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W. 백빠김종인; 부적절한 이사님 누구든 김종인 이사님을 좋아했다. 사원들은 사원들대로, 상사는 상사들대로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따랐으며 믿었다. 반듯한 외모와 바른 품행, 거기에 뛰어난 업무 능력과 친절함은 사(社)내 여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임자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와이프를 본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엄청난 미인에 재력가라고 알려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김종인을 부러워하며 이렇게들 말했다. 김종인 이사님은 완벽한 인생을 살아가는 분이야. 저렇게 살고 싶어.그러나 나는 김종인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저 얼굴 뒤에 가려진 진짜 김종인을. " 야, 어제 윤대리님 김종인 와이프 봤대. "" 정말? 어떻대? "" 장난 아니래. 무지하게 예쁘대. " 커피를 들고 입에 가져다 댄 후 입술로 축여가며 조금씩 마신다. 가 입력되어있던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저들의 입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온 대화로 인해 멈춰버리고 말았다. 김종인, 그 이름 하나만으로. " 역시 사람들은 끼리끼리 만난다니까. "" 이사실에 와이프 사진 끼워진 액자 있다고 하지 않았어? "" 팀장님, 이사실에 와이프 사진 있어요? " 사람들의 눈길이 나로 집중된다. 곰곰히 보고하러 갈 때마다의 이사실의 풍경을 생각해내본다.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없던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와이프의 사진을 보지 못한 건 아니다. 김종인의 오피스텔에 가면 웨딩사진이 여기저기 붙어있거든. " 글쎄요, 있었던 것 같기도하고. "" 아, 정말 이사님이랑 결혼하면 하루하루가 꿈 같을 거에요. "" 당연하지. 김종인 같은 남자랑 결혼하면 전생에 나라 구한거지 뭐. "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태연한 척, 웃으며 그러게요-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도저히 이제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 죄책감에 하루가 다르게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고, 내 인생은 비참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물론 그 시작은 나였다.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붙잡고 진흙탕에 나뒹굴자고 했다. 그게 지금은 엄청나게 후회되지만. 그래서 나는 가끔, 그 시작을 되새김질 해보곤 한다.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 시작은… 6개월 전 쯤이었다. " 언니, 정리해고 명단 뜬다는데요? "" 정리해고 명단? "" 응. 완전 대거 정리래요. 여자들 조심하라던데. " 회사 내에서 조금 친하다 싶은 동기 여사원과 커피를 마시는 도중에 정리해고, 라는 말이 나왔다. 사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 주의깊게 듣지 않았다. 나는 내 부서 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를 통틀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능한 여사원 중 한 명이었고, 그러므로 난 절대 그 불운의 대상일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난 그 이야기에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여사원이 술자리에서 내게 말해왔기 때문이었다. " 저… 언니 저번에 제가 했던 말 생각나세요? 정리해고? "" 아, 응. 기억나지. "" …그, 제가 오늘 어쩌다 부장님 자리에 갔다가 보게됐는데…, 사실 말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에… "" …. "" 정리해고 명단에 언니 이름이…. " 그건 내 얘기였다. 결코 내 얘기가 아니라고 자부했던 그 말들은 모두 나를 가르키고 있었다. 내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엄마가 있었고 이번에 대학을 가는, 당장 등록금을 내야하는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돌아가신지 오래였기에 나는 우리 집의 가장이었다. 뻔하디 뻔한, 진부한 러브스토리에나 나올법한 여주인공의 단골 배경. 그러나 날 신데렐라로 만들어줄 남자 주인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없는 돈으로 겨우 공부해 들어간 명문대, 운좋은 취업, 다음 달 승진의 꿈은 하루 아침에 날아가버릴 지경이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은, 괜찮아야만 하는 현실은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내가 없으면 멀쩡히 잘도 돌아가겠지만 우리집은 내가 없으면 절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마 길바닥에 나앉게되겠지. 나는 여직원에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그래? 다른 직장 알아봐야겠네. 마침 때려치고 싶었는데 잘됐네, 뭐. 하며 웃으며 받아쳤다. 쿨한 척. 그리고 집에 가선, 동생이 들을까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끅끅 대며 눈물로 이부자리를 적셨다. " 저, 이사님이 들어오시랍니다. " 나는 해고되어선 안됐다. 어떤 이유로든 난 해고 될 이유가 없었고, 되어서도 안됐다. 그래서 찾아갔다. 내가 사원으로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의 상사인 김종인 이사님을. 사실 더 직급이 높은, 지체높으신 작자들을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일개 사원일 뿐인 내 말을 들어줄리가 만무했고, 김종인 이사님은 평소 회사 내에 평판이 너무나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사님은 허락해주셨다. 나의 마지막 애원할 기회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비서는 이사실의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침을 한번 꿀떡 삼킨 후 천천히 이사실로 들어가자, 철컥- 하고 문은 다시 닫혔다. 또각, 또각, 나의 걸음소리가 이사실을 울렸고 서류를 바라보던 이사님은 고개를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의 넥타이를 맨 그의 모습은 정갈해보였다.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 거기 쇼파에 앉아요. " 검은색의 푹신한 쇼파. 생각보다 친절한 그의 말에, 나는 어떠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쇼파에 앉았고 그는 내게 물어보았다. 커피, 아님 차? 그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친절했다. 나는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고 그는 그래요, 그럼.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내 맞은 편에 있는 쇼파에 앉았다. 용건부터 바로 말해야하나, 아님 조금 돌려서 말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내게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아마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경직된 내 얼굴을 보고 묻는 말이리라. " 할말이 뭐길래 그렇게 긴장했어요? "" …어, 저기 이사님. "" 네. "" 그게…. " 차마 마음 먹은 것처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술로 입을 한번 축였다. …아까 물이라도 달라고 그럴 걸 그랬나.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어보려는데 나보다 이사님이 조금 더 빨랐다. 이번엔 그리 친절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조소가 섞인 목소리에 가까웠다. " 정리해고 때문에 온 거 같은데. "" …네? 그걸, 그걸 어떻게. ""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은 번복이 어렵습니다. "" …. " 나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희망, 나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오히려 날 구해줄 생각 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애원은 한번 해보고 나가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내가 회사에서 해고되더라도 후회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김종인 이사님이라면,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믿고 지지하는 김종인 이사님이라면, 내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주지 않을까. " …이건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잘못도 없고, 실적도 높은 직원인데다 다음 달엔 이미 부서에서 팀장을 맡기로 되어있었어요. "" …. "" 저한텐 아픈 어머니도 계시구요, 이번에 대학을 들어가서 등록금을 내야하는 동생도 있어요. 아빤 돌아가신지 오래되서 가장 역할을 하고 있고요…. "" …. "" …이렇게, 다른 직장을 구할 시간도, 기회도 없이 해고하시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려내고 있었다. 아마 이게 나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책임질 수 없는 가족들을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하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고. 복잡한 감정들이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내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 있던 이사님에게 말했다. 아니, 사정했다. " 그러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한번만, 딱 한번만 도와주세요. "" …. "" 우리 집은 저 없으면 망해요, 정말 망해요.. 도와주세요. " 내 울음에 그는 천천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와 쇼파 앞 테이블에 놓여있는 각휴지에서 휴지를 몇 장 뽑는다. 감사합니다, 하며 내가 받으려고 하자 내 손을 탁, 하고 쳐내더니 내 턱을 잡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친절, 이라고 하기엔 쳐낸 손길이 어딘가 이상해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꿈뻑 바라보는데 내 눈물을 닦아낸 그가 입을 열었다.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게 뭔지 알아요? "" …. "" 동정 팔아서 어떻게 해보려는 년들. "" …. "" 너 같은 년들이 한 둘이 아니거든. " …이건 이사님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착하고 성실하며 유능한 김종인 이사님이 아니었다. 내 앞에서 내 턱을 쥐고 싸하게 말하는 남자는, 김종인의 얼굴을 한 또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얼굴의 김종인. " …이사…님? "" 김종인이라면 들어주겠지 했나본데. "" …. "" 씨발, 너네 좋으라고 만든 이미지 아니야. 날 위해서 만든거지. "" …. "" 그러니까 이렇게 사정해봤자 소용 없어. " 팔뚝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김종인 이사님의 본성이고, 나는 그걸… 마지막에 가서야 보게된거구나. 아무도 모르는 이 얼굴을. 내 턱 끝을 쥐고 있던 이사님은 내 얼굴을 가까이 와서 바라본다. 잔뜩 울어 발갛게 부었을 내 눈을. 나 또한 언제나, 매일 보았지만 오늘 처음에서야 보게되는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을 바보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빛은, 뭐랄까… 야했다. 무서웠고, 찐득거렸다. 불쾌할 만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더 무서울 현실을 생각해냈다. 아마 그 어떤 무엇보다 더 끔찍하겠지.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올려 그의 와이셔츠 소매를 붙잡았다. " …하라는 거 다 할게요. "" …. "" 시키는 거 다할게요. 뭐든지 다 할게요, 그러니까…. "" …. "" 제발 도와주세요, 이사님. "" …. "" 한번만 도와주세요. " 본성을 감추고 살았던 사람이 본성을 드러냈다면, 그 찰나엔 작은 유혹에도 쉽게 무너질거야.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도 무서웠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역시 내 앞에 놓인 현실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김종인은 나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리고 내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 사람 파악 하나는 잘하네. "" …. "" 안그래도 우는 얼굴이 꽤 꼴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종인은 내 입술을 게걸스레 물어왔다. 마치 먹어치우듯. 다음 날, 나는 정리해고 명단에서 바람처럼 사라지게 되었고 쓸쓸히 커다란 상자와 함께 걸어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난 부서의 팀장이 되었다. 그게 나와 김종인의 시작이었고, 앞에 닥친 위기를 넘긴 후에야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자고 했으니, 그만두자고 말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김종인의 오피스텔에 갈 때마다 붙어져있는 둘의 웨딩사진은 나를 하루하루 죄책감에 몰아 넣었고, 번번한 연애 같은건 꿈 꿀 수도 없었다. 김종인이 나를 놔주기 전까지는, 나는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제는 그만하자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지속해나갈 수 없다. 이 부적절하고도 부도덕적인 관계를. "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 굿모닝입니다, 이사님. "" 네, 좋은 아침. 다들 아침밥은 먹었어요? " 출근 길 엘레베이터에 재수 없게도 김종인이 올라탔다. 이사면 이사답게 옆에 있는 임원용 엘레베이터를 탈 것이지, 괜히 사원들 북적이는 엘레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이것도 아마 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함이겠지. 뒤에 서있는 나와 그의 눈이 얼마간 마주친다. 나는 그냥 눈을 내려 깔아버린다. 여사원들은 잔뜩 신이나서 김종인에게 아침 밥 드셨어요? 피곤하시겠다- 하며 말을 걸었고 김종인은 또 그걸 하나하나 다정하게 받아준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신발코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에 서있던 친한 여사원이 내 팔을 툭툭 쳤다. " …? " 살짝 고개를 돌려서 옆을 보자 여사원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회사 내 소식통인 여자애라 사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금세 캐치하는 편인데, 표정에 장난끼가 가득 묻어있는 걸 봐선 비밀스럽고 재밌는 소식이 분명했다. 아마 김종인에 관한거겠지. 이 여사원은 당사자 앞에서 속닥대며 비밀을 말하길 즐겨하니까. " 언니, 저 어제 야근한거 알죠. 퇴근 전까지 내라고 했던 보고서 못써서. "" …아, 그랬나? "" 그래서 언니가 화냈잖아요. 상부에 보고 못하게 생겼다고. '" 아, 응. 그랬지. 참. "" 그래서 어제 열라게 보고서 완성시켜가지고 퇴근 전에 이사실로 갔거든요? "" …. "" 근데 이사실에서 여자 신음소리가 나는거 있죠. "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킥킥 거리는 여사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고 해야하지. 그저 사원일뿐인 너가 대체 왜 이사실로 보고를 하러 간거지. 야근 중 끝낸 업무라면 다음날 아침 내게 제출해야하는 건 모르는건가. 신음소리를 들었으면 혼자나 알고있지 왜 나한테 말해주는거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정작 입은 열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 어. 그거 난데. 이렇게? 아니면 이사님이 회사에서 여자랑 떡을 쳤단 말이야? 더럽다. 이렇게? 그것도 아니면 아, 응. 그렇구나. 근데 어쩌라구.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 할만한 선지가 단 한개도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지 고민하는 그때, 김종인이 내려야할 층에서 엘레베이터가 멈춰섰고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김종인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보았다. 잠시 내비친 또다른 김종인의 얼굴을. 김종인이 내린 엘레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히고, 옆에 있던 여사원은 내게 다시 말을 건냈다. 아까보다는 조금 커진 목소리로. " 왜 말이 없어요? 너무 놀랐어요? "" …응. "" 그러니까 저도 놀랐어요. 어제 와이프 왔었나봐요. 거기서 사랑을 나눌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사님도 참… 남자네. 남자야. "" 그러게. " 차라리 그 신음소리가 김종인의 와이프 것이었다면 나았을텐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지잉, 하며 휴대폰이 울려왔다. 저장해놓지 않은 8자리의 번호, 그러나 어느 누구의 번호보다 익숙한.[ 010 - 1045 - 7781]- 올라와 나는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로,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6개월을 하루같이 장난감처럼 놀아줬으면 이제 그만할때도 되지 않았나. 앞에 닥쳐온 현실보단 견딜만 할거라고 생각했던 또 다른 현실이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해고될 걸,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 빌어먹을 팀장딱지를 떼는 한이 있더라도-. 가방을 놓자마자 서류 두어개를 가지고 이사실로 올라갔다. 모든 걸 아는 듯 모르는 듯 한 여비서는 이사님께 형식적인 보고를 마치면 나를 이사실에 들여보내주었다. 언제나처럼 내가 들어가자마자 문은 철컥, 하고 닫힌다. 이사실에 부른 것은 그였고, 지금 들어온 것이 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김종인의 시선은 보고서를 떠날 줄 모른다. 그의 책상 위에 올려진 김종인, 이라고 쓰여있는 대리석 팻말은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김종인은 여전히 시선을 보고서에 둔 채로 내게 말했다." 퇴근하고 오피스텔로 가. "" …. "" 와이프 출장 갔어. " 어떤 협박적인 목소리도, 무서운 표정으로 말한 것이 아님에도, 오히려 그는 보고서를 보며 담담히 말했는데도 내 숨이 턱- 하고 막혀버린다. 어제 점심시간에도 이사실에서 그에게 몸을 내주었고 퇴근 후에도 내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또 오피스텔. 우리 집보다 익숙해져버린 김종인의 오피스텔. 그곳에 갈 때마다, 그의 아래에 깔려 정신없는 와중에도 눈에 와이프 사진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는가. 이제 정말 그만 두어야한다고 나는 생각했고, 그리고 지금 말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마음을 고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우리 이제 그만해요, 이사님. "" …. ""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 …. "" 죄책감 들어요, 저. " 그제서야 보고서를 떠날 줄 모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향한다. 그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가 이렇게 날 바라볼 때는, 여전히 야하고, 무섭고, 찐득 거린다. 가끔은 섬뜻할 때도 있고. 그는 나의 말에 허, 실소를 내뱉는다. " 뭘 더 이상 못하겠는데? "" …. "" 섹스를, 아님 팀장을? " 섹스를 못하겠다면 나를 해고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니까, 협박의 일종이지. 그리고 난 그 협박에 반년 동안 꼼짝없이 그의 손에 쥐어져야했고.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만큼 김종인이 힘에 겨웠다. 엄마는 안타깝게도 상황이 더 안 좋아졌지만 이번 달이 거의 고비라고 하시고, 사실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정말 못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몇년동안 지쳐버린 날 이해해주길 바라며, 여튼 병원비를 더이상 내지 않아도 될 지도 몰랐고 동생은 다행히 추천서를 받아 일단 1학년은 장학금으로 다니게 됐다. 그래서 나 더 이상은… " 못하겠어요. 진심이에요. 더 이상은 못해요. " "…. "" 나와의 관계를 끊던, 날 해고하던 둘 중 하나는 해주세요. ""…. "" 아마 해고하실 게 분명하겠지만. " 진심인 듯한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간다. 내가 싫어하는 얼굴. 완벽히 또 다른 김종인의 얼굴. 차마 더 이상 김종인을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어 뒤로 돌아 문을 향해 다가갔다. 해고인지 아닌지는, 물론 당연히 전자겠지만, 회사 게시판에서 보던 개인 연락으로 받던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이제 다 그만해요. 죄책감 느끼는 것도, 끊임없이 나에 대해 부정함을 느끼는 것도, 누군가에게 장난감 취급 받는 것도 모두 질려버렸어. 그러나 뒤에선 김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내가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빠르게 내 쪽으로 다가온 김종인은 내 손목을 강한 악력으로 움켜쥐었다. 저절로 내 입에서는 악, 소리가 내질러졌고 손목에 느껴지는 고통에 아파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였다. 화가 많이 난 듯한 눈빛이었다. " 시작은 니가 했어. "" …. "" 누구 마음대로 뭘 그만 둬. " 그는 우리가 처음 선을 넘었던 검은색의 쇼파로 날 끌고가더니 내 손목을 놓아주는 동시에 쇼파 위로 나를 내팽겨쳐지듯 눕혔다. 내 위를 올라탄 그는 내 머릿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 입에서는 또 한번의 아픈 비명소리가 내질러졌다. 밖에서 분명히 들었을 여비서가 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주길 바랬지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종인은 꽉 쥔 내 머릿채를 잡아당겨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 이젠 팀장 같은거 안해도 집구석은 잘 돌아가고, 나랑 몸 섞는건 짜증나고. 그래? "" …. "" 씨발,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왜, 이젠 더러운 것 같아? "" …. "" 대답해봐. 더러운 거 같냐고. " 무서움에 눈물이 났다. 울면 안되는데, 울면 완벽하게 지는건데 눈물이 났다. 어차피 그와 나의 거래가 좋게 성사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정도로 나쁠 줄은 몰랐다. 적어도 내가 해고되면 끝일 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며, 밀리진 않았지만, 그러려 노력하며 한껏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죄송해요, 근데…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 뭐가 아닌데. "" 아내분한테도 너무… 너무 죄송하고요… 가정도 있으신데 이러면 안되는거 아시잖아요… ."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내며, 마치 시작의 그날처럼 애원하는 나를 바라보는 김종인. 내가 먼저 시작해놓고, 이제와서 죄책감이니 뭐니 별 같지 않은 말을 대가며 그만하자고 하는 내 꼴이 웃기겠지. 그렇지만 내가 그땐 너무 급했으니까. 내가 책임져야할 사람이 많았고, 눈 앞에 닥친 현실이 암담했으니까…. 김종인은 다른 한 쪽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 죄책감이라. "" …. "" 가정 있는 새끼한테 먼저 도와달라 울며불며 지랄하신게 누구였더라. "" …아는데, 다 아는데요…, 제가 잘못한거 다 아는데… 너무 힘들어요, 정말…. " 김종인은 우악스럽게 내 와이셔츠를 뜯는다. 그의 아래에 깔려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하는 내 몸뚱이. 어느새 볼을 쓰다듬던 손은 내 두 손을 한번에 결박하고 있었다. 나는 울었다. 그러나 김종인은 내 우는 얼굴을 좋아했고, 울어도 소용 없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그럼 이 관계를 끊어낼 방법은 더 이상 없는건가. 내가 이 회사를 나가서 끝날 일이 아니라면, 그냥 나는 그 끝을 기다려야하는걸까. 이 모든 걸 다 받아내면서? 김종인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나긋나긋 속삭였다. " 시작이 니 마음대로 였으면, "" …. "" 끝은 내 마음대로여야지. "" …. "" 그래야 공평하잖아. 안그래? " 내 마음대로 시작했으니, 끝은 제 마음대로 내야겠다는 그의 말에 결국 온 몸에 가득 주고 있던 힘을 뺐다. 반항을 한다거나, 발악을 한다고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닌 것 같았으며 더욱이 내가 끊어낸다고 끊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내 가슴께를 쥐어오는 그의 손길에 나를 맡겨냈다.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이 관계를 나는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부적절한 그와 나의 관계를. 그래, 잘하면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지도 모르겠다. 욕망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테니까. ▼BGM - Do your trick?섹시한 김종인은 옳습니다. 이 모든 글은 첫짤을 보자마자 탄생되었습니다. 너무 섹시한 나머지ㅇ<-< 몸 파는 누나 下편은 쓰는 중임다. 하핫.댓글 쓰고 포인트 받아가셔요♡ + 저번에 한 사담톡 분들 댓글은 다 캡쳐해놨어여..감동ㅠㅅㅠ
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김종인; 부적절한 이사님
누구든 김종인 이사님을 좋아했다. 사원들은 사원들대로, 상사는 상사들대로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따랐으며 믿었다. 반듯한 외모와 바른 품행, 거기에 뛰어난 업무 능력과 친절함은 사(社)내 여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임자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와이프를 본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엄청난 미인에 재력가라고 알려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김종인을 부러워하며 이렇게들 말했다. 김종인 이사님은 완벽한 인생을 살아가는 분이야. 저렇게 살고 싶어.
그러나 나는 김종인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저 얼굴 뒤에 가려진 진짜 김종인을.
" 야, 어제 윤대리님 김종인 와이프 봤대. "
" 정말? 어떻대? "
" 장난 아니래. 무지하게 예쁘대. "
커피를 들고 입에 가져다 댄 후 입술로 축여가며 조금씩 마신다. 가 입력되어있던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저들의 입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온 대화로 인해 멈춰버리고 말았다. 김종인, 그 이름 하나만으로.
" 역시 사람들은 끼리끼리 만난다니까. "
" 이사실에 와이프 사진 끼워진 액자 있다고 하지 않았어? "
" 팀장님, 이사실에 와이프 사진 있어요? "
사람들의 눈길이 나로 집중된다. 곰곰히 보고하러 갈 때마다의 이사실의 풍경을 생각해내본다.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없던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와이프의 사진을 보지 못한 건 아니다. 김종인의 오피스텔에 가면 웨딩사진이 여기저기 붙어있거든.
" 글쎄요, 있었던 것 같기도하고. "
" 아, 정말 이사님이랑 결혼하면 하루하루가 꿈 같을 거에요. "
" 당연하지. 김종인 같은 남자랑 결혼하면 전생에 나라 구한거지 뭐. "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태연한 척, 웃으며 그러게요-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도저히 이제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 죄책감에 하루가 다르게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고, 내 인생은 비참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물론 그 시작은 나였다.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붙잡고 진흙탕에 나뒹굴자고 했다. 그게 지금은 엄청나게 후회되지만. 그래서 나는 가끔, 그 시작을 되새김질 해보곤 한다.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 시작은… 6개월 전 쯤이었다.
" 언니, 정리해고 명단 뜬다는데요? "
" 정리해고 명단? "
" 응. 완전 대거 정리래요. 여자들 조심하라던데. "
회사 내에서 조금 친하다 싶은 동기 여사원과 커피를 마시는 도중에 정리해고, 라는 말이 나왔다. 사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 주의깊게 듣지 않았다. 나는 내 부서 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를 통틀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능한 여사원 중 한 명이었고, 그러므로 난 절대 그 불운의 대상일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난 그 이야기에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여사원이 술자리에서 내게 말해왔기 때문이었다.
" 저… 언니 저번에 제가 했던 말 생각나세요? 정리해고? "
" 아, 응. 기억나지. "
" …그, 제가 오늘 어쩌다 부장님 자리에 갔다가 보게됐는데…, 사실 말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에… "
" …. "
" 정리해고 명단에 언니 이름이…. "
그건 내 얘기였다. 결코 내 얘기가 아니라고 자부했던 그 말들은 모두 나를 가르키고 있었다.
내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엄마가 있었고 이번에 대학을 가는, 당장 등록금을 내야하는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돌아가신지 오래였기에 나는 우리 집의 가장이었다. 뻔하디 뻔한, 진부한 러브스토리에나 나올법한 여주인공의 단골 배경. 그러나 날 신데렐라로 만들어줄 남자 주인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없는 돈으로 겨우 공부해 들어간 명문대, 운좋은 취업, 다음 달 승진의 꿈은 하루 아침에 날아가버릴 지경이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은, 괜찮아야만 하는 현실은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내가 없으면 멀쩡히 잘도 돌아가겠지만 우리집은 내가 없으면 절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마 길바닥에 나앉게되겠지.
나는 여직원에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그래? 다른 직장 알아봐야겠네. 마침 때려치고 싶었는데 잘됐네, 뭐. 하며 웃으며 받아쳤다. 쿨한 척. 그리고 집에 가선, 동생이 들을까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끅끅 대며 눈물로 이부자리를 적셨다.
" 저, 이사님이 들어오시랍니다. "
나는 해고되어선 안됐다. 어떤 이유로든 난 해고 될 이유가 없었고, 되어서도 안됐다. 그래서 찾아갔다. 내가 사원으로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의 상사인 김종인 이사님을. 사실 더 직급이 높은, 지체높으신 작자들을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일개 사원일 뿐인 내 말을 들어줄리가 만무했고, 김종인 이사님은 평소 회사 내에 평판이 너무나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사님은 허락해주셨다. 나의 마지막 애원할 기회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비서는 이사실의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침을 한번 꿀떡 삼킨 후 천천히 이사실로 들어가자, 철컥- 하고 문은 다시 닫혔다. 또각, 또각, 나의 걸음소리가 이사실을 울렸고 서류를 바라보던 이사님은 고개를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의 넥타이를 맨 그의 모습은 정갈해보였다.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 거기 쇼파에 앉아요. "
검은색의 푹신한 쇼파. 생각보다 친절한 그의 말에, 나는 어떠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쇼파에 앉았고 그는 내게 물어보았다. 커피, 아님 차? 그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친절했다. 나는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고 그는 그래요, 그럼.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내 맞은 편에 있는 쇼파에 앉았다. 용건부터 바로 말해야하나, 아님 조금 돌려서 말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내게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아마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경직된 내 얼굴을 보고 묻는 말이리라.
" 할말이 뭐길래 그렇게 긴장했어요? "
" …어, 저기 이사님. "
" 네. "
" 그게…. "
차마 마음 먹은 것처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술로 입을 한번 축였다. …아까 물이라도 달라고 그럴 걸 그랬나.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어보려는데 나보다 이사님이 조금 더 빨랐다. 이번엔 그리 친절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조소가 섞인 목소리에 가까웠다.
" 정리해고 때문에 온 거 같은데. "
" …네? 그걸, 그걸 어떻게. "
"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은 번복이 어렵습니다. "
나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희망, 나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오히려 날 구해줄 생각 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애원은 한번 해보고 나가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내가 회사에서 해고되더라도 후회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김종인 이사님이라면,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믿고 지지하는 김종인 이사님이라면, 내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주지 않을까.
" …이건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잘못도 없고, 실적도 높은 직원인데다 다음 달엔 이미 부서에서 팀장을 맡기로 되어있었어요. "
" 저한텐 아픈 어머니도 계시구요, 이번에 대학을 들어가서 등록금을 내야하는 동생도 있어요. 아빤 돌아가신지 오래되서 가장 역할을 하고 있고요…. "
" …이렇게, 다른 직장을 구할 시간도, 기회도 없이 해고하시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려내고 있었다. 아마 이게 나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책임질 수 없는 가족들을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하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고. 복잡한 감정들이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내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 있던 이사님에게 말했다. 아니, 사정했다.
" 그러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한번만, 딱 한번만 도와주세요. "
" 우리 집은 저 없으면 망해요, 정말 망해요.. 도와주세요. "
내 울음에 그는 천천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와 쇼파 앞 테이블에 놓여있는 각휴지에서 휴지를 몇 장 뽑는다. 감사합니다, 하며 내가 받으려고 하자 내 손을 탁, 하고 쳐내더니 내 턱을 잡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친절, 이라고 하기엔 쳐낸 손길이 어딘가 이상해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꿈뻑 바라보는데 내 눈물을 닦아낸 그가 입을 열었다.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게 뭔지 알아요? "
" 동정 팔아서 어떻게 해보려는 년들. "
" 너 같은 년들이 한 둘이 아니거든. "
…이건 이사님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착하고 성실하며 유능한 김종인 이사님이 아니었다. 내 앞에서 내 턱을 쥐고 싸하게 말하는 남자는, 김종인의 얼굴을 한 또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얼굴의 김종인.
" …이사…님? "
" 김종인이라면 들어주겠지 했나본데. "
" 씨발, 너네 좋으라고 만든 이미지 아니야. 날 위해서 만든거지. "
" 그러니까 이렇게 사정해봤자 소용 없어. "
팔뚝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김종인 이사님의 본성이고, 나는 그걸… 마지막에 가서야 보게된거구나. 아무도 모르는 이 얼굴을. 내 턱 끝을 쥐고 있던 이사님은 내 얼굴을 가까이 와서 바라본다. 잔뜩 울어 발갛게 부었을 내 눈을. 나 또한 언제나, 매일 보았지만 오늘 처음에서야 보게되는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을 바보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빛은, 뭐랄까… 야했다. 무서웠고, 찐득거렸다. 불쾌할 만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더 무서울 현실을 생각해냈다. 아마 그 어떤 무엇보다 더 끔찍하겠지.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올려 그의 와이셔츠 소매를 붙잡았다.
" …하라는 거 다 할게요. "
" 시키는 거 다할게요. 뭐든지 다 할게요, 그러니까…. "
" 제발 도와주세요, 이사님. "
" 한번만 도와주세요. "
본성을 감추고 살았던 사람이 본성을 드러냈다면, 그 찰나엔 작은 유혹에도 쉽게 무너질거야.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도 무서웠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역시 내 앞에 놓인 현실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김종인은 나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리고 내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 사람 파악 하나는 잘하네. "
" 안그래도 우는 얼굴이 꽤 꼴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종인은 내 입술을 게걸스레 물어왔다. 마치 먹어치우듯. 다음 날, 나는 정리해고 명단에서 바람처럼 사라지게 되었고 쓸쓸히 커다란 상자와 함께 걸어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난 부서의 팀장이 되었다. 그게 나와 김종인의 시작이었고, 앞에 닥친 위기를 넘긴 후에야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자고 했으니, 그만두자고 말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김종인의 오피스텔에 갈 때마다 붙어져있는 둘의 웨딩사진은 나를 하루하루 죄책감에 몰아 넣었고, 번번한 연애 같은건 꿈 꿀 수도 없었다. 김종인이 나를 놔주기 전까지는, 나는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제는 그만하자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지속해나갈 수 없다. 이 부적절하고도 부도덕적인 관계를.
"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
" 굿모닝입니다, 이사님. "
" 네, 좋은 아침. 다들 아침밥은 먹었어요? "
출근 길 엘레베이터에 재수 없게도 김종인이 올라탔다. 이사면 이사답게 옆에 있는 임원용 엘레베이터를 탈 것이지, 괜히 사원들 북적이는 엘레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이것도 아마 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함이겠지. 뒤에 서있는 나와 그의 눈이 얼마간 마주친다. 나는 그냥 눈을 내려 깔아버린다. 여사원들은 잔뜩 신이나서 김종인에게 아침 밥 드셨어요? 피곤하시겠다- 하며 말을 걸었고 김종인은 또 그걸 하나하나 다정하게 받아준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신발코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에 서있던 친한 여사원이 내 팔을 툭툭 쳤다.
" …? "
살짝 고개를 돌려서 옆을 보자 여사원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회사 내 소식통인 여자애라 사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금세 캐치하는 편인데, 표정에 장난끼가 가득 묻어있는 걸 봐선 비밀스럽고 재밌는 소식이 분명했다. 아마 김종인에 관한거겠지. 이 여사원은 당사자 앞에서 속닥대며 비밀을 말하길 즐겨하니까.
" 언니, 저 어제 야근한거 알죠. 퇴근 전까지 내라고 했던 보고서 못써서. "
" …아, 그랬나? "
" 그래서 언니가 화냈잖아요. 상부에 보고 못하게 생겼다고. '
" 아, 응. 그랬지. 참. "
" 그래서 어제 열라게 보고서 완성시켜가지고 퇴근 전에 이사실로 갔거든요? "
" 근데 이사실에서 여자 신음소리가 나는거 있죠. "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킥킥 거리는 여사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고 해야하지. 그저 사원일뿐인 너가 대체 왜 이사실로 보고를 하러 간거지. 야근 중 끝낸 업무라면 다음날 아침 내게 제출해야하는 건 모르는건가. 신음소리를 들었으면 혼자나 알고있지 왜 나한테 말해주는거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정작 입은 열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 어. 그거 난데. 이렇게? 아니면 이사님이 회사에서 여자랑 떡을 쳤단 말이야? 더럽다. 이렇게? 그것도 아니면 아, 응. 그렇구나. 근데 어쩌라구.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 할만한 선지가 단 한개도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지 고민하는 그때, 김종인이 내려야할 층에서 엘레베이터가 멈춰섰고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김종인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보았다. 잠시 내비친 또다른 김종인의 얼굴을.
김종인이 내린 엘레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히고, 옆에 있던 여사원은 내게 다시 말을 건냈다. 아까보다는 조금 커진 목소리로.
" 왜 말이 없어요? 너무 놀랐어요? "
" …응. "
" 그러니까 저도 놀랐어요. 어제 와이프 왔었나봐요. 거기서 사랑을 나눌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사님도 참… 남자네. 남자야. "
" 그러게. "
차라리 그 신음소리가 김종인의 와이프 것이었다면 나았을텐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지잉, 하며 휴대폰이 울려왔다. 저장해놓지 않은 8자리의 번호, 그러나 어느 누구의 번호보다 익숙한.
[ 010 - 1045 - 7781]
- 올라와
나는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로,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6개월을 하루같이 장난감처럼 놀아줬으면 이제 그만할때도 되지 않았나. 앞에 닥쳐온 현실보단 견딜만 할거라고 생각했던 또 다른 현실이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해고될 걸,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 빌어먹을 팀장딱지를 떼는 한이 있더라도-.
가방을 놓자마자 서류 두어개를 가지고 이사실로 올라갔다. 모든 걸 아는 듯 모르는 듯 한 여비서는 이사님께 형식적인 보고를 마치면 나를 이사실에 들여보내주었다. 언제나처럼 내가 들어가자마자 문은 철컥, 하고 닫힌다. 이사실에 부른 것은 그였고, 지금 들어온 것이 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김종인의 시선은 보고서를 떠날 줄 모른다. 그의 책상 위에 올려진 김종인, 이라고 쓰여있는 대리석 팻말은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김종인은 여전히 시선을 보고서에 둔 채로 내게 말했다.
" 퇴근하고 오피스텔로 가. "
" 와이프 출장 갔어. "
어떤 협박적인 목소리도, 무서운 표정으로 말한 것이 아님에도, 오히려 그는 보고서를 보며 담담히 말했는데도 내 숨이 턱- 하고 막혀버린다. 어제 점심시간에도 이사실에서 그에게 몸을 내주었고 퇴근 후에도 내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또 오피스텔. 우리 집보다 익숙해져버린 김종인의 오피스텔. 그곳에 갈 때마다, 그의 아래에 깔려 정신없는 와중에도 눈에 와이프 사진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는가. 이제 정말 그만 두어야한다고 나는 생각했고, 그리고 지금 말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마음을 고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우리 이제 그만해요, 이사님. "
"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
" 죄책감 들어요, 저. "
그제서야 보고서를 떠날 줄 모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향한다. 그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가 이렇게 날 바라볼 때는, 여전히 야하고, 무섭고, 찐득 거린다. 가끔은 섬뜻할 때도 있고. 그는 나의 말에 허, 실소를 내뱉는다.
" 뭘 더 이상 못하겠는데? "
" 섹스를, 아님 팀장을? "
섹스를 못하겠다면 나를 해고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니까, 협박의 일종이지. 그리고 난 그 협박에 반년 동안 꼼짝없이 그의 손에 쥐어져야했고.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만큼 김종인이 힘에 겨웠다. 엄마는 안타깝게도 상황이 더 안 좋아졌지만 이번 달이 거의 고비라고 하시고, 사실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정말 못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몇년동안 지쳐버린 날 이해해주길 바라며, 여튼 병원비를 더이상 내지 않아도 될 지도 몰랐고 동생은 다행히 추천서를 받아 일단 1학년은 장학금으로 다니게 됐다. 그래서 나 더 이상은…
" 못하겠어요. 진심이에요. 더 이상은 못해요. "
"…. "
" 나와의 관계를 끊던, 날 해고하던 둘 중 하나는 해주세요. "
" 아마 해고하실 게 분명하겠지만. "
진심인 듯한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간다. 내가 싫어하는 얼굴. 완벽히 또 다른 김종인의 얼굴. 차마 더 이상 김종인을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어 뒤로 돌아 문을 향해 다가갔다. 해고인지 아닌지는, 물론 당연히 전자겠지만, 회사 게시판에서 보던 개인 연락으로 받던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이제 다 그만해요. 죄책감 느끼는 것도, 끊임없이 나에 대해 부정함을 느끼는 것도, 누군가에게 장난감 취급 받는 것도 모두 질려버렸어.
그러나 뒤에선 김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내가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빠르게 내 쪽으로 다가온 김종인은 내 손목을 강한 악력으로 움켜쥐었다. 저절로 내 입에서는 악, 소리가 내질러졌고 손목에 느껴지는 고통에 아파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였다. 화가 많이 난 듯한 눈빛이었다.
" 시작은 니가 했어. "
" 누구 마음대로 뭘 그만 둬. "
그는 우리가 처음 선을 넘었던 검은색의 쇼파로 날 끌고가더니 내 손목을 놓아주는 동시에 쇼파 위로 나를 내팽겨쳐지듯 눕혔다. 내 위를 올라탄 그는 내 머릿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 입에서는 또 한번의 아픈 비명소리가 내질러졌다. 밖에서 분명히 들었을 여비서가 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주길 바랬지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종인은 꽉 쥔 내 머릿채를 잡아당겨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 이젠 팀장 같은거 안해도 집구석은 잘 돌아가고, 나랑 몸 섞는건 짜증나고. 그래? "
" 씨발,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왜, 이젠 더러운 것 같아? "
" 대답해봐. 더러운 거 같냐고. "
무서움에 눈물이 났다. 울면 안되는데, 울면 완벽하게 지는건데 눈물이 났다. 어차피 그와 나의 거래가 좋게 성사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정도로 나쁠 줄은 몰랐다. 적어도 내가 해고되면 끝일 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며, 밀리진 않았지만, 그러려 노력하며 한껏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죄송해요, 근데…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
" 뭐가 아닌데. "
" 아내분한테도 너무… 너무 죄송하고요… 가정도 있으신데 이러면 안되는거 아시잖아요… ."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내며, 마치 시작의 그날처럼 애원하는 나를 바라보는 김종인. 내가 먼저 시작해놓고, 이제와서 죄책감이니 뭐니 별 같지 않은 말을 대가며 그만하자고 하는 내 꼴이 웃기겠지. 그렇지만 내가 그땐 너무 급했으니까. 내가 책임져야할 사람이 많았고, 눈 앞에 닥친 현실이 암담했으니까…. 김종인은 다른 한 쪽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 죄책감이라. "
" 가정 있는 새끼한테 먼저 도와달라 울며불며 지랄하신게 누구였더라. "
" …아는데, 다 아는데요…, 제가 잘못한거 다 아는데… 너무 힘들어요, 정말…. "
김종인은 우악스럽게 내 와이셔츠를 뜯는다. 그의 아래에 깔려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하는 내 몸뚱이. 어느새 볼을 쓰다듬던 손은 내 두 손을 한번에 결박하고 있었다. 나는 울었다. 그러나 김종인은 내 우는 얼굴을 좋아했고, 울어도 소용 없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그럼 이 관계를 끊어낼 방법은 더 이상 없는건가. 내가 이 회사를 나가서 끝날 일이 아니라면, 그냥 나는 그 끝을 기다려야하는걸까. 이 모든 걸 다 받아내면서? 김종인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나긋나긋 속삭였다.
" 시작이 니 마음대로 였으면, "
" 끝은 내 마음대로여야지. "
" 그래야 공평하잖아. 안그래? "
내 마음대로 시작했으니, 끝은 제 마음대로 내야겠다는 그의 말에 결국 온 몸에 가득 주고 있던 힘을 뺐다. 반항을 한다거나, 발악을 한다고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닌 것 같았으며 더욱이 내가 끊어낸다고 끊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내 가슴께를 쥐어오는 그의 손길에 나를 맡겨냈다.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이 관계를 나는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부적절한 그와 나의 관계를. 그래, 잘하면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지도 모르겠다. 욕망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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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Do your trick?
섹시한 김종인은 옳습니다. 이 모든 글은 첫짤을 보자마자 탄생되었습니다. 너무 섹시한 나머지ㅇ<-< 몸 파는 누나 下편은 쓰는 중임다. 하핫.
댓글 쓰고 포인트 받아가셔요♡
+ 저번에 한 사담톡 분들 댓글은 다 캡쳐해놨어여..감동ㅠㅅ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