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들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야, 너 아직도 최연준이랑 만나냐? 친구의 말에 고개를 으쓱했다. 만나긴 만나는데, 곧 이별할 거 같아.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났다. 그는 같은 교양수업을 듣는 다른 과의 과대였다. 연준이 건넨 커피에는 작은 메모가 붙어있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내 마음을 간질였고, 벚꽃이 피는 계절을 함께 보내며 마음을 키웠다. 연준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풋풋했던 우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2차는 작은 술집이었다. 알딸딸한 정신에 기분이 방 떠있는 듯했다. 술잔을 보니 연준의 얼굴이 떠있었다. 한입에 술을 털어마셨다.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혹시나 그에게 연락이 왔을까 하고 확인했지만 역시나. 핸드폰을 엎어두고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 —왔어? 늦었네. 노트북 앞에 앉아 밀린 업무를 하는 그가 보였다. 연준은 고개만 돌려 무심하게 말했다. 동거 초, 집에 들어오자마자 보고 싶었다며 어깨에 제 얼굴을 묻으며 안기던 그가 생각났다. 그때와 비교되는 연준을 보고는 아무 대답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알딸딸한 상태에 주변 공기들 마저 어지럽게 느껴졌다. 한숨을 내쉬고는 겉옷을 벗어 걸었다. 샤워기를 틀었다. 쏟아지는 물에 몸을 적셨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문득 낮에 지갑을 주워주던 남자가 생각났다. 어이없었겠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괜스레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마저 씻었다. 복잡한 생각을 같이 씻어내렸다. 씻고 나오니 연준이 먼저 침대에 누워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웬일로 다정한 그의 물음에 몰라. 하고는 옆에 누웠다. 그가 허리에 손을 대며 입을 맞춘다. 피곤해? 물으며 내 옷을 들추려는 손을 막았다. —피곤해. —난 하나도 안 피곤한데. 이럴 거면 왜 물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제멋대로 할 거면서. 그가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나 피곤하다고. 하며 그를 밀어냈다. 그는 내 손길에 밀리지 않고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넌 너 하고 싶을 때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눈물이 차올랐다. —하, 넌 왜 또 말을 그렇게 하냐. 그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나는 울컥해서 그에게 다 쏟아냈다. —나는 피곤하다고. 하기 싫다고! 어제 너 새벽까지 기다리느라 나는 피곤하다고! 그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누가 기다려달래? 마구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울음이 막혔다. 기가 막혔다. —뭐? 그는 우는 내게 고개를 돌리며 다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이내 방을 나갔다. 넓은 방에 나 혼자 남겨졌다. 공허감이 한 번에 밀려왔다. 어둠 속에 작은 전등만 빛났다. 나는 이불에 고개를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이게 사랑이라면, 내가 여태껏 해왔던 게 사랑이라면, 나는 앞으로 사랑 따윈 다시 하지 않으리. - 기분 좋은 아침 햇살에 잠이 깼다.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연준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넘겨주고 있었다. —깼어? 어젯밤의 기억들이 마구 쏟아졌다. 꿈인가. 어젯밤이 꿈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건지. 잠에서 막 깨어나서 그런지 아직 몽롱했다. 그냥 그를 올려다봤다. —눈 부었네. 내 눈가를 매만지며 묻는 그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연애 초, 그때의 그 같았다. 나를 아주 많이 사랑했을 그때. 나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쓸어넘겨 묶고, 침대에서 빠져나가 욕실로 향했다. —미안해. 그가 뒤에서 내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응. 하고 짧게 말한 후, 그에게서 빠져나와 다시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익숙해진 그의 한숨 소리와 피곤해하는 듯한 눈빛. 나를 피하는 손. 나도 그처럼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 방에서 나오자마자 거실의 소파가 눈에 띄었다. 소파 위에는 이불이 있었다. 아마, 그가 소파에서 잔듯싶었다. 이불을 대충 정리해놓고는 다시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울다 잠이 들어 그런지 퉁퉁 부어있었다. 나는 찬물을 틀고 얼굴을 적셨다. 씻고 나왔을 때, 그새 차려입은 그가 눈앞에 있었다. —나 나갔다 올게. 해장국 끓여놨으니까 밥 거르지 말고. 또 외출이다 또. 하루 종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주말뿐인데. 아무리 그가 밉다고 해도,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한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었다. 오늘 또한 그랬다. —언제 들어와? 일찍 와... 그의 옷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그가 끄덕였다. - 그의 끄덕임이 무색하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나는 온종일 밀린 회사일을 하고, 밀린 빨래를 하고, 밀린 드라마를 봤다. 그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미루고 미루다가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문자를 남길까 하다가 또다시 비참한 기분이 들어 관뒀다. 나는 자꾸만 미뤄질까 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너무 우울해. 내 한마디에 친구는 나를 밖으로 꺼냈다. 겉옷을 챙겨 입고 집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밤이 깊었다. - 수빈은 지갑을 펼쳐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걸 버려 말아...' 지갑 안에는 명함과 현금, 그리고 어떤 남자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버려달라고는 했는데, 그러기에는 지갑 안의 사진이 꽤나 귀중한 사진 같았다. 현금은 사례금으로 가지라는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지갑 속 현금을 세다가 3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에 놀라며 다시 넣었다. 아무래도 돌려줘야 할 듯싶었다. '어떻게 돌려주지...' 하고 생각하는 참이었다. 명함이 눈에 띄었다. 풋풋한 웃음으로 웃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명함의 사진을 한참 쳐다봤다. 그러다가 그녀의 명함 속 사진과 지갑에 끼워져 있는 어떤 남자의 사진을 번갈아 들여다봤다. 연인일까? 그렇겠지? 헤어졌으려나, 지갑을 버려달라는 거 보니까... 여러 궁금증이 떠다녔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궁금해해봤자 뭐해. 해가 지고 있었다. 수빈은 겉옷을 챙겨 나갔다. 그는 집 근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하며 간간이 아는 형의 가게를 도왔다. 그날도 아주 바빴다. 이곳저곳 눌리는 벨에 정신없이 서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빈은 깜짝 놀라 들고 있는 술병을 놓칠 뻔했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갑, 그 여자다. - —어-? 지갑? 맞죠?? 혹시나 해서 일부로 그 근처를 알짱거렸다. 그때 그녀가 수빈을 알아본 듯한 말을 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신기해라. 그녀는 꽤나 취해있었다. 수빈은 왠지 반가웠다. 사실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다니. 신기했다. 어쩌면 인연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는 사람? 사장이자 친한 형의 물음에 글쎄. 하고 답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멍하니 있는 수빈에게 사이다를 쥐여주며, 서비스라고 드려. 하는 사장이었다. 아는 형이자 사장은 수빈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비스에요. 그녀의 테이블에 사이다를 놓으며 말했다. 그녀는 수빈을 올려다보며 감사해요- 하고 웃었다. 수빈의 귀가 붉어졌다. —내 지갑은? 버렸어요? 버려줘요- 그녀의 말에 아직 가지고 있어요. 하고 답했다. 버려달라니까- 하며 웃는 그녀에게 왠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술을 들이켰고, 수빈은 정신없이 서빙했다. 새벽 4시가 되었고, 술집 마감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여주의 테이블만 남았다. 수빈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희 마감이에요. 벌써? 라며 아쉬워하는 그녀였다. 그녀 앞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도 꽤나 취해있었다. 곧이어 그녀 친구의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데려다 준다고 말을 했지만, 그녀는 거절하며 친구나 잘 챙겨 들어가라고, 본인은 집이 바로 앞이라고 그랬다. 그녀의 친구와 그의 애인이 가게를 나갔다. 혼자 남겨진 그녀가 신경 쓰였다. —집이 어디예요? 데려다줄게요. 공기가 쌀쌀했다. —걸을 수 있어요? —아니, 못 걸어요. 농담할 정신은 아직 있나 보네- 살짝 웃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있었다. 시계를 보니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인연일까.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어쩌면 정말 인연이지 않을까. 그녀 옆의 수빈은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조심히 걸어요. 비틀거리는 그녀에게 팔을 내어주고, 손을 잡았다. 심장소리가 크게 울렸다. 수빈은 그런 심장을 애써 외면하고 그녀에게 길을 물어가며 그녀를 부축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여기 맞아요? 수빈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라며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에, 수빈의 귀가 빨개졌다. 그때였다. 어스름 어둠이 깔린 새벽, 아직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그 밑에 서있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당신 누구야. 네? 하고 그를 쳐다봤다. 그녀 지갑 속의 그 남자였다. 멍하니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나 이 사람 애인인데, 당신 누구냐고. 새벽 공기가 쌀쌀하게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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