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깊이 언제 이렇게 깊어졌는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른다. 언제 그를 이렇게나 깊게 품었는지. 그는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물이 스며든 솜처럼 조용히,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 솜은 무거워져 가라앉는다. 나는 네게 푹 빠져 저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어쩌면 사랑이었다. - 우리는 한참을 울고는 겨우 진정했다. 그는 그의 사정을 이야기해줬다. 왜 약혼을 했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 그런 것들을 말이다. — 그의 새엄마는 미친 여자였다. 각종 불안장애가 있었는데, 그걸 그 작은 아이에게 풀었다. 그녀는 작은 아이를 때리고 밀치기도 하고, 내쫓았으며 발로 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리고 여린 그는 사랑이 고팠다. 그저 어린 아이의 작은 소망이였다. 그녀는 수빈을 지독히도 괴롭혔다. 그러면서 @@생명의 손녀와 결혼하면 네 인생에서 나가주겠다고. 그 집안에서 돈만 받아먹으면 앞으로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치고 지친 그 아이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본인의 희생을 결심했다. 그 아이는 생각했다. '나만 희생하면 여주도, 새엄마도 행복해질거야. 나만 힘들면 돼.'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그 아이만의 노력이었다. 세상은 이 작은 아이에게 너무나도 가혹하고, 또 잔인했다. — "그게 최선일까." 내 물음에 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본다. 너는 내 눈을 깊게 들여다본다.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네 눈을 피했다.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그의 대답이었다. 너는 착각을 하고있었다. 너는, 너와 함께라면 내가 불행해질거라고 종종 그렇게 말했다. 너는 알까. 네가 없으면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내 행복의 대부분이 너에게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꽤나 쌀쌀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한참을 말 없이 서있었다.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누구도 말로 꺼내지 않았다. 감히 꺼낼 수 없었다. 밤이 깊어졌다. 깨질 것 같은 어둠이었다. 우리는 겁이 참 많아서, 지독한 이 어둠을 깰 용기가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걸었다. 그저 울음만 꾸역꾸역 삼켜냈다. 그저 너의 행복을 바랐다. #관계의 변화 그날 –그의 약혼소식을 알게된 그 날.– 이 후, 우리의 관계에는 변화가 생겼다. 어쨌든 누군가와 결혼을 약속한 너에게 나는 다가갈 수가 없었고, 너도 마찬가지였다. 관계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너에 대한 내 감정은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키워온 감정을 하루만에 꺾을 수는 없었다. 질기고 질겨 꺾어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모순처럼 너에 대한 감정이 더 깊어지기도 했다. #가치관 너는 가정의 유지와 화목에 대한 약간의 집착과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 너는 너를 버린–사실 너의 친어머니는 너를 버리지않았지만, 너는 항상 너를 버렸다고 표현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조금의 원망을 품고살았다. 새엄마의 학대가 너의 생각을 그렇게 몰아세웠다. 그렇기에 너는 아직은 그 약혼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할거라고 말했고, 원해서 하는 결혼은 아니지만, 기왕 생길 가정을 지키고싶다고 말했다. 너의 가치관에 대한 그 한마디 한마디는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나는 네게서 찢긴 조각들을 들여다보며 네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타협점 나는 공식적으로는 너를 포기했다. 내 속마음은 너를 놓아주지 않았지만, 겉으로 연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타협했으며, 우리의 타협점의 이름은 '친구'였다. 서로를 위한 결과였다. 많이 좋아하니까 서로를 위해 노력해보기로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노력이었다. #질투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남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함께 하교하기' 정도였다. 그 마저도 그의 약혼녀가 교문에 마중이라도 나온 날에는 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 그의 약혼녀를 마주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하교를 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였다. "수빈아." 꽤나 귀엽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녀도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근처 명문고로 유명한 예고의 교복이었다. 아, 그녀는 바이올린을 켠다고 들었다.–전혀 알고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생글 웃으며 최수빈의 손을 잡아끌고는 나를 아주 묘한 표정으로 힐끗 쳐다봤다. 최수빈은 덤덤한 말투로 어쩐지 의무적인 대사를 내뱉었다. "많이 기다렸어?" 그녀는 아주 애교쟁이였다.–이것 또한 전혀 알고싶지 않았다.– 건조한 수빈의 물음에 온갖 애교섞인 말투로 아니라며 방방뛰었다. 기가 찼다. 조금 짜증이 나서 "먼저 갈게." 라고 말한 후,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게 최수빈의 그녀와의 첫만남이었다. 그리고는 오늘, 그와 함께 하교 중이였는데, 애교 섞인 목소리가 최수빈을 불렀다. 수빈아-하는 부름에 최수빈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는 "연락이라도 하고오지."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최수빈의 진짜 연인이라도 된 양, "보고싶어서 몰래 왔지! 서프라이즈~" 라고 지랄을 떨었다. 나는 그녀의 애교에 기분이 뭣같아져서 "갈게." 하고 돌아섰다. 그런 나의 팔을 잡아돌린건 최수빈이었다. "방향 같잖아.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헷갈림 이 애가 왜이러나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약혼녀에게 최선을 다 해볼거라며 내 속을 박박 긁어놓더니만. 며칠 후, 나는 그 날에 대해 너에게 물었다. "너 왜 그래 자꾸? 헷갈리게 하지마. 넌 그 약혼녀한테 충실히 해." "친구로써 데려다주고싶었어." 그 놈의 친구, 친구. 지겹고 싫다. 앞에 붙은 '친구로써' 라는 말을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말에 기분이 별로가 되어 그냥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었다. 아주아주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약혼녀와 협의를 봤었다고 했다. 각자 사생활에는 들어오지 말기로. 둘 다 좋아서 하는 결혼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수빈의 사생활에 종종 들어갔다. 아마 그를 좋아하게 되어서일까 싶었다.–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를 지키기로. 최수빈도 그녀를 좋아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은 제 뜻대로 안되더라고 그러더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사랑하는 것은 상대한테도 본인한테도 잔인한 일이더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 때는, 그럼 그 남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거리 나는 점점 너를 멀리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서로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종종 약혼녀와 하교하는 너를 봤고, 그 날은 비가 오기를 바랐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멀어졌다. 방학식 날, 방학 잘 보내라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헤어졌고, 방학동안 우리는 만나거나 연락 따위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우리집에서는 나의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않아 나는 유학을 결심했다. 이곳을 떠나는 이유 중 작지만 너도 속해있었다. #하교, 그 날의 노을 개학 후, 나의 유학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온 난리를 피웠다. 우는 아이들도 간혹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일이다.– 친구 관계가 곧 세상이었던 작은 우리들은, 헤어짐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의 유학 소식은 곧 너에게까지 전해졌다. 너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반으로 달려왔다.–방학 이후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끝나고 집에 같이 가."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왜 유학가느냐고 언제 떠나느냐고, 왜 나에게 먼저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런 질문들을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원래도 네 생각을 하기로 한다면 너 이외에 다른 것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종례 후, 우리 반 앞에서 벽에 기대 나를 기다리는 네가 보였다. 나는 "가자."라고 한마디 한 후 앞서걸었다. 아이들이 이미 다 빠져나간 텅 빈 복도였다. 어긋난 발소리만 복도에 울려퍼졌다. 창밖으로는 노을이 지고 있었으며, 하루를 다 한 햇빛이 복도를 비추어 어쩐지 따뜻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냥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서, 지는 해의 온도가 너무나도 따사로워서 그래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와 나란히 걷고싶었다. 항상 마음의 걸음이 다른 우리였기에 이제는 나란히 걷고싶었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뒤돌아 너를 봤다. 너는 울고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의 눈물을 처음 마주했으니 말이다. 나는 멈춰서서 네 이름을 불렀다. 너의 눈물샘은 내 목소리가 버튼이라도 된 양,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보내기 싫어." 너는 나를 안으며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나는 참고참은 눈물을 터뜨렸다. "잘 지내. 보고싶을거야." 하지만 마음 속의 수천가지 고백들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냥 마음에 묻어뒀다. 너를 위해 너를 좋아하는 것을 멈춰야했다. 우리는 그 날의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서, 지는 해의 온도가 아직은 꽤나 따뜻해서 어쩐지 슬퍼졌다. 그래서 울었다. 그래서 서로를 안으며 실컷 울었다. 마지막 포옹이었다. #출국 그 노을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서로를 위해서였다. 너를 많이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우리 둘에게는 각자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의 출국날은 다가왔고, 너를 생각하면 어쩐지 서글퍼졌지만 너에게 연락은 끝내 하지않았다. 출국장에 들어서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시선이 닿은 곳에 네가 있기를 바랐다. 가지말라고 잡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너에게 안기고 싶었다. 너의 얼굴을 그리며 그저 어린 날의 풋사랑이었겠거니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주, 아주 많이 아픈 사랑이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노래를 틀었다.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많이도 울었다. 정말, 정말로 다 끝이다. 가끔씩은 서로가 그립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안녕,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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