀가 부드럽게 경수의 입으로 넘어들어왔다. 이질적인 느낌에 경수는 뻣뻣하게 혀를 굳혔다. 종인은 굳은 혀를 둥글게 감싸며 경수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사실, 나도 사랑한다고. 사랑해왔다고.
말로는 할 수 없는 말들을, 몸짓으로, 당신을 향한 나의 온기로 전한다.
한참동안 입술을 나누었다. 이제 경수는 지쳐서 종인이 하는대로 입술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진득하게 입술을 머금고 문질러대는 종인의 모습은 참 생소하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어서, 경수는 이제 그만. 하며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 때, 물처럼 이어지던 종인의 동작이 잠깐 멈칫했다. 경수는 눈을 살짝 떴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제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도로 눈을 감았다. 김종인은, 눈을 감아도 섹시하다, 생각하며. 지금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상황인지 까맣게 잊어가며.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공기가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축축한 액체가 뒤덮인 입술은 빠르게 식어갔다. 경수는 차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종인의 눈빛 또한, 저를 향한 열정과는 다른 불꽃이 번뜩이고 있었다.
"종인아."
"...이따 마저 하자."
경수는 고개를 돌렸다. 센티넬 한 명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종인은 다시 백현을 받쳐 들었다. 경수는 불안한 눈빛으로 손톱을 물었다.
"네시 방향 다섯, 일곱시 방향...일곱?"
종인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꽤 많은 센티넬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
"시간 끄는게 아니었는데.."
경수가 중얼거렸다.
"후회 안해."
종인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경수의 손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건물,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게..."
"건물 안?"
"반군 휘하의 병원이라고 해도 일반인 환자들도 분명 많을거야. 반군은 지금 형체를 드러내면 좋을게 없으니까, 병원 안에서 우리를 저격하진 못할거야."
종인은 알겠다는 듯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입구에 이미.."
종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뒤쪽에서 센티넬 무리의 발걸음소리가 선명해졌다. 종인은 응급실 입구가 있는 쪽으로 내달렸다.
응급실 입구에는 병력이 배치되어있지 않았다. 경수는 혼자 응급실로 들어갔다. 옷걸이에 대충 걸려있던 의사가운 두개를 집어들고 달려나왔다.
"저기...그 가운은.."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경수는 냅다 달렸다.
"어윽..!!"
순간 목을 강하게 조이는 악력과 동시에 자신을 끌어당기는 무지막지한 힘을 느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제 겁니다."
센티넬.
의사가, 센티넬이었다.
의사는 경수의 목 앞부분을 한 손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그 상태로 경수를 끌며 종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재밌는 장난을 치려고 했나보네."
"도경수!!!!!!"
"김종인, 응? 재미없는데. 어떡할까."
"시발, 진짜...!!"
"죽여버릴까?"
오른쪽으로 와 닿는 동그랗고 차가운 금속의 촉감. 경수는 순간 초점을 잃었다. 온갖 두려움이 벽을 뚫고 흘러나왔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갔다.
"..종인아.."
파스스. 이름이 서리처럼 흩어졌다.
그 모진 고문을 받아내면서, 나는 너를 생각하며 버텨냈는데. 멀리 있던 너는 나를 강하게 했는데.
내 옆에 너는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 김종인, 살고싶게 만든다. 내 곁에서, 오래도록 숨쉬고 싶은 욕심을 갖게 한다. 죽음을 두렵게 한다.
"투항해. 김종인. 네 뒤로 정예 센티넬부대가 몰려오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을거 아냐."
"...."
"도경수를, 잃을 거야?"
"...."
"어떻게 얻은,"
"...."
"예쁜 새끼를."
그는 총구로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냉기가 갯벌의 물줄기처럼 남았다.
그 순간.
"김종인!!!!!!!!!!!!!!!!!!!!!!!!!!!!"
멀찍이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도경수!!!!!!!!!!!!!!!!!!!!!!!!!!!!!!!!"
"오세훈.....?"
"준면이 형...?"
SAG의 센티넬 부대를 이끌고 도착한.
반군의 부대를 모두 처리한 후, 오세훈은 헬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경수와 종인에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알고 왔냐."
"어떤 사람이 긴급사태 호출을 했더라고. 그것도 민원실이 아니라 경호실에."
"신고를 했다고?"
"그런거지. SAG 본사 소속이 아니면 본부 경호실 연락망은 어떻게 알았대. 근데 너랑 경수형 여기 있다고, 실명까지 대니까..."
"아......"
"근데 니가 업고있던 그 사람은 누구야? 좀 낯이 익은데."
"그, 그냥 병원에서 감금당하고 있던 사람이예요. 이유는 모르지만...가까운 병원에 맡길까 해요."
경수가 황급하게 말을 받았다. 여기서 백현의 정체가 알려지면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무튼 다행이다. 다행이에요, 형."
세훈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숙소에서 보자, 잘 쉬고! 라는 털털한 안부인사를 붙였다.
"......"
"......"
좁은 헬기 안에서, 그보다 더 촘촘한 적막이 둘을 휩싸안았다. 조종사가 조종대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 달라는 부탁을 하기 전까지 둘은 반듯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
"....마저 하자."
경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아까, 마저 하자고."
"......"
말로 할 수 없는 말.
말이 필요 없는 말.
두 파도가 서로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