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감 입을 맞춘 이후, 우리는 잠시 가까워진 듯싶었다. 우리는 종종 손을 잡고 걷기도 했다. 마주 보며 웃었다. 서로를 생각했다. 사랑하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2주. 짧은 2주라는 시간에 우리 사이에는 큰 벽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나를 피하는 네 탓이었다. 하교를 함께 하고 싶었는데, 너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첫 주자로 나가버렸다. 내가 부른 너의 이름들은 주인 없이 허공에 떠다녔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나를 왜 피하느냐며 수백 번 너에게 따져 물었지만, 현실은 네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좁혀놓은 거리인데, 야속한 너는 하염없이 멀어졌다. 잠깐 달콤한 꿈을 꾼 듯했다. #용기 "수빈아." 용기를 냈다. 너의 뒷통수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네가 돌아봤다. "왜 나 피해? 나한테 마음 상한 일 있어?" 네 표정이 묘했다. 복잡해 보였다. "아냐 그런거. 미안. 먼저 가볼게." 너는 또 나를 피한다. 속이 상했다. 네가 너무 좋은데, 네가 나를 밀어내서 미웠다. 좋다가도 밉고, 행복하다가도 슬펐다. 네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망 평소와 같은 어느 주말의 아침이었다. 엄마가 나를 급히 깨우며 "준비해야지 여주야!!!" 하고 외쳤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준비? 무슨 준비?" 하고 비몽사몽 대답했다. 오랜만의 사교모임이었다. 한참을 또래 아이들과 떠들고 있는데, 평소 입이 가벼운 남자아이가 누군가를 가르키며 말했다. "애들아 쟤 말이야. @@생명 손녀랑 결혼한대. 이미 약혼까지 했대." "엥? 쟤? 아직 고딩인데 웬 결혼?" "아 쟤 잘생겨서 꼬시려고 했는데 ㅋㅋㅋ" "야 미친 니가 꼬시면 꼬셔지냐? ㅋㅋ 암튼 진심 결혼한대?" "아니 약혼만 했고 결혼은 20대 중반 되어서야 할거라는데? 쟤네 엄마가 엄청 독하잖아. @@생명에 붙어먹으려고 아들 약혼 시킨거래. 진짜 엄마 맞냐?" "야 새엄마잖아." 아이들의 말소리는 이미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는 너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대체 왜 이 아이들의 이야깃거리의 주인공이 너인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주인공이 왜 최수빈 너냐고. 가벼운 말들을 제치고 네게 향했다. 너는 어떤 여자에게 팔을 내어주고 있었으며 –둘은 팔짱을 끼고있었다.–, 나는 당황한 채로 네게 다가갔다. 곧 너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답지 않게 어른들과 이야기하며 웃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당황했다. 너는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물론 옆에 있던 여자에게까지도–, 내게 왔다. 나는 네게 말했다. "나한테 할 얘기 없어?" 너는 잠시 당황하더니, 올라가서 얘기하자. 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네가 너무 미워져서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미운 마음보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커서 그러지못했다. 그냥 너에게 자꾸 끌려갔다. 같은 호텔의 같은 옥상. 같은 시간대이지만 다른 감정. 우리는 처음 만났던 그 옥상에서 다시 서로를 마주했다. 긴 정적 후, 먼저 입을 뗀 건 최수빈이었다. "미안,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뭘." 너는 조용히 왼손 약지에 껴있는 반지를 보여줬다. 아, 저 반지. 한 일주일 전부터 갑자기 너는 반지를 끼고 나타났다. 그 반지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으나, 별 거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그냥 넘겼다. 너는 악세사리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냥 마음에 드는 반지를 샀나보다. 그렇게 넘겼다. 어쩌면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껴 일부러 묻지 않았을 수도. 그때 물어봤으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잠깐 생각에 잠긴 나는 그냥 네 반지를 빤히 쳐다봤다.
"나 약혼했어." 네 한마디가 내 생각들을 깨부순다.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담담한 투로 말했다. "누구랑?" 내 대답에 너는 당황했다. 네가 왜 당황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곤란한 질문을 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네가 내 눈가를 닦아준다. "울지마..." 너를 당황시킨 범인은 나의 갑작스러운 눈물이였구나. 내 감정은 나를 삼켜 너에게까지 닿았다. 일렁일렁 넘쳐버릴까봐서 조심해왔건만. 너는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내 나를 안아 토닥였다. 나는 그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너에게 안겨 울었다. 이대로 세상이 끝나기를 바랐다. 너의 옷깃을 꽉 쥐었다. 너를 놓기 싫었다. 나는 아직 너를 놓을 준비가 안되었다. —나는 그 날 너에 대해 마음에 안드는 점이 몇가지 있었는데, 첫번째는 네가 처음보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는 점. 두번째는 평소에 잘 웃지 않는 너였는데, 다른 여자에게 너의 보조개를 보이며 웃어줬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 아는 네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내가 아는 너는 아주 가끔씩만 웃어주며–그 때 나오는 보조개에 나는 푹 빠졌다.–, 숫기가 없어 어른들에게 살갑지 못했고, 사교 모임에 나서는 성격이 아닌데 말이다. 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너의 약혼 소식말이다.– 전해들은 것. 그 날의 너는 참 잔인하고 미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좋아서, 네가 너무나도 좋아서 나는 힘들었다.— #담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일렁이다가 넘쳐버린 감정들을 다시 주워담았다. "조금 진정이 됐어?" 네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한숨을 내쉬더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습관처럼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그런 너를 그냥 쳐다봤다.
너는 잠깐 멍하니 담배를 몇번 피우더니, 살짝 놀라며 "아 미안. 무의식중에." 하며 담배를 끄려 했다. 나는 네가 피우다 만 담배를 가져다 피웠다. –사실 첫 흡연이었다.–
"싫어하잖아."–나는 그에게 담배 냄새가 날 때면,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그에게 냄새가 별로라며 떨어져 걸었었다.– 너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후- 내부는 담배 연기가 하늘 위로 퍼져오른다. 나는 저 연기처럼 피어나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구려져 담배를 난간에 지져 껐다. 첫 흡연의 느낌은 아주 별로였다. 다시는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아닌 다짐을 했다. 네가 멍한 나를 보며 말한다. "미안해.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네 말을 자르고 내 말을 붙였다. "상관없었던거 아냐? 내 기분 같은건." 그리고 다시 네게 물었다. 왜냐고 물었다. 왜 약혼하느냐고, 왜 하필 그 여자냐고, 왜냐고 대체 왜, 왜. 애써 다시 담은 감정들이 아까보다 더 크게 밀려온다.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왜 나만 안되는건데 왜??!!!!" 너에게 울며 소리쳤다.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들이 몰려들어 폭발했다. 나는 너를 이토록 좋아하는데 나는 왜 안되는거냐고 따져물었다. 그 여자보다 내가 훨씬 더 너를 좋아한다고, 그걸 왜 몰라주느냐고 투정부렸다. 너는 무릎을 꿇어 앉아 나를 안았다. 그리고는 너의 그 저음인 목소리로 내 마음을 때렸다. 마구 때렸다. 너의 한마디 한마디는 내 마음을 쿵-쿵- 하고 두들겼다. "좋아해. 좋아해 여주야. 그래서 미안해. 너를 너무 좋아하는데..." 너의 말문이 울음에 막혔다. 너는 빨개진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좋아해..." 애달픈 고백이었다. 그토록 듣고싶었으나 소용없는 그런 고백이었다. 나는 그 밤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니면 이대로 불타없어져 버리기를 바랐다. 네가 한 고백은 아마 저편에 묻어둬야겠지. 그래도 밤하늘의 별은 알고있다. 우리의 첫입맞춤의 증거이자 증인인 별들은, 그의 고백 또한 알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