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각] Major Arcana 메이저 아르카나
02. The Magician
w. 에오스
요즘 핫하게 뜨는 신인그룹 무한동력의 성열이 개인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이씨, 이제 고작 십 분밖에 안 남았어!"
"형, 살살 운전하세요. 우리 너무 빨리 가면 저 회사 들어가서 혼자서 안무연습 또 해야된단 말이에요-"
"야 이 자식아, 회사에서 내린 방침이라 난들 별 수 있겠냐. 너 요즘 너무 얼굴 믿고 안무 대충대충 한다고 댓글이 아주 그냥 말야, 너 나오는 인터넷뉴스고 지금 하고 있는 라디오 생방 댓글이고 자글자글해! 우글우글... 내가 봐도 토할 것 같더구만. 회사에도 너 정신건강을 위해서 자꾸 안무 시키는거니까 군말말고 시킬 때 잘 해봐. 자꾸 욕 먹지 말고."
"하하- 연예인이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시기, 질투,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인기와 명성...그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이지 않고 도는게 이 바닥이고 제 인생인데, 힘들 때 거기서 동력을 얻는거에요. 나를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괜사리 고마워서, 좋아서..."
"하이고, 천상 연예인이네, 연예인이야. 나한테 그렇게 하라면 난 백 억이고 천 억이고 통장에 쏴줘도 못 할 거야. 차라리 돈 안 벌고 욕 안 먹는게 낫지."
"돈 때문이 아니라 팬들 때문이라니까요? 형도 한 번 느껴보셔야되요, 그 짜릿함 말이에요. 공연이 끝나도, 공허함이 찾아와도, 팬들이 올린 공연후기를 보면 괜사리 뿌듯해지면서 그 빈 공간이 다시 채워진다니까요. 괜히 오타나서 놀림받을까봐 자주 피드백은 안 올려도, 마음 속으로는 항상 참 좋고 고마운 사람들하고 함께 있어서 난 진짜 좋더라."
성열은 어릴 때부터 수려한 외모의 유명 아역배우로 활동했던 탓에 학교 수업을 종종 빠졌고, 그 탓인지 리더인데도 불구하고 지식을 뽐내는 데 있어서는 다른 무한동력 멤버들보다 관심이 없어 보였다. 늘 그렇듯 성열의 안티팬들은 성열의 학력을 논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성열에게 무자비한 말을 내뱉었지만, 성열은 그들에게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꽤나 긴 정적이 흘렀고, 매니저가 무한동력 소속사 바로 옆에 있는 숙소 앞에 차를 세울 때 쯤, 성열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형, 솔직히 눈치채셨죠?"
"응? 뭔데."
"저희가 영원히 사장님 꼭두각시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에요."
"..."
"솔직히 형도 아시잖아요. 사장님은 손익분기점 작년에 넘기고도 우리한테 수익금을 n분의 1은 커녕 손에 단돈 천원도 쥐어주지 않으셨어요. 재민이랑 형섭이네는 활동할 때 돈 없어서 부모님들께서 그 돈 마련해주시다가 집이 통째로 경매에 넘어가게 생겼고, 제가 연 치킨 가게, 그거 아무리 이익을 내려고 해도, 아무리 팬들이 찾아와줘도, 아니 사실 그래서 가격을 못 올려서, 그래서 수지가 맞질 않아요. 우리는 정말 노래하고 춤추고 방송에 나오는게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이제 마음에도 없는 그런 부업들까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저희 가족들까지 빚에 시달려야 해요."
"..."
"그래서 말인데요, 형."
"응, 그래."
"형도 이 회사에서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부탁이에요."
"..."
"형, 제 꿈은 말이에요..."
"...내가 방금 들은 말은 난 모르는 일이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나중에 일이 다 깔끔하게 해결됬을 때, 그 때쯤에나 나한테 알려줘."
성열은 그 말을 듣자마자 차에서 내렸고, 얼마 전에 일어난 경미한 교통사고 때문에 달아놓은 블랙박스의 깜빡임만이 성열의 매니저 혼자 남은 봉고차 안의 적막을 소리 없이 깨고 있었다. 씩씩대며 차에서 내린 성열은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삐 소리 이후에..."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랑 통화를 하는거야. 하며 대답 없는 전화를 끊고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가려던 성열은 아파트 정원 사이에 숨어있던 여학생 두 명을 발견했고, 그는 직감적으로 그 아이들이 무한동력 팬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야, 너네 여기서 뭐해?"
물건을 훔치다가 들키기라도 한 듯 소녀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자빠졌고, 그동안 하도 사생팬들에 대한 혐오감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분출하던 성열은 오랜만에 보는 사생들의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크게 한 번 웃는다. 우리 중에서 누구 팬인데 이렇게 계속 기다리는거야?"
"저...저희 오빠 팬이에요. 저희 대전 사는데 오빠 보려고 이번에 처음 서...서울로 올라왔어요. 다른 오빠들은 스케줄 끝나고 숙소 들어갔는데 오빠만 라디오 스케줄 있었잖아요... 저희 그거 들으면서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빠 원래 이렇게 집 앞까지 따라다니는거 싫어하시는거 아...아는데도 그냥 한 번... 너무 보고 싶어서..."
두 소녀가 지레 겁을 먹었는지 말을 하다가 이내 울음을 왈칵 터뜨렸다. 성열이 그동안 겪어왔던 예의없는 팬들과는 사뭇 다른 소녀들이었다. 어쩌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생후기를 보고 너무 부러웠던 나머지 이번에 처음 이런 짓을 하는 것 일수도 있었다.
"너네 핸드폰 있어? 아니면 카메라나."
"네네! 사실 아까 오빠 차가 저기 서서 한참 시동 걸렸을 때에도 계속 동영상 찍고 있었어요. 애들한테 자랑하려구..."
"그럼 지금도 찍고 있는거야?"
"야야, 확인해봐."
"아, 아까 너무 당황해서 이거 끄는거 까먹었다. 지금도 계속 녹화되구 있어."
"그거 잠깐 줘봐. 내가 다같이 동영상 찍어줄테니까, 절대 아무한테도 이 동영상 보여주면 안돼. 알았지? 이건 진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너희하고 나만의 약속인거야."
"와... 진짜요? 절대로 아무한테도 안 보여줄게요! 약속해요."
"그럼 이리로 와봐. 이거 아직도 녹화 되는거지?"
"네네!"
"무한동력 사랑해줘서 정말 고맙고, 특히 이성열 사랑해줘서 더더욱 고맙다! 비록 언젠가 우리가 무한동력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는 시간이 오고, 너희가 우리를 믿지 못하고, 우리 모두가 서로를 잊는 날이 와도... 그래도 난, 우리 무한동력은 여전히 너희를 기억하고 사랑할거야. 날씨도 추운데 얼른 집에 들어가! 내일 전체스케줄 나올 때 너희 또 보면 그땐 진짜 화낸다."
"오빠... 정말, 정말 감사해요..."
"응 그래, 진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기다? 늦었을텐데 막차 타고 가면 늦으니까 패스트푸드점이나 안전한 곳에 있다가 내일 아침에 꼭 집에 가!"
성열이 돌려준 핸드폰을 품에 꼭 안던 소녀들이 몇 발자국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 성열에게 소리쳤다.
"성열오빠, 성열오빠!"
"왜?"
"이거... 이거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뭐가?"
"오빠도 어릴 때부터 아이돌 하는게 꿈이 아니었잖아요. 잡지 인터뷰 읽으면 항상 아이돌 말고 다른 거 하고 싶어하는거 팬들은 다 눈치채요~ 오빠는 뭐...뭐가 진짜 꿈이에요?"
"나? 내 꿈은 큰 집에서 사는거! 집 앞에는 꽃도 있고, 나비도 날아다니고! 근데 왜?"
"저, 지금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이 다음에 커서 꼭 오빠를 위한 집을 지어 줄 거에요!"
"저도요!"
"그래그래, 그때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나도 춤연습 열심히 해야되서 몇 시간동안은 안 나올거야. 아까 약속한거, 지키는거지?"
"네! 잘 있어요 오빠!!!"
없는 친여동생이라도 만난 듯한 기분에 성열은 괜사리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불이 꺼진 회사 연습실로 들어갔다. 습관적으로 연습실 불을 킨 성열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연습실 안에는 숙소 안에 있어야 할 무한동력 멤버들과 성열을 데려다 주었던 매니저, 그리고 사장이 일제히 성열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거 뭐에요. 다들 여기서 뭐하는거야? 나 오늘 춤 연습하라면서요... 아, 오늘 내 생일인가? 오늘이... 오늘 내 생일 아닌데요? 하하하! 다들 잘 못 알고 있었나보네요~ 아 근데 뭐야! 야, 너네는 같은 멤버인데 어떻게 리더 생일을 모르냐? 하하!"
"성열 군. 방금 내가... 내가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네."
"네?"
"회사를 나갈 생각이라면서? 무한동력을, 탈퇴할 생각이라면서."
성열은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쳐다보았다. 재민, 진수, 형섭, 제이크, 방우, 민영, 정현이 형, 그리고…
"사장님,"
"내가 처음 너희를 키울 때, 아니 너를 키울 때 그런 생각을 했지. 저 아이라면 얼굴도 반반한데다 참 내 말을 잘 듣겠구나. 왜냐고? 너희 집이 돈에 쪼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우리가 계약 하기 전에 했던 비밀약속을 벌써 까먹은 것은 아니겠지?"
10억.
10억이었다. 성열이 좋아하는 연기를 하기에는, 성열의 집은 성열을 밀어줄 힘이나 돈이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성열을 이용해 작게나마 돈을 벌려고 그를 이 더러운 판에 강제로 담가 버린 사람도 엄마였고, 5억 때문에 노래하고 춤에는 일절 무관심했던 성열을 조폭 두목이 운영하는 아이돌 기획사로 데뷔시키게 한 사람도 엄마였다. 성열은 그런 엄마를 사랑했다.
"돈이 꽤 급하셨나 보더구나,"
그리고 엄마는 성열을 버렸다.
"처음 거래했던 10억, 그에 대한 이자, 그리고 어머님께서 가져가신 6억. 총 21억이다. 그 돈에 응당하는 대가는... 너가 치루어야겠지? 얘들아,"
얘들아, 이 한 마디에 5년동안 같이 울고, 또 같이 웃던 멤버들은 성열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밟기 시작했다. 성열은 최대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숫자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디 보자... 우리 잘 생긴 성열이 얼굴이 피떡이 되었구나...? 근데 지금부터 시작이야. 아니, 말을 잘 못 했구나."
사장은 말을 이었다.
"넌 이제 끝이야."
그 때, 성열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정현이 형... 내 꿈이 뭔지 알아요?"
매니저는 말 없이 무언가에 적신 듯한 흰 손수건을 들고 성열 앞에 다가섰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성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제 꿈은요..."
매니저가 서서히 손수건을 성열의 입으로 갖다 대었다.
제 꿈은요,
꽃밭이 있는 집에서 별을 보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싶어요. 별하고 꽃을 보다가 그 모든 것이 지루해지면, 많은 곳을 다녀보고 싶어요.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냐고요? 괜찮아요. 우리 집에는 항상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멤버들과,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가 있거든요.
한 단어로 꿈을 정하기에, 꽃다운 내 나이는 나비같이 아름다운걸요.
***
우현은 어렴풋이 유명 아이돌 무한동력 의 이성열 이라는 멤버를 기억해냈다. 아주 옛날에 성규 형과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켰을 때 음악방송에 나온 그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노래 가사 또한 나쁜 남자가 부르는 노래였지만, 그의 촉촉한 눈동자는 속마음이 여린 그가 지금 센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를 본건 성규랑 헤어지고 수많은 날들을 술과 약으로 보내다 잠에서 일어나 무심코 킨 티비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우현이 처음 티비에서 본 그의 모습이거나 지금 우현의 눈 앞에 보이는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멀쩡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대형 교통사고였다더라. 성열이 라디오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 가던 도중 어떻게 됬다 카더라. 겉모습은 멀쩡하지 못했지만 신이 그를 보살폈었던지 장기는 손상 없이 멀쩡했다 카더라. 그의 모친과 멤버들은 평소에 그의 뜻을 존중해 여러 곳에 장기를 기증하고 팬들이 모아 기부한 돈은 빚이 있던 성열의 모친이 가지기로 했다더라. 몇몇 극성 팬들이 오빠가 죽었을 리 없다며 장례식장에서 난동을 피우기도 했지만, 한 의사가 장기를 기증할 때 맥박이 뛰었다고 양심선언을 했지만, 모두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더라…'
성열은 자신을 기억하는 듯한 우현의 모습을 보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씁쓸한 미소를…
"다음 집에 머무르는 친구는 누군지 정말로 궁금해지는구나."
중엽이 먼저 발걸음을 재촉하였고, 그 뒤로 우현과 성열, 그리고 흰 나비들이 따라갔다.
중엽이 인도하는 데로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서 검정색 이층집이 보였다. 그 이층집 앞에는 역시나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그 위에는 두 명의 사람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 하였다.
"어이!"
중엽이 손을 흔들자 두 명이 대화를 멈추고 일제히 중엽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중엽은 시선을 한 몫에 받는 것이 꽤나 기뻤던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늦어서 미안한데 우리가 이럴 시간이 없거든. 빨리 떠나야 되니까 짐 싸서 나와!"
한 집에 두 명이 사는 광경을 처음 본 우현은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중엽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어봤다.
"안내자님, 왜 저 집은 두 명이 같이 살아요?"
"으흑, 간지러워! 아, 저 친구들은 아마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운명을 달리 하지 않았나 싶다. 봐봐, 너희 둘은 처음 만나서 그런지 서로 엄청 견제하는게 나한테까지 느껴지는데, 쟤네들 보면 그런 감정들이 느껴지진 않잖아. 형제였나?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면 같은 장소에서 같이 죽어도 저렇게 친하지는 않을 텐데."
***
"으흑흑...성은아! 성은아...미안해 성은아...아악...흑..."
"너무 슬피 우시진 마세요... 진정이 되신다면 저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셔야 해요. 무엇이 명수 씨를 괴롭히고 있고, 누가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지를 알려주셔야 명수 씨의 상처를 치료해드릴 수 있어요."
"성은이...성은이가... 날 버리고 떠났어요... 심장병이래요... 우리를 방해했던 모든 걸 다 없애고 이제서야 사랑하나 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걸 운명은 싫어했나봐요... 성은이 심장에 구멍이 났대... 그런데 끝까지 날 여기에 살려두고 갔어요...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 왜 아무도 안 도와주는거야... 성은아, 내 사랑아. 누가 제발 우리 성은이 좀 돌려주세요! 내 심장을 떼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할 수 있어요..."
성종은 훌쩍거리며 말하는 명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는 이내 조심스레 쓰다듬어줬다. 벌써 상담사 일을 시작한지 5년이 지났다.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환자들의 안정을 짧은 시간 내에 되찾는데 성공했던 성종이었기 때문에 이번 손님 역시 한 시간 내로 상담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오랫동안 사람들 봐오는 직업이라서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사람이란 알다가도 모를 존재들이야.'
벌써 두 시간이 지났음에도 명수는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짐승처럼 울부짖기까지 했다. 심장병으로 죽은 전 여자친구가 그리도 그리울까. 내추럴 본 솔로인 성종은 사랑은 하염없이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서야 사람을 저렇게 반 미친 놈으로 만들 리 없어. 하긴, 저런 사람들이 있어야 나도 굶어죽지는 않지... 하며 왜곡된 눈으로 무너진 모래성 같은 비극적인 사랑의 결과물만 봐왔던 성종에게, 사랑은 너무나도 어려운 존재였다. 성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랍에서 오래된 작은 종이상자 한 개를 꺼냈다. 함부로 쓰고 싶지는 않은데...
"명수 씨, 운명을 믿으세요?"
"흐흑...네... 저랑 성은이는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운명이에요. 성은이가 보고 싶어요..."
"만약에 명수 씨가 운명을 믿는다면, 명수 씨가 성은 씨와 만날 수 있는지... 운명을 알고 싶으세요?"
"네...?"
"이 카드들은, 타로 카드라고 해요. 운명을 믿는 자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주는, 신기롭다면 신기하고 요상하다 하면 요상하다 할 수 있는 물건이죠. 정말로 명수 씨가 운명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카드들이 명수씨의 질문에 대답할 거에요."
"아... 전 운명이 있다고 믿어요. 저랑 성은이가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그 동안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징징거리며 성종을 귀찮게 한 사람들에게 성종은 최후의 보루로 말 대신 타로점을 봐 주었고, 다들 하나같이 제 정신이 아니었던 탓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낱 종이 몇 장에 자신의 운명을 수긍해버리는 사람들을 보며 성종은 다시 되뇌었다.
'그래, 운명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거야. 운명은 저런 나약한 사람들이나 믿는 거지.'
성종은 카드를 펼친 뒤 명수의 말에 따라 세 장을 골랐다. 이런 배열은 나온 적이 없었는데…
"심적으로 많이 고통스러워 하셨네요. 지금 당장은 운명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될 텐데 아마 가까운 미래에는 다시 만날...!"
"훗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나오나요?"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상담을 해 오면서 헤어진 연인과는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점을 봐준 사람은 손에 꼽히지만 그래도 몇 있었는데, 헤어진 '저승으로 간' 여자친구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 혹시 자살하려고 하나...? 어떻게 다시 만나지?
"자살할 생각은 꿈에도 마세요."
"네?"
"죽지 말라고요. 건강하게 있어야 성은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거 아니에요. 밥도 잘 먹고, 생글생글 웃어도 보고, 클럽에도 가 보고. 이렇게 잘 생긴 얼굴을 눈물로 썩히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조금 더 행복해지세요. 명수 씨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요."
"아... 감사합니다."
"이건 향기나는 초인데, 그냥 선물로 드릴게요. 성은 씨가 생각날 때 마다, 이 향기를 맡으면 조금은 나아지실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명수는 많이 진정된 듯 보였다. 성종도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타로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단 세 장의 종이 만으로도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진실을 알려주는 성서인 양 사람들은…
“그런데 혹시 보일러 트셨어요? 이제 막 봄인데 참 덥네요. 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네?"
아까부터 어렴풋이 느끼던 것이었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덥다고 느낀 성종이었다. 명수가 하도 난동을 부려서 진정시키느라 더운줄 알았는데, 벽을 만져보니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체난방이라도 돌아가는건가. 하며 경비실에 찾아가려고 문을 연 성종은 화들짝 놀랐다.
"으악 깜짝이야!"
복도는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상담해주느라 듣지 못했던 가스 터지는 듯한 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왔고, 그 때마다 복도 안 화기는 더욱 더 세졌다.
"명수 씨..."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고 꽤 괜찮은 해결책을 제시해왔던 성종은, 자신의 눈 앞에 닥친 위기에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몰랐다.
"왜요?"
명수는 지금 이 상황을 잘 모르는 듯 가운데 있던 카드를 집어 들었다. 심하게 꼬부라진 영어로 써져 있어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듯 명수는 그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우리 지금 갇혔어요..."
울먹거리는 듯한 성종의 말에 부산을 떨던 명수는 성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밖에 불이 났는데, 못 나갈 것 같아요..."
"하나, 둘, 셋!"
명수와 성종이 힘을 합쳐 창문을 열었지만 화기에 이음새 부분이 조금 녹았는지 창문은 애석하게도 열리지 않았다. 성종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명수가 의자를 가져와서 그대로 창문을 향해 던져버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서지고, 이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는 향긋한 봄바람이 명수와 성종이 있는 방을 한 바퀴 휘감았다. 명수는 밑을 내려다 보았고, 이내 소방차가 저 멀리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이 건물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서 여기까지 오려면 기본 5분인데, 5분 후면 불은 이미 저 현관문을 뚫고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무작정 창문으로 뛰어내리기에는 성종의 사무실은 너무 높았다. 16층. 16층이었다. 여기 머무른다면 타 죽을 것이요, 만약 뛰어내린다면 몸이 부서져 죽을 것이다.
"성종 씨. 저 믿으세요?"
"네?"
"저 믿냐고요."
다짜고짜 도를 믿냐고 물어보는 사람마냥 자신을 믿냐고 물어보는 명수의 말에 성종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아왔던 성종의 인생이, 어긋나버린 톱니바퀴 마냥 겉잡을 수 없이 어긋나고 있었다.
"결정하셔야 해요. 여기 남거나. 아니면 뛰어내리거나. 둘 다 보장 못할 공수표죠. 어떻게 할까요?"
하루종일 작은 공간 안에서 갇혀 살던 성종에게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란 너무나도 버거운 행동이었다.
"저는... 음...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빨리 타로를 한 번 더 보죠."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한시가 급한 와중에 타로를 보자고 한다. 아까 전까지는 이 사람은 그냥 나아진 척 한 거고, 사실은 아직 반 미쳐있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뛰어내리는 것이 좋을까요, 건물에 머무르는 게 좋을까요?"
명수는 아예 성종의 얼굴 앞에 타로 상자를 갖다 대면서 질문하였다. 인생을 반 정도는 포기한 듯한 표정의 성종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상자 안의 카드를 꺼냈다. 그가 반달 모양으로 카드를 펼치자 명수는 재빨리 카드를 세 장 골라서 앞면으로 뒤집었다.
"이거... 무슨 뜻이에요...?"
성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달, 바보, 그리고 탑.
"안돼요... 우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성종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흑... 이렇게 죽기는 싫어... 싫어요..."
"죽기 싫으세요?"
"...진짜 아까부터 무슨 소리 하시는거에요. 저는 이렇게 심각한데!"
"그러니까, 죽기 싫으시면 저 믿으시라고요. 저한테 맡기시라고요."
그 누가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라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사람이 반 미치면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저리 의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명수는 비장한 표정으로 울고 있는 성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악! 뭐하는 짓이에요!"
성종을 두 팔로 안았다.
명수는 품에 안긴 성종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믿냐고요."
"..."
성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이렇게 해서 제가... 살았던 적이 있어요."
"..."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저 믿죠?"
명수의 말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성종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복도에서 느껴지는 매서운 화기와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가벼운 봄바람이 아이러니한 조화를 이루며 명수와 성종의 볼을 스치웠다. 성종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봄이구나... 또 다시 봄이 왔구나.'
명수는 성종을 안은 채 굳은 표정으로 깨진 창문을 응시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이내 다시 눈을 부릅떴다.
"아아아아악!"
바람에 흩날려오는 벚꽃잎과 함께, 그렇게 두 청년은 건물 밖으로 힘없이 추락해갔다.
***
중엽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다시 뚫어져라 명단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을 찡그렸다가 비볐다가 오만 성질을 다 내기 시작했다.
"아니 왜 내가 이렇게 숫자를 못 세지? 하나, 둘, 셋, 넷. 그런데 명단에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분명히 여섯 명 이어야 하는데 왜 네 명 인거지? 장동우 하고 이호원. 이 두 사람이 빠졌단 말야... 주인님이 잘못 명단을 보내셨나? 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나저나 이 이름은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이름인데... "
우현, 성열, 명수, 그리고 성종은 아직 서로에게 말을 거는게 어색했던지라 계속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때, 저 멀리 수평선 끝에서 두 명의 남자가 각각 자신의 몸집만한 캐리어를 들고 중엽 일행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중엽은 재빨리 품 안에서 조그마한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아니...! 저 아이가 어떻게 또..."
망원경이 없었던 나머지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던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가까이 왔었을 때야 비로소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성열이었다.
"근데 말이에요 안내자님..."
머리 속이 복잡해진 중엽은 성열의 말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
"우리 이번에 남자들만 모이는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