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이상 편하게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한국은 없다. 티비를 틀면 북한과의 일촉즉발 상황에 대한 긴급속보만이 가득했고, 어느 마트를 가도 식품코너와 창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모든 국민들은 지금 한국에서 타국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나 박찬열은, 그런 국민들의 대피를 도와 호위해주는 호위요원이다.
WARRIOR
BY 붉은악마
운 안 좋게도 내가 발령받은 지역 A-12는 어제 새벽, 북한으로부터의 도발유도탄 폭격을 받았다. 때문에 사망자는 약 20명. 케어하던 사람들의 40%가 죽었다. 험악하고 우울한 분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고, 나한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윗사람들에게 보고하자 돌아온 대답은 그저 빨리 국민들을 대피시키라는 이야기 뿐. 씨발, 욕을 읊조리며 무전을 끊고 임시 천막 안에서 나왔다. 천막 구비 상황도 좋지 않아서 여성과 아이들을 제외한 인원은 모두 그냥 흙바닥에 서로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눈에 익은 남학생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 부분을 툭툭 털고는 내게 걸어온다. 아마, 변백현이라고 했지. 고등학교 3학년이라던.
"저... 아저씨."
"왜."
"약 같은 건 없죠?"
이 녀석과 함께 피난 길을 나선 것도 벌써 두달 째. 부모님은 원래 따로 살아서 행방을 모른다고 했고, 하나 있던 여동생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던 북한의 첫 폭격 때 죽었다. 따라서 혼자인 아이가 약을 찾는걸 보면, 가족 때문에 그런 건 아닐텐데. 본인이 아파서 찾아온건가 해서 얼굴을 좀 살펴보니 평소보다 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 아프냐?"
아이는 말을 할까, 말까 하는 표정을 한 채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결국 고개를 들어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머리가 좀 아파서... 아, 심한 건 아니구요!"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내 표정에 겁먹기라도 한건지 손사레를 치며 심한 건 아니라고 하는 아이를 보며 지금 남아있는 상비약의 양을 계산했다. 정부로부터 각 지역에 받은 기본 구급상비약은 극소량. 그것도 두 달간의 여정에 이미 바닥이 난 상태일텐데. 그래도 두통약 정도는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 아이에게 잠깐 있으라고 말한 뒤 다시 내 호위요원 전용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내 바로 밑에서 보좌 역할을 하는 경수에게 두통약 좀 있냐고 물으니, 쓰고 있는 뿔테를 벗어 책상에 내려놓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없어요. 다 떨어졌어. 경수의 말에 한숨을 쉬고는 내 책상에 놓여있던 초코바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제대로 된 밥도 먹지 못하고 피난 강행을해서 더욱 지쳐있으리라. 주머니 안에 든 초코바의 포장을 손으로 잘게 만지며 천막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왔는데. 아이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변백현! 정신차려!"
아까와는 다르게 입술은 핏기없이 말라 각질도 일어났고, 아이를 흙바닥에서 일으키기 위해 잡은 팔과 허리는 뜨거웠다. 왜 아까는 이 열을 느끼지 못한 건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이를 들쳐안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호위요원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천막인지라 놀라는 경수에게 '찬 물 가져와. 물수건도.' 라는 말을 하고는 내 간이 침대에 아이를 눕혔다. 헤질대로 헤지고 많이 더러워진 하복차림새의 교복의 윗단추를 조심히 풀어주었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숨통이 트이는지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어가는 아이를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 (타임루프 뿅! 쾅쾅 거리는 전쟁터로 타임루프합니다 조각글이자나여)
씨발, 역시 아이를 이 곳까지 따라오게 한 건 판단 미스였다. 그냥 아까 피난민들과 함께 섞어서 보냈으면 이런 위험한 일은 없었을 텐데. 깊은 흙도랑 속에 아이와 함께 몸을 숙이고 있지만 이 곳으로 수류탄이라도 굴러들어오면 다 끝이였다. 바로 뒤에서 터지는 총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겁먹은건지 아무 말 못하고 몸만 떠는 아이를 보며 속으로 욕을 수십번은 외쳤다. 아이가 끝까지 날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 왜 그래라 허락을 해준것인지. 아이를 옆에 두고 싶었던 순전한 내 욕심이었다.
"백현아."
"...."
"변백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이를 부르니 아직도 멍한 상태로 고개만 돌려 내 눈을 바라보는데 그 눈에는 공포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앞에 있는 건 5명. 내 총에 있는 총알 수는 4개... 불가능하지만,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거면 돼. 내 머리에 써져있던 군모를 벗어 아이에게 씌어 주었다. 그러자 더욱 겁먹은 얼굴을 하면 내 손목을 잡고 떼내려고 하는 아이를 보니 다시 마음이 약해지려고 한다. 안돼, 넌 가야지. 백현아.
"시, 싫어. 이거 왜 나 줘요. 아저씨꺼잖아, 응?"
"백현아. 잘 들어. 지금부터 한 번만 말할게. 백현이 똑똑하니까."
"아저씨. 싫어. 지금 나 보내려고 그러지? 싫어, 싫다고!"
자신에게는 좀 큰 군모를 써서 얼굴을 다 가린채로 눈물 줄기가 보이는 아이의 볼을 닦아주면서 잡고 짧게 입 맞췄다. 그러자 더 눈물을 터뜨리며 내게 안겨오려 하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 떼내고 얼굴을 마주했다. 이제 진짜 시간 없는데, 얼굴 좀 더 보자.
"백현아. 아저씨 안 죽어. 니가 그랬잖아. 나 절대 안죽는다고."
"흐으.. 아저씨가, 지금, 나, 으... 보내려고!"
"아니야. 우리 지금 헤어지는거 아니야. 잠깐 먼저 가있어. 아저씨 갈게."
"거짓말! 아저씨... 그러지마. 우리 같이 가자, 응?"
여전히 떼를 쓰는 아이에게 좋은 말로 타이르고 있던 찰나, 내 뒤 30M쯤 떨어진 거리에 수류탄이 굴러오는게 보였다. 얼른 아이를 뒤로 눕히며 그 위를 내 몸으로 막으며 엎드렸다. 순간 뒤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상흔은 없었지만 소음탓인지 내 한쪽 귀에서 뜨뜻한 피가 흘렀다. 아, 아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한다.
"현아."
"아저씨! 피, 피! 피.. 아저씨, 흐으, 어떡해, 피.."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저기 나무 보이지. 그 쪽으로 쭉 뛰어가. 가면 경수형 있을 거야. 같이 피난소까지 뛰어가. 아저씨가 뒤에서 따라갈게."
"싫어. 안 돼. 아저씨 두고 어딜 가..."
아이가 고개까지 뒤로 젖힌 채 크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여전히 머리 위로는 총알이 날아다니고, 계속 된 포탄 때문에 숨쉬기 힘들만큼 공기의 화약농도도 높아지고 있다. 위험했다. 아이를 먼저 보내야만 한다. 그때 저 멀리 나무 쪽에서 초록색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경수의 신호탄이다. 지금이 기회야. 이걸 놓치면 아이는 없다.
"알겠어. 아저씨도 같이 갈게. 그럼 되지?"
"으,응? 흡, 아저씨도 같이 가는거야? 정말?"
"그래. 가는 거야. 준비해. 숫자 센다."
"아저씨..."
하나. 백현아. 널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니가 여동생 손을 잡고 와서 나한테 인사할 때. 그때부터 니가 눈에 들어오더라.
둘. 너한테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서로 마음 알아간지는 아직 보름도 안 된 것 같은데.
셋. 그래도 백현아. 나는 정말로 행복했어. 우리 백현이를 만나서, 너랑 사랑하게 되서. 한 번도 말 못해줘서 미안해. 사랑해.
아이의 손을 잡고 깊은 도랑 속에서 올라오는 순간 아이의 손을 놨다. 총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왔고, 난 아이를 호위하며 총을 겨눴다. 4발 중 2발은 명중. 아이는 내 걱정과는 다르게 이 상황이 무섭고 두려운지 내가 시키지 않아도 경수가 있는 쪽으로 잘 뛰어갔고, 난 더이상 아이를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 멈춰 그들과 대적했다. 그러자 오로지 내게로만 총구가 놓여지고, 총알이 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아이는 경수에게로 잘 도착했으리라. 그걸로 됐다. 점점 정신이 흐려졌지만 니가 살아있으면 그걸로 된다, 백현아. 넌 살아남아서 예쁜 부인을 얻고, 예쁜 자식을 낳아서 나중에 그 자식들한테 그냥 말해줘. 그때 너에게 이런 사람이 있었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