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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별모양곰돌이

 

 

붓과 건반의 교향곡

 

 

1.

 

 

'서번트 증후군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도 할 만큼 자폐증 환자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식 의학 명칭은 이디엇 신드롬이죠. 뭐, 일종의 병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공감각, 예술, 기억력 여러 가지 방면에서 일어납니다.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레인맨이라고 아세요? 아... 보셨군요. 초월적인 암기능력을 가졌죠. 그것도 일종의 서번트 증후군입니다. 자폐증 환자 2.000 명 중 1명꼴로 나타나고 전 세계적으로는 약 300명이 있죠. 동우의 경우도 같습니다. 이디엇 신드롬이에요. 동우의 아이큐는 65. 하지만 이 아이는 그림실력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이 있는 것 같네요. 이 아이는 천재입니다. 그림천재요. 하지만 자폐증 환자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돼요. 이 아이는 자신만의 공간에 사는 아이라는 것을요.'

의사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막내아들이 자폐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들을 포기할 순 없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사랑을 주고, 더 아껴주고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비록 아이가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지 않고, 인사하지 않으며, 자기만의 공간에서 있다 할지라도. 이 아이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서번트 증후군이든 뭐든. 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욕심은 없다. 하지만 소원이 있다면 '동우야-'하고 불렀을 때 '엄마.' 하고 눈을 마주치며 대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 수 있기를. 그녀는 그것만 바랄 뿐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보다 동우가 옆에서 공룡인형을 들고 꾸벅, 조는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그녀는 아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


"엄마! 아빠!"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딸이 아빠와 엄마에게 나란히 안겼다. 듬직하고 성숙한 첫째 딸은 동우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려하며 안녕- 하고 인사를 했지만 동우는 묘하게 어긋난 시선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동우의 머리를 쓰다듬은 큰 딸은 동우의 신발을 벗겨주고 1층 안방 바로 옆에 있는 동우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반면에 장애가 있는 동우를 싫어하고 질투가 많은 둘째 딸은 아빠에게 업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꽃잎아- 아빠 힘들어."
"싫어. 싫어어-"

그는 동우와 연년생이라 많은 관심을 주지 못한 꽃잎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꽃잎을 업고 다니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는 첫째 딸과 동우가 있을 동우의 방문을 열었다. 동우가 크레파스를 죄다 꺼내들어 자신의 방 한쪽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첫째 딸 풀잎은 그 옆에서 부러진 크레파스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동우 그림 그리니?"
"엄마, 이것 봐. 이거 동우가 그렸다?"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다. 처음 크레파스를 사 주고 동우가 이상하리만큼 집착을 하고 집안 여기저기에 그림을 그리고 다니기에 혹시나 무슨 병이 있나 싶어서 병원에 데리고 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우가 그린 그림을 본 적은 없었다. 의사가 천재라고 했던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동우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보니 한 번에 이해가 갔다. 이게 고작 7살 어린애가 그린 그림이라니...

"엄마. 이게 뭔 거 같아?"
"이건 우리 집 거실이잖아."

놀랍도록 묘사된 거실이 조그마한 스케치북 안에 들어가 있었다. 크레파스 특유의 투박한 색감과 굵은 선이였지만 그것이 거실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풀잎이 다음 장을 넘겨 그림을 보여주었다. 작은 스케치북 안에는 집안 곳곳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동우를 과연 어떻게 키워야 하는 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이 작은 천재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어린 동우의 옆으로 가서 동우가 그리는 크레파스의 끝에서 이어져 나오는 선을 바라보았다. 동우가 바라보는 그 선을 함께 바라보고 있으면 이 아이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동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만 동우는 크레파스로 열심히 벽에 그림만 그리고 있을 뿐 반응이 없다. 꽃잎을 업고 2층에서 내려온 아빠는 동우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등에 업혀있던 꽃잎이 한 마디 거든다.

"뭐야! 왜 벽지에다 낙서 해! 아빠, 동우 혼내 줘."
"낙서 아니고 그림 그리는 거야. 이 바보야."
"뭐? 언니가 더 바보야!"
"어허, 조용. 조용. 동우 그림 그리잖아."

아빠의 작은 호통에 금세 토라진 꽃잎이 아빠의 등을 작은 주먹으로 마구 때리다가 등에서 내려와 쪼르르 2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그 모습을 본 그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큰 딸이 자랑스럽게 그의 앞으로 스케치북 하나를 건넸다.

"동우가 그린거야. 진짜 잘 그렸지?"
"..."

한 동안 스케치북을 펼쳐 보던 그가 스케치북을 접어 큰 딸에게 다시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풀잎엄마.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녀는 동우의 옆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넥타이를 풀고 양복 마이를 벗었다. 티 테이블에 앉은 동우의 부모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동창 중에 미술 하는 녀석이 있는데..."
"하원예술종합대학교에서 교수 한다는 친구요?"
"응... 아무래도 거기는 순수예술만 하는 곳이니까... 동우가 어리지만 거기로 데리고 가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긍정적인 의사를 밝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화를 잠시 전화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이유 없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이가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했지만 선천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듯 동우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폐증 환자. 하지만 그림천재인 서번트 증후군. 괜히 혼란스러운 마음에 저절로 어깨가 처지고 걱정만 산더미같이 쌓인다. 앞이 캄캄하다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그냥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고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싸우기도 하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군대도 가고 결혼을 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신은 동우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괜히 억울하고 동우가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런 그녀의 어깨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올려졌다.

"축복이라고 생각 하자. 우리 동우가 그 만큼 특별한 아이라는 거라고 생각 하자."
"모르겠어. 잘 키울 자신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조용히 그녀의 여린 어깨를 감싸 안아 토닥일 뿐이었다.


**


"어, 엄마! 아빠! 할머니!"

호원이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손님들이 호원의 큰 소리에 놀라 멍하니 식사를 하다 멈추고 가게 주방으로 들어가는 호원을 보았다. 서로 의아해 하며 눈치를 보고 있는 데 호원의 큰 소리가 가게안에 우렁차게 울린다.

"나 하예종 피아노과 수석 입학 했어! 지금 쌤한테 전화 왔는데 4년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데!"
"진짜가?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다! 장하데이-"

주방에서 서로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고 급기야 호원의 어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다. 또래 아이들처럼 다섯 살 때 태권도와 피아노학원을 보냈었다. 호원은 피아노에 엄청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찍부터 그 길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찍이 서울로 이사 오면서 엄청나게 돈이 들고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호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싶었다. 더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더 늦게 문을 닫는 생활을 하면서 호원을 키우며 고생했던 것을 오늘에서야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하이고- 우리 손주가 수석 입학 했어예. 축하해 주이소! 4년 장학생이라 캅니다!"

할머니는 주방을 나가 손님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손님들은 일제히 제 일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보냈다. 호원이 쑥스러워하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자주 오는 단골손님들은 호원에게 용돈까지 쥐어 주며 적극적으로 격려해 주고 축하해 주었다. 호원은 일일이 인사를 꾸벅 하며 마음껏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하예종 수석입학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돌고 친구들이 찾아왔다.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께도, 학교 선생님께도, 친구도 모두 축하한다는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받았다.

늦은 밤. 호원은 침대 대신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돈이 없어 비싼 피아노를 사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쭉 같이 해온 중고 피아노. 차마 정이 들어 버릴 수 없어서 집에서 연습용으로 쳤지만 이제는 아무리 수리를 하고 건반을 갈아도 예쁜 소리가 나질 않았다.

"고마워. 고생 많았어."

피아노를 쓸면서 호원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피아노 치는 것이 즐거워서 배우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곡을 하나 씩 연주하고 모차르트며 쇼팽이며 하이든이며 그들의 곡을 연주할 때 마다 그들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좋았다. 콩쿠르에 나가 상을 받는 것도 하나의 보상이라 생각했을 뿐 호원은 순수하게 피아노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서울대나 외국으로 가라는 선생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하원예술종합대학교를 지원했던 것이다. 호원은 피아노 위에 엎드렸다.

"이제 피아노만 치면서 살 거야. 작곡도 한 번 해 보고... 대학에 들어가면 다른 아이들과 합주도 해 보고 싶어. 또..."

호원은 마음에 묻어 두었던 자신만의 꿈을 피아노에게 이야기 하다 피아노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W.별모양곰돌이

 

 

2.

 

 

"우현이 형, 미대가 어디건물이라고요?"
-아, 멍청아! 되게 무식하게 생긴 건물 있잖아!
"아... 모르겠어요..."

입학하기 이틀 전. 호원은 기숙사 정리도 할 겸 미리 와 있다가 우현에게 연락을 했었다. 고등학교 선배지만 그닥 선배 같지는 않은... 아무튼. 학교에서 또라이로 좀 유명해서 별명도 아.우.또. 아, 우현이가 또? 의 약자였는데... 학교 건물에 이상한 그림이나 조형물이생기거나 하면 모두 우현의 것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아.우.또.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간다!
"알았어요. 빨리 오기나 해요."

유난히 길을 잘 잃어버리는 탓도 있지만 미대건물이 도대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옆에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데 뒤에서 누군가가 확- 끌어안는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쏟아지려는 걸 한 쪽 발로 지탱하고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멍청아. 니 뒤에 있는 게 미대 건물이다."

우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하얀 건물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있다. 꼭 조형물 같은 건물... 설마 저게 미대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 했다. 너무 학교건물같이 생기지 않아서.

"저게 학교 건물이라고요? 헐."
"되게 무식하게 생겼지?"
"예쁜데요?"
"저게 예쁘냐? 무식한거지. 가자."

우현은 페인트가 가득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지금 우현의 동기들은 함께 대형 캔버스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각자 붓을 여러 개씩 들고 캔버스 위를 걸어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호원은 그들을 보며 와- 하고 감탄을 했다. 저렇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보니 멋있고 왠지 모를 동경심까지 생겼다. 우현은 잠시 동기들을 불러 모았다. 호원은 멋쩍게 우현의 옆에 붙어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 데 호원의 눈에 유독 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있지도 않은 한 남자가 페인트 통이 가득 쌓인 곳 옆에 멀뚱히 서서 페인트 통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내 고등학교 후배. 잘 생겼지? 이름은 이호원이고. 이번에 피아노과 전체 수석 입학이래-"

우현의 칭찬에 쑥스러워졌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고 인사를 하고. 남자선배들은 술을 사 주겠다며 번호를 가져갔고 여자선배들은 미팅을 시켜 주겠다며 번호를 가져갔다. 정신없이 번호를 교환하는 와중에도 호원의 눈은 그에게서 눈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호원을 눈치 빠른 우현이 알아차리고는 아- 하고 아는 척을 한다.

"동우라고. 우리 동기야."
"왜 저기에 혼자 저러고 있어요?"
"자폐증인데 혹시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알아?"
"아, 알아요."

우현이 동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호원과 옆에 벤치에 앉았다. 우현은 삐딱하게 앉아 동우를 가리켰다.

"울 교수님이 동우 어릴 때부터 데리고 계셨데. 대학생들하고 쪼끄만 초딩하고 같이 그림을 그린거지."
"그렇게 잘 해요?"
"잘 한다는 것 보다는 미쳤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거 같아."

우현은 잠시 동우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었다. 수업 중에 갑자기 미친 듯이 붓질을 하는 것을 보고 공포까지 느꼈던 우현이다. 또 갑자기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서 찢더니 완벽한 조형물까지 만들었던 녀석이기도 하고. 동우에 관한 이야기들을 쭉 쏟아내다 갑자기 어어-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란에 고개를 들어 보니 동우가 페인트 통을 들고 마구잡이로 쏟아 붓기 시작했다. 노란 페인트 통을 잔디밭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아스팔트 위까지 쏟으면서 미친 듯이 움직인다.

"쟤 또 접신했다."
"접신이요?"
"우리끼리 쓰는 용어야."

동우의 광기어린 행동에 놀란 이들이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동우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멈추고 동우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노란 페인트 통을 전부 뿌린 동우는 빨강, 파랑, 초록, 모든 페인트를 다시 쏟아 붓기 시작했다. 옷은 다 더러워지고 얼굴과 머리이며 모든 곳에 페인트가 튀어 묻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동우는 땀을 뻘뻘 흘리고 숨까지 헐떡이면서 페인트를 모두 바닥에 쏟았다. 넓게 뿌려진 페인트들이 굳지 못하고 흘러내리기도 하고 섞이지 않으면서 요상한 무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야! 모여봐!"

함께 작업 하던 교수님이 학생들을 모았다.

"우리 교수님. 동우 데리고 계신다던."
"아-"
"잠시만."

우현은 호원을 두고 모두 모인 그 곳으로 향했다. 이 와중에도 동우는 자기 할 일에 열심이었다. 이제는 급기야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바닥으로 페인트들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동우의 얼굴을 뒤덮고 바닥에 툭, 툭, 떨어졌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호원은 그런 동우가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지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동우는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페인트들을 넓게 펼치기도 하고 먼저 뿌린 색들을 섞어 문지르기도 하면서 한참을 움직였다. 호원이 멍하게 동우를 보고 있는 데 옆에 우현이 왔다.

"오늘 작업은 취소."
"네?"
"동우가 저러고 있으면 아무 것도 못 해. 작업이야 내일 하면 되고."
"아... 쿨하시네요."
"응. 쿨하지? 우리 여기서 중국집시켜서 술 마실 건데."
"네?"

놀란 호원이 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은 뭐 어떠냐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지금은 이제 오전 10시 일 뿐이다.

"우린 일상이야 임마- 교수님도 있는데 뭘."
"으으..."

역시 하예종 미대생들은 또라이들의 모임이라는 게 맞는 말이였어... 호원은 우현의 이끌림에 강제로 학생들이 둥글게 앉아 있는 그 곳으로 갔다. 어색하게 웃고 앉아 주위를 두리번. 그러다 다시 동우를 보았다. 혼자서 뭐가 그렇게 열심인지. 이제는 신발에 페인트를 묻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아스팔트 위에서 뛰면 위험할 것 같은데... 아스팔트, 인도, 잔디밭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동우가 다시 그 위를 기어 다니면서 손으로 바닥을 치기 시작한다.

"동우 신경 안 써도 돼-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아, 네..."

한참을 떠들다 배달시킨 음식들이 도착했다. 미대생 8명에 호원. 음식들이 철가방에서 쏟아지고 또 소주들이...

"이걸 다 먹어요?"

호원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묻자 학생들이 와하하 하고 웃어버린다.

"역시 새내기는 뭘 모르는구먼?"
"이 정도는 약과지!"
"아 귀여워-"

윽, 호원은 귀가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들이... 일단 자신에게 주는 소주병 하나를 잡았다.

"자, 첫 잔은 반샷! 알지?"

남우현. 물 만났네. 소주병을 맥주병처럼 들고 다같이 짠- 을 하고 마셨다. 처음 술을 마시는 호원은 한 모금만 마시고 속에서 열이 나는 것 같다. 무슨 소주를 맥주 마시듯이...

조금 알딸딸한 기분에 탕수육도 맛있고- 날씨도 좋고. 잔디밭에서 이러고 논다는 게 조금 재밌기도 하고 이게 대학생활이구나- 싶기도 하고. 호원은 재밌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노는 맛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문득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1시다. 시간 빠르네... 하며 문득 동우를 보니 여전히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어?"

그러다 동우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


"에이씨-"

호원은 동우를 업고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기숙사로 동우를 데려가야 했다. 우현과 다른 학생들은 흔히 말하는 꽐라가 되어가지고 정신 못 차리고 있었고 대낮부터 이게 무슨 일이냐... 싶던 호원은 동우가 무의식중에 웅얼거리며 자신의 목을 꽉 안아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아기가 옹알이 하는 것 같은 소리에 웃음도 나왔다. 자신의 옷에 페인트들이 묻겠지만 호원은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뭔가 동우가 귀엽게 느껴졌다.

7층 자신의 방이 있는 곳 까지 올라간 호원은 조금 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우가 가볍긴 했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방문을 열고 일단 동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려던 것을 잡아 안았다. 얼굴 한 쪽에는 페인트가 묻어 있었고 머리도 그렇고. 옷은 말 할 것도 없고. 일단 씻겨야 했다.

일단 신발을 벗기고 안아서 샤워 실에 들어갔다. 기숙사 샤워 실에 욕조 따위는 없었지만 일단 동우를 벽에 기대게 앉히고 호원은 윗옷을 벗었다.

"에이씨- 진짜. 남우현 개새끼. 그게 선배라고."

호원은 동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별다른 미동 없이 정말 잠이 든 것 같은 동우의 표정은 한 없이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인형의 옷을 벗기듯 하나씩 옷을 벗기던 호원은 슬슬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은근히 이것도 노동이구나 싶다.

"저... 일단 씻길게요..."

괜히 민망함에 들을 리 없는 동우에게 혼자 말을 하고 혼자 허락을 받았다. 다행히 페인트가 아직 굳지 않아서 물에도 잘 씻겨 내려간다. 힘없이 쓰러지려는 것을 몸으로 받쳐 가면서 호원도 물에 젖어버렸다. 차라리 바지도 벗을 껄 그랬다. 바지까지 다 젖었네.

동우를 씻기고 닦아주고 다시 옷을 입히고. 호원은 동우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바닥에 대자로 누워 쓰러졌다.

"하- 힘들어... 쓰벌... 남우현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그렇게 우현을 욕하다 그대로 스륵- 잠이 든 호원이다. 얼마나 잤을 까. 호원은 문득 눈을 뜨자 밖이 조금 어두워졌다.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있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 했다. 5시 40분. 헐. 많이도 잤다. 몸을 일으키니 동우가 침대위에서 새근- 새근- 숨 소리를 내며 아기처럼 자고 있었다. 아기 냄새 날 것 같다. 젖은 바지를 입고 그대로 자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하다. 호원은 옷을 다 벗고 간단하게 씻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한 번 남우현 개새끼를 외치려던 찰나 우현에게 전화가 왔다.

"타이밍 죽이시네... 여보세요?"
-야~ 죽인다~ 기숙사 옥상으로 와~ 완전~ 죽인다~ 꺄아~
"아 진짜... 아 몰라요!"
-짱이다~ 장동우는 진짜 천재야~ 우와~ 완전~ 우와아~ 동우찡~ 뿌잉뿌잉~

호원은 장동우라는 말에 뒤돌아 볼 것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옥상으로 걸어 올라가니 난간에 우현이 딱 붙어서 우와~ 하면서 혼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궁금했다. 장동우가 왜 천재라는지. 그냥 그렇게 이끌렸다. 우현의 옆으로 가니 술 냄새가 훅- 하고 온다.

"저것 봐라~ 저거 봐~"

우현이 완전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호원은 우현이 가리킨 미대 건물 옆을 보았다.

"우와!"

그 곳에는 오전에 동우가 페인트를 뿌린 그것이 있었다. 노란 페인트들과 색색의 페인트들이 뭉쳐진 그 것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나무잖아~ 인도가 나무줄기고~ 동우 발자국은 나뭇잎이고~ 꺄~ 너무 예쁘당~ 꺄~ 나무나무 남우현~ 꺄~"

일단 우현의 헛소리는 귓등으로 무시하고 호원은 동우가 만들어 놓은 그 거대한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동우에게는 모든 것이 캔버스였다. 호원은 그 멋진 작품을 보니 기분까지 상쾌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동우를 더 알고 싶어졌다. 동우와 친해지고 함께 저런 작품도 만들어 보고 싶기 까지 했다.

"형."
"왜에~?"
"동우형하고 친해지고 싶어요."
"고럼 고럼~ 친해져야지~ 친해져라~ 흐으응~"

 

 

 

 

 

W.별모양곰돌이

 

 

3.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동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책상 앞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던 호원이 깜짝 놀라 핸드폰을 들었다. '엄마'. 호원은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옆 침대에서는 동우가 완전 이불에 파묻혀서 잠이 들어 있다.

"여, 여보세..."
-동우니? 동우야?
"아, 저... 동우형 지금 자, 자는데요."
-... 넌 누구니? 우현이니?
"아니요. 우현이 형 후배인데... 그러니까. 어쩌다 동우형을 맡아가지고요."

다급한 목소리가 잠잠해 지더니 차분히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에게 말 하는 소리도 들리고.

-지금 어디니?
"지금... 기숙사에 제 방에 있는데요. 동우형이 좀 지쳐가지고 제 침대에서 잠들어서..."

응? 말이 좀 이상하다... 호원은 말주변이 없는 자신을 탓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걸 아는지 모르는 지 동우는 잠만 잘 자고 있다.

-지금 기숙사 앞으로 갈 테니까 동우 좀 데리고 나와 줄래?
"아... 네. 언제쯤..."
-바로 내려오렴.

발랄한 동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전화는 끊겼다. 머리를 긁적이던 호원이 동우를 흔들어 깨웠다. 어깨를 두드리고 뽀샤시하고 말랑한 볼을 꼬집어봐도 전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동도 없이 잠만 자는 동우를 바라보다가 호원은 그냥 동우를 잡아 당겨 업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호원은 뭔가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 이 등에 느껴지는 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겠지. 설마 아밀라아제가 가득한 그 액체는 아니겠지...

기숙사 앞으로 동우를 업고 내려가자 검은 에쿠스 한 대가 기숙사로 오고 있었다. 오... 에쿠스다. 에쿠스. 호원은 언뜻 보이는 운전석에 있는 동우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꾸벅 했다. 부드럽게 호원의 앞에 멈춘 차 뒷좌석에서 내린 동우의 어머니는 호원의 등에 업혀있는 동우를 살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아, 네... 잠만 잤어요. 아. 그리고 페인트가 묻어서 씻기고 옷도 제 옷으로..."
"교수님한테 다 들었어. 너무 고마워."
"아, 아니에요..."

동우와 똑 닮은 그녀가 동우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더니 동우를 뒷좌석에 눕혔다. 동우가 잠이 깨려는 듯 칭얼거리다 다시 자세를 잡고 잠이 들었다. 에쿠스에 언뜻 보니 풀 옵션이다. 동우네가 은근 부자라는 것을 직감한 호원은 괜히 침을 꼴깍 삼켰다.

"번호 좀 줄래?"
"네?"
"동우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 영 우현이는 믿음도 안 가고... 학생이 듬직해 보이고 좋네."

우현이는 믿음도 안 가고, 우현이는 믿음도 안 가고, 우현이는 믿음도 안 가고... 속으로 큭큭 거리며 웃은 호원은 그녀에게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 주고 인사를 꾸벅 했다.

"다음에 우리 집에 초대 할게. 와 줄 수 있지?"
"아, 영광이죠."
"내일 연락 할 테니까. 내일 봐. 학생."
"조심해서 가세요."

발랄한 그녀는 호원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호원은 멀어지는 차를 향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금 전에는 우현이는 믿음도 안 가고... 이 말이 맴돌아 웃겼다면 이번에는 학생이 듬직해 보이고 좋네... 이 말이 계속 맴돌았다. 듬직하다라...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듯 했다. 동우의 듬직한 후배. 그리고 동생. 동우와 고작 하루 본 사이인데. 아니,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은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괜히 가까워진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호원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떠진 눈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부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핸드폰 액정으로 보니 '동우형 어머님'이라고 떠 있다. 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호원이 통화를 눌렀다.

"예... 어, 크흠, 어머니."

막 일어난 탓에 목소리는 다 갈라진 소리가 났다.

-학생 옷 돌려주려고 하는데 지금 기숙사 1층으로 내려올래?
"지금요?"
-지금 기숙사거든.
"네, 네!"

아씨, 망했다. 호원은 입고 있던 트레이닝바지에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한 없이 엉망이다. 재빠르게 얼굴 정리를 했지만 여전히 부은 얼굴과 눈두덩이는 참... 뭐라 말하기 힘든 몰골이다. 호원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어제 보았던 그 에쿠스가 떡하니 자신의 앞에 있었고 그 속에서 동우가 튀어나오듯이 밖으로 나왔다. 그 옆에는 동우의 어머니가 자신의 옷이 든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호원이 멋쩍게 웃으면서 꾸벅 인사를 하자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금방 일어났나 보네?"
"아... 어제 늦게 자느라... 하. 하. 하."

굉장히 어색하게 웃은 호원이 쇼핑백을 받았다. 옆에서는 동우가 멀뚱히 서 있었다. 초록색 옷을 입었다. 되게 귀엽네- 호원은 동우를 보다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동우와 눈을 맞추고 동우의 손을 잡고 동우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 동우 뭐 해야 된다고 했지?"
"..."
"동우 오늘 교수님하고 그림 그리고 엄마 전화하면 전화 받아야 해. 꼭!"
"..."
"엄마 간다? 알았지?"
"..."

동우는 고개를 숙이고 묘하게 어긋난 시선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눈을 마주치려고 해도 동우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호원이 묘하게 안타깝다. 서글픈 표정의 그녀는 호원에게 가볍게 인사하곤 차를 타고 가버렸다. 호원이 어떡할까 하다가 일단은 식사를 하려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동우를 이대로 두어도 되는가 싶다.

"저기... 동우 형."

동우를 부르지만 동우는 그녀가 타고 있는 에쿠스가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그 곳을 보고 있었다. 차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동우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놀란 호원이 동우를 일으키려 하자 동우가 자신을 본다. 어... 아주 짧지만 눈을 마주쳤다. 오히려 더 당황한 호원이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는 동우가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원은 쇼핑백을 잠시 내려놓고 힘을 양 손으로 동우의 허리를 잡고 일으켰다. 순순히 일어난 동우의 손을 꼭 잡은 호원은 쇼핑백을 들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형. 밥은 먹었어요?"

대답이 없다. 아마 먹었겠지? 싶은 호원은 동우를 데리고 매점으로 향했다.

"형 먹고 싶은 거 골라요."

행여나 동우를 잃어버릴까 싶어 손을 잡고 있는 데 조금 민망하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동성커플로 보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호원은 후드를 조금 더 눌러 쓰고 얼굴을 가렸다. 동우는 호원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점을 돌아다니다 뭔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뭔가 보니 주스들이 나열된 곳이다. 호원이 오렌지 주스를 집자 동우가 호원의 손등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따끔하게 아프다... 이번에는 호원이 눈치를 보면서 토마토 주스를 고르자 또 손등을 때린다.

"아, 왜 때려...요..."

호원이 설마 싶어서 당근주스를 고르자 동우가 호원의 손에서 당근 주스를 뺏는다.

"이거 맛없는 데... 형은 그게 좋아요?"

뭐, 좋은 거 같다. 동우는 호야의 손을 꼭 잡고 계산대로 뛰어간다. 얼떨결에 끌려 간 호원이 지갑을 열어 당근 주스를 샀다. 그리고 빨대도 챙겼다. 동우의 손을 잡고 기숙사 식당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동우가 어디 갈 수도 있으니 한 손으로는 동우를 잡고 손목에는 쇼핑백을 걸어 놓고 한 손으로 식판을 들고 늦은 아침을 챙겼다. 자리에 동우와 마주 앉자 이제야 뭔가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야지 키가 커."

동우가 하는 말에 호원이 눈을 크게 뜨고 동우를 바라본다. 동우는 호원의 식판을 가리키며 조금은 옹알거리는 말투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대화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많이 먹어야 키가 커야 돼."
"아... 네."

무슨 말인지 원... 동우는 혼자 꿍얼거리다가 주스를 마시려고 뚜껑을 열려고 하는 데 마음대로 잘 안 되자 울상을 짓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호원이 쉽게 뚜껑을 열고 빨대까지 꽂아주자 이제야 만족한 듯이 양 손으로 주스 병을 잡고 빨대를 쪽쪽 빨아 당근주스를 먹기 시작한다. 근데 먹으면 먹을수록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하는 게 심상치 않다. 곧 울 것처럼 눈 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훌쩍거린다.

"맛없어..."
"... 맛없으면 먹지 마요. 형..."
"맛없어... 히잉- 맛없어..."

아니, 먹고 있으면서 맛없다고 울려고 하는 건 뭐다? 호원이 벙찐 표정으로 동우를 살피는 데 그래도 꿋꿋하게 먹는 걸 보면 그냥 먹게 두는 게 나은가 싶기도 하고. 괜히 뺏었다가는 울어버릴 것 같은데 되게 맛없어하는거 같기도 하고... 헷갈리기 시작한 호원이 동우가 하는 모습을 계속 보았다. 그래도 다 먹긴 먹었는데... 다 먹었으면서! 왜!

"흐아아앙- 맛! 없! 어! 으아앙-"

동우가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울기 시작한다. 그것도 꽤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니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동우와 호원을 보았다. 동우야 워낙 유명하니까 사람들도 그닥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호원은 어떡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한 채로 어영부영 있었다. 동우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동우의 손에서 병을 뺏으려 하지만 그건 또 힘을 주고 꼭 잡고 있다. 호원이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멍청하게 동우만 보고 어버버 거리고 있는 데 동우의 옆에 우현이 식판을 탁, 내려놓더니 자리에 앉았다. 우현이 옆에 있든 말든 혼자 맛없다며 목 놓아 울던 동우의 앞에 우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흡, 흐읍..."

핸드폰 액정을 보던 동우가 이내 훌쩍임을 멈추고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기 시작한다. 우현은 손으로 동우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태연하게 국을 한 숟가락 떠서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호원이 우현의 핸드폰 액정을 보니... 뽀로로가...

"앞으로 동우랑 다니려면 뽀로로 동영상과 노래는 필수이니라."
"...아..."
"그리고 뽀로로는 나의 우상이기도 하지."

이건 또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 호원은 우현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이미 훈련이 되어 있어서 그 뒤의 이야기는 무시하고 이제야 편하게 밥을 먹기 시작한다. 우현은 아랑곳 않고 자기만의 논리로 뽀로로를 찬양하고 있었다.

"난 뽀로로님의 삶을 살고 싶어. 뽀로로님을 찬양하는 노래도 그의 삶을 보여주는 거라고."
"아, 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언제나 즐거워. 굉장하지 않냐?"
"...그러네요..."

엄청난 몸짓으로 과장된 뽀로로 찬양을 하던 우현이 호원에게 감정이 없다며 뭐라 하지만 호원은 역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

식사를 마친 그들은 나란히 식당 밖을 나왔다. 우현은 동우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호원은 묘한 기분이 든다. 우현은 호원의 손에 동우의 손을 쥐어주었다.

"동우 손 잘 잡고 다녀라. 애 잃어버리기 진짜 쉽다. 아차하면 사라져."
"네..."
"왜? 게이커플 오해 받을 거 같아? 하예종에 게이커플은 평범한겨~ 또라이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당신이요. 라고 말 하고 싶던 걸 꾹 참는 호원이다.

"네. 근데, 형은 어디 가세요?"
"해장술~"

분명히 뒤에 하트가 붙을 것 같은 표정과 말투로 방긋 웃은 우현이 마치 하늘을 향해 날아가 듯 사뿐한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기숙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인간... 분명 알콜 중독일거야. 하긴, 그러니까 또라이 소리도 듣지. 근데 저 사람이 어떻게 하예종이 들어왔는지도 궁금하다. 도대체 얼마나 미술을 잘 하길래... 아니면 그냥 또라이라서 뽑았을 수도... 미술은 정말 희한한 것도 많으니까 말이다.

"음... 동우 형. 어디 갈까요?"

호원의 물음에 동우가 알아들은 건지 어디론가 걷기 시작한다. 호원은 동우의 손을 꼭 잡아 동우의 빠른 발걸음에 맞춰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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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우가 호원의 손을 잡고 도착한 것은 미대 건물과 꽤 멀리 있는 음대였다. 호원이 잠시 음대 건물을 보다 동우를 보니 동우는 바로 또 걸음을 재촉한다. 건물 안으로 서둘러 들어간 동우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2층으로 올라간다. 계단은 또 어찌 그렇게 빨리 올라가는지, 호원은 생각보다 빠른 동우의 걸음에 은근히 힘이 든다. 2층은 바로 호원이 연습하는 피아노과 학생들의 연습실과 과실이 있는 곳이다. 그 중 가장 햇살이 잘 드는 연습실로 들어간 동우는 연습실의 방음벽을 한 번 더듬어 보더니 피아노 의자에 털썩 앉았다. 호원은 동우의 옆에 앉아 피아노를 열었다.

"연주 해 줄게요."

호원의 다정한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동우는 멍하니 건반만 바라볼 뿐이다. 검은색과 하얀색만이 가득한 길쭉한 피아노 건반을 보며 동우는 무심코 들리는 큰 소리에 깜짝 놀랐다. 호원이 장난스럽게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일부러 크게 연주하자 동우가 신가한 듯이 호원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신기해요?"

호원의 물음에 동우는 그저 호원의 손가락만 볼 뿐이다. 호원은 간단하게 손가락을 마사지 하며 손가락 근육을 풀었다. 마디마디마다 만져주며 한참을 마사지를 한 호원은 스케일을 치면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호원의 곧은 손가락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피아노 건반 위를 유유히 흐르듯 움직이는 것을 본 동우가 신기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원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가장 낮은 음부터 가장 높은 음까지. 호원의 손가락이 미세한 세기의 차이와 박자를 따라 동우의 심장과 머리가 같이 울리는 것 같았다. 호원은 충분히 손가락을 푼 뒤 연주를 하려고 한다. 쇼팽의 야상곡. 호원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이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
"뭐야?"
"야상곡이요. 야. 상. 곡."
"야상곡?"

동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악보가 아니라 호원이었다. 호원을 가리키며 야상곡이라니. 호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호원이요. 이. 호. 원."
"호... 호... 호야!!"
"아니요... 호원이요. 이. 호. 원."

호원이 입 모양을 일부러 과장되게 하면서 말 했지만 동우는 듣지도 않았다.

"응. 호야지. 호야. 호야야. 호야. 호야 할 꺼야. 호야! 호야. 호야~ 호야."
"... 내가 강아지야?"

조금은 분노가 섞인 말투였지만 호원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어쨌든 자신의 이름을 야상곡으로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호원은 자신의 손가락만 계속 보는 동우를 보며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첫 부분의 느낌을 중요시 하는 호원은 눈을 감고 청아한 피아노 소리를 느꼈다. 하늘 빛 초승달이 떠올랐다. 그 밑에 호숫가에는 순수한 요정이 있다. 자신을 호야라고 부르는... 첫 느낌이 떠오르자 그 다음은 막힘이 없었다. 멜로디에 따라 이미지를 그리며 연주하는 호원은 눈을 감고 완전히 야상곡에 빠져들었다. 물 흐르듯 마치 달빛이 호수를 감싸듯이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연습실에 울리자 동우는 가만히 호원이 연주하던 손가락에서 눈을 떼고 호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이 얌전히 내려앉았다. 호원의 단정한 옆모습을 보던 동우는 호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유유히 연주가 끝나고 호원은 한참을 그 느낌을 떨치지 못 하고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느꼈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차분하고 이렇게 야상곡을 즐겁고 아름답게 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아니,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야상곡을 치다니. 호원은 그 자체로도 즐거웠다. 감았던 눈을 뜨자 동우가 호원이 하던 것처럼 피아노 건반을 검지로 꾹- 꾹- 누르기 시작한다. 낮은 C만 계속 누르는 동우는 정확히 같은 리듬으로 C를 누르고 있었다.

"형. 합주 할까요?"
"..."

동우가 피아노 연주(?)에 열중해 있으니 대답도 없다. 호원은 동우가 누르는 낮은 C에 맞춰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쳤다. 혼자서 즉흥 연주를 해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과 하기는 처음이다. 사실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정석적인 연주만이 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그저 악보대로만 칠 수 있는 꾸준한 노력 형이라고 언제나 자부해 왔으니까. 동우가 일정하게 치는 음에 맞춰 호원이 마음껏 즉흥연주를 시작한다. 재즈피아니스트처럼 박자를 가지고 놀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호원 나름대로 멋대로 해 본다.

한참을 동우의 음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이던 호원이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동우를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같은 음만 치는 동우의 표정이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그리고 햇살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나는 머릿결과 투명한 눈동자와 긴 속눈썹이 예뻐서, 그리고 붉은 입술이 도톰한 동우가 꼭 인형 같아서...

"..."

호원의 시선이 한참동안 동우의 입술에 머물렀다. 천천히 동우에게 다가간 호원은 동우의 동그란 머리통을 살짝 잡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동우의 도톰한 아랫입술이 맞물리는 것이 느껴지고 향긋한 향도 나는 것 같다. 호원은 입술을 살짝 움직여 동우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과 마찰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한 감정이 흐르고 문득 정신을 차린 호원이 동우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으앗! 내가 무슨 짓을..."

호원이 놀라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마구 문질렀지만 동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건반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건반 위에 올려진 손가락으로 같은 음을 치는 동우. 호원은 괜히 섭섭하다.

그러다 갑자기 동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원이 잡을 사이도 없이 연습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심성도 없이 마구잡이로 뛰어 나간 동우를 따라 같이 뛰는 호원이 다급하게 동우의 이름을 부르지만 동우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 내리막길도 있는 힘껏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형! 위험해! 천천히! 천천히!"

호원이 아무리 불러도 동우는 뛰기만 한다. 불안불안 하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잘 뛰어가는 모습에 호원이 오히려 불안해 죽겠다. 순식간에 동우는 달리고 달려서 자신이 주로 있는 미대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미대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호원은 머리를 막 쥐어뜯으며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왜... 왜 그랬지... 내가..."

혼자 자학을 하고 있는 데 문득 조용한 복도에 누군가의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렸다. 호원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복도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마치 어린아이의 콧노래처럼 서투른 노랫소리가 들렸다. 호원은 긴 복도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를 들었다. 강의실을 하나씩 보면서 소리를 향해 나아가던 중 호원은 기름 냄새가 강하게 나는 어느 강의실 앞에 섰다.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나고 있었다. 아주 작은 노랫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저 끝 복도에서는 왜 그렇게 선명하게 들렸던 것일까. 호원은 살짝 열려있는 강의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동우형...?"

동우의 키 보다 조금 더 큰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동우는 붓질을 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붓이 망가질 것처럼 거칠게 큰 붓을 캔버스에 칠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우의 손에는 페인트 통이 들려 있었는데 동우는 무겁지도 않은 지 그 페인트 통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함께.

강의실 한 쪽 의자에 앉아 동우의 모습을 보고 있던 호원은 문득 동우의 서툰 노랫소리가 조금 전 자신이 쳤던 야상곡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우는 겨우 4마디 멜로디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친 붓질에 페인트가 튀어 옷에 묻고 얼굴에 묻고 손에 다 묻었지만 동우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호원은 동우의 놀라운 집중력에 넋 놓고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뭔지 몰랐는데. 점점 형체를 갖춰 가며 캔버스를 점령해 가는 남색과 흰색의 조화를 보며 호원은 왠지 모를 정겨움을 느꼈다.

"멋있다... 형..."

마냥 어린아이 같던 동우가 저렇게 한 가지에 몰두해 있는 것을 보니 호원은 소름이 끼치도록 동우가 멋있게 느껴졌다. 형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다 문득 호원은 정말 소름이 끼치고 팔에 닭살이 오소소- 하고 돋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띵 하게 울리는 느낌. 동우가 완성시켜나가고 있는 그 캔버스에는 호원의 첫 느낌이 있었다. 조금 전 연습실에서 호원이 동우를 위해 연주했던 쇼팽의 야상곡. 그 첫 음의 이미지가 바로 동우의 캔버스에서 현실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호숫가.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작은 요정. 그 요정과 호수를 감싸 안는 듯한 밝은 하늘빛 초승달. 그 모든 것이 동우의 캔버스 안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호원이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동우의 공간 속에 마치 자신이 들어간 것 같았다.

"동우 형. 이거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내가 상상한 걸 정확히 그려냈어요? 네?"
"... 야상곡."

거친 페인트와 붓질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그 캔버스를 보며 동우는 말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페인트 통을 내려놓고 호원의 손을 잡았다. 마치 낮에 호원이 동우의 손을 잡고 음대로 갔던 것처럼, 이번에는 동우가 호원의 손을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왼손에는 호원의 손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붓이. 동우는 여전히 반복되는 그 4마디 멜로디만을 흥얼거리고 있었고 그런 동우를 호원은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그 다음 날. 개강을 하면서 미대에서 개강 전시회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하예종 미대 전시회라 많은 사람들이 왔고 호원 역시 호기심에 그 전시회를 찾아 갔다. 학교 안에서 하는 전시회치고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미술품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호원은 건물 밖에 있는 설치 미술들과 불과 며칠 전에 동우가 바닥에 페인트를 뿌려 그린(?) 거대한 나무를 다시 한 번 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너른 로비에 크고 작은 캔버스들과 조각상들이 나열이 되어 있었고 호원은 찬찬히 그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역시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구나..."

그러다 문득 호원은 커다란 사진 한 장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보고 있으면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만드는 멋진 소나무 한 그루. 그나저나 미대에 웬 사진?

"예~ 나의 후배! 이호원~"
"아, 형! 깜짝 놀랐잖아요!"

우현은 감상을 하고 있는 호원을 뒤에서 껴안았다.

"오- 나의 작품에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 게야?"
"네? 아, 이거 형이 찍은 거예요?"
"응?"
"네? 이거 형이 찍은 거 아니에요?"
"찍다니? 내가 그린 건데?"
"...네?"

호원은 우현이 그렸다는 것에 놀라 다시 한 번 그 캔버스를 보았다. 아니, 아무리 봐도 이건 사진인데... 사진...!!! 이렇게 정밀한 그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 호원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우현의 사진 같은 그림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정말 작가 명에는 남우현 석자가 있었고 제목은 '소나무' 였다.

"진짜 형이 이걸 그렸다고요? 이 사진 같은 그림을?"
"어머? 나 초정밀화가 주특기야."

헐... 이 산만하고 정신없고 알콜중독자 같은 이 인간이 초정밀화가 주특기라니라니라니?!?!?! 호원의 정신 나간 듯 한 표정에 우현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한 숨을 푹-쉬었다. 호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이 캔버스 앞에 앉아서 이렇게 초정밀화를 그리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싶다. 우현은 다시 정신없는 모습으로 유유히 사라졌고 호원은 아직도 충격 받은 모습으로 다른 작품들을 감상했다. 아직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아 잔상이 남는다. 그러다 문득 호원은 익숙한 그림에 고개를 들어 그림을 보았다.

"아..."

동우의 그림이다. 그것도... '야상곡'이라는 이름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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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호원은 멍하니 동우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상곡. 호원은 지금까지 상상만 했던 것을 눈으로 직접 보니 설레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입을 벌리고 멍청하게 동우의 그림을 보고 있는데, 그 앞에 불쑥 동우가 나타났다. 우왁- 하고 작은 비명을 지른 호원이 한 걸음 물러서자 동우도 같이 한 걸음 다가갔다.

"조, 좋은 아침이네요... 동우 형."
"호야."

동우는 호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금 어긋난 시선이다. 호원은 동우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이 되어 있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의... 입술이라는 것도. 당황한 호원은 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동우의 눈을 보고 있지만 동우의 눈은 자신의 입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동우가 호원에게 달려들어 호원에게 입술을 맞췄다. 놀란 호원이 동우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서 떼어 내고 동우를 보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보니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 한 것 같다. 동우는 또 다시 호원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려고 하지만 호원은 힘을 주고 동우가 다가오지 못 하게 어깨를 꽉 잡았다.

"안 돼요. 형."

호원이 의도치 않게 단호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안 된다고 하자 동우의 표정이 금세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변해버렸다.

"왜? 왜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흐흑,... 흐이잉-"

어라...? 서러워진 동우가 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훌쩍인다. 다행히 큰 소리로 우는 건 아니지만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쥐고 꾹, 꾹, 울음을 참으면서 입술을 꽉 물고 있었다. 호원이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뽀로로를 보여 줘도 소용이 없었다. 툭- 건드리면 큰 소리로 울 것 같은 동우를 어떻게 하지 못 하고 당황하던 호원은 일단 동우를 자신의 기숙사로 데리고 가기로 한다. 서둘러 미대 건물을 빠져 나가는 동우와 호원을 본 우현이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그리 크게 신경은 안 쓴다.

"뭐... 설마 둘이 뽀뽀하려고 가는 거겠어?"


**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호원은 계속 훌쩍거리는 동우를 달래고, 어르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우 달래느라 저 구석에 박혀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며 군것질 거리며 다 주고 뽀로로 동영상이란 동영상은 다 보여 줘도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동우가 다시 호원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호원이 다시 막았고 동우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너무나도 서럽게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황당할 따름인 호원은 동우 앞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막 헝클렸다.

"아악- 나보고 어쩌라고... 괜히 그때 뽀뽀를 해 가지고..."

그러다 문득, 지금은 기숙사. 거기다가 방. 괜찮나... 싶기도 하다. 지금 동우가 원하는 것은 뽀뽀니까...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동우를 달래기 위해서 이 한 입술 희생하리다! 라는 생각을 한 호원은 다시 한 번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창문에 블라인드까지 확실하게 내렸다. 엉엉 우는 동우의 앞에 마주보고 쪼그려 앉은 호원이 동우의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동우 형."
"으응-?"
"해도 돼요. 형. 뽀뽀 실컷 하세요..."
"뽀뽀?"
"그러니까... 형이 지금 하고 싶어 하는 거요. 알아들어요?"
"뽀뽀... 호야뽀뽀?"
"아니 뭐 굳이..."

호원이 먼저 동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자 금세 또 기분이 좋아진 동우가 빨개진 눈을 크게 뜨고 호원에게 다가가 입술에 뽀뽀. 하지만 그게 한두 번으로 끝나지를 않는다. 쪽, 쪽,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하는데 호원은 점점 심상치가 않다. 아니, 뭘 이렇게 계속 하지? 하는 생각에 호원이 동우를 떨어뜨리려고 하지만 그러면 또 동우가 울 것 같고... 완전 패닉상태가 되어버린 호원이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니, 형, 그, 게, 계속, 하, 실, 건가, 요, 동우, 형? 네?"
"..."
"동우, 형, 목, 안, 아파, 요?"

동우는 호원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자신이 하는 뽀뽀에만 열중이다. 아이씨- 다리 아픈 데... 계속 쪼그려 있던 호원은 다리에 쥐가 날 듯 저려오자 순식간에 동우를 떼어내 손을 잡고 침대로 올라갔다.

"형한테 뭔 짓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다리 아프니까. 응?"
"호야뽀뽀- 호야뽀뽀-"

동우가 눈을 반달로 예쁘게 휘며 웃었다. 낯간지럽게 호야뽀뽀 라는 말도 하면서 호원의 위로 올라탄... 아니 올라타다니! 놀란 호원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대로 동우가 호원의 입술에 뽀뽀를 하면서 호원은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눈이 팽글팽글 도는 것 같다. 이런 걸 원해서 한 건 아닌데 요상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은근히 양심이 찔리기도 하지만 호원은 지금 동우의 행동에 완전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동우는 호원의 단단한 가슴에 손바닥을 데고 자세를 낮췄다. 훅- 끼치는 동우의 향기에 아찔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무슨 향이 이렇게 나는 걸까. 장동우 한테서는. 편하게 자리를 잡자 동우는 이제야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실컷 한다. 그러니까... 뽀뽀 말이다. 동우가 호원에게 폭풍뽀뽀를 하면서 자꾸 꼬물거리자 동우의 엉덩이와 호원의 그 부분이 마찰을 일으킨다. 잘 느끼지 못 하다가 갑자기 불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자신의 분신 때문에 놀란 호원이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지만 그 놈은 자꾸만 딱딱해지려 하고 있었다.

"으으. 형, 잠시, 만, 요-"

들을 리 없는 동우. 차라리 호원은 동우가 제 풀에 지칠 때 까지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한다. 어제 봤던 개콘에 뭐가 재밌더라... 요즘 무한도전 안 하는데... 보고 싶다... 하지만 도저히 자신의 존재감을 힘껏 알리고 있는 그것을 잠재우지 못 하고 있다. 호원이 계속 해서 심호흡을 하지만 그것도 안되는 게 지금 자신은 뽀뽀 중이지 않은가! 으으... 죽겠다. 이건 희망고문이다...

실컷 호원에게 입술박치기를 퍼붓던 동우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졸린 모양인지 하품을 작게 한 동우가 호원의 위에서 내려왔다. 자신의 분신을 잠재우느라 모든 정신력을 쏟아 부은 호원은 막상 동우가 비켜나자 또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러던 동우가 갑자기 호원의 바지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것을 보고 호기심을 느꼈다. 이게 뭘까...? 동우는 일단 호원의 부풀어 오른 그 곳을 손으로 꾸욱- 하고 눌렀다. 딱딱하면서도 뭔가 조금 말랑하다. 놀란 호원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뜨악- 하는 표정으로 동우를 보았다. 동우는 호기심이 이번에는 그 쪽으로 쏠렸는지 또 다시 호원의 것을 만지려고 했지만 호원은

"우왁-"

큰 소리를 지르고 화장실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문을 쾅 닫고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좁은 화장실 속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마구마구 쥐어뜯었다. 호원은 지금 엄청난 내적 갈등 중이었다. 자위를 해... 말아... 해... 말아... 아니, 나의 소중한 이 손가락을 고작 그것에 이용할 순 없어! 피아노 치기에도 아까운 손가락인데... 호원은 그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지만 오히려 바지의 탄력 때문에 자신의 분신이 더 괴롭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 방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호원이 찬물로 급하게 세수를 하다 거울을 보았다.

"아니지, 자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하긴, 나는 이 불타는 청춘을 피아노에 불태우느라 나 자신을 위로할 줄 몰랐지? 응? 이건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한 거야. 응?"

이라는 자신과의 대화와 함께 결론을 내렸다. 문이 꽉 닫힌 화장실 이였지만 그래도 부끄러워 서둘러 바지를 내리고 호원은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끄응-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서둘러 화장지로 닦아 내고 축 쳐진 어깨와 함께 허무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온 호원이다. 이런 호원의 사정은 당연히 모르는 악의 없는 발랄함을 가진 동우는... 호원의 침대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에휴..."

호원이 동우에게 가서 웅크린 몸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형이랑 나랑 안 지 겨우 일주일 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형이 나한테 너무 많은 일상이 된 거 같아요."

호원이 동우의 코 끝을 톡- 톡- 치며 말하는 데 동우가 슬며시 눈을 떴다. 어? 하고 놀란 호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우의 눈을 보는 데, 동우 역시 호원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있었다. 지금껏 이렇게 정확하게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아니, 자폐증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맞추지 않는 다고 들었는데... 놀란 호원이 눈을 깜박이며 동우를 보는 데 동우가 다시 눈을 감고 고로롱- 하며 작게 코를 골았다. 아... 자다가 얼떨결에 눈 뜬 거구나... 호원은 괜히 설렜던 마음을 추스르고 침대에 기대어 앉아 동우가 작게 코 고는 소리를 들었다.


**


개강을 하고 첫 레슨이었다. 호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어 교수에게 인사를 꾸벅 했다. 파리지앵이라고 불리는 교수님이셨는데 우현의 말로는 상당히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라고 했다. 뭐, 미대생이 어떻게 음대 상황까지 이렇게 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아홍홍홍- 반가워요. 음... 이호원 학생? 우리 수석?"
"아, 네..."

괜히 쑥스러운 탓에 호원이 멋쩍게 웃었다. 상당히 패셔너블하고 독특한 사람이라는 것은 첫 인상에서부터 알겠다.

"자- 일단... 한 곡 해 볼까? 아무거나 오케이."

호원은 멋지게 빠진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 전에 연습실에서 미리 손가락을 풀고 와서 간단하게 손마디를 만져준 뒤 긴장되는 마음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역시 호원의 선택은 쇼팽의 야상곡. 호원은 저절로 떠오르는 동우의 그림과 동우를 생각하며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뿅! 하고 눈앞에 나타난 동우가 마치 춤을 추는 듯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뽀뽀 까...

"으앗!"

이런... 젠장! 갑자기 뽀뽀 생각을 하니까 피아노에 집중이 되질 않아서 손가락이 어긋나고 말았다. 이런 적이 극히 드물었던 호원이 귀까지 빨개지며 당황하자 교수가 마치 꽃이 피어나올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호원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네?!!!!"

당황한 호원이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다 싶이 경기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좋아하는 사람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치다가... 뭐 키스하는 상상이라도 했어?"
"... 아니 뭐..."
"아항항항- 오홍홍홍- 귀여워라- 아항항항-"

한참을 또 웃기 시작하는 그 파리지앵 덕분에 호원은 죽을 맛이다.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혼내는 건지 아니면 그냥 특이한 애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랑은 좋은 거야. 너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구."
"사랑 아니에요..."
"무슨 소리~ 난 다 알지. 난 음악의 신이니까. 니 연주는 완~전~ Fall in Love. 엘! 오! 브! 이! 러~브!"

계속 되는 저 꽃미소에 호원은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누가 누구랑? 호원은 괜히 그 교수가 미워 입술이 비죽이 튀어나왔다.

"뭐, 오늘 수업은 여기 까지-"
"네?"
"다음에는 진도 더 빼고 와서 완벽하게 연주 해~"

호원의 어깨를 두 세 번 친 그가 호원에게 일어나서 나가라고 말 한다. 아니, 개강 첫 날. 그것도 일학년 첫 레슨을 이런식으로 끝낼 수가... 호원은 눈 앞이 팽글팽글 도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게 진짜 하예종식 수업 스타일인가? 아니면 그냥 저 교수의 스타일인가? 에휴... 호원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푹- 쉬면서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무슨, 알지도 못 하면서 사랑이래."
"뭐가?"
"아 교수님 말이야... 사랑은 무슨 사랑? 웃기지도 않아."
"아- 그래?"

어? 근데 가만... 지금 호원은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섬뜩해짐을 느낀 호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에는... 우현이 있었고 그 옆에는 우현의 손을 잡고 멍하니 복도 한 쪽을 주시하고 있는 동우가 있었다.

 

 

 

 

 


W.별모양곰돌이

 

 

6.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우현이 호원에게 묻자 호원은 여전히 동우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왜요? 별 일은 없는 데..."
"동우네 엄마가 집에서 밥 해주신다고 하셨거든. 같이 가자."
"네?"

오. 마이. 갓. 깜짝이야. 호원이 과하게 놀라며 다시 한 번 우현에게 물었다. 우현은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동우의 머리통을 호원 쪽으로 돌리며,

"저번에 너가 동우 봐 줬잖아. 그런 것도 있고 해서. 초대하고 싶으시데. 오키?"
"뭐... 오키..."

그러다 갑자기 동우가 저번처럼 호원에게 말없이 달려든다. 호원은 반사적으로 동우가 자신에게 뽀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동우를 막았다. 그런 동우를 보며 우현은 별 생각도 안하고 바로 호원에게 동우를 넘겼다.

"동우가 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으니 너가 저녁까지 책임을 지고 있거라."
"네? 저 연습해야 하는데..."
"그래? 난 술 마시러 가야 하는데?"
"... 뭐라구요?"
"동우를 술집에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젠장, 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동우를 호원에게 떠넘긴 우현은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우의 손을 잡은 호원은 동우가 옆에서 뽀뽀 하겠다고 보채는 것을 핸드폰에 있는 뽀로로 동영상으로 겨우 달래고 고민하다 연습실로 가기로 한다. 또 기숙사 방으로 들어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말이다.


**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호원은 우현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동우의 집은 소문난 부자들만 산다는 강남 한 복판의 아파트. 거기다 제일 윗층 팬트하우스에 복층. 괜히 호원은 자신이 입고 있는 후드티를 슬쩍 보았다. 음... 나쁘지는 않은 듯...

"형은 동우형 집 몇 번 가봤어요?"
"나? 음... 동우 생일이나 가끔 이렇게 엄마가 불러줄 때?"

애살이 많은 우현은 동우의 어머니에게 '엄마' 라고 불렀다. 꽤 애교도 부리고 투정도 부리면서 아들 비슷한 노릇을 하는 데 우현의 천성이 밝은 탓일 것이다. 대리석이 화려하게 박힌 현관문을 보고 감탄 한 번, 번쩍 거리는 실내에 또 한 번. 이렇게 큰 집은 또 처음 보았다. 호원은 동우의 어머니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거실 쇼파에 앉아 집을 둘러 보았다. 딱 봐도 값비싼 가구들이며 가전도구며 온 갖 화려한 것들이란 다 모아노은 것 같다. 도대체 이건희는 어떻게 사는 걸까 라는 생각도 한다.

"동우 방 들어가서 같이 놀아주고 있어. 요거 찜만 다 하면 돼."
"네~ 엄마~"

우현이 방실방실 웃으며 호원을 데리고 어디론가로 간다. 너무 넓어서 미로 같은 복도들을 지나 예쁜 풍경이 그려진 방문이 나왔다. 딱 봐도 지나치게 정교한 것이...

"내 작품이지롱~"

우현의 작품이었다. 방정맞게 브이를 하며 발까지 동동 구르던 우현은 동우의 방문을 열어 호원을 밀어 넣었다.

"난 엄마 일 도와줄게. 동우랑 잘 놀고 있어~"

우현이 문을 탁 닫고 가는 바람에 호원은 뭐라 할 것도 없이 어정쩡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넓은 동우의 방을 본 호원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오로지 커다란 침대만이 있는 그 방은 온통 알록달록한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한 쪽 벽에는 동우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미 그림이 가득 그려진 벽지 위에.

호원은 찬찬히 벽지를 보았다. 크레파스로 그린 모양인 듯. 그닥 많지 않은 색들이 둔탁한 선들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멀리서 보면 하나의 그림으로 보였다. 마치 물방울이 튀어 색색의 얼룩을 만들어 내 듯 아름다운 조화였다. 호원은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크레파스 조각들을 최대한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동우의 옆으로 다가갔다. 동우가 호원이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오로지 그림에만 집중할 뿐이다.

"동우 형."

역시 대답이 없는 동우. 호원은 가만히 동우가 그리는 어떤 것을 보았다. 호원도 바닥에 있는 크레파스 중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크레파스를 들고 동우의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렸다. 동우가 그린 선을 보라색으로 꽉꽉 눌러 채웠다. 동우가 호원이 칠하는 것을 가만히 보더니 그 옆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가만히 있는다. 호원은 동우가 그린 그 동그라미를 보라색으로 채웠다. 그러니 동우가 이번에는 또 그 옆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호원은 또 그것을 채우고, 그리고, 채우고의 반복. 호원은 자신이 크레파스를 밟아 양말이 더러워 진 것도 모른 채 동우가 그린 동그라미를 보라색으로 열심히 채우고 있었다. 동우와 뭔가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마치 처음으로 두 사람이 어설픈 합주를 했을 때처럼.

"밥 먹으로 오쎄용~"

우현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호원이 크레파스를 떨어뜨렸다. 우현이 그런 호원을 보며 마구 놀렸다.

"에- 양말 더러워~ 더러워~ 더러운 이호원!"
"시, 시끄러워요!"
"더러워~ 더러워엉~"

어울리지도 않게 콧소리를 내며 더럽다고 찡찡 거리던 우현이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집이 넓어서 가는 동안에 음식이 다 식어버릴 수도 있다며 말이다. 호원은 동그라미를 또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동우의 손을 잡았다.

"가요. 밥 먹으러."

가만히 동그라미를 보던 동우가 대답이 없다. 호원은 떨어뜨린 보라색 크레파스를 들어 그 동그라미를 보라색으로 채웠다. 그리고 동우에게 다시 물었다.

"밥 먹으러 가요. 형."

그제야 만족한 듯 동그라미와 하이파이브(?)를 한 동우가 쫄래쫄래 우현을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호원도 따라 가려다 더러워진 양말을 보고 그냥 벗어 주머니에 넣어버린다. 어쩔 수 없지. 뭐...


**


넓은 식탁에 가득 찬 음식들.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식탁에 널려 있었다. 뽀로로 포크를 주먹쥔 동우가 보채기 시작한다.

"쭈꾸미- 쭈꾸미-"

쭈꾸미라고 말 하는 그 입모양이 꽤 귀엽다. 그 입술을 꾹 눌러보고 싶다. 동우의 앞접시에 쭈꾸미를 가득 담아준 엄마는 동우가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다 자신도 숟가락을 들었다.

"많이 먹으렴.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다."
"엄청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인사까지 꾸벅 하는 호원을 보고 흐뭇하게 웃음을 짓던 그녀는 우현이 반찬을 집어 올리다 식탁에 다 흘리고 다른 반찬에 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 우현을 밉지 않게 나무랐다. 호원은 밥은 먹지 않고 쭈꾸미만 오물거리는 동우를 보며 동우의 쭈꾸미 반찬 위에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올려놓았다. 그러자 동우가 열심히 포크로 밥알을 다 떼어 놓고는 쭈꾸미만 냠냠 거리며 먹는다. 괜히 오기가 생겨 밥을 한껏 떠서 쭈꾸미 양념에 비벼서 놓으니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또 밥알을 열심히 떼기 시작한다.

"다녀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우현과 호원과 그녀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동우의 둘째 누나인 꽃잎이 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낯선 사람의 등장에 놀란 호원이 어설프게 일어나 인사를 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찬바람이 쌩 부는 듯 한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짜증나..."

낮게 깔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일순간 정적이 일었다. 어색하게 호원이 다시 의자에 앉는 데 옆에 동우가 사라졌다. 놀란 호원이 동우가 어디로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몰라 두리번 거리다 식탁 밑에서 대화소리를 듣고 허리를 숙여 식탁 밑을 보았다.

"동우야. 엄마 있어. 괜찮아. 응?"
"우으... 으으..."
"뚝, 착하지 동우. 뚝..."

식탁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그녀가 토닥일 때 마다 우는 소리를 내는 동우. 갑작스러운 동우의 행동에 적응을 하지 못 하고 놀라던 호원은 우현이 손짓하는 데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저희 갈게요... 뒷정리 못 해서 죄송해요. 다음에 올게요."

할 말만 한 우현은 호원을 데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


별 대화 없이 학교로 돌아가던 걸음이 무겁다. 먼저 입을 연 건 우현이었다.

"동우 둘째 누나야. 아까 그 사람. 동우보다 한 살 위에 누나인데. 어렸을 때부터 동우 때문에 부모님께 사랑을 못 받아서... 그래서 질투가 좀 심해.
"아... 그래서..."
"어렸을 때 동우를 창고에 가두고 문을 안 열어 줬었데. 그 다음부터 동우가 그 누나를 되게 무서워 한데."
"정말요? 너무 한다 그건... 동우 형은 장애가 있는 사람인데."
"그만큼 외로웠던 거지. 당연히 외롭지. 아무도 자신을 안아주지 않았으니까."
"... 형이 어떻게 잘 알아요?"
"... 그 누나 내 첫사랑이야. 꽃잎누나도 하예종이야. 한국무용."
"헐..."
"거기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이야."

우현의 말에 깜짝 놀란 호원이 걸음을 멈췄다. 아, 그래서 그렇게 이 사람이 동우의 어머니와 친하고 동우를 잘 돌봐주는 것이었구나. 호원은 조금 의심 가던 것이 모두 제자리를 찾는 듯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항상 밝던 우현의 뒷모습이 조금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그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일까. 호원은 낮에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호원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까만 밤하늘을 보았다. 그 까만 밤하늘에서 동우가 보이는 듯 하다.


**


독특한 파리지앵 교수님은 호원에게 과제를 내어 주었다. 얼만큼 연습을 하라는 것이 아닌. 조금은 황당한, 아니, 아주 쌩뚱맞은 과제가 주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곡을 직! 접! 만들어 올 것."
"교수님. 전 작곡과가 아닌데요? 거기다 저는 곡을 써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본인이 직접 작곡을 해 봐야 곡에 너의 느낌을 넣을 수 있어."
"하지만 전 최대한 느낌을 살려요. 여러 가지를 상상하면서요. 교수님께서도 제 스타일 잘 아시잖아요."
"알지. 그게 너의 가장 큰 장점이야. 하지만 너는 너의 이야기를 상상한 적이 있니?"
"..."
"오홍홍홍- 이 음악의 신이 하는 말 대로 들어~ 넌 꼭 작곡을 해야 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말이지. 사~ 랑하는 사~ 람~ 아항항항-"

황당한 과제와 함께 끝난 레슨에 호원은 문구점으로 가서 빈 음악노트를 하나 사서 연습실로 들어갔다. 빈 노트 첫 번째 장을 펼쳐 자신의 이름을 쓴 호원은 일단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하나를 그리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니까... 어휴-"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쉰 호원이 머리를 쥐어 뜯으며 피아노 위로 쓰러지 듯 업드렸다. 괜히 낮은 도부터 높은 도 까지 쭉 치다가 천천히 치다가. 동요도 한 번 연주 해 보고 잘 치지는 않지만 알고 있는 재즈 곡 몇 곡을 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호원은 절망에 빠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음... 동우... 아니얏!!"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호원은 피아노 건반에 머리를 박았다. 괴상한 음이 연습실을 울렸다. 호원은 그대로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피아노에서는 이상한 소리들이 울리고 있었다.

"으아아아- 죽겠다-"

그러던 중 마치 구세주 처럼 우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야야야. 나랑 동우랑 피자 먹으로 가려고 하는 데. 같이 가자!
"피자요?"
-응. 응! 피자~ 피자~

호원은 딱히 연습실에 있는 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일어나 가방을 챙겨 연습실을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학교 앞에 있는 피자집으로 달려가듯 들어간 호원은 단숨에 우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샐러드바에서 엄청난 양의 샐러드를 떠 온 우현은 감자샐러드를 입에 구겨넣고 있었다.

"왔냐?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
"몰라요... 에효. 슬럼프인가..."
"야, 야... 함부로 그러지 마라. 큰일 난다."
"알아요... 피아노 슬럼프가 아니라... 인생에 슬럼프에요."
"오호- 뭐냐? 내가 다 상담해 주마."
"됐어요. 차라리 동우 형 한테 상담하는 게 더 마음 편하겠다."

호원은 턱을 괸 채로 동우를 바라보았다. 동우가 하는 포크질부터 손가락 하나 하나. 입술, 콧등, 앞머리에 가려 살짝씩 보이는 곧은 이마, 긴 속눈썹, 까만 눈동자, 살짝 오른 볼살.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호원. 그런 호원을 또 보던 우현은 호원과 동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우현이 농담 삼아,

"너 동우 좋아하냐?"

라는 말에 호원이 과하게 반응 하며 허리를 바로 세운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호원이 놀라 뭐라 더 말을 하려는 찰나- 동우가 옹알거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응. 나 호야 좋아해."

 

 

 

 

W.별모양곰돌이

 

 

7.

 

 

"응. 나 호야 좋아해."

갑작스러운 동우의 말에 놀란 호원의 귀가 빨개진다. 우현은 한껏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만 웃음소리가 나지 않는다. 너무 웃겨서 웃음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 반면에 동우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멀뚱히 포크만 쥐고 앉아 있다가 샐러드 접시에 담긴 감자샐러드를 휘적거리기 시작한다. 호원은 완전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그 자리에서 얼어 있었다. 모든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 모든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호원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떠한 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 지 조차 알지 못 하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아니,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건 지 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지가 되지 않는다.

"주문하신 피자 나왔습니다."

발랄한 여자 아르바이트 생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때서야 호원이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우현은 웃다 지쳐 옆에 쓰러져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호원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행동도 하지 못 하고 이제야 인식이 되는 동우의 말에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야."

우현이 한껏 건들거리며 호원의 정수리를 쿡- 하고 찌르지만 호원은,

"왜요오-"

라며 늘어지는 말투로 우현의 말을 받을 뿐이다. 우현은 우선 동우에게 피자를 한 조각 덜어준 뒤 손톱으로 호원의 정수리 부분을 쿡, 쿡 찔렀다. 그것도 꽤나 아프게. 하지만 호원은 전혀 감흥 없다는 듯 테이블에 머리를 몇 번 박다가 고개를 들었다. 호원의 얼굴에는 오만가지 감정이 다 있었다.

"고백을 받은 소감은?"
"뭐라는 거야."
"뭐라고 하기는? 궁금해서 그런다, 왜!"
"무슨 고백이에요..."
"고백이지 바보야. 동우가 빈말하는 거 봤어? 어? 너 동우한테 고백 받은 거다. 그것도 아주 돌직구로."

괜히 우현이 호들갑 떨면서 주절거리지만 호원은 피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괜히 자기만 이렇게 과한 반응을 하나 싶어 동우를 보는 데 동우는 그런 호원의 마음은 전혀 알지도 못 한 채 우현이 잘라주는 피자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그런데 호원은 그게 또 굉장히 귀여워 보이는 거다.

"하... 진짜 미추어버리겠네."

호원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온갖 혼란과 짜증을 토로했지만 또 금세 호원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진 우현은 그런 호원이 무슨 말을 하던 관심을 끄고 동우가 흘린 피자조각을 주워 자신의 입에 쏙 집어넣었다.


**


방으로 돌아온 호원은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일단 빈 오선지를 펼치고 샤프를 들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만을 그린 오선지에 아무것도 하지 못 한 호원은 깊게 한 숨을 쉬었다.

"나 호야 좋아해... 나 호야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동우가 오후에 피자집에서 한 말을 함께 읊조려 보았다. 뭔가 입에 착착 붙는 느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왜 이 말이 이렇게 좋은 걸까. 호원은 자세를 고쳐 조금 더 편안하게 책상에 엎드린 후 음표 몇 개를 끄적거렸다. 멜로디. 오직 멜로디 만이 있는 악보가 그려지고 있었다. 마디 표시도 없고 그저 멜로디만 있는.
음표를 그리면서 호원은 동우가 그리던 동그라미들이 생각이 났다. 동우가 그린 동그라미를 호원이 채웠다면 이번에는 호원이 그린 동그라미를 동우가 채우는 것 같다. 그렇게 멜로디만이 가득한. 어떤 음인지는 잘 모르고 그저 호원의 흥얼거림과 상상으로만 만들어져 나가는 그 악보에서 호원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지 않아도, 박자가 맞지 않아도 왠지 이 곡은 호원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 될 것 같다. 그리고 호원은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동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호원은 수업을 가기 전 다시 한 번 오선지를 펼쳤다. 멜로디만 있는 곡. 마치 동요처럼 단순한 멜로디에 호원은 잠시 고민했다. 어제 저녁 단 한번 만에 만들어 버린 이 곡이. 그저 순수하게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적은 이 오선지가. 과연 교수의 마음에 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뭐- 어쩔꺼야. 라는 생각으로 공책을 접어 가방에 집어넣는 호원이다. 괜히 두근거리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음대로 향하는 호원의 발걸음이 조금 빠르다.

오늘따라 유난히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은 교수님께 인사한 호원은 어색하게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어때? 잘 해 봤어?"
"아... 뭐, 나름..."
"한 번 해 볼까?"
"네..."

호원은 자신이 갑자기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해야지. 호원은 노트를 펴서 긴장된 오른 손을 살짝 풀고 건반을 눌렀다. 점점 붉어지는 호원의 귀를 본 교수는 호원이 지금 어떤 감정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지 다 알 수가 있었다. 아주 짧은 멜로디를 마친 호원은 그대로 피아노에 머리를 박았다. 호원이 부끄러울 때 하는 행동이었다.

"아항항항- 왜 그래~ 잘 했는데..."
"쪽팔려요..."
"그래도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너도 확신 하지?"
"... 모르겠습니다... 묻지 마세요..."
"잘 했어. 아주 좋아."

교수의 칭찬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호원은 슬쩍 웃으면서 노트를 접었다.

"너 웃으니까 꽤 귀엽다? 흐흥-"
"... 교수님, 저한테 흑심 가지지 마세요."
"좋아하는 사람이 연상이지? 딱 느낌이 온다."
"뭐... 비슷해요."
"자, 이제는 레슨 시작 해 볼까?"


**


레슨을 마친 호원은 단숨에 동우가 있는 미대로 향했다. 동우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다. 호원은 이런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인정하기에 조금 쑥스러웠지만 자신이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동우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호원은 조금 더 적극적이게 되었다. 호원은 잠시 매점에 들러 동우가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미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동우가 주로 작업하는 작업실 안으로 들어간 호원은 동우가 커다란 캔버스 밑에서 페인트를 섞는 것을 보았다. 호원이 동우의 이름을 부르지만 동우는 들리지도 않는 다는 듯 여전히 페인트를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들고 있었다. 호원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동우의 옆으로 조심히 걸어갔다. 동우는 페인트를 섞다 힘이 들었는 지 바닥에 엉덩이를 데로 앉으려 하는 도중 살짝 중심을 잃고 옆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캔버스를 건드리고 말았다.

"어어..."

커다란 캔버스가 넘어지면서 동우의 위를 덮치려 하자 호원은 서둘러 뛰어 동우를 재빨라 감싸 안았다. 한 손으로는 동우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쓰러지려는 캔버스를 받쳤다. 호원은 쓰러지던 캔버스를 들어 올려 다시 세우고 중심을 잡았다. 오른쪽 팔에 짧게 느껴지는 경련에 호원이 팔을 감쌌다. 동우가 혹시나 다치지는 않았나보지만 동우는 넘어졌던 몸을 일으켜 묵묵히 페인트를 다시 섞을 뿐이다.

"아으..."

호원은 계속되는 근육 통증을 호소 하지만 동우의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든 호원은 동우의 다시 쪼그려 앉은 뒷모습을 묵묵히 보았을 뿐이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들어온 우현이 팔을 붙잡고 통증을 호소하는 호원을 보고 급하게 호원에게 다가갔다.

"야, 너 왜 그래? 괜찮아? 팔을 왜 이렇게 떨어?"
"... 캔버스가 넘어져서... 잡으려다.. 으으..."
"병원 가야겠다."
"아, 네... 흐으..."

우현이 호원을 부축해서 작업실을 나가는 그 순간 까지도 동우는 호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해 보였다. 호원은 끝까지 동우를 보았지만 눈을 마주쳐 주지도, 그저 페인트에만 집중을 하고 있는 동우에게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병원에서의 진단은 생각보다 심각하지는 않았다. 잠깐 근육이 놀랐고 원래 피아노를 쳐서 어깨부분이 조금 뭉친 것도 원인이 라는 의사의 진단에 안심을 한 호원은 당분간 레슨을 쉬기로 하고 휴식기간을 가지기로 하였다. 잠시 본가로 내려간 호원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오랜만에 먹은 엄마가 해 주신 밥도 좋고 맛있었지만 호원의 기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 이유도 모른 채 호원은 침대에 누웠다.

"하아..."

괜히 한숨이 나와 호원은 답답했다. 3일 정도 본가에서 휴식을 취한 뒤 호원은 서울로 올라왔다. 레슨을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는 동안에도 호원의 다운된 기분은 풀리지가 않았다. 뭔가 답답한 마음에 호원은 계속 한숨을 쉬었다. 레슨을 가는 동안에도 기분이 계속 다운이 되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왜 이런 걸까... 동우의 그 시큰둥한 표정이 자꾸만 떠올라 호원은 가슴이 답답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간 호원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아 3일 동안 완전히 푹 쉬겠다는 생각으로 피아노 연습을 단 한 번도 하지도 않았다. 호원의 그리 좋지 않은 표정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교수가 호원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호원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호원이 스스로 피아노를 시작할 때 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호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을 뿐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호원아. 뭐 고민 있어서 그러니?"
"... 아니요..."

고개를 젖던 호원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호원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더 이상 주체를 하지 못 하고 호원의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놀란 교수가 호원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유를 물었지만 호원은 입술을 깨물고 눈물만 뚝뚝 흘린 뿐이었다.

"교수님... 피아노 못 칠것 같아요..."
"호원아... 아니야. 할 수 있어. 응?"
"아니요... 피아노가 무서워졌어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이미지가... 안 떠 올라요..."
"호원아."
"교수님... 저 어떡해요? 어떡하죠?"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호원을 어떻게 하지 못 하던 교수가 우는 호원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예상치도 못한 일로 호원에게 없었던 슬럼프가 찾아 온 것이다.

 

 

 

 

 


W.별모양곰돌이

 

 

완결

 

 

처음으로 슬럼프가 찾아오자 당황한 호원은 하루종일 연습실에만 있어 보기도 하고 무조건 피아노악보에 있는 곡을 다 쳐보았지만 예전처럼 피아노를 칠 수가 없었다. 호원은 자신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감각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온 슬럼프에 호원은 방황이 시작되었다.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호원은 레슨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연습실에만 있었다. 연습실과 기숙사만을 반복하며 오가던 호원을 본 우현은 겨우겨우 호원을 불러 세웠다. 호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너 밥은 먹고 다니냐? 요즘 미대에도 잘 안 보이고...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아니에요.”

고개를 든 호원은 우현의 옆에 동우가 있음을 확인했다. 동우는 시선을 전혀 호원에게는 두지 않고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호원은 왠지 서글퍼지기 시작하고 왠지 모르게 무기력한 기분까지 든다.

“갈게요.”
“어어- 야. 같이 밥이라도...”
“입 맛 없어요.”

그리고 호원은 그대로 다시 연습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호원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던 우현이 동우의 손을 잡았다. 우현이 동우를 데리고 다시 미대로 돌아가려 하는 데 동우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동우야. 일어나-”
“...”
“장동우?”

동우는 완고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이제야 호원이 사라진 연습실 복도를 보고 있었다. 우현은 동우를 일으키려 했지만 동우의 고집은 꺾기지 않고 그 때문에 우현은 한참이나 동우의 옆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연습실로 들어온 호원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멍하니 건반들을 보았다. 동우에 대한 마음을 겨우겨우 깨닫고 이제부터 진심으로 사랑하리라 마음먹었지만 동우는 호원의 생각 만큼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야 동우의 장애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 쉽게 받아드릴 것이 아니였음을 알았다. 호원은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고 또 닦아 내었다. 왠지 모를 실망감과 짜증에 머리가 아프다.

콰앙-

기분 나쁠 정도의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호원은 그대로 주먹을 건반에 내리쳤다. 마치 피아노 건반이 모두 부서질 것 처럼 호원은 두 주먹으로 건반을 내리 쳤다.

“흐으... 으아악!!!”

갈라진 호원의 목소리가 피아노의 거친 소리와 함께 연습실에 울렸지만 호원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힘들다는 기분이 이렇게 절망적이고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호원은 이제 더 이상 동우를 보지 않고 보아서도 안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동우는 자신에게 있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라,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호원은 그 괴로움에 더욱 더 신경질 적으로 변했다.


**


술, 연습실, 기숙사, 술, 그리고 또 술... 이제 호원은 연습실도 잘 가지 않았다. 피아노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용기가 나지도 않았고 자신도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곤 오직 이 피아노 밖에 없었던 호원에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것은. 이호원 자신을 잃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호원은 오늘도 술을 마시고 두 다리를 끌다 싶이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방에는 우현이 있었다. 우현을 본 호원은 천천히 걸어 우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호원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자 우현은 그런 호원의 머리통을 다정히 쓸어 주었다.

“형... 나 힘들어...”
“괜찮아... 다 괜찮아.”

한참을 호원을 토닥여 주던 우현이 호원을 떼어 내고 호원을 침대에 앉혔다. 그 옆에 삐딱하게 앉은 우현은 호원의 어깨를 툭- 하고 가볍게 쳤다.

“요즘 동우 뭐 하는 줄 알아?”
“...”

동우를 잊으려 하는데 잘 잊혀지지 않아서 괴로운데. 그런데 또 우현의 입에서 나온 동우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동우라는 이름이 이렇게 자신에게 자극제가 될 줄은 호원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호원에게 동우라는 이름과 존재는 너무나도 크다.

“동우가 캔버스에 그림을 안 그려. 아마도 너가 캔버스 때문에 자기한테 안 오는 거라 생각하나봐.”
“캔버스에... 안 그린다구요...?”
“벽이나 아니면 그림 안 그리고 조각을 하거나 해. 캔버스에 절대로 안 그려.”

우현의 말에 호원은 의외로 냉소를 날렸다. 호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배게에 얼굴을 묻은 호원은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중얼거린다.

“나 혼자 동우형 좋아하면 뭐 해... 동우형이 과연 사랑이라는감정을 아는지도 모르겠고. 나 혼자 삽질하는 거 같아서 자존심도 상하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금지된 사랑이잖아요. 나는 자신이 없어요. 형.”
“호원아.”
“차라리 동우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이러지도 않았겠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가슴이 너무 아프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힘이 들어요...”

호원의 중얼거림에 우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뭐라 위로를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던지 호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호원이 그대로 잠이 들 때 까지 옆에 있던 우현은 조심스럽게 호원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고 학기를 마치는 날이 왔다.


**


우현이 호원에게 꼭 종강작품전시회에는 오라고 해서 호원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미대로 향했다. 여전히 피아노를 치는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으로 피아노를 다루는 스킬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호원은 더 이상 그 예전의 감각을 살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이미지에 의존하지 못 하고 악보에 충실한 연주만을 하다 보니 호원은 조금은 예민한 성격이 되었다. 자신의 방식대로 할 수 없으니 더욱 완벽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탓이다.

미대 건물로 들어간 호원은 오랜만에 오는 탓에 어색함을 느꼈다. 물감 냄새와 기름 냄새가 묘하게 섞인 미대 전시관을 돌아다니다 캔버스에 그려지지 않고 벽에 그려진 그림을 발견했다. 호기심을 느낀 호원이 그 그림 앞으로 갔다. 벽에 바로 그린 그림. 그리고 호원은 몇 달 전 우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사고 이후 동우가 더 이상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말. 호원은 아차 싶어 그림에서 한 발자국 물러 섰다. 고개를 숙여 망설이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어 그림을 보았다. 알 수 없는 선들의 향현이 가득한 그림. 그 색이 너무나도 따스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인다.

“예쁘다...”

저절로 예쁘다는 감탄사가 나온다. 온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동우를 사랑했던 그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머리가 맑아지고 하나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왠지 그 그림에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고 동우가 생각이 나는가 싶더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동우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그림을 계속 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자신을 꼭 안아 주며 등을 토닥여 주는 기분까지 든다. 위로를 받는 느낌. 호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다. 호원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 하고 그대로 전시장을 뛰쳐나갔다.

꽤 가파른 오르막을 차오르는 숨과 함께 뛰어 올라가며 급하게 연습실로 뛰어 들어갔다. 탁, 탁, 탁. 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고 연습실로 들어간 호원은 가방도 내려 놓지 않고 그대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피아노가 너무나도 치고 싶었다. 그것도 마음대로.

정말 미쳤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호원은 자기가 그렇게 치고 싶었던 피아노를 자기 마음대로 치기 시작했다. 무슨 곡인지도 모르겠고. 음이 맞는 지. 화성법이 맞는 지. 혹은 박자가 맞는 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호원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피아노를 치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리고 호원은 자신의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조금 전 동우가 그린 그림이 자신의 주위에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하하...”

땀까지 흘리면서 피아노에 열중하던 호원은 자신의 슬럼프가 드디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처럼 이미지를 떠 올리고 자유롭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자신감이 들었다. 더 이상 자신은 악보에 갇혀서 피아노를 칠 필요가 없었다. 혼자서 웃으면서, 울면서 피아노를 치던 호원은 문득 연습실 밖에 어둑해 졌다는 것을 느꼈다.

“벌써 시간이...”

멍하니 밖을 보던 호원은 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수화음이 가고 우현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현이 뭐라고 말을 끝 맺기도 전에 호원은 횡설수설 자신의 말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형! 저 피아노 다시 칠 수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근데 전시회장에 갔는데 갑자기 이러는 거에요! 형! 저 자신감이 생겼어요. 지금 미쳐버릴 것 같아요!”
-야, 천천히 말 좀...
“형! 저 진짜 지금 너무 좋아요! 진짜 이대로 뛰어 내려도 좋아요! 형!”
-왜!
“동우형이 보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아요. 동우형이 너무 보고 싶어요. 지금 당장 보고 싶어요.”
-동우 지금 나랑 있어. 전시회장에.

우현의 말이 끝나자 마자 호원은 연습실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뛰어 올라왔던 그 오르막을 다시 뛰어 내려가며 호원은 숨이 턱까지 차 올라 숨 쉬기 힘들 때 까지 뛰었다. 전시회장으로 빠르게 달려 간 호원은 자신의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보고 있는 동우를 발견 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호원은 뛰어가 동우를 끌어 안았다. 순순히 호원에게 안긴 동우는 호원의 거친 숨 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었다. 호원이 동우를 끌어안고 한참을 있는 데 동우가 팔을 들어 함께 호원을 안았다. 강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안아주는 그 느낌에 호원이 깜짝 놀라 동우를 바라 보았다. 잠시나마 동우의 눈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동우형...”
“호야.”

호원의 말에 동우가 반응을 했다. 호원은 동우의 반응에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동우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하다니. 호원은 가슴이 뛰는 것은 느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감정이 솟아 오른는 것도... 호원은 다시 동우를 끌어 안았다. 품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아 한참을 그러고 있다 우현이 벽에 박힌 동우의 이름과 함께 작품명을 보았다.

동우의 작품명은 바로 ‘이호원’ 이였다.

 

 

 

 

 


W.별모양곰돌이

 

 

붓과 건반의 교향곡+

 

 

-프랑스는 어때?
"좋아요. 동우형도... 잘 적응하는 것 같고."
-이번에 신문에도 크게 났더라. 멋있어.
"하하. 고마워요."

우현의 칭찬에 웃은 호원이 오른손에 있던 전화기를 왼손에 들었다. 벽 한 면 전체가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커다란 방에서 동우는 그림그리기에 열심이다. 그런 동우를 보며 호원은 소리 없이 웃었다.

"형은 요즘 뭐 해요?"
-요즘? 나야 뭐... 여전히 그림 그리고 있지.
"아... 졸업하고 형 못 본지도 벌써 2년이네."
-그러게. 새삼스럽게 보고 싶다. 동우는 잘 지내?
-네. 동우 형도 그림 그리면서 살아요.

동우가 그림을 그리다 말고 호원을 봤다. 호원과 눈을 마주친 동우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다시 몸을 돌려 호원을 보며 웃었다.

"호야..."

동우의 부름에 전화를 하던 것을 멈추고 호원이 동우를 보았다.

"나 쉬마려..."

쉬가 마렵다며 울먹거리는 동우를 보자마자 호원이 전화를 끊었다. 동우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니 동우가 문을 쾅 닫는다. 보지마!! 라면서 큰 소리를 치면서. 그게 또 귀여워 호원은 혼자 웃으면서 동우가 화장실을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곧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동우가 종종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호원은 보지도 않고 다시 캔버스로 가 그림을 그린다. 밝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린 동우를 보며 호원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하예종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들과 주위 사람들은 모두 호원이 교수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호원은 동우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동우와 함께 살고 싶었다. 동우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는 크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냥 자유로운 프랑스에서 가끔씩 공연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었다. 서로 아끼면서 그림 그리고 피아노 치면서 살고 싶었다.

"형."
"음음... 흐음..."

호원이 즐겨 치는 야상곡을 흥얼거리면서 동우는 그림을 계속 그렸다. 동우의 옆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던 호원이 또 다시 웃었다.

"형, 행복해요?"

여전히 호원의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동우지만 호원은 알 수 있었다. 동우가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눈도 잘 마주치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호원이 부르면 대답도 하고 또 필요할 때면 호원을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호야뽀뽀... 하고 싶어."

그림을 그리다 말고 동우가 붓을 내려놓았다. 얼굴이며 옷이며 온통 물감을 묻혔으면서 동우는 아랑곳 않고 웃어보였다. 호원은 동우에게 다가가 동우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호원이 먼저 뽀뽀를 하면 짜증난다고 울어버리는 동우였다. 호원은 동우가 먼저 자신에게 뽀뽀를 하기를 기다렸다.

"호야뽀뽀..."

동우는 호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맞춰진 입술에 호원이 또 미소를 지었다. 동우는 한 번에 멈추지 않고 자신이 만족할 때 까지 뽀뽀를 계속 했다. 동우 특유의 고집이었다.

"헤헤... 그림. 그림."

동우가 호원에게서 떨어져 다시 붓을 집어 들었다. 밑그림을 모두 그린 모양인지 이제는 세밀한 붓을 집어 들었다.

"으흠- 흥흠-"

동우가 신이 난 모양.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을 그린다.

"동우는 호야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
"네. 저도 동우형이 좋아요."

호원은 보지도 않고 혼잣말을 하는 동우를 보며 호원이 피아노에 앉았다.

"피아노 쳐 줄게요."
"호야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 호야가 좋아. 뽀로로보다 좋아."

호원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동우가 혼잣말을 했다. 호원은 그런 동우를 보며 피아노건반을 매만졌다. 오직 동우만을 위해서 작곡한 곡.

"형, 잘 들어요."

동우를 향해 말 했지만 동우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여전히 그림에만 몰두다. 호원은 동우의 반응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래도 동우가 자신을 많이 아껴주는 것을 아는 호원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호원의 손이 부드럽게 건반 위에서 움직였다. 오직 동우를 위해서만 작곡한 것.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한 사람만을 위한 세레나데.

호원의 멜로디를 가만히 듣던 동우가 붓질을 멈추고 호원의 뒷모습을 보았다. 동우는 붓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호원의 뒤로 가 호원의 등을 매만졌다. 이전에는 없었던 동우의 행동에 놀란 호원이 움찔 했지만 동우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 하고 호원의 등을 만졌다. 동우는 자신의 미술도구가 쌓여 있는 방으로 가 작은 붓 하나와 팔레트를 가지고 왔다. 재빠르게 호원의 뒤에 다시 슨 동우가 호원의 등을 보에 붓을 놀렸다.

"호야... 그림."

동우가 자신의 등에 그림을 그릴 것을 눈치 챈 호원이 피식 웃으면서 건반을 눌렀다. 부드러운 호원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휘저으며 음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음색을 들으며 동우는 붓을 그대로 놀렸다. 동우의 붓 위에서 그려지는 아름다운 그림...

"끝..."

끝이라는 말과 함께 호원의 연주도 멈췄다. 호원은 연주를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옷을 벗었다. 물감이 다 마른 것을 기다렸기 때문. 호원은 옷을 벗어 자신의 티셔츠 위에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

"어... 나에요?"

호원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누군가가 그려진 자신의 티셔츠를 확인했다. 지금가지 동우가 사람을 그린 적이 없었는데...

"형. 이거 누구에요?"
"..."

대답 없이 동우가 손가락을 들어 호원을 가리켰다. 호원의 볼을 쿡- 찌른 동우가 베시시- 웃었다. 아쉽게도...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동우가 웃는 것을 본 호원도 같이 웃었다. 비록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호원은 동우가 충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구나."

선명하게 그려진 피아노와 뒷모습에 호원은 자신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나 그린 거죠?"

호원의 물음에 동우가 대답이 없다. 대신 호원의 손을 잡은 동우가 호원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긍정의 뜻. 호원은 동우와 같이 살면서 동우의 의사소통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호원은 두 팔을 크게 벌려 동우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자신의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동우의 느낌이 좋다. 호원은 얌전히 안겨있는 동우의 등을 토닥이며 볼에 입술을 맞췄다.

그래, 이렇게 살면 돼. 누구처럼 부귀영화를 부릴 필요도 없다. 그냥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면 돼. 호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우를 더 꽉 껴안았다. 하고 싶은 그림 그리고 하고 싶은 피아노 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동우는 자신을 꽉 끌어안는 호원을 느끼며 자신도 호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호야..."
"네?"
"... 쉬마려."

또 쉬가 마렵다는 동우를 보며 호원이 소리 죽여 웃었다. 호원은 동우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래, 정말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면 된다. 그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그렇게. 남들 사는 것처럼.

 

 


---------------------

원래는 한달 후에 돌아오려고 했는데...ㅠㅠㅋㅋㅋㅋㅋㅋ

지금까지 썼던 글이 반응이 좋아서 그냥 올릴게요...

부끄럽지만.../////ㅎㅎ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회원전용으로 돌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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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말로표현못할만큼좋아요ㅜㅜㅜ ㅜㅜ작가님신알신하고갑니다너무잘봤어요!!!!ㅜㅜㅜ
11년 전
독자2
작가님 제사랑 먹으세요♥♥♥♥♥♥♥♥아까 댓글은 못달고 신알신만했었는데..정말 작가님 완전 쨩ㅠㅠㅠ
11년 전
독자3
헐 작가님 최고예요ㅜㅠㅠㅠ 이런 글 느므느므 좋습니다ㅠㅠㅠ 소재까지 제 스타일... 핳.. 신알신 하고갑니다!!
11년 전
독자4
와..대박이네요 작가님완전금손이세요ㅠㅠㅠ신알신하고갑니다♥♥♥혹시암호닉받으시나요?
11년 전
별모양곰돌이
암호닉이 뭔가요^^;??
11년 전
독자7
여기가익명이라서로알수없으니암호닉을통해 알아보는거죠! 제가만약암호닉을별모양이라고신청하면다음편부터 별모양이에요라고말하면 아이독자분이그독자분이구나 하고알수있는거죠!
11년 전
별모양곰돌이
아~ 글쿤요!!!!!! 암호닉 해 주세요>_<
11년 전
독자8
국밥으로신청이요!!!!^∇^ 다음작품도기대하며기다리고있겠슴당
11년 전
독자5
작가님~ 매번 작가님의 작품이 올라올때마다 항상 구독하는데요~ 그저 엄청나다는 생각뿐이예요~(참고로 제가 요즘 서번트증후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글이 올라오니 깜짝 놀랐답니다!!) 글의 분위기가 달달해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어요~ 특히 마지막 부분 "그래, 정말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면 된다. 그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그렇게. 남들 사는 것처럼." 라는 대사는 정말...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ㅠ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호원이 동우를 그저 한사람으로, 사랑으로 대하는게 너무 좋아요~ 잘 봤습니다~

11년 전
독자6
와 정말 잘 읽었어요ㅜㅠ 호원이 슬럼프를 극복해준게 동우의 그림!!!
작가님 정말 금손이세요!!!

11년 전
독자9
부엉이예요!!아무슨영화한편본느낌ㅠㅠㅠㅠㅠ진짜작가님금손대박짱금손이예요ㅠㅠㅠㅠㅠㅠㅠ그나저나...부엉이의눈에뙇!걸려버린오타두개남기고가요흐흫제일윗줄처음에표정!
11년 전
독자10
그리고아주쪼끔밑에내려가다보면이부분있는데요젤윗줄끝부분쯤에아마도손톱으로찌른거겠지요??아니면왕소금소금..핳
11년 전
별모양곰돌이
ㅎㅎㅎㅎ 감사해부엉~!!!!!! 오타를 찾는 그대는 진정한 부엉이!!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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