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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어] 설레임 증폭장치

  






  

나는 너의 지난 십 년 간의 시간을 알지 못 했다.

 




자세히는 알지 못 했다. 지난 십 년 동안, 너와 아예 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지만 – 그래도 너의 곁에 항상 있어준 것은 아니었고, 또 연락도 ‘간간이’ 했던 탓에. 자세히는 알지 못 했다. 그냥 십 년 간에 너와 나의 인연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이지, 너와 십여 년간 계속 만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간간이 네 생각은 했어. 지하철에서, 힘들어하는 장애우를 볼 때 - 모르는 사이래도,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줘도 될까요?’라며 정중하게 말해 도움을 줬었지. 너 덕에 많이 달라진 거다. 참, 너와 만난 건 단순히 네 34년 생활중 2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나에게 많은 인상을 남겼다.

 

 

어린아이를 보면 네가 떠오른다. 또 장애우를 봐도, 사탕을 물고 있는 사람들을 봐도 네가 떠오른다. 너와 한창 연락을 안 할 때에, 지나가다가 내가 어떤 한 남자를 봤는데, 그 남자가 사탕을 너무 맛있게 먹고 있기에. 아, 너도 지금 즈음이면 저런 모습일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참 이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금방 생각을 접었지만. 그 때 나는 애인도 있었고, 너와 나의 관계는 단순히 ‘사제관계’ 그 이상, 또는 이하로 정하기도 싫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네가 애인이 될 만한 상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냥 소중한 제자 – 귀여운 제자 – 어디즈음에 잘 지내고 있을 제자?.

 

 

 

너를 만난 건 정확히 12년 전이었다.

 



 

돈이 없었다. 갓 군대에서 제대한 그날 겨울의 나는, 겨울에 지하철에서 자면 입 돌아가 죽는다던데. 차라리 집 안에 설설 기어들어가는 것보다는 지하철에서 입 돌아가 죽는 게 나았다. 사실 집 안에 설설 기어들어갈 돈도 없었다. 무작정 무리하게 한국으로 바로 입국한 탓에, 러시아로 돌아갈 돈이 없었어.


 

그렇다면 왜 한국으로 왔는가? 단순한 ‘현실도피’ 였었다. 러시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많은 사건들에 지쳐 아무도 모르는 한국으로 가고 싶다 – 해서 온 ‘현실도피’. 나도 참 대책 없었다. 대책 없고, 병신 같았다.

 


일자리도 없고, 또 돈도 없다. 한국인도 아니다. 아르바이트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이런 내가 도대체 어디에서 일을 할까. 어디에서 돈을 벌까.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참 그때는 정말 내가 한심해 보이고, 초라해 보였다. 현실도피를 하기 위해 가깝지만 먼 나라로 왔건만. 평소에 멀게만 느껴졌던 나의 어리석음이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다.

 


한 번도 내 선택에 관해서 후회를 한 적은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건 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실에 벽 앞에 크게 부딪힌 그날의 나, 스물두 살의 청년은 그제야 ‘선택을 되돌아보는 법’을 배웠다. 그때 이후로부터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것 같아.라는 소리를 주변인들에게 들은 것 같다. - 참, 나는 뭘 하든 지나친 사람인가 보다.

 


여튼 그때는 눈에 뵈는 게 없이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았었다. 알바xx, 알바x, ‘알바’ 라고 쓰여있는 사이트란 사이트는 다 뒤져보았다. 그 결과 ‘외국인 우대, 막노동’ 딱 하나, 그 하나를 찾았었다.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연락을 했다. 바로 내일부터 나오면 된다고 사람 좋아 보이는 목소리의 아저씨가 걸걸하게 말씀해 오시기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끊었다. 그때 사실 ‘ㅂ’ 받침 발음이 꽤 안돼서 애먹었을 때였는데. 아저씨는 ‘예에 감사해요 - ’라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더라. 뭔가 좋은 일자리 같아 보였다. 대단한 착각이었었지만.

 




일자리로 가는 길에 한 광고지를 보았다. ‘영어권 선생님 구함, 12살짜리 아이 과외’ 라고 쓰여있는. 사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는데, 12살 짜리라니, 나랑 딱 열 살 차이나는 그 아이의 나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그걸 꾸깃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서는 일자리 – 막노동 현장에 들어갔다. 사실 주머니에 넣고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 막노동이란 것은 너무 만만치가 않아서.

 



처음 20분은 견딜만했다. 처음 20분만 그랬다. 점점 온몸에 쑤셔오지 않는 곳이 없고, 한 달 정도 하면 실려간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며 알게 되더라. 끝나고 삼겹살이 그렇게 당긴다던데, 돈을 받을 힘도 없어서 주머니에 그 광고지를 까맣게 잊은 채 쑤셔 넣고서는 바로 정육점으로 달려갔다. 그때 한국 맥주도 처음 마셨다. 물론 맛은 없었다. 맹물을 먹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막노동을 그만뒀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처음 같지 않았다. 굳어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고, 또 미안했기에. 아저씨가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인 채 무작정 사과를 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이해해 주시는 것 같더라. ‘백인 청년이 우리나라에서 고생하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아저씨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야장천 술을 마셨다. 대학교 학비에 쓸 돈에 그만 손을 대고야 만 것이었다. 그냥 부모님에게 욕먹을 각오로 그랬었다. 어차피 전화로 잔소리만 들으면 될거야, 한국에 오시겠어?라는 생각으로. 마치 백수처럼 그렇게 술만 마셔대었을 것이다. 그때 친해진 옆집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벌써 십 년이나 지났네. ‘아직도 건강하시겠지 - ’ 무의식적으로 되뇐 이 말이, 뭔가 ‘바람’같아서 싫다. ‘아직까지 건강하실거야.’

 



 

그날도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재킷에다가 그만 토를 해 버렸다. 꼬질꼬질한 재킷이라 괜찮았다. 그래도 버리기 전에 우선 토사물은 치워야 할 것 같아서, 어지러운 머리를 이끌고 재킷에 휴지를 문질러 깨끗하게 만들려는데. 그때 언뜻 종이를 보았다. 외국인 선생님을 구한다는 그 종이.

 




[러시아인은 괜찮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창피한 문자는 없다. 다짜고짜 – 러시아인은 괜찮아요? 라니. ‘과외 구한다고 하시기에 실례지만 문자를 드려봐요, 제가 러시아인인데. 혹시나 괜찮을까요?’라고. 지금 다시 쓰라면 이렇게 구구절절이 잘 쓸 수 있는데. 마음속이 허하니, 머릿속도 띨빵이처럼 허 해진 것 같았다.

 

얼마 안가 바로 답장이 왔다.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속물 같아 보이지만 바로 가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 내 PR을 해대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쪽도 나를 꺼리는 분위기는 아닌 듯 보이더라. 아무래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한국에 실력이 도움이 된 듯 보였다. 발음은 안 좋았지만. ‘문자라서 다행이야’. 그때 가슴을 쓸면서 그렇게 되뇌었었다.

 

첫 과외 날짜가 잡혔다. 모든 게 다 잘 풀릴 것 같던 날이었다. 평소 예쁘다고 눈여겨봤던 선배와 한 조가 되고, 아 내게도 봄이 찾아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이름은 ‘윤선’ 이었다. 윤선. 디베이트 수업의 같은 한 조가 되어 너무 기뻤어, 윤선 선배. 토론을 하니 그만큼 이야기를 많이 하고, 또 더 친해지고. 그 이후로 로맨틱한 일들이 절로 상상이 가 웃음이 실실 나왔다. 바보같이.

 



그걸 본 건지 친구들이 나를 놀렸었다. 그게 그렇게도 좋으냐며. 아무래도 윤선 선배를 좋아하는 것을, 윤선 선배 빼고 다 알고 있었나 보다. 별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이 귀띔이라도 해 주면 사이가 더 발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선배는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남자친구 없다고 했다. 그 사실에 뭐가 그렇게 기뻤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과외하는 장소로 아이처럼 뜀박질 쳤다. 늦지도 않았는데. 덕분에 과외 시간보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너무 일찍 들어가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근처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먹을까. 했지만 어쩌면 ‘내가 이만큼 성실한 사람이다!’라는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것 같기도 해, 망설임도 잠시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는 문자에서 풍기는듯한 인자한 말투 그래도 선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계셨다.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힘차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머니는 아이를 잘 부탁한다며 내게 네가 있는 방을 가리켜 보였다. ‘왜 나와서 인사를 안 하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공부를 하고 있거나 – 혹은 다른 것을 하고 있거나 – 경우의 수는 많기에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인사를 한 후에 집 안으로 들어섰었다.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눈 안에 들어오는 편안한 집안의 광경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집 안은 참 깨끗했다. 온화하고. 따듯한 분위기였다.

 

 

너무 둘러보면 실례가 되는 것 같아, 그냥 고개만 두리번 거리고서는 바로 네 방 문을 달칵 열었다. 사실 문을 열기 전에 노크를 해야 하는게 예의라고 들었는데. 굳이 그런 걸 지키지 않았던 마인드가 버릇이 되어버렸다.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파란 벽지였다. 어느 남자아이들과 같은 파란 벽지, 그리고 하늘색 침대와 흰색 탁자. 그 앞에 공손히 앉아있는 너. 너는 어린아이답게 크고 똘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너는 곧 허리를 접어왔다. 사실 인사를 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때 네가 내개 한 행동은 ‘허리를 접다’ 라는 표현이 맞았다.

 

 

“성새이 앙녀하세여!”

 

 

 

말이 상당히 서툴렀다. 외국인이라 그런 줄 알았다.

 

나도 안녕.이라 인사한 후에 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 이상함을 느끼지 못 했다. 너는 어느 아이들과 같았고, 나도 너를 어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대했다. 우선 너와 친해져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네가 블레어야?’ 라는 질문을 던지자, 너는 고개를 갸웃여왔다. 그런 너의 행동에, 블레어가 아닌가. 잠시 당황스러웠다.

 

 

 

“성새이 안드여요”

 



 

너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 했다. 뭐라고? 라 너에게 되물으니, 너는 답답한 표정을 짓고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펜을 들고 오더라. 그리고 열두 살 어린아이, 그것도 딱 남자아이에 걸맞은 글씨를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네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말보다 나았다.

 

 



[선생님 저 잘 안 들려요]


 

 

일부러 다시 과장되게, ‘네가 블레어니?’라고 소리치며 물었다. 너는 빤히 내 입모양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라.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너에게 ‘잠시만’이라고 크게 이야기를 해 준 후에 어제 너의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창을 살펴보았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한 대화치고 나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잘만 했더라, 나, 자신이 대단했다. 딱 그렇게 올려다 보기 만 했을까, 한 반 정도 올라간 후에 너희 어머니가 했었던 한 문단이 눈에 띄어왔다. [귀가 안 들리는 아이 여서요] 라는 문장이.

 

 

나도 참 어떻게 이런 문장을 안 보고 넘길 수가 있을지. 다시 너를 한번 쳐다보고, 그 문장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복하며 바라보았다.

 

 

너는 핸드폰만 만지는 내 행동이 지친 건지, ‘성새이 수엄! 수엄!’ 이라며 책상을 팡팡 쳐왔다. 사실 그 꼴이 조금 귀여웠다. 너는 'ㅂ'발음이 안 돼서 하는 말들이 애교스럽게 들려오더라. 너도 나처럼 ‘ㅂ’ 발음이 잘 안됐었는데, 난 왜 그럴까. 우선 오늘 수업은 없다고. 녀석의 종합장에 써 주니 녀석은 ‘그러면 뭘 배울 건데요?’라며 그 밑에 글씨를 써 왔다. ‘원래 있잖아,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친해지기부터 해야지. 바로 공부부터 하면 재미 없어.’

 

 

 

 

[그러면 선생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러시아’라고 쓰니 녀석은 그 바로 밑에 ‘Good!’이라며 짧은 영어와 함께 귀여운 이모티콘을 그려왔다. 자기는 호주 사람이라면서. - 응, 알고 있었다. 너희 어머니가 아이가 고급 문법엔 서투르니 한국어와 영어 섞어가며 수업해달라고 그러시더라. 사실 나도 한국어 고급 문법에는 서툰데. 무작정 알았다고 하고 너의 수업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보니 디즈니 영화라고 답해왔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디즈니 영화는 그냥 단순히 재밌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의미가 하나하나 담겨있어서 여운이 남는다는 말을 – 하려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한국어 실력이 서툴다 보니까 다 표현을 하기엔 무리가 있나 보다. 그래도 열두 살 치고는 생각이 깊었다. 나는 열두 살 때, 레슬링밖에 안 했는데.

 

 

좋아하는 음악을 물어보니 너는 노래를 흥얼대왔다. 갑자기 ‘머리무터 말긑가지 사랑슬어어 - ’라며 몸을 흔들더니, ‘끌여오겠지 – 발거름은 내게로 - ’ 라며 이번엔 조금 좋은 발음으로 남자 아이돌 노래를 하며 열창을 했다. 귀여웠다. 마냥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지더라. 열두 살 짜리 아이가 서툰 발음으로 춤을 추니까. - 귀여웠다.

 

어떻게 말을 그렇게 잘 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뒤늦게 – 아, 실례인가. 하고 아차 했지만 읽고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보다. 다행이었다. 너는 이어 그것을 빤히 바라보더니, 무얼 생각하는 듯 음 - 하는 소리를 내다, 곧 펜을 쥐고 끄적끄적 무얼 써 내려갔는데, 중간중간에 힐끗 눈을 내리깔아 읽어보니, ‘아 -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어머니가 알려주셨다더라. 주로 대화는 사람들의 입모양을 보고한단다.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어머니가 말하는 법을 알려주실 때는, ‘가’ 같은 경우는 가글을 했고. ‘파’같은 경우는 휴지를 파 – 하고 불었고. ‘호’같은 경우는 촛불을 끄는 방식으로 배웠단다. 그 외에도 자신의 입에 손을 대어 그 입술이 움직이는 느낌을 직접 느끼게 했다던데,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셨다. 아이만을 향한 사랑으로는 한계가 있는 점도 몇몇 있을 텐데, 그걸 핑계로 돌리지 않고 이 아이를 끝까지 포용하시고 알려주신 그분이 무언가 높아 보였다.

 


 

[선생님, 대학 가면 사람들이 다 애인 생긴다네요!]

[구라야]


 

 

녀석이 푸하하, 웃어왔다. 내가 예민한 건지, 그 웃음이 ‘아직까지 솔로야?’하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아서, 녀석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 가벼운 꿀밤을 넣어주었다.



 

[선생님은 그러면 애인 있어요?]

[없어]

[좋아하는 사람은요?]

 

 

[있어]

 

 



윤선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은 바로 우와와 - 하며 눈을 반짝여 오기에. 성급히 ‘다음에 오자’ 고 자리에 뜬 후 정말로 다음에 와서 수학을 알려주었다. 까먹지 않고, 그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며 떼를 쓴 블레어였지만, 무시했다. 그냥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애니메이션이나 – 동화이야기 같은.

 

블레어의 나이는 초5였지만, 진도는 초3 수학이었다. 사실 애가 똑똑해 알려주는 것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금방 진도를 나갈 수 있을 것 같더라. 영어 단어도 금방금방 외우고, 머리 하나는 정말 똑똑했다.

 

 



*





 

윤선 선배와 삼일 연속으로 밥을 먹었다. 그리고 금방 나갈 줄 알았던 진도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나가서. 이제 블레어도 초6 수학을 ‘예습’하게 되었다.

 

과외하는 또 다른 학생도 생겼다. 아무래도 소문이 났나 보다. 그래서 이제 돈에 찌들리는 일은 없었고, 그때 이사도 하게 되었다. 그 할아버지와의 이별. 그 할아버지는 ‘빨리 꺼지라’며 떠나가는 나를 한 번도 보시지 않고 허공에 담배만 피우셨다.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 모든 게 즐거웠다.


 

중1 수학 수업을 마치고 달력을 보았다. ‘새삼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구나’라는 할아버지 같은 소리가 나왔다. 블레어와의 수업이 엊그제 같은데, 초 6수학을 예습한다고 기뻐하던 게 어제 같은데. 이제 벌써 중1 수학이라니. - 블레어에게 문제집은 이걸 사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뭔가 그날은 블레어의 표정이 애매해서. 기분이 좋지 않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알고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날, 블레어의 부모님은 내게 돈을 주면서. ‘과외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아요’라며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아입니다 –라는 사투리가 나오더라. 러시아 사람이 사투리를 쓰는 게 웃겼는지 너의 부모님은 웃음을 터트려와, 고개를 도리질 친 다음에 그것을 받아 가방 속에 넣고 성급히 그 자리에 떴다. 뭔가 그곳에 오래 있으면 너에게도 실례이고, 또 내 마음도 싱숭생숭한 게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아무래도 넌 첫 제자였으니까 그랬나 보다. 


그날 나는, 막노동 때 이후로 먹지 않았던 맥주를 마셨다.

 

 

얼마 후, 윤선 선배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해왔다. 친한 동생이니 말해주는 거라고 웃음 지었지만, 이 주일 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과 전체로 소문이 났다. - 그것 때문인지, 나는 졸지에 ‘불쌍한 남자’ 가 되었지. 윤선 선배가 그렇게 꼬리를 쳐 썸을 타는 듯 보였는데, 결국 일리야만 놀아난 거라고. 윤선 선배와의 사이가 그때문에 어색해졌다. 


뭐, 그냥 잊으려고 노력했다. 윤선 선배 때문에 거절했던 수빈이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애인을 사귀려고 그렇게 노력했다. 그 덕에, 두어 달 후. ‘세은’ 이라는 신입생 후배를 사귀게 되었다. 이 아이는 내가 첫사랑이라고 말해오더라. 부담스러웠지만, 뭔가 좋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첫사랑. 첫사랑이라 – 그 와중에 윤선 선배 생각이 언뜻 났는데. 딱히 두근거리지도 않고, 무감각했다. 세은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때 오랜만에 블레어에게 문자가 왔었다. 사실 번호만 봐서는 블레어인지는 몰랐는데, [선생님 저 블레어에요]라며 새로운 번호로 내게 문자가 왔더라. 아무래도 너희 부모님이 내 번호를 알려준 듯 보였다.



 

[반갑다] 라고 답장했다. 그리고 세은이와 데이트를 즐겼다.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너는 중간중간 모르는 단어들이 있을 때마다 문자메시지로 사진을 찍어 내게 보냈다. 거리낌 없이 문제를 풀어주고, 또 그 풀이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 너에게 찍어 다시 보내주었다. 세은이가 ‘누구야?’라며 질투하는 듯 보였는데, 이리저리 설명해주니 ‘오빠 착하네’ 라고 칭찬해주더라. 칭찬받았다. 나.

 

중학교 교복을 갈아입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너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사진을 내게 보내주었다. 마지막 문자를 확인하니 세 달 전이었다. 시간 참 빠르다.를 느끼고 [옷태 죽이네] 라며 녀석에게 보내주니. ‘남고로 갔어요ㅜㅜ’ 라며 슬퍼하더라. 바로 비웃어주었다.

 



 

[야 그래도 삼년 금방간다, 조금만 참아라]

[외롭단말이에요!ㅠ3ㅠ. 맞아 선생님 우리 영화보러 갈래요?]




 

 

문맥에 맞지 않은 말이었다. 갑자기 대화 주제가 돌려졌다. 뜬금없이 영화라니 – 입모양으로 보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차마 답장하기가 애매했다.

 




 

[나 외국영화는 잘 봐요. 아바타 보러 가요.]




 

 

그런데 내 걱정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너는 곧이어 문자를 하나 더 보내와서, 흐음 그런가.라는 감탄사와 함께 - 약속이 있었나, 고민만 하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니. 그럼 가자며 너는 약속을 몰아붙였다.

 



 

첫 번째 약속이었다. 너와 영화를 보는.



 

세은이가 그날 놀이동산에 가자며 내게 부탁을 해 왔다. 순간 고민하다가 – 미안하다고, 선약이 있다고 거절하니 조금 서운한 기색을 보이더라. 그러면서 누구와의 약속이냐고 묻기에, 블레어와의 약속이라 대답해주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좋은 옷 입고 가라며 옷 쇼핑까지 같이 갔다. 세은이의 옷만 잔뜩 샀지만. 대충 이럴 거란 거, 알고 있었다.

 

그 날 유난히도 일찍 일어났다. 원래 약속 같은 거 금전적인 문제가 얽히지 않는 이상 정각에 오거나 삼분 정도 늦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날은 십분 정도 일찍 가서 너를 기다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눈이 일찍 떠졌다. 문득, 십분 일찍 나온 나를 보고. 그때, 과외할 때 생각이 많이 났었다.

 

너는 왜인지 잔뜩 꾸미고 나왔었다. 뭘 그렇게 멋있게 차려입고 왔냐고 너를 쓰윽, 훑어봤는데. 너, 많이 커 있다는 것을 정말 문득 느꼈다. 확실히 열두 살 때랑은 다르더라. 젖살도 조금 빠지고, 뭔가 더. 외국인스러워졌어 너.

 

 

이런 말을 해 주니, 외국인스러운 건 뭐냐며 너는 표정을 찡그려왔다. 왠지 삐친 것 같기도 해, 바로 영화를 바로 보여주러 녀석을 영화관 안으로 이끌었다. 영화비와 팝콘은 모두 내가 다 샀다. 당연히 더치페이 아니었냐고 너는 당황스러워했지만. 무슨 더치페이야 더치페이는. 이런 건 어른이 내는 거다. 라 멋있는 대사를 해 주니. 그런 게 뭐냐고 꺄르르 웃어오더라.

 

너는 그날 밤, 이별할 때에. 선생니 – 까지 말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알겠다. 는 것은, 네 발음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것. 열두 살의 너와 비교도 안되게 좋아졌다는 것. 그것이다.




 

이후로부터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벌써 몇 년째 백수야, 취업 준비를 하러 정말 이리저리 다 돌아다녔다. 세은이도 역시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 했다. 일 년, 이 년, 정말 어린아이가 ‘하나, 둘!’ 숫자 세듯 재빠르게 지나갔다.

 

이 년 동안 블레어와 대화는 잘 하지 않았다. 세은이를 만날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블레어와 만날 시간은 더 없었다. 블레어가 올해 몇 살이 되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다.

 

시간은 아직도 걷고 있는 나에 비해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너무 빨랐다.



 

 

JLPT 1급을 땄다. 빨리 따는 것은 어렵다는데 야동이 도움이 될 줄이야 – 꿈에도 몰랐다. 세은이에게 자랑하니 세은이는 답이 없었다. 곧 진동이 울렸는데, 문자가 온 상대는 세은이가 아닌 블레어였다. 오랜만에 보는 그 세 글자 이름.

 

 

 


[선생님 저 대학교 합격했어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1급을 딴 것보다, 그게 더 가슴이 벅차올라 기뻐왔다.

 

바로 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전화기 버튼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떼었다. 하지만 그때 진동이 한번 더 울려서 그러지 못하고, 다른 문자를 확인했다. 상대방은 다름 아닌 세은이었다. 아무래도 1급을 축하하려나 보다. 별생각 없이 클릭했다.



 

 

[우리 헤어져]


 

 

[나 시험 합격했다~]라는 내 문자와는 참 맞지 않는. 어찌 보면 웃기게도 보일 흐름이었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멎었다. 블레어가 자랑스럽게 대학교 합격했다며 좋아하던 모습이 잊혀만 갔다. 왜?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왜, 꼭 왜. 하지만 전화는 걸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침대에 털썩 앉아서 한숨만 쉬었다. 우리가 사귄 지, 벌써 몇 년이 되었을까.

 

장수 커플이었다. 그 긴 연애 시간 동안, 네가 지쳤던 거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내가 백수라서 그런 것일까? 나는 너에게 묻지 않았다. 네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한 마디도 먼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냥, 이유는 ‘그냥’이다. 그냥 -

 

허탈했다. 그 순간에 진동이 한번 더 울리기에, 이젠 또 어떤 변명을 하려고 – 지친 기색을 잔뜩 내보이며 문자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세은이는 아니었다. 블레어였다. 사진까지 첨부하며 보냈는지, 그것을 로딩하는 대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 대학교! 대학교 합격증 받으려 한번 와 봤어요! 어때요?!]

 

 

그리고. 성숙해진 네 모습. 몰라보게 달라진 네 모습과 네 미소가, 찬란한 너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해 얼굴이 붉어졌다.

 

 

 

 

 

*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성숙해진 너의 모습이 자꾸 잔상에 남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네가 너무 신경 쓰인다. 세은이랑 헤어졌다고 벌써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장난스럽게, 그렇게 생각해본 것뿐인데 웃음이 나오더라. 왜인진 나도 모르겠다.

 

너를 만나기로 했다. 널 만나면 무슨 해답이라도 나올 것 같아서.

 

너는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해주었다. 네 사진을 본 이후로 내 마음이 싱숭생숭해, 그것도 물어볼 겸 널 부른 거였는데. 아직까지 넌 ‘착한학생’ 인가 싶다. 아니면 내 말만 유난히 잘 듣는 걸까.

 

그날도 약속시간에 십 분 일찍 나갔다.


 

널 만날 때만 그런다. 유난히 널 만날 때만 십 일 분도, 또 구분도 아닌 정확히 십 분 일찍 나가게 된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난 너를 만나러 나갔다. 그런데 그날은 너도 십 분 일찍 나와있었다. 나보다 더 빨리 나와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너는 수첩에다가 쓱쓱, [선생님이 항상 일찍 나오니까. 십오분 일찍 나와봤어요] 라 적더라. 단순히 너랑 만난 것은 세 번 밖에 안되었는데, 넌 벌써 나의 패턴을 완벽히도 꿰었다.

 

너와 걷는 내내 느낌이 이상했다. 나도 모르겠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그리고 같이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확실히 전에 와는 느낌이 달랐다. 너와 야식도 먹었다. 어느새 너랑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다니. 느낌이 이상하더라. 너는 눈을 접으며 ‘선생니, 건배에 - ’ 하며 애교스럽게 말꼬리를 늘여왔다. 발음이 많이 좋아졌다.

 

 

“으으, 나 영어르, 배웠다니까요.”

 

 

너는 고등학교 때에 고충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영어를 쓰는데, 자신이 원어민인데, 한국 영어가 너무 어렵다 –부터 시작해서. 왜 나는 모태솔로인가!까지. 너는 자기가 모태솔로라고. 이야기할 때 살짝 눈물을 닦더라. 뭔가 네가 애인을 사귀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가서. 너를 위로해주지 못 했다. 그냥 아 그래? 하고 어색하게 웃어주기만.

 



“널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업써요!”


 

 

업써,업써,업써,업써어!! - 너는 발악하듯 그렇게 중얼이고서는 퓨. 한숨을 쉬어대었다. 참 네가 말해도 네가 비참한 건가 보다. 블레어 걱정 마 나도 솔로야. 그렇게 급하게 여자친구는 사귀지 않아도 좋다. 너.

 

 


“조아하는사람 ,이써요 - ”

 


 

그런가, 뭔가 씁쓸해진다. 도대체 왜 내가 씁쓸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나도 연애 고수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윤선 선배, 세은이, 딱 두 번의 사랑만 했단 말이지. 마냥 녀석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을까. 녀석은 눈을 반짝이다가, 무얼 말할 것인지 긍데 – 라며 입을 떼어오더라.

 

너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너와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허공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는데, 참 너를 바라보지 않고 술을 마시길 잘했다.

 

 


“나 선생니 좋아했어요”


 

 

마치 만화처럼, 그대로 뿜어버렸거든.

 


하긴, 어엿한 성인의 고백이었다. 당황해버렸지만. 말도 안 되게 당황했지만, 너도 성인이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다만 내가 너무 당황했을 뿐이었지. 아, 아, 그렇냐고. 어색하게 웃어줬다. 얼굴이 붉어졌다. 귀도 뜨거워지고. 네가 이걸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는데. 눈치도 빠른 너는 그것을 봤나 보다.

 


선생니 귀 빨개졌다 – 하고 너는 네 귀를 만지며 하하호호 웃어왔다. 그 꼴이 귀여우면서도 나 자신이 창피해 술만 벌컥벌컥 들이켜니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는 계속 나를 놀렸다. 선생니 왜 빨개지냐고, 선생니도 나 조와했어? 이렇게. 아. 진짜. 블레어. 차마 대답을 하지 못 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사춘기 소년처럼.

 

 

술을 마신 후에 산책길을 걸었다. 날씨가 좋았다. 네가 계속 나를 놀려대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바람, 햇빛, 그리고 풍경. 삼 박자가 골고루 잘 맞았다. 바람을 맞으니 문득 생각이 들더라. ‘내가 얘를 좋아하는 걸까’라는 생각. 솔직히 지금까지 반응으로 본다면 그런데 괜히 좋아하는 것 같아 –라는 생각을 하며 녀석을 쳐다보면. 어, 어, 진짜, 진짜로 느낌이 이상하다.

 

 

녀석이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걸음을 옮기려고 보였다. 아쉬웠다.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 라고 녀석을 붙잡으려고 하니 어머니가 부른다고 스무 살의 청년은 그렇게 답을 해 왔다. 그래서, 그때 너를 그냥 보내주었다. 너의 뒷모습을 보고 한번 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되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냥 너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났다. 일상생활에 치이다 보니까 그랬다. 너랑은 연락도 잘 하지 못 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너랑 만난 것은 문자도 아닌 지하철 안 인 만큼 – 난 너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게,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마냥 이질감만 들어서.

 

 

지하철에서 너의 얼굴을 보자마자 ‘블레어구나’를 느끼고 시선을 피했다. 일부러 시선을 피했는데, 얼마 안가 네가 내 등을 쳐와서 실패해버렸지만. 너는 선생니 – 하고 내게 크게 인사를 해 왔지. 그때 너의 얼굴을 보고, 솔직히 조금 놀랐다.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네 모습.

 

그러나 아직까지 그 앳된 얼굴을 가지고 있었어. 아 안녕.이라 인사를 한 후 다시 고개를 돌리니 너는 등을 톡톡, 쳐오며 [어디가요?]라는 글씨를 내게 보여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내 입모양을 보려는 듯,  네 눈이 내 답을 바라는 듯 계속 반짝이는 게, 마치 한 마리의 토끼와도 같았는데. 그냥, 그때 네가 입었던 토끼가 그려진 티셔츠와 네가 너무나도 닮아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어쨌든 괜히 그게 또 귀엽고 그래서, 대충 집에 간다고 말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렸어. 너를 완전히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마냥 순수한 토끼에게 여러 가지 생각들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랬다.

 

그런데 넌 또다시 나를 쳐 왔다. 그러더니, [선생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라며 물어오더라.

 

 

당황했다. 아니 잘못한 거는 없는데 –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그때 마침 내가 도착할 정류장에 다 와서, 블레어 미안하지만 갈게.라고 내리려고 하니 블레어도 따라 내리더라. 당황해 녀석을 돌아봤는데 그만 어떤 한 사람에 치여 짐을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블레어도 당황한 건지 짐들을 주워주었다. 창피했다.

 

그리고 짐들을 다 주었을까, 블레어는 다시 그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 글자씩. ‘선생니, 무슨일이있어요?’라 물어왔다. 블레어의 그 눈은 변함이 없었다. 그 한결같음이 예전 같았으면 부러웠을 텐데, 이제는 – 좋았다.

 

 

 


“으, 지하철이라, 사람이 많아서 - ”


 

 

대충 뒷머리를 긁적이며. 네가 못 알아듣길, 네가 예전에 날 좋아한다고 했었잖아.라며 흘리듯 말했는데, 애는 입모양을 봐서 흘리는 말도 소용이 없는지. 네! 하고 대답해왔다. 아 역시 이따 말하는 게 좋겠어. 그냥 나중에 말할까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계단에 올라없는지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 진짜,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 이놈의 얼굴.

 

뇌가 과부하였다. 이미 말은 꺼냈으니 뭐라 해야 할 텐데,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다짜고짜 그, 그게, 있잖아,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인데!라며 떨었을 것이다. 너는 으음? 하며 고개를 갸웃여와서. 모르겠다, 마음과 몸을, 충동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너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토끼처럼 눈을 깜빡거려오는 너에게 큰 입모양으로. 첫날에 너를 가르쳤던 나처럼 그렇게 소리쳤다.

 

 

“사랑해!”

 

 

 

그 후 네가 무슨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맞추었다. 완벽한 범죄였다. 키스를 하는 와중에 황홀감보다, 이대로 잡혀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팔목에 쇠고랑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  입을 맞춘 후에 너는 울었다. 선생니 이제, 이제 사귀는 거냐며 울었다. 발음이 더 알아듣기 힘들어졌었는데,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사귀는 거야 블레어.

 


그때 이야기만 하면 너는 아직도 운다. ‘그때는 정말 꿈만같았다구요’ 라면서 눈물을 글썽거린다. 아직도 그때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 블레어, 네가 널 울리게 할 또 다른 일을 벌였는데. 말야.


 




- 블레어는 약간 다혈질인 듯 보였지만 귀여움으로 다 커버가 되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형 같은 외모에 여자들에게 귀엽다며 인기도 많았다. 가끔씩 까다로운 면도 있고, 차별당하는 것을 무엇보다 끔찍이 싫어한다. 정의로운 사내였고, 귀여운 사내였다. 이런 청년을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겁이 들었다. 그래서 유난히, 이 준비가 빨랐었을지도 모른다.


 

너랑 결혼을 하려고 꽃을 사보았다. 오늘 너에게 프러포즈를 하려고 한다.

 

 

꽃이 향긋하다. 꽃의 종류를 몰라서 대강 플로리스트에게 돈을 쥐여준 후 그녀에게 꽃을 맡겼다. 플로리스트는 여자친구에게 주실 거냐고 물어서 고개를 끄덕이니 좋으시겠어요. 여자친구분은. 이란 뻔한 멘트를 내뱉더라. 뻔한 멘트일지 몰라도 나는 좋았다. 이런 서비스류의 말도 기분이 좋았다.

 



직장을 구했다. ‘너’라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도 생겼다. 올해의 봄은 조금 다를 것이다. 다르게 해 줄게.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주지 않겠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봄날의 향기였다.

 




네이버 웹툰 HO! 를 기반으로 썼어요ㅎㅎ

암호닉분들

증사앙님 블맘 님 Sweet Bomb(스윗밤) 님 카푸치눠님 블루님 레어님 팅커벨님들!
항상 싸랑하고 감사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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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카푸치눠에요! 세상에 작가님... 오늘은 해피엔딩.... 쪽지를 보고 제목을 볼때부터... 브금을 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저의 설레임은 증폭되다못해 터져서 날아갔어욬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 이런ㅠㅠㅠㅠㅠㅠ 저는ㅠㅠㅠㅠㅠㅠ 해피엔딩이ㅠㅠㅠㅠㅠ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줄이야ㅠㅠㅠㅠㅠㅠ 조쿤요. (진지) ㅋㅋㅋㅋㅋ 아 일리야...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래 블레어를 안좋아할수가 없지 아니근데 나이차이가... 나이차이가... 조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어릴때의 블레어도, 점점 커가면서 일리야에게 문자를 보내는 블레어도, 입맞춤을 하고나서 눈물을 보이는 블레어도 너무 귀여워요. 그러니 일리야가 안좋아할수가... (나도 좋아하는데.... 나는 왜 솔로...) 너무 오랜만에 오셨지마뉴ㅠㅠㅠㅠㅠㅠ 저는 신알신 쪽지를 받았을때부터 너무 좋았어여ㅠㅠㅠㅠㅠㅠ 오늘도 잘 읽고 가요 감사합니다 :)
9년 전
카풰라떼
카푸치눠님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해피엔딩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방학시즌때 새드 주구장창 썼었던게 언뜻 기억에 나네요 6_6...커플찢어놓기 좋아하는 싸람..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물론 아예 새드를 안쓰는건 아니지ㅁ...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이차이가...나이차이가....적절하죠!!!!!!!!!!! 그러게여 저도 일리야 좋아하는데...사랑하는데...저도 왜 솔ㄹ.....흑...저도 감사해여!!!!!!!!
9년 전
독자6
일리야는 블레어한테 갔으니.. 남은건 저와 작가님...? (뚜뚜루뚜 뚜뚜루뚜 뚜뚜루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오셨는데 제가 댓글도 1등으로 달아서 기분이 좋아요~ 물론 내일은 월요일이지만~~ 저는 작가님한테 갑니다....! (현실도피) ㅋㅋㅋㅋㅋ아 그리고 브금 뭔지 알수 있을까요?
9년 전
카풰라떼
그럽시다 (라디오를)(튼다)(뚜루루뚜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브금은 Anna Graceman - Can We Figure It Out 입니당!!!!!!!! 후....저의 여ㅈ..(입을다문다) 내일 월요일...제가 애써 잊고있었던 그 사실을 일깨워주셨어요.... 아..내일..월요일.... 아 아니네요 비요일이네요!!ㅎㅎㅎ 카푸치눠님 비요일인것만 생각합시당 우리(찡긋)
9년 전
독자2
일단 여기에 자리부터 깔고 시작할게요. 블레어랑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래도 알콩달콩한 두 사람 보면 보기 좋네요. 제목보고 오늘은 행복하려나 하고 들어왔는데 예.상.적.중 ㅠㅠㅠㅠㅠㅠ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보고 갈게요. 글 안의 일레어처럼 작가님도 행복하세용!
9년 전
카풰라떼
예.상.적.중!!!!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히 감사해여 저도 글 안의 일레어처럼 사랑...사랑...사랑좀 와주었으ㅁ.....(눈물) 감사해여 독자님 싸랑훼여 ♥
9년 전
독자5
저도 맨날 그 생각해요.... (눈물) 이래서 소설 아닐까요 나한테는 없는일이라...!
9년 전
카풰라떼
맞아요 이래서 소설이죠..!!허구니까!!!허구니ㄲ>...!!(입을 틀어막는다)(흐읍)
9년 전
독자7
.... 그래도 우리 웃어여 내일은 비요일이니까... (눙물
9년 전
독자3
헐 저 웹툰 호 엄청좋아해서 읽으면서 호랑 느낌 비슷해서 좋다했었는대ㅜㅜ 이런 금글 감사합니다ㅜㅜ
9년 전
카풰라떼
저도 호 완전좋아해여 호도좋고 원호도좋고 호도좋고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오늘 호 보면서 진짜 와 쓰고싶다 라는게 팍팍ㄱ느껴져서 쓰게됐네여ㅠㅠㅠㅠㅠ독자님 저도 감사해요!!!!!!!!
9년 전
독자4
이야아아아아 저 HO! 진짜 좋아해여!! 일레어 버전 HO! 도 재밌네요!!!! 역시 카풰라떼ㅈ작가님...♥ 싸라해여!!!!!!!
9년 전
카풰라떼
응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호ㅠㅠHO!ㅠㅠㅠㅠㅠㅠㅠ완전좋아해요ㅠㅠㅠㅠ사실 이구역의 호덕이랍니다..호덕!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오늘도 보는내내 막 일레어 쓰고싶다 일레어 으으 쓰고싶다 이러면서 봤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호를 잘 표현할수있을까 걱정되기도 하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히 감사해여 독자님 ...♥ 저도 싸라해여!!!!!!!!!
9년 전
독자8
대박진짜대박너무좋아요글이렇게잘쓰기있기없기???
9년 전
카풰라떼
고마워요 ㅎㅎㅎㅎㅎㅎ이런 반응 싸랑♡♡감사해용 ㅎㅎ
9년 전
독자9
세상에..... 글 전개가 넘 설레요 흡인력있고 와와와 일리야 키스할 때 심쿵사 할 뻔 했읍니다ㅠㅠㅠㅠㅠㅠㅠ 그 오랜 시간 앓았던 블레어에게도 봄이 왔네요 아 해피엔딩 넘 좋아요ㅠㅠㅠㅠ 잘읽엇어요!!!!>_<
9년 전
독자10
Sweet Bomb 아따 스윗 밤이어라잉! 오랜만에요ㅠㅠㅠ 그리고 댓글이 늦었어요ㅠㅠㅠ 시훔기간이라 인티 들어오기가 힘드네요ㅠㅠㅜ 힐링힐링하고 가요ㅜㅜㅜ 저도 Ho! 보는데! 해피엔딩.. (흐뭇) 일레어들 얼른 결혼하라 그래요ㅠㅜㅜㅜ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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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L을 만난 건 내 연애 역사 중 최고의 오점이다. 그때의 나는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줘본 적도 없는 모태솔로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쩌다 나와 L은 커피를 한두 잔 같이 마셨고 무심코 던진 L의..
by 한도윤
나는 매일매일 이직을 꿈꿨다. 꿈꾸는 이유는 단순했다. 현재 내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환경의 변화를 꾀하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나는 2년 전 중견 건축사사무소에서 프리랜서의 꿈을 안고 퇴사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터지면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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