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나
축 쳐진 어깨에 가방을 걸쳐매고
교실로 향했다.
매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데리러 오던
태형이 오늘은 내 옆에 없었다.
오늘 아침엔 진짜 일찍 일어났는데,
오늘은 집 앞에서 안 기다려도 됐는데...
김태형 나쁜 놈.
오지 말라고 말려도 그렇게 죽어라 오더니
꼭 지 필요할 땐 잠수타고...,
못돼빠졌어.
"안녕"
익숙하게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옆을 돌아보니
있어야 할 태형이 없다.
아직 안온건가? 뭐지?
혹시 아픈가?
핸드폰을 꺼내들어 번호를 누르다
멈칫하고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아침에 그만큼 전화했는데도 안 받았었는데
지금이라고 받을 리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엎드리자
옆 의자를 빼고 한 남자아이가
태형이의 자리에 앉았다.
인사도 한 번 안 해본 사이였던 것 같은데
뭐지?
부스스 일어나 쳐다보자
이죽이면서 바라보는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애들 시선이 다 이쪽으로
집중 되어 있는 느낌.
"야 김탄"
"...어?"
"너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
"...뭐?"
갑작스런 말에 인상을 찡그리자
주변 아이들이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아 병신아, 작업거냐?'
'겁나 웃기네 진짜ㅋㅋㅋㅋ'
들리라는 듯 크게 웃는 소리에
순간 온 몸이 경직된 듯
멈춰섰다.
정말 뭔가 이상하다.
직감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 친구가 너 마음에 든다는데
소개 시켜줄까 해서"
"..저 그러니까.."
"아- 당연히 싫으려나?"
"..."
"원조교제하는 애한텐
돈 없는 내 친구가 너무 후달리네"
"...뭐?"
"넌 이상형이
차 있는 늙은이들이잖냐"
남자 아이가 이죽이죽
입꼬리를 더 올리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인사를 나누던
아이들이 왜 갑자기 나를 적으로 몰고가는지도,
지금 저 말이 나와 아저씨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정말 그렇다면 아저씨와 내 사이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김태형.
순간 적으로 생각 난 이름에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야, 아닐거야.
"야, 대답안해?"
"작작해라, 그 늙은이
부르면 어쩌려고.
넌 아는 아줌마도 없잖아"
"아, 맞네. 돈이 제일 무섭지.
그치 탄아"
"아 진짜 미친ㅋㅋㅋㅋ"
조롱섞인 웃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저씨랑 나랑은 그런 게 아닌데,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닌데.
목까지 차오른 말을
내 뱉을 수가 없었다.
바보같이 두려웠다.
"야 김탄 전화온다"
"그 늙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쥐어들었다.
김태형.
그 이름 세 글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왠지 모르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를 믿음이 분명한데
그냥..., 그냥 지금은 네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김탄!!!!"
뒷문이 열리고 들어온 태형이
빠르게 달려와 내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탄아 괜찮아?"
"...이거..."
"진짜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진짜..
애들 분위기 이상해서 뛰어왔더니,
너 진짜 괜찮아?응?"
"...놔.."
"지금 애들 너랑 그 아저씨
얘기하는 거 맞지?
쟤네 진짜 어떻게-"
"이거 놔"
"...어?"
우려했던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화를 내야 하는게
진짜 김태형 네가 아닌데,
진짜 너는 잘 못한게 없는데.
날카롭게 나가 버린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김탄, 너 혹시 지금..."
"..."
"저거 내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
"..야, 대답해봐.
지금 나 진짜 딱 오해하기
직전이거든?"
"..."
"너 진짜 저거 내 짓이라고 생각해?"
"..."
"야, 대답해.
너 진짜 내가 너한테
그랬을 거라고 생각-"
"지금 아저씨랑 내 사이"
"..."
"아는 게 너 말고 누가 있어"
내 말에 작게 헛웃음 친 태형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건 진짜 좀 심했다"
"..."
"네가 나랑 멀어지려고
발악하는 건 알겠는데"
"..."
"..지금 너 진짜 실수했거든?
...내가 진짜..."
"..."
"아 시발 진짜.."
작게 욕을 읊조리며
의자를 걷어 찬 태형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고,
입술을 꽉 깨물고
부르르 떨던 나는
발걸음을 옮겨 뒷문을 빠져나왔다.
학교 앞의 택시를 타며
전화를 거는데도
아저씨가 받지를 않았다.
..일 하는 중이려나
전에 얼핏 들었던 아저씨
회사 이름을 대자
출발한 차가 얼마 안가 멈춰섰다.
-..어, 학생. 왜?
핸드폰 사이로 흘러나오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대답도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울일도 아닌데
목시 시큰한게
자꾸 눈물이 새어나오려 했다.
-무슨 일 있어?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한 남자와 같이 서 있는
아저씨가 건물 기둥에 기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저-"
뛰어가 안기려던 발이 흠칫
멈춰섰다.
건물에서 나온 한 여자가
자연스럽게 아저씨의
팔에 기대 안겼다.
-학생, 학교 아니야?
"..."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지금 수업 할 시간 아니야?
"..."
-..아저씨 지금 바빠서
일단 끊어야 겠다.
"..."
-조금 있다 전화할게.
알았지?
뚝 끊겨 버린 전화를
멍하니 내려다 봤다.
진짜 지금...
진짜 아저씨가 필요한데...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진짜 그래서 전화한건데...
초라하게 멈춰선 두 발이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방황했다.
"누구야?"
여자의 말에 아저씨가
대답했다.
"그냥 좀 아는애"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장난치던 아저씨와 여자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저씨를 보냈다.
그제서야 참아왔던
눈물이 울컥 쏟아지는 것 같았다.
*
오래 걸은 두 발이 미치도록 저렸다.
주변은 벌써 어둑해진지 오래고,
흐릿해진 눈으로 위태롭게 집 앞에 멈춰섰다.
"...김태형.."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태형을 부르자
그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울고 있을 줄 알았다, 멍청한게"
일그러진 얼굴의
나를 바라보던 태형이
한발짝 뒤로 물러서고,
놀란 내가 그에게
한발짝 다가섰다.
"안기고 싶지"
"...야.."
"안겨서 펑펑 울고싶지"
"..김태형 너 진짜.."
"오빠가 진짜
딱 한 번만 봐준다"
피식 웃은 태형이 두 팔을 벌리고
재빠르게 그 안에 들어가 안겼다.
"김태형 겁나 착하지.
그런 말 듣고도
너 안아주고 있다, 내가"
"...미안...미안해"
"오늘 좀 심하긴 했는데,
착한 김태형이 봐줘야지, 뭐"
"...진짜 미안해..태형아"
울먹이는 목소리에 옅게 웃은
태형이 더 꽉 나를 안아왔다.
"내가 저번에 그랬지"
"..."
"나 아직 어린 것 같다고"
"..."
"아까 너 진짜 얄미웠었는데"
"..."
"생각해보니까"
"..."
"네가 나보다 덜 컸으면 덜 컸지
키도 쪼만한게
어리광 피우는 내 앞에서
다 큰 척하느라 힘들었을텐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싶고"
"..."
"말썽은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많이 피웠으면서
너한테만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서"
"..."
"뭐..., 그냥.나도 미안하다고"
머쓱하게 웃는 태형에
헝크러진 머리로 결국 나도
푸스스 웃어버렸다.
"..우리 이제 좀 돌아온 것 같다"
"...어?"
"내 욕심 버리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
"이제 욕심 안부릴테니까"
내 몸을 때어넨 태형이
눈을 맞춰왔다.
"그만 멀어지자 우리"
"..."
"아까 말했다시피
나 아직 어려서"
"..."
"네가 필요해"
멍하니 태형을 바라보자
베시시 웃은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멍 때리지 말고 들어가.
어머니 걱정하시더라"
"...응"
"괜한 생각 말고 일찍자고"
"...응"
"내일 보자"
"..응.."
끄덕끄덕.
멍하니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던 태형이
걱정 돼 죽겠네, 진짜.
라며 읊조리더니
내 머리를 툭툭 치고 뒤 돌아섰다.
빨리 들어가라며
손을 휘휘 내젖는
태형을 바라보며,
오늘은 왜인지,
아저씨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아저씨가 보고싶지 않았다.