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애(溺愛) 되다. : 흠뻑 빠져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다. 나는 너의 그 깊은 보조개에 빠져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좋았다. 너는 가끔씩이면 묘한 그 눈동자로 나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는 했는데, 나는 너의 그런 눈빛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아서 네 눈을 피하곤 했다. 너는 그 깊은 눈동자로 나의 아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는 너에게 내 속마음을 들키기 싫었다. 나는 네 마음 중 작디작은 조각 조차도 알 수가 없었기에 더욱이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너는 순수한 얼굴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나보다 두 마디는 큰 손으로 습관처럼 담배를 물었다. 나는 나보다 한참 큰 너를 올려다봤다.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냄새 싫지. 미안.” 하며 담배를 지져 껐다. 싫지 않았다. 담배 냄새는 싫어하지만, 네가 피는 담배의 냄새는 어쩐지 향이 좋은 향수처럼 느껴지곤 했다.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그 어떤 것도 네가 하면 그저 좋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쨌거나 나는 너라는 사랑에 푹 잠겨있었다. #첫만남 원체 집안이 부유하게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사교 모임에 따라다니곤 했다. 피곤한 일정들의 반복에 지쳐 어린 마음에 투정을 한번 부린 적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우리 딸입니다~ 하고 눈도장 찍는 거야. 나중에 다 이득으로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참아줘 여주야. 응?” 하는 부모님의 말에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아 상황 판단이 빠르고 영악했던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의 말을 다 이해했다. 지겨운 사교 모임들은 몇 해를 거듭했다. 그놈의 사교. 한 해라도 안 만나면 불안하기라도 한가보다 다들. 아무튼 그렇게 그런 환경에서 나는 자라왔다. 경제적으로 풍족해 편했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다 이 말이다. 사교 모임에 가서, 더 이상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나이 즈음, 내 또래들이–알고 보면 다 나보다 3,4살 위이지만– 내게 샴페인 잔을 건넬 때쯤, 나는 그 애를 처음 만났다. 몇 해 동안 사교모임에서 봤던 수많은 얼굴들 중,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호기심 그 애는 참 묘했다. 도화지같이 순한 얼굴을 하고서는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눈 밑에 도는 붉은기는 그 아이의 묘한 분위기를 더 극대화 시켰다.
나는 홀린 듯 그 아이를 쳐다보다가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시선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별거 아닌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한 뒤, 내 시선은 다시 그 아이를 쫓기 바빴다. 하지만 그 한마디 하는 사이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아이가 궁금해졌다. #담배, 그리고 별. 점점 길어지는 모임에 나는 평소처럼 한숨을 한번 내쉰 뒤, 호텔 옥상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라 가슴이 답답할 때 나는 이 건물 옥상에서 별을 올려다보며 괜히 별이 몇 개인지 세어보기도 하고 그랬다. 오늘은 별이 몇 개쯤 보일까. 하며 옥상 문을 열었을 때, 평소와는 다른 장면이 나를 맞이했다. 넓은 등과 정장. 담배연기. 한숨. 나는 아까 그 묘한 아이인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의 옆으로 향했다. “담배, 몸에 안 좋은데.”
갑자기 건넨 말에 조금 당황한 듯한 그가 잠시 정지되어 나를 쳐다봤다. “몸에 안 좋다고요 그거~” 아. 하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발로 밟아 담배를 끄는 그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오늘 처음 온 거 맞죠?” 그는 별 대답 없이 조용히 나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정면에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어 이런 거. 그렇지 않아요? 난 5살 때부터 와서 지겨워..” 나도 모르게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한참을 쫑알거렸다. 그러다가 그의 작은 웃음소리에 나는 그를 쳐다봤다. 중저음인 그의 목소리는 잠깐 들었지만 참 듣기 좋은 톤이었다.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작게 실소를 터뜨린 그에게 물었다. “왜요? 왜 웃어요?” 그는 한참을 말없이 나를 빤히 보더니, –그래서 잠시 무안해졌다.–
“그냥. 신기해서.” 하고 말하며 또 실없이 작게 웃었다. “뭐가 신기해요? 내가?” 나는 물음표 살인마라도 된 양 그에게 자꾸 물었다. 그는 그럼에도 내 물음표에 답을 달아줬다. “나랑 아주 다른 사람 같아서. 그게 신기하네.” 달라봤자 뭐 얼마나 다르다고. 어쨌거나 이 사교모임에 환멸을 느낀다는 점과, 지루를 참지 못하고 옥상으로 피신 온 점도 그렇고 비슷하지 않나. 우리는 큰 의미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의 이름은 최수빈이었다. 아마 빼어날 수(秀)에 빛날 빈(彬)을 쓰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아는 '수빈'이들의 이름 뜻은 다 그랬거든. 아무튼 그와 썩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흔하지만 귀중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 중에 내 어깨에 무언가 닿았다. 그의 정장 재킷이었다. 꽤나 쌀쌀한 밤이었다. 나는 내 어깨에 얹어진 재킷을 손으로 잡으며, 그가 참 매너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가 피웠던 담배 연기처럼 퍼져나가는 우리의 입김은 저기 저 별까지 닿았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습관 잠깐 본 그에게는 몇몇 습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대화 중 대답을 하기 전에 상대방을 말없이 몇 초 동안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그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안 좋은 의미로써가 아니라, 그 짧은 몇 초 동안 내가 그에게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아서. 그리고 내 생각이 모두 읽히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곤 했다. 다음에 그를 또 만난다면 눈을 피하지 않으리 다짐했다. #그 사교 모임이 끝난 후 며칠 동안 나는 마치 꿈을 꾼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를 만났던, 그와 이야기했던 그날 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는 누구일까. 아차, 나이를 묻지 않았다. 그는 몇 살일까. 그를 다시 보고싶었다. 그의 얼굴만 눈에 아른아른 거렸다. "수빈... 최수빈..."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운명 꿈과 같았던 주말이 가고, 지겨운 월요일이 왔다. 아침 조례 시간. 월요일부터 빅뉴스다! 라고 외친 담임 선생님이 전학생을 소개해준다며 들어왔다. 이 시기에 웬 전학생?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내 앞에, 그것도 우리 교실에 서있다. 나는 그 순간 운명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어중간한 학기 중간에 온 전학생은 모든 이들의 화제가 되기 마련이었다. 쉬는 시간, 그는 온 학생들에 둘러싸였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다짐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 순간이었다. 그도 놀랐을까? 궁금했다. 나는 이렇게나 놀랐는데 말이다. 내 친구들은 아주 사교적이라 금방 그를 우리 무리로 끌어당겼다. 그런 친구들 덕에 나는 그와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우리는 누구 하나 먼저 아는 채 하지 않았다. 밥을 다 먹은 후, 전학생 학교 구경은 내가 해주고 싶다는 말로 그와 둘이 있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 알죠." 그는 작게 웃었다. 알다마다- 그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와 학교 옥상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난간에 기대어 맑은 하늘을 보는 그에게 말했다. “담배 피우길래 성인인 줄 알았는데... 동갑이었네? 말 편하게 할게. 그래도 되지?"
그는 그날 밤처럼 조용하게, 저 밤 하늘의 빛나는 별보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너무나 흔한 로맨스 이야기의 클리셰 범벅이다. 반복되는 우연과 너에게 빠진 나. 자, 이제 네가 날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