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의 차이 나와 너는 생각하는 깊이나 양이 매우 달랐다. 나는 때때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때면, 저 깊이 가라앉아버린 너를 찾다가 찾다가 지쳐 그냥 물 위에 둥둥 떠있기 십상이었다. 어서 빨리 네가 올라왔으면 하며 말이다. 가끔씩은 네가 너무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뜨거운 햇빛에 타버릴 듯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찾을 수 없었다. 너의 수심의 깊이는 가늠조차 안 갔으니 말이다. 그런 네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를 그곳에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네가 잠시 올라와 내 손을 잡아 함께 내려가주거나, 아니면 내 범주 안에서 함께 헤엄치기를 바랐다. 내가 큰 걸 바랐는가 싶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우리는 끝까지 닿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지쳤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지쳤다. #이해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전 어느 하굣길에서였다. 우리는 20분이면 가는 거리를 일부러 뱅뱅 돌았다. 한 시간 정도를 말없이 걸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마 사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약 1시간 전, 우리는 학교를 막 나오자마자 처음으로 다퉜다. 작은 다툼은 나의 말 한마디로 시작됐다. "바다가 좋아, 산이 좋아?" 방학에 바다를 가고 싶다는 나의 말에서 파생된 질문이었다.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는
글쎄. 하고 그냥 묵묵히 걸었다.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 넘실거리던 감정들이 순간 파도쳤다. "왜 그것도 말 안 해줘? 아님 말해주기 싫은 건가."
그는 또 아무 말 없이 날 빤히 쳐다봤다. 속상했다. 너는 항상 그래. 항상 벽을 치고 날 밀어내. 난 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친구는 맞니? 아니면, 여태껏 나만 너를 특별하게 생각한 거야? 너에게 내 안의 파도를 쏟아냈다. 눈물이 났다.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며 소리쳤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꾸만 반대로 향했고, 끊임없이 걸었다. - "미안해." 내 예상에 딱 들어맞는 그의 말이었다. 나는 약간 심술이 나서 됐어. 하고는 앞장서 걸었다. "엄마가 도망갔어." 수빈의 말은 앞장 서던 내 발걸음을 잡았다. 나는 그를 돌아봤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둑해져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떤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 평화롭게 살던 집안에 유리가 던져졌다. 가족사진이 깨졌다. 엄마가 악을 쓰며 소리친다. 원인은 아빠의 바람이었다. 그는 귀를 막고 울었다. 다음날 엄마의 짐이 모조리 없어졌다. 쪽지에 미안해 우리 아가. 엄마가 많이 미안해. 라고 쓰여있었다. 수빈은 엄마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때는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살아가면서 눈물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그날 거의 다 채우지 않았을까 싶었다. 며칠 후 새엄마가 왔다. 아빠가 있을 때 그녀는 천사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빠가 없을 때 수빈을 때렸다. 수빈이 웃을 때면, '그 년'과 똑같은 얼굴로 똑같이 쳐웃지 말라며 때렸다. 여기서 '그 년'은 엄마였다. 그 천사 탈을 쓴 악마는 교묘하게 옷으로 가려지는 곳만 때렸다. 아빠는 사랑에 빠져있었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웃음이 많던 어린 수빈은 점차 웃음을 잃어갔다. 예쁜 보조개가 보이지 않았다. 보조개는 엄마의 유전이었다. 웃지 않게 되었다. 웃는 법을 까먹은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이 무서웠다. 마음의 문을 닫았다. 세상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 날이 어두워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감정을 알려줬다. 나는 수빈에게 다가가 그를 안았다. 그의 세상을 안았다. "여주 너라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사람 대하는 게 조금 힘들어." 나는 차가워진 그의 볼을 매만졌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픈 속 이야기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고맙다고 했다. 너의 속을 내게 보여줘서 고맙다고 했다.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수빈아, 넌 웃는게 예뻐."
그가 슬픈 눈으로 웃었다. 고맙다며 나를 안았다. 너는 여리지만 강한 사람이었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여러차례 울고 난 뒤였다. #첫입맞춤 누가 먼저랄 것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분위기에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요동치는 감정에 휩쓸린 결과였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나는 두 볼을, 너는 두 귀를 붉혔다. 불 타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타올라 없어져도 좋았다. 너는 평소의 너와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을 타며 말했다.
"날이 춥다."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방금 한 행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마땅한 말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울리지 않는 말에 "그러게. 곧 겨울이 오려나봐." 라고 어울리지 않게 대답했다.
모르는 채 했다. 우리가 방금 한 행위를 말하게 되면 누구에게 들킬까 봐서 그랬던가. 그 날 우리의 감정은 우리조차 헷갈렸지만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다 보고 있었다. 우리의 증거이자 순간이었다. 증인이자 감정이었다. #폭발 그날 이후, 우리가 입을 맞춘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해." 이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니면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너무 슬프다. 나는 너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느냐고. 왜 나에게 사랑을 말해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말했듯이 이건 내가 지는 게임이다. 그는 내게 바다가 좋아. 하고 말했다. 그거면 됐다. 네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만 해도 나는 좋았다. 그럼에도 욕심이 많은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들 중 내 이름도 하나 끼워넣고 싶어했다. 무얼 좋아하니. 바다, 그리고 이여주. #손 그날은 평소보다 추운 날이었다. 너는 겉옷을 챙겨올걸. 하고 후회하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빨개진 귀로 많이 춥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나보다 두 마디는 큰 손으로, 작디작은 내 손을 잡았다. 작디작은 담배가 아닌, 내 손을 잡았다. 심장소리가 들릴까 무서웠다.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것 같이 느껴졌다. 불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같이 타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네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린 말없이 걸었다. 타오르는 노을을 향해 걸었다. 두 그림자는 맞닿아 있었다. #흑백 수빈은 과거를 떠올리면 온통 흑백으로 떠올려진다고 했다. 나와의 기억은 알록달록 다채롭기를 바랐다. 너의 캄캄한 세상을 색칠할 준비가 되었다. 함께 색칠해 나가기를 바랐다. 내가 그의 세상을 칠해주려 물감을 준비하던 어느 날, 수빈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생겼다. #약속 그는 약속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점을 퍽 좋아했다. 그럼에도 그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에 한 맹세만큼은 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이고 싶었다. 네가 약속한 반지의 주인이 나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세상은 야속한 것 투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