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1위까지 했다던 그 앨범 활동이 끝이 난 변백현은 지금 우리집에 와서 뒹굴고 있다. 데뷔 후 처음으로 받는 휴가를 왜 내 집에서 뒹굴거리며 보내냐고 하니, 휴가라고 어디 나가봤자 팬들 들러붙어서 피곤하기만 하댄다. 그럼 지네 집에 가면 될 것이지, 왜 우리 집에 와서 몇일째 저러고 있는 거냐고. 내가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다시피 한 누나라지만 저 헐거벗은 차림새도 좀 거슬리는데.
"야. 너 진짜 집 안가냐? 아줌마, 아저씨 서운해 하셔."
"응? 가야지, 갈거야. 휴가 끝나기 마지막 전 날."
"불효자식 새끼."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이 새끼는 야행성인거지 자려는 생각도 않는 듯 하다. 아까부터 하늘색 트렁크 하나만 걸치고 소파에 삐딱하니 누워서 케이블 방송을 보고 있는 꼬라지가 가관이다. 셋팅 안 된 머리는 부시시 해서는 감지도 않았지. 피부도 쉬는 동안 관리 안하니까 기름이니, 뾰루지니 더러운 거 다 나고. 아, 저기 트렁크 위로 뽈록 튀어나온 뱃살까지.
"누나."
"...."
"누나아-"
"...."
"야!"
"뒤질래?"
내일 출근해야 하는 날이니까 눈썹 정리 좀 하려 거울 보면서 신중을 가하고 있는데 계속 빽빽대는 변백현 때문에 망쳤다. 저게 지금 4살이나 많은 누나한테 야야 거리는거지? 진짜 오냐오냐해주면서 친동생 대하듯이 길렀더니 아주 싹퉁 바가지가 없어.
"누나, 나 배고파. 야식 먹,"
"니 배를 보고 말해. 너 연예인이긴 하냐?"
"아. 휴식인 사람한테."
하긴 활동기의 변백현은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하긴 했다. 다른 멤버들이 워낙 말라서 자기가 뚱뚱해 보인다나. 활동기 중에 한 번은 다짜고짜 내 집에 처들어와서는 팬들에게 받은 감당 안 될 만큼의 군것질 거리들을 투척하고 갔다. 다이어트 해야되는데 자꾸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며. 근데 그걸 지금 휴식기 핑계대고 우리 집에 와서 지가 다 까서 처먹고 있는게 함정. 저 또라이 새끼. 아무튼... 그래도 고딩 때 변백현에 비하면 확실히 얄쌍해진게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 너무 늦었는데 고칼로리는 좀 그렇고.
"기다려봐. 먹을 거 있나 보게."
"치킨! 아니면 족발?"
"닥쳐, 돼지야. 냉장고에 과일있나 보고 과일 있으면 그거 먹일거야."
저 악독한 누나가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라는 둥, 진짜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기한테 왜 돈을 아끼냐는 둥 꿍얼대는 소리가 들리지만 다 무시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아, 과일이 없네... 야채칸에는 먹을만한 게 뭐가 있나. 고구마...가 있긴 한데. 이건 꿀호박고구마니까 내꺼야. 저런 놈따위한테 이걸 줄 수 없어. 한참을 뒤적거려서 냉장고에서 1분을 초과했다는 '삐삐-' 거리는 소리가 날 때쯤 내 손에 잡힌 건 오이였다. 오이 2개. 이거면 되겠다.
"변백. 오이 먹자."
"아, 뭐야. 꺼져. 아, 빨리 넣어. 냄새 나!"
그렇다. 저 호구같은 새끼는 이 오이의 후레쉬함을 모르는 놈이지. 왜 오이냄새만 맡으면 그렇게 기겁을 하고 지랄똥을 싸는지 모르겠다. 저 새끼 지금 저 태도보면 분명히 안 먹을게 뻔하네. 오랜만에 오이 마사지나 하고 자야겠다. 으, 피곤해. 월요일 되려면 벌써 30분 정도밖에 안남았네. 망할.
"아, 왜 안 넣어!"
"마사지 하고 잘 건데? 냄새 맡기 싫으면 들어가던가. 너도 좀 자라. 다크서클 하고는."
내가 도마와 칼을 들고와서 소파 앞에 앉고 티비를 보며 오이를 자를 준비를 하자 뒤에서 변백현이 내 뒷통수를 눈이 빠져라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그래, 쳐다보든가. 넌 방에 들어가게 되어있어. 빨리 들어가서 자라, 좀. 실은 사귄지 한 달도 안된 남자친구와 매일 12시에 통화를 하고 자고는 했는데 변백현 새끼가 집에 있어서 그 짓을 못해먹겠단 말이지.
"아, 진짜 존나 못됐어. 아줌마 만나면 나중에 다 말할거야."
"그러던가~"
"...나이 먹으면서 성격만 더 괴팍해졌어. 노처녀."
저 씨발놈이...! 26살인데 뭔 노처녀야! 순간 빡친 내가 칼을 던지려다가 겨우 오이로 바꿔 방에 들어가려는 변백현의 종아리에 던졌다. 명중. 은 FAIL... 얄밉게 콩콩거리며 피한 변백현이 집게 손가락으로 오이를 들어 내 쪽으로 다시 던지고는 방문을 소리나게 닫고 사라진다. (근데 거기 내 방이잖아)내 앞으로 됴르르 굴러오는 오이만 괜히 아팠겠다. 흐, 내가 빨리 잘라서 내 피부에 붙여줄게. 편히 쉬렴.
딱, 딱, 거리며 오이를 얇게 썰고는 얼굴에 하나씩 올렸다. 다 붙이고나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거울을 가져와 얼굴을 보는데... 징그럽긴한데 시원하다. 얼굴에 오이를 가득 붙인채로 거울을 보며 이유모를 예쁜 척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아, 맞아. 12시구나. 큼큼. 조용히 해야지.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모르는 변백현이 듣고 나와서 존나 놀릴지도.
"여보세요?"
[어, 자기야. 나야.]
"응. 집 들어갔어? 술 약속 있다며."
[응. 계속 2차 가자는데 그냥 들어왔어. 자기 걱정할까봐. 근데 자기 목소리가 왜이렇게 작아? 집에 누구 있어?]
"어? 아니! 있기는... 나 혼자 사는거 알잖아."
그때 변백현이 방 안에서 겁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제끼기 시작했다. '그래 울프! 내가 울프! 아우!!!!!!' 아니, 저 미친 새끼가 진짜 오이 냄새 맡고 미치기라도 했나 해서 얼른 손으로 핸드폰의 송화구를 고 닫힌 문을 발로 조용히 찼다. 조용히 해라, 새끼야. 제발.
[자기야? 자기야!]
"으, 응... 아, 자기야.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네. 일찍 끊어야겠다."
[몸이 왜 안좋아? 약 사갈까? 어디가 안 좋은데?]
그때 방 문 너머로 들리는 건 변백현의 방정맞은 웃음소리와 비아냥 거리는 소리. '아, 미친!!! 자기래!!!! 자기래액!!!!!!!' 저 미친 놈이 진짜. 아오. 얼른 끊어야겠다. 자꾸 송화구를 막고 말을 끊는 나때문에 남자친구는 이상한 기색을 느꼈는지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른다.
"자기야. 나 오늘은 통화 오래 못하겠다. 미안해. 끊을게?"
[어? 아, 잠깐만. 자기야. 사랑해 해줘야지.]
여기나 저기나 주책 맞는건 매한가지구나. 으, 성격상 이런거 잘 못하는데... 게다가 이거 변백현이 들으면 지금 지랄한 것 보다 레벨이 다르게 지랄할 것 같은데.
"사랑해..."
[에이, 자기야. 목소리가 너무 작잖아.]
"아, 사랑한다고..."
[뭐라고? 안들려, 자기~]
"으으, 자기야... 사랑해. 응?"
[더 크게!]
그때 방문이 벌컥 열어젖혀졌고 변백현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내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채갔다. 이 새끼 분명 큰 키는 아닌데 내 키가 너무 작아서 그런건지 얘가 까치발 들고 손까지 위로 쭉 뻗고 있으니 뺏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변백현 정강이만 차며 달라고 낑낑 대는데 변백현은 줄 생각을 안한다. 그러더니 폰에 대고 잽싸게 하는 말이.
"아, 씨발. 사랑한다잖아요. 왜 이렇게 찡찡대, 남자가. 끊어!"
... 하고는 지 멋대로 끊은 것도 모자라 베터리까지 빼서 내 방 침대에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가서 침대에 던지듯이 내팽겨치는데. 이 씨발놈이! 아까운 오이 다 떨어지잖아! 아니, 그것보다 남자친구 오해하면 어떡하라고. 아... 걔 트리플 A형인데 어떻게 풀어주라고!
"누나. 남자친구도 있었냐?"
"뭐! 뭐, 이 미친놈아! 난 있으면 안 돼?!"
"근데 왜 있다고 말 안해? 너 대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말 했잖아, 나한테."
"너 바쁜데 뭘 그걸 줄줄이 말하고 있어! 아, 좀 나와봐! 무거워!"
무거운 건 사실 핑계고 내 위에서 양 팔까지 결박하고 정색하고 말하는데... 사실 좀 무섭다. 무섭다, 이거지. 어린 놈의 자식이 한참 나이 많은 누나를 무섭게 해, 쪽팔리게.
"뭐야. 그럼 나 다시 활동 시작하면 누나 다른 남자친구 생겨도 말 안해주고, 결혼식 때도 안 부르겠네."
"뭔 개소리야, 그게! 아, 그리고 애초부터 너한테 왜 일일히 그걸 말해야 되는데!"
"말 존나 예쁘게 한다, 씨발."
정 떨어졌다는 표정을 하고는 내 위에서 몸을 치우는 변백현의 이 표정은 분명히 변백현이 조쭝딩이였을 때 봤던 내가 변백현이 발렌타인데이날 받아온 초콜릿 다 먹었을 때 삐진 그 표정인데. 아, 그러니까 지금... 삐진거구나. 남자친구 생겼다고 자기한테 말 안해서. 변백현이 여동생이나 누나가 없다보니 오랜시간 동안 옆집 살던 내가 친누나처럼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 만큼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변백현은 삐지고는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서로를 친남매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아... 서운할 만 한가? 하긴, 나도 변백현이 여자친구 생겼는데 나한테 소개 안시켜주면... 서운할 것 같기도 하네.
"야, 변백."
"아, 오이 냄새 나거든? 꺼져."
"변배액-"
"꾸린 내 나니까 꺼지시라고요, 쫌."
"백현아. 누나 좀 봐바. 삐졌지, 똥?"
유치한 놈. 아무리 이제 성인이라지만 내 눈엔 여전히 어린 동생같은 변백현은 삐져서는 볼이 퉁퉁하니 불었다. 침대에 앉아있는 변백현의 앞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볼을 살짝 꼬집고 흔들면서 내가 부르는 나름대로의 애칭인 똥, 똥 거리니까 슬며시 내 표정을 보는데. 아, 귀여워. 아직도 애기구나.
"누나가 남자친구 있다고 말 안해줘서 삐졌어? 너 애기야?"
"아, 뭐래. 아니거든."
"애기 맞네. 우리 백현이. 누나가 잘못했어. 앞으로 생기면 말할게. 됐지?"
"아,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빌기라도 해? 진짜 쪼잔하게 그래야겠냐."
"아... 진짜."
뭐라 머뭇거리던 변백현은 여전히 자신의 볼을 잡고 흔드는 내 손을 띄어 놓더니 내 얼굴에 붙어있는 오이 한 조각을 떼서 입에 넣는다. 야, 더럽게!
"나 오이 싫어하는거 알지."
"야, 그걸 더럽게 왜 먹어! 안그래도 싫어하는 애가."
"근데 누나한테 있던거니까 생각보다 맛있거든?"
이게 뭔 개소리야- 하는데 또 다시 한 조각을 떼서 입에 넣는다. 아삭아삭- 거리며 우물거리던 변백현은 크게 꿀꺽 삼키고는 말한다.
"누난 모르는 척 하는거냐,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거냐. 진짜."
"뭘! 야, 먹지마. 으, 오이 다 떼버리던지 해야지. 주위에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
"나 어렸을 때부터 누나 좋아하는 거 몰라?"
침대 옆 탁상에 놓여있던 티슈라도 급한 채로 뽑아 그 위로 얼굴에 있는 오이조각들을 떼서 놓고 있는 무드 없는 순간 들려온 건 변백현의 처음 듣는 진지한 목소리였다. 아. 오이 떼다 말고 이런 말 들으려니 어떤 말 해야될지 모르겠네. 그것도 그렇고 동생으로만 생각하는 놈이 이런 말을 갑작스럽게 해오면.
"나 우리 예전 집 이사 올 때부터 누나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누나랑 친하게 지낸거야. 어렸을 때는 우리 형도 누나 좋아했었다?"
"어? 걔가?"
"아, 형 얘긴 빼고. 암튼 누나 어렸을 때 부터 남친 얘기하고 이럴때마다 나 존나 속 터졌어. 나보다 훨씬 못생겼던데 뭘 좋다고 손 잡고 뽀뽀한 사진 올리고 하는지. 누나가 동방신기 좋아했잖아. 그래, 안 그래."
"그...랬었지, 아마."
"아마는 무슨. 죽순이면서. 나 누나 때문에 가수 한거 아니야. 누나가 가수랑 결혼하고 싶다며."
아. 그랬었다. 벽지 대신 동방신기 브로마이드로 도배 되어있던 한 때가 있었다. 변백현이 보기 싫다고 마음대로 다 떼버린 날 변백현 머리를 미친듯이 쥐어박고 나도 울고 변백현도 울었었지. 울면서 악에 받혀서 '난 동방신기랑 결혼 할거란 말이야! 어헝, 시아준수...' 하고 했던 기억이 아스라히 나는데... 이게 중요한게 아니고.
"아니, 야. 잠깐만. 너 진짜로 나 좋아한다고...?"
"응."
"...왜? 나 소름돋아."
진짜로 닭살이 쫙 돋아서 양 팔을 슥슥 문지르니 변백현은 진심 짜증난 표정으로 손바닥을 쫙 펴서 내 이마를 쳐버린다. 아!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다시 발끈해서 나도 맞대응하려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변백현은 내 어깨를 누르며 자신도 침대에서 내려와 내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내가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무작정 입술부터 들이밀고 부딪혀 오는데. 아, 오이냄새 난다. 변백현한테서 오이냄새라니. 아이러니하네.
기말고사 기간입니다. |
그래서 매우 스트레스를 받아서 글 하나 쪄왔어여. 그냥 킬링타임용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킬링타임용으로 너무 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